제182화
#182.
자신을 가오이라고 칭한 사자 수인족의 말, 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과 혼란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진화한 이노센티아로 인해 반쯤 혼이 나간 루시의 정신을 화들짝 깨웠을 정도다.
마치 AED의 심장 충격처럼 가오이의 말은 트라우마에 허우적거리던 루시를 번쩍 깨웠다.
“후우…….”
사아아아아아.
그렇게 정신을 차린 루시는 한숨을 쉬더니, 쉼 없이 펼치던 설원의 권능과 무한의 추위를 거뒀다.
“나는……!”
그리고 예리하게 다시 일어난 기세로 입을 열었다.
“나는 루시푸르네! 루한의 여왕이자, 설원의 대마녀다!”
스르릉.
외침과 함께 루시는 허리에 있던 푸른색 마검 윈테이라를 꺼냈다.
“설원의 권능 말고도 무수한 마법이!”
부웅, 부웅.
국서의 검 윈테이라가 푸른 마석을 빛내며 휘둘렸다.
“내 심장과 내 머리와 내 영혼에 각인돼 있으니.”
설원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마법을 쓰면 된다.
설원의 대마녀는 지금 이 순간, 설원의 마검사가 되었으니.
“……?!”
박태오는 곁눈질로 그런 루시를 잠시 보다가 다시 눈앞의 가오이에게 힘을 집중했다.
“진짜 여왕이라고?! 루한의 여왕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확실히 닮긴 했어. 다만 사진으로 본 것보단 젊은 것 같군?”
루시의 자기소개를 들은 가오이는 처음엔 놀라더니 이윽고 의문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
그런 가오이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은 루시는 다시 한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박태오! 그 수인족, 절대 죽이지 마라! 내가 물어볼 것이 많으니.”
그녀는 윈테이라를 들고 검에 푸른 마나를 주입하면서 박태오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노력해 보지……가 아니라! 그쪽이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
이에 박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항의했다.
타앗.
루시는 박태오의 대꾸를 듣지도 않고 앞서 나갔다.
그녀의 진격로는 가오이가 아닌 게이트가 있는 방향.
특히 그 게이트 주위에 포진 중인 무수한 이계 침략자들.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것이지?’
루시가 박태오와 대치 중인 가오이의 뒤를 공격하지 않고 게이트로 달려드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우우우우.
아까부터 저 게이트의 뒤편에서 어떤 ‘의식’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대마녀의 직감이 저 의식의 불길함을 경고했다.
타앗.
“흐아아아압!”
루시는 점프와 함께 몸을 붕 띄웠다. 지하지만 핵 벙커 기능도 하는 시설이라 천장은 높았다.
“크르르르륵!”
“쿠오오오오!”
아래의 적들은 천장으로 날아오른 루시를 쳐다만 볼 뿐, 설원의 냉기는 사라졌지만 굳어진 몸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슷, 파슷, 슈웅.
뒤늦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적들이 그런 루시를 공격했다.
마법과 산성, 흑염을 쏘았지만 루시는 거뜬히 피했고, 설령 스칠 듯 가까이 온 공격은 방어막으로 튕겨 냈다.
타앗.
그리하여 적진 한가운데 최후방에 홀로 낙하한 루시.
루시가 착지한 곳에서는 드래고니안, 마족, 고위 정령, 신수 등등이 사이좋게 어떤 마법진을 바닥에 새기는 중이었다.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인간!]
“루한의 여왕과 닮은 이계의 마녀여! 너의 힘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이를 예견한 빙하의 여제의 안배가 있도다.”
하늘을 날아 대마법진 바로 앞에 착지한 루시를 본 일부 드래고니안과 마족들이 가소롭다는 듯 조소했다.
‘살다 살다 별걸 다 보는군.’
루시 또한 눈앞의 장면이 기가 찼던 것은 마찬가지.
상위 차원의 고위 종들이 사이좋게 대마법진을 그리는 상황이 황당하기만 하다.
루시는 황당함을 뒤로하고는 놈들이 새기고 있는 마법진을 훑었다.
‘역시 이노센티아!’
그 마법진의 정체는 역시나 이노센티아.
그녀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푸른 안광을 빛냈다.
[얼어라!]
그리곤 설원의 대마녀의 언령을 영창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살펴보고 싶은 것도 산더미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루시는 푸른 마나가 가득 담긴 윈테이라를 휘둘렀다.
일시적으로 설원의 마검사가 되었다고 해도, 지분으로 보자면 검 1 마법이 9.
왕족이기에 기본적인 검술 실력은 갖췄지만 마법보단 못하다.
그럼에도 그녀를 검을 든 마녀가 아닌 마검사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검술 따위 마력으로 해결하면 그만!”
바로 ‘각성한’ 진정한 설원의 대마녀라서 그러하다.
진정한 설원의 대마녀는 자신의 영혼과 심장에 담긴 마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단순히 마법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번쩍, 쏴아악!
윈테이라의 푸른 검날에서 소드 마스터나 펼칠 법한 푸른 검기가 튀어나왔다.
“막, 막아!!”
그 푸른 검기를 본 은색 드래고니안이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외쳤지만, 의식을 진행 중이라 무방비로 있었기에 그들 중 누구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들을 보호해야 할 몬스터와 동료들은 이제야 차가움에 굳어진 몸을 천천히 뒤로 돌리고 있을 뿐이다.
서거걱.
루시가 던진 검기에 무방비로 있던 드래고니안 둘이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키에에엑!]
흑염으로 이뤄진 마족 셋 또한 큰 데미지를 입고 역소환되었다.
그리하여 놈들이 몸으로 가리고 있던 이노센티아의 전체 모습이 루시의 두 눈에 들어왔다.
“역시! 내 공격을 저기에 모으고 있었구나!”
마침내 루시는 자신의 설원의 권능과 무한의 추위가 어째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통로 같은 거였어!’
적들의 피부에 새겨 있던 이노센티아는 통로였다.
그 통로를 통해 루시가 펼쳤던 설원의 힘 대부분이 흡수되었고, 눈앞의 저 대마법진 이노센티아에 흡수된 냉기가 모였던 것.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적들을 느리게 만든 루시의 힘은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저렇게 모은 내 힘으로 뭘 하려던 거지?!’
처억.
루시는 다시 한번 윈테이라에 푸른 마나를 모으고는 휘두를 준비를 했다.
[저 마녀를 죽여! 대마법진을 지켜라!]
“막아! 막으라고!”
“저…… 저 푸른색 마검…… 진짜 윈테이라 아니야?!”
“쿠오오오오!”
그제야 몸을 돌린 몬스터들과 상위 종족들이 루시를 막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어딜!”
쿠웅!
때마침, 루시의 바로 뒤로 박태오가 지진과 함께 착지하더니 탱킹에 임했다.
“싸우다 말고 어딜 거느냐! 참으로 명예롭지 못한 전사로다!”
쿠와앙!
그런 박태오를 쫓아 가오이도 뒤이어 내려왔다.
쿠르르르.
가오이가 천장에서 육중하게 착지하자 지진이 일었다.
“비, 비켜!”
“어어? 넘어진다!”
이로 인해 루시와 박태오에게 달려들던 적 중 상당수가 휘청거리다가 꼬여 넘어졌다.
“끄아아악! 숨을 못 쉬겠어!”
[이 멍청한 필멸자 놈들!]
적지 않은 수의 몬스터들이 서로에게 깔리거나 뒤엉켜 혼란이 일었다.
아직 몸이 전부 녹지 않아서 더욱 혼란이 컸다.
“감히 나와 싸우다 말고 등을 보이느냐! 명예롭지 못하도다!”
가오이는 그런 아군의 상황에 시선조차 두지 않고는 눈앞의 박태오를 보며 으르렁거릴 뿐이다.
“명예는 일단 일대일로 싸울 때나 해당되지 않겠소?”
이에 박태오는 자신을 따라 쫓아온 가오이의 뒤를 가리키며 조소했다.
“……그런가?”
의외로 가오이는 그런 박태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으음, 그래, 일리가 있어. 이건 분명 명예롭지 못하다. 아무리 빙하의 여제와의 계약이 있다고 해도 사자의 명예보단 못하지.”
사자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명령이다! 이제부터 우리 싸움에 끼어드는 자는 내 명예를 더럽힌 적으로 간주하겠다!”
쿠오오오오.
사자의 포효와 함께 선포했다.
“크르릉.”
“쿠우우.”
쿵, 쿵, 쿠웅.
그러자 제일 먼저 수인족과 신수 계열의 침략자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가오이의 명을 받들었다.
“멍청한 금수 놈이!”
[지금 명예를 따질 때냐!]
물론 이에 반항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부분 드래고니안과 마족들 그리고 놈들의 지배를 받는 몬스터들.
“사자 왕은 무시하고 공격하라!”
제일 먼저 드래고니안이 몬스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크와아아앙.
쿠웅, 쿠웅, 쿵!
드래고니안의 명령에 그들의 지배를 받는 몬스터들이 우르르 움직인다.
“갈!!”
“사자 왕의 명예를 지켜라!”
“아오오오오!”
하지만 그 진격은 바로 옆에 있던 수인족 전사와 신수들에 의해 제지되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를 본 박태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토록 쉽게 내분이 일어나다니.
잘은 모르겠지만 박태오와 가오이 덕분에 저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루시는 시선을 정면에 집중했다.
지금은 눈앞의 저 대마법진 이노센티아가 더 중하다.
‘지금까지 저 이노센티아에 마력이나 공급해 준 꼴이라니!’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발전소가 된 기분이었다. 죽어라 설원의 권능을 펼쳤던 것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의식을 진행하던 드래고니안과 마족을 몇 베었지만, 저 이노센티아는 여전히 빛을 뿜어냈다.
우우우우우.
빛이 당장이라도 폭발을 일으킬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키히히히히히! 이미 늦었다아!]
“위대하신 존재를 위하여!”
[마왕 세피로스의 부활을 위해!]
마족과 드래고니안들은 각자의 염원을 외치며 루시 앞에 몸으로 바리게이트를 쳤다.
파아아아아.
루시가 급히 윈테이라를 휘두름과 동시에, 이노센티아가 발동됐다.
발동된 이노센티아의 빛이 향한 곳은 루시가 서 있는 쪽에서 정반대 방향.
고오오오오.
이노센티아에서 거대한 에너지포가 응축되었고 굉음이 일었다.
콰아아아아앙.
그것은 마치 에너지파처럼 굵고 길게 쏘아졌다.
대마법진에서 일어난 거대한 빛줄기가 대각선 우상향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쿠르르르르.
지진이 몰아쳤고, 깊은 지하에 위치했던 연구실 천장에 집채만 한 큰 구멍이 시원하게 지상까지 뚫렸다.
지상의 공기와 볕이 지하로 스며 들어왔다.
“지상으로 진격하라!”
[움직여, 움직여!]
“쿠오오!”
“키아아악.”
막 내분이 일어났던 이계의 침략군은 싸우던 것을 멈추고는 바로 지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루시의 냉기에 굳었던 몸이 어느새 대부분 풀린 모양인지 놈들의 몸놀림은 아까보다 더 자연스러웠고 빨랐다.
“멈춰!”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루시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마검 윈테이라를 휘둘러 검기를 몇 번 날렸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검기로 막기엔 놈들의 수가 너무 많아!’
방금처럼 무방비 상태의 소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면 검술의 사용은 큰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검기의 마력은 설원의 권능처럼 무한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루시는 설원의 권능을 펼쳤다.
‘최대한 묶어 두고 박태오나 지상의 헌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저 대마법진 이노센티아 때문에 얼려 죽일 수는 없겠지만, 적들의 몸을 최대한 둔하게 만들어 발을 묶으려 했다.
[얼어라!]
루시는 마녀의 언령을 영창했다.
우우우우.
그러자 역시나 대마법진 이노센티아가 기다렸다는 듯 빛을 냈다.
-!
그런데 이번 이노센티아의 빛과 형태는 아까와 좀 달랐다.
“!!”
이를 눈치챈 루시는 급히 펼쳤던 설원을 거뒀다.
“아아아악!”
그러나 조금 늦고 말았다.
털썩.
설원의 권능을 펼쳤던 루시는 사지에 힘이 턱 하니 풀리는 기분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으윽……!”
파아아앗.
이노센티아는 아까처럼 힘을 저금하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시전자의 마나와 설원의 권능을 역류시켰다.
‘도대체 누가 저런 주술을!’
대마법진에 정통으로 맞은 루시는 자신이 펼쳤던 권능만큼의 타격을 입어야 했다.
회귀 전보다 더 진보한 것 같은 이노센티아.
‘이노센티아는 정말 타천사의 주술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는 12차원에서 추락한 타락 천사일까?’
온갖 심란한 추측이 루시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