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183.
루시가 이노센티아로 인해 다시 한번 주저앉은 와중에도 이계의 침공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의 침공은 정찰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본격적인 침공이 이제야 개시된 것 같았다.
게이트에서는 끊임없이 이계의 괴물들을 지상으로 싸질러 댔고, 지하에 있던 기존 몬스터 또한 이미 상당수가 지상과 이어진 땅굴을 오르고 있었다.
“크하아압!”
“크르릉! 아주 간만에 제대로 싸워 보는구나! 좋구나! 좋아!”
구석에서는 박태오와 가오이가 정신없이 무투를 겨루는 중이다.
그곳에는 오직 박태오와 가오이, 둘뿐이었다.
가오이의 명을 받들던 수인족과 신수들은 자신들의 족장을 뒤로하고 지상으로 올라간 모양. 아마 가오이가 따로 지시한 듯싶다.
“…….”
루시는 멍한 눈으로 가오이와 싸우는 박태오를 보았다. 혹시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크으윽!”
“벌써 지친 것이냐? 크아아아악! 좀 더 기합을 내거라! 기합을!”
실력은 가오이가 살짝 위였기에, 박태오는 다른 데 신경을 쓸 상황이 되지 못했다.
루시는 멍한 눈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지상으로 이어진 커다란 구멍으로 시선이 향했다.
저렇게 크고 길게 뚫렸음에도 여기가 무너지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하다.
불현듯 바람의 정령이 들고 오는 지상의 전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위에에에에엥.
게이트 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
퍼엉, 번쩍, 콰아앙.
각종 포탄과 마법이 터지는 소리.
“막아라!”
“쏴! 쏘라고!”
“후퇴, 기지에서 후퇴해! 지금 전력으론 이거 못 막아!”
저항하는 인류의 외침.
“쿠와아아앙!”
[키아아아아.]
몬스터의 포효와 11차원 괴수의 괴성.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상황.
“…….”
루시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왼손을 보았다. 정확히는 왼손 약지에 있는 붉은 반지를 응시했다.
반대편, 윈테이라를 쥔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반지 낀 왼손을 보는 루시의 멍한 눈에는 절망보다는 망설임에 가까운 감정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왼손을 보고 있는데, 하얀 루시의 손 위로 여러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정말 루한의 여왕과 닮았는데?]
“평행 차원의 같은 존재인가?”
“그렇다면 저 검은…… 진짜 윈테이라인가?”
“설마 이게 태양샘 반지?”
주저앉은 루시 주위로 마족과 드래고니안 몇몇이 우르르 포위했다.
[키히히히. 뭐, 상관없겠지. 죽이자! 죽이고 저 여자의 영혼을 먹어야겠어!]
“영혼은 양보하지. 대신 심장은 우리가 가지겠다.”
[그럼 윈테이라와 저 반지는 우리가 가져가겠다.]
“태양샘 반지는 양보 못 한다.”
놈들은 소를 도축하는 것처럼 루시를 보며 지분을 나눴다.
“태루시!”
뒤늦게 루시의 상황과 지상의 상황을 인지한 박태오가 급히 나서려 했다.
“명예를 더럽힐 셈이냐! 네 상대는 여기 있다!”
콰아앙!
가오이에 의해 저지되었다.
[저 금수의 왕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키히히히.]
“평행 차원의 루한의 여군주여,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 주리다.”
방해꾼이 완전히 제지되자, 마족과 드래고니안들이 주저앉은 루시의 목숨을 끊기 위해 각자의 흑염과 무기를 들었다.
“…….”
죽음이 목전에 왔음에도 루시는 고개를 숙인 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루시의 모습은 체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
“?!”
이에, 마족과 드래고니안은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는 주춤거렸다.
“……누구 마음대로?”
아니나 다를까.
“정녕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들다니…….”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던 루시는 스산하게 중얼거리더니.
“고얀 것들.”
번쩍.
푸른 사파이어 안광을 빛내면서 고개를 들었고, 고개를 듦과 동시에.
“이 반지는 가급적 빼기 싫었는데!”
왼손 약지에 낀 태양샘 반지를 뺐다.
“아, 반지를 계속 끼고 있어야!”
그리고 진심 어린 분노를 담아 한 문장 한 문장 무겁게 토해 냈다.
“그이가 쥴리아를 통해 나를 찾을 수 있는데!”
솔라와의 키스로 루시가 품고 있던 설원의 저주는 완전히 해주 되었다.
“만약 이 반지를 뺀 사이에!”
그럼에도 그녀가 태양샘 반지를 절대 빼지 않았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솔라가 나를 찾았으면!”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이유가.
“그래서 내가 솔라와 만나지 못했다면!”
고오오오오.
반지를 빼자마자, 설원의 권능이 무섭게 포효했다.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설원의 저주가 없어졌다지만, 그렇다고 태양샘 반지의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태양샘 반지는 알게 모르게 루시의 힘에 리미트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리미트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설원의 권능을 펼쳤다.
설원의 권능은 순식간에 무한의 추위가 되었다.
파치치치직, 끼아아아악, 끼이이익.
대마법진 이노센티아에서 여러 괴음이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왔다.
스파크 터지는 소리와 비명 비슷한 소리, 그리고 칠판 긁는 것 같은 소리가 공명한다.
[이, 이노센티아가!!]
“빙하의 여제의 걸작품이?!”
태양샘 반지를 벗은 루시의 진정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노센티아가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용서 못 해!”
고오오오오.
그리하여 진정한 설원의 대마녀가 이곳에 강림하였으니.
“미…… 미친……!!”
이 거대하고 깊은 설원에 바로 옆에 있던 박태오가 기겁한다.
‘이 냉기는 진짜 위험하다!’
그는 가까스로 막고 있던 가오이의 공격마저 무시하더니, 전력으로 강화 이능을 펼치고는 몸을 공처럼 웅크려 추위에 대비했다.
“크으…… 크오오오오!”
가오이 또한 휘두르던 주먹을 급히 거두고는 온 힘을 다해 추위를 견뎠다.
“크아아아아!”
“쿠오오오오.”
영혼까지 얼 것 같은 추위에 둘은 사이좋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불행 중 다행인지.
[얼어라!]
루시의 분노는 뒤에 있는 두 덩치보다 앞에 있는 마족과 드래고니안 그리고 끝없이 몬스터를 뱉어 내는 게이트에 향해 있었고, 덕분에 박태오와 가오이는 죽기 직전의 고통만 느끼는 선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악!]
“!!”
반면, 루시의 분노를 가장 정통으로 맞아야 했던 이노센티아 주위의 마족과 드래고니안들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기도 전에 완전히 얼어 부서졌다.
[얼어라!]
설원의 대마녀의 차가운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수으으으으, 쏴아아아.
자비 없는 설원이 게이트에 이어서 집중되었다.
“……?!”
[!!]
“켁……!”
게이트에서 막 나오려던 적들과 림보 속에 대기 중이던 침략자까지 전부 얼려 버렸다.
파바바바밧.
그리하여 지구에 처음 나타난 유형의 게이트가 처참히 얼어 부서졌다.
루시는 말없이 지상과 이어진 거대한 땅굴을 쓸어보았다.
“…….”
게이트뿐만 아니라 땅굴을 오르던 몬스터들 또한 얼어 죽었다.
그녀가 펼친 설원으로 땅굴의 3분의 1 정도가 몬스터와 함께 얼어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2는 루시가 펼친 징벌에서 도망치듯 더욱 빨리 지상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미 적지 않은 이계의 무리가 지상으로 올라간 상황이다.
지상은 지금쯤 지옥일 것이다.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후우…….”
루시는 차가운 숨을 몰아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허억!”
“크르릉!”
그녀의 푸른 안광이 뒤를 향하자, 그곳에 있었던 박태오가 숨을 크게 삼켰고 가오이 또한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살려 주마. 물어볼 것이 많으니.”
유독 가오이를 싸늘하게 훑은 루시가 차갑게 말했다.
“…….”
이제 가오이는 감히 으르렁거리지도 못했다.
“박태오, 잘 감시해.”
이어서 루시는 옆에 있던 박태오에게 무심한 어조로 지시했다.
“……아, 알았다.”
아까와 달리 묵묵히 루시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박태오였다.
“크르릉……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를 거라고 보오?”
뒤늦게, 루시에게 쫄았던 것이 후회되었는지. 박태오 옆에 있던 가오이가 언짢은 눈으로 루시를 노려보았다.
“나는 사자 왕 가오이! 그대가 진짜 루한의 군주라면 군주 간의 명예를…….”
그는 그렇게 사자 군주의 마지막 자존심을 세웠지만.
“사지를 얼려 부숴 줄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시의 살벌한 경고를 들어야 했다.
“크흠!”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난 지상으로 갈 거야. 따라오든 말든 알아서 해. 단! 가오이, 너는 도망치는 순간 평생 병X 왕으로 살 줄 알아.”
그렇게 포로(?)를 챙겨 놓은 루시는 급히 몸을 띄우더니 지상으로 향했다.
“…….”
“…….”
박태오와 가오이는 지상으로 날아가는 루시의 뒷모습을 말없이 보았다.
“……비긴 것으로 하자.”
그러다가 문득 가오이가 입을 열었다.
“태루시의 냉기에 내가 좀 더 잘 버틴 거 같은데?”
그 말에 박태오가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같은 편이니까 네놈한테 자비를 둔 것이다! 불공평해! 명예롭지 못하다!”
이에 가오이가 억울하다는 듯 따졌다.
“……과연 그럴까?”
‘진짜로 죽을 뻔했어. 진짜로…….’
가오이의 말에 박태오는 공포가 드리운 눈으로 루시가 사라진 방향을 볼 뿐이다.
루시가 사라지고 협회장과 사자 왕 단둘만이 남은 지하.
“…….”
“…….”
방금까지 서로 죽일 듯 싸웠기 때문인지, 그들은 유독 어색함을 느꼈다.
그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박태오는 지하 연구실을 돌아다니면서 연구 자료로 보이는 서류들을 살폈다.
하드디스크나 메모리 같은 것도 챙길까 했지만 얼핏 봐도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에 서류 위주로 챙겼다.
중간중간 가오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보면서 말이다.
“크흠! 일단 우리도 지상으로 가지. 여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그러다 문득 가오이가 심심함을 못 이겼는지 지상으로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지.”
가오이의 말에 박태오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들과 군인들은 죽었군.’
혹시나 생존자가 있을까 싶어 둘러보았지만 생존자는 두 사람 외에는 없었다.
‘또 정부와 언론에서 X랄하려나?’
처음 루시와 박태오가 지하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상당수 사람들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부는 방금까지 지하에 가득 찼던 몬스터에게 밟혔거나 잡아먹혔다. 하지만 절대 다수는 루시의 냉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건 태루시가 죽인 게 아니야. 그저 싸움에 휘말린 것일 뿐.’
박태오는 정부와 언론에 그렇게 설명하기로 속으로 결정했다.
정부에서 정밀한 초상 감식을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둘이 오지 않았어도 어차피 죽었을 운명들이다.
‘하지만 태루시는 정말 위험해. 너무나 위험해.’
한편으론 방금 목도한 루시의 힘이 두려웠다.
‘빙하의 여제보다도, 마왕 세피로스보다도, 태평양 게이트보다도 더 위험해.’
잊어버린 현실감이 돌아오자, 뒤늦게 박태오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태광휘, 너는 도대체 이런 괴물을 어디서……?’
저 여자를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는 온 우주를 통틀어도 태광휘밖에 없을 거라고 박태오는 생각했다.
‘참으로 짜증나고 분하지만…… 태루시의 말처럼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으면 좋겠군.’
저승에 있을 동생 박소영에겐 미안하지만, 지금만큼은 현실과 타협해야만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에 잠겼던 박태오는 문득 아까 가오이와 마족, 드래고니안이 한 말이 떠올랐다.
‘빙하의 여제와는 정말 관련이 없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야.’
그나마 루시와 베아트리체는 분명 다른 존재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 박태오였다.
“이봐!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어서 가자니까! 이 세계의 병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하구먼!”
그때, 옆에서 가오이의 독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오이의 외침에 박태오는 속으로 아차!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건지, 의리가 있는 건지.’
확실히 명예에 집착하는 놈이라서 그런지, 자신이 딴생각에 빠졌을 때 충분히 튈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래, 가자고. 어디 딴 데로 튀려 하지 말고.”
그는 눈앞의 사자 수인족이 이상하게 싫지 않다고 느꼈다.
“크흠! 날 뭘로 보고! 명예롭지 못한 짓은 하지 않는다!”
가오이는 어깨와 가슴을 쫙 펴면서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 아마 너희 수인족과 신수들이 많이 죽을 텐데, 괜찮겠나?”
문득 박태오는 루시가 휩쓸고 간 잔해를 보며 가오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잔해 중에는 적지 않은 수인족과 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마울 뿐.”
박태오의 말에 가오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뭐?”
“그런 게 있다. 더 이상 알고 싶다면 나를 주군으로 모셔라. 내 친히 너를 친위 전사로 임명하마.”
“X랄, 바이킹의 바할라 같은 거겠지.”
“바할라? 바이킹? 그건 뭔가?”
“알고 싶다면 날 형님으로 모시든가?”
“크르르릉!”
그렇게 둘은 서로 투닥거리면서 루시가 나아간 길을 쫄래쫄래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