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184.
지상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비록 루시가 게이트를 얼려 추가적인 피해는 막았다지만, 이미 무시 못 할 양과 질의 침략자들이 지상으로 올라온 상황.
본래 마족 하나만 게이트에서 나와도 뉴스에 나오는 세상이다.
그래서 전황은 압도적으로 인류가 밀렸다, 압도적으로.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목숨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
“총원 전투 배치!”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반복한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제주도에 있는 군대와 헌터가 총출동하여 이계의 종합 침략 세트를 상대했다.
“드래고니안이 마족이랑 같이 싸운다고?!”
“저게 도대체 무슨 조합이야? 마왕이 부활이라도 한 거야?!”
하지만 수십의 마족과 수십의 드래고니안이 몬스터 군단을 이끄는 중이다.
비록 마족의 등급이 매우 낮고 드래고니안들도 나이가 어려 보였지만, 이 정도 전력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헌터나 길드는 흔하지 않았다.
적어도 제주도에는 없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출동했던 제주도의 군대와 헌터는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전투력과 사기 부분에서 밀렸다.
“×발, 세피로스 때에도 드래고니안과 정령들은 따로 놀았다고! 이제 와서 마족과 연합하는 게 말이 돼?!”
“무슨 종합 침략 세트도 아니고.”
처음 뭣도 모를 때에는 어찌어찌 함성을 지르며 전장에 도착하였지만, 막상 전장에서 마주친 적들을 보자 그 전의가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사령부에서는 뭐라는데!”
“증원군을 편성해서 5시간 내로 보낼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라고…….”
“5시간?! 5분도 못 버텨!”
“……기도라도 해야겠군.”
그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각자 발버둥을 쳤다.
포악한 붉은 안광을 빛내며 지하에서 무수한 몬스터와 악마들이 기어 올라왔다.
크르르르르.
크와아아아!
끼히히히히.
몬스터 하나하나가 최소 C급 각성자는 되어야 간신히 상대할 수 있는 중위급 몬스터.
심지어 저 중위급 몬스터를 쫄병으로 보이게 만드는 마족과 드래고니안, 최상급 정령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놈들은 전략 전술까지 부리는 듯하다.
퍼어엉!
콰앙, 콰아앙!
급히 제주 초상 해양 기지로 지원 온 공군의 전투기와 해병대의 공격 헬기, 육군의 전차와 장갑차가 도착 즉시 무력화된다.
이계의 존재들에게 효과가 직방이라는 초상 포탄이 있으면 뭐 하는가?
“거리 500미터! 중급 몬스터 매머드 발견!”
“대괴수 포탄 장전, 조준, 발사 준비!”
“발사 준비 완료!”
“발…….”
전장에 도착하여 발사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이봐요~ 군인 언니? 나랑 놀래?]
“……?!”
마족들이 정신 공격으로 전차병과 전차장을 정신 지배해 버렸다. 각성자가 아닌 비각성자이기에 정신 지배는 어린아이와 팔씨름하는 것보다 쉬웠다.
위이잉, 처억.
이로 인해 막 장전을 끝낸 포신은 몬스터가 아닌 다른 아군 전차에게 향했다.
“어……?! 저 언니, 왜 저래? 왜 여기로 포구를 돌리는데!”
퍼엉, 콰앙.
“꺄아아악! 쐈어! 저 ×발년이 진짜로 쐈어!”
“피탄 상황 보고해!”
“감히 팀킬을 해?! 죽여 버리겠어!”
[치이익…… 대대장이다. 다들 정신 차려라! 마족이 있다는 보고야! 정신 공격에 대비하여 아군 간의 교전을 피…… 커헉…… 크흐…… 크헤헤헤헤! 다 죽이자, 다 죽여!]
아군 간의 분열과 혼란을 야기한다.
마족이 광범위한 정신 지배로 아군 간의 팀킬을 유도했다면, 드래고니안은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전투에 임했다.
“어어? 기체가 멋대로 움직입니다?”
[김숙희 대위, 지금 뭐 하나? 술 마셨어?!]
“그게 아니라 균형이 멋대로……!”
[초상 보호장치는 아꼈다가 똥 만들게?! 당장 써! 그러다가 추락하면 다 뒈진다고!]
“켰습니다. 켠 상태라고요! ×발! 고위종이다! 드래고니안……!”
[뭐, ×발? 김 대위, 너 방금 뭐라고……! 잠깐, 드래고니안이라고?!]
“추, 추락한다아아! 꺄아아악!”
피슈우우웅, 퍼어엉!
몇몇 드래고니안이 염력으로 헬기와 각종 미사일을 추락시켰다.
“폭, 폭격이다!”
“미친 공군 놈들! 여긴 아군이 있는……!”
퍼어어엉.
그렇게 추락한 미사일과 비행체는 지상에 있던 육군과 해병대에게 그대로 불벼락을 선사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어어!”
“아악!! 내 얼굴에 불이…… 내 얼굴이……! 누가 물 좀! 이 불 좀 꺼 줘, 제바알!”
“꺄아아악! 최혜미 병장님 얼굴이 녹고 있어!”
“소화기! 소화기이!”
비각성자로 이뤄진 군대는 순수하게 중하급 종들을 위한 무력이었기에, 7차원 이상의 존재들에게 처참할 정도로 무력했다.
사람들은 다급히 헌터를 찾아 헤맸다.
“드래고니안에 마족이라니! 초상부대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헌터 새끼들, 코빼기도 안 비치네! 비싼 돈 받아 처먹는 것들이 이럴 때 돈값을 해야지!”
“대대장님, 제주 초상부대로부터 보고입니다. 초상부대 생존자, 총 5명……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제주 소속의 길드와 PMC의 헌터들과의 통신도 두절되었습니다. 목표로 한 마족이 멀쩡한 것으로 보아, 레이드는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를 저지해야 할 헌터들은 진즉에 전멸한 지 오래.
“……미쳤군.”
“협회는? 협회는 언제 오지?! 본토의 길드와 PMC에서는?!”
사람들은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계의 침략군이 우르르 튀어나온 지 불과 수십 분 만에, 제주도가…… 제주도가 무너졌다.
그러나 가장 어두운 밤이 되어야 새벽이 오듯이, 절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 * *
혼돈의 도가니가 된 지상에 청은발의 한 여성이 푸른색 마검을 들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
엉망이 된 제주 초상기지의 전경이 루시의 두 눈에 들어왔다.
퍼엉, 퍼어엉, 콰아앙!
꺄아아아악! 으아아악!
쿠오오오오, 크와아악.
깔깔깔깔깔깔~!
그녀의 눈에 인세의 지옥이 펼쳐졌다. 불타고 무너지고 녹고 있는 건물들, 비명 지르며 찢기고 녹고 불타고 먹히는 사람들.
무수한 총탄은 마력장에 의해 허무하게 막혔다.
지구의 물리법칙은 상위 차원의 형상 법칙 앞에서 무능할 뿐.
‘내가 저 지하에서 그토록 오래 있었던가?’
잠시 전황을 살핀 루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땅속이라서 시간의 흐름을 잘 인지 못 한다지만, 놈들이 지상으로 올라간 지 수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 너무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해도 많이 기울었군.’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모양.
‘지하와 지상의 시간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
추정되는 이유는 많다. 차원 코어 때문일 수도 있고, 차원 코어로 뒤틀려 열린 게이트 때문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이노센티아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하리.
솨아아아.
지상에 오른 그녀 주위로 벌써 설원이 탄생했다.
그 설원 위를 루시는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모든 것을 얼리는 냉기가 빠르게 사방으로 퍼졌다.
지상으로 강림한 루시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한 여군 일병의 머리를 뜯어 먹고 있었던 웨어울프였다.
“쿠? 쿠으으으?”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루시의 강함에 웨어울프는 포식을 멈췄고 피범벅인 주둥이를 하늘 위로 올려 울부짖으려 했다.
“워우우어어억……!”
하지만 놈의 울음소리는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
늑대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순식간에 폐와 내장이 얼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몸속의 모든 것들이 꽁꽁 얼었고, 놈은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머리 없는 병사의 시신과 함께 그 자리에서 얼음 박제가 되어 버렸다.
“…….”
루시는 웨어울프의 손아귀에 잡혀 죽은 여군 병사의 처참한 시신을 말없이 보았다. 그녀는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괜히 평택에 두고 온 구민주가 떠올랐다.
최근 예비군 때문에 저 병사와 똑같은 군복을 입고 있던 민주를 봐서 그런지 더욱 와닿았다.
처참한 병사의 주검은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 주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이 제주 기지에는 생존자가 없었다.
즉, 설원의 권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얼어라!]
루시는 위령제를 올리는 무녀의 심경으로 설원의 언령을 영창했다.
* * *
하사 고영록은 초상부대 소속의 헌터였다.
대부분의 국군 소속 헌터처럼 의무 복무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었고, 초상부대의 헌터들은 아무리 각성 등급이 낮아도 하사부터 시작하기에 전역까지는 한참 남은 상황.
특이한 것은 하사 고영록의 외모가 굉장히 앳돼 보인다는 거였다. 아무리 잘 쳐 줘도 중학생 정도의 외모.
이는 인적 자원, 그것도 각성자가 극도로 부족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시행 중인 청소년 조기 입대 제도 때문이었다.
“흐으으으으, 여기서 죽으면 진짜 안 되는데. 부모님이랑 우리 형들, 누나들이 나 하나만 보고 사는데…….”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고영록은 아까부터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그는 5남매 중에 막내, 다섯째였다.
초상 시대의 흐름이기도 한 자식 가챠에서 5세트 만에 태어난 각성자, 그것도 선천적 각성자였다.
집안의 유일한 각성자였고, D급 각성자라서 높진 않았지만 초상 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전도유망한 각성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수입과 어머니에게 지급되는 다섯 아이분의 부모 월급으로 적어도 다섯 남매가 배는 굶지 않았다.
그러나 풍족하지 못한 것도 사실.
그래서 고영록은 어릴 적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자라야만 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일찍 입대한 것도 초상부대에서 복무하면 미성년자라도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14살이 된 고영록 하사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은 많았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배달일을 하는 두 형님, 그 셋의 한 달 월급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았고, 어머니가 매달 받는 다섯 미성년자분의 부모 월급보다 많았다.
학생인 두 누님이 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번 급여까지 합쳐야 그제야 얼추 고영록 하사의 한 달 급여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서 영록의 입지는 압도적이었다. 매번 휴가를 받아 집에 갈 때마다 온 가족이 영록이를 상전 모시듯 했다.
심지어 이것도 군 복무 중이라 적게 받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역 후에 제대로 된 초상 기업에 취직하면 얼마를 벌게 되는 것일까?
상상만 해도 기분이 몽롱해졌고, 영록은 국군 초상부대에 입대한 것에 불만이 없었다.
그저 여기서도 착실히 돈을 모아 가계에 보태고, 전역 후에 좋은 초상 기업에 취직해서 돈을 왕창 벌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이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고영록 하사가 가슴에 품고 있었던 희망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덜덜덜덜.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지금은 그저 단 한 가지 바람만이 고영록을 채웠다.
오전부터 그가 복무 중이던 제주도가 어수선했고, 점심을 막 먹고 나와 음료수를 마시며 선임들과 노가리를 깔 때쯤에 상황이 터졌다.
영록과 중대원들은 급히 초상 무기를 챙기고 게이트가 열렸다는 제주 해상 기지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막 초상 기지와 이어진 도로에 진입했을 때, 영록과 함께 전장으로 진격했던 중대는 열 걸음을 다 떼기도 전에 전멸했다.
참으로 재수 없게도 부상병으로 변신했던 마족에게 낚여 중대원 전체가 흑염에 녹아 버렸다.
중대에서 막내였던 고영록은 제일 후미에 있어서 흑염 폭발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