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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85화 (185/212)

제185화

#185.

지금 중대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고영록 하사뿐이다.

마족의 함정에서 급히 몸을 피한 그는 욱신거리는 몸을 살폈다.

폭발한 흑염 중 일부가 그의 볼과 목, 팔에 튀어 징그럽게 번져 있었다.

각성자니까 그나마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비각성자였다면 뼛속까지 스며들었겠지.

영록은 훈련받은 대로 급히 초상 구급 세트로 상처를 치료했다.

흑염으로 인해 녹아 버린 피부 위에는 초상 붕대를 감았다.

대강 치료를 마친 후에는 반쯤 무너진 건물에 숨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몸을 덜덜 떨면서 몸을 웅크렸다.

‘흐으으으…….’

입 밖으로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속으로 삼키며 눈을 꾹 감았다.

숨도 천천히 죽은 듯이 쉬었다.

덜덜덜.

다만, 이놈의 떨림이 문제다. 두려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떨리는 몸만이 불안할 뿐.

‘추…… 추워.’

죽음이 문턱에 온 것일까? 아까보다 추위가 더 강해진 것 같다.

영록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크르르르.

쿠웅, 쿠웅, 쿵.

그때였다. 몬스터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몬스터가 걸을 때마다 일어나는 땅의 진동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

추위와 부상으로 잠에 막 빠지려던 영록은 급히 눈을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쿠오오오오오!

쿠에에에엑!

마침, 눈앞에서 두 몬스터가 슉 하고 사라졌다. 워낙 빨리 사라져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드레이크 타입으로 추정되었다.

두 몬스터는 분명 뛰면서 영록을 보았다. 하지만 영록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는 죽어라 달릴 뿐이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

영록은 웅크렸던 몸을 폈다. 화상으로 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은신 중이던 건물에서 나왔다.

“……눈?”

영록이 처음 본 것은 설원이었다.

“여기서부턴 생존자가 있나 보구나? 힘 사용에 주의해야겠군.”

멍하니 설원을 둘러보던 영록의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

영록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

그곳에는 감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운 여성이 도도한 자태로 서 있었다.

“태, 태, 태, 태, 태…….”

영록은 그 여인의 얼굴을 잘 알았다.

실제로 본 빙하의 집행관은 감히 카메라에 담지 못한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풍겼다.

“그래, 태루시다.”

루시는 어린 소년병의 얼빠진 얼굴을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붕대를 덕지덕지 감은 영록의 모습을 안타깝게 훑었다.

“치료 마법은 능하지 않지만…….”

루시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한 손을 뻗어 하사의 머리 위에 올렸다.

우우우웅.

머리 위에 올라간 루시의 손에서 부드러운 빛이 느껴졌고, 영록은 부상으로 인한 통증이 다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집행관! 협회의 집행관이 왔어!’

그러나 통증이 가라앉는 느낌보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비록 악명 높은 집행관이지만 지금만큼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키에에에에!]

그때였다.

끔찍한 11차원 괴수의 정신파가 안도하던 영록의 귓가에 들렸다.

“허억!”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영록의 중대를 전멸시킨 흑염의 마족이 그곳에 있었다.

[어디에 숨었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11차원의 마족은 스산한 목소리로 영록에게 속삭이듯 텔레파시를 쏘았다.

줄줄줄.

영록은 겁에 질린 나머지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바로 옆에 집행관 태루시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너는 누구지? 청은발? 게다가 푸른 마검?]

영록을 노리던 마족은 이어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낯이 많이 익군.]

놈은 영록 옆에 서 있는 루시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낯이 익다고? 게이트에서 나오면서 본 거니? 아니면 너희가 온 세계에서 본 것 같니?”

마족의 반응을 본 루시는 차가운 눈빛으로 마족에게 물었다.

[글쎄? 모르겠군. 뭐, 상관없지 않나?]

그러나 눈앞의 마족은 루시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

[어차피 전부 내 먹이가 될 영혼들인데?]

키아아악!

파아앗.

놈은 아까 영록의 중대를 향해 기습 공격을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구르르르.

달려드는 흑염의 인영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영록의 초상 중대를 전멸시킨 흑염 폭발이다.

“으아아악!!”

마족의 흑염 돌격에 어린 소년병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간이 10초 정도 흘렀다.

“……?”

어떤 소리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영록은 눈을 조심스레 떴다.

“!!”

그리고 소리 없이 놀랐다.

자신들에게 달려들었던 마족이 완전히 통으로 얼어 버렸기 때문이다.

불과 3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

막 흑염 폭발이 터졌던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순간이 눈앞에 박제되어 멈춰 있었다.

톡.

영록은 코앞에서 얼어 버린 마족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톡 쳤다.

바스스스스.

그러자 꽁꽁 얼었던 얼음 동상이 잘게 부서지더니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서 바닥에 쌓인 얼음 가루가 마치 포도즙을 뿌린 눈꽃 빙수 같았다.

휘이이이.

이윽고 설원의 바람이 불었고, 검보라빛 눈가루는 더 작은 입자가 되어 멀리 흩어졌다. 미세 먼지처럼.

“가, 감사……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고영록은 루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청은발의 집행관은 보이지 않았다.

“빙하의 집행관이다!”

“협회에서 지원이 왔어!!”

그저 저 멀리서, 구원자의 존재를 알리는 환호성이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다.

“……!”

영록은 붕대로 감은 손을 간신히 들더니, 한참을 루시가 사라진 방향으로 말없이 경례를 올렸다.

* * *

어느 순간 무자비한 진격이 멈췄다.

와아아아아!

절망을 담은 비명이 희망을 담은 함성으로 변했다.

협회의 집행관 태루시가 사악한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무수한 몬스터들이 제주도 전체로 넓게 퍼졌기에, 루시 혼자서 모든 것을 징벌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주로 마족과 드래고니안, 최상급 정령 같은 우두머리만 노렸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몬스터들이 설원에 휘말려 죽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패색이 짙었던 전황이 뒤집어졌다.

이것이 바로 S급 각성자의 위엄.

“와아아아아! 살았어! 협회에서 집행관이 왔어!”

“태루시! 태루시! 태루시!”

“사랑합니다! 제주의 구원자시여!”

모두가 루시의 이름을 연호했다.

“역시 태루시 헌터는 S급이었어!”

“어쩌면 태광휘 헌터와 비슷한 경지일지도 몰라.”

“저게 어떻게 A급이야? 협회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영웅을 A급으로 분류한 거지?”

몇몇은 협회에 공시된 루시의 등급에 의문을 가졌다.

서류상으로 루시는 A급 집행관이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확신했다.

집행관 태루시는 지구의 수호자 태광휘와 비슷한 급의 각성자라고.

“지금이야! 반격하자!”

“쏴라! 전진! 전진하라!”

마족과 드래고니안이 해결되자 인류는 투지를 되찾았고, 뒷걸음치던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으며, 후진하던 기어를 전진으로 바꿨다.

포신이 이제는 아군이 아닌 적을 향해 정확히 조준되었다.

퍼엉!

남은 포탄을 아낌없이 쏘았다.

쿠오오오오.

몬스터들의 몸에 무수한 대괴수탄이 꽂혔다.

우우우웅.

그렇게 반격하는데.

“마법진?”

“저 표식은 뭐지……?”

갑자기 몬스터들의 가죽에서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놈들의 방어력이 갑자기 올랐습니다! 처음 보는 현상입니다.”

“몬스터 군단 전체가 동시에 진화헀다고?! 그것도 수 초 만에?”

빛나는 마법진과 함께 몬스터들이 급속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대괴수탄이 잘 먹히지 않았다. 움직임도 조금은 빨라진 것 같았다.

‘이노센티아가 또?!’

이를 본 루시는 눈을 크게 떴다.

대마법진 이노센티아는 지하에서 파괴되었다.

때문에 저 작은 이노센티아들은 발동되면 안 됐다.

쿠오오오오!

키아아아악!

작은 이노센티아가 다시 발동되자, 루시가 펼쳤던 설원이 징벌이 다시 주춤한다.

무엇보다 또다시 몬스터들이 그녀의 설원에 얼어 죽지 않기 시작했다.

퍼엉, 펑.

꺄아아아악!

아악!

잠시 잠잠했던 인간의 비명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

루시는 하늘에 떠서 말없이 전장을 살폈다.

‘이노센티아가 또 있나?’

그녀는 오감을 총동원하여 주위를 살폈다.

‘없어.’

하지만 어떤 대마법진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빙하의 여제.’

이 이노센티아를 만들었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

‘……베아트리체.’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가 분명 이 근처에 있다!

위우우웅!

“?!”

그리고 루시가 직접 그녀를 찾을 필요도 없이.

파아아앗.

공간 도약을 알리는 효과음과 함께 가면 쓴 한 여성이 루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루시와 놀랍도록 똑같은, 대대로 루한의 왕족을 상징하는 청은발이 설풍에 휘날린다.

옷은 지구인들이 보통 여름에 입는 하얀 원피스를 입었다.

이 겨울에, 그것도 설원의 권능이 몰아치는 지금 원피스라니.

애초에 추위를 거의 타지 않는 루시였기에, 눈앞 여인의 복장에 큰 괴리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너, 정체가 뭐지?”

루시는 베아트리체로 추정되는 여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알면서 뭘 굳이 질문까지 하실까요?]

물음에 대한 답변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뒤에서 들렸다.

“!!”

루시는 급히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후드를 깊게 쓰고, 마법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한 남성이 있었다.

타천사를 상징하는 회색 날개가 고고히 펼쳐져 있었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

더욱 놀라운 것은 뒤에 나타난 남자의 존재를 그녀가 느끼지 못했다는 것.

[저는 루시프라고 합니다. 마인들의 조직, 레드문의 대표를 맡고 있지요. 그리고 저 뒤에 계신 레이디는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가 맞습니다.]

후드 속 루시프의 탁한 백금색 안광이 빛나면서 목소리를 냈다.

[참고로 우리 빙하의 여제님께서는 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과거 태광휘에게 큰 부상을 입었거든요.]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루시에게 인사를 했다.

“너희는 무슨 이유로 이런 짓들을 하는 거지?”

그런 루시프를 향해 루시는 차갑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전부터 발생한 마인들의 범죄와 테러부터, 현재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까지. 어쩌면 루한을 비롯한 다른 차원에서도 일어나는 11차원의 침략까지도.

[글쎄요? 악을 행함에 있어 이유가 필요할까요?]

루시의 질문에 루시프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하긴, 마계의 잡것들은 원래 그랬지.”

루시프의 대답에 그녀는 루한에서 겪었던 마계의 만행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

그때, 문득 저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루시를 비롯한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외침이 들려온 쪽을 보았다.

“박태오?”

어느새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박태오와 가오이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박태오는 등에 멘 초상 장비로 하늘을 날았고, 가오이 또한 수인족의 군주답게 나름의 비행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

루시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루시프가 있는 곳에 도착한 박태오는 떨리는 눈동자로 베아트리체를 보았다.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

‘베아트리체!’

다시 만나기만 하면 복수심이 불탈 것 같았는데, 동생을 향한 분노로 주먹부터 나갈 것 같았는데.

“……리체, 정말 너야?”

실제로 만나니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너는 그때 분명 광휘의 손에 죽었는데…… 어떻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비슷하게 떨리는 음색으로 박태오는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오해는 안 받겠군?”

그런 박태오를 슬쩍 본 루시가 조소한다.

“…….”

박태오는 가면 쓴 베아트리체에게 정신이 팔려 루시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와 혼란스러운 얼굴에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동생의 원수, 한때 가장 마음을 주었던 여인이자 동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그녀의 배신 등등, 증오와 복수, 혼란, 갈등, 애증이 박태오의 얼굴과 심장에 그라데이션처럼 번졌다.

‘차라리 네가 그때처럼 광휘의 손에 순식간에 불탔더라면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았을 텐데.’

이 자리에 없는 태광휘가 아쉬웠다.

당시에는 박태오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태광휘가 베아트리체를 척살했다.

“크르릉.”

한편, 박태오와 함께 이곳에 온 가오이는 잔뜩 굳은 미간으로 아까부터 계속 으르렁댔다.

번쩍.

가오이의 이마에 있던 이노센티아가 어느 때보다 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이를 본 루시가 말없이 전투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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