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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86화 (186/212)

제186화

#186.

말없이 하늘에 떠 있는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에게 온 정신이 팔린 혼란스러운 박태오.

이마의 이노센티아로 힘겨워하는 가오이.

그런 가오이와 베아트리체, 루시프를 동시에 견제해야 하는 루시.

복잡하면서도 묘한 대치가 공중에서 이어졌다.

한편, 지상의 전장은 이노센티아로 강성해진 몬스터의 발악으로 소강상태다.

몬스터들은 다시 전진했고, 전진했던 인류의 군대는 이를 막느라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간간한 비명과 괴성 그리고 좀 더 빈번한 총포탄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지상의 전쟁 음을 배경음 삼아서.

루시, 박태오, 가오이, 베아트리체, 루시프, 다섯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볼 뿐이다.

“…….”

[…….]

누구라도 먼저 움직이는 순간, 난잡한 전투가 시작될 것 같은 예감.

그렇게 칼날 위 같았던 긴장과 침묵.

[이거, 생각보다 빨리들 왔습니다?]

문득 루시프의 목소리로 끊겼다.

[불청객이 너무 많아졌어요.]

-!

루시프의 말이 끝나고 얼마 후.

지상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피슈웅, 콰아아앙, 퍼어어엉.

제일 먼저 탄약 고갈로 조용했던 대지에 무수한 포격과 폭격이 다시 퍼부어졌다.

와아아아아!

이어서 지상에서 다시 한번 희망의 함성이 메아리친다.

“본토에서 지원군이 왔어!”

“협회와 평택의 헌터들이야!”

국군의 지원 부대와 헌터들이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막 상륙한 것이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지원군이 도착하자, 루시프는 약간의 다급함을 보였다.

그는 베아트리체를 향해 후드 속의 탁한 백금색 안광을 빛냈다.

“…….”

하얀 가면을 쓴 베아트리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앗, 솨아아아아.

그리고 느닷없이 냉기를 펼쳤다.

냉기가 향한 방향은 지상, 막 제주도에 상륙 중인 해병대의 상륙정과 상륙 헬기를 겨눴다.

“리, 리체……! 크으으윽!”

이에, 급히 박태오가 나섰다.

그가 강화계 이능을 최대치로 발휘하여 베아트리체의 냉기를 막았다.

옆에 있던 루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얼어라!]

루시가 급히 설원의 언령을 영창해서 베아트리체를 공격했다.

[……!]

베아트리체는 급히 지상을 향했던 설원을 움직여 루시의 공격을 막았다.

고오오오오.

공중에서 여왕의 설원과 여제의 설원이 맞붙는다.

대기와 대기가 설풍과 스파크를 튀기며 뒤얽혔다.

[얼어라!]

루시는 다시 한번 대마녀의 언령을 영창했다.

[!!]

저 앞의 가면 쓴 여인도 말을 하지 못할 뿐이지, 영혼으로 언령을 영창한다.

콰오오오오오.

눈의 폭풍과 함께 고공에 설원이 몰아쳤다.

때로는 고요하게, 때로는 사납게, 그리하여 거룩하고 깊게, 상공에 혹한의 태풍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

베아트리체와 첫 대결을 하던 루시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악과 의문으로 물들었다.

‘이건…… 순수한 설원의 권능이 아니야!’

전력으로 베아트리체와 싸우면서 상대의 본질을 봤기 때문이다.

눈앞의 빙하의 여제의 힘은 설원의 권능도 아니었고, 설원의 권능의 뿌리인 무한의 추위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래서 솔라가 별말을 하지 않았던 건가?’

베아트리체의 냉기는 그저 옷이랑 비슷했다. 지구식 개념으로는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 스킨 같은 거였다.

‘저 설원은…… 신성력에 가까워!’

루시는 눈을 부릅뜨고 저편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저 설원은 가짜야. 이노센티아를 이용해 흉내 낸 가짜야!’

역시 베아트리체의 정체는 12차원 출신의 타천사였다.

추측으로만 거의 확신했던 것이 마침내 확실시된 순간이었다.

“감히…… 설원의 순수를 더럽히지 마라!!”

한편으론 루시는 불쾌함을 느꼈다. 명품 장인이 백화점에서 자신의 짝퉁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얼어라!]

루시는 분노의 고함과 함께 다시 한번 언령을 영창했다.

파아아아앗.

설원의 권능이 더욱 거세졌고 무한의 추위로 변한다.

[…….]

그런 루시의 압박에 베아트리체는 살짝 주춤했지만.

[도와 드려야겠군요?]

뒤에 있던 루시프가 주춤한 베아트리체를 지원한다.

파아아앗!

“크윽……!”

루시는 자신을 압박하는 무형의 족쇄가 더욱 많아짐을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저 루시프라는 타천사도 이노센티아를 쓰는군.’

루시프의 참전이 기울어지려던 추의 균형을 역전한다.

다시 팽팽해진 균형, 아니, 서서히 루시에게 불리해지고 있는 무게추.

[이제 슬슬 끝을 냅시다.]

루시프는 쐐기를 박으려 했다.

[베아트리체, 아니, 리리스.]

그는 베아트리체의 본명을 부르며 재촉하듯이 속삭임을 이었다.

[우린 루시푸르네의 심장이 필요해요. 한시라도 빨리. 그가 돌아오기 전에.]

루시프와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루시의 심장이 있는 흉부에 모였다.

[…….]

이에 베아트리체는 힘을 가다듬고는 언령을 영창했다.

[이노센티아.]

처음으로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대기에 퍼졌다.

콰아아아앗!

이노센티아와 거짓된 설원의 권능이 합쳐져 루시를 포위한다.

“!!”

루시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간신히 버티던 그녀의 설원이 급속도로 응축되었다.

루시의 설원이 급격히 밀리는 것은 옆에 있던 박태오도 보았다.

누가 보아도 루시가 불리하다. 위태롭다.

아무리 베아트리체에게 시선이 팔렸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리체.”

박태오는 루시와 베아트리체의 격돌을 떨리는 눈동자로 잠시 보더니 깊이 숨을 내뱉는다.

“후우.”

짝!

양손으로 자신의 양 뺨을 때렸다.

“크아아아아압!”

그리고 기합을 내지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콰아아아악.

이 주먹에 모든 힘을 담았다.

타앗, 피슈우우우.

“소영이의 복수다아!!”

이윽고 강화된 그의 몸이 로켓처럼 베아트리체와 루시프가 있는 곳을 향해 발사되었다.

“베아트리체에!”

과거의 인연과 감정들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박태오는 샤우팅하듯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그때,

“크와아아아왕!”

“?!”

베아트리체에게 달려들던 박태오의 등을 가오이가 덮쳤다.

* * *

비슷한 시각, 미합중국 뉴시카고.

유리아는 짧게 친 진분홍빛 머리카락을 털었다.

짧은 머리였지만 적지 않은 피가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후우.”

그녀의 힘을 억누르던 모자와 선글라스는 벗어 던진 지 오래.

아마 이곳 어딘가 구석에 굴러다니고 있을 터.

번쩍, 콰아아아.

그때, 도시 동쪽 끝에서 신성 폭발이 감지되었다.

자정을 넘어선 어두운 새벽 시간이기에 신성 폭발의 빛은 더더욱 눈에 띄었다.

‘성녀님의 신성 폭발!’

아마 성녀 아스카의 활약일 듯싶었다.

키아아아악.

얼마 후 도시의 서쪽에서도 동료의 활약이 감지됐다.

키에에에엑!

키메라의 괴성이 들렸다.

이어서 푹푹거리는 살점과 촉수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시몬 경도 무사한가 봐. 다행이야.’

시몬이 있는 방향을 본 유리아는 문득 실소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여기서 제일 최약체라고 하면 바로 자신이거늘.

처억.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검을 들었다.

‘폐하는 괜찮으실까?’

한편으론 지구 반대편에 계실 루시가 걱정되었다.

당장이라도 제주도로 가고 싶었지만, 지금 이곳 상황이 영 좋지 못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마인 소굴이었을 줄이야.’

원래에도 안 좋았던 미국의 치안이 2차 개문과 대공황으로 더 안 좋아졌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마인이 도시 하나를 완전히 접수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우르르르, 구르르르.

그때, 그녀의 발달된 귀로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무수한 발소리가 들렸다.

몇 번째인지 모를 마인들의 습격이 또 시작된 것이다.

“…….”

유리아는 두 눈을 슬며시 감고는 심장 박동을 빠르게 했다.

두근, 두근, 쿠웅, 쿵, 쿵쿵쿵.

-!!

이젠 그녀의 일부이기도 한 ‘알파’의 잔해가 꿈틀거렸다.

솨아아아앗.

이윽고 혈향이 짙은 붉은 안개가 연막탄처럼 순식간에 펼쳐졌다.

짙은 안개가 사거리의 블록 하나를 완전히 덮었다.

“크아아아아!”

[죽여어어어어!]

이성을 잃은 마인들과 좀비가 되어 버린 시민들이 유리아가 펼친 피의 안개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불나방 무리 같다.

“크으으으?”

[흐히히히힣, 히힣, 흐힛?!]

핏빛 안개 속에 흘러 들어간 이들은 이성을 잃었음에도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슈우우우욱.

“끄어어어어억!”

[끼야아아아악!]

좀비가 된 시민도, 이성을 잃은 마인도, 안개 속에 들어오기 무섭게 피와 마력을 빼앗기기 시작했고, 1분도 안 돼 모두 미라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서거걱, 서걱.

몇몇 생명력이 높은 마인은 유리아가 직접 검을 휘둘러 처리했다.

마지막 마인의 심장을 찌른 유리아는 또다시 머리카락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후우.”

피로한 한숨을 뱉으며 붉은 안개를 거뒀다.

최소 스무 번은 겪은 것 같은 마인들의 웨이브가 이번에도 유리아의 압승으로 끝났다.

고오오오.

이번의 웨이브가 끝나자 처음으로 고요함이 유리아 주위를 둘렀다.

번쩍, 퍼어엉.

촤아아악, 푸우욱.

멀찍이서 성녀와 시몬의 전투 소리만이 은은하게 들릴 뿐이다.

‘둘 다 상대가 만만치 않나 보군. 고위 마족이라도 소환된 건가?’

단순히 몰이 사냥을 하던 유리아와 달리, 아스카와 시몬은 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던 두 고위 마족을 상대 중이었다.

보아하니 둘 다 아직 한창 싸우고 있는 모양.

‘누구부터 도와야 하지?’

유리아는 잠시 갈등에 빠졌다. 시몬과 유리아는 이 도시의 동쪽과 서쪽 양 끝에 있었다. 유리아는 가운데에 있었다.

‘문제는 누구의 상태가 심각한지, 어디가 더 급박한지 알 길이 없어.’

밀 스펙으로 제작된 집행관용 휴대폰과 무전기가 아까부터 먹통이었기 때문이다.

‘시몬 경이 성녀님보다 더 강하시지겠지? 그럼 일단 성녀님부터 돕는 게 맞을까? 하지만 그 시몬 경이 아직까지 싸우고 있다는 것은 서쪽에 소환된 마족이 엄청 강하다는 뜻도 되는데…….’

그렇게 어디로 먼저 지원을 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파치지직.

갑자기 허공에서 시공간 균열을 알리는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게이트다!’

하필이면 유리아가 서 있던 곳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쪽이다.

유리아는 급히 게이트가 열린 곳을 향해 뛰었다.

도착한 그곳에는 사람 한 명이 통과할 크기의 균열이 막 열리고 있었다.

‘마족인가?!’

이를 본 유리아는 급히 검을 들어 전투 준비를 했다.

한편으론 알파를 자극하여 혈마법을 발동했다.

그리고 반쯤 무너진 건물의 그늘 아래로 이동해 은폐를 유지했다.

새벽에 가까운 늦은 밤, 전기가 모두 나간 어둠의 도시.

그런 도시의 무너진 그늘에 선 유리아는 달빛마저 찾지 못했다.

게이트 앞에 선 그녀는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파아앗.

잠시 후, 게이트가 쫘악 하고 열리더니 밝은 빛을 토했고, 그 빛무리 안에서 한 남성이 등장했다.

“……!”

유리아는 어둠과 하나가 된 상태로 게이트에서 나온 남성을 유심히 관찰했다.

“인간?”

제일 먼저 남자의 종족이 눈에 띄었고 이어서 남자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저 제복은?’

매우 눈에 익은 기사 제복에 유리아는 뇌 정지가 올 뻔했다.

하지만 진정한 경악은 이제 시작이다.

빛무리가 점점 사라지자, 기사 제복을 입은 남자의 얼굴이 비로소 나타났다.

“!!”

게이트에서 나온 남자의 얼굴을 본 유리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태양을 닮은 남자의 금색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났다. 남자의 어깨와 머리 위로 은은한 헤일로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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