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88화 (188/212)

제188화

#188.

대한민국 제주도.

피슈웅, 콰앙!

가오이의 공격을 받은 박태오는 지상으로 추락했다.

“크허억…… 허억…….”

S급 강화계 각성자였기에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의 정도는 깊었다.

“빌어먹을…… 저 마빡을 깜빡했군.”

지상에 추락한 박태오는 자신을 쫓아 땅 아래로 내려온 가오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내 실수다! 정신이 너무 리체에게 팔렸어.’

옆에 있던 가오이의 상태를 살피지 못했다.

선택의 그 순간까지, 박태오의 인지 범위엔 오직 베아트리체만이 있었다.

‘아무리 정신이 팔렸다고 해도 이렇게 뒤를 무방비하게 내주다니…….’

초짜 헌터도 이런 짓은 안 한다.

‘진짜 X신 같군.’

진심으로 스스로가 한심했다.

“쿨럭, 쿨럭!”

추락과 기습의 후유증으로 박태오는 연신 각혈을 했다.

쿠오오오오!

퍼어억!

그런 박태오를 향해 이성을 잃은 사자왕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퍼억, 콰앙, 퍽!

기습을 맞고 지상으로 추락한 박태오는 부상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묵묵히 구타를 당해야 했다.

“…….”

타고난 맷집으로 구타를 어찌저찌 견디고 있지만, 밀려오는 비참함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몸을 웅크려 방어하면서 흐릿한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태루시…… 리체…….’

그곳에는 여전히 두 개의 설원이 맞붙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가 있는 쪽의 설원이 누가 봐도 밀리고 있었다.

‘나는 복수를 할 능력도 못 되는구나…….’

세계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고 S급 강화계 각성자면 뭐 하는가?

결국 이 모양 이 꼴인데.

‘광휘를 볼 면목이 없군.’

오늘따라 태광휘의 빈자리가 유독 더 크게 느껴졌다.

퍼억, 퍽, 퍽.

무자비한 가오이의 구타가 계속 이어졌다.

박태오가 아무리 S급 강화 계열이라고 해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

‘……!’

그의 머릿속에 목숨의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울렸다.

마찬가지로.

솨아아아, 파바바밧.

루시가 있는 저 하늘 또한 지상의 박태오 못지않게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지원군의 상륙으로 희망이 봇물 터지는 제주도지만, 이런 제주도의 한쪽에선 더 큰 절망이 샘솟는다.

그리고 그때.

파치지지긱.

문득 허공에서 균열이 일더니 작은 게이트 하나가 열리기 시작했다.

게이트는 크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오갈 만한 방문 크기의 게이트.

하필이면 박태오가 있는 곳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장소.

‘X랄 났군…….’

뿌연 의식 속에서 게이트를 본 박태오는 진심으로 절망을 느꼈다.

파아앗.

이윽고 작은 게이트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저벅,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어째 잘 훈련받은 군인처럼 절도 있었다.

‘사람……? 여자?’

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인간 여성이 뿌연 박태오의 시야에 잡혔다.

짧은 단발로 자른 청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복장은 근세 지구의 제복과 유사한 옷을 입고 있었다.

“……?!”

멋들어진 판타지풍 기사 제복을 입은 여기사는 말없이 박태오와 가오이를 보더니.

“이노센티아?”

차가운 어조로 한마디를 하고는 푸른색 마검을 뽑아 가오이의 몸을 찔렀다.

푸우욱-!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마치 길 가다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친숙함.

푸른색 마검은 너무나 허무하게 가오이의 두꺼운 가죽을 깊숙이 뚫었다.

이노센티아에 이성을 잃었던 가오이는 박태오를 구타하는 데 정신이 팔려 여기사의 찌르기에 무방비했다.

쿠으으으……?

푸른색 마검이 몸을 완전히 관통하자, 가오이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멈추고는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 쓰러졌다.

파치지직.

놈의 이마에 있던 마법진도 스파크를 일으키며 소멸했다.

게이트에서 나온 이계의 기사는 너무나 쉽게, 허무할 정도로 폭주하는 사자 수인족을 제압했다.

‘죽은 건가? 이 괴물이!’

코앞에서 쿵 하고 쓰러진 가오이. 이를 본 박태오는 놈의 심장이 멈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기세등등하던 녀석의 기운과 생명력이 빠르게 식어 간다.

“……!”

박태오는 멍하니 자신을 구해 준 여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차원 코어?!’

그러다가 여자가 들고 있는 푸른색 마검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마검의 폼멜 쪽에 주먹만 한 투명한 구슬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소에서 본 차원 코어보단 작았지만 생김새는 놀랍도록 유사했다.

“괜찮으시오?”

쓰러진 가오이의 몸에서 검을 완전히 뽑은 여기사는 박태오에게 접근해 왔다.

루시처럼 통역 마법을 사용했는지 박태오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박태오는 저 여자의 목소리가 유독 태루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휘이이잉.

이어서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분명히 느껴지는 냉기가 얼굴에 스쳤다. 태루시와 베아트리체에게서 났던 겨울 냄새가 눈앞 여기사에게서도 느껴졌다.

“무슨 빙하기도 아니고.”

박태오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하늘을 보았다.

땅에도 하늘에도, 죄다 냉기 원소술사뿐이다.

“부탁이 있습니다, 이계의 기사여…….”

긴장이 풀린 박태오는 심신의 피로로 급격히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저기 하늘의 가면 쓴 마녀를 죽여 주십시오. 그녀는 아주 사악한 학살자입니다.”

도저히 수마를 견디지 못했기에, 그는 마지막 의지를 쥐어짜 정체불명의 이계인에게 부탁을 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박태오는 눈을 감았고. 깊은 수마에 몸과 영혼을 맡겨야만 했다.

“이보시오! 괜찮……?”

박태오가 눈을 감자 여기사는 당황했다.

“……잠들었군.”

그러다가 그가 단순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 안심했다.

“부탁이라고?”

이어서 그녀는 박태오의 시선이 향했던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이계의 전사여, 걱정 마시오. 나는 저것들을 척살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니.”

하늘을 본 청은발의 여기사의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드디어 만났군. 부디 이번엔 본체였으면 좋겠는데…….”

당장이라도 저들을 베어 버릴 기세를 풍겼다.

“빙하의 여제! 그리고 루시프! 인류의 공적!”

그녀는 살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타앗!

단숨에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 * *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던 상황.

유일한 희망이었던 박태오는 뒤도 안 살피고 돌격하다가 지상에 처박혔다.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라는 갈등이 초 단위로 루시를 스쳤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도망치면 제주도에 있는 무수한 사람이 죽는다.

“끄으으윽!”

루시는 인상을 팍 쓰면서 설원의 권능을 펼쳤다.

마지막 남은 그녀의 설원. 10미터 거리의 영역을 철저히 사수했다.

‘저 헌터들이 도움이 될까?’

막 제주도에 상륙한 헌터들에게 기대를 걸까 싶었지만.

‘아니, 희생만 키울 뿐이야.’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들이 여기 올 때까지 못 버텨.’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시몬과 유리아급은 되어야 해!’

차라리 지구 반대편이 있다는 두 사람이 1초라도 빨리 왔으면 싶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죽어라 버티고 버텨도, 유리아와 시몬은 오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루시를 향한 압박은 더더욱 거세졌고, 10미터 범위였던 그녀의 설원이 끝끝내 밀리고 밀리더니.

9미터, 8미터, 7미터…… 어느덧 5미터까지 좁아진다.

고오오오오!

베아트리체의 가짜 설원이 루시를 포위한다.

이노센티아가 루시의 힘을 억압했기에, 가짜 설원이 진짜 설원을 덮칠 수 있었다.

[…….]

루시프는 묵묵히 뒤에서 잿빛 날개를 쫙 펼치곤 베아트리체를 지원했다.

어떻게 지원하는지는 명확하진 않다. 다만, 그의 개입으로 이노센티아가 더욱 강성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파아아아앗.

고오오오오.

이노센티아의 방해와 설원의 압박이 콤보를 이룬다.

두 개의 공격이 루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꽈아아아악.

그리하여 마침내 3미터까지 루시의 설원이 쪼그라들었다.

“흐으으읍!”

루시는 결국 한계에 도달했음을 느꼈고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신음과 동시에.

[얼어라!]

문득 매우 친숙한 언령이 뒤에서 들렸다.

치잉! 서거거걱.

이윽고 푸른색의 차가운 검기가 빙하의 여제를 갈랐다.

[꺄아아악!]

하늘 위, 빙하의 여제의 차가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싸움은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진보한 요정 검술, 훨씬 발전한 마나 배열과 수식.

비록 기습이었지만, 기습이었기에 더욱 위력적이었다.

땅으로 추락하는 베아트리체.

[이런…….]

갑작스러운 여기사의 등장에 루시프가 급히 방어 태세를 취한다.

[역시 일이 쉽게 풀리진 않는군요.]

“루시프!”

[오랜만입니다, 황녀 전하. 아니지, 윈터 나이트라고 불러야 좋아하시려나?]

루시프는 여기사를 아는 모양.

“오늘 기필코 네놈의 날개를 잘라 버리겠다!”

마찬가지로 여기사 또한 눈앞의 타천사를 아주 잘 아는 모양이다.

[저를 향한 겨울 기사님의 관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에, 루시프는 과장되게 제스처를 취하면서 반응했다.

[으음, 하지만 지금은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너그러이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누구 마음대로!”

루시프의 말에 여기사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베아트리체…… 리리스의 상태는 어떻지?’

그런 여기사를 경계하면서, 루시프는 땅으로 추락한 베아트리체를 슬쩍 살폈다.

‘리리스는 전투 불가군. 아쉽지만 다음을 노려야겠어. 다른 방법도 많으니까.’

그는 완전히 전투 불능이 된 베아트리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후퇴를 결심했다.

위우우웅!

루시프는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마법을 펼치더니.

[그럼! 다음 기회에~.]

바로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쥐새끼 같은 타천사 놈!”

루시프가 순식간에 도망치자, 여기사는 루시프가 사라진 허공을 향해 증오에 찬 욕설을 뱉었다.

“후우.”

그러다가 얼마 후, 수평으로 들었던 검을 내려놓았다.

덜덜덜.

검을 든 그녀의 손과 팔이 잘게 떨렸다.

루시프에게 바로 돌진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모양.

아까 가오이와 베아트리체에게 날렸던 일격은 보기와 달리 보통의 공격이 아닌 듯싶다.

나름 전력을 다해 내지른 일격이었는지 여기사 또한 많이 지쳐 보였다. 푸른 마검을 든 그녀의 팔에 지속되는 잔떨림이 그 증거.

“후우.”

몇 번의 심호흡으로 지친 모습을 애써 숨긴 여기사는 이어서 시선을 땅으로 돌렸다.

“이번에도 인형이었군.”

그리고 땅에 처박힌 베아트리체의 잔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처럼 베아트리체는 인형이었다.

“그래도 본체에 타격은 갔겠지.”

힘을 잃고 땅에 추락한 베아트리체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부서진 마네킹 같았다.

“…….”

그리고 아까부터 그런 여기사와 추락한 베아트리체를 멍하니 보고 있던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방금까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던 루시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루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순식간에 나타나 베아트리체를 벤 정체불명의 여기사.

한편으론 지상으로 추락한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인형술!’

문득 아리아 데스모와 옥타나가 떠올랐다. 그 둘도…… 정확하게는 옥타나가 인형술사였지.

‘설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추론에 루시의 얼굴에 그늘이 깊어진다.

하지만 상념에 빠지기엔 상황이 너그럽지 않았다.

“이럴 수가?”

때마침, 루시의 귀에 자신을 보고 놀란 듯한 여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

루시는 고개를 번쩍 들어 도와준 여기사를 보았다.

지금은 베아트리체의 정체보단 눈앞의 여자가 더 중요하다.

‘닮았어, 나랑.’

자신과 놀랍도록 비슷한 목소리.

루한의 왕가를 상징하는 고결한 청은발.

그이가 떠오르는 금색 눈동자.

‘왕실 기사단 제복?’

무엇보다 여자가 입고 있는 제복이 시선을 끌었다.

저 제복은 루한의 왕실 기사단이 입는 기사 제복이다.

세부적인 디자인은 살짝 다르지만, 기본적인 틀은 루한의 기사 제복이 맞았다.

‘저 푸른 마검은…… 윈테이라와 많이 닮았어.’

이어서 여기사가 들고 있는 푸른색 마검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윈테이라와 제법 닮은 마검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마법이나 검기를 쓰는 예검 윈테이라와 달리, 눈앞의 저 검은 실전용에 가까웠다. 마치 윈테이라를 전투용으로 다시 만든 것 같았다.

‘차원 코어?!’

그러다가 뒤늦게 푸른색 마검의 폼멜 부분을 본 루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윈테이라를 닮은 푸른색 마검 칼자루 끝에 투명한 구슬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투명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인지하지 못할 구슬이었다.

비록 크기가 좀 작았지만 차원 코어와 놀랍도록 유사한 구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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