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89화 (189/212)

제189화

#189.

고공에서 청은발의 여기사와 루시가 시선을 교차했다.

“……!”

“……?”

루시가 여기사를 관찰하듯 여기사도 루시를 뚫어지게 보았다.

두 여자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라도 한 듯 서로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루시였다.

“나는 루한의 여왕이자, 설원의 대마녀 루시푸르네, 여기에서는 태루시 집행관이라는 신분으로 있도다. 도움을 준 여기사여, 그대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루시의 말에 여기사의 얼굴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역시였어! 이, 이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솔로안 얘는 따라온다면서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아까의 위풍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눈에 띄게 동요한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파치지지직!!

“!!”

여기사가 들고 있는 푸른색 마검에서 갑자기 스파크가 튀었다.

번쩍, 번쩍, 번쩍.

스파크에 이어서 폼멜 쪽에 있는 투명한 구슬에서 경보등 같은 불빛이 요란하게 반짝였다.

“벌써 시간이!”

마검의 경보를 본 여기사의 표정이 심각하다.

파아아앗!

그녀는 급히 마검을 휘둘렀다. 푸른색 마검의 궤적이 허공을 갈랐고 균열이 일었다. 인위적으로 게이트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

이를 본 설원의 대마녀 루시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게이트를 이토록 쉽게 열다니! 자신은 세계수가 빌려준 중간계의 차원 코어로 간신히 왔는데!

아마도 저 검 끝에 달린 작은 차원 코어 덕분인 듯싶다.

루시가 할 말을 잃고 인위적으로 열린 게이트를 관찰하는 사이, 허공의 균열은 작은 문의 형태를 갖췄다.

게이트가 여물자, 여기사는 몸을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

게이트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제 이름은 루샬트, 루샬트라고 합니다.”

루시를 향해 조심스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게이트로 몸을 던지려 했다.

“자, 잠깐! 도움을 받았으니 사례를 하고 싶다.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루샬트라는 이름의 여기사가 막 가려고 하자, 아쉬움과 궁금함이 넘치던 루시가 그녀를 붙잡았다.

“……저희는 되도록 만나면 안 됩니다. 차원의 안정을 위해서라도요.”

슈욱!

그 말을 끝으로 루샬트는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다.

게이트는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닫혔다.

“루샬트, 루샬트…….”

여기사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보던 루시는 계속해서 루샬트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샬트.”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훗날 자식을 낳으면 이 이름으로 짓고 싶을 정도로.

* * *

미합중국, 뉴시카고.

빛으로 이뤄진 화망이 막 사라졌다.

아침이 온다.

“후우…….”

순식간에 다섯 마족을 정화한 솔로안은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유리아는 급히 솔로안에게 다가갔다.

“……!”

그녀가 다가오자, 솔로안이 경계의 눈빛을 했다.

유리아에게 남아 있는 알파의 혈향에 거부감을 느낀 모양.

‘독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약재가 되는 법이지. 흐음…….’

하지만 이내 작게 중얼거리며 경계의 눈빛을 거뒀다.

“지쳤을 뿐이야.”

그리고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유리아를 향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까처럼 유리아에게 존대를 하진 않았다. 자신이 아는 스승 유리아와 눈앞의 알파 유리아는 이제 전혀 다른 존재로 인지한 모양.

“…….”

“…….”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고오오오.

도시의 동쪽과 서쪽에서도 막 싸움이 끝난 모양.

더 이상의 신성 폭발과 키메라의 괴성이 들리지 않았다.

“저, 그러니까…… 일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리아는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환기시키기 위해 솔로안에게 말을 걸었다.

“할 일을 했을 뿐.”

이에 솔로안이 짧게 답했다.

“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돌아갈 방법을 찾으실 때까지 머물 곳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유리아는 새로운 집행관의 탄생인가 싶은 생각에, 솔로안의 거취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때.

파치지지직.

갑자기 솔로안이 들고 있는 스태프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스태프 끝에 박힌 투명한 구슬에서 요란한 오색 빛이 발광했다.

“이런,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내 누이는 진즉에 복귀했고.”

스태프를 본 솔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까? 누구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할까?”

뭔지 모르지만, 쌍둥이 누이와 관련된 일 때문에 이렇게 이계로 온 모양.

“어휴, 어마마마 배 속에서 나보다 늦게 나온 주제에 늘 누나라고 우기기나 하고. 뭐? 자기가 누나라서 양보를 해 줬다고?”

그는 이 자리에 없는 누이에 대한 뒷담화를 짧게 하고는 이어서 시선을 유리아에게 고정했다.

“그대와 이 세계를 좀 더 연구해 보고 싶지만, 상황이 급박한 관계로 넘어가겠다.”

처음처럼 차가우면서도 거리가 있는 뉘앙스.

하지만 눈빛에는 약간의 호의도 보였다.

휘익.

솔로안은 그 말을 끝으로 들고 있던 투명한 구슬이 박힌 황금 스태프를 허공에 휘둘렀다.

파아아앗.

스태프의 궤적과 함께 허공에 균열이 발생했다. 게이트가 열렸다.

‘인위적으로 게이트를?!’

이를 본 유리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 솔로안 전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갚고 싶은데,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유리아는 솔로안이 게이트로 사라지려 하자, 급히 물었다.

“되도록 다시 안 만나길 바란다. 우리가 자주 만날수록 우주가 불안정하다는 뜻일 테니까.”

솔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

“무운을 빌지. 봄의 축복을 지닌 혈기사여.”

그는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유리아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다.

* * *

제주 사태와 뉴시카고 사태 다음 날.

극동아시아의 어딘가, 이화초상연구소.

절뚝, 절뚝.

가면을 쓰고 그 위에 로브를 뒤집어쓴 한 여인이 절뚝이면서 어디론가 하염없이 걷는다.

그녀가 걷는 복도는 실내로 보였다. 창문 하나 없는 것이 지하에 위치한 모양.

이윽고 복도 끝에 한 연구실이 보였고, 여인은 힘겨운 몸짓으로 연구실의 보안 문을 통과한다.

그렇게 들어간 연구실 중앙에는 사람 몸통만 한 투명한 구체가 놓여 있었다. 차원 코어였다.

여인은 망설임 없이 차원 코어를 향해 다가갔다.

“잠, 잠깐……! 그렇게 함부로 만지시면!”

그때 연구실에 있던 흰 가운을 입은 중년 여성이 이를 제지한다.

찌릿.

그러자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말없이 흰 가운을 입은 박사를 노려본다. 가면 뒤에 있는 그녀의 백금색 안광이 번쩍인다.

본래엔 푸른 사파이어 빛이었어야 할 안광이 오늘은 백금색으로 빛났다. 차갑고 사나운 기운이 가면 속 두 눈동자에서 흘렀다.

“허업! 죄, 죄송합니다…….”

이화연구소의 책임자 구미희는 여인의 안광에 바로 겁을 집어먹었다. 벌벌 떨면서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구미희가 순순히 물러나자, 가면 쓴 여인은 하려던 일을 마저 하려 들었다.

이를 보는 구미희 박사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베아트리체를 노려보았다.

‘뭘 할 생각이지?’

한편으론 과학자 특유의 호기심이 구미희의 두 눈에 서렸다.

‘그 무식한 군인처럼 부수려 들진 않겠지.’

적어도 제주 해상 기지의 멍청한 초상 장교처럼 도끼질을 하진 않을 터.

‘결국 이렇게 되었군. 저 마인들 때문에 일부러 정부 시설로 옮겼던 것인데…….’

한편으론 결국 완전히 레드문의 것이 되어 버린 지구의 코어를 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구미희의 복잡한 시선을 받으며, 베아트리체는 망설임 없이 차원 코어의 표면에 손을 댔다.

처억.

우우우웅.

공명이라도 하듯 자신의 마나를 부여했다.

[…….]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이런, 이런, 새치기는 나쁜 겁니다, 리리스.]

베아트리체의 뒤에서 루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루시프의 등장에 베아트리체의 본신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어디, 저도 한번?]

그녀가 물러나자, 이번엔 루시프가 차원 코어에 손을 올렸다.

[…….]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이를 지켜보던 구미희가 안도와 의문이 뒤섞인 눈을 했다.

[역시 루시푸르네의 심장이 필요하겠어요.]

“!!”

하지만 이어진 루시프의 말에 구미희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설마 12차원에서 이렇게까지 수를 써 놨을 줄은 몰랐습니다.]

알듯 말듯 한 루시프의 중얼거림.

[…….]

그의 말을 듣던 베아트리체는 문득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전날 루샬트에게 입은 부상이 긴 상흔으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투명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루샬트의 검이 리리스의 영체에 확실히 영향을 줬나 보군요? 괜찮나요?]

그녀의 상태를 슬쩍 본 루시프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

베아트리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이 많이 꼬였어요. 설마 차원 코어에 도끼질을 할 줄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것도 12차원의 개입이었을까요?]

베아트리체가 반응을 하든 말든, 루시프는 말을 이었다.

[그 도끼질 덕분에 차원 폭풍이 크게 일었습니다. 첫 번째 도끼질에선 무수한 평행 차원이 부딪쳤고, 두 번째 도끼질에선 시간선이 어긋나 버렸어요.]

루시프는 말을 하면서 차원 코어를 쓰다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첫 번째 도끼질에선 다른 차원에 가 있는 우리의 아바타들이 이득을 보았다는 정도? 덕분에 최악은 면했지만요.]

코어를 쓰다듬던 타천사의 깊은 후드 속에서 한숨 소리가 얼핏 들렸다.

[하지만 역시 두 번째 도끼질이 문제였어요. 나와 리리스의 아바타들이 노력했음에도 다른 세계의 그들이 만나는 것을 결국 허용해 버렸지요.]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질렸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지금 태광휘가 있는 태평양 게이트도 분명 영향을 받았을 터. 그가 오기 전에 이 차원 코어를 흡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루시푸르네, 그것도 현 지구에 있는 루시푸르네가 반드시 필요하고요.]

[…….]

베아트리체는 루시프의 일장 연설 같은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여기 차원 코어가 있으니 그녀를 유인하는 것은 쉽습니다. 다만, 그녀 혼자서 오게 해야 합니다. 어제의 루샬트 또는 유리아급의 동료가 합세하면 지금의 우리로선 승부를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아까부터 연구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구미희도 귀를 쫑긋 세우며 루시프의 말을 들었다. 세계적 마인 조직 레드문 수장의 말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거대한 정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구미희 박사.]

그러다 문득 말을 잇던 루시프의 고개가 구미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예? 예!”

마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구미희는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바짝 얼었다.

[당신이 루시푸르네와 인연이 깊은 것을 알고 있어요.]

“제, 제가요?!”

[정확히는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요. 연락처, 아직 지우지 않았지요?]

루시프는 속삭이듯 안광을 빛냈다.

[의외로 그녀를 홀로 유인하는 것은 쉽겠어요. 의외로 잔정이 많은 그녀가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요?]

“……!”

타천사의 말에 구미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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