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90화 (190/212)

제190화

#190.

쿠웅.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아빠! 아빠아!”

그의 가슴 위에서 소녀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태광휘는 쥴리아의 목소리에 의식을 차리곤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한 손에는 회색 마검이 쥐어져 있었다.

화르릇.

쥴리아는 태광휘 옆에 서서 여차하면 이 숲을 태워 버릴 준비를 마쳤다.

“어?! 여기…… 여기는?!”

그러다 숲을 태워 버릴 기세로 있던 쥴리아가 놀란 눈을 한다.

“아빠, 여기 내 기억이 맞다면…….”

아우라처럼 뿜어냈던 쥴리아의 화염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요정의 숲.”

쥴리아에 이어서 태광휘 또한 자신이 떨어진 세계를 눈치챘다.

“분명 태평양 게이트의 마지막 림보를 닫았어. 원래대로라면 지구로 귀환했어야 했는데…… 그때 휘몰아친 차원 폭풍 때문인가?”

복잡해진 결과에 그는 미간을 구겼다.

‘동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도 여기에 떨어졌나? 아니면 지구로 간 것일까?’

태광휘와 지구의 헌터들은 태평양 게이트의 마지막 림보를 닫았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성공했다. 이것으로 지구는 당분간 안전하다. 마계와 지구의 단일화는 뒤로 미뤄졌다.

그렇게 영광의 귀환을 준비 중이었는데, 갑자기 거대한 충격파가 온 차원을 뒤흔들었다.

충격파로 인해 차원 폭풍이 일었고, 태평양 게이트 속의 림보 또한 격변에 휘말렸다.

함께 승리를 이뤘던 전우들이 차원 폭풍에 휩쓸렸고, 제아무리 태광휘라 해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등에 딱 달라붙었던 쥴리아와 마지막 림보에서 마침내 얻은 투명한 구체 하나를 간신히 챙겼을 뿐이다.

그리하여 차원 폭풍에 휘말린 태광휘가 떨어진 곳이 바로 이 숲이었다.

“코어는 무사해. 이것만 있으면 다시 지구로 갈 수 있겠지.”

태광휘는 품속에서 주먹 크기의 투명한 구슬을 꺼내 살폈다.

“응! 다행이야, 아빠! 저 투명한 구슬을 조금만 연구하면 지구로 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오빠들이랑 언니들이…….”

사춘기 소녀로 훌쩍 큰 쥴리아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꼬면서 걱정 어린 눈을 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다들 한곳으로 휩쓸렸으니까.”

태광휘는 그런 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일단은 세계수에게 가 보자.”

주위를 살핀 태광휘는 쥴리아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세계수와 리리아라면 자신과 쥴리아를 지구로 보내 줄 방법을 알 것이다. 이 투명한 코어를 어떻게 쓰는지도 말이다.

‘만약 루시가 아직 루한에 있다면 이참에 만날 수도 있겠군. 루시와 더불어 루나도, 로뮤도.’

한편으론 괜히 가슴이 뛰는 태광휘였다.

가슴 뛰는 재회를 나누고 다 같이 지구로 가서 지구의 차원 코어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두 세계를 잇고 이를 통해 마계와 지구의 합병을 막는 것이다.

어쩌면 요정 숲에 떨어진 덕분에 일이 생각보다 쉬워질 듯싶었다.

그렇게 숲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음?”

“어!”

요정 도시에서 좀 떨어진 외곽.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엘프 파수꾼이 야영지 대신 쓰는 오두막일 수 있었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이 멈춰 선 것이 아니었다.

그 오두막 바로 앞에 백은발의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수한 옷차림에 한 손에는 물동이를 든 것이 전형적인 시골 아낙처럼 보였다.

외모는 세월을 다소 머금은 듯 중년에서 노년의 외모였고, 백은발에는 청은발의 머릿결이 중간중간 물들어 있어 젊었을 적 여인의 머리 색을 추측할 수 있었다.

“……!”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오두막 앞에 있던 나이 든 여인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태광휘를 보았다.

“폐하……?”

여인의 입에서 뜬금없는 호칭이 제일 먼저 나왔고.

“아니, 아니야. 황제와 똑같이 생겼지만 달라. 이 냄새는…… 이 영혼과 마나의 냄새는!”

하지만 여인은 고개를 젓더니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당신……! 당신이죠?!”

태광휘를 향해 소리치는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나체리나?”

태광휘는 나이 먹은 여인의 정체를 바로 추측할 수 있었다.

“말을! 말을 할 수 있어요?!”

태광휘가 예나체리나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자, 예나체리나는 다시 한번 놀라 소리쳤다.

“이 부질 없는 목숨, 요정 숲까지 와서 연명하길 잘했어. 정말 잘했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태광휘에게 달려들었다.

타다다다닷.

그리고 그의 품에 푹 하고 안겼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루시의 솔라시우스가 아닌, 나의 솔라시우스를.”

태광휘의 품에 안긴 예나체리나는 잘게 흐느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가 완성된 세계수 묘목의 세계라고?!’

태광휘는 자신과 쥴리아가 떨어진 세계가 단순한 루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두막 안.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 보는 요정 차 냄새가 은은하다. 태광휘와 쥴리아는 예나체리나가 준 차를 기분 좋게 음미했다.

“저분이 그럼 외할머니셔? 예전에 아빠가 말한 세계수 속의?”

차를 한 모금 마신 쥴리아는 태광휘의 팔뚝을 쿡 찔렀다.

‘엄마랑 진짜 닮았다. 엄마도 늙으면 저렇게 될까?’

그러면서도 시선은 저 앞의 노부인을 연신 힐끔거렸다.

마찬가지로 예나 또한 쥴리아를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진짜 딸인가요?”

그녀는 쥴리아와 태광휘의 관계에 혼란스러워했다.

“양녀야.”

이에, 태광휘는 짧고 명료하게 해명했다.

“휴우, 그렇죠? 하지만 당신과 느낌이 너무 비슷한데……?”

예나는 안도했다. 눈에는 여전히 자잘한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이내 의문을 지우곤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대로군요. 저는…… 많이 늙었지요?”

그녀는 멍하니 태광휘의 얼굴을 보더니 자신의 볼을 손으로 매만진다.

“아시다시피 설원의 계승식을 마친 마녀는 신체가 평범하게 변하니까요. 오히려 그동안 멈췄던 노화가 급격히 진행돼요.”

잔주름이 자잘하게 수 놓인 예나체리나의 얼굴은 노부인임에도 고왔다.

“…….”

그러나 딱히 거짓말은 안 하는 태광휘였기에 침묵으로 대신했다.

“흠흠!”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예나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당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태양 제국의 솔라시우스와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곤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태광휘에게 물었다.

“긴 얘기가 되겠군.”

태광휘는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을 적신 후 예나체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 이름은 태광휘야. 솔라시우스라는 이름 이전에…….”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숲이 어두워질 때까지 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랬군요. 그랬어…….”

태광휘의 기나긴 이야기를 다 들은 예나체리나는 소원을 이룬 사람처럼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번엔 태광휘의 궁금증을 풀 차례.

“그런데 왜 이곳에 그대가 있는 거지? 내가 리리아에게 들은 세계선에서는 지금쯤 루카스와 루한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마도 차원 폭풍 때문일 거예요. 솔라…… 아니, 태광휘. 당신이 11차원의 림보에서 겪은 차원 폭풍 말이에요.”

“……자세히.”

“그 차원 폭풍으로 시간선과 세계선이 변한 모양이에요. 들어 보니까 우리 세계의 역사와 당신이 요정 여왕에게서 들은 역사는 악황제를 무찌르고 쌍둥이를 낳는 부분까지만 일치해요.”

예나는 태광휘의 금색 눈동자를 애틋하게 보며 말을 이었다.

“……태양 제국이 건국되고, 솔라시우스의 이복형제가 제국의 섭정을 맡고, 딸과 사위가 루한의 순백궁에서 쌍둥이들과 행복한 생활을 이어 갈 때쯤에 사건이 생겼어요.”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계의 문, 당신의 세계에선 게이트라고 불리는 것들이 대륙 전체에 발생했어요.”

씁쓸함이 감돌던 그녀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피었다.

“게이트가 열리던 첫날, 루한의 국서였던 루카스가 마족의 암습으로 죽었어요. 어린 손주들을 지키다가요.”

“……!”

도끼질에서 시작된 두 번의 차원 폭풍은 시공간의 제약 없이 퍼졌다.

첫 번째 차원 폭풍은 10년 전 중간계 대륙 전체에 게이트가 열리는 것으로 발현되었고, 두 번째는 10년 후의 지금 태광휘의 불시착과 지구와 이 세계의 시간 축 동기화로 발현됐다.

“다행인 것은 차원 침공의 시기였어요. 막 대륙이 태양 제국의 지붕 아래로 통일되었을 때 일어났으니까요. 하나가 된 중간계는 상위 차원의 침공을 극복해 나갔어요. 희생이 없진 않았지만.”

대륙은 하나가 되어 차원 침공에 대항했다.

모든 학파의 마법사 마녀들이 힘을 합쳤다.

모든 왕국이 힘을 합쳤다.

모든 교단이 하나가 되어 기도에 임했다.

대륙에 지성을 가진 모든 종족이 결집했다.

태양 제국의 태양 황제 솔라시우스의 외조와 루한의 여왕 루시푸르네의 내조가 대륙을 이끌었고, 그리하여 대륙은 이계의 침공에서 굳건할 수 있었다.

본래에도 마나가 있던 4차원의 중간계였기에, 지구와 달리 큰 피해 없이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완승은 아니었다.

“현재 전황은 소강상태예요. 대륙의 10분의 1이 여전히 침략자의 손에 놓여 있지요.”

‘세계의 5분의 1이 마경이 된 지구보단 훨씬 낫군.’

예나의 설명에 태광휘는 생각했다.

“적들은 마왕급에 준하는 두 존재의 지휘를 받고 있어요. 덕분에 아주 전략적으로 움직이지요. 놈들에게 전향한 왕국과 종족도 제법 되고요.”

두 존재에 대해 얘기하는 예나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엿보였다.

“두 존재?”

“네! 바로 빙하의 여제와 타천사 루시프.”

태광휘의 물음에 예나는 이를 갈면서 답했다.

“……빙하의 여제?”

그녀의 대답에 태광휘의 눈이 일그러졌다. 빙하의 여제라는 칭호가 그의 신경을 긁었다.

“가증스럽게도 초대 여왕님과 이름이 같은 여자지요. 본명은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유독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고집하더군요.”

“혹시 가면을 썼나? 가짜 냉기를 펼치고?”

“어떻게 알았어요? 지구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나 보죠?”

“그래.”

태광휘는 굳은 얼굴을 했다.

‘그때 없앤 것은 역시 본체가 아니었어.’

원수 중에 원수, 그 원수가 살아 있었다. 심지어 고위 마족처럼 본체를 없애야 진정한 복수를 할 수 있는 번거로운 존재였다.

“하긴, 지구에도 있다는 것이 크게 이상할 건 없네요.”

베아트리체가 지구에도 있었다는 태광휘의 말에 예나체리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마족들의 흔한 수법이니까요. 본신은 꽁꽁 숨겨 두고서 자신의 분신을 하위 차원에 무수히 퍼트리죠.”

“마왕 세피로스처럼 본체에 큰 타격을 줘야 물리칠 수 있겠지.”

막연히 추측은 하고 있었기에 큰 충격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저 서브 퀘스트가 추가된 느낌이다.

“루시프는 어떤 존재지?”

그는 빙하의 여제와 함께 언급되는 또 다른 존재에 대해 물었다.

“12차원에서 추방당해 마계에 투신한 타천사로 알려져 있어요. 보통 타락한 성직자를 숙주로 삼아 활동하고요.”

‘지구의 마인 같은 건가 보군.’

예나의 말에 태광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들…… 미래에 당신과 루시가 낳을 루샬트와 솔로안. 현재 그 아이들이 루시프의 숙주와 빙하의 여제의 본체를 찾고 있어요.”

손자, 손녀에 대해 얘기하는 예나의 얼굴은 기특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들과 딸이라…….’

태광휘는 아직 낳지도 않은 평행 차원의 자식들이 낯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