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191.
예나와 태광휘의 대화는 밤새 이어졌다.
“참! 이노센티아가 루시프와 빙하의 여제의 것이라고 하더군요?”
대화는 흐르고 흘러 이노센티아에 이르렀다.
“아리아 데스모, 아니, 옥타나에게 힘과 지식을 전해 준 것도 마왕 세피로스가 아니었어요. 실제론 빙하의 여제나 루시프에게서 전수받았을 거예요. 세피로스는 중개인에 불과했을 테고요.”
“……이노센티아에 대해 아나?”
그녀의 입에서 이노센티아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광휘가 관심을 가졌다.
“왜 모르겠어요? 설원의 계승식에서 저와 루시의 목숨을 위협했던 대마법진을. 당시엔 그 정체를 몰랐지만, 훗날 게이트가 열리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예나체리나는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말했다.
혼자서 분석한 것도 있었지만, 요정 숲에서 리리아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초대 황후 아낙시아와 옥타나의 관계가 있다.
더불어 루한의 초대 여왕 베아트리체와 아낙시아의 악연 또한 리리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름 열심히 조사했군.”
처음 안 정보들도 있었기에, 그는 눈을 빛내며 예나의 말을 경청했다.
“지식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예나는 자신의 이마를 검지로 두들기면서 피식 웃었다.
“제가 지금 요정 숲에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요정 숲에 쌓인 서적과 지식은 중간계 제일이거든요. 더불어 노화도 최대한 늦출 수 있고.”
“그런데 왜 이 오두막에서 홀로 유배 생활을 하는 건데?”
“이 오두막 생활은 차별이나 박해 같은 게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명상이 필요해서 따로 요청한 거예요. 머릿속에 넣은 지식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거든요.”
태광휘가 오해를 한 것 같아 예나가 급히 해명했다.
그 해명을 끝으로.
“…….”
“…….”
톱니처럼 이어 돌아가던 둘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
딱히 이유 있는 침묵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대화하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해지는 그런 순간이 이 오두막에도 찾아왔을 뿐이다.
작은 침묵, 그사이를 이용해 두 사람은 다 식은 차를 각자 입에 댔다.
“그런데요, 태광휘.”
미지근해진 차로 입술을 축인 예나는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그런데 대화를 이은 그녀의 얼굴은 고민 상담을 하러 온 사람처럼 뭔가 불안해 보였다.
“어쩌면…… 빙하의 여제와 루한의 초대 여왕님이 깊은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예나체리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백하듯 말했다.
“아낙시아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옥타나……. 차라리 계속해서 몰랐다면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랬다면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적의 이간질 정도로 믿었을 텐데…….”
루한의 초대 여왕의 이름과 이능을 흉내 내는 빙하의 여제.
애써 아니라고 부정했었다.
빙하의 여제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데는 가증스러운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륙에서 루한의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침략자의 수작으로 여겼다.
하지만. 요정 숲에서 지식을 쌓을수록 의혹은 점점 짙어져만 간다.
애써 마음 구석에 숨겼던 불안함.
“태광휘, 저는 너무 불안해요.”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눈앞의 남성을 바라보았다.
“뭐가 불안하지?”
루카스가 죽고 지금까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들.
“그냥 모든 것이요. 이 세계의 미래는 물론, 딸과 사위도 걱정이에요. 어린 나이에 위험한 임무를 수행 중인 손주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매일 마음을 졸여요.”
그랬던 것들이 눈앞의 남자를 만나자 참을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의지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빙하의 여제, 그녀가 만약 루한의 초대 여왕이 맞다면…… 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왕실의 시조가 마계에 있는 타천사라니! 고결한 루한의 정통성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몰라요.”
대륙 전체가 손가락질할 것이다. 자신은 상관없다. 다만 사랑하는 딸과 손주들이 문제다. 후손들이 마족의 피가 흐른다며 배척당할 것이다.
“…….”
그런 예나의 고백에 태광휘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지구에도 빙하의 여제가 있었지.”
태광휘는 그런 예나체리나를 보면서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냉기 원소술을 발휘하던 헌터가 있었다.
누구보다 든든했던 동료였고, 그랬던 만큼 배신의 상처는 깊었다. 그녀는 마왕군의 사천왕 중에 제일 큰 위협이 되었다.
베아트리체가 배신했을 때, 특히나 박소영을 죽였을 때는 태광휘 또한 큰 충격을 받았다. 분노했었다.
당시에는 왜 그녀가 갑자기 배신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빙하의 여제는 처음부터 배신할 작정으로 접근해 온 것 같았다.
추격에 추격을 했고, 마침내 베아트리체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쥴리아의 전생인 아스트라가 죽었었다.
“…….”
태광휘는 어느새 구석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쥴리아를 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다시 예나에게 향했다.
“하지만 예나체리나, 그대도 알 텐데? 빙하의 여제가 사용하는 설원과 루한의 여왕들이 사용하는 설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지구에서 베아트리체를 죽일 때, 정확히는 빙하의 여제가 아스트라를 꺾을 당시, 베아트리체는 설원이 아닌 전혀 다른 이능을 펼쳤다.
비로소 그제야 태광휘는 베아트리체의 본질을 보았다.
베아트리체의 냉기는 겉으로 보이는 위장이었을 뿐.
‘나와 같은 빛이었지.’
그녀의 본질은 ‘빛’이었다. 그것도 태광휘와 너무나 똑같은.
그래서 그는 루한의 여왕들을 지구의 베아트리체와 연결하지 않았다.
직접 예나와 루시의 냉기를 느꼈을 때, 태광휘는 오히려 속으로 안도했다.
그들의 냉기에는 빙하의 여제에게서 느낀 ‘이질감’이 없었기에.
“빙하의 여제와 루한의 초대 여왕은 전혀 다른 존재야. 그녀의 본질은 오히려 빛에 가까워. 빙하의 여제의 분신을 직접 소멸시킨 내가 보증해. 오히려…….”
태광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오히려 제국 황실과 더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것도 상관없지. 황실을 끌어들이면 같은 빛과 신성을 사용하는 교국의 성자들도 딸려 올 테니.”
태광휘가 빙하의 여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전부 말했다.
“하지만 찝찝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오히려 황실과 루한이 둘 다 침략자와 연관 있다고 왜곡될 수 있어요. 설원의 권능이 유독 이노센티아에 기를 못 펴는 이유도 걸리고요.”
그럼에도 예나의 얼굴에는 그늘이 남아 있었다.
태광휘는 그런 예나체리나를 보며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설령 빙하의 여제가 루한의 초대 여왕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마하 대제가 타천사와 관련된 자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
그녀의 눈동자에 물결이 일었다.
“찝찝하더라도 이미 지난 일이야.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빙하의 여제와 루시프를 척살하는 것, 그것뿐이야. 과거는 지금을 이길 수 없고, 지금을 사는 우리는 미래를 결정할 수 있어.”
“…….”
예나는 태광휘의 말을 멍하니 경청했다.
“설령 사실이더라도 무시하면 그만이야. 부인하고 부정해.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 바뀌어.”
태광휘의 금색 눈동자가 예나체리나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을 마쳤다.
“……고마워요.”
예나체리나는 태광휘의 말에 위안이라도 느꼈는지 감사를 표했다.
고민이 풀려서 그럴까?
이후 예나의 얼굴은 맑고 개운해 보였다.
태광휘는 그런 예나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단순히 공부를 하기 위해서 요정 숲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요정 여왕과 따로 하고 있는 게 있나?”
공부를 하겠다는 이유 외에도 그녀가 이곳에 홀로 있는 이유가 더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요정 여왕과 함께 차원을 수호할 방법을 연구 중이에요. 정확히는 이노센티아에 대해서요. 공부를 하는 것은 그 일환 중 하나지요.”
“세계수와 그대가 힘을 합칠 정도로 이노센티아가 위협적인가?”
“이노센티아는 참으로 거슬리는 마법이에요.”
대화의 주제는 다시 이노센티아로 향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설원의 권능이 유독 그 이노센티아 앞에서 기를 못 써요. 또 이노센티아는 세뇌와 현혹에도 효과가 있어요. 인간과 엘프는 물론, 드래고니안 같은 고위종까지 부릴 수 있죠. 저것 때문에 연합군의 결속이 약해졌어요.”
이노센티아에 대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이노센티아는 천계가 기원이지?”
“리리아가 말하길 천계에서도 대천사급들이 사용하던 마법이라 하더군요.”
“루시프와 빙하의 여제가 대천사급 타천사라는 거군.”
“네, 맞아요. 추방당했고 힘과 권능을 빼앗겼어도 그들 또한 지식은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예나체리나는 말을 이었다.
“참고로 이노센티아는 천계의 마법 중에서도 유독 특이하다고 들었어요.”
“어떤 점에서?”
“최근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노센티아는 천계에서 13차원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낸 ‘무기’라고 해요.”
“……13차원?”
차원은 12차원이 끝 아니었나?
태광휘는 뜬금없는 새로운 차원이 튀어나오자 고개를 갸웃했다.
“13차원은…….”
태광휘의 반응을 본 예나가 막 설명하려 할 때였다.
“거기서부턴 내가 말해도 될까?”
끼익.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닫혔던 오두막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현관에 언제 왔는지 모를 엘프 여인이 있었다.
바깥에는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같이 온 수십의 엘븐나이트가 오두막을 포위하듯 서 있었다.
“리리아?”
태광휘는 그 엘프의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
지금까지 구석에서 졸고 있던 쥴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왕님!”
쥴리아는 비록 다른 세계선의 리리아지만 반가움을 표했다.
“역시나 알고 있었구나? 리리아.”
예나체리나는 다소 아쉽다는 반응이었다.
“아쉽네, 내일 아침까지는 내가 독점하려 했는데.”
“후훗, 미안해. 하지만 예나도 알다시피 상황이 여유롭지 않아서 말이야.”
리리아는 은은한 미소로 예나체리나를 대했다.
“안녕? 처음 보면서도 오랜만인 차원의 인연들이여.”
예나와 대화를 나눈 요정 여왕은 이어서 태광휘와 쥴리아에게 인사했다.
리리아는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찬란한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 피부 위의 은은한 빛, 루시와 맞먹는 고결한 아름다움.
장수종인 엘프답게 그녀의 외모는 태광휘의 기억 속의 리리아와 변함없었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 림보 속의 차원 폭풍에서 너를 이쪽으로 부른 것은 나와 세계수의 의도가 있었어.”
리리아는 변하지 않은 목소리와 어투로 사과부터 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함께 있던 동료들은 무사하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함께 무사히 지구라는 세계로 복귀할 수 있을 거야.”
“…….”
그녀의 고백에 태광휘와 쥴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일단 넘어가지.”
살짝 당혹스러우면서도 불쾌했지만 태광휘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13차원이 뭔지 얘기해 봐. 그리고 여기로 나와 쥴리아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도.”
태광휘는 무심한 눈으로 리리아에게 말했다.
“어머~ 고마워라.”
이에 리리아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13차원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야. 무(無)의 공간이면서 혼돈의 공간이지. 무한한 공허와 무한한 추위를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무한의 추위?’
리리아의 말에 태광휘는 본능적으로 루시를 떠올렸다.
“만물의 정보가 무질서하게 쌓인 정보의 무덤이기도 해. 지구식 명칭으론 삼라만상 혹은 아카식 레코드라고도 하지.”
리리아는 태광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가 잠든 곳이야. 나도 세계수도 지금은 딱 그 정도까지만 알아. 그 외의 부분은 지금도 수집 중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레 세 사람이 앉은 식탁으로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