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192.
13차원의 개념에 대해서는 대강 이해했다.
태광휘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옆에 선 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쥴리아를 여기로 부른 이유는?”
이제는 두 번째 궁금증을 풀어야 할 때.
“거래를 하고 싶어서?”
“거래?”
“힘을…… 태광휘, 당신의 힘을 조금 많이 빌려줘.”
은은하게 웃던 리리아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지금 우리 세계가 지구처럼 차원 침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 거야.”
“그래서?”
“태양 황제와 루한의 여왕 그리고 두 쌍둥이가 힘내고 있지만 현상 유지가 한계야.”
“내가 싸움에 참전하길 원하는 건가?”
“비슷해. 당신의 힘이 더해지면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우리 쪽으로 완전히 기울 거야.”
“지구와 이 세계의 시간축은 어떻지?”
“안타깝게도 지구에서 일어난 두 번째 도끼질 때문에 두 차원의 시간이 같아졌어.”
‘도끼질?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예나에게서는 듣지 못했던 지구의 상황을 리리아가 언급하자, 태광휘는 괜히 찝찝해졌다.
“미안하지만 지구의 일이 내겐 더 급해. 그리고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줘.”
“충분히 이해해. 그래서 말인데, 함께 싸워 주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도움을 줬으면 해. 협조해 주면 지구에서 일어난 일도 내가 아는 한에서 전부 말해 줄게.”
“다른 방법? 쌍둥이나 루시, 아니면 또 다른 나를 돕는 건가? 그러고 보니 루나와 로뮤도 있군.”
“아니, 그들과 당신은 가급적 안 만나는 게 나아.”
리리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혹여 세계선의 타임라인에 변수가 생기면 정말 귀찮아지거든? 안 그래도 이번에 쌍둥이들이 친 사고 때문에 심장이 철렁했지 뭐야?”
“리리아! 내 손주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손주 이야기가 나오자 예나가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아! 그건 이따 말해 줄게, 예나. 그리고 두 아이는 무사해.”
리리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짓으로 예나를 달랬다.
그리고 태광휘를 기대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다른 방법이나 말해 봐.”
리리아의 눈빛에 태광휘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대의 힘을 세계수에게 부여해 줘.”
그런 태광휘에게 리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부탁했다.
“힘을?”
“현재 세계수는 우리 차원에 게이트가 더 열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막고 있어. 하지만 슬슬 한계야.”
리리아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힘을 보태 주면 세계수는 기운을 되찾을 거야. 오히려 더 강해질지도? 그렇게만 되면 게이트가 막힐 테고, 고위종 충원이 어려워진 적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얼마나 필요한데?”
그녀의 요청이 들어줄 만하다고 생각한 태광휘는 자세한 부분을 물었다.
“많을수록 좋아!”
리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녹색 눈을 빛내며 외쳤다.
“나라고 무한한 것은 아니야. 그렇게 준 힘을 다시 채우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걱정 마! 회복을 최대한 빠르게 할 수 있는 영약과 열매를 준비했으니까.”
“후, 좋아.”
태광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가를 들어 봐야겠군. 내 힘의 값으로 뭘 줄 거지?”
그렇다고 완전히 결정한 것은 아니다. 대가가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할 생각이다.
“지식과 기술을 줄게. 당신이 마계의 림보에서 구한 투명한 구슬, 그걸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도와줄게.”
“알고 있었군?”
태광휘는 품에서 투명한 구슬을 꺼냈다.
“차원 코어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물건이지. 우리 세계에서는 이걸 게이트 코어라고 불러.”
“게이트 코어?”
“응. 상위 차원의 존재들이 어떻게 자유롭게 하위 차원을 침공하겠어? 바로 이것 때문이지. 우리도 3개 가지고 있어.”
리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태광휘가 가진 것과 똑같이 생긴 구슬을 꺼냈다.
“나머지 둘은 쌍둥이들에게 있어. 이건 만약을 대비해 내가 보관 중이고.”
“어떻게 3개나 가지고 있는 거지?”
지구에서는 태평양 게이트가 터지고서야 처음 알게 된 것이 바로 게이트 코어였다.
“이 녀석은 생성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지구는 오랫동안 마나가 없던 3차원이었잖아? 당연히 지구와 연결된 림보에 생성될 가능성이 희박했지.”
“태평양 게이트급은 되니까 생성되었다는 뜻이군.”
리리아의 설명을 태광휘는 납득했다.
“우리의 게이트 코어를 줄 수는 없어. 하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게이트 코어를 그 회색 마검에 인챈트시켜 줄 수는 있어.”
그년 태광휘의 허리춤에 있는 회색 마검 제노사이드를 가리켰다.
“그것만 있으면 차원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이어서 리리아의 눈이 쥴리아에게 이동했다.
“저 아이가 제법 똘똘하지만~ 지금 우리의 수준으로 게이트 코어를 인챈트하려면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소요될걸?”
“…….”
리리아의 말에 쥴리아가 미간을 구겼다. 사실이긴 하지만 뭔가 자존심이 좀 상했다.
“거래하지.”
리리아의 말을 끝까지 들은 태광휘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바로 하자.”
“지금? 여기서?”
“세계수와 나는 이어져 있어. 언제, 어디서든.”
리리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뻗어 태광휘의 가슴에 올렸다.
번쩍!
그러자 밝은 빛이 오두막 안에서 터져 나왔다.
“!!”
태광휘는 힘이 급격히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온몸이 황금색 빛으로 감싸였고, 힘을 빼앗긴 후유증 때문일까? 태광휘의 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헐, 아빠가!”
“리, 리리아?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쥴리아와 예나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분명 제주도를 구한 것은 루시였다. 부가적으로 박태오가 있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시몬과 유리아 두 집행관과 성녀 아스카 레이나가 마인들의 도시 뉴 시카고를 정화했다.
다시 한번 협회와 협회의 집행관이 세계를 구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언론과 정부 모두가 이 제주 사태의 책임을 협회로 돌리고 있었다.
“제주 사태, 협회는 면죄인가?”
“협회장과 태루시 집행관의 무리한 개입이 제주 참사를 야기했다는 증언 쏟아져”
“충격! 동상으로 사망한 군인이 몬스터에게 죽은 군인보다 다섯 배나 더 많아”
제주도에 열렸던 이상 게이트가 태루시와 박태오의 무리한 개입으로 일어난 사고로 포장되었다.
“성녀와 집행관들이 미국에서 대학살을 벌이다.”
“과연 뉴시카고는 마인에게 넘어간 도시였을까? 도시를 탈출한 생존자들의 증언은 협회 발표와 달랐다.”
“그녀는 과연 지구의 성녀인가? 아니면 피의 성녀인가?”
“부협회장 아스카 레이나, 협회장 박태오와 마찬가지로 부상을 이유로 칩거 중.”
“문유리, 김시오, 두 집행관, 신경질적으로 인터뷰 거절! 대학살에 대한 반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아.”
“협회는 부패하고 타락했다! 협회 내부에서 양심선언 이어져.”
“마인 집단 레드문보다 더한 협회의 잔혹함에 대해”
뉴 시카고 사건 또한 마찬가지.
루시, 박태오, 아스카, 시몬, 유리아.
전 세계가 이 다섯을 마인과 다를 바 없는 학살자라며 맹비난 중이었다.
제주도에서 루시에게 목숨을 구한 생존 장병들이 SNS로 항의했고, 뉴 시카고의 진실을 아는 진짜 뉴 시카고 생존자들이 입을 열었지만 금방 삭제됐다.
사람 셋이 입을 맞추면 없던 호랑이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기업과 정부가 작심하자, 협회는 순식간에 레드문보다 더 사악한 단체가 되어 버렸다.
이에 대한 협회의 대응은 오히려 소극적이었다. 이전과 같은 적극적인 변호도, 대응도 없었다.
실제로 성녀는 뉴 시카고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요양 중이었고, 박태오 또한 가오이에게 당한 부상 때문에 거동이 힘든 상황.
이는 UN 쪽 인사인 마용민 사무국장이 사실상 협회를 장악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 레드문의 짓이에요!”
휴대폰으로 여론을 본 구민주가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
그런 민주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리며 루시는 멍하니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입가에는 다소 멍청해 보이는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유리아는 솔로안이라는 솔라의 아들을 만났다고 했어.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쌍둥이였다고 했지? 나를 도와준 그 여기사가 내 딸이었다는 소리잖아?’
이 작은 복부에서 그토록 늠름한 아이가 태어나다니,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평행 차원일까? 아니면 그때 솔라와 함께 세계수 속에서 구원한 완성된 세계선일까?’
솔라와 함께 세계수 속에서 구원한 묘목의 세계선. 그 세계선의 미래에 대해 루시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날, 순백궁의 빈터에 반투명하게 나타난 솔라가 해 줬던 얘기 중에 그 내용도 있었기 때문.
‘솔라, 솔라시우스!’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던 왼손을 보았다.
왼손에는 태양샘 반지가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약지에 꼭 끼어 있었다.
미래에 태어날 자녀로 멍청한 미소를 짓던 루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태광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태양샘 반지를 보자 마음 한곳에 접어 뒀던 불안이 펴졌기 때문이다.
지금 루시는 온 세상이 자신을 학살자 마녀라고 불러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제주 사태가 끝나고 곧바로 태양샘 반지를 다시 꼈던 순간, 태광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게이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루시는 제일 먼저 태평양 게이트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직접 태평양 한가운데로 공간 이동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론이 안 좋은 때에 직접 움직이는 것은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루시는 시몬에게 전화로 부탁했다.
-협회에 알아본 결과, 평소와 다름없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초상 위성 영상도 평범하고요.
그리고 몇 시간 후, 시몬은 루시에게 자신이 협회를 통해 알아본 바를 전화로 전했다.
“그러니? 안 그래도 인터넷에 있는 자료는 지금 보고 있어.”
루시는 시몬의 전화를 받으면서 모니터를 멍하니 보았다.
“하아…….”
시몬과 통화를 마친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깊게 쉬었고, 이후론 거의 하루 종일 멍하니 태양샘 반지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늦은 밤이 되었을 때.
벌떡!
거의 하루를 솔라를 향한 걱정으로 보낸 그녀가 마침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산만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원 코어! 차원 코어!’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타개할 방법은 차원 코어뿐. 그걸 이용하면 태평양 게이트에 있을 솔라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민주야!”
“네!”
하루 종일 멍하니 있던 고용주가 마침내 움직이려 하자, 구민주는 바로 방에서 나와 루시 앞에 섰다.
“루시 님과 다른 두 집행관님을 음해하는 언론사 리스트를 드릴까요? 제가 다 정리해 놨습니다요!”
마침내 행동에 나선 고용주의 모습에 절로 신이 난 매니저다.
“혹시 이화초상연구소라고 아니? 그 연구소에 구미희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
하지만 이어지는 루시의 물음에 민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네가 인터넷 검색 같은 거에 능하니까 한번 알아보렴. 그 연구소의 위치랑 구미희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리 검색해 봐도 못 찾겠더구나.”
“…….”
민주의 얼굴이 창백해졌음에도 루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온 신경은 태양샘 반지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협회의 도움은 받기 힘들 것 같더구나? 문유리와 김시오가 애써 변론 중인 것 같지만 한계가 명확하고.”
루시는 말을 이었다.
“네가 한번 알아봤으면 한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돈은 다 끌어다 써도 돼. 내 계좌에 있는 돈도 다 써! 무력이 필요하면 같이 움직이자.”
“…….”
구민주는 멍하니 루시의 지시를 듣기만 했다.
‘구미희, 구미희, 그 구미희……?’
그녀의 머릿속에는 구미희라는 이름만이 사납게 메아리쳤다.
“민주야?”
그런 민주의 상태를 마침내 이상하다고 여긴 루시가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네…… 네! 알, 알겠습니다. 한번 알아볼게요. 근데 제가 오늘 좀 피곤해서 일찍 좀 쉬어도 될까요?”
뒤늦게 정신 차린 민주는 횡설수설하듯 답했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역시 구미희라는 여자와 인연이 있었어. 성이 같은 것이 좀 걸렸는데 말이야.’
루시는 그런 민주의 반응에 눈을 빛냈다.
다음 날, 민주는 멍하니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갰다.
밤새 잠을 못 이룬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이 정리한 침구류를 보았다.
일어나자마자 침구류를 정리하는 습관은 군대에서 얻은 습관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 얻은 습관.
어쩌면 트라우마에 가까운 습관.
그러나 폭력이나 폭언과 같은 학대가 아니었다.
“…….”
철저한 무관심, 방치, 방관이라는 트라우마였다.
마치 집 안의 죽어 가는 화초처럼, 대전쟁 시절 민주는 그렇게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