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197화 (197/212)

제197화

#197.

“루시 님, 면목 없습니다.”

루시를 향해 다가온 사람은 어느새 의식을 차린 유리아였다.

“유리아 경, 몸은 어때?”

“제 몸에 있던 알파가 급히 놀라 숨은 것 외에는 멀쩡합니다.”

“다행이네.”

“하지만…… 루시 님을 지키기로 했는데 이를 지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기사도에 충실한 유리아는 당장이라도 할복할 것처럼 침울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대신 민주 좀 어서 봐 줘. 나는 이 여자를 치료할 테니.”

“알겠습니다. 마침 휴대용 포션이 있으니 그거라도 쓰겠습니다.”

“부탁할게. 시몬 경이 일을 끝내고 올 때까지만 응급처치 좀 해 줘.”

루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뻗어 산송장이 된 구미희에게 치료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연구실의 저편을 보았다.

번쩍, 파앗.

빙하의 여제와 시몬이 있는 쪽에서도 나름의 결판이 나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냉기를 펼치며 시몬과 최대한 거리를 벌렸고, 시몬 또한 끝없이 솟아나는 촉수와 제한적인 신성력으로 그런 베아트리체를 상대했다.

‘이노센티아를 왜 안 쓰지?’

루시는 그런 시몬과 베아트리체의 싸움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팽팽한 대결. 어떻게 보면 시몬이 살짝 위다. 그럼에도 빙하의 여제는 냉기 마법만 사용할 뿐이다. 끝내 시몬에게 이노센티아를 펼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못 쓰는 건가?’

루시는 방금까지 의식이 없었다. 그래서 초반 시몬과 베아트리체의 싸움을 못 봤다.

‘이노센티아를 못 쓴다면 지금이 기회라는 것인데!’

그러니 멋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저 싸움에 개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그녀는 둘의 싸움을 바라보면서 답답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도 유리아도, 차원 코어의 후유증으로 각자의 주력을 쓰지 못했다.

‘응급처치를 마치면 상황을 봐서 개입하자. 시몬이 우세한 것 같으니 나랑 유리아가 조금만 거들면 제압할 수 있을 거야!’

대신 루시는 보조 마법으로 저 싸움을 지원할 각을 쟀다.

하지만 그녀가 개입하기 전에 베아트리체 쪽에서 먼저 반응이 있었다.

우우우웅, 파아앗.

베아트리체의 발아래서 익숙한 수식과 배열이 새겨진 마법진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공간 이동!’

혼자서는 싸움이 힘들다고 판단한 베아트리체가 뒤로 몰래 공간 이동 마법을 준비한 모양.

거리를 최대한 벌린 베아트리체는 준비했던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쳤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시는 멍하니 베아트리체가 사라진 허공을 보았다.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구미희에게 치료 마법을 사용하면서.

“어흑…… 아아아악……!”

그런데 갑자기. 루시에게 치료를 받고 있던 구미희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뇌전증 환자처럼 거품을 물더니 몸을 벌떡벌떡 떨었다.

“시몬! 어서 와서 이 여자를……!”

당황한 루시가 급히 치료 전문인 시몬을 불렀다.

“그으으으…….”

하지만 시몬이 다가오기 무섭게 구미희는 숨이 멎고 말았다.

‘이노센티아……?’

숨이 멈춘 구미희의 이마에는 이노센티아의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개성 지하에서 행해지던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실험들.

심지어 협회 집행관을 유인하기 위해 집행관의 매니저까지 납치한 사건.

해당 시설과 일당은 3인의 집행관이 직접 나서서 일망타진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기업과 정부와 레드문이 긴밀한 관계임을 입증하는 증거도 넘쳐났다.

우려와 달리 적들의 증원은 더 오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을 맞이한 것은 긴급 출동한 협회의 치안관들이었다.

개성에서의 일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제주도와 뉴시카고 사태와 마찬가지로 이 일 또한 철저히 왜곡되었다.

지하실에 있던 실험실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시몬이 다시 찾아갔을 땐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가 찍은 증거 영상은 인터넷에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삭제되었다. 잠깐 사이에 퍼진 영상 또한 전문가들에 의해 합성된 영상이라면서 무시되었다.

마용민 사무국장이 지휘하는 협회에서는 이제 대놓고 세 집행관을 적대하고 있었다.

시몬과 유리아가 이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러 박태오와 아스카를 만나러 갔다.

박태오와 성녀를 만나러 간 둘은 간 지 몇 시간도 안 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협회장님과 성녀님이 연락되지 않습니다.”

“두 분이 계신 병원으로 가 봤지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시몬과 유리아는 굳은 얼굴로 비관적인 보고를 루시에게 했다.

“둘이 우릴 배신했을 확률은?”

루시는 거실 TV를 보며 물었다.

“문제의 세 집행관! 개성에서도 학살 자행해!”

“집행관의 면책 특권 당장 폐지해야!”

“그들은 무고한 초상 과학자들이었다.”

“한순간에 사라진 국가의 최고 인재들.”

TV에서는 이제 대놓고 루시와 유리아, 시몬을 마인 취급하고 있었다.

협회에서는 이제 그들을 변호하긴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협회장님과 성녀님의 배신은 아닌 듯 보입니다.”

“두 분은 부상으로 제힘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상태서 구속진에 구속되어 어딘가에 갇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대들과 인연이 있는 협회의 집행관과 치안관은 없나? 하다못해 일반 직원이라도?”

“모두가 저희를 피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이들도 침묵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단 한 명도 응하는 사람이 없고?”

“일부는 협회장님과 성녀님처럼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아마도 구속이 된…….”

“그걸 고려해도 너무할 정도로 고립되었어. 너희 둘이 그동안 구한 사람들의 수를 생각해 봐. 이 여론이 말이 되는지.”

루시가 시몬의 말을 끊었다.

“나야 저지른 일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 하지만 그대들은…….”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몇 년간 이 세계를 위해 땀 흘린 것이 모두 허사였군, 쯧.”

루시의 혀 차는 소리에 시몬과 유리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둘 다 고개를 숙였음에도 허탈한 표정이 숨겨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찌 살아왔는지 대충 보이는군.’

시무룩한 둘을 보며 루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몬과 유리아는 루한에서 온 이방인. 거기다 능력 때문에 늘 모자와 선글라스를 껴야 했고, 사람들과 최대한 거리를 둬야 했다.

둘은 폐쇄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고, 아스카와 박태오는 그런 둘의 처지를 최대한 배려하여 별동대처럼 활동할 수 있게 해 줬다.

이로 인해 전공을 세워도 대부분 두 사람만의 전공이 되었고, 협회 내에서나 협회를 경계하는 외부에서나 둘은 경계의 시선을 받았을 터.

앞에서는 다들 둘에게 협회와 인류의 수호자라면서 치켜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뒤에서는 어떤 말이 오갔을지 안 봐도 뻔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금 이렇게 돌아왔다.

‘안 봐도 비디오야.’

하지만 뻔히 그 이유를 짐작한 루시와 다르게.

“어쩌면 약점이 잡혔거나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친분이 있던 분들에게 다시 가서 양심선언을 부탁해 보겠습니다.”

이 호구력 충만한 두 바보는 여전히 인류애를 버리지 않았다.

“양심선언? 애초에 양심이 있었다면 진즉에 나섰겠지.”

이를 본 루시는 황당함에 둘과 이 주제로 대화하길 포기했다.

“지구인 중에 우리 민주 같은 충신은 정말 손에 꼽는구나.”

여왕의 시선이 TV에서 방으로 향했다.

저 방 안에는 구민주가 요양 중이었다.

각종 치료 마법으로 신체적인 손상은 회복했지만, 문제는 정신과 영혼에 있었다.

비각성자가 되어 정신적으로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았다.

더불어 루시가 흡수한 차원 코어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된 것도 문제였다.

“유리아 경, 그대의 몸 상태는 지금 어떻지?”

“몸은 멀쩡합니다. 다만 알파의 힘은 아직 온전한 사용이 어렵습니다.”

유리아는 루시의 질문에 대답하고는 이내 조심스레 되물었다.

“저…… 루시 님은 괜찮으십니까?”

“설원의 권능 말인가? 좋지 않아.”

“좋지 않다는 뜻은……?”

“나도 경처럼 아직 온전히 펼치지 못해.”

“그렇군요.”

루시의 대답에 유리아는 그늘진 표정을 지었다.

‘이 차원 코어를 완전히 제어한다면 모르겠는데…….’

루시는 자신의 몸속을 관조했다.

처음처럼 차원 코어의 기운을 흘리지는 않았다.

이젠 구민주 같은 비각성자가 바로 옆에 있어도 차원 코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루시의 설원에 있었다. 이전처럼 무한정 쓰기가 힘들었다. 정확히는 출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지금은 태양샘 반지를 빼야만 약하게나마 설원의 권능을 펼칠 수 있어.’

그녀는 왼손 약지에 낀 태양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 난관을 극복한다면 더욱 강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루시는 마냥 절망하지 않았다. 이 차원 코어가 심장에 들러붙은 순간, 그녀는 ‘깨달음’의 벽을 조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나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깨달음의 벽. 이 벽을 넘는다면 이전과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오른다.

문제는 지금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리아도 제힘을 내기 힘들었고, 시몬 정도만이 멀쩡하다.

구민주라는 보호해야 할 존재도 있다.

거기다 지구의 모든 존재가 그녀에게 적대적이다.

“저, 루시 님……. 그런데 협회의 마용민 사무국장이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문득 고민에 잠긴 루시를 향해 시몬이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제안?”

협회 마용민 사무국장의 제안이라는 말에 여왕의 얼굴이 혐오로 일그러졌다.

지금 이 사태를 야기한 가장 큰 원흉이 바로 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국정감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시몬은 잔뜩 구겨진 루시의 얼굴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국정감사?”

“예, 협회와 정부에서도 저희와 싸워 피를 보고 싶은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자들이 저런 뉴스를 낸다고?”

시몬의 말에 루시가 황당한 눈으로 TV를 가리켰다.

“이 나라에서 곧 선거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를 선거용으로 써먹겠다는 건가?”

“그 마용민 사무국장이 말하길, 국감장에서 사과 몇 마디만 해 주고 쓴소리만 참고 들어 주면, 모든 것이 무난하게 끝날 거라고 합니다.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우린 잘못한 게 없어. 없는 잘못을 만든 것도 모자라서 할 이유도 없는 사과를 하라고? 저것들의 권력욕을 위해서? 참나!”

지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루시는 저들의 수법이 대강 보였다. 이방인에 불과한 자신과 유리아, 시몬을 적으로 만들고 두들겨 패는 것으로 시민들에게 대리 만족을 주려는 수작이다.

“선거 외에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번 기회에 협회와 집행관들을 완전히 길들일 작정인 것 같습니다. 협회장과 부협회장이 부재한 상황입니다. 거짓된 명분이지만 어쨌든 이보다 좋은 명분도 없지요.”

그들이라고 하면 기업과 정치인 그리고 길드일 것이다.

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정치인과 기업인들, 협회의 간섭 없이 좀 더 활개 치고 싶은 각성자들.

그들에게 협회는 언제나 족쇄였다. 그리고 이 족쇄를 풀 기회는 좀처럼 흔하지 않았다.

“저들은 루시 님과 솔라시우스 전하의 관계를 잘 모릅니다. 설령 알더라도 믿지 않거나 평가절하 중이지요. 그랬기에 이런 짓을 과감히 하는 것입니다.”

시몬은 한숨을 쉬며 자신이 생각을 이어서 밝혔다.

“설령 솔라시우스 전하가 돌아와도 명분을 들이밀면 됩니다. 저들은 위조한 증거를 내밀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것이고, 이방인인 우리보다 같은 지구인인 자신들의 말을 더 믿어 줄 거라고 확신할 겁니다. ……일단 제 생각은 이 정도입니다.”

루시와 유리아가 말없이 시몬의 말을 경청했다.

‘사람이 착해서 그렇지, 바보는 아니군.’

설명을 들은 루시는 시몬에 대해 다시 평가했다.

그는 인류애가 충만해서 호구처럼 보일 뿐, 그 또한 상대방의 계략을 나름 파악하고 있었다.

‘뭔가 연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런 시몬의 모습이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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