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199.
비상 상황 발생!
안하무인으로 유명한 집행관이라고 해도 이렇게 국감장에서 난리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우우웅.
이럴 때를 대비한 얄팍한 구속진이 국감장 바닥에서 빛났다.
그러나 루시 정도 되는 수준의 초인에겐 무용지물.
그녀의 분노가 빠르게 넓게 국감장을 채웠다.
“경비! 경비!”
당황한 국회의원들이 호들갑 떨면서 경비를 불렀다.
국회의 경비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모두 상급 헌터들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 끝을 보자.”
경비들이 오는 동안에도 루시는 이능을 거두지 않았다.
콰아아아, 콰악.
루시의 힘은 이윽고 눈앞의 의원을 넘어 막 국감장을 탈출하려던 모두에게 뻗었다.
힘과 함께 뻗은 그녀의 왼손에는 태양샘 반지가 없었다.
“커억!”
“살, 살려……!”
모든 국회의원과 직원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그들 중에는 방금까지 개 목걸이 구속구를 흔들어 대던 마용민 사무국장도 포함돼 있었다.
“미, 미쳤어…… 태루시 집행관! 나, 협회 사무국장이야! 진정해, 진정하라고! 지금 이건 전 세계를 적…… 적으로 돌리는…… 끄으으윽!”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 라……. 국감장 직전에는 안 그랬던 것처럼 들리는군? 그때는 뭘 믿고 나한테 개 목걸이를 흔든 거지?”
마용민의 말에 루시의 반응은 냉소 그 자체다.
“이 세계의 법과 공권력을 믿었나?”
루시의 말에 마용민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은 말없이 입김만 내뿜을 뿐이었다.
“네놈들이 이렇게 오만하게 구는 것은 법과 공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겠지?”
벌벌 떠는 그들을 노려보며 여왕은 싸늘하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은 사무국장뿐만 아니라 함께 떨고 있는 국회의원과 카메라 속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
루시가 내뿜는 압박감에 국감장의 그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
국회의원도, 직원도, 기자들도, 그저 입을 꾹 닫고 벌벌 떨었다.
그러다 문득 루시의 시선이 국감장의 카메라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계의 여왕은 자신을 모욕한 지구의 모두에게 차가운 선포를 시작했다.
“만약 나와 시몬, 유리아가 이 세상 모든 공권력보다 강하다면? 그땐 과연 어떻게 될까?”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협박이 되어 국감장 너머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도 법과 공권력이 의미 있을까?”
그 협박이 끝나기 무섭게.
콰앙, 쾅.
경비를 맡은 헌터들이 국감장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하지만.
촤아아앗.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시몬의 촉수들.
“!!”
퍼억, 퍽.
적지 않은 수의 헌터들이 진입하자마자 시몬의 촉수에 급소가 꿰뚫려 즉사했다.
“추, 추워…….”
“이능이…… 이능이 안 움직여!”
살아남은 헌터들도 루시가 펼친 냉기에 힘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빌어먹을! 구속진! 대구속진을 가동해!”
헌터들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필사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보였다.
이후 몇몇 지원계열 헌터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이능을 펼쳤다.
파아아아앗.
그러자 처음 자동 발동됐던 구속진과 차원이 다른, 크고 강력한 구속진이 바닥과 천장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이노센티아가 있군.’
이번에 발동된 대구속진을 본 루시는 속으로 긴장했다.
가뜩이나 제힘도 내지 못하는 상황. 이노센티아가 있으면 훨씬 불리할 터.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노센티아가 날 구속하려 들지 않아?’
이노센티아와 쌍둥이처럼 똑같은 대구속진이 애처롭게 빛났지만, 그 빛은 시몬도, 루시도, 붙잡지 못했다.
“허억!!”
최후의 수단마저 통하지 않자, 저 구석에서 경악으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는 설원을 제한적으로 펼치면서 이유를 생각했다.
‘차원 코어를 흡수해서 그런 걸까?’
당장 짚이는 원인은 단 하나. 바로 차원 코어.
‘그런데 시몬은 뭐지?’
한편으론 이노센티아로부터 자신과 똑같이 멀쩡한 시몬의 상태도 신기했다.
‘일단 나중에.’
그녀는 시몬을 슬쩍 힐끔거리다가 이내 국감장의 벌레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너희는 오늘, 인류 최강의 집행관 셋을 잃었다.”
그리고 차갑게 전직을 선포했다.
“대신 인류 최악의 빌런 셋을 얻었다.”
루시의 눈과 목소리에는 이제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애정도 증오도 없는, 그저 벌레를 짓밟는 대마녀의 무심함만 있을 뿐.
“…….”
시몬 또한 어느새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 던졌다.
촤아아악.
그리고 말없이 양팔의 촉수를 크게 뻗어 괴물이 되기로 선포했다.
본래 국감장에 있던 국회의원들과 마용민 사무국장 그리고 헌터들의 시나리오는 이랬다.
혹여나 저 두 집행관이 반항하면 구속진을 발동한다.
이어서 밖에서 대기하던 상급 헌터들이 떼거리로 달려든다.
마지막으로 상황을 봐서 둘을 죽이거나 구속할 작정이었다.
더불어 이곳에 없는 문유리 집행관에 대한 현상수배도 마쳤다.
제아무리 S급 혹은 EX급에 가까운 괴물들이라도 해도 대구속진의 함정과 다구리에는 버틸 수 없다고 모두가 확신했다.
협회장 박태오도, 성녀 아스카도, 생각이 다른 협회의 일부 헌터들도, 모두 이렇게 제압했기에 누구도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작과 동시에 이 모든 시나리오가 무로 돌아가 버렸다.
엄선되어 배치된 A급에서 S급의 헌터들마저 허무하게 즉사했고, 믿었던 국감장의 대구속진마저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구속진이…… 소용없다고?!”
“말도 안 돼. 저기 있는 헌터들은 전부 A급 이상이라고!”
“괴물…… 괴물이야! 우리는 괴물의 뺨을 때린 거라고!”
이 장소에 있는 모두가 추위와 공포 속에서 절규했다.
“이젠 다 틀렸어. 인류는 이제 끝이야…….”
추위로 굳어 가던 한 의원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리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리고 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모두가 비슷한 심경이었다.
마치 진주만 기습을 한 일본처럼, 그들은 자신이 적대하는 대상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알려 하지 않았으며, 설령 알았어도 애써 무시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업보에 대한 ‘대가’.
“누구나 근사한 계획은 있지요. 처맞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시몬은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했다.
어차피 학살자로 낙인찍힌 몸. 안타까움과 별개로 이 상황에서마저 자비를 보였다간 정말로 무시받을 것 같았다.
한편 루시도 시몬과 비슷한 심경이었다. 그녀도 혐오와 무시보단 두려움과 경외가 더 좋았다.
‘미안해, 솔라.’
학살에 앞서 루시는 속으로 태광휘에게 사죄했다.
어쩌면 태광휘가 지키려고 했던 세계 한 축을 자신이 파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진짜 큰일 날 것 같아.’
루시는 양손을 뻗었다. 비어 있는 왼손 약지가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저것들이 또 반지를 빼게 만들었어! 절대 용서 못 해!’
태양샘 반지를 빼고 온 힘을 다해 설원을 펼쳐야만 이곳의 인간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순식간에 원자 단위까지 얼리지 못했다.
그저 천천히 고통스럽게 얼려 죽이는 것이 최선이다.
아마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펼친 설원에 괴로워만 하다가 시몬이 휘두른 촉수에 숨을 거둘 것이다.
‘벌은 나중에 달게 받을게!’
하지만 오히려 이런 방법이 더 큰 공포심을 유발했다.
솨아아아.
촤아아악, 퍼억.
생방송으로 참혹한 학살이 생중계됐다.
살, 살려 줘어어!
괴물, 괴물이야……! 엄마아아아!
꺄아아아악!
으으으…… 아아아악!
이곳에 있는 방송 카메라는 국감장답게 초상 처리된 초상 카메라였고, 두 집행관에 의해 학살당하는 국회의원과 상급 헌터들의 모습은 여과 없이 세계로 송신되었다.
사상 최악의 빌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깔끔한 호텔 같은 병실.
하지만 실체는 호화로운 감옥.
내부는 급히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그런지 새 페인트 냄새가 강했고, 창문은 전부 철판으로 메워 바깥은 전혀 볼 수 없었으며, 기존에 있던 벽마저 넓게 부숴 두 개의 방을 하나의 방으로 큼지막하게 이은 느낌이 났다.
30평 병실 바닥에는 대놓고 구속진이 뻔뻔하게 새겨져 있었고, 박태오와 아스카가 힘을 펼치려 할 때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목 조르듯 그들의 이능을 졸랐다.
스으으으윽, 피슉, 슈슈슈슉.
그런 밀실 안으로 검은색 그림자 같은 게 스윽 들어오더니 아스카의 품에 쏙! 하고 들어갔다.
“고생했어요, 피스!”
아스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 들어온 피스를 쓰다듬었다.
키이이이이, 끼이이이이.
성녀 아스카의 애완 괴수 피스가 낑낑거리며 밖에서 들고 온 정보를 건넨다.
“태오 짱과 저를 포함해서 총 24명이 이 집에 갇혀 있는 것이에요.”
방금까지 피스와 함께 보았던 것들을 아스카가 힘없는 목소리로 박태오에게 전한다.
“22명이라……. 많은 건가, 적은 건가?”
아스카의 말에 박태오는 씁쓸하게 되물었다.
“적은 거죠! 지금까지 협회에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데…… 흐으으.”
아스카는 신음을 흘리며 몸살 난 사람처럼 침대 위에서 벌벌 떨었다. 이불로 몸을 칭칭 감아 목과 머리만 빼꼼 내민 성녀의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
“몸은 아직도 안 좋은가?”
그런 성녀를 보며 박태오가 걱정스레 물었다.
자신은 강화계라서 부상에서 거의 회복했다. 하지만 아스카는 아직 회복 중인 모양. 하루 중 대부분을 침대에서 잠으로 보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저놈의 구속진 때문에 마냥 좋다고 하긴 무리인 것이에요.”
“그 피스라는 괴수 조종을 자제하는 게 어때? 그거 때문에 더 회복이 더딘 거 같은데?”
추가로 이 구속진 위에서 무리하게 사용 중인 이능이 문제다.
그게 그녀의 회복을 더욱 느리게 만드는 것 같아 박태오는 걱정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인 것이에요. 마지막으로 최대한 멀리 가 보도록 하겠어요!”
박태오의 만류에 아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수고해 주세요, 피스!”
그녀는 눈을 감고 피스를 다시 품에서 꺼냈다.
끼이이이.
피스는 딱 봐도 가기 싫은 티를 냈지만.
“어. 서. 요.”
끼익!!
아스카의 재촉에 쫓겨나듯 집 밖으로 사라졌다.
뉴시카고에서 최고위 마족과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은 아스카와 제주도에서 가오이에게 큰 부상을 입은 박태오는 어떻게 저항할 새도 없이 잡혀 버렸다.
그것도 같은 지구 인류에게 말이다.
서로 견제하고 있었지만, 저들이 이렇게 막장으로 행동할 줄은 박태오도 아스카도 예상치 못했다.
“태광휘가 돌아오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 박태오는 답답했다.
그러면서 피스를 패밀리어처럼 조종 중인 아스카를 보았다.
그녀의 애완 괴수가 이번에는 어떤 소식을 들고 올지 궁금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아스카를 막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아스카가 피스를 조종하면서 했던 말이 맞는지, 이번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가뜩이나 구속진이 거미줄처럼 쳐진 방이다. 괜히 그녀의 몸과 영혼에 큰 부담이 오지는 않을까 박태오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허억!”
불쑥 아스카의 눈이 부릅떠졌다.
덜덜덜덜.
눈을 뜬 그녀가 어느 때보다 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떤다.
“아스카?!”
박태오가 당장이라도 아스카가 있는 침대로 다가갈 준비를 했다.
“피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니요. 너무 중요한 사실이라 동기화를 먼저 끊었어요. 피스는 좀 있으면 올 것이에요.”
“무슨 일이길래?”
“태평양 게이트가…… 태평양 게이트가 사라졌어요!”
아스카는 자신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는 박태오를 향해 급박하게 말했고.
“뭐어?”
아스카의 상태를 걱정하던 박태오는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태평양 게이트가 사라진 지는 좀 된 거 같아요.”
“……!”
“하지만 광휘 오빠와 함께 간 헌터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요.”
“그래서……였군.”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한 박태오였다.
“태광휘는 그럼…… 죽…….”
“아니에요!”
아스카는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박태오의 말을 끊었다.
“저 멍청한 작자들! 광휘 오빠는 그렇게 허무하게 갈 사람이 아닌데! 광휘 오빠와 저는 똑같은 빛의 이능을 가졌어요! 오빠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제가 전혀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에요!”
태광휘의 생존을 확신하는 아스카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그래. 태광휘 그 녀석은 불사신 같은 놈이지.”
박태오는 태광휘의 죽음을 절대 부정하는 아스카를 보며 호응했다. 실제로 성녀인 그녀가 저렇게 부정하자 그 또한 태광휘의 죽음을 더 불신하게 되었다.
“…….”
“…….”
잠시 깊은 침묵이 병실을 스쳤다.
“그나저나…….”
그렇게 5분 정도 흘렀을까? 박태오가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쓸었다.
“유리아와 시몬, 태루시가 걱정이군.”
그는 얼굴 못 본 지 꽤 된, 이방인 집행관 삼총사가 생각났다.
아직 구속되지 않은 듯 보였기에 더 걱정되었다.
“글쎄요? 세 사람을 상대할 인류가 저는 더 걱정되는 것이에요.”
그런 박태오의 걱정에 아스카가 피식 웃는다.
“무슨 소리야?”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이에요. 태루시 집행관은…….”
어느새 피스와의 동기화 후유증에서 벗어났는지 아스카의 숨소리와 떨림이 많이 진정되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것이에요.”
진정된 그녀의 얼굴에 황당함이 이어서 펼쳐졌다.
피스를 통해 얼핏 보았던 바깥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격변을 겪고 있었다.
약 한 달 후.
협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죽은 마용민 사무국장의 감투를 임시로 썼다고 밝힌 협회 직원은 박태오와 아스카 앞에서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었다.
협회는 자신들이 구속한 박태오와 아스카를 포함한 24명의 헌터들에게 도움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