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200화 (200/212)

제200화

#200.

비각성자 시민들은 누구나 각성자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다.

시민들은 고위 각성자들에게 열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추락을 염원했다.

그리고 그런 고위 각성자 중에 가장 상징적인 존재가 바로 집행관이었다.

어느 날, 한 집행관이 세상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비각성자 시민들에게도 이능을 펼쳤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마인과 몬스터를 잡는다고 더 많은 무고한 시민과 군장병을 죽였다고 했다.

고위 각성자, 특히 집행관을 향한 시민들의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정치인과 기업인에게 협회와 집행관은 제일 눈엣가시였다.

집행관의 면책특권은 돈과 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절대 거역할 수 없는 태광휘 체제에 숨죽여 왔었다.

하지만 태평양 게이트로 들어간 태광휘와 핵심 헌터들이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다.

협회의 답답한 규제와 규율은 각성자들에게 언제나 불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싶었다.

그들 또한 태광휘가 만들어 낸 협회와 집행관 체제에 자유를 억눌려 왔었다. 조금이라도 협회의 가이드라인을 넘어서면 마인으로 취급되었고 집행관과 치안관에게 척살당했다.

자발적으로 절제한 것이 아닌 억지로 절제당했던 욕망들이 슬슬 한계점에 도달했다.

협회에 소속된 헌터들 또한 생각하는 바가 각자 달랐다. 일부는 진짜 사명감을 가지고 움직였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사명감을 가진 치안관과 집행관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하나둘씩 유혹에 넘어가거나 부러졌다.

협회와 검룡길드의 고위 헌터들이 태광휘와 함께 태평양 게이트로 들어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사명감 가진 치안관과 집행관은 소수였고, 그들은 하루아침에 비주류가 되었다.

협회장 박태오와 부협회장이자 성녀인 아스카가 있었지만,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포위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레드문의 마인들은 옆에서 부추기고 거들었을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 타락과 파멸을 유도하는 악마처럼, 그저 뒤에서 속삭이고 방법을 알려 줬을 뿐이다.

달콤한 유혹이 눈앞에서 살랑거린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지구의 대기를 데웠다.

그리고 마침내, 방아쇠를 당기는 계기가 발생했다.

바로 태평양 게이트의 소멸.

그리고 태평양 게이트에 들어갔던 태광휘와 고위 헌터들의 미귀환.

이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심리적 안전장치가 해제됐다.

참고 참았던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음을 알리기 위한 의식이 필요했다.

정부와 기업, 헌터가 하나가 되어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쇼케이스를 준비했다.

이 쇼케이스에는 먹음직스러운 제물이 필요했고. 제물 또한 문제없었다.

이계에서 온 각성자들, 당장 없어져도 누구 하나 개의치 않을 존재들.

그들을 마인보다 더 잔혹한 학살자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원래 선동은 70%의 진실에 20%의 과장과 5%의 통제 그리고 마지막 5%의 거짓을 절묘하게 섞는 것이니까.

특히 태루시라는 집행관의 평소 언행이 큰 도움이 되었다.

생각 외로 강한 것이 걸렸지만, 고위 헌터들과 국감장에 준비된 대구속진만 있으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박태오를 비롯한 헌터들도 이렇게 제압했으니까.

쇼케이스의 시작은 서울 국회에서 행해진 국정감사였다.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악명 높은 집행관을 윽박지르고 구속하는 것.

비각성자 시민들에게는 대리 만족을, 기업인과 정치인에겐 옛 시대의 복고를, 각성자들에겐 더 큰 자유를, 마인들에겐 음지에서의 탈출을.

각자가 갈망하는 멋진 신세계가 이 국감장에서 펼쳐질 것이라고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날, 국감장에 있던 모든 국회의원과 상위 헌터가 몰살당했다. 전 세계인이 그 장면을 필터 없이 그대로 시청했다.

세계가 뒤집혔다.

* * *

국감장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학살을 마친 루시와 시몬은 곧바로 평택의 집으로 공간 이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 주위에는 경찰과 헌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유리아가 구민주와 함께 대치 중에 있었고, 이미 유리아는 몇 번의 저격을 맞은 상태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유리아에겐 이득이자, 유리아를 포위했던 이들에겐 재앙이 되었다.

목과 심장에 총알을 맞은 유리아는 잠시나마 빈사 상태에 빠졌고, 이것이 차원 코어로 위축되었던 알파를 깨우는 트리거가 되었다.

본래 죽을 고비를 넘기면 크게 성장한다고 하지 않던가?

유리아를 막고 있던 깨달음의 벽이 이를 계기로 뚫렸다.

루시와 시몬이 막 평택에 있는 집으로 공간 이동했을 때, 유리아의 각성이 시작되었고 혈향이 가득한 안개와 함께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첫날에 경찰과 헌터들이 몰려왔다면, 다음 날에는 군대와 좀 더 높은 등급의 헌터들이 쳐들어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날고 기는 특수부대와 초상부대가 총출동했다.

하지만 유리아의 알파와 시몬의 키메라 마법 앞에선 처참히 무너졌다.

루시는 아직 벽을 깨지 못했기에 필요할 때만 반지를 빼서 돕는 식으로 전투를 지원했다.

그 이후에도 세계 각국의 특수부대가 몇 번 더 쳐들어왔지만 전멸했고 그들의 시체는 시몬의 키메라에 흡수되었고, 이 광경이 기자들에 의해서 실시간으로 세계에 방송되었다.

인류의 공세 웨이브를 디펜스한 루시 일행이었지만, 평택의 집에서는 오래 거주하지 못했다.

제일 먼저 그들의 계좌가 동결되었고, 집의 수도와 전기가 끊겼다. 통신도 각종 방해 전파로 인해 차단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폭격이었다.

피슈우우웅, 퍼어어엉.

늦은 새벽, 루시네 집 지붕으로 정밀 폭격이 한 시간 내내 이어졌다. 공습경보음조차 울리지 않았다.

루시 일행의 보금자리가 있던 집터에는 작은 철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수백 미터 반경과 수십 미터 깊이의 크레이터만 남았을 뿐이다.

폭격을 감지한 루시 일행은 재빨리 공간 도약을 했다.

대마녀의 직감이 이때 빛을 발했다.

불길함을 느낀 루시는 다짜고짜 태양샘 반지를 빼서 설원의 결계를 펼쳤고, 기습적인 폭격에서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에 시몬이 공간 이동을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직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서울 교외였다.

서울은 아직 옛 페허와 재개발이 공존하는 도시였고, 때문에 교외에만 가면 인적이 드물었다.

“이제 어쩌지요?”

“집은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계좌도 전부 막혔습니다. 당장 끼니와 숙박부터가 문젭니다.”

얼굴도 이미 완전히 팔린 상황. 어디서 일도 못 할뿐더러 식당이나 마트, 모텔도 이용할 수 없었다.

변장 마법이 있지만 정부와 협회의 집요한 추적을 생각하면 이 또한 금방 들킬 터.

호기롭게 인류의 공적을 선포하자마자 쭈글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모두가 사면초가의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된 이상,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루시의 현지 시녀장인 구민주가 불쑥 의견을 제시했다.

민주는 국감장에서 일어난 학살을 TV를 통해 보았었다.

‘조졌다! 내가 앓고 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시 님은 왜 저기서 저러고 계시냐고!’

상상을 초월하는 루시의 행동과 선포.

그 직후 집으로 쳐들어오는 경찰 특공대에 민주는 패닉에 빠졌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러다가 나도 인류의 공적이 되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런해야 하나?’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야. 지금 내가 이분들을 손절한다고 해도…… 정부에서는 무슨무슨 법을 엮어서 나를 감옥에 평생 처넣을 게 분명해! 그럴 바엔 차라리! 어차피 버린 신세!’

민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의 운명은 이미 저들과 하나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저렇게 피를 쏟으시는 문유리 님을 두고 어떻게 도망쳐!’

자신을 지키다가 총에 맞는 유리아를 보니 도저히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네가 뭔데 우리 애를 때려!’

“…….”

개성의 이화초상연구소에서 루시가 외쳤던 말이 여전히 민주의 마음속에 맺혀 있었다.

구민주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계좌가 막혀서 돈을 쓰지 못한다고요? 얼굴이 팔려서 돌아다니기 힘들다고요?”

상황을 보는 관점을 뒤집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가 돈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 남들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니까 세상이 달리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은 셈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순순히 돈을 내는 이유는 단순해요. 돈을 안 내고 상품을 가져가면 도둑질이 되고 감옥에 가니까요.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개인은 절대 법과 공권력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구민주는 어떻게 된 것이, 도망자 신세가 된 이후 더 밝고 쾌활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경찰도 군대도 어떻게 하지 못하잖아요?”

“그러고 보니 네 말이 맞구나.”

루시는 민주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유리아와 시몬만이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두 경도 함께하지 않겠나? 어차피 버린 신세 아닌가?”

루시는 황당해 하는 유리아와 시몬에게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상인들이나 일반 시민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너무…… 악당 같아요.”

당연하지만 둘은 거부 반응을 보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일반 시민들에게 죄가 없을까요?”

이에 민주가 시몬과 유리아에게 냉소를 담아 대꾸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인터넷과 커뮤니티에서 선동에 쉽게 휘말리는 대중을 보았다.

익명과 집단이라는 가면 뒤에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정 찝찝하면 차용증이라도 써 주는 것으로 하자꾸나?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자들에 청구하라는 식으로 말이야. 영수증 뒷면에 친필로 써 주는 것이지.”

루시는 끝내 찝찝해 하는 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차용증에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 우리가 청구자로 지목한 정부나 협회, 길드에서 값을 치르지 않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우리가 직접 찾아가 그들을 벌하겠다고.”

차용증에 대해 말한 루시는 이윽고 민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주야, 리스트 혹시 가지고 있니?”

“네! 루시 님과 시몬 님, 유리아 님을 매도했던 작자들을 쫙 정리해 놨습니다. 정부 기관, 기업, 언론사, 길드부터 시작해서 책임져야 할 개인들까지요!”

“좋구나! 차용증에는 그 조직과 책임자의 이름을 돌아가면서 적으면 되겠어. 만약 지급하지 않으면 인터넷에 차용증과 함께 올리라고 해. 찾아가서 참교육해 주자고.”

루시 일행에게 시비를 턴 조직은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혼내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솔라의 세계를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것은 좀 꺼려졌는데, 이렇게 제한적으로 징벌을 내리면 그이도 크게 화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혼을 낸다면? 지구인들에게 충분한 공포와 교훈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솔라가 왔을 때 비교적 멀쩡한 세상을 남겨 줄 수 있었다.

“마석 본위제에 이어 무력 본위제인가요?”

차용증에 대한 루시의 아이디어를 들은 민주가 감격이라도 했는지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차용증은 또 하나의 기축통화가 된 셈이다.

화폐의 가치가 마석에서 세 사람의 무력으로 축을 옮긴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