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203.
태광휘는 시즈의 안장에 앉아 지상을 슬쩍 보았다.
‘무사히 도착했군.’
지상에는 정령술을 펼치는 로뮤와 음영술을 펼치는 루나가 활약 중이다.
‘루한에 먼저 들르길 잘했어.’
저 둘을 보니 든든했다. 예나체리나가 있는 세계에서 일을 마친 태광휘는 곧장 지구로 가지 않았다. 대신 제2의 고향인 루시의 루한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루나와 로뮤를 데리고 지구로 왔다.
하지만 아직 그의 소환은 끝나지 않았다.
태광휘는 태양검을 번쩍 들었다.
번쩍.
제노사이드의 검 손잡이 끝에 달린 투명한 구슬에서 빛이 터졌다.
촤아아아.
그러자 로뮤와 루나를 소환할 때와 똑같은 게이트가 우후죽순으로 생성됐다.
“우리가 왔다!”
“태평양 게이트를 폐문하고 드디어 돌아왔도다!”
“와, 이 공기! 저 푸른 하늘! 나, 눈물 나려고 해.”
게이트가 열리고 그와 함께 태평양 게이트로 향했던 헌터들이 마침내 지구로 발을 디뎠다.
“워메, 시X레!? 저게 뭐시여!”
그리고 그렇게 도달한 그들 눈에 보인 것은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협회장과 성녀가 잡혀 있었고, 심지어 그 장소는 태광휘의 자택이다. 그 자택 주위를 마인 놈들이 우르르 진을 치고 있다.
“마인 놈들이 태광휘 님의 집을 점거하다니!”
“태오 형이랑 아스카 쟤는 왜 못난이처럼 잡혀 있냐?”
“게다가 상공에는 저거…… 빙하의 여제 아니야?”
“베아트리체는 신경 끄자! 보니까 광휘 대장이 이미 선수 쳤네! 우린 지상의 쭉정이들만 상대하자고!”
“공격! 협회장님과 성녀님을 구하라!”
고향으로 돌아온 협회와 검룡길드의 헌터들은 회포를 풀 여유도 없이 곧바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헌터들의 소환을 끝낸 태광휘는 빙하의 여제를 노려보았다.
루나가 펼친 음영술에 날아간 루시프라는 타천사도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일단 베아트리체에 집중하기로 한다.
‘역시…….’
그리고 베아트리체를 본 태광휘는 이번에야말로 확신했다.
‘그랬던 건가?’
서리를 휘날리는 눈앞의 적은 인형이었다.
하지만 인형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태광휘는 저 인형의 본질을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다.
과거 처음 빙하의 여제를 상대했을 때에는 워낙 잠깐이라 몰랐지만, 두 번째로 마주하게 된 지금은 확실하다.
‘설원의 권능이 큰 도움이 되었어.’
새삼 저 아래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올려다보고 있는 루시푸르네에게 시선이 간다. 괜한 반가움에 작게 미소가 그려졌다.
“…….”
가면을 쓴 빙하의 여제가 그런 태광휘를 말없이 노려본다.
태광휘는 미소를 거두곤 눈앞의 적을 똑같이 노려보았다.
인형의 눈빛에는 질투와 갈망이 강렬히 담겨 있었다.
우우우웅.
베아트리체의 질시 어린 눈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루시프가 없는 상황을 부담으로 여긴 것일까? 베아트리체의 아바타는 공간 이동을 시도하려 했고, 이를 본 태광휘는 당연하지만 순순히 그녀를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가자, 시즈.”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위해 그는 시즈의 고삐를 당겼다.
키에에에엑.
못 본 사이에 최종형으로 진화한 드레이크 시즈는 포악한 포효를 내질렀고, 기쁜 기색으로 재회한 주인의 명을 따랐다.
고오오오오.
시즈를 타고 베아트리체에게 돌진하는 태광휘의 전신이 빛으로 물든다. 그가 타고 있는 시즈 또한 주인의 이능에 물들더니 똑같이 빛으로 물들었다.
궁극기 태양의 후예가 참으로 오랜만에 지구에서 발현되었고, 그리하여 이를 목도한 모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태광휘……! 태광휘가 돌아왔다아!”
“맙소사…… 그가 돌아왔어! 그가!”
“젠장,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줄을 갈아타야 하나?”
협회와 길드의 헌터들이 순식간에 전의를 잃었다.
번쩍.
하늘에서 태양검의 일격이 터졌다.
끼아아아아악!
베아트리체의 인형이 내지르는 비명이 대기를 울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간발의 차이로 베아트리체의 인형은 공간 이동을 해 버렸다. 긴 비명만 허공에 버려두고서.
* * *
루시는 하늘에서 휘몰아치는 빛의 향연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줄줄 흐르던 눈물은 이제 마르고 닳아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엄마……?”
그런 루시의 뒤에서 참으로 그리웠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쥴리아?”
루시는 화들짝 뒤를 돌았고, 그곳에는 못 본 사이 너무나 성숙해진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이리 온! 안아 보자, 어서.”
루시는 양팔을 벌려 쥴리아를 불렀다.
“응!”
쥴리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후 그녀의 품에 안겼다.
“고생 많았어요, 새언니!”
“노고 많으셨습니다, 여왕 폐하.”
쥴리아를 꼭 껴안은 루시를 향해 루나와 로뮤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 * *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루시프는 도망쳤고, 베아트리체는 두 번째 인형을 잃었다.
이제는 정리의 시간. 업보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순간.
쿠우웅.
붉은색 드레이크의 육중한 몸이 지상으로 착지했다.
루시푸르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즈를 보았다.
드디어! 드디어 만난다. 솔라, 솔라시우스를!
타앗.
태광휘가 안장에서 점프하듯 지상으로 착지했다.
마침내 가까이에서 본 태광휘는 기억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솔라!”
루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태광휘에게 달려들었다.
“루시.”
태광휘는 그런 루시를 양팔을 벌려 환영한다.
하지만 그때.
“……이런. 벌써 힘이?”
태광휘는 갑자기 난감한 얼굴을 했다.
파아아앗.
이어서 그의 몸이 태양의 후예 때처럼 빛으로 물들더니 줄어들기 시작한다.
“솔…… 솔라?!”
갑작스러운 태광휘의 변화에 루시의 얼굴에 경악이 물들었다.
빛무리가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태광휘는 7살 정도의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잠시 이 모습으로 지내게 되었어, 루시.”
경악과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루시를 향해 태광휘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게……?”
루시는 뛰었던 발걸음을 바꾸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과 혼란이 여전히 한가득이다.
“힘을 좀 많이 사용해서 말이야. 후유증이라고 보면 돼.”
그런 루시의 반응이 부담스러웠는지 태광휘가 어색하게 설명한다.
“……!”
한편 루시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의 손을 입으로 가렸다.
처음에는 충격과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태광휘가 이어서 큰 문제 없다고 설명을 잇자,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느낌은 단 하나.
‘귀, 귀여워!!’
세상에 어쩜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을까? 느려졌던 그녀의 걸음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루시. 이건 바로 해결할 수 있어. 해결 방법도 의외로 가까이 있고.”
어린 소년이 된 태광휘는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애늙은이 같은 말투를 했다.
‘바로 해결 안 하고 좀 더 저 모습으로 있는 것도 괜찮은데…….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언밸런스가 이상하게 귀여움을 더 자극한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구의 꼴이 내 기억과 많이 다른 거 같……!”
덥석!
태광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솔라아아아아!”
“읍읍…… 읍읍!!”
결국 참지 못한 루시가 태광휘를 꼭 껴안았기 때문이다.
태광휘는 루시의 가슴팍에 얼굴을 강제로 묻은 상태가 되었다.
그녀에게 들어 올려져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광휘의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고통스러워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솔라시우스 전하는?”
좀 떨어진 곳에서 그런 루시와 태광휘를 보던 유리아가 물었다.
마침내 태광휘를 다시 보았고, 이어서 루시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본 감정은 유리아에게 결코 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순식간에 아이가 되어 버린 태광휘의 모습에 씁쓸함을 되새길 여유를 느끼지 못했다는 정도.
“으음…… 일단은 태평양 게이트에서 힘을 너무 많이 썼다는 정도로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유리아의 질문에 쥴리아가 대표로 답했다.
‘완성된 세계선 이야기는 복잡하니까 빼자. 대외적으론 태평양 게이트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고 알리는 게 단순하고 좋으니.’
쥴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어서 유리아 뒤에 선 시몬 또한 유심히 보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쥴리아 양.”
“변경백에서 속죄행을 가기 전에 본 이후 처음이군요?”
“정확히는 마왕 세피로스와 싸울 때 잠깐 보긴 했었지요.”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그땐 다들 경황이 없었으니, 하하하하.”
셋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흐음…….’
인사를 나누면서도 쥴리아는 유리아와 시몬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태광휘와 쥴리아가 지구에 없던 사이에 쑥 하고 등장한 두 사람이다.
물론 안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친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그저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알았던 사이. 그래서 쥴리아는 둘의 존재가 어색하면서도 의문스러웠다.
‘지금은 둘보다 저쪽이 더 중요하지.’
시몬과 유리아에게 향했던 쥴리아의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어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제 막 구출되어 족쇄를 벗어 던진 박태오와 아스카가 있었다.
“쥴리아!”
“두 집행관분들도 참으로 오랜만인 것이에요.”
박태오와 아스카가 쥴리아와 두 집행관을 보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협회장님,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오랜만이에요. 태오 아저씨, 아스카 언니!”
“정말 고맙군. 두 집행관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좀 더 일찍 오지 못해서 미안할 뿐인걸요?”
다섯 사람은 재회의 기쁨을 짧게 나눴다.
그렇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는 중에.
“아스카 언니? 좀 편찮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쥴리아가 문득 아스카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더 안색이 창백한 것 같은데 무슨 문제 있는 거야?”
쥴리아의 말에 박태오도 걱정스레 아스카에게 물었다.
“제가 협회장님처럼 강철 몸인 줄 아시나요? 방금 제물로 있다가 막 풀려나서 그런 것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박태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자신의 생명력이 뛰어나긴 하다. 하지만 함께 있던 22명의 헌터들도 아스카처럼 힘겨워 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아스카는 성녀다. 치유력과 재생력이 박태오를 능가하는데…….
“어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의문과 별개로 박태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스카를 보았다.
“아무래도 타천사 루시프와 성녀인 저의 기운이 서로 상극인 것 같아요.”
박태오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아스카는 자신의 추측을 말하면서 애써 미소 지었다.
“치료를 당장 받을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에요! 이래 봬도 성녀라고요. 천천히 치유가 되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영웅의 귀환을 환영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에요!”
아스카는 그렇게 말하더니 태광휘가 있는 쪽을 뚫어져라 보았다.
“태광휘가 왔구나…….”
박태오가 아스카를 따라 시선을 돌리며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렇게 멍하니 태광휘와 루시를 보고 있는데.
“아아악! 저 얼음 마녀! 그 정도면 된 거 아닌가요? 구출해 준 감사의 대가는 이미 한참을 초월한 것이에요! 어서 광휘 오빠를 놔주세요!”
루시가 태광휘를 꼭 껴안고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자, 결국 참지 못한 아스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한다.
“광휘는 괜찮은 거니? 듣자 하니 태평양 게이트를 닫는 과정에서 저렇게 되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발광하는 아스카를 무시한 박태오는 어린아이가 된 태광휘의 상태에 대해 쥴리아에게 물었다.
“네, 걱정 안 해도 돼요. 힘이야 금방 회복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박태오의 물음에 쥴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아스카를 길게 응시했다.
키이이잇!
쥴리아의 눈빛에 아스카의 애완 괴수 피스가 흠칫한다.
“쥴리아는 우리 피스가 궁금한 것인가요?”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인지한 모양인지, 발광하던 아스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피스를 쓰다듬는다. 마치 애완동물을 자랑하는 뉘앙스다.
성녀의 맑은 미소를 보면서, 쥴리아는 이제 애완 괴수 피스보다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
“…….”
쥴리아와 아스카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이 흐르기 시작한다.
“어…… 저기? 둘이 싸우는 건 아니지?”
둘 사이에 낀 박태오가 살짝 당황한 눈치다.
이는 함께 있던 시몬과 유리아도 마찬가지.
그러나 둘의 대치는 처음 잠깐 시작되었다가 이내 끊어졌다.
“태광휘 헌터님! 태광휘 헌터님!”
“저희 얘기 좀 들어 주십시오!”
“저 태루시라는 여자는 아주 위험한 여자입니다!”
“부디 인류를 대신하여 징벌을……!”
전혀 반갑지 않은 불협화음이 태광휘와 루시 쪽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