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205.
저 리리스는 12차원의 관문을 지키는 좌품 천사였어요.
천계의 관문을 지키는 천사 중 하나라는 자부심은 수만 년이 흐르도록 변함없었지요.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
좌품 천사에서 언제 더 높은 천사로 오를 수 있을까?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천계의 높으신 분께서 먼저 다가오셨어요.
바로 천계의 치품 천사 루시프.
‘좌품 천사 리리스, 저와 일 하나 해 보지 않겠어요?’
천계의 다섯뿐인 대천사 중 한 분이 저에게 속삭였지요.
‘당신이 차원 관문을 지키는 계절에 두 존재가 몰래 방문할 겁니다. 그 둘을 통과시켜 주세요.’
대천사님의 은밀한 부탁.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지요.
‘그대도 답답함을 느끼고 있잖아요? 천계는 변해야 해요. 지금의 천계는 잘못돼도 너무 많이 잘못됐으니까요.’
하지만 대천사의 설득은 수백 년간 이어졌고, 점점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하면 당신은 대천사가 될 것입니다. 이 답답한 천계에만 있는 것도 끝이에요. 치품 천사가 되어 온 차원과 우주를 자유로이 누릴 것입니다.’
결국 저는 응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의문입니다. 당시의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어요. 수만 년 동안 굳건했던 내가…… 왜 그때만 그토록 답답함을 느꼈을까요?
* * *
대천사 루시프가 일으킨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습니다.
루시프는 천계의 모든 대천사가 경악할 어떤 일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13차원과 관련된 그 권능은 잘만 하면 천계를 뒤집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찰나의 격차로 실패하고 맙니다.
추가로, 마계의 그림자 군주와 최초의 흡혈귀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천계의 중심부에서 루시프와 함께 말이죠.
저는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들여보낸 존재가 누구였는지를.
루시프와 두 마족 군주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천계는 큰 격변에 휩싸였습니다.
그 격변 속에서 저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모든 신성력을 잃고 하위 차원으로 추락해야 했습니다.
제가 추락한 하위 차원은 마나는 존재하지만 높지 않은 문명을 지닌 세계였습니다. 저는 그 땅에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의 고아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리리스, 당신에게 큰 피해를 주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저는 천사였을 적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대천사의 마지막 권능을 이용해 당신의 기억을 지켜 냈습니다.’
타천사가 되어 천계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루시프가 저에게 남긴 소소한 배상이었지요.
‘저와 뜻을 함께했던 마계의 동지, 그림자 군주와 최초의 흡혈귀 또한 당신처럼 권능을 잃고 하위 차원으로 추락했을 겁니다.’
루시프가 제게 남긴 말은 영혼에 각인되었어요.
‘일단 힘과 권능을 회복하세요. 제가 다시 당신을 찾을 때까지.’
이 말을 끝으로 더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천계에서 추방당했다는 절망과 천계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로움을 동시에 느끼며, 저의 필멸자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전생의 기억, 그것도 천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꽤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제가 태어난 대륙이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평범한 고아 소녀였다면 진즉에 죽거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저는 달랐어요.
혼자서 마법을 깨우치고 세상을 떠돌았지요.
그러고 어느 날, 광명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태양의 힘을 가진 마하와 세계수의 힘을 가진 하이엘프 아낙시아에 대한 소식이었지요.
멀리서 마하 대제와 최초의 황후 아낙시아를 본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태양의 힘과 세계수의 힘은 12차원 신성력이 뿌리에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저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저 둘의 힘을 빼앗자.’
천천히, 그리고 치밀하게, 하나하나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세계수를 설득하여 아낙시아의 힘을 빼앗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애매하네? 하이엘프라서 신성력이 많을 줄 알았더니…… 어떻게 된 게 냉기가 더 많지? 에이션트 엘프라서 그런가?”
하이엘프 아낙시아는 신성력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신 설원의 힘이 이상할 정도로 특출났어요. 좌품 천사였던 제가 보아도 신기할 정도로.
“이 냉기는 씨앗이야. 대를 이어 가다 보면 뭔가 굉장한 열매를 맺게 될 것 같아.”
저는 아낙시아의 냉기가 지닌 잠재력을 알아보았고, 이를 키우기로 결심했답니다.
아낙시아의 힘과 권능을 빼앗았다면 이제는 마하의 차례.
제일 먼저 마하에서 루한으로 이름을 바꾼 그와 결혼했습니다. 대륙 북쪽에 루한이라는 왕국도 세웠고요. 필멸자로 해 볼 수 있는 놀이는 다 해 본 것 같네요.
태양의 힘을 얻기 위해 수도 없이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지요.
아낙시아의 냉기를 이어 갈 후손을 낳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마하의 힘을 손에 넣어 천사로 복귀하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마하의 힘은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12차원에서 추방당하면서 알게 모르게 받은 제약 때문인지, 아니면 아낙시아의 냉기로 인한 거부 반응인지 명확하지 않아요.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릅니다.
아낙시아를 배신한 이후, 마하는 사실상 폐인이 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저는 폐인이 된 마하의 몸을 죽기 직전 상태에 봉인하였고, 그의 영혼에 실린 힘을 흡수하기 위해 별별 짓을 다 했습니다.
조심스레 인근 차원을 돌아다니며 여러 재료와 생명체를 수집했고, 그렇게 수집한 것들로 아티팩트들을 만들었지요.
‘윈테이라’와 ‘태양샘 반지’가 그때 만든 대표적인 아티팩트였습니다.
천사가 되기 위한 제 집념과 노력은 엄청났습니다.
한편으로는 천계에 있었다면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을 삶의 역동을 느꼈습니다.
필멸자의 삶은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지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필멸자로 태어난 저의 수명은 점점 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법의 힘으로 억지로 늘리던 것도 이젠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번에 죽게 되면 다음에 태어날 때 기억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초조해져 갔습니다.
* * *
루한의 순백궁 깊숙한 곳.
얼음으로 된 푸른 석판 위에 백금발과 금안을 한 늙은 남성이 누워 있네요. 얼굴에는 어떤 삶에 대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 공허만이 떠다니고 있었어요. 마치 산송장 같은 몰골.
“후, 이제 진짜로 보내 줄게요, 루한.”
그런 남자 앞에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한 제가 푸른색 마검을 들고 섰어요. 인신 공양을 하는 제사장처럼 괜히 가슴이 요동칩니다.
푸른색 마검 윈테이라를 쥔 저의 왼손 검지와 약지에는 태양샘 반지가 껴 있었어요.
푸욱.
그 상태로 저는 남편의 심장을 찔렀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파아아앗.
마하의 몸에서 눈부신 빛과 열이 터졌어요!
그의 몸과 영혼에 깃들어 있던 신성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좋아! 드디어!’
이를 본 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어요.
저와 마하 사이에서는 이미 자식을 보았고 그 아이에게 설원의 계승까지 마쳤습니다.
하지만 자식에게 전한 설원의 권능 중 일부는 아직 제 영혼에 남아 있지요.
딸에게 전수한 설원의 권능은 씨앗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 씨앗이 제일 중요한 근본이긴 하죠.
하지만 저 씨앗이 대를 이어 자라려면 꽤 긴 시간이 될 터.
아낙시아와 제가 평생에 걸쳐 모은 설원의 힘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사용할 뿐이에요.
파종도 완료했겠다, 걱정 없는 마음으로 저는 부디 마지막이었으면 싶은 시도를 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진 순조로운 것 같아요.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굳어져 가네요.
마지막 한 줌, 비록 한 줌이지만 태양의 정수인 그 힘이 끝내 오려 하지 않아요! 빌어먹을!
“……리체”
그때 빛에 물들어 있던 마하가 입을 열어 저를 불러요.
“!!”
산송장이었던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저는 화들짝 놀랐어요.
“……이……리……로.”
그는 힘겹게 손짓했고, 저는 홀리듯 그의 입가로 얼굴을 가까이 댔어요.
“이렇……게.”
덥석.
마하는 가까이 다가온 제 입을 향해 빛에 물든 자신의 입을 댔어요. 이 나이에 기습 키스라니!
“!!”
황혼의 로맨스에 우주가 감격이라도 한 것일까요?
마침내! 마지막 태양의 힘까지 저는 흡수할 수 있었어요.
마하는 매우 평화로운 얼굴로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고, 저는 마침내 손에 넣은 신성력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요.
서로가 만족하는 결과, 해피엔드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좋게 좋게 매듭지어지면 좋으련만.
꺄아아아아악.
이윽고 견딜 수 없는 격렬한 뜨거움에 저는 영혼의 비명을 질러야만 했어요.
영혼이! 저의 영혼이! 이대로 더 있다간 폭발할 것 같았어요.
일단 급히 태양샘 반지에 태양의 힘 중 일부를 이동시켰어요.
“하아…… 하아…… 하아…….”
터질 것 같았던 영혼이 간신히 진정되었지요.
“이걸 이대로 두면……!”
저는 얼빠진 눈으로 두 태양샘 반지를 노려보았어요.
급히 손가락에서 빼고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지만 여전히 뜨거워요.
“설원의 가호가 이상해질 거야!”
필멸자의 삶 중에 세운 왕국 루한에 나름 애착이 있었고, 이 두 반지 때문에 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파아앗!
그리하여 저는 루한 최남단에 있는 또 다른 마녀 공방으로 공간 이동을 했습니다.
볼카라는 땅 깊은 지하에 위치한 실험실은 특별합니다.
그곳에는 그동안 제가 인근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것들이 봉인돼 있었지요.
태양샘 반지를 하나로 합친 후 이 볼카 공방에 봉인하기로 했어요.
“발록,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고대 악마 중 한 놈을 깨워 이 봉인을 지키도록 명했어요.
그리고 다시 룰루랄라, 루한으로 가기 위해 공간 이동을 시도했어요.
우우우우웅, 파앗.
“?!”
그리고 저는 보고 말았어요.
하나로 합쳐진 태양샘 반지가 공간 이동 직전에 빛을 뿜어내는 것을.
그 빛은 마치 마하의 원한이 담긴 빛 같았어요.
* * *
공간 이동과 동시에 빛을 내뿜던 태양샘 반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지요.
제 육신은 루한이 아닌, 알 수 없는 림보로 이동해 버렸고, 가뜩이나 나약해져 있던 육신은 결국 그 과정에서 소멸되었어요.
저는 영혼만 남은 상태로 엉뚱한 차원으로 불시착해 버렸고, 그 차원의 이름이 ‘지구’라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지요.
천만다행히도, 지구에 떨어진 제 영혼은 기억도 잃지 않았고 10차원의 연옥으로도 끌려가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힘이…… 힘이 있어?!’
제 영혼에 설원의 냉기와 태양의 신성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어요.
‘위험해……. 위험해!’
문제는 이 두 힘이 너무나 상극이라는 것.
저는 급히 이 힘을 나눠야 했고, 힘을 나누기 위해 적합한 육신을 찾아 헤맸지요.
당시 지구는 막 게이트가 열렸던 대전쟁 초기였어요.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고 영혼이 막 사라진 육신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어요.
저는 일본이라는 섬나라에서 꽤 적합한 막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스카 레이나라는 젊은 여성이었지요. 막 악령 타입 마족에게 영혼이 수확된 불쌍한 아이. 텅 빈 육신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고, 5분만 늦게 발견했다면 몬스터에게 찢겨 먹혔을 거예요.
저는 그 아이의 몸에 태양의 신성력과 제 영혼을 담았어요.
흑발이었던 육신은 태양의 힘에 의해 금발 금안이 되었고 압도적인 신성계 각성자가 되었죠.
문제는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설원의 냉기였어요.
아무리 돌아다녀도 설원을 품을 육신을 찾지 못했어요.
결국 저는 인형술을 활용했어요.
그 인형에 저의 영혼 일부와 설원의 힘을 담았지요.
빙하의 여제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탄생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