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210.
나는 많은 힘과 권능을 잃고 천계에서 쫓겨났다. 대천사의 격이 있었기 때문에 천사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천사지만 천계에 돌아가지 못하는 천사, 타천사가 되었다.
함께 일을 도모했던 그림자 군주와 최초의 흡혈귀 또한 비슷하게 몰락했다. 소멸은 되지 않았다. 우리 같은 고위 차원종의 소멸은 13차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 가담했던 아둔한 천사 리리스는 평범한 영혼으로 강등되었고 하위 차원으로 강제 전생되었다.
리리스가 어느 차원으로 떨어졌는지는 모른다.
그저 내 마지막 대천사의 권능으로 기억은 잃지 않게 배려는 해 줬다.
이후 멍하니 무수한 차원을 떠돌아다녔다.
떠돌면서 열쇠의 씨앗을 품은 필멸자를 찾아다녔다.
차원을 떠돌면서 이노센티아를 필멸자들에게 전수했다. 열쇠를 품은 필멸자의 발생 확률을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한 소소한 수작이었다.
주인 없는 세계의 차원 코어를 구하면 원하는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다고 타천사의 이름으로 속삭이기도 했다.
“타천사 양반, 아주 재밌는 일을 벌이시더군?”
이런 나의 움직임은 11차원의 마왕 세피로스의 관심까지 끌었다.
“주인 없는 세계의 차원 코어라. 그런 게 존재하나? 자연적으로? 그냥 침략해서 빼앗아 버리면 되지 않나?”
세피로스의 말에 나는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 하지만 이용 못 할 놈은 아니지. 무수한 차원에 침략의 촉수를 내민 마왕군이라면 분명 내 과업에 도움이 될 터.
“찾기만 하면 마계는 더 이상 천계의 아래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 그림자 군주와 알파도 그거 때문에 댁과 힘을 합친 건가?”
“실패했지만요.”
“크크크크큭! 나는 실패 안 해.”
그날 이후 나는 마왕 세피로스와 함께 차원을 돌아다녔고, 무수한 차원에 타천사 루시프라는 이름이 퍼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 찾은 거 같은데?”
세피로스의 마왕군이 지구라는 차원을 발견했다.
지구의 1차 개문 사태는 이렇게 발생했다.
지구의 발견은 행운의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나는 뜻밖의 발견을 하나 더 하게 되었다.
내가 방문했던 몇몇 차원에서 빙하의 여제라는 이름의 마녀가 출몰했다는 보고가 들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 빙하의 여제를 본 나는 전율을 느꼈다.
‘13차원! 저 설원에 미약하지만 13차원의 냄새가 나!’
오직 나만이 발견했고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냄새! 그 냄새를 아주 미약하게나마 풍기는 존재를 찾았다.
미친 듯이 빙하의 여제를 추적했다.
알고 보니 저 마녀는 인형이었고, 그 인형의 주인은 바로…….
‘리리스!’
천계에서 내게 이용당한 아둔한 천사, 리리스였다.
‘심지어 지구에 있다니!’
심지어 리리스는 지구에 있었다. 외모는 필멸자의 육신에 갇혀 있지만 영혼만은 리리스가 분명하다.
‘리리스한테 어떻게 13차원의 냄새가?!’
어디서 묻혀 온 것인지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 13차원의 냄새였다. 내가 천상에서 이노센티아를 통해 슬쩍 엿보았던 무한한 공허의 냄새.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나 이 냄새는 리리스와 그녀의 인형이 직접 내뿜는 냄새가 아니었다. 어딘 가에서 묻혀 온 냄새. 그리고 그 냄새의 기원을 얼마 후 알게 되었다.
루한의 여왕이라는 필멸자 혈통에게서 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대를 이어 갈수록 진해졌고, 이대로 몇 대만 더 이어 가면 무르익을 것 같았다.
문제는…….
천계에서도 이런 나의 움직임을 눈치챘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천계는 내가 천상에서 이노센티아를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놈들은 본능적으로 내가 뭘 꾸미는지 불안해했고, 오래전부터 나를 감시하고 구속하는 존재를 내 영혼에 심어 놓았다.
그 녀석을 떼어 내야 한다.
동시에 열쇠의 완성을 앞당겨야 한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리리스.”
그래서 리리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당신과 인연을 맺고 있는 태광휘는 지구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아둔한 이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쉽게 꼬드길 수 있다.
“그를 없애야 합니다. 그가 지구에 없어야만 지구의 차원 코어를 찾을 수 있어요. 당신이 제격이겠군요. 태광휘를 흡수하세요.”
그녀의 욕망만 잘 알아차리고.
“아! 이걸 보시면 방법이 생각날 겁니다.”
이를 조금만 자극하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리리스, 인형술로 참 재미있는 일을 벌이셨더군요? 금제에 있는 주술의 정체는 이노센티아입니다. 제가 천계에서 만들었던 주술이지요. 협조를 부탁하는 의미로 이것을 전수해 드리지요.”
나를 감시하는 천계의 족쇄를 피해서, 리리스는 내 훌륭한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나라고 지시만 할 수는 없다.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사안도 존재한다.
‘과연 운명은 운명인가?’
루한에는 그림자 군주의 핵과 최초의 흡혈귀 알파가 있었다.
너무나 비참한 모습으로 있어서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했다.
나는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흡수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내 모든 것을 이 루한에 집중하겠다. 이 루한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시간선과 세계선에 내 분신을 넣겠어!’
다른 차원에서 했던 것처럼 성직자를 내 아바타로 썼다.
무수한 차원에서 시몬이라는 성직자는 알파와 그림자 핵 그리고 키메라 마법을 품은 존재로 활약했다.
리리스는 의도대로 충분히 움직여 줬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안 돼!! 솔라, 솔라시우스!!”
‘이번에도 실팬가?’
“흐으윽! 솔라!!”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아아아아악!!”
이로써 또 하나의 13차원 열쇠가 망가졌다.
지구의 개념으로는 강화 실패인 것이다.
열쇠의 완성을 앞당기기 위해서 이노센티아를 이용해 두들기다가 결국 부서져 버렸다.
이윽고 세계는 마왕 세피로스의 아바타에 의해 잿빛으로 변할 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루한의 이전 시간선으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용사! 너는 이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다.
“?!”
뜬금없는 마왕의 외침이 들렸다.
무수한 엔딩을 보았지만 이 대사는 처음이었다.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지구에서 세피로스의 아바타가 소멸했다고?’
그 이변은 지구에서 일어났다.
지구를 침략해 차원 코어를 찾던 마왕군이 전멸했다. 세피로스의 아바타와 그의 사천왕도 죽었다.
치욕적인 아바타의 소멸에 세피로스의 본체는 분함을 느낀 모양. 녀석은 태광휘에게 저주를 걸었고, 태광휘는 저주로 인해 루한으로 강제 소환당헸다.
‘재밌군. 재밌어.’
나는 급히 태광휘가 소환된 루한의 시간선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세피로스를 통해서 베아트리체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 우둔한 아이는 너무 잘해 줬다. 하지만 이 이상 개입하는 것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대 어린 심정으로 태광휘와 루시푸르네를 지켜보았다.
‘여기서 시몬으로 개입하자!’
이 시간선에서도 시몬은 존재한다.
반드시 내가 곁에서 저 둘을 컨트롤해야만 한다.
하지만.
꿈틀!
“!!”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던 내 안의 ‘방해자’가 움직였다. 천계의 대천사들이 내게 채운 수갑 같은 녀석!
놈은 마치 이때를 위해 숨을 참았다는 듯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결국 내게서 시몬을 강탈해 갔다.
* * *
때가 되면 알을 깨고 나오는 아기 새처럼, 나는 인지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루시프!’
절대 저 타천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선 안 된다!
늘 그를 견제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했다.
‘도대체 뭘 노리는 걸까?’
한편으론 놈의 목적이 궁금했다.
놈의 목적은 놈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미친 타천사 놈.’
녀석의 목표를 명확히 알았을 때, 나는 육신이 없었음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에 이어 진지함이 나를 채웠다. 막아야 한다.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큰 변수’가 생긴 세계선에서 나는 움직였다.
루시프 대신, 바로 내가! 시몬이라는 성직자의 몸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가장 이변이 큰 세계선의 시몬을.
처음엔 고통스러웠다. 12차원의 결정체인 나에게 이 무수한 원혼과 마기로 충만한 육체는 끓는 기름 속 같았다.
하지만 견뎌 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위해서.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무너지면 유리아, 이 불쌍한 여인도 위험해진다.
그러니 버텨야 한다.
솔라시우스! 태광휘에게 루시프와 리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 차례 그에게 진실을 말하려 했다.
[절대 안 되지!]
하지만 아직 나와 연결되어 있던 루시프가 그것만큼은 절대적으로 막았다.
나는 육신을 얻었지만, 아직 영혼은 루시프와 이어져 있었기에 완전한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야 녀석을 끝까지 감시할 수 있으니까.
시간은 좀 더 흘러, 태광휘가 쥴리아와 함께 11차원에서 마왕 세피로스 본체와 싸우는 순간이 왔다.
내 눈앞에서 역사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나다.
‘그런데 왜 나는 여기 있는 거지?’
공간 도약 과정에서 루시프가 손을 쓴 모양이다.
나는 림보의 구석에서 태광휘와 세피로스의 결전을 지켜보았다.
‘유리아…….’
옆에는 의식을 잃은 유리아가 있다. 참으로 가여운 여인이다. 정의롭고 순수한 그녀에게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운명이다.
‘막상막하군. 과연 누가 이길까?’
둘의 싸움에는 낄 수 없었다.
지금도 나를 좀먹는 이 육신의 원혼과 마기 때문이다.
저 마왕의 본체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타락할 것이다. 나도 유리아도.
그게 루시프가 노린 것일 테니까.
공간 이동도 지금 당장은 무리다.
최대한 멀리서 싸움을 관망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렇게 11차원에서 버틴 지 얼마나 지났을까?
번쩍!
문득 마계에 게이트가 열리더니, 누군가가 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루시프!’
바로 루시프였다.
녀석은 빛의 속도로 태광휘와 대치 중이던 세피로스를 꿰뚫었다.
[끄아아아아아아!]
세피로스는 거대한 비명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그 폭발 직전에, 태광휘는 쥴리아와 함께 지구로 귀환했다.
“이걸 노린 거였나! 루시프으으으!”
나는 마왕의 폭발에 휘말려야만 했다.
마왕의 폭발은 거대한 마기였다.
그 마기를 뒤집어쓴 나는 버텨야 했다.
거대한 마기와 원혼에서 자아를 유지해야만 한다.
더불어 유리아, 이 가련한 여인도 지켜야 한다.
내 싸움은 지구 시간으로 약 2년간 이어졌다.
나를 파고들던 마기의 방향을 외부로 쏘아내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나와 유리아 안에 가득 뭉쳤던 엄청난 원혼과 마기가 밖으로 향하자, 마왕의 폭발과 합쳐졌다.
-!
다시 한번 거대한 차원 폭발이 일었다.
문제는, 이 차원 폭풍으로 지구에 태평양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루시프의 진짜 목적은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태평양 게이트가 열리면서 지구의 차원 축이 많이 어긋났다.
‘이대로 가면 충돌이야!’
지구와 마계가 곧 충돌한다. 더불어 루한까지 위험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루시프와 나를 잇는 고리가 살짝 약해졌고, 유리아와 나를 잇는 끈 또한 많이 가늘어졌다.
‘태평양 게이트에 태광휘와 쥴리아가 들어왔을 거야!’
이때를 이용해 태광휘에게 얘기해야 한다.
‘차원 코어를 직접 언급할 순 없어.’
루시프와 연결된 고리가 약해졌지만, 전부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힌트! 힌트라도!’
12차원에서 받은 권능을 이용해 쥴리아에게 텔레파시를 쏘았다.
차원 코어를 직접 언급하진 못했지만, 지구와 루한이 연결되어야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혹시 모르니, 루시푸르네와 소통도 할 수 있게 해 주자.’
다른 차원에 있는 둘을 연결하는 것은 한 번 정도지만 가능했다. 왜냐면 둘은 태양샘 반지를 끼고 있었으니까.
이를 매개체로 태평양 게이트에 있는 태광휘와 루한에 있는 루시를 연결해 줬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어!’
나는 시공간이 정지한 결계 속에서 잠들어 있는 유리아를 따듯한 감정으로 본 후, 지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