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211.
내가 선의로 행했던 행동 중 하나가 루시프를 도와준 꼴이 되었다.
‘루시푸르네가 지구에 오다니…….’
괜히 태광휘와 루시를 이어 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할 일이 늘었군.’
지구에서의 내 삶은 줄타기 같았다.
루시프의 속삭임에서 자아를 지키고, 베아트리체의 엉뚱한 짓을 최대한 저지하고, 루시푸르네를 인근에서 보좌했다.
참고로 루시프는 나를 공격하거나 내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녀석이 내 언행에 간섭하는 것처럼, 나도 녀석의 언행에 간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녀석은 행동 지침을 바꾼 모양.
바로 나를 이용해서 지구의 성녀를 견제하는 것으로 말이다.
‘아스카가 딴마음 먹은 것이 한몫했군’
아스카는 차원 코어까지 욕심을 부렸고, 차원 코어를 흡수할 루시를 노렸다.
루시프는 이를 손 안 대고 견제하고 싶었고, 녀석이 보기엔 내가 적임자였나 보다.
나는 최대한 자아를 유지했지만, 종종 루시프의 속삭임 때문에 언행이 이탈하는 경험을 했다.
제주도에서 분명 루시와 함께 붙어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루시프는 루시와 차원 코어가 자연스레 만나는 것을 유도하려 했다. 하지만 차원 코어에 도끼질을 한 장교와 구미희의 행동으로 망쳐 버렸지.
하지만 결국 개성에서 루시가 차원 코어를 흡수해 버렸다.
최대한 저지하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온전히 내가 아니었다. 반쯤 루시프가 내 언행을 통제했다.
루시프의 개입이 사라진 것을 느낀 순간은, 루시가 차원 코어를 심장에 흡수한 직후였다.
‘루시프와 연결이 끊겼어!’
루시와 차원 코어가 만나자, 나는 생전 처음 홀가분함을 느꼈다.
제일 먼저 루시프와 나의 연결이 끊어졌다.
이어서 밖으로 풍기던 각종 마기도 빠르게 사그라드는 것을 인지했다.
‘유리아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어!’
무엇보다 유리아의 변화가 보는 기쁨을 주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난다면 평범한 일상을 누릴 터.
‘이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존재 인식 후 누린 첫 자유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이 타천사 녀석은 무슨 생각인지 루시가 차원 코어를 흡수했음에도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구를 나에게 맡겨 놓고 다른 차원을 연신 돌아다녔다.
‘루시프! 도대체 뭘 하는 중일까?’
궁금했다. 녀석과 다시 연결하려면 할 수는 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
하지만 다시 연결하는 순간 영원히 놈에게 종속될 것 같은 느낌이 본능으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끝까지 망설였다.
‘이 또한 루시프가 노린 거였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나는 태광휘가 오기 직전까지 루시와 함께 지구를 여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태광휘 집이 수용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최대한 늦게 말한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이 자유와 휴식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어.’
태광휘 집에서 나와 루시를 기다리고 있을 리리스와 루시프를 최대한 늦게 만나고 싶어서였다.
찰나 같았던 휴식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든 순간까지 왔다.
태광휘의 집에서 루시프와 리리스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 모양.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기에 결국 루시와 함께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태광휘 집 옥상에서 빙하의 여제가 무한의 추위를 사용한 것을 본 순간, 나는 후회했다.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조금이라도 일찍 와서 저지했어야 했거늘!
그래도 천만다행히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태광휘가 지구로 귀환해 주었다.
정말…… 다행이다.
지구로 돌아온 태광휘는 나를 의심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루시푸르네도 나를 의심했으니까.
“시몬, 말해.”
“뭘 말입니까?”
“모든 것을.”
어느 날, 태광휘는 나를 따로 불러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입을 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태워 버릴 기세였다.
“…….”
그런 태광휘의 모습에 나는 괜히 기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루시프와 연결되지 않은 지금이 모든 것을 말할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제 변론을 들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들어 봐서 바로 죽일 수도 있어.”
“……긴 얘기가 될 겁니다.”
나는 해방감과 함께 태광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 * *
온통 흑백으로 가득 찬 절망의 세상.
폐허가 된 도시는 개미 한 마리 기어 다니지 않았고, 반쯤 부서진 옥좌에 루시프는 앉아 있었다.
시몬과 똑같은 얼굴을 한 루시프는 이 흑백뿐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을 지녔다.
“결국 놓쳤군. 뭐, 상관없나?”
루시프는 옥좌에 앉아 무료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근 석 달 가까이 술래잡기 놀이를 하던 한 여기사가 비쳤다.
“덕분에 더 큰 물고기가 왔으니.”
결국 청은발의 여기사는 놓쳤다. 금발의 마법사는 제일 먼저 도망쳐 추격조차 못 했지.
하지만 루시프는 시무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이어 놓친 물고기보다 더 큰 물고기가 오기 때문이다.
파아아앗.
루시프의 예상대로 그의 눈앞에 공간 이동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눈부시게 빛났다.
마법진의 빛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놀랍도록 똑같은 주황 머리에 실눈을 한 남성이 나타났다.
“…….”
촤르륵.
시몬은 옥좌에 앉은 루시프를 보자마자, 자신의 키메라 촉수를 날개처럼 펼쳤다.
“…….”
촤아앗.
루시프 또한 옥좌에서 일어나 회색 아우라로 들끓는 날개를 펼쳤다.
키이이이이!
그런 둘 사이에서 마왕 세피로스가 애처롭게 꿈틀거렸다.
“왜 생각이 바뀌었지? 지금의 너라면 분명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루시프는 시몬을 노려보며 물었다.
“외부보단 내부에서 공격하려고. 세피로스도 비슷한 생각이고.”
시몬이 실눈을 부드럽게 뜨며 답한다.
키이이이?!
시몬의 말에 품에 있던 세피로스가 ‘그게 뭔 소리냐?’라며 발악한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해쳤으면, 최소한의 속죄는 하셔야지?”
그런 세피로스에게 시몬이 타이르듯 말했다.
“크흐흐흐흐흐.”
대답을 들은 루시프가 음산하게 웃는다.
“행운을 빌지.”
촤아아악, 슈욱!
그 말을 끝으로 시몬과 세피로스는 루시프가 펼친 그림자에 삼켜졌다.
* * *
시몬이 사라진 태광휘의 집은 혼란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모두가 태광휘에게 어찌 된 것인지 설명해 달라는 듯한 눈치를 보낸다.
“…….”
특히나 집행관 임무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온 유리아가 유독 더 했다.
“루시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어.”
태광휘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문뜩 말했다.
“시몬 경이…… 루시프였던 것입니까?”
원하는 대답이 아닌 엉뚱한 대답을 들은 유리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둘은 달라.”
“그럼 왜 마지막에 그런 말을?”
“정을 주고받기 싫었던 것이지. 이미 늦었음에도.”
유리아의 애절한 눈을 피한 광휘는 작게 혀를 찼다.
“루시프는 그럼 어디에 있는 거야? 가서 시몬을 구하든가 해야지!”
옆에 있던 루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몬은 포기해. 방금 루시프에게 먹혔어. 녀석은 먹히기 직전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고.”
“!!”
이어지는 태광휘의 말에 유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 유리아를 토닥이며 루나가 오라버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응. 전에 대화 나눴던 게 그거야.”
태광휘는 씁쓸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바마마…….”
부상에서 회복한 루샬트가 어색한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참고로 루샬트는 게이트 코어가 파손돼서 한동안 지구에 있어야 했다.
태광휘가 가진 게이트 코어로는 루샬트의 세계를 열지 못했다.
리리아가 다른 시간선의 사람과 자주 만나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제한을 걸어 버렸기 때문이다.
“…….”
루샬트의 물음에 태광휘는 잠시 말이 없었고, 바로 옆에 있는 루시의 손을 잡은 뒤 입을 열었다.
“루시푸르네와 솔라시우스가 죽었던 세계.”
태광휘는 깊은 눈으로 루시를 보았다.
“……!”
루시는 입을 살짝 벌렸다. 태광휘가 말한 세계가 어떤 곳인지 바로 이해한 모양.
회귀 전의 세계, 멸망한 루한에 루시프가 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꼭 우리가 가야 해? 그냥 모른 척하고 그 세계에 있으라고 하면 안 되나?”
태광휘의 얘기를 대강 들은 루나가 문뜩 물었다.
“루시프가 있는 세계는 시간선의 끝자락, 미래시도 보이지 않는 차원이야. 놈은 그곳에서 꾸역꾸역 힘을 기르고 있지.”
루나의 질문에 태광휘는 무심한 눈으로 대답했다.
“시몬을 흡수한 지 얼마 안 된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시몬은 내게 루시프 안에서 마지막 비수가 되겠다고 결의했어.”
모두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 그 세계로 가서 루시프를 없애지 않으면, 녀석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서 지구로 올 거야. 루시의 심장을 노리고.”
“그러면 여왕님은 지구에 모셔 두고 우리끼리만 가는 게 낫지 않나?”
태광휘의 말을 묵묵히 듣던 로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로뮤의 말에 루시가 반발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루시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13차원의 힘이 필요해.”
태광휘는 로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가기 전에.”
태광휘의 말은 끝나지 않고 잔잔하게 이어졌다.
턱.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손을 뻗어 루시의 허리를 감쌌다.
“솔, 솔라?!”
갑작스러운 태광휘의 행동에 루시는 당황했다.
“아까 못 한 거 마저 해야 해.”
태광휘는 타오르는 금색 눈동자로 루시에게 속삭였다.
“!!”
그 속삭임을 들은 루시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엄마! 아빠! 파이팅!!”
둘은 쥴리아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집을 나섰다.
* * *
다음 날 점심때쯤에 태광휘는 녹초가 된 얼굴로, 루시는 윤기가 흐르는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새언니, 몸 상태는 어때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말을 건 것은 루나였다.
“으음? 아직 잘 모르겠는데?”
루나의 물음에 루시는 시치미 떼는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대답과 달리 그녀의 손은 차원 코어가 있는 가슴을 쓸었고, 이어서 아랫배로 손을 옮겼다.
‘어머! 어머!’
‘대박!’
미쳤어! 미쳤어! 꺄아아아아!
이를 본 루나와 구민주가 괜히 입을 틀어막고는 소리 없는 호들갑을 떨었다.
“크흠, 큼!”
저 배 속에 과거의 자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루샬트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집에 돌아온 루시는 자신과 태광휘를 보러 나온 사람들을 훑다가 한 명이 안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그…… 유리아는 괜찮아?”
루시는 괜히 유리아가 걱정됐다.
“시몬 경이 그렇게 된 게 충격이 컸던 모양이에요. 어제부터 방에서 안 나오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루샬트, 솔로안은 어떻게 됐지?”
루나의 대답을 옆에서 듣던 태광휘는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미래의 딸에게 물었다.
“…….”
이에, ‘루샬트는 참 빨리도 물어보시는군요!’라는 말을 형상화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다가 입을 열었다.
“솔로안은 마법사라서 도망에 있어선 저보다 늘 빠릅니다. 아마 잘 도망쳤을 겁니다.”
루샬트의 대답에 태광휘와 루시는 ‘그렇다면 다행이네’라는 말을 형상화한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미래의 조카님?”
그때 루나가 조심스레 루샬트에게 속삭이듯이 말을 걸었다.
“혹시 나는 어떻게 돼? 그…… 로뮤 오빠랑 나보고 고모부, 고모라고 말했잖아?”
질문을 하는 루나의 얼굴이 괜히 붉어진다.
“아직 깊은 관계는 안 하신 건가요?”
“깊, 깊?! 으응…… 엘프라서 그런지 워낙 눈치가 없어서…….”
“텔로나랑 텔노아는 아직이군요.”
“?!”
루샬트의 말에 루나가 눈을 크게 뜬다.
옆에 있던 광휘와 루시도 비슷한 반응.
“네, 고모도 쌍둥이 낳아요. 로나가 여자, 노아가 남자. 요정 여왕께서는 두 아이를 다크엘프라 불렀어요.”
루샬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뮤! 로뮤 오라버니!!”
루나는 재빨리 로뮤가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이후 로뮤와 루나가 있는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태광휘의 집은 방음이 철저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그날 저녁 식사 때에야 두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고, 로뮤와 루나의 안색 또한 낮에 태광휘, 루시와 놀랍도록 비슷했다는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