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212. + 에필로그
시몬은 말했다.
루시프는 스스로 13차원의 존재가 되려는 것 같다고.
그래서 게걸스럽게 무수한 세계선과 시간선에 퍼진 그림자 핵과 알파를 흡수했다고.
이노센티아도 어느 순간부터 덩치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고 했지.
루시의 심장이 차원 코어를 만나 열쇠가 되었음에도 때를 기다린 것은 그런 이유였다.
시몬은 그런 루시프의 의도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장단에 맞춰 줘야 했다.
“준비됐어, 로안.”
시몬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던 태광휘의 귀에 로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을 수도 있어.”
이에 태광휘는 자신의 뒤에 선 이들을 보며 말했다.
쿠오오오오!
그러자 그가 타고 있던 시즈를 시작으로.
“안 가도 죽습니다.”
유리아.
“맞습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야 합니다.”
루샬트.
“미래를 위해서라도 가야 해!”
루나.
“어떻게 보면 소영 언니의 원수잖아! 복수해야 해!”
쥴리아가 답했다.
“루한인들에게 진 빚을 이참에 갚겠어!”
“우오오오오!”
이어서 박태오를 비롯한 지구의 엄선된 헌터들도 함성을 지른다.
“…….”
태광휘는 함께하기로 한 동료들을 말없이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뒤에 딱 붙어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준비됐어, 루시?”
“물론이지, 솔라.”
쪽!
루시는 대답과 동시에 태광휘의 볼에 입을 맞췄다.
촤아아아.
회색 마검 제노사이드에 달린 게이트 코어가 빛나면서 게이트가 열렸고, 준비된 용사들이 전진했다.
* * *
흑백과 재로 가득 찬 세계.
본래라면 마왕의 아바타와 마계의 괴수들이 돌아다녔을 세계.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왕 세피로스가 사실상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자, 이곳에서 마지막 유희를 누리던 아바타 또한 힘을 잃고 부서졌기 때문이다.
암흑제국은 무너졌고. 몬스터와 괴수로 들끓던 대륙은 얼마 후 강림한 루시프와 10마리 드래곤에게 모조리 먹혔다.
시공간이 멈춰 버린 회색 세계.
아직 남아 있는 사람 형상이 셋 있었으니, 하나는 부서진 옛 순백궁의 옥좌에 무심히 앉아 있는 루시프였고, 다른 둘은 세피로스의 검에 꿰뚫린 채 숨이 멎은, 회귀 전의 루시와 솔라의 시체였다.
“악취미군.”
막 게이트를 열고 모습을 드러낸 태광휘는 인상을 찌푸렸다.
회색 세계에 오자마자 본 것이 루시와 솔라의 시체였기 때문이다.
“…….”
루시 또한 회귀 전의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입술을 깨문다.
쿠오오오오오.
두 사람이 탄 시즈가 대신 분노라도 하는지 사납게 포효한다.
뒤이어 게이트 안에서 사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회색으로 도배된 세계와 회귀 전 두 사람의 주검을 보곤 멈칫한다.
하지만 다들 베테랑답게 금방 정신을 차리곤 사주경계에 임했다.
구르르르르.
이윽고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반쯤 무너져 있던 옛 순백궁이 완전히 무너진다. 순백궁의 잔해에 루시와 솔라의 주검이 무덤처럼 묻혔다.
-크우어어어어어어.
이윽고 회색 하늘에서 10마리의 흑염으로 된 섀도 드래곤이 나타났다. 어찌나 큰지 옛 왕도의 하늘을 용 모양 그림자로 가득 채워 버렸다.
그리고 그림자로 가득 찬 검은 하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륵.
하늘이 무너지려 한다.
하늘을 덮은 10마리 그림자 드래곤들이 지상의 피조물들을 깔아뭉개려고 낙하한다.
거대한 위압감에 모두가 굳어 입도 뻥긋 못하고 있을 때.
번쩍, 솨아아아.
폐허 위에서 눈부신 등불이 빛나 솟아날 구멍을 넓히기 시작했다.
“새벽의 등불이야!”
“태광휘! 태광휘!”
태광휘의 이능 중 하나인 새벽의 등불이 그림자로 짓눌릴 세계를 밝혔다.
-크아아아악!
새벽의 등불에 닿자, 그림자 드래곤들이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너도나도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도망친 하늘 위 그림자는 급격히 수축되더니 옥좌에 앉은 루시프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촤앗.
그림자 드래곤들을 흡수한 루시프는 회색 날개를 쫙 펼친 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공격!”
“쏴라!!”
그런 타천사를 향해 숱한 사격이 가해졌다.
지구의 헌터들은 마탄이 장전된 총을 쏘기도 하였고, 로뮤나 루나처럼 마법을 쏘기도 했다.
스스스슷.
루시프는 이러한 공격을 그림자를 펼쳐 손쉽게 막았다. 아니, 흡수했다가 더 정확할 듯싶다.
“음영술의 원조는 나라고!”
이에, 루나가 똑같이 그림자로 공격을 가했다.
[아, 예, 그러시군요?]
루시프는 조소하며 타천사의 신성력을 펼쳐 루나의 음영술을 저지했다.
“하아아압!”
“흐어업!”
루시프가 원거리 공격과 루나의 음영술에 시선이 향한 틈을 타, 유리아와 박태오가 근접 공격을 감행했다.
“시몬 경을 뱉어 내!”
유리아는 알파의 기운이 담긴 혈검을 휘둘렀다.
“어디 이것도 막아 보시지!”
박태오는 특수 제작된 초상 갑옷을 두르고서 아르미달로처럼 점프해 돌진했다.
촤아아아악!
루시프는 그런 둘의 급습을 시선조차 주지 않고 키메라 촉수를 이용해 튕겨 냈다.
[얼어라!]
그러나 루시프를 향한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리아와 박태오를 잡아 삼키려는 촉수를 향해 루시푸르네의 설원이 펼쳐졌다.
꽈드드득.
루시프의 키메라 촉수와 그림자 중 일부가 순식간에 얼었다.
우우우웅.
하지만 루시의 설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루시프는 곧장 이노센티아를 펼쳐 그녀가 펼친 추위를 밀어냈다.
파아아앗!!
심지어 루시의 설원을 밀어내는 것을 넘어, 역으로 그녀에게 공격을 가했다.
“!!”
루시가 펼친 설원의 결계를 뚫고 루시프의 그림자 촉수와 키메라 촉수가 다가온다.
아주 집요할 정도로 그녀의 심장을 노리고.
채애앵!
하지만 투창처럼 날아오던 루시프의 공격은 루샬트의 검격으로 차단됐다.
루시는 자신을 구해 준 루샬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고, 루샬트 또한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로뮤와 헌터들의 각종 원거리 공격.
유리아와 박태오의 근접 공격.
루나와 루시의 광역 공격.
이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루시프는 이 모든 공격을 한 번에 상대했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쿠오오오오!
그때, 루시프가 떠 있는 상공보다 훨씬 위에서 드레이크의 괴성이 울렸다.
생기 하나 없는 흑백 세계의 하늘에 태양이 생성돼 있었고, 그 태양은 이내 거대한 메테오처럼 루시프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궁극기 태양의 후예를 활성화한 태광휘가 똑같이 빛에 물든 시즈를 타고 활강한다.
한 손에는 태양검을, 다른 한 손에는 불살검으로 변한 쥴리아를 들고서.
-!!
거대한 충격파가 루시프와 태광휘 둘 사이에서 터졌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둘이 맞붙은 충격파로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멀리 날아가 버렸다.
[왜 결전 장소를 여기로 골랐는지 아십니까?]
팽팽한 대치 중, 루시프가 태광휘에게 물었다.
“…….”
태광휘는 말없이 루시프를 노려보았다.
[13차원과 가장 비슷한 공허와 허무가 이곳에 있으니까요.]
루시프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실눈을 차갑게 뜨고서 말을 이었다.
[루시푸르네의 무한의 추위가 여기서는 효과가 덜합니다. 성벽 바로 아래 효과와 유사하다랄까?]
촤아앗.
그 말을 끝으로 루시프의 등에서 촉수가 하나 솟았다.
‘루시!’
모두가 충격파로 멀리 날아갔지만, 끝까지 충격파에서 크게 밀려나지 않았던 한 사람, 루시를 향해 쏘아졌다.
촉수는 루시의 심장을 노렸다.
[얼어라!]
이를 루시는 멍하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태광휘와의 관계 덕분인지, 어느 순간 다시 쓸 수 있게 된 설원과 무한의 추위를 펼쳤다.
“하아아앗!”
태광휘 또한 가만있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루시프를 압박했다. 녀석이 루시에게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파아아앗, 파바바밧.
땅은 물론 대기까지 따갑게 진동한다.
셋의 대립은 느리지만 꾸준히 한쪽의 우세로 나아갔다.
[저는 무적입니다. 당신들의 공격은 제가 흡수한 힘의 일부이기도 하지요.]
루시프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루시와 태광휘를 조롱했다.
[즉, 저는 모든 공격에 면역이 있고, 오히려 힘까지 회복한다, 이 말입니다.]
그의 말은 조롱이지만 사실이었기에.
“…….”
“…….”
둘은 굳은 표정으로 이 악물고 버틸 뿐이었다.
카앙!
그때, 루시프의 뒤에서 검격이 일었다.
루시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어느새 밀려났다가 돌아온 유리아와 루샬트가 그를 향해 검기를 날리는 중이었다.
“두 분! 괜찮으십니까?”
루샬트가 검격을 날리면서 루시와 태광휘에게 안부를 물었다.
“시몬 경! 응답하십시오! 시몬!!”
옆에 있던 유리아는 계속해서 시몬을 불렀다.
[둘 사이에 감정이 전혀 없진 않았나 보군?]
그런 유리아를 본 루시프가 피식 웃는다.
스으으으으.
루시프는 유리아와 루샬트를 향해 붉은색 안개를 펼쳤다.
“우욱!”
“크윽!”
강한 혈향이 유리아와 루샬트의 뇌를 아리게 만들었다.
“혈마법은 나도!”
이에, 유리아 또한 알파의 이능을 펼쳤지만.
[어림없습니다. 유리아 당신의 알파는 사실 티끌에 불과하거든? 시몬이 당신을 지키겠다고 알파의 힘 중 대부분을 가져갔었지. 아! 당신은 모르겠군?]
“!!”
루시프의 혈마법이 압도적으로 짙어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그리고 루나, 그쪽도 마찬가지야.]
루시프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획 움직였다.
그의 시야에 막 합류해 음영술을 펼치려던 루나시르네가 담겼다.
[그 로사리오에 있는 그림자 핵 또한 티끌에 불과하지. 진짜 그림자 군주의 권능은 이거야!]
샤아아악.
루시프가 펼친 음영술이 루나를 압박한다.
“!!”
음영술을 펼치기 위해 금발 금안이 된 루나가 루시프의 음영술을 보곤 경악한 눈을 했다.
힘 대 힘의 대치는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태광휘 쪽이 불리했다.
아니, 어쩌면 수적으로도 루시프가 월등히 유리할지도 모른다. 녀석의 몸에는 10마리 드래곤을 비롯한 무수한 시간선의 시몬이 합쳐져 있을 테니.
[이제 슬슬 끝내지요.]
루시프는 슬슬 이 싸움이 무료하다 여겨졌는지, 아니면 고대하던 순간이 무르익었음을 느꼈는지, 처음으로 공격적인 태세를 했다.
쿠우우우웅!
그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그나마 천천히 기울던 승패의 추가 급격히 주저앉기 시작했다.
[심장, 심장을 봅시다!]
루시프는 다시 한번 자신의 온갖 촉수를 뻗었다. 그 촉수의 끝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한곳, 루시푸르네의 심장이다.
“루시!!”
[엄마아!]
“폐하!”
“안 돼에!”
“!!”
태광휘를 비롯해,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루시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로 태광휘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루시의 무한한 추위 또한 마찬가지.
고오오오오!
설원의 결계를 손쉽게 뚫은 루시프의 촉수가 루시의 흉부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
“저깁니다!”
[빛이 있으라!]
[얼어라!]
뒤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
매우 친숙한 두 기운이 밀려와 루시프의 검은 촉수를 밀어냈다.
“솔로안!”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루샬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 어마마마?! 아바마마!!”
이어서 솔로안과 함께 등장한 두 사람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솔로안 양옆에는 루시, 태광휘와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완성된 세계선의 루시푸르네와 솔라시우스!”
둘보다 살짝 나이가 든 다른 세계의 루시푸르네와 솔라시우스였다.
두 배의 태양과 두 배의 설원.
루시와 루시가 시선을 교환했고, 광휘와 솔라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세계의 광휘와 설원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다.
급격히 기울었던 승패의 추가 다시 일자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좋아.
루시프의 몸속에서 루시프와 전혀 다른 느낌의 목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이!
이어서 피스의 소리도 난 것 같았다.
[?!]
이에 루시프는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시몬!’
대치 중이던 태광휘는 루시프의 몸에서 난 목소리의 정체를 눈치챘다.
꿈틀! 촤악!
이어서 루시프의 의지와 상관없다는 듯 그의 옆구리에서 키메라 촉수 하나가 기습적으로 치솟았다.
-지금!
푸욱!
엄청난 속도로 루시에게 쏘아지더니,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시몬의 것으로 추정된 촉수는 무한의 추위도 태양의 이능도 설원의 결계도 그대로 통과했다.
“……!!”
루시프도 아닌 시몬의 배신 행위.
이를 본 태광휘와 쥴리아, 루나, 유리아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을 했다.
“?!”
“!!”
마찬가지로 완성된 세계선에서 온 루시푸르네와 솔라시우스, 쌍둥이 또한 경악한 모습.
“…….”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몬에 의해 심장이 뚫린 루시만큼은 표정이 평온하다.
찰나였지만 영원과도 같았던 순간이 지나고.
푸슈욱!
루시의 심장을 꿰뚫었던 촉수가 뽑혔다.
촉수는 그녀의 흉부 속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차원 코어!’
그것은 그녀의 심장에 녹아들었던 차원 코어.
스스스스슷.
이윽고 구멍 뚫린 루시의 흉부가 급격히 재생되더니.
-아아아아!!
그녀의 입과 눈에서 푸른 빛이 함께 터졌다.
* * *
푸른 빛은 빅뱅처럼 크고 밝게 터졌고, 빛무리가 사그라질 때쯤 회색 세계는 더 이상 흑과 백으로만 칠해져 있지 않았다.
푸른 빛은 거룩하게 회색 세계를 물들였다.
[끄으윽…… 끄으……으으…….]
초토화된 푸른 대지 위를 넝마가 된 한 인영이 애처롭게 기어 다닌다.
[히익, 히이이익! 아버지? 아버지!]
방금까지 13차원 창조자의 권능을 넘보던 타천사 루시프의 원형이었다.
[이럴 순 없어! 당신은 도대체……!]
하지만 아까의 위용은 온데간데없는 듯. 회색의 인영으로 이뤄진 루시프의 영혼은 군데군데 찢어졌고 당장이라도 소멸될 것처럼 보였다.
저벅, 저벅, 저벅.
그런 루시프의 뒤를 한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쫓는다.
외모는 분명 청은발의 루시푸르네였지만 분위기부터 영혼까지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사람 같은 존재.
[시몬은 대천사들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맙소사! 당신이…… 아버지 당신이 직접 심은 것이었어!]
시몬과 피스는 방금 루시프의 영혼 속에서 폭발로 소멸했다.
하지만 루시프는 시몬과 피스의 소멸보다 더한 충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가끔 너 같은 별종이 탄생하긴 하지.
이 세상 것이 아닌 목소리가 루시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 불완전한 순환이 완전한 것이기도 하고.
[으…… 으아아아악!!]
이어지는 창조자의 말에 루시프의 영혼은 경기를 일으켰다.
-재창조의 순간은 아직 멀었어.
루시의 몸을 빌린 창조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아주 손쉽게 루시프의 영혼을 소멸시켰다.
파아아아앗.
상황이 종결되었다. 허무하게.
촤아앙.
창조자는 손에 쥐고 있는 지구의 차원 코어를 이용해 13차원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루시의 몸으로 무한한 공허 속으로 향하려 했다.
“안 돼!!”
덥석!
그런 루시의 몸을 태광휘가 뒤에서 꼭 안으며 막았다.
“루시를 두고 가라!”
태광휘는 루시의 귀에 대고 창조자를 향해 외쳤다.
고오오오오오.
그러자 소리 없는 거대한 압박이 창조자를 막은 태광휘에게 가해졌다.
“크으으으윽!”
하지만 태광휘는 절대 루시를 안은 팔을 풀려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아빠!”
“로안!”
“태광휘!”
뒤늦게 합류한 동료들이 그런 태광휘와 루시를 보며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13차원 게이트에서 나오는 무한한 추위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루시! 일어나! 루시이!”
힘겹게 루시의 이름을 부르는 태광휘.
-…….
고오오오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조자의 압박이 태광휘의 영혼을 짓누른다.
“루시!!”
영혼이 소멸할 것 같은 상황임에도 포기하지 않는 태광휘.
“폐하!”
“새언니!!”
“루시푸르네!”
“엄마아!”
마찬가지로 무한의 추위를 무릅쓰고 죽을 각오로 루시푸르네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
잠깐이었지만, 루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윽고 창조자가 장악했던 루시는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털썩.
태광휘가 이불처럼 그런 루시 위에 엎어졌다.
동시에, 13차원의 게이트가 완전히 닫혔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두의 어안이 벙벙하다.
“세상에! 창조자가 이런 변덕을 부릴 수도 있구나?”
상황 정리는 뒤이어 등장한 두 요정 여왕에 의해 다소 풀렸다.
“이거~ 늘 명상으로 목소리만 듣다가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까 좀 신기하네?”
“기수로 따지면 내가 위인 거 알지? 나랑 로안이 아니었으면~ 그쪽 세계는 완성되지도 못했어.”
“나이 많은 게 그렇게 좋은가? 주름 하나 더 많아서 좋겠어?”
두 세계에서 온 리리아가 묘한 기 싸움을 한다.
“엄마랑 아빠는 무사한 거지요, 여왕님?”
그런 두 요정 여왕에게 눈시울을 붉히면서 질문하는 쥴리아.
“응, 창조자께서 변덕을 부린 거 같아.”
“둘 다 영혼도 몸도 건강해.”
두 세계의 리리아는 쥴리아와 태광휘의 동료들에게 간결한 설명으로 안심시켰다.
“그럼 우린 먼저 가 볼게. 우리는 만나지 않을수록 좋은 거 알잖아?”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완성된 세계선에서 온 리리아가 쌍둥이와 루시푸르네, 솔라시우스를 데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물론이지. 그래두~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웠어.”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일부러 재수 없게 굴어서 정 안 쌓이게 만드는 의도라면 성공했어.”
두 리리아는 마지막까지 친한 건지 안 친한 건지 모를 대화를 나누곤 헤어졌다.
“자아! 우리도 이제 가 볼까?”
완성된 세계선의 사람들이 사라지자, 리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구의 차원 코어를 주웠다.
“어쨌든 잘 끝나서 다행이야.”
지구의 차원 코어를 쓰다듬으며 요정 여왕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 *
와아아아아아!
오늘은 루한은 물론 대륙 전체에 엄청난 경사가 있는 날이다.
루한의 수도 윈테라 전역이 광란에 가까운 환희로 들끓었고, 막 재건된 아름다운 순백궁은 그 환희의 중심이다.
대륙과 제국은 물론, 지구에서도 많은 손님이 오늘을 축하하기 위해 포탈을 통해 방문했다.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주례를 맡은 로뮤가 높은 제국어를 요정 억양을 섞어 외쳤고, 리리아와 함께 온 엘프 악사들이 신랑의 행진을 축하하는 연주를 펼쳤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함께 루한풍의 예복을 입은 태광휘가 당당히 걸어 나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국서의 검 윈테이라가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식장을 걷는 태광휘를 향해 제국의 섭정직을 맡고 있는 미나스가 박수를 치며 축하한다.
“저희 여왕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여왕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안 됩니다, 솔라시우스 폐하!”
이어서 왕실 기사단장 하이마와 시녀장 베네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축하해, 오라버니! 다음 달에는 나랑 로뮤의 결혼식인 거 알지?”
루나의 밝은 목소리도 걸음을 걷는 태광휘의 귀에 들렸다.
태광휘는 작게 미소 지으면서 연단 앞에 섰다.
로뮤는 태광휘가 자리에 서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이어서 두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로뮤의 말과 함께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각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등장한다.
청은발의 루시가 루한의 재상 루카스의 손을 잡고 등장했고, 그사이 분홍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유리아가 변경백 문라이트 후작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태광휘는 조용히 서서 두 여인이 오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이어서 반지를 교환했다. 루시와 태광휘는 태양샘 반지를 다시 한번 교환했고, 유리아와는 요정 여왕 리리아가 만든 세계수 잎으로 만든 풀 반지를 교환했다.
결혼 축가는 루나와 구민주가 지구의 최신 가요를 몇 곡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 요정 숲에서 온 요정들의 합동 연주로 마무리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이벤트가 있었지만, 태광휘는 워낙 경황이 없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중에 민주가 찍은 결혼식 영상을 통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있었다.
결혼식 하이라이트는 다름 아닌 부케 던지기.
루시와 유리아, 두 신부가 던진 부케를 리리아와 구민주가 얼떨결에 받은 것이 어떤 의미에선 기억이 남았다.
키에에에에!
결혼식이 막바지에 달하자, 하늘에서 신혼여행을 위해 꽃단장을 한 시즈가 부드럽게 착지했다.
태광휘와 루시, 유리아는 이날을 위해 특수 제작된 아늑한 안장에 올라탔고, 모두의 축하와 축복을 받으며 날아올랐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