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벌 받을 시간! (1)
스턴은 아만이 정말로 그 짓을 삼만 번 반복할까 두려웠던 것인지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나온 스턴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마음속 깊이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얘를 그럼 어쩌면 좋을까요?”
신음하며 널브러져 있는 스턴을 바라보는 아만 역시도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그저 갈기갈기 찢어 죽일 생각이었는데, 스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동정심이 생겨난 것이다.
“……기억을 지울 수도 없고.”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고…….”
“어디 동굴에 숨겨놓을 수도 없고…….”
“흐음…….”
“흐으음…….”
아만과 루카스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끄으으…….”
치유마법을 시전해 줬음에도 스턴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몰렉의 숨결’을 쓴 이상 몸도, 그의 영혼도 완전히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걸 함부로 쓰래? 엉?!”
끙끙거리는 스턴을 보다 못한 아만이 버럭 소리쳤다.
“우선 기억을 지워라. 너와 내 관계에 대한 것만 우선 대충 지워.”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만큼 두드려 맞았으면 기억 몇 개쯤 날아가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다.”
“아,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루카스는 일단 스턴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배후에 있는 자가 알베르토라는 것은 이미 알아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자가 황제라는 완벽한 증거가 필요했다.
먼저 알베르토가 ‘몰렉의 숨결’을 전해준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황제는 시타타를 건들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 두 가지를 조합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라크메르는 어떻게 됐지?”
“그것들 역시 점조직 형태라 완전히 잡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잔당들은 꾸준히 처리하고 있긴 합니다만, 좀처럼 윗선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렇군.”
흑마법을 주로 다루는 은밀한 마법조직 ‘라크메르’. 그들이 행했던 끔찍한 일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의 배후엔 역시나 알베르토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일 처리를 꽤나 완벽하게 하는 그들이었기에 완벽한 증거를 잡아내기가 어려웠다.
루카스는 점점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제대로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어째서 주변에 이런 거지 같은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생활은 무척 평화로웠다.
아이들과 함께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 않았는가!
“아만…….”
“예?”
“솔직히 우리가 언제부터 명분을 따져가며 인간들을 벌했는가.”
“…….”
“알베르토를 잡아 와라. 그 개자식을 족치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옙!”
인내심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여차하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게다가 제 부모들에게 먹고 살만큼의 재산도 주었으니,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신계로 올라간다 해도 괜찮다.
남은 일은 신이 된 다음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까.
***
“루카스! 괜찮은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인가!?”
기숙사로 돌아오자 스키르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제 방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얼마나 기다린 것인지, 스키르는 저린 다리를 부여잡고 절뚝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뭐 해?”
“크흡… 그, 그것이…….”
루카스의 태연한 물음에 스키르는 돌연 눈물을 터트렸다.
“왜 그래?”
당황한 루카스가 스키르의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끄어엉! 허엉!”
그러자 스키르는 더욱더 힘차게 울어 재끼기 시작했다.
“아니, 왜, 왜 그러냐고!”
“혀, 형님이… 끄엉엉! 형님께서…… 끄헝!”
스키르의 입에서 나온 ‘형님’이라는 말을 듣자, 루카스는 상황이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울지 말고… 자, 들어가자. 우선 들어가자.”
다정하게 달래는 루카스의 말에 스키르는 꺽꺽거리면서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데리고 들어와 한참을 달래자 조금 진정이 된 스키르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찾아오셨다.”
“그래?”
모르는 척 묻는 루카스의 말에 스키르는 훌쩍이며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스턴이 자신을 찾아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그의 표정이나 차림새가 어떠했는지.
그러고 나서 자신을 때린 이야기를 하는 스키르는 부풀어 오른 제 뺨을 은근히 들이밀어 보였다.
“어이구, 그래. 아팠겠네.”
“괜찮다…….”
제 뺨을 한번 쓸어 보인 스키르는 무서웠지만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만을 찾아갔다고 했다.
‘아, 그래서 아만이…….’
아만이 자신을 그토록 빨리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스키르 덕분이었다.
아만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곧장 루카스의 방에 찾아왔다고 했다. 스턴이 했던 이야기 중 로드리고 백작가가 있었기에.
하지만 그는 방에 없었고 초조한 마음에 여지껏 문 앞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방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마법으로 잠겨있는 자물쇠 덕에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멍청하군. 사감에게 가서 열어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을…….’
“그래도 네가 괜찮으니 다행이다…….”
조금 전 다섯 살 난 아이처럼 울었던 스키르는 이제 완전히 진정되었는지 다시 형 노릇을 하려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루카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왜, 왜 웃는가!”
“아니, 아니야. 고마워. 걱정해 줘서.”
배시시 웃는 스키르를 보자, 루카스는 스턴을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못난 형님이라 할지라도 제 가족인데 그가 죽고 나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데려다 그런 짓을 하게 한 놈을 족쳐야지…….’
***
로드리고 백작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시비에 백작의 물음에 앨리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없어졌어요.”
“분명 앨리 님께서 스턴은 죽었다고…….”
“안 죽었나 봐요. 그 개 같… 아니, 걔가 없어졌어요.”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한번 삼켜낸 앨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짜지 않은가. 피가 튀는 것이 싫어 그대로 묻어버린 스턴을 찾으려 했더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땅을 아무리 뒤집어엎어 봐도 스턴은커녕 옷자락 하나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면 스턴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네. 살았겠죠. 그 끈질긴… 아니, 예. 맞아요.”
스턴을 추적하려 해봤지만 앨리는 이내 그 행동을 그만뒀다.
이만큼 힘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줬으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쥐콩만 한 인간 자식이 다시 찾아오면…… 그땐 생매장이 아닌 수장을 시켜주지.’
앨리는 제 손톱을 입으로 물어 뜯어내 바닥에 한 번 틱 뱉어냈다.
“아, 그보다… 광장 보수가 조금 늦어질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시비에 백작은 마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스턴이 살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제 친구인 시러스 공작의 면을 볼 낯이 아직은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영지에 찾아온 스턴이 어떤 이유에서든 죽임을 당했더라면, 친구를 떠나 황실의 문책 역시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스턴은 지금 오닐 공작가의 영식이 아닌, 마탑주의 양자였다.
그렇게 되면 마탑 역시도 양자를 죽인 백작가를 벌하러 득달같이 달려오겠지.
“아, 그리고 이주민들 마을 계획서예요.”
“아, 예.”
앨리가 옆에 놓인 서류 다발을 내밀자, 백작은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게 전부 뭡니까?”
“어떤 거 말씀이세요?”
서류철을 멍하니 바라보는 백작의 표정이 모호했다. 놀라움인지, 당황스러움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백작은 입을 달싹이기만 할 뿐 좀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이게… 전부 마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 네. 맞아요. 이주민이 생각보다 많아서요.”
“이렇게나… 많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흠~ 지금 만 명 정도는 이미 이주를 마쳤고, 만 명 정도 이주를 희망하고 있어요.”
“허억……! 그럼 모두 이만 명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이 만이라니! 그 정도면 백작령이 아닌 소도시 수준의 숫자였다.
“네, 그래서 말씀인데 이거 규모를 쪼오~ 끔 더 키워보면…….”
앨리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만 명에게 팔아치울 집이며, 상가 인테리어! 게다가 새로운 상가와 도로까지! 모든 공사를 자신이 수주한다면 엄청난 이윤이 남을 것이다.
“……앨리 님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
이제 백작은 질린다는 표정도 지어 보이지 못했다. 앨리가 온 뒤로 백작령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 처리 솜씨를 이미 알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일이 너무 커졌어…….’
***
“자, 이번 학기에도 잘 부탁합니다.”
마법 약 교수인 하딘 바라드는 엘프였다.
지난 학기에 기초반 마법 수업을 맡았던 하딘은 새로이 초급반 마법 약 수업을 맡게 되었다.
“오늘은 이번 학기 동안 마법 약 수업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수업계획을 먼저 말씀드리려 합니다.”
칠판에 커다란 종이를 한 장 펼쳐 보인 하딘은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에 아카데미 측에서 온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온실에서 자라나는 약초와 마법 식물들을 키워내기도 할 겁니다.”
아카데미에서 만들어 준 엄청난 규모의 온실은, 매번 신선한 재료를 수급하기 어려워 진척이 되지 않았던 수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 눈앞에 놓인 화분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으세요. 우린 그곳에 만드라고라를 키워낼 겁니다.”
‘만드라고라’라는 이름을 들은 몇몇 학생들이 눈을 크게 뜨고 하딘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은 개량된 만드라고라입니다.”
“교수님, 아무리 개량된 만드라고라라고 한다 해도 위험하지 않나요?”
손을 번쩍 든 학생은 이번 초급반 진급에 성공한 에이라 토헤일이었다.
수업에 항상 열심인 그녀였지만, 덤벙대는 탓에 마법 약 수업에서 종종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우리 엘프족들이 개량을 모두 마쳤으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개량된 만드라고라는 효과가 절반 이상 감소한 대신 죽음에 이르는 독이나, 비명은 지르지 않아요.”
“아…….”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완벽에 가까운 개량이지만 독은 여전히 존재하고, 만드라고라는 비명을 지를 겁니다.”
하딘의 말에 스키르와 폴라는 ‘헉’ 하며 숨을 삼켰다.
“야… 근데 만드라고라가 뭐야……?”
작게 속삭이는 폴라의 목소리에 루카스가 대신 대답을 했다.
“사람처럼 생긴 약초야. 잎사귀에도 독이 있고 열매에도 독이 있어. 하지만 효능은 좋아.”
“헉! 그럼 비명을 지른다는 말은… 무슨 말이야?”
“만드라고라는… 뽑힐 때 비명을 질러. 아주, 아주 시끄럽게.”
“으! 징그러워.”
루카스의 말을 들은 폴라와 넬라는 역겹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만드라고라는 징그러웠다. 하지만 효능만큼은 아주 대단했다.
그런데 그런 만드라고라를 개량해 냈다니.
‘엘프들의 식물 사랑은…… 여전히 대단하군.’
엘프족을 떠올린 루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루카스의 지시를 받은 아만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베르토를 추적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명색이 마탑주이니 만큼 그의 행보는 어딜 가나 기록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는 없으니, 아만은 조용히 그가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알베르토가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방에 들어갈 때까지 아만은 그의 흔적을 꾸준히 쫓았다.
수업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그를 추적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혼자 남았을 때 재빠르게 텔레포트한 아만이 그의 곁에 섰다.
“안녕? 알베르토.”
“……누구냐.”
다른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아만을 알아보지 못한 알베르토의 싸늘한 음성이 방을 울렸다.
공격 태세를 갖춘 알베르토의 곁에 빠르게 다가선 아만이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저승사자.”
-파앗!
그대로 알베르토를 데리고 텔레포트한 아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너무…… 너무 짜릿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