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반란의 씨앗 (2)
응접실에서 들은 내용들만 봐도 쪽지의 진위여부 파악은 가능했다.
한 가지 더 확인할 점이라면 제게 쪽지를 건네주었던 소녀의 정체가 진짜인지 정도였다.
아스트리드 백작가의 여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의 정체와 더불어, 그녀의 말대로 아스트리드 백작가는 이 일에 정말 연관이 없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찾아야겠군.’
자신에게 쪽지를 건넸을 때 표식을 남겨둔 덕에 소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파앗!
조심히 백작가를 빠져나온 루카스가 그녀가 있는 곳 근처로 텔레포트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광장에 위치한 여관 앞이었다.
소녀는 자신에게 쪽지를 건넨 뒤 이곳에서 묵고 있는 듯 보였다.
‘흠… 이걸 어쩐다.’
사실 쪽지를 건넨 자가 남자였다면 그냥 방 안으로 들이닥칠 테지만, 상대가 여자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완연한 남자였고, 또한 아만의 도움을 받아 폴리모프했기에 나름대로 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성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루카스가 일단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문이 열리며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자, 종업원 하나가 얼른 나와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십쇼!”
“식사 됩니까?”
“아유,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먼저 일층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시킨 뒤 혹시 소녀가 나오기를 기다리려 했건만.
‘그럴 필요가 없겠군.’
루카스의 눈에 아까 보았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빵쪼가리를 힘없이 뜯어먹는 중이었다.
“아니, 저쪽에 아는 얼굴이 있군요.”
“예! 물론입니다. 그럼 앉아계시면 제가 얼른 메뉴판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의 안내를 물린 루카스가 소녀의 앞에 다가서자, 빵에 시선을 고정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누, 누구세요?”
갑자기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에 놀란 소녀가 토끼눈을 뜨고 물어왔다.
“로드리고 백작가에서 왔습니다.”
“로, 로드, 드리고요?”
“네. 그러니 자연스럽게 행동하세요.”
루카스의 말에 소녀는 놀랐는지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목구멍에 막힌 빵을 내리고 있었다.
“여기.”
루카스가 자연스레 물컵을 건네자, 얼른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소녀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 여긴 어, 어떻게…….”
소녀는 말을 더듬으며 주변을 흘끗거렸다.
“메뉴판입니다!”
“히끅!”
불쑥 나타난 점원에 놀란 소녀가 딸꾹질을 하자, 루카스는 다시 한번 물잔을 가리켰다.
“어휴,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니, 에요.”
“오늘의 스튜와 빵으로 부탁합니다. 음료는 됐습니다.”
“옙! 알겠습니다!”
와중에 차분히 메뉴를 고른 루카스가 메뉴판을 건네자, 그것을 얼른 받아 든 점원이 자리를 떴다.
“이제 차분히 이야기해 볼까.”
루카스가 품속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자, 소녀는 쪽지와 루카스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게 전부 사, 사실이에요. 보, 보셨겠지만 우리 가문은 과,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 쪽지가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네가 말한 너의 신분이 진짜라는 것도 말이야.”
“저, 저를 믿지 모,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 없어요…….”
루카스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그럼 믿는다는 가정하에 묻지. 왜 아스트리드 가문은 관여하지 않는 거지? 알아보니 너희 가문을 비롯한 모두가 쫓겨나다시피 베네타로 이주했던데. 그곳에서 버티는 것보다는 반역이 더 낫지 않나?”
“아, 아니에요. 우, 우리는 로, 로드리고 백작가와 약속을 지키는 거예요.”
루카스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속이라…….”
“우, 우리는 발 디딜 곳이 있으면 그걸로 조, 족해요. 로, 로드리고 배, 백작가도 사, 살아야 다음이 있으니 모, 목숨을 중히 여기자 하셨어요.”
“다음이라는 것이 이번이 기회가 아닌가? 황제는 반푼이가 되었다 소문이 났고, 로드리고 백작가만 잘 구슬리면 재력까지 등에 업을 기회인데. 알지 않나?”
소녀의 대답에 루카스가 몸을 기대며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지, 지키자고 하셨어요. 자, 자식들을…….”
“…….”
“그, 그때는 백작님께 자식이 어, 없으셨지만, 우, 우리를 위해 배, 백작가에서 재, 재산을 다 내어 주셨어요. 자식을… 저희를 지키라고. 그렇기에 우, 우리도 백작님의 뜻을 지키고 싶어요. 이, 이젠 아드님이 있잖아요.”
소녀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모든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그때 자식이 없던 로드리고 백작가에서는, 재산을 몰수당한 다른 귀족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어준 것이었다.
자식을 데리고 도망가 어디든 목숨을 부지하라고 말이다.
그런 시비에 백작의 뜻에 따라 도망친 수많은 귀족들 중 하나인 아스트리드 가문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 이곳까지 온 것이고.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 우선 너의 말을 믿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식사는 내가 계산하지.”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소녀가 얼른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저, 저 돈 있어요.”
“그런가.”
마지막 남은 소녀의 자존심일까.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온 사람에게 밥 한끼 대접하지 못한다면 로드리고 백작가의 체면도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거 받아라.”
루카스가 주머니 하나를 건네자, 소녀는 고개를 저어 거부를 표했다.
“그, 그거 도, 돈이잖아요.”
“맞아. 나는 로드리고 백작가의 사람이다. 그러니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내가 곤란해질 거다. 백작님의 심부름이니.”
그러자 소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툭.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툭 올려두자, 소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머니와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만.”
말을 끝으로 루카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자, 뒤에서 더듬거리는 소녀의 말이 들려왔다.
“아, 안 되는데… 어, 어떡하지…….”
***
자리를 벗어난 루카스는 다시 백작가로 돌아왔다.
소녀의 말을 모두 들어보니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십여 년 전 사건에 휘말려 쫓겨난 수 많은 귀족들은 분명 로드리고 백작가를 질투하고 증오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죽음의 문턱에 맞닥뜨릴 때마다 시타타라는 척박한 땅에 처박힌 로드리고 백작가가 한없이 부러웠을 것이며, 추위에 몸을 떨며 나뭇잎을 덮고 나무 아래 잠을 청할 때마다 지붕 아래 놓인 그들이 죽도록 미웠을 것이다.
게다가 시비에 백작의 친구인 시러스 오닐 공작이 개국 공신과도 같은 대접을 받으니, 시비에 역시 그 덕을 조금은 봤을 거라 짐작하며 증오를 키웠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시비에 백작이 생활고에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들의 머릿속엔 자신들을 도운 그의 손길이 아닌, 그들이 걸었던 고된 길만이 떠올랐을 것이다.
물론 오닐 공작가의 혜택을 받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로 인간의 증오가 잠재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미워할 대상으로 삼기에는, 멀리 있는 배신자가 아닌 자신들 곁에 섰던 비슷한 처지의 로드리고 백작가가 더 나았을 것이다.
생각이 겹겹이 쌓이자 루카스는 머리가 아파왔다.
‘산 넘어 산이로군.’
하나를 해결하니 다른 하나가 머리를 내밀고, 다른 하나는 해결할 기미도 보이지 않건만 또 다른 문제가 튀어나왔다.
‘전생에 내가 그리 잘못 산 것인가…….’
백작가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투명화 마법을 쓴 채 이 층에 마련된 손님용 응접실에 들어서자, 아까 보았던 사내 셋이 보였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가진 재정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또한 대륙에 삼을 거점조차 없고 말입니다.”
“내일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시비에 백작에게 뜻을 전해보지요.”
“하, 그보다 어이가 없군요. 이런 곳에서 호의호식하며 여태껏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립니다.”
사내 하나가 눈으로 응접실을 훑자, 다른 사내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했던 추측들이 맞아떨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 필요 없고 약속했던 보수나 잘 챙겨주면 됩니다.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니겠지요?”
“세라노 님. 당신이 없으면 우리 북부 연합에 있는 마법사들 모두 빠질 텐데,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내의 말을 들어보니 세라노라 불린 사내는 마법사인 듯 보였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저도 조니 님과 하워드 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붙은 제 수배지만 해도 몇 장인데.”
“그럼요. 알지요.”
“저 역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라노 님.”
사내들이 감사 인사를 전하자, 마법사로 보이는 사내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다리를 꼬고 몸을 기대앉았다.
“그래서 계획이 다들 뭔데요?”
“일단 백작가에서 금전적인 지원과 적당한 거처를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그걸 이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시비에 백작이 바보도 아니고 저희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까요?”
“아까 백작이 하는 말 못 들었습니까? 그 역시도 모르는 땅이라고 한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역시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떠나기 전에 우리 가주님들께 뜻을 전한다고 합시다. 그다음 세력을 꾸려 조금씩 이주해 내려오면 적어도 두 달 안에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겁니다.”
그들의 말을 듣던 루카스는 그들의 머리에 라이트닝 스톰을 내리꽂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내 아버지란 자를 아주 모자란 인간으로 보고 있군. 건방진 자식들 같으니라고.’
그들이 주고받았던 말 몇 마디만으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생각이 글러 처먹었다는 것 역시 확인했다.
‘너희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중요한 정보는 모두 입수했다. 그들의 생각과 계획을 정확히 들었으니, 그들을 저지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응접실을 빠져나온 루카스는 숲길을 걸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저들을 어떻게 막는 것이 최선일지, 어떻게 해야 백작가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당장 저들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저들이 함께하는 자들이 누군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중에는 백작가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종종 섞여있었다.
에스나 왕국에 들러 물건을 받는다든지, 바마라스에 들러 물건을 전해준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베네타에는 척박한 땅에 맞춰 자라난 희귀한 약초와 질긴 가죽과 뛰어난 보온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서식했다.
상품성이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파는 상단의 특성에 따라, 베네타산 예티 털가죽이나 아이스 베어의 털가죽 등은 겨울이 있는 나라라면 어디에서든 인기 있는 물건이었다.
높은 값을 자랑하는 만큼 뛰어난 보온성을 지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저들이 지닌 짐 중에는 그런 어떤 것도 보이질 않았다.
‘마법사에게 아공간이 있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공간 아티팩트가… 아니, 아니지. 돈이 없어 쩔쩔매는 자들에게 그것은 무리다.’
그런 그들에게 도대체 건네고 건네받을 물건들이 뭐가 있을까.
그때 루카스의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하. 그곳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