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랬더라면.
루카스는 하셀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막막하군.’
하지만 대화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카스가 했던 의심은 하셀 역시 하고 있었고, 조사도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진척은 없다고 했다.
또한 마왕이 돌아온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나, 그 흔적 역시 찾지 못했다고 한다.
‘타라스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아무리 마신이 그들을 돕고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마신은 말 그대로 신이었다. 그런 그가 마족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자잘한 뒤치다꺼리까지 해주고 있다?
루카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드래곤이나 다른 종족을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루카스는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
‘투르캄에게 가봐야겠군.’
루카스는 지난 만남을 마무리 짓기 위해 드워프의 영역으로 향했다.
“투르캄.”
“오셨구먼?”
대장간에 들어서자 투르캄이 언제나처럼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생각은 모두 정리되었나?”
“그렇다고 볼 수 있제?”
투르캄이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저~ 짝으로 가서 이야기해 보자고.”
대장간을 빠져나온 둘은 천천히 걸어서 투르캄의 집으로 향했다.
사실 천천히 걷는 것은 루카스였고, 투르캄은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분주히 걸어갔지만.
“하이고야. 아니 뭐 헌다고 집은 이렇게 높은 데다가 지어가지고는!”
투르캄이 거친 숨을 뱉으며 투덜거렸다.
“헤엑. 헥! 자, 들어가자고.”
그가 문을 열자 루카스가 뒤를 따랐다.
“숨 좀 돌리고.”
그러고는 몇 번이나 숨을 다시 골라냈다.
“후우! 차 좀 줘?”
“좋지.”
투르캄이 차를 내오는 사이, 루카스는 혹여 투르캄이 안 좋은 소식을 전할 것에 대비해 몇 가지 상황을 미리 생각했다.
‘중립을 고수하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마족의 편에 선다면…….’
테이블 모서리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던 때였다.
“자.”
투르캄이 차를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잘 마시겠네.”
“그냥 뜨거운 물에 찻잎 몇 개 넣은 건디~ 뭘 또 거창하게.”
투르캄은 루카스의 진중한 인사말이 부끄러웠는지 괜히 구시렁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말을 해야것지? 피차 낯 붉히는 것은 싫으니께 말여.”
“좋지.”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그런디 사실 드래곤은 썩 맘에 안 든다는 말이여. 우리 종족도 벌써 수백은 잡혀가서 돌아오지를 안 하니께. 우리가 그래도 불을 가까이하고 사는 종족인디 레드 드래곤은 얼굴도 본 적이 없다니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디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안 써. 어차피 우리도 제 한 몸 지킬만한 힘은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 우리 일족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리는 인간도 문제지만, 잡혀간 일족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말이여.”
“…….”
“그런디! 우리는 그나마 강하고 돈도 쪼까 있는 종족이라지만, 토토족이나 여우족은 아니잖여. 사실 갸들이 우리를 진즉에 찾아왔었어.”
투르캄이 목소리를 높였다.
“토토족 갸들이 얼마나 작고 귀여운지 알지? 여우족 갸들도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 종족이냐는 말이여. 그런 갸들이 지 한 몸 지키겠다고 제 몸에 맞는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왔다니께?”
투르캄의 말을 듣던 루카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토토족은 정말 너무나도 작은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용맹한 종족이었다. 작은 덩치 때문에 핍박받기 일쑤였던 그들은 성격이 포악했다.
게다가 작은 몸집 덕에 어찌나 빠른지 웬만한 속도로는 그들을 잡을 수도 없었으며, 눈으로 좇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종족은 아니었다. 어차피 정면으로 맞서면 이길 확률이 낮은데, 칼을 휘두를 시간에 달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토토족이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찾아왔단다.
“이 험한 길을 뚫고 온 것도 대단한디 무기를 만들어 주면 값을 치르겠다고 제 몸집만 한 금화 덩이를 몇 개씩이나 이고 지고 왔더라고. 내가 그걸 보고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듣는 나도 마음이 아프군.”
“게다가 여우족은 또 어떻고? 겨울 여우족이라고 알지? 나는 갸들이 전설이나 신화 속에나 나오는 애들인 줄 알았어. 아니, 물론 갸들 눈알로 나쁜 짓거리를 한 것은 알지만, 그만큼 보기가 드물고 힘든 종족이라는 말이여. 내 말 알지?”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디 겨울 여우족이 여기를 또 찾아왔어. 갸들도 무기를 만들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값은 뭘로 치르겠다고 한 줄 알어?”
“……?”
“하, 이 말 들으믄 눈물 나니께 그 앞에 헝겊 하나 집어.”
헝겊을 가리키는 투르캄의 눈은 이미 촉촉했다.
“갸들이… 갸들이……!”
투르캄은 말을 잇지 못했다.
“……크흡. 일족의 눈알을 가지고 왔어. 값을 치를 것이 도저히 없다고 말이여. 정말 싫고 치가 떨리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땅을 치고 울면서 말이여!”
“……하.”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값을 치를 것이 없어 제 일족의 눈알을 가지고 왔다니.
“누군가 인간에게서 뺏어 온 일족의 눈알이라고 하더구먼. 눈알로 아주 예술 작품을 만들어 놨더라고. 잔인한 것 같으니!”
분에 찬 투르캄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런디 그것을 품에 안고 왔다고. 서럽게 울면서 말이여. 값을 치를 것은 없고, 그렇다고 힘을 키우지 않을 수는 없으니께 결정한 거라고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루카스 역시 가슴에 뜨거운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들끓었다. 그것은 이종족을 수집하던 미친 계집에게서 언젠가 루카스가 직접 빼앗아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찾아왔다니……!
너무나도 잔인하고 참혹한 현실이었다.
“그것을 다 보고 들으믄 당장에라도 드래곤이랑 맞서 싸우고 싶어진다니께? 하지만 우리도 알어.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어. 드래곤이 우리의 왕이라고는 하지만 아니라는 거.”
투르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있잖여. 내가 이 드워프의 족장 자리에 앉아보니께 말여.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감이 따르고 부담인지 알것더라고. 내가 부족한데도 나를 이렇게 따르잖여.”
“…….”
“물론 드래곤은 직접 왕의 자리에 앉겠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말여. 그런데 있잖여?”
투르캄의 촉촉한 눈이 루카스를 지긋이 바라봤다.
“우리가 왕이라고 했을 때 아니라고 안 했잖여. 우리가 만났을 때 왕이라고 고개를 조아리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잖여. 내 말이 틀려?”
루카스의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투르캄의 말이 모두 맞았다.
드래곤들 중에 ‘누가 왕 한다고 했냐.’며 책임이 없다는 듯 외면하던 이들은 항상 있었다.
종족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드래곤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종족들과 어울려 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왕 대접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 대접을 받았으며, 혹여 그러지 않는 이가 있다면 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 왕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모순이었다.
“맞지? 자네도 드래곤의 계약자지만 알 거 아녀? 나는 자네가 인간인데도 묘하게 마음에 들어. 이렇게 마음도 터놓을 수 있을 만큼 말여. 자네가 드래곤의 계약자니께 언제든 그들에게 가서 털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말여. 아니, 사실은 털어놔 주길 바라고 있어.”
투르캄이 쓰게 웃었다.
“자네 말이 모두 맞네. 투르캄. 그들은 왕의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이종족들 모두가 무책임한 왕에게 등을 돌려도 그들은 할 말이 없고.”
“허허! 맞지. 할 말이 있으믄 정상이 아니지 그려.”
“그들을 대신해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그러자 투르캄의 눈동자가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이게 참…….”
그러고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참…… 이상혀. 자네는 인간인데도 드래곤을 대신해 사과를 받았다고 하니께 마음이 슥 풀려 그래.”
낡은 헝겊을 들어 제 눈가를 거칠게 닦아낸 투르캄이 슬프게 웃었다.
“그래…… 풀려. 마음이 풀려.”
“…….”
“우린 그걸 기다렸을지도 몰라. 진심으로 들여봐 주고 미안하다 말 한마디 해주길 기다렸을지도 몰라.”
투르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읊조렸다.
“……투르캄.”
루카스가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자, 투르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우리의 왕이니께. 미워도 싫어도 그래도 우리 왕이잖여. 왕을 등지는 신하의 마음이 마냥 좋기야 하것어? 아무리 나쁘고 못된 왕이어도 말여. 그리고 드래곤은 어찌 보믄 왕이 아니라 우리의 커다란 부모같은 존재니께.”
‘부모’라는 단어에 루카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인간인 자네는 모르것지만 우리는 그려. 우리가 뭐 신전을 쫓아다니면서 기도를 하기를 해 뭐를 해? 인간들은 신전도 짓고 기도도 하믄서 마음의 위안을 얻지만, 우린 드래곤이 사는 레어를 보면서 위안을 얻거든. 아, 저기에 우리의 왕이 계신다. 하고 말여.”
몰랐던 사실이었다. 아니, 잊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그들은 드래곤을 마주할 때면 항상 고개를 조아리고 겁에 질려 떨었으니.
‘그래. 그런 날도 있었지.’
엘프들이 모여 드래곤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들려줬던 때가 있었다. 여우족이 막 태어난 일족을 품에 안고 와 축복을 바라던 때가 있었고, 토토족이 정성스레 키운 열매 중 가장 알차고 예쁜 것을 모아 와 바쳤던 때가 있었다.
‘옛날이야. 너무 옛날이라 내가…….’
그때를 떠올렸던 루카스가 자신과 잠시 타협했다.
‘아니. 그 옛날을 기억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내 자신을 타박했다.
“왕을 저버리는 신하의 마음도 좋지 않은데, 부모를 저버리는 자식의 심정이 어떻겠)어? 그것도 사랑하는 부모를 말여. 우리 이종족 모두가 지금 그런 심정이여.”
“…….”
“하지만 우리 드워프는 마족의 편에 서지 않기로 했어. 아무리 밉고 싫더라도 부모는 부모고 왕은 왕이니께. 우린 왕을 배신하는 짓은 못 해. 아니 안 할 거여.”
투르캄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고는 잠시 말을 골라냈다.
“부모라고 언제까지나 기회가 있을 수는 없것지. 그러니께 우리 드워프는 드래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어. 우리도 배알이라는 게 있고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거든. 자식을 저버린 부모를 언제까지나 따르지는 않겠다는 말이여.”
투르캄의 단호한 눈이 루카스를 바라봤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제?”
“잘 알겠네. 내게 이렇게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군.”
“허허! 고맙긴. 내 말 그대로 전하다가 계약자한테 두드려 맞을까 겁나는구먼. 친구를 잃기는 싫으니께 적당히 알아서 잘 전해줘.”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스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차라리 저버렸으면.’
그랬더라면 이 마음이 덜 했을까.
‘차라리 욕하고 손가락질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마음이 덜 했을까.
‘차라리 마족의 편에 서서 우리를 공격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덜 했을까.
‘내 잘못이구나. 내가 잘못 살았구나.’
그랬더라면 이 후회가 덜 했을까.
‘너무 잘못 살았어.’
짙은 후회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