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2화 (2/55)

제2장

신교 입성

혁련소는 사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멋지군.”

웅장한 마교의 건축물들은 그의 놀람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척박한 지형에 황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성곽과 전각들은 신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대변하듯 했고 곳곳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들은 역시 이곳이 천하만마의 중심임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피의 역사로 세워진 곳이지.”

연무진의 얼굴은 매우 씁쓸해 보였다.

“이곳을 꽤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

“맞다! 싫어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연무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그늘져 보이자 혁련소의 눈동자에 이채가 나타났다. 연무진이 씁쓸한 어조로 말을 늘어놓는다.

“그냥 치열한 삶이 싫을 뿐이야.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죽이는 방법만을 배우는 곳이 이곳이지. 싸워서 이겨야만 존재할 수 있고 약하고 도태된 자들은 스스로 죽어가는 이곳이 언제부턴가 싫어지더군. 물론 이런 나를 이곳의 사람들은 나약한 존재라 비웃고 있지.”

“확실히 의외군. 그 입에서 그런 소리라니…….”

“후후! 네 말처럼 신교도라면 이런 말을 해선 곤란하지. 하지만 싫은 걸 어떡해.”

혁련소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위치에 따라서 자신을 바꾸어야 할 때도 있어. 책임과 의무란 그럴 때를 두고 나온 말이지. 강자일수록 더 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법이고.”

연무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우리 아버님처럼 말하는군.”

“아버님이 옳으신 거다.”

“그래, 그렇겠지.”

연무진의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그늘은 이내 우울함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거처로 들어서던 연유극의 노기를 불러왔다.

“나약한 놈!”

나지막한 호통 소리에 연무진이 돌아섰다.

“무진이 아버님을 뵙습니다.”

연유극의 노기 어린 눈동자가 그의 전신을 쓸었다. 고개를 조아린 연무진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허리를 숙이고만 있었다.

연유극의 시선이 혁련소를 향해 돌아갔다.

“벗이라고 들었다.”

“혁련소라고 합니다.”

연유극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자신의 신분을 알고서도 이렇듯 당당한 태도는 근 십 년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어디서 온 누구의 자손이더냐?”

“마땅히 내세울 만한 가문이 아닌지라…….”

“제 벗입니다!”

연무진이 거들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함부로 허락 없이 외부인을 들이다니… 도대체 네놈은 정신이 있는 놈이냐!”

“피해를 줄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연유극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둘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

“이틀 남았다. 모든 것은 네게 달렸으니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네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연유극이 거처를 나가자 연무진은 자신의 침상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조치양이 얼굴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그는 연무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저분의 속내를 헤아려야 합니다.”

“자신 없습니다.”

연무진의 대답에 조치양은 고개를 저었다.

“소교주!”

“노력은 해볼 테니 군사께서도 이만 물러가십시오.”

연무진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조치양은 이내 허리를 숙여 보이고서 걸음을 돌렸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한쪽에 서 있던 혁련소는 연무진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연무진은 화를 삭이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젠장!”

지켜보던 혁련소의 미간이 좁혀진다. 짧은 시간에 제법 마음이 통했던 벗의 고뇌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살아온 방식이나 생각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 *

짧은 머리에 장대한 체구, 그리고 연신 강렬한 불꽃을 뿜어내는 눈동자, 사내는 자신의 대도에 비친 얼굴을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냥 돌아오지 않았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을…….”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의 중앙에 거대한 바위가 버티고 있었다. 바위를 향한 사내의 시선이 섬광을 발했다.

“연무진, 너의 그 나약함이 나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사내의 대도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사내, 염천양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내는 초마전(超魔戰)의 후계자이자 신교의 성좌를 꿈꾸는 야망의 화신이었다.

푸스스스!

거대했던 바위가 먼지로 화해 바람에 흩날린다. 사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다시금 떠오른다.

“이것으로 네놈의 패배는 결정되었다.”

초마전기(超魔電氣)!

극성에 이르면 하늘도 가른다는 비전절기의 완성은 염천양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염천양의 육신이 어느 순간 흐릿하게 변하며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염천양이 섰던 곳의 주변이 일렁거리며 흑발에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가 그가 섰던 자리에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전신에서 퇴폐적인 음습함이 묻어나는 사내의 칼날 같은 예기를 품은 시선이 염천양이 사라져간 곳을 향한 채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주변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는 사내는 고개를 돌려 먼지로 화해버린 바위의 흔적을 쫓았다.

‘극성에 이른 초마전기라…….’

사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무엇이 그의 기분을 좋게 했을까?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이 적용사문의 적수라 할 만하지.’

사내의 시선이 바닥을 덮은 바위가루를 향했다. 그러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가루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치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염천양이 가루로 만들어버린 바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앞으로 내민 사내의 검에서 백색섬광이 번쩍였다.

번쩍!

그리고 사내는 돌아섰다.

‘흐흐! 극마전의 승자는 나, 적용사문이 될 것이다.’

적용사문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섰던 자리엔 염천양에 의해 가루가 되어버렸던 바위가 예전의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햇빛에 반짝이는 바위의 표면은 얇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 * *

천산에 걸린 만월로 인해 산의 정상은 부러질 듯 위태함을 느끼게 했다.

“좋군.”

혁련소는 거처의 창을 통해 신비한 신강의 밤하늘에 심취했다. 산의 정상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눈의 결정체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눈을 어지럽혔고 가끔 한 번씩 보이는 유성은 우주에 대한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켰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

연무진이 별도로 내어준 거처에는 분명 그 혼자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팔자 한 번 늘어졌군.”

“제 팔자야 언제나 늘어졌지요. 덕분에 숙부님이 고생이 많습니다.”

“언제 돌아갈 것이냐?”

“글쎄요. 아직은…….”

“내가 널 묶어서 데려갈 수도 있다.”

“후후! 그러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확신은 금물이지. 언제라도 주공이 명을 내리시면 너를 꽁꽁 묶어서 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코끝을 슬쩍 찡그린 혁련소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숙부님!”

“좋지.”

“안주는 없습니다.”

그림자가 자리에 앉자 혁련소는 거처의 구석에서 술병을 들고 왔다. 출출하면 마시라고 연무진이 들여보낸 빙설로였다. 만월의 빛을 받으며 둘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비록 벗의 초대로 온 신교라지만 그래도 세상의 무섭다는 자들은 모조리 모여 있는 곳에서의 술자리는 특별한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놈과 언제까지 엮여 있을 셈이냐?”

“글쎄요. 극마전이라는 것, 그것은 보고 가야겠지요.”

“위험할 수도 있다.”

“무진이 패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뭐, 숙부님이 계시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림자의 얼굴이 피식 웃음을 보인다.

“나 아니더라고 충분하지 않느냐?”

“아직은 멀었습니다.”

빙설로가 몇 잔 들어가자 속이 뜨거워짐을 느낀 혁련소는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한 잔을 더 마셨다. 그림자의 눈이 빛을 발했다.

“돌아가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분 말고 너를 이길 자는 없겠지. 좋지 않으냐?”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적당히 강해져서 적당히 살면 그게 제일인 것 같습니다.”

연무진과 있을 때와는 달리 혁련소의 말수가 제법 많았다.

어둠 속에서는 무적이라는 눈앞의 존재는 그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이자 사부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친구이기도 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법이다. 지금은 비록 그분을 넘어설 자가 없으나 어떤 불가해한 존재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는 그런 때를 대비해서 더욱 강해져야 한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분이 구한 세상이다.”

술잔을 꺾은 혁련소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다시 물었다.

“구해주었으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닙니까? 이제는 강호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하고 지켜나가게끔 하는 것이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던 혁련소는 숙부라고 칭한 존재의 눈이 섬광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누가 붙었군.]

전음성을 듣는 순간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혁련소의 눈이 그제야 섬광을 발하며 뒤로 돌아갔다. 미세한 기운들이 자신이 있는 거처의 외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노린 건가?’

이곳에 자신을 아는 자는 전무했다.

그는 기척을 숨기고 그 자세로 가만히 앉아서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야밤에 자신을 찾은 이유가 내심 궁금했다.

‘살수들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곳에 온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의문이 구름처럼 솟아났다. 자신은 소교주의 손님이다. 그런 자신에게 야밤의 은밀한 접근은 결코 좋은 뜻을 가졌을 리 없다.

‘복잡한 곳에서 살고 있었군.’

그는 연무진의 그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이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놈들이야.]

전음성이 다가드는 존재들의 위험성을 알려주었다. 그가 상당히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면 정말 강한 자들이 확실했다.

그때 창을 통해 쏘아지는 강력한 두 줄기 강기가 그의 가슴과 목을 노리고 들었다. 혁련소의 눈이 섬광을 발하며 창 쪽으로 날아갔다. 날아들던 강기는 이미 그의 손짓에 소멸되어 버렸다.

와장창!

창이 박살나며 혁련소의 육신이 창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재빨리 사방을 둘러본 그의 눈에 좌우로 갈라서 도주하는 그림자 둘이 보였다.

[오른쪽을 맡아라.]

언제나 알아서 움직이는 존재의 전음성에 혁련소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머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내 우측을 달리는 그림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팟!

엄청난 속도의 경공은 자신을 보호해 주는 전음성의 주인공이 가르쳐준 것이다. 경공의 정점이라는 이형환위를 보통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빠르기로 그림자를 쫓았다.

‘야습을 한 자치고는 지나치게 빠르군.’

상대의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신의 경공을 감안하면 금방 잡혔어야 할 대상은 지금도 방향을 바꾸어가며 십여 장 앞을 달리고 있었다.

갈지자로 내달리는 그림자는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직선을 달리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는 지형지물을 교묘히 활용하며 도주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뇌리를 스쳐가는 불길함, 혁련소는 전력을 끌어올려 그림자를 향해 직선으로 뻗어갔다. 진로를 방해하는 건물이나 나무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울리며 도주하는 인물과의 거리가 공격범위 안으로 좁혀졌다.

“멈춰!”

쐐액!

혁련소의 손끝에서 발출된 강력한 지력(指力)이 그림자의 등을 노리고 날아갔다.

퍽!

“윽!”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가던 그림자가 휘청거리며 꼬꾸라짐과 동시에 혁련소가 떨어져 내렸다. 어깨를 관통당한 인물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기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보냈지?”

발로 바닥을 기는 자의 얼굴을 들었다.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혁련소를 노려보는 인물은 순식간에 자신의 혀를 물었다.

퍽!

“끄윽!”

하지만 혁련소의 발길질이 그것을 막아버렸다.

“말하지 않으면 죽는 것을 부러워하게 만들어주지.”

“크흐흐! 역시 강한 놈이었군.”

“뭣? 나를 알고 있었나?”

“소교주가 대리인을 데리고 왔음은 교내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혁련소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대리인? 대리인이라니…….’

아주 짧은 생각을 하는 그 찰나에 눈앞의 인물은 자신의 혀를 절단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죽음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몸을 돌리는 그의 머릿속은 연무진에 대한 불길함으로 가득했다.

“젠장!”

콰아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연무진의 거처를 향해 전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검을 내려다보는 연무진의 눈동자는 불신으로 가득했다. 눈에 익은 검, 아니 검보다는 검의 주인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온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한 육신은 고개조차 들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죽어갔다.

“왜…….”

간신히 입을 뚫고 나온 말은 많은 것을 묻고 있었다.

“천하만마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푹!

가슴을 뚫은 검이 등 뒤로 빠져나왔다.

연무진의 눈이 액체를 흘렸다. 고독하고 외로웠던 자신의 인생에 웃음을 준 벗의 얼굴이 아버지보다 먼저 떠오른다. 죽는 것보다 그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그를 슬프게 했다.

“소…….”

연무진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너의 나약함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구나.”

연무진의 몸에서 검을 뺀 인물은 한동안 연무진을 응시하고선 유령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 * *

혁련소는 연무진을 안고 교주전(敎主展)으로 달렸다.

교주전이 어디 있는지 그는 몰랐다. 하지만 무조건 내달렸다. 달려가다 눈에 띄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물어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죽지 마라. 무진!”

죽은 줄 알았던 연무진이 미세한 진기로 숨이 붙어 있음을 알고서는 무작정 업고 달리는 중이다.

[좌측으로 가면 그곳이 교주전이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숙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혁련소는 지체 없이 방향을 틀었다. 고맙다는 전음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거대한 전각을 돌아서자 붉은색으로 칠을 한 거대한 전각이 모습을 나타냈다.

교주전!

분명 정문에 쓰여 있는 글씨는 교주전이라 적혀 있었다.

“쾅!”

정문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버렸다.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부수고 들어간 혁련소는 곳곳에서 날아드는 공세들을 향해 반응할 겨를조차 없었다.

“멈춰라!”

전방에서 강대한 기운 셋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타났다.

“비켜!”

“헉! 소교주님!”

막아섰던 자들 중 하나가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혁련소의 다급한 눈빛을 읽은 셋은 이내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먼저 전각 안으로 몸을 날렸다.

팟!

전각을 들어선 혁련소는 앞을 달려가는 자의 뒤를 쫓았다. 그러기를 조금이 지나자 강대한 기의 흐름이 앞쪽에서 일렁거림을 느꼈다.

쾅!

앞쪽의 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날아가며 연유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혁련소의 등에 업힌 연무진을 본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혁련소는 연유극의 앞에 연무진을 내려놓았다.

“위중합니다.”

연유극은 아들의 얼굴만을 직시한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분노!

혁련소는 그에게서 지독한 분노를 읽었다.

연유극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혁련소를 돌아봤다.

“어찌된 일이냐?”

“암습을 당했습니다.”

“암습?”

연유극의 얼굴에 광포한 기운이 어렸다.

아들을 안고 사라지는 수하의 뒷모습을 돌아본 그는 다시 혁련소에게 시선을 주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하나뿐인 아들의 생사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독한 분노의 감정만을 담고 있었다.

“들어오너라.”

연유극이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혁련소도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

* * *

“컥!”

죽어 버린 선혈이 연무진의 뺨을 타고 턱을 흘렀다.

귀의(鬼醫) 포중삭의 손길이 재빠르게 연무진의 전신을 찍고 돌자 죽었던 연무진의 혈색이 서서히 돌아왔다.

“소교주! 조금만 참으시오.”

포중삭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크게 놀랐으나 손놀림은 예의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의원으로서는 보여선 안 될 분노가 포중삭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연무진의 참혹한 모습은 포중삭, 자신의 상처인 양 지독한 분노와 통증을 가슴에서부터 피워 올렸다.

악다문 입술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연무진의 얼굴을 더럽혔다.

“살 수 있겠느냐?”

연유극의 물음은 담담했다.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에도 그는 거인의 모습을 잃지 않았지만 주변 인물들은 그가 얼마만큼 분노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포중삭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연유극을 바라보았다.

“흐흐! 당연히 살지요. 신교가 살려면 소교주가 살아야 합니다. 잘못되면 신교든 나발이든 모조리 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니까 말입니다.”

연유극이 있는 자리에서 해선 안 될 말을 거침없이 해대는 포중삭, 하지만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 못했다. 그가 연무진을 어느 정도 아끼고 대해 왔는지는 전 신교의 무사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살려라. 반드시…….”

연유극이 돌아섰다.

포중삭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연유극의 뒷모습을 쫓았다. 혁련소는 포중삭의 모습에서 진한 감정이 솟아남을 느꼈다. 진정 아끼는 자에 대한 태도를 포중삭이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오너라.”

연유극의 부름에 혁련소도 몸을 돌렸다.

* * *

연유극은 자신의 앞에 앉은 혁련소를 가라앉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단순하게 여겼거늘 물건이었나?’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새삼 다가왔다. 자신 앞에서 저렇듯 태연자약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혁련소는 고작 이십대 초반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태도를 보이기엔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다.

연유극이 입을 열었다.

“너의 가문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네가 정도맹의 세작이라도 더 이상 거론치 않겠다. 하지만 나의 부탁 하나는 들어줘야겠다.”

혁련소가 고개를 들어 연유극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저렇게 되었으니 네가 대신 극마전에 나서야겠다.”

“예?”

혁련소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극마전의 참가라니?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무진을 대신해서 네가 나서란 말이다.”

“저는 신교의 무사가 아닙니다. 더구나 극마전에 나설만한 실력이 되질 않으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소속은 문제가 아니다. 본좌가 내세우면 그것으로 자격은 충분한 것이고, 실력이야 결코 무진의 아래가 아님을 알고 있다.”

혁련소는 말없이 연유극을 응시했다.

한번 뱉은 말을 거둘 존재가 아님을 알기에 내심 매우 난감했다. 자신은 강호의 일에 끼어들어선 안 되는 존재다. 아무리 무진과 관련된 일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무진의 벗으로 이곳에 온 것뿐입니다.”

혁련소의 단호한 태도에 연유극은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에게 극마전의 참가를 부탁하는 것이 무리한 것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극마전이다. 수백 년간 이어온 불패의 전설을 자신의 대에서 마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 어쩌면 신교의 존망을 결정지을, 그로서는 무조건 막아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암습에 의한 부상이니 무진이 완쾌될 때까지 기한을 연기하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암습까지도 정당한 대결로 보는 것이 이곳이다. 본좌가 비록 신교의 주인이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불문율이다. 그리고 극마전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날짜에 열려야 하는 것 또한 깨져선 안 될 철칙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군요.”

“신교란 그런 곳이다. 약하면 절대 살아남지 못하는 강자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곳이지. 무진은 그것을 싫어했다. 어렸을 적부터 놈은 생명을 사랑하고 약자를 도우며 사는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지. 바보 같은 놈!”

연유극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혁련소가 이채를 발했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세상에 알려진 신교주의 또 다른 모습에 혁련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에 빠진 그의 귓속으로 연유극의 말이 이어졌다.

“놈들이 극마전을 이기면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당장 무사들을 이끌고 중원으로 내달릴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

혁련소의 눈이 다시 빛을 발했다.

‘천하를 걱정하는 신교주라…….’

상상이 안 가는 모습을 연유극이 보여주고 있었다. 흔들리는 연유극의 눈동자가 혁련소를 향했다. 강렬한 염원을 담은 그의 눈빛을 혁련소는 피하지 않았다.

“천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교를 걱정하는 것이지. 지금 세상에 나가면 신교는 전멸을 피하지 못해. 수백 년을 통치해 온 가문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정도맹 때문입니까?”

“신교를 무시하느냐? 놈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럼?”

“초월자들의 성역! 신마성!”

혁련소는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천하의 연유극이 두려워하는 곳, 신마성.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온 것을 알면 가관이겠군.’

신교 멸망을 손에 틀어쥔 존재의 혈육에게 신교를 부탁한 것을 알게 된다면 연유극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가는 미소가 저절로 입가에 걸렸다.

“그들은 세상일에 관여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만.”

“알 수가 없지.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관조자의 입장으로 그저 방관하는 것인지… 하지만 신교의 중원진출이 그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해서 그들의 시선을 중원으로 돌리게 한다면……!”

“멸망이겠지요.”

혁련소의 말에 연유극은 화를 내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판단할 일이다. 물론 자신도 다를 바 없었다. 혁련소가 묘한 눈빛으로 연유극을 응시했다.

“다시는 중원진출의 꿈을 꾸지 못함을 염려하시는군요.”

“그렇다.”

연유극은 눈빛을 발하며 혁련소의 살폈다.

‘결코 초마와 검마의 아이들보다 아래가 아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본능을 자극하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느끼면서도 혁련소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들을 대신할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어쩌면 충분히 극마전을 승리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느낌은 언제나 정확하게 맞아들었었다.

‘기필코 이 아이를 무진을 대신해서 출전시켜야 한다.’

둘이 시선을 주고받을 때, 밖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소교주께서 의식을 찾으셨습니다.”

“알겠다.”

대답을 하는 연유극의 얼굴엔 일말의 기쁨조차 떠올라 있지 않았다.

혁련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참으로 무정한 분이군. 저런 자리에 있으면 다 저렇게 되는가?’

자신의 아버지도 아마 저럴 것이라 생각이 들자 쓴웃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문득 자신의 아버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천하만마의 주인이라는 연유극조차도 두려워하는 자신의 아버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다.

‘크! 생각에서조차 저런 표정이라니.’

고개를 흔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연무진에게 가봐야 했다. 먼저 몸을 일으킨 연유극의 뒷모습이 눈을 찔러왔다. 고수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난처하게 되었어.’

연무진이 부탁을 해오면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러지 말기를 바라며 혁련소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온 연무진은 통증으로 인해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치료하는 포중삭의 육신 또한 흘린 땀으로 인해 장포가 몸에 붙을 정도였다.

“크윽!”

“조금만 참으시오. 소교주!”

자신의 내공을 손끝에 담아 연무진의 전신 혈도를 한 시진 동안 치료해 온 포중삭은 이미 고갈 일보직전의 상태였지만 오직 연무진을 회생시키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들어서던 연유극이 그런 포중삭의 상태를 알아챘다.

“그만 멈추어라. 포중삭!”

“여기서 멈추면 소교주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됩니다. 조금만 더하면 되니 제게 교주의 내공을 빌려주십시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포중삭이 다급하게 외치자 잠시 연무진을 응시한 연유극이 포중삭의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켰다.

‘나를 믿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감인가?’

연유극의 행동에 혁련소는 이채를 발했다.

지금 거처에는 연유극 부자와 포중삭, 그리고 자신뿐이다. 그럼에도 연유극은 거침없이 내공을 주입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손짓 한번으로 천하만마의 종주를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후후! 역시 일파의 수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군.’

혁련소는 또다시 연유극의 뒷모습에서 강자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혁련소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오를 때쯤 그의 귓속으로 미약한 전음이 흘러들었다.

[소…….]

‘무진!’

연무진의 전음성이었다.

혁련소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죽음의 기로에 처한 연무진은 내력소모가 큰 전음을 펼쳐서는 안 된다.

[무리하지 마라! 무진.]

[시간이 없다. 내말을 무조건 듣기만 해라.]

혁련소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연무진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연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기 바쁜 연무진, 혁련소의 눈동자가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나를 대신해서 극마전에 참가해 줘. 부탁이다.]

[네가 직접 참가해.]

[크윽! 농담할 시간이 없다. 나는 곧 긴 잠에 빠져들 것이다. 네가 부탁을 들어줘야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으니 어서 대답해 줘.]

[죽을 놈이 별 신경을 다 쓰는군.]

[나는 죽지 않는다. 다만 긴 잠을 자러 갈 뿐이다. 그때까지만 네가 아버님을 지켜드려라. 부탁이다. 소!]

연무진의 전음은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짧은 순간 혁련소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연무진과 등을 돌린 연유극을 바라보았다. 급격히 식어가는 연무진을 보며 어깨를 떠는 연유극, 표현하지 못하는 그의 내면이 얼마만큼 비통할지 상상이 갔다.

‘죽지 않는다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연무진을 응시했다. 마침 연무진의 눈이 살짝 떠지며 시선이 부딪혔다.

[좋다. 단 네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지.]

[고맙다. 소!]

혁련소는 연무진의 눈동자가 급격히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았다. 서서히 감기는 그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연유극의 얼굴이었다.

또르륵!

굵은 눈물이 연무진의 뺨을 타고 흘렀다.

‘행동과는 달리 꽤나 좋아했군. 저 무뚝뚝한 양반을…….’

혁련소는 연무진의 눈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소교주!”

포중삭이 거칠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늘어진 연무진은 빠르게 체온이 식어갔다. 지켜보던 연유극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지만 입은 굳게 다물어진 채 벌어질 줄 몰랐다.

“젠장! 눈을 뜨시오. 소교주!”

포중삭이 연무진의 심장을 미친 듯, 주무르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혁련소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죽지 않습니다.”

“뭣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포중삭의 고개가 황급히 혁련소를 향해 돌아갔다. 혁련소는 자신을 바라보는 연유극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진이 말했습니다. 긴 잠을 자고난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놈이 네게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연유극이 몸을 일으켰다. 혁련소의 시선이 그를 쫓았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연유극은 늘어진 연무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너를 믿는다.”

“다시 돌아오면 그땐 그런 감정쯤은 보여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동안 무척 힘들어 했으니까요.”

혁련소의 말에도 연유극은 연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섰던 그가 몸을 돌렸다. 지켜보던 혁련소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거래를 하시지요.”

연유극이 걸음을 세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혁련소를 바라보았다.

“거래라면……?”

“교주님 때문이 아닙니다. 한 달 남짓 사귄, 친구 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극마전이라고 했습니까? 하겠습니다. 무진을 대신해서 제가……!”

연유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살짝 떨림을 보였다.

“조건은?”

“무진이 돌아오면 그땐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물론 무조건 들어주셔야 할 조건이지요.”

“네가 손해 보는 거래군.”

“의리 때문이라고 해두죠.”

말없이 혁련소를 응시하던 연유극이 몸을 돌려 거처를 나갔다. 혁련소는 늘어져 있는 연무진을 응시했다.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한 포중삭이 어수선한 움직임을 보이며 그를 안아 들고서는 밖으로 나섰다.

‘확실히 귀찮게 되었군.’

* * *

극마전을 이기기 위한 방법은 무척 간단했다.

첫째, 다른 출전자들이 모두 포기하는 경우.

둘째, 다른 출전자들을 제압하는 경우.

신교의 주인을 가리는 것치고는 아이들의 장난처럼 극히 간단했다.

하지만 간단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최종 본선에 오르기 전에 이미 수많은 위험을 거쳐야 했고 약하거나 능력이 없으면 출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극마전이기에 최종 본선에 오른 후보들은 그만큼 검증된 자들이라 볼 수 있었다.

초마전의 후계자와 검마전의 후계자, 그리고 소교주 연무진이 최종후보에 오른 자들이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방식에 혁련소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거처에서 그것에 대한 말을 건넨 연유극이 물었다.

“두렵지 않느냐?”

“조금은…….”

“그들은 강하다. 어쩌면 당대의 전주들과 동격의 경지를 밟고 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자리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고 봐야겠지.”

미간을 찌푸린 혁련소가 연유극을 보며 물었다.

“무진과는 단 이십 일 정도를 지냈을 뿐입니다. 솔직히 승낙은 했지만 제 자신도 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도 네가 이해되질 않겠지. 사는 게 그런 것이다. 백 년을 함께 해도 믿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단 하루를 지내도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무진에겐 네가 후자에 속했겠지.”

“훗! 영광이군요.”

머쓱한 표정을 지은 혁련소를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시하던 연유극이 나지막이 물었다.

“너의 출신을 묻지는 않겠다. 대신 극마전을 이긴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들어줄 수 있겠느냐?”

“제가 극마전을 이겨 교주의 위에 오른다고 해도 사실상 실권은 교주께서 지니게 될 것입니다. 교에 대한 부탁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내가 실권을 지니게 된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어차피 무진이 회복되면 그에게 돌려줄 생각입니다. 뭐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제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천하인들의 주목을 받는 이런 자리는 제가 싫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혁련소를 연유극은 무거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혁련소가 말을 이었다.

“부탁이란 게 무엇입니까? 천하의 교주께서 하시는 부탁이니 무척 궁금합니다.”

연유극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초마전과 검마전의 후보들을 죽여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나의 부탁이다. 물론 네가 그들보다 강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지.”

“부탁을 하시는 것만으로도 제가 그들보다 강하다고 여기시는 것 같군요.”

“확신은 아니다만 확률이 높다고 여기고 있다.”

“흠! 제발 교주님의 생각이 틀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도 젊은 나이에 타지에서 귀신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자들을 죽이고 싶으시면 당장에라도 직접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혁련소의 물음에 연유극이 눈빛을 발하며 대답했다.

“그 아이들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극마전뿐이다. 그 외의 방법으로 죽인다면 교도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는 사분오열 갈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을 죽이려 하심은 역시 신교의 중원진출을 막으시려는 것 때문입니까?”

“그렇다.”

혁련소가 의구심이 가득한 빛으로 되물었다.

“제가 이긴다면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교주의 명으로 막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중요한 재원들을 죽이려 하시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혁련소의 말처럼 극마전에 나선 후보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기재들이다. 비록 가는 길을 달리하는 경쟁자의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중요한 인재들이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는 강력한 우군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연유극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누구보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연유극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것은 나름대로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교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 물론 너도 예외는 아니다.”

“솔직하시군요. 저를 이용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출전을 거절 못 하는 것을 보니 제게도 무진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을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거침없는 대답에 연유극의 표정이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혁련소의 태도에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스스로 천하만마의 주인이라 자부하던 자신보다 눈앞의 자식같이 어린 청년이 더욱 득도를 한 고승처럼 보였다.

혁련소의 눈동자가 섬광을 발했다.

“암습까지도 극마전의 연장으로 생각한다는 말씀, 사실입니까?”

“그렇다. 왜 그것을 묻느냐?”

혁련소의 눈동자가 한광을 발했다.

“눈앞에서 친구가 당했습니다. 갚아 주지 않으면 왠지 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자칫하면 네가 당할 수도 있다.”

혁련소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기왕 나선 것이라면 확실히 존재감을 심어줄 작정입니다.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말이지요.”

연유극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는 어쩌면 눈앞의 혁련소가 자신이 측량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 * *

혁련소는 자신의 앞을 마주한 숙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빙설로 한 잔을 기울이던 그는 그런 혁련소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까지 부려먹을 작정이냐?”

“어쩌겠습니까? 그 방면에선 숙부께서 천하제일이 아닙니까?”

“신교를 위해서 손발을 놀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혁련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빈 잔을 채워 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십시오. 아무 놈이나 상관없습니다. 그저 한 놈만 골라서 죽지 않을 만큼만 손을 봐 주시면 됩니다.”

“확실히 그 뻔뻔함은 주공을 앞서는군. 좋다! 한 놈은 제거해 주지.”

“하하! 역시 숙부님이십니다. 벌써 손이 근질근질하십니까?”

“솔직히 네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한 놈 정도는 족칠 생각이었다. 감히 신마의 혈족이 벗으로 생각하는 아이를 암습하다니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 같았으면 신교를 아예 쓸어버리자고 했을 것이다.”

사실이었다.

혁련소에겐 모두 여덟의 숙부들이 있었다. 물론 하나같이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겐 아버지와 같은 존재들이 그들이다. 하나하나가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면 구주팔황을 진동시킬 존재들이 그들이었고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천하와 전쟁을 벌이고도 남을 존재들이기도 했다.

“다행이군요. 그나마 제일 평화적인 숙부께서 호위를 맡으신 기간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평화적이라? 웃기는군.”

“뭐, 여덟 분 중에서 그렇단 말이지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숙부님도 절대 평화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하!”

혁련소의 낭랑한 웃음에 숙부, 흑야의 얼굴 근육이 살짝 움직였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극마전을 이기는 방법 중에 다른 놈들이 포기하면 된다는 조항이 있다더군. 알고 있느냐?”

“교주에게 들었습니다. 아주 괜찮은 방법이지요.”

“그렇지. 아주 괜찮은 방법이지. 괜히 힘쓰지 말고 그 조항을 이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쉽고 빠르고, 게다가 가장 확실하기도 하다.”

“생각 중입니다.”

흑야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혁련소를 응시하는 눈빛이 묘했다.

“배짱이 좀 늘었군. 물론 생각보다 늦었지만…….”

“배짱이라… 글쎄요. 기왕 하기로 작정했으니 보다 확실하게 겁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야 나중에 뒷말이 생기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것도 좋겠지. 그저 패도를 추구하는 놈들은 힘으로 눌러버리는 것이 최고다. 주공께서 즐기시는 방법이 그런 쪽이지.”

빙설로가 떨어졌다. 흑야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이거 제법 괜찮은 술이군. 나중에 그놈이 깨어나면 좀 얻어가야겠어. 그나저나 극마전이 내일이니 오늘 밤 한 놈을 보내주지.”

팟!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야의 모습은 그 자리에 없었다. 혁련소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갈수록 괴물이 되어 가시는군. 나중에 옥황상제가 상당히 골치가 아프겠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혁련소는 침상에 몸을 누이며 눈을 감았다. 이십 일 남짓한 기간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그에게서 벌어졌다.

‘신교의 주인이라…….’

천하만마의 주인이 가려질 극마전, 우습게도 자신은 그런 천하만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의 아들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함을 떠올렸던 그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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