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천년금역으로 가는 길
빠르게 산악지역을 이동하던 셋은 산악지역이 끝나는 시점에서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상당히 좁은 협곡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하지만 협곡 따위에 걸음을 멈출 그들이 아니었다. 일단의 무리들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강한 놈들이군.’
흑야는 협곡의 좌우에 포진하고 있는 무리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스물에 달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기운을 발산하며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특히 선두에 선 둘은 측정불가의 경지에 접어든 듯, 조금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고수들이다. 조심해야겠어.]
그의 전음이 아니더라도 혁련소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금껏 신교에서 봐왔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들임을 그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용케, 이곳까지 잘도 왔구나.”
날카로운 비수를 연상시키는 인상을 지닌 노인이 차갑게 그들을 직시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어깨에 두 자루의 검을 멘 그의 시선은 오직 흑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스르릉!
그들이 검을 뽑아 들자 순식간에 주변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단순한 검의 기운만으로 이 정도의 변화를 준다면 이들이 고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외부인들과 함께 발을 맞추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특이하게도 붉은 적발을 늘어뜨린 노인이 연소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말 속엔 감당 못할 지독한 살기가 진득하게 숨어 있었다.
“부끄러운 짓을 한 건 당신들이 아닌가요?”
연소민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는 내심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녀도 무인이다. 본능적으로 두 노인의 수준이 엄청남을 느꼈다면 대꾸하는 지금의 태도가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네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만 본교를 우습게 여긴 죗값은 치러야지.”
“흥! 아버님과 오라버니를 암습한 당신들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우습지도 않군요.”
“교주의 의무를 소홀했다면 당연히 사라져야지. 그게 교를 위한 것이 아니겠나. 네 아빈 처음부터 그자리가 어울리지 않았다.”
“닥쳐요!”
연소민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흑야와 혁련소는 전음을 주고받으며 앞으로의 상황을 준비했다. 전면전을 벌여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연소민 때문이다.
[중원으로 들어서는 것은 포기한다. 일단 내가 공격을 퍼부으면 넌, 저 아이를 데리고 북쪽으로 무조건 뛰어라! 반나절을 가다 보면 대지를 가른 천장단애가 나올 것이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라!]
[혹시 세가가 있다는 그곳입니까?]
[그렇다. 준비해!]
흑야의 검이 은은한 강기를 피워내며 묘한 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혁련소는 전음으로 연소민에게 상황을 주지시키고는 그녀의 지척으로 다가갔다.
흑야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읊조렸다.
“신교에 꽤 쓸 만한 종자들이 있었군.”
무지막지한 기운이 주변으로 발산되며 막아선 신교의 고수들을 긴장시켰다. 쌍검을 뽑아 든 노인의 얼굴에 놀란 빛이 나타났다.
‘고수다!’
치르륵!
노인의 쌍검이 기이한 울음을 터트리며 검강을 쑥 뽑아냈다. 놀랍게도 검강의 길이는 한자에 달했다. 이 정도면 초절정은 그냥 회쳐먹는 수준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고수가 둘이나 되었다. 그리고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자들이 열여덟이라면 결과는 불을 보듯 훤했다.
“너희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었군. 일개 지부의 것으로 보기엔 과한 전력이야. 뭐지? 중원이라도 노렸던 거냐?”
“대답은 죽어 지옥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신교의 고수들이 벼락같이 선공을 가했다. 흑야의 육신이 허공으로 떠오른 것은 쌍검을 쥔 노인의 공세가 그의 허리어름에 떨어질 때였다.
“지금이다!”
번쩍!
일시적으로 시력을 앗아갈 엄청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혁련소와 연소민이 날쌘 제비처럼 북쪽으로 경공을 펼쳤다.
“교활한 놈들! 두 연놈을 쫓아라!”
쌍검을 쥔 노인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명령을 따르는 자, 아무도 없었다. 워낙 창졸지간에 발생한 빛의 폭발이 일시적으로 시력을 앗아간 것이다. 상황을 인지한 노인은 쌍검을 교차하며 흑야를 노렸다. 동시에 다른 고수 하나가 그의 뒤쪽 방위를 차단하며 움직였다.
쐐액!
흑야의 검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직선거리를 날아갔다. 그 강맹함에 쌍검을 든 노인이 감히 맞설 생각을 접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흑야에게 몸을 뺄 기회를 주고 말았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그의 육신이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의 가운데로 스며들었다.
결코 약하지 않았던 자들이 속절없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노인들이 그를 덮쳤지만 그는 이미 먼 거리 밖을 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혁련소와 연소민의 이동방향을 빛의 폭발 때문에 놓쳐버린 그들이었다.
바득 이를 간 그들은 이내 흑야의 뒤를 쫓았다.
* * *
팟!
우거진 산림 속으로 되돌아 들어온 혁련소와 연소민은 곧장 북쪽을 향해 달렸다. 기감을 열어 뒤를 살폈으나 걸려드는 기운은 전무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은 둘은 쉬지 않고 북쪽을 향했다.
“본단보다 지부에 더 강한 자들이 있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소.”
“관서지부의 고수들이에요!”
“관서든 관동이든 거꾸로 된 인력배치가 아니오. 아니면 관서지방을 삼킬 생각이라도 했던 것이오?”
“그건 저도 몰라요.”
혁련소는 조금 전, 두 노인의 경지를 새삼 떠올렸다. 일대일로는 자신이 감당 못 할 고수들임이 틀림없었다. 그 정도면 교주 연유극과 비슷한 수준으로 봐야 했다. 그런 엄청난 강자들이 고작 일개 지부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빚은 수십 배로 갚아주지!”
태어나서 이렇듯 도주하기는 처음이다. 은근히 수치심이 생겨났다. 그는 연소민을 돌아봤다. 그녀의 호흡이 다시금 거칠어지고 있었다. 붉어진 뺨이 무척이나 고혹적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갑시다!”
“뭐 하는 짓이에요!”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잖소!”
혁련소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는 거침없이 속도를 높였다. 그러기를 반나절이 지났을까? 둘은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단애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혁련소의 얼굴이 꽤나 상기되어 있었다.
‘이곳이 가문의 뿌리가 잠들어 있는 곳이구나.’
위대한 혁련 가문이 시작된 곳, 그곳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 안에 불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자신의 아버지와 그보다 더한 무적의 고수였던 증조부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심하게 요동쳤다.
다가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후욱! 젠장! 무지 깊구나. 저길 어떻게 내려간단 말이지?’
난감하고도 당혹스러웠다.
숙부는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훤히 노출된 평지가 아닌 저 깊숙한 밑이 분명했다. 연소민이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우린 지금 무척 난감한 상황에 빠졌소.”
“그게 무슨 소리죠?”
“흠! 그게 말이오. 흠! 지금 우리는 저 밑으로 내려가야만 하오. 뭐, 이곳에서 놈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내려가지 않아도 되지만 당신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제가 방해가 되었군요. 아니! 걸림돌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연소민이 대번에 우울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런 반응에 혁련소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쳇! 그게 그렇게 되나…….’
경솔했던 입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핀 혁련소가 눈을 반짝 빛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흑야는 자신의 뒤를 추격해 오는 신교의 고수들을 돌아왔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특히 적발을 휘날리며 가장 선두에서 날아오는 노인은 전신에 은은한 적광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괴이했다.
‘마공을 익힌 놈이군. 저런 놈이 지금껏 본성의 첩보에서 비껴나 있었다니…….’
그가 몸담고 있는 성의 첩보력은 개방의 몇 배를 능가한다.
고금최강의 환술을 지닌 존재가 그것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수법은 전통의 전서구는 어린아이들의 장난으로 여길 만했다. 그런 존재의 눈에서 완벽하게 비껴나 있었다면 상당한 준비를 했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고수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당장 느껴지는 기운은 자신의 적수가 아니었다. 암습을 한다면 일도양단이 가능할 것이오, 전면전을 벌인다면 두 시진 정도면 썰어낼 정도로 여겨졌다.
흑발 사내는 달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울창한 수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좋군!’
수림 속으로 들어서자 행동반경이 상당히 좁아졌다. 물론 이런 환경은 그에게 상당히 유리함을 가져다준다. 은신하고서 암습을 한다면 자신의 검을 피할 자, 세상에 단둘뿐이다. 자신의 주인이 하나요, 그보다 더 한 주인의 조부가 그랬다.
‘어차피 놈들은 끝까지 쫓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수를 줄여놓는 것이 좋겠지.’
생각은 이내 행동으로 옮겨졌다.
“놀라운 놈이군! 순식간에 기척을 감추다니…….”
신교의 고수들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느껴지는 기척은 동물의 그것뿐이었다. 쌍검을 든 노인이 살벌하게 외쳤다.
“놈을 잡아 반드시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모두 세 명씩 조를 이루어 수색하며 전진한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교의 고수들은 조를 이루어 사방으로 산개했다.
“살수였나?”
“살수라면 결코 그 정도의 힘을 지닐 순 없다. 특이한 무공을 익힌 놈이 맞을 것이다.”
“천하에 저 정도의 고수라면 교의 첩보망에 벌써 들어왔을 텐데… 분명 놈은 처음 보는 놈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적발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그곳에서 나온 놈은 아니겠지?”
“그곳이라면… 젠장! 심장 떨리는 소릴랑 그만 해라!”
적발 노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들이 거론한 그곳은 천하를 관조하는 괴물 같은 존재가 그 위대한 육신을 웅크리고 있는 곳이다. 검을 들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면 절대 적이 되고 싶지 않은 존재… 둘은 한차례 몸을 떨었다.
섬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신교의 고수들은 신중하게 전진했다. 이상하게도 새나 풀벌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서걱!
섬뜩한 소음이 울리며 가장 우측을 전진하던 자의 목이 느닷없이 피를 뿌리며 날아올랐다. 비명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피를 뒤집어쓴 자들이 기겁을 하고서 주변으로 예측공격을 퍼부었다.
“여기다!”
콰지지직!
난무하는 검강들이 주변을 모조리 초토화시켰지만 흑발 사내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적발 노인이 빠르게 그곳으로 날아갔다.
“여우같은 새끼!”
이를 갈았지만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서걱!
이번엔 좌측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두 고수의 얼굴이 흉악스럽게 구겨졌다. 이번에 비명뿐만 아니라 핏물조차 튀지 않았다. 그것은 완벽한 괘적에 의한 살인을 뜻한다.
“비켜!”
두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좌측으로 빛살처럼 날아가며 손을 휘저었다. 무지막지한 기운들이 목이 잘린 자의 주변으로 날아갔다.
콰과과광!
장정의 허리둘레만 한 거목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을 덮었다. 뒤이어 다른 자들의 검강이 최초 공격지점의 주변을 쓸었다.
콰지지직!
그들의 합공은 무시무시했다. 인간이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확신할 만큼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사방을 가리며 솟아오른 나뭇가지들과 흙먼지가 가라앉기까지는 대략 일 각이 지나갔다.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던 적발 노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핏물 한 방울도 없었다. 또다시 실패한 것이다. 강한 자들은 실패 뒤에 따르는 분노도 더 컸다. 둘은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자 눈을 번득이며 주변을 살폈다.
“젠장! 모두 한곳으로 모여서 전진한다!”
더 이상의 피해가 두려웠던 신교의 고수들은 이내 둥근 방진으로 뭉쳐 전진을 시작했다. 방진은 사방을 경계할 수 있는 최상의 방어진이다. 그 옛날 촉한의 제갈무후도 소수의 병력으로 적을 상대할 때, 애용했었다고 전해질만큼 수비력에 있어서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방진이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존재는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존재였다. 방진의 뒤쪽 중앙을 밟고 섰던 자가 목을 부여잡고 털썩 쓰러졌다.
이번엔 베기가 아닌 찌르기에 당한 것이다. 잡은 두 손 사이로 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솟아나는 것을 보며 쌍검을 든 노인이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쳤다!
“이놈! 모습을 나타내어라!”
사위는 지독한 적막만이 흐를 뿐이었다.
신교의 고수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건 마치 귀신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최소한 손을 쓸 때, 기척이라도 느껴졌어야 했지만 그것조차 없었으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두 노인을 제외한 다른 자들이 서서히 두려움이란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도 어지간한 고수들, 결코 적이 자신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사지를 썰어 젓을 담그고 말겠다! 망할 새끼!”
적발 노인이 바드득 이를 갈았지만 그 역시 마땅한 방도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자신을 하늘처럼 여기는 수하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돌아가면 목숨을 건질 순 있다.”
어디선가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이 그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닥쳐! 개새끼야!”
적발 노인이 거친 욕설을 쏟아냈다. 그러나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해봐야 실패할 것이 당연하기에 괜한 진력의 소모를 아꼈다.
“네놈들이 두려워 도주한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사소한 다툼 정도로 여겨줄 수 있다.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면 여기서 걸음을 돌려라!”
“개소리 그만 하고 모습을 드러내라!”
으드득!
두 노인의 이가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흑야는 신교의 고수들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몸을 은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귓속을 파고들 정도의 거리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군. 서둘러야 한다.’
그는 혁련소가 걱정되었다.
‘다음에 모조리 죽여주마.’
육신이 소리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방향을 틀어 금역이 있는 북쪽으로 새처럼 빠르게 이동했다. 산악지역을 벗어나면 천산의 끝자락이 보이고 그 밑에 천년금역이 존재했는데, 그곳까지 가려면 적어도 반나절을 소요된다. 그 시간 동안 아무 일 없기만을 바라며 그는 최대한의 속도로 직선거리를 달렸다.
흑야의 육신이 울창한 침엽수림을 막 지나갈 때였다.
끼아악!
허공에서 거대한 독수리가 사내를 보며 울어댔다. 어지간한 사람도 낚아챌 만큼 거대한 독수리는 그의 괘적을 쫓아 움직이며 연신 울어댔다.
‘걸렸군!’
흑야는 주변을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예상대로라면 독수리의 울음을 들은 신교의 고수들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예상은 다르지 않았다.
쐐애애액!
공기를 가르며 수십 발의 강전들이 그의 육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보통의 화살과는 괘를 달리하는 속도였다.
따다다당!
검을 휘둘러 강전들을 모조리 튕겨낸 흑야는 바닥을 차고 상당한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침엽수의 끝부분에 내려선 그는 빠르게 주변을 감지했다.
‘고수들이군! 신교가 이렇게 강했었나?’
느껴지는 기운들은 10여 명 정도였는데, 정제된 호흡과 칼날 같은 예기로 보아 상당한 고수들임이 예상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강자들의 출현이 늘어나자 그는 신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놈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소가 위험할 수도 있다.’
탓!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거리는 가는 나뭇가지를 차고 오른 흑야는 빠르게 북쪽으로 질주를 거듭했다. 10개의 그림자들도 뒤를 쫓아 수림을 타고 솟아올랐다. 추격하는 속도가 확실히 이전의 고수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러나 그들보다 흑야가 더욱 빨랐다.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추격자들의 시야에서 흑야의 모습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삐익!
추격자들에게서 호각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자 허공을 비행하던 거대한 독수리가 흑야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늦으시네요.”
“그러게…….”
연소민의 말 속에 제법 불안감이 묻어났다. 혁련소 역시 드넓은 평원의 끝을 주시하며 다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흑야가 말했던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그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둘이서 저 밑을 내려가라고 했다.
“추격을 뚫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강한 분이오. 미안한 말이지만 신교에서 그분을 당해낼 고수는 사실 없을 것이오. 교주님조차도…….”
“미안해할 것 없어요. 저도 그 부분에 인정하니까…….”
그녀가 의외로 고분고분 수긍했다.
연소민도 추격전을 벌일 때, 흑야의 무공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결코 약하지 않은 그녀였기에 그의 무력이 엄청나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릎에 고개를 묻으며 연소민이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되었지?”
그리고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녀를 힐끗 쳐다본 혁련소는 눈을 가늘게 하고서 평원의 끝을 주시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흑야가 그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한다.
금역 밑으로 내려갈 것인지, 아니면 방향을 선회하여 중원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말이다. 혼자라면 중원으로 가는 것을 택할 그였다. 제아무리 신교가 천라지망을 펼쳤더라도 작정하고 도주한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실력이 혁련소에게 있었다.
‘젠장! 무진! 놈 때문에 제대로 엮였어.’
연무진이 문득 떠올랐다.
생사를 모르는 벗이 떠오르자 가슴 속에서 아련한 통증과 함께 살기가 생겨났다. 말없이 머리를 파묻고 있던 연소민이 살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적인가요?”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미 손은 자신의 연겸을 틀어쥐고 있었다. 혁련소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생겨났다.
“아니오! 잠시 딴생각을 했었소.”
“놀랐잖아요. 생각하면서도 살기를 피우고 그런가 보죠?”
“아주 못된 놈을 생각하니 저절로 생깁디다.”
혁련소가 웃음으로 그녀의 긴장을 풀어줬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곳 북방지역은 밤이 빨리 찾아온다. 그리고 밤이 되면 기온이 엄청나게 내려간다. 모두가 북방지역 특유의 기후 탓이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혁련소가 초조함을 드러냈다. 어둠이 내려앉자 평원의 끝은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이제 일 각 정도가 지나면 땅과 하늘이 같은색으로 된다. 그렇게 되면 눈으로 어떤 사물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해진다.
끼아악!
독수리의 울음이 둘의 귓속을 울렸다. 어두워진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독수리를 본 연소민이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짤막한 신음성을 흘려냈다.
“혈응!”
혁련소가 그녀를 돌아봤다.
“교의 특수부대들이 데리고 다니는 독수리예요. 그들이 나타났다면…….”
“특수부대라면?”
“인간병기로 키워진 자들을 따로 모아서 만든 전투부대가 있어요. 그들은 교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떠돌며 작전을 수행하는데, 그들이 왔군요. 저 독수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들이 있다고 했으니 틀림없을 거예요.”
혁련소는 연소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만으로 그녀가 거론한 자들이 무척 위험한 존재들임을 짐작했다.
끼아악!
또다시 날카로운 독수리의 울음이 주변을 울렸다.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가 둘을 향해 날아들었다. 놀란 둘은 검을 뽑아 들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림자는 둘을 넘어 그대로 달렸다.
* * *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떠오른 만월의 고고한 빛이 만월만큼이나 높은 곳에서 세상을 아우르는 존재의 어깨를 비추었다.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긴 사내는 성의 첨탑에서 섬서성의 야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옆을 흑색 장포를 걸친 장한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금발을 늘어뜨린 이국적인 모습을 물씬 풍겨내는 장한의 어깨엔 새하얀 털을 자랑하는 작은 북방여우가 꼬리를 말고 앉아 있었다.
“추격을 받고 있단 말이지?”
“상당한 전력이 뒤를 쫓고 있습니다.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고작 신교 따위의 추격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이냐?”
“일행이 있습니다. 실각한 연 교주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 때문에 아직 북방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내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잠시 입을 닫고서 섬서의 야경을 느릿하게 쓸어보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장한은 사내의 눈빛을 감히 마주보지 못했다.
“내가 직접 가겠다.”
“옛?”
“준비해.”
“주공, 주공이 움직이시면 천하가 소란에 빠집니다. 그냥 저희들이 다녀오겠습니다.”
캉!
사내가 손짓을 하자 북방여우가 사내의 어깨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장한이 다시 읍소했다.
“이번 일은 저희들에게 맡겨 두십시오. 비밀리에 놈들을 제거하고 데리고 오겠습니다.”
“신교 정도면 그 아이의 신분을 벌써 알아냈을 것이다. 그런데도 놈들은 추격을 하고 있다. 내가 직접 움직일 이유는 되는 것 같은데…….”
“……!”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장한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니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떨어진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 자신의 주인이다.
“휴! 시끄러워지게 생겼네. 이거 괜히 보고를 드렸군.”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자 장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장한의 뒤쪽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자식아! 그러게 그냥 우리끼리 가자고 했잖아! 하여튼 저놈의 주둥이는…….”
험악한 인상의 장한이 투덜거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은색갑주에 붉은 흉갑을 두른 사내가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주공께서 가시면 주모님들도 반드시 함께하실 것이니 미리들 준비해. 진무! 넌 내려가서 마차와 기본 식량들은 준비하고 진천은 노주께 미리 알려드리고 와!”
“쩝! 저도 저렇게 나오실 줄 몰랐지요.”
학사풍의 장한, 진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가 다 갈순 없겠지. 누가 남을 테냐?”
“난 싫다. 이번 기회에 코에 바람이라도 넣고 오련다.”
“나도!”
“내가 남겠다는 생각은 아예 집어치우는 것이 좋아.”
모두가 같은 대답이다.
의사를 물었던 사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기해서 지는 놈이 남는 거다!”
“좋지!”
“무엇으로 할 테냐?”
귀에 상아귀고리를 한 사내가 히죽 웃으며 나섰다.
“저 앞에 백어산을 가장 빨리 돌아오는 놈이 이기는 것으로 하지. 물론 꼴찌하고 그 앞이 남기로 하고 말이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백어산을 쳐다봤다. 그저 평범한 야산에 불과했던 백어산은 지금 강호의 최고 명산으로 불린다. 바로 자신들이 몸을 담고 있는 이곳 때문이다.
쾅!
느닷없이 둘의 육신이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뒤이어 다른 존재들도 어둠을 가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런! 썅!”
상아귀고리를 한 사내와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욕설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 * *
<급! 신마성주가 움직였음. 방향은 서북쪽으로 추측되며 팔대천왕, 모두가 함께하고 있음. 추적불가! 추후 지시요망.>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성을 떠나는 그 순간, 위와 같은 내용의 전서를 묶은 수십 마리의 전서구들이 일제히 중원의 곳곳으로 퍼덕이며 날아갔다. 섬서의 정도맹과 신강의 신교를 비롯한 구파와 오대세가들, 그리고 심지어는 세외까지 포함되었다.
세상에 황제가 있다면 강호엔 황제보다 더한 존재가 모든 이들의 정점에서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존재가 이십 년 만에 드디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급보를 전해들은 모든 세력들은 그의 강호행이 어떤 목적을 지녔는지에 대한 정보입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의 행선지와 목적을 알아내야 한다.”
사파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마도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은신처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정파는 그들이 지나가는 행선지에 놓인 문파들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공문으로 지시했다.
강호로 나선 숫자는 고작 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강호인들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천년역사의 강호에 유일하게 무적이라는 단어를 강호인들 스스로 붙여준 존재, 신마성주 신마(神魔) 혁련천후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 *
쾅!
어두운 밤하늘이 폭발이 일으킨 빛으로 번쩍거렸다.
“젠장!”
혁련소는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불기둥들을 보며 당혹해했다. 이런 공격방식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법이다. 거대한 독수리들이 하늘을 나르며 연속적으로 포탄의 위력을 상회하는 불줄기를 뿌려대니 도저히 피할 공간이 없었다.
“저걸 믿고 반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그렇겠군.”
셋은 빠르게 방향을 바꿔가며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그러나 어찌 인간이 독수리의 빠름을 넘어서겠는가. 그들이 이동하는 앞쪽으로 불줄기가 후드득 쏟아졌다.
콰과광!
평원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지며 불기둥들이 수십여 장의 길이로 솟아올랐다. 뜨거운 열기가 셋의 얼굴을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없소?”
“없어요! 저도 저런 게 있는 줄은 몰랐어요!”
교주의 딸인 연소민이 몰랐다면 말 다한 것이다. 체념한 혁련소는 흑야에게 물었다.
“저곳으로 내려가실 생각입니까?”
“현재로선…….”
공중공격을 벗어날 방도가 없었으니 방법은 금역으로 내려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흑야는 뭔가를 찾으며 천장단애의 주변을 계속 돌았다. 혁련소가 하늘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에게 말했다.
“떼거리로 몰려옵니다! 당장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뛰어내리면 생사를 장담 못 해! 길을 찾아야 한다!”
“절벽에 길이 있단 말입니까?”
“있다!”
흑야가 갑자기 방향을 우측으로 틀었다. 둘도 황급히 방향을 바꾸어 그의 뒤를 쫓았다. 공격을 퍼붓던 독수리들이 그들의 괘적을 쫓아 방향을 트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상당한 속도로 직선을 날다가 급히 방향을 바꾸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수리들은 이내 그들이 질주하는 상공을 날고 있었다.
“또 옵니다!”
“저쪽으로!”
“어머!”
콰르르르!
상당히 가까운 뒤쪽에서 화염이 솟아오르며 주변을 밝혔다. 동시에 어둠을 가르고 날아드는 암기들이 섬뜩한 파공성을 울렸다.
따다다당!
호신강기를 뚫지 못한 암기들이 울음을 터트리며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흑야의 얼굴이 지독한 살기를 품어내기 시작했다. 큰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이 시간이 갈수록 위험한 지경으로 바뀌어가자 내면에 잠재되었던 광포함이 서서히 그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가 하늘을 올려봤다.
수십 개의 불꽃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독수리가 불꽃을 뿜어내는 일은 전설에도 없는 괴사, 당연히 사람이 독수리의 등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만큼 독수리는 거대했다. 사내의 손이 벼락처럼 하늘로 뻗어졌다.
끼아악!
“으악!”
소리도, 형체도 없는 무엇인가가 가장 선두에서 비행하던 독수리의 가슴을 그대로 뚫어냈다. 불꽃이 사라지며 독수리와 사람이 추락하며 만들어낸 둔탁한 소음이 사방을 울렸다. 혁련소가 흑야를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즉에 죽여 버리지 그랬습니까!”
“쉽지 않아!”
“쩝!”
그들의 앞에 거대한 암벽이 나타났다. 흑야의 육신이 빠르게 암벽을 타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혁련소가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자신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고 있었다. 상당한 속도였다. 그만큼 추격하는 자들이 고수라는 반증이다.
“젠장!”
혁련소는 연소민의 손을 잡고는 빠르게 암벽 뒤쪽으로 돌아갔다.
암벽이 위치한 곳은 절벽의 끝부분이었다. 미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절벽 밑에서 들려왔다. 흑야가 절벽의 끝에 서 있었다.
“여기서 뛰어내린다.”
“예?”
“이곳이 가장 낮은 곳이다. 죽지는 않으니 서둘러!”
흑야가 성큼 걸어왔다. 혁련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함께 뛰어내릴 생각이 아니군요.”
“난, 놈들을 처리해야지.”
“위험합니다!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한 놈들입니다. 그냥 이곳에 은신했다가 기회를 보는 것이…….”
흑야가 차갑게 웃었다.
“내 성격에 그런 건, 안 어울려. 걱정 말고 뛰어내려. 혹시, 붉은 연못을 보게 되면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만 명심해. 간다!”
그 말만을 남기고 흑야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뒤이어 비명과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제대로 나셨군.”
“위험하실 텐데…….”
연소민이 굳은 얼굴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혁련소가 상황에 맞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하늘도 저분을 어찌할 순 없소. 그러니 우린 그냥 뛰어내립시다!”
“도와야 하지 않아요?”
“우리가 이곳에서 사라져주는 게 돕는 거요.”
혁련소가 연소민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의 입이 뭔가로 막혔다. 따뜻한 그것은 혁련소의 입술이었다.
쐐액!
귓속으로 들려오는 바람을 찢는 소리는 자신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합시다!”
탓!
혁련소의 말에 연소민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떨어지는 속도가 확실히 느려졌다. 혁련소가 검을 뽑아 벽으로 뻗었다.
콰지지직!
“보고만 있지 말고 같이해요!”
연소민이 그제야 그의 뜻을 짐작했다. 그녀도 재빨리 검을 뽑아 혁련소와 같은 방법을 취했다. 그러자 확실히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 정도면 천길 절벽이라도 무사할 정도의 속도였다.
혁련소가 위를 올려봤다.
만월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웃는 듯, 무척이나 크고 밝았다. 숙부가 싸우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바닥이 보여요!”
희미하게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당한 빠르기로 흘러가는 물줄기와 암벽 곳곳에 생겨난 작은 수풀들은 묘하게도 모두 붉은색이었다. 둘은 곧 바닥에 무사히 발을 내디뎠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달빛에 비쳐 절벽의 끝부분이 희미하게 보였다. 엄청난 높이의 절벽을 뛰어내린 것에 절로 소름이 돋아났다.
혁련소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느낄 겨를은 없었다.
“저쪽으로 가봅시다!”
“무턱대고 가면 어떡해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소!”
연소민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연소민의 고운 아미가 살짝 올라갔다.
“이젠 손을 잡는 것쯤은 아주 마음대로 하시네요?”
“……!”
“저쪽으로 가요!”
둘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발밑을 흐르는 물줄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붉었다. 마치 사람의 핏물과도 같은 물줄기를 보며 연소민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이곳 어딘가에 가문의 본가가 있다. 잘됐군. 기왕 이렇게 된 거, 그곳이나 찾아봐야겠다.’
혁련소는 주변을 살피며 눈에 내공을 실었다.
그러나 시야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한밤중이라도 내공을 끌어올리면 대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뭐야! 전혀 시야가 밝아지질 않잖아!’
미끈!
“어멋!”
발이 미끄러져 휘청거리자 비명은 연소민이 질렀다. 간신히 중심을 잡아 물줄기로 떨어지는 것을 피한 혁련소는 미안하다는 시늉을 해보이고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연소민이 조금은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군요. 내공과 상관없이 시야가 일정해요. 마치 안개가 덮은 것처럼…….”
“산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다고 소문난 곳이 이곳이오. 이상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소.”
꽉!
연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혁련소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천년금역에 대한 강호의 소문을 새삼 떠올린 그녀는 바싹 몸을 밀착시켰다. 둘이 한몸이 되어 일 각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좁고 습했던 계곡이 사라지고 상당한 넓이의 분지가 나타났다.
“밝아졌어요!”
탁했던 시계가 걷히자 대낮처럼 주변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지는 절벽 밑이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넓이를 넓이였다. 우거진 수림도 놀라울 정도였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저런 수림이라니, 놀랍군요.”
“그러니까, 천년금역이 아니오. 비정상이 정상이라 생각하시오.”
둘은 빠르게 분지를 가로질러 걸었다.
‘뭐야? 가문의 본가가 어디 있단 말이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 사는 집이라곤 보이질 않았다. 아니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었다. 연소민이 혁련소를 보며 물었다.
“뭘 그리 찾으세요?”
“아, 아니오! 그냥 신기해서…….”
“너무 멀리가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분이 오신다고 했잖아요.”
“괜찮소. 살아만 있으면 어디에 있다한들 찾아오실 분이오. 그러니 구경이나 좀 합시다.”
“천하태평이군요.”
연소민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천하태평이 아니라 담대한 거요. 사내가 고작 이런 일 따위에 호들갑을 떨 수는 없지 않겠소.”
혁련소는 여전히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살았다면 이곳에 그 흔적이라도 있어야 했다. 다른 곳은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고 시뻘건 연못과 역시 시뻘건 물줄기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봐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없었다.
‘설마, 이십 년 만에 먼지로 사라진 것은 아닐 테고… 진법이라도 펼쳐져 있단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혁련소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여덟 명의 숙부들 중, 한 존재가 문득 떠올랐다.
‘사공 숙부가 있었지! 분명 사공숙부의 진법이 이곳을 보호하고 있을 거야.’
혁련소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밝아지자 연소민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이곳으로 떨어진 게 그렇게 좋은가 보죠?”
“내가 언제 좋다고 했소?”
“얼굴이 그렇게 말해 주네요. 뭐가 좋아서 싱글거리죠?”
혁련소는 연소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조금 전의 두려운 기색을 걷어낸 그녀는 예의 차가움으로 돌아가 있었다. 북해의 얼음을 연상시키는 차가움은 그 고고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무슨 짓이죠?”
혁련소가 갑자기 말없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연소민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혁련소는 연검을 손까지 올린 그녀를 보고는 어이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 쉽시다. 죽기 살기로 뛰었더니 무척 피곤하군… 배고프지 않소?”
“……!”
안 고플 리가 있나. 하루를 꼬박 추격을 피해 뛰었으니 뱀이라도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그렇다고 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자니까…….
혁련소가 주변을 흘긋거렸다.
“짐승이라도 있으면 사냥이라도 하지. 이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온 거야? 설마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테고…….”
“그게 무슨 소리죠?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이 있단 말인가요?”
“아, 아니오! 배가 고파서 헛소리가 나온 모양이오.”
자신의 입을 원망한 혁련소가 벌떡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짐승이라도 있는지 살펴보고 오겠소.”
“함께 가겠어요!”
혼자 있기가 무서웠던 연소민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내심 고소를 지은 혁련소는 기감을 열어 주변의 모든 기운을 살폈다. 우측에 형성된 수림에서 미세한 기운이 포착되었다. 혁련소의 육신이 벼락같이 수림으로 날아들었다.
찍!
“어머!”
쥐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 나오자 연소민이 그 자리에서 팔짝 뛰며 기겁을 했다. 역시 쥐는 천하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이다. 호랑이를 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무림의 여고수가 사색으로 변했다.
“분명 쥐의 기운은 아니었는데…….”
혁련소가 눈을 가늘게 하고서 수풀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연소민도 함께 그곳을 응시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혁련소는 암벽에 등을 기대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연소민도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시간이 지나가자 여명이 떠오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 사이로 태양이 스며들자 오히려 밤보다 더한 스산함을 자아냈다. 잠시 졸았던 둘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들이 앉았던 앞쪽에 제법 큰 연못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핏물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혁련소는 붉은 연못을 주의하라는 흑야의 말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연못으로 다가갔다.
연못은 진정 피처럼 붉었다.
“으스스한 곳이에요. 무슨 연못이 핏물처럼 생겼데?”
“그리게 말이오.”
혁련소가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주워와 연못으로 던졌다. 지켜보던 둘의 얼굴에 극도의 놀람이 떠오른다.
“중수(重水)!”
“놀랍군요. 전설에나 전해지던 중수가 실제로 있었다니…….”
연소민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나뭇가지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현상에 둘은 혈지를 한동안 뚫어져라 연못만을 쳐다봤다.
“응!”
혁련소의 고개가 벼락같이 뒤로 돌아갔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오. 피곤해서 헛것이 자꾸 느껴지네.”
분명 묘한 기운이 주변을 감도는 것을 느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을 유심히 살폈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보이지 않자 혁련소는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당히 넓은데… 뭔가 지리적으로 맞질 않잖아!”
그랬다.
자신들이 서 있는 이곳은 꽤나 협소한 협곡이라고 봐야 했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인데 연못은 좁고 긴 형태가 아니라 둥글고 넓은 형태였다. 마치 연못이 있는 공간만 따로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왜 이곳을 조심하라고 하셨지?’
호기심이 강렬하게 생겨났다. 단순히 중수라서 그랬다고 보기엔 미심쩍었다. 제아무리 중수라도 혁련소 정도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물론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자신의 숙부가 위급한 상황에도 그 말을 건넸다면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그들의 뒤쪽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물러서!”
“헉!”
“어머!”
채챙!
놀란 둘이 빠르게 몸을 돌리며 검을 뽑았다.
“스물이 넘은 놈이 무슨 호기심이 그리도 많아.”
흑야였다.
놀람에서 반가움으로 바뀌던 혁련소의 얼굴이 다시 놀람으로 물들었다. 흑발 사내의 전신이 피로 흠뻑 적셔져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가슴어름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혈부터……!”
“괜찮다.”
손으로 가슴 부근을 몇 번 찌르자 선혈은 이내 멈추었다. 다소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혁련소에게 물었다.
“별일 없었나?”
“별일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쥐새끼만 살고 있던 걸요.”
연소민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금창약입니다. 이거라도 바르세요.”
비상시를 대비해서 소지했던 금창약을 꺼내놓자 흑야는 거침없이 웃옷을 벗어젖혔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길게 그어진 상처가 흉측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연소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릴 정도로 상처는 깊었다.
“세상에 숙부를 그 지경으로 만들 자가 있었습니까?”
“세상은 넓다.”
상처 부위에 가루로 만들어진 금창약을 뿌리면서도 표정의 변화라곤 전혀 없었다. 상당한 통증이 동반되는 것이 소염을 목적으로 한 금창약이다. 하지만 흑야에겐 그저 가려운 정도로밖엔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다.
찌이익!
장포의 끝부분을 찢어 상처를 동여맨 흑야는 다시 웃옷을 걸치고는 걸음을 놓았다. 혁련소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다.
“따라와.”
“어딜 가십니까?”
“가보면 안다.”
셋이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을 때였다.
스으으…….
연못의 수면 위로 짙은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스멀거리며 솟아올랐다. 놀랍게도 그 기운은 서서히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어가더니 이내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은 천을 뒤집어쓴 사람이 수면 위에 나타나 있었다.
사악한 기운으로 번득이는 인물의 눈동자가 일행이 사라져간 방향을 응시하며 섬광을 발했다.
“놀랄 만한 기운을 지닌 자로군.”
어색한 중원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턱 아래로 자란 수염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 정도면 제국의 초인들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과연 이 세상엔 저 정도의 강자들이 얼마나 더 있단 말인가?”
부글부글!
그가 선 수면이 끓기 시작했다.
가늘게 흔들리던 인물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빛이 발산되었다.
“시간이 되어가는군. 곧 있으면 문이 열린다. 그 안에 저 아이를 이곳으로 유인해야 한다.”
스르륵!
인물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