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8화 (8/55)

제8장

혁련천후, 이계로 넘어가다

연못을 바라보는 금발 사내의 이마에 짙은 주름이 생겨났다.

그는 고금최강의 환술을 지닌 존재이자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무불통지의 현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내 눈을 감고 연못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특히 두 여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쥐고서 금발 사내의 능력을 고대했다.

치르륵!

하얀빛의 줄기들이 생겨나며 연못 위의 공간을 두르기 시작했다. 그 신기한 광경에 모두는 눈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금발 사내의 전신이 땀으로 적셔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엄청난 내력을 필요로 하는 대법을 펼치는 중이었다.

연못의 수면이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혁련소를 끌어삼킬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금발 사내의 육신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력의 한계에 이른 것이다.

모두가 초조함을 드러내며 금발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쥐어진 손도 땀으로 흥건하게 적셔진 지 오래다. 오직 흑발의 사내만이 차가움, 그대로를 유지한 채, 금발 사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용돌이치던 연못이 이내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금발 사내가 눈을 떴다.

“헉! 헉!”

거친 숨을 토해내며 육신을 휘청거리자 다른 존재 하나가 재빨리 그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내력을 주입시켰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금발 사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저곳에서 사라졌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

“색목국의 용모를 지닌 잡니다.”

“흑야도 함께 있었더냐?”

“형님과 여인 하나가 소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전혀 보이질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금발 사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사내는 연못의 수면 위를 응시했다.

‘할 수 없군. 직접 뛰어드는 수밖에…….’

방법은 역시 그것뿐이었다. 어차피 아들의 일이 아니더라도 연못에 대한 신비를 파헤쳐야만 했다. 가문을 승계한 자신이 반드시 해내야 할 일들 중, 하나가 그것이었기에 그는 스스로 그곳으로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의 표정변화를 살피던 여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안 돼!”

“말리지 마세요.”

여인의 아름다운 입술이 지그시 눌려 있었다. 사내의 눈가에 주름이 생겨났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극히 위험한 상황이다. 결코 사랑하는 아내를 그 위험에 들게 할 순 없었다. 그가 창을 두른 인물에게 시선을 던졌다.

털썩!

여인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창을 두른 인물이 혈도를 짚은 것이다.

“산악과 너희들은 우리가 저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저들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가라. 혹,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신마성을 부탁한다.”

“주공!”

지명된 둘이 사내를 불렀다.

전신에 병기를 주렁주렁 걸친 존재가 씩 웃었다.

“뭐야? 그 표정은… 설마 우리가 주공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흐흐! 걱정 마라.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 수련이나 제대로 시켜 놔.”

상아귀고리를 한 존재가 거들었다. 사내가 몸을 돌려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던졌다. 핏빛으로 찰랑거리는 그곳에 아들이 있다.

‘내가 간다. 소…….’

* * *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 초원 위로 붉은 석양이 떨어진다. 세상을 온통 자신과 같은 붉은색으로 칠해버린 석양은 그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뒤이어 질세라 달이 떠오른다. 세상은 붉은색에서 곱게 화장한 여인의 그것처럼 은은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밤이라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푸르륵!

은은한 달빛이 떨어지는 초원 위로 전마에 몸을 실은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갑주를 걸치고 투구를 쓴 기사들, 그러나 그들에겐 기사의 표본인 용맹의 그림자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두에서 전마를 몰아가던 금발 사내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휴! 틀렸군. 틀렸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망스러운 몸짓을 보였다. 그의 좌우를 호위하듯 함께하던 기사들이 주변을 살펴보며 그의 절망에 불을 지핀다.

“아무래도 이곳엔 없는 듯합니다! 곧장 영지로 돌아가시는 것이…….”

“그렇습니다! 자칫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돌아가 다른 방도를 구해보시는 것이 이롭습니다! 영주님!”

둘의 조급함에 금발 사내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내 숨을 내쉰 그는 고삐를 당겨 전마를 세웠다. 멀리 초원의 끝으로 거대한 성곽이 달빛에 아른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곳이군. 대륙 최강의 초인이라는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이…….”

“더 들어가면 마법병단의 경계망에 걸려듭니다.”

“후후! 그 위대한 양반이 고작 나 같은 미천한 일개 영주에게 신경이나 쓸까? 그에겐 그저 수천만의 인간들 중, 하나로밖엔 보이지 않을 텐데…….”

금발 사내의 얼굴에 자조 섞인 웃음이 떠오른다.

“욘크!”

“예! 영주님!”

“잠시 쉬었다 돌아가자. 술 남은 것 있어?”

“조금…….”

영주라 불린 사내가 말에서 내려 초원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욘크라 불린 기사가 말의 허리에 걸렸던 주머니에서 술과 간단한 건량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너희들도 이리 앉아. 며칠을 쉬지 않고 돌아다녔더니 죽을 맛이야. 이것만 마시고 영지로 돌아가자. 힘들 내자고!”

“영주님도 힘내십시오!”

“힘… 그렇지. 나도 힘을 내야지. 크…….”

술을 한 모금 마신 사내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술은 지독하게 독한 럼주였다. 해적들이나 마실 독한 술이 영주인 그의 입맛에 맞을 리 없다.

두 기사도 럼주를 한 모금씩 마시고는 재빨리 건량을 입에 넣었다. 욘크라 불렸던 기사가 말했다.

“돌아가시면 곧장 수련에 들어가십시오! 그 못된 놈들과의 영지전이 고작 한 달 남았습니다. 방법은 오직 영주님께서 그놈을 이기는 것뿐입니다.”

“한 달을 수련한다고 해서 내가 그 강하다는 사자검, 써튼을 이길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목이 잘려 죽지 않으면 다행일 거야.”

영주의 자조는 이어졌다.

두 기사는 나약한 젊은 영주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러나 내색할 순 없는 노릇, 건량을 찢어 건네주며 그를 위로했다.

“분명 신이 도우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마음을 굳건하게 가지십시오! 혹, 그 안에 그분을 찾으러 떠난 기사들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수도 있으니 영주님은 수련에만 정진하십시오.”

술병을 통째로 입에 처넣은 영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돌아가지. 돌아가서 남은 한 달 동안 대책을 강구하다 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셋은 이내 전마 위로 몸을 실고는 고삐를 틀어 말머리를 돌렸다. 전마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육중한 몸을 돌릴 때였다.

츠츠츠츠…….

그들의 뒤쪽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며 공간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설마!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셋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제국 최강의 마법병단을 지닌 테세우드가의 마법사들이 나타난다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재빨리 도주를 결심한 그들이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려고 할 즈음, 강력한 빛의 폭발이 일어나며 그들의 시각을 일시적으로 앗아갔다. 그 빛이 지독하게 강렬했기에 셋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스르르르…….

묘한 소리를 울리며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그림자들은 모두 일곱, 그 모습을 지켜보던 셋의 얼굴에 절망의 기운이 어렸다. 그림자들에게서 뿜어지는 엄청난 기운이 그들의 심장까지 흔들어놓았다.

“영주님! 이곳은 저희들에게 맡기고 어서…….”

욘크가 롱 소드를 꺼내 들며 소리쳤다. 다른 기사도 이미 손에 롱 소드를 쥐고서 나타난 그림자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누구냐!”

욘크가 용감하게 외쳤다.

느껴지는 기운은 절대 자신들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것, 그러나 영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는 용기를 끄집어냈다. 강력했던 기운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일곱의 그림자가 그들을 보며 소곤거렸다.

* * *

“색목국으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조윤이 눈앞의 셋을 보고는 혁련천후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생긴 용모나 복장으로 보아 색목국의 인물들이 분명해 보였다. 모두는 다소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을 막 겪은 그들이다. 빛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던 자신들이 공간을 넘어 전혀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이다.

“젠장!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전신에 병기를 걸친 사내, 북궁천소가 인상을 그렸다. 셋이 외치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천! 네가 어떻게 좀 해봐!”

그 말에 금발 사내, 진천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색목국의 언어를 사용해 물었다.

“이보시오! 여기가 어디요?”

그러나 셋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눈만 굴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색목국이 아닌가 봅니다. 말을 못 알아듣는데요?”

뒤쪽에서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걸어오며 진천에게 말했다.

“환술을 사용해 봐.”

“알겠습니다.”

진천이 성큼 셋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장대한 체구를 지니고 은빛 갑주를 걸친 자가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진천의 손짓 한 번에 그는 바닥을 구르며 나가 떨어졌다.

“내가 지금 몹시 예민하거든. 그러나 까불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남은 둘이 창백하게 질린 채,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도 곧 진천의 손짓에 전신이 마비되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진천이 그들에게 환술을 사용하려 내공을 끌어올릴 때였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가 일행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화살의 모양을 한 불덩어리들이었다. 속도와 파괴력이 대단했다.

“뭐야? 저건!”

누군가가 칼을 뽑아 들고는 그대로 허공을 후려치자 날아들던 불꽃 화살들이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다. 혈도가 제압당한 드웨인 일행은 그 광경에 넋을 놓았다. 지금 날아들었던 그 불화살들은 결코 손짓 한 번으로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둘의 눈이 부릅떠졌다.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서 온 자들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인물들이 아닌 마법사들이 몰려나온 것이다. 나타난 자들은 모두 다섯, 그들은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여덟의 인물들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왔다.

“이런 개새끼들이 어디서 불장난이야!”

상아로 만든 귀고리를 한 덩치 큰 존재가 당장에 죽여 버리기라도 할 듯 성을 냈다. 그러나 흑발 사내의 만류로 그는 씩씩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흑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나타났던 자들이 크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놀라도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놀라기는 혈도를 제압당한 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뒤늦게 나타났던 자들과는 다른 종류였다.

반가움.

지독한 반가움이 흑발 사내를 향한 그들의 눈에 담겨져 있었다.

* * *

“저, 저분이 그분 같습니다! 영주님!”

욘크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영주, 드웨인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흑발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국에, 아니 대륙 전체에 그 위대한 이름을 떨친 존재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흑발의 마검사들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왜 일곱이나 되지?”

“그렇군요. 분명 그분들은 둘이라 들었는데…….”

“하지만 저 얼굴… 분명 그분이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분이 분명해. 오! 신의 가호가 내게 떨어지다니…….”

드웨인은 떨려오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쓰러졌던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엉금엉금 기어왔다. 그 역시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과 대치한 존재들을 보며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감히 그분을 몰라 뵙고 덤벼들었으니…….”

“어두워서 그랬으니 용서하실 거야. 그나저나 저놈들 이제 큰일 났군. 감히 저분들께 마법공격을 퍼부었으니까 말이야.”

마치 자신의 편인 양,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을 노려보던 드웨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금발을 늘어뜨린 존재가 자신들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진천은 혈도가 제압당한 셋이 무한한 공경을 담은 눈빛으로 바뀌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오른손에 찬란한 금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난 네놈들의 언어나 알아내야겠어. 내 기운에 대항하면 뇌가 터져 죽을 수도 있으니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목숨을 살리는 길이야. 알겠어?”

그의 말을 이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코를 찡끗한 진천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드웨인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 진천은 짐승들과 대화를 할 때나 사용했던 환술을 시전하려고 했다.

말을 모르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사람이니 한결 쉬울 것이다.

* * *

퍽!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은 맞으면서도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들은 비록 최상급 클래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마스터들과 반나절은 싸울 수 있는 실력을 지닌 마법사들, 하지만 눈앞의 존재들은 반나절은커녕 시작하자마자 일방적인 구타로 이어졌다.

“크윽!”

마지막으로 초원에 두발을 디디고 섰던 마법사가 가슴을 움켜쥐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그들은 전신에 병기를 주렁주렁 매단 존재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저런 자가 제국에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뒤에 오연하게 서 있는 흑발의 존재야 대륙 전체가 알고 있는 엄청난 존재, 하지만 그와 다른 넷은 지금껏 구경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오직 저 무지막지하게 생겨먹은 자, 하나에게 자신들 다섯이 당한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마법사들을 쳐다보던 흑발 사내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연못에서 진천의 환술로 보았던 영상 속의 인물, 검은 천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쓴 그 영상 속의 인물과 그들의 복장이 무척 비슷했다.

그가 진천을 찾았다.

“환술을 시전 중입니다.”

“음……!”

진천의 주변이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진천과 드웨인의 육신을 두른 황금색 빛들은 한동안 둘의 육신을 감싸며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진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알아냈냐?”

“하하! 제가 누굽니까? 천재 중의 초천재, 진천이 아닙니까?”

“그래 너 잘났다. 새끼야!”

“얼른 말해.”

불퉁거리는 거친 존재들에게 웃음으로 화답한 진천이 흑발 사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그를 쳐다보던 마법사들은 눈동자를 심하게 떨었다. 이유는 그들만이 알 뿐이다.

“알아냈나?”

“장소가 그래서 많은 것을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이곳엔 통역을 해주는 마법구슬인가 뭔가가 있다고 하는군요. 자신의 집에 그것이 있으니 함께 가면 그것을 주겠답니다.”

“마법구슬? 통역을 해준다고? 아니 구슬이 사람 말을 통역해 준단 말이지? 저 노랑머리새끼가 거짓말 한 거 아냐?”

상아귀고리를 한 존재, 왕전이 험악한 얼굴로 드웨인을 노려봤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던 드웨인은 살벌한 시선을 받자 심신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진천이 웃으며 말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거짓말을 했으면 벌써 뇌가 터져 죽었을 테니까요. 솔직히 저도 그런 게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기왕 물어본 거 좀더 많은 것을 물어보지 그랬냐? 고작 그거 하나 얻어내고 말았냐?”

“어허! 그게 얼마나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그런 소릴 합니까? 한번 시전하면 며칠을 삼류허접처럼 살아야 한다고요!”

“끄응! 그러기에 진즉 영단 좀, 처먹고 내공을 길렀어야지 자식아!”

“내공이 하루아침에 쌓인답니까?”

진천이 버럭 성을 내자 귀고리를 한 존재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그를 노려본 진천이 흑발 사내에게 말했다.

“일단은 저들을 따라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법구슬이라는 것을 얻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야겠지.”

흑발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쓰러진 몸으로 자신들을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쳐다보는 마법사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 복장, 네가 본 것과 비슷하지 않나?”

“오! 그렇군요. 맞습니다! 분명 놈도 저런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햐! 이거 우리가 제대로 왔군요.”

진천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했다.

“좋은 놈들인가?”

그 물음에 진천이 뚫어져라 마법사들의 눈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주 악질적인 놈들입니다. 눈에 어린 기운으로 보아 상당한 살인을 저지른 놈들입니다.”

“죽여!”

“옛?”

“나쁜 놈들이면 살려둘 필요가 없겠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북궁천소가 터벅터벅 마법사들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허공을 슬쩍 가르고 지나가자 다섯의 숨이 그대로 끊어졌다.

그 모습을 본 둘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하염없이 몸을 떨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이는 흑발 사내를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지?’

소문의 그들과는 다소 달라 보였다. 소문엔 결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고 전해졌었는데, 그저 손짓 한 번으로 다섯의 생명을 거두어갔다.

드웨인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 * *

아이는 손에 든 작은 보따리를 쳐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하! 이거면 엄마가 굶지 않아도 돼.”

붉게 상기된 얼굴은 뛰어가는 내내 미소를 머금었다. 가끔 뒤를 돌아볼 때면 사슴처럼 큰 눈망울엔 존경이 어리곤 했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꼭 저분들처럼 될 거야! 반드시…….”

스스로 그렇게 수백 번을 다짐하며 아이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다. 인가가 드문 한적한 곳에 초라한 집 하나가 있었고 아이는 그 집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고는 숨을 쌕쌕거렸다.

“엄마!”

덜컹!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쾌쾌한 냄새가 아이의 코를 찔러왔다. 아이에겐 익숙한 냄새다.

낡은 침상에 누워 있던 중년여인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던 여인은 아이의 손에 쥔 보따리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했다.

“그게 뭐니?”

“엄마! 이제 굶지 않아도 되고, 아픈 거 고칠 수도 있어!”

“그게 뭐냐니까?”

“헤헤! 이것 좀 봐!”

챠르륵!

아이가 낡은 탁자 위에 뭔가를 쏟아냈다. 창을 뚫고 들어온 햇빛에 반짝이는 황금색 동전들을 본 여인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결코 아이의 손에 쥐어질 물건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여인은 몸을 일으켜 아이의 손을 거머쥐었다.

“루크! 너 이게 어디서 난 거니?”

“왜 그래 엄마?”

좋아할 줄 알았던 엄마가 화를 내자 아이는 울먹였다. 여인이 다그쳤다.

“바른 대로 말해! 이 돈! 어디서 난 거지?”

“훔친 거 아냐. 다크 남작님이 주셨단 말이야. 맛있는 거 사먹고 엄마 약도 사드리라고…….”

“뭐? 다크 남작님이… 그게 정말이니?”

“응! 그리고 나보고 엄마 병이 다 나으면 남작님 성으로 함께 들르라고도 하셨단 말이야. 정말이야. 훔친 거 아니야.”

눈에 눈물을 그렁거린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루크! 미안해. 엄마가 너를 그렇게 보았다니…….”

여인이 아이를 끌어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미안하단 말을 흘려냈다.

“엄마! 나 배고파.”

“그래!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곧 밥을 지어줄게.”

여인이 눈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석에 마련된 낡은 조리시설로 걸어가던 그녀가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그냥 아이가 돈을 지니고 가는 것이 염려되어 따라온 것이오.”

“어! 털보 아저씨!”

“하하! 그래 털보 아저씨다.”

아이가 반갑게 그를 맞이하자 여인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림자가 앞으로 슥 나서자 장대한 체구에 얼굴의 반을 수염으로 뒤덮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손에 커다란 뭔가를 든 그는 여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것을 여인에게 내밀었다.

“이건 남작님께서 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거절치 마시고 받아주시지요.”

여인은 남작이 거론되자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청년이 내민 것은 커다란 소의 뒷다리였다. 일개 여인이 받기엔 지나치게 무거울 만큼 큼지막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기를 주방의 한쪽에 내려놓았다.

“아저씨! 배고프면 밥 먹고 가세요!”

“밥? 밥 좋지! 제가 먹을 밥도 있습니까?”

“아! 이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식사를 해 올리겠습니다.”

“하하! 이거 한 끼 신세를 지겠습니다. 부인.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저 고기를 좀 썰어놓겠습니다.”

여인이 두 팔을 휘저었다.

“아, 아닙니다! 미천한 곳에서 어찌…….”

그 말에 웃음을 머금었던 청년의 정색으로 변했다. 여인이 그런 청년을 보고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은 아닌가 싶어 두려움을 가졌다. 청년이 여인을 보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적어도 우리 남작님의 권역에선 누가 미천하고 누가 잘나고, 그런 거 따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분께선 신분의 고하는 어디까지나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로만 여기십니다. 앞으로 다시는 부인께서 스스로 미천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기 루크를 봐서라도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옛날 버릇이…….”

여인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평생을 포악한 영주의 영주민으로 살면서 착취를 당해온 그녀였다. 남편을 잃었으며 인생을 잃었다.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신에게 감사했던 그녀는 언제부턴가 자신들의 영주가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영주가 바뀐다고 최하위 계급인 소작농들이 달라질 건 없다. 전 영주에게 하던 대로 생산한 곡물의 80%를 바치고 나머지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몸에 병이 들면서부터 소작을 하지 못하게 된 그녀는 영주의 문책이 두려워 하루하루를 가슴조리며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바뀐 영주는 세금을 바치지 못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세금을 바치지 못하면 아이를 데려갔던 전 영주와는 달리 생명처럼 소중한 아들도 데려가지 않았다. 다크 남작!

여인은 그 이름을 떠올리며 기어코 눈물을 흘려냈다.

“엄마! 울지 마. 이 아저씨 무서운 분 아니란 말이야.”

“응! 그래.”

“하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부인! 제가 이래 봬도 음식솜씨가 제법 뛰어나답니다. 이봐! 루크! 오늘 스테이크 어때?”

“우와! 스테이크 먹고 싶어요!”

루크가 눈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청년이 여인을 자리에 일부러 앉히고는 요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8살의 어린 루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테이크를 먹게 되었다.

* * *

다크 영지의 영주가 거주하는 작은 성의 거처에 둘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둘은 금역에서 사라져버렸던 흑야와 혁련소였다.

그러나 연소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려하게 생긴 유리병에 든 술을 입으로 가져가는 혁련소의 얼굴은 중원에서와는 다르게 매우 수척한 모습이었다.

연한 호박색의 술은 빛깔과는 달리 목구멍이 탈 듯 독했다.

“이젠 이 술도 익숙해져 가는군요.”

“제법 이곳 사람처럼 보인다. 게다가 남작인가 하는 지위까지 얻었지 않느냐?”

“그깟 지위야… 하지만 지위가 높으니 좋은 점은 있군요.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문명은 중원보다 상당히 발달했지만 일반 백성들이 고생하는 건 어디든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술을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은 흑야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이번에 새롭게 백작의 지위에 오른 놈 있지? 그놈이 곧 자신의 영토를 순시한다고 하더군. 당연히 이곳에도 올 테니, 미리 준비를 해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준비라니요?”

“놈의 악명은 세상을 울리더군. 봐서 가능하면 도중에 목을 잘라버려야지.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또 다른 악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하하! 백작 정도면 상당히 까다로울 겁니다. 당연히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들과 마스터들이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왔다가 건방떨고 가게 내버려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난, 중원에 있을 때, 상당한 자들의 목을 베었지. 물론 대부분이 사람들의 원성을 산 사파나 마도의 인물들이었지.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세상에 이런 놈들만 없다면 얼마나 삶이 즐거울까… 살인을 할 때마다 더더욱 간절해지더군. 하지만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지.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악당들은 여전히 존재할 거고, 강호라는 세상이 존재하는 한, 더더욱 악당들은 많아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뭔지 아느냐?”

“……!”

“그래도 악한 놈들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지.”

혁련소가 웃었다.

“그래도 아버지와 숙부들 덕분에 강호는 꽤나 태평성대를 누렸지 않습니까?”

흑발 사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랬지. 주공이 없었다면 어쩌면 강호는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테니…….”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던 적들을 떠올리자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은은한 투기가 생겨났다. 혁련소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이 세상에도 그들에 못지않은 엄청난 악당들이 널렸습니다. 당장 요란제국의 황제라는 작자만 하더라도 전쟁을 일으키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이야 제국전쟁의 여파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다지만 전력이 보강되면 언제라도 다시 전쟁을 일으킬 작잡니다!”

“그래서 그 백작이란 놈을 죽이려고 하는 거다. 놈은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려고 들 것이다. 이 세상의 귀족이라는 자들,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하더군. 결국 죽어나는 것은 평범한 백성들뿐이야. 따라서 사람들에게 해가될 놈이라면 미리 죽여 놓는 것이 이롭다.”

“하하! 숙부님의 이런 모습을 아버님과 다른 숙부들이 아시면 꽤나 놀라실 텐데 말입니다. 완전히 정의의 사도가 되셨으니… 하하!”

“그런가?”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가볍게 웃었다.

술병이 두 병을 넘어 세 병째로 넘어갈 즈음,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한 인물이 들어왔다. 얼굴의 반을 수염으로 덮은 그 청년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혁련소가 청년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좋아하시던가?”

“예! 남작님! 간만에 제가 요리솜씨를 발휘해 스테이크까지 만들어주고 왔습니다.”

“그래? 후후! 그 꼬맹이가 무척 좋아했겠군.”

“저보다 더 많이 먹더군요. 덕분에 며칠 먹고 남을 쇠고기가 반으로 줄어버렸습니다. 저! 남작님! 돌아오다 테세우드 공작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혁련소와 흑발 사내가 그를 쳐다봤다.

“얼마 전에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살해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다섯씩이나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제국에서 감히 그곳과 마찰을 일으키는 곳이 있다니 말입니다.”

흑발 사내가 물었다.

“사인은?”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더 놀랍습니다. 테세우드 공작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4클래스 이상의 중상위 마법사들인데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살해를 당했다면 적어도 제국의 오대 초인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전설의 드레곤이라도 나타난 난다면 모를까.”

“놀랍군. 다섯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있었다니… 초인들은 당연히 아닐 거고, 설마 다른 제국의 어쌔신들이 뭔가를 노리고 살해한 것은 아닐까요?”

혁련소가 흑야를 보며 물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그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정도의 마법사들을 저격할 수 있는 수준의 어쌔신이 과연 있을까? 있다고 해도 한꺼번에 다섯을 몰살하기란 불가능해.”

흑야의 부정적의 의견에 혁련소도 수긍했다.

“정말 전설의 드레곤이 나타나기라도 한 걸까요?”

“모르지.”

둘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흑야가 갑자기 눈빛을 발했다.

“설마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만들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테세우드는 야망이 큰 놈이다. 충분히 스스로를 희생시켜 전쟁을 일으키고도 남을 놈이야.”

“범인을 요란 제국으로 몰아가면 전쟁은 쉽게 터지겠군요.”

“어쩌면 정말로 요란 제국이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 놈들이 이곳 케이론 제국을 호시탐탐 엿보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알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너무 뻔한 수법입니다. 자신들이 의심을 받을 것을 알면서 일부러 그런 짓을 벌이기야 하겠습니까? 뭐, 요란 제국의 황제가 조금은 미친놈이긴 합니다만…….”

청년이 끼어들었다.

“곧 범인들이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테세우드 공작가 정도면 권역의 전반에 걸쳐 결계를 쳐놓았을 테니 범인들의 영상이 공작에게 당연히 전해졌겠지요. 조만간 제국에 수배령이 내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지 몰라도 아마 엄청난 현상금이 걸릴 것이 분명합니다. 이참에 현상금이나 타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자금이 바닥이 난 상태입니다.”

“현상금? 하하! 그거 좋지. 하지만 말이야. 테세우드도 그다지 좋은 인간은 아니잖아. 그런 작자를 도와주고 싶진 않아.”

혁련소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흑야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피곤하십니까? 표정이…….”

“그냥 기분이 묘해지는군. 술은 이 정도에서 그만 하지. 쉴트! 너도 그만 가서 쉬어.”

그가 자리를 뜨자 털 복숭이 쉴트도 인사를 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혼자 몇 잔을 더 마신 혁련소는 입은 옷 그대로 침상에 벌렁 누웠다.

천장에 아름다운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혁련소의 얼굴이 대번에 어둡게 그늘이 진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빛의 공간 속에서 헤어진 그녀를 찾기 위해 낯선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그녀의 행방은 전혀 듣지도 찾지도 못했다. 자신의 용모를 이용해 소문을 내면 그녀가 듣고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 강자들을 찾아다니며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현상금이 붙은 수많은 악당들을 체포하기도 했고, 생소한 몬스터 토벌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덕분에 남작이라는, 비록 하위급에 불과하지만 귀족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찾지 못했다.

[지켜준다고 약속해요.]

그녀의 슬픈 음성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살아 있겠지…….’

혁련소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을 것이다.

“휴…….”

짙은 숨을 내쉰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우연찮게 일행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며칠을 걸어 자그마한 도시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신기한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존재들을 보며 드웨인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내심 이들과의 만남을 운명이라 여겼다.

‘그래! 그 마법사들은 결코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어. 정의의 힘을 행사하신 걸어야.’

스스로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리고 곧 있을 영지전에서 저들의 힘을 빌려 영지를 보전함과 동시에 그 못된 써튼의 영지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속셈과 바람이 강렬했기에 그의 그러한 심중은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

드웨이의 옆을 걷던 욘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분들의 복장이 제국의 그것과는 생소한데 괜찮겠습니까?”

“복장이 무슨 문제가 되지?”

“지금 마족들의 발호로 제국이 시끄럽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분들은 마족들과 같은 흑안을 지녔으니 곳곳에서 검문을 받지 않겠습니까?”

“흑안의 마검사를 감히 누가 건든단 말이야. 괜한 걱정 말라고.”

“영주님! 그분들을 싫어하는 귀족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이곳 북부지역은 더더욱 그렇고 말입니다. 자칫 그들의 권역에서 검문이라도 당하면 그땐…….”

욘크의 말에 드웨인은 자못 심각하게 변했다. 욘크가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테세우드 공작의 마법사들을 죽였지 않습니까? 이거 잘못하다간 도움은커녕 불구덩이 속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테세우드 공작은 평소 치밀하기로 소문난 자니까 분명 그곳에 결계를 쳐놓고 있었겠군. 그렇다면 당연히 저분들의 영상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테지?”

간사한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다. 지금 드웨인의 감정변화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죠. 그의 성정으로 보아 자신의 마법사들을 죽인 저분들을 곱게 내버려두진 않을 겁니다. 왜 이 생각이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떠올랐는지, 나 참!”

욘크가 자신의 머리를 툭 치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각한 기색으로 뒤를 따라오는 존재들을 흘긋거린 드웨인은 잠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영지를 보전하기 위해선 저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쁨에 욘크가 지적한 사안은 그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였다.

‘테세우드 공작과 적이 된다면…….’

생각만으로 드웨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테세우드 공작은 케이론 제국, 최강의 기사이자 대륙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초인의 반열에 든 절대강자이다. 제국 내에서 최강의 힘을 보유한 그는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실질적인 케이론의 지배자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날로 난 끝장나겠지.’

자신의 영지는 그날로 끝장나는 것이다.

드웨인은 온몸에 전율이 생겨났다.

그는 다시 뒤를 힐끔 돌아봤다. 차가운 얼굴로 주변을 무심하게 둘러보는 흑발 사내와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여섯 존재들, 그들의 모습 위로 언젠가 제국의 국경일 행사에서 딱 한 번 보았던 테세우드 공작의 무시무시한 영상이 겹쳐서 나타났다.

‘어떡해야 하지?’

결정을 해야만 했다.

‘저분들이 나를 도와준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 않은가? 비록 흑안의 마검사에 대한 소문이 엄청 좋긴 했지만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인데…….’

마음이 흔들리자 그토록 맹신했던 흑안의 마검사에 대한 생각까지 달라진다. 그들이 흑안의 마검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금발을 한 사내, 진천이 자신을 쳐다보자 드웨인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 * *

“저 자식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야?”

드웨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은 진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에 전신에 병기를 두른 존재, 북궁천소가 드웨인을 가늘게 노려봤다.

“좋은 놈이라며?”

“눈빛이야 그렇게 전해줬지만 사람 마음이 좀 요사스러워야지요. 조용한 곳에서 족쳐볼까요?”

“저기가 괜찮겠군.”

“참! 뭘 하실 때 요만큼이라도 생각 좀 하고 결정하세요. 그냥 해본 말인데 당장 족치자고 하면 어쩝니까?”

진천이 손끝을 모으는 시늉을 하자 북궁천소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자식아! 네가 족치자고 하니까 그랬지. 이게, 요즘 살살 올라오네? 너 한번 죽어볼래?”

“헤헤! 뭘 그런 걸 가지고 또 죽이니 살리니 하십니까?”

진천이 재빨리 혁련천후의 뒤로 숨었다.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던 북궁천소가 그와 시선이 부딪히자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뒤에서 혀를 날름 내미는 진천에게 무심한 눈길을 준 혁련천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서 걷던 드웨인 일행은 그들이 걸음을 멈춘 것도 모르고 걷다가 강력한 기운이 몸을 끌어당기는 느낌에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혁련천후가 손가락으로 드웨인을 불렀다.

드웨인이 다가오자 그는 진천을 보며 말했다.

“이곳의 언어를 가장 빨리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봐.”

“쩝! 이곳은 보는 눈이 많아서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 환술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흑발 사내가 주변을 쓸어보고는 한곳을 가리켰다.

“저곳이 좋겠군.”

성곽의 뒤쪽에 자그마한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곳엔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반짝인 진천이 드웨인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먼저 그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머뭇거린 드웨인과 기사들은 진천을 따라갔다.

잠시 후, 진천이 헐떡이며 돌아왔다. 제법 기운이 빠진 모양이다.

“저놈들 집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답니다.”

“뭐? 새끼들이 왜 진즉에 털어놓지 않았지?”

북궁천소가 힘없이 뒤를 따라오는 드웨인을 보며 인상을 그렸다.

셋의 얼굴이 시뻘겋게 부은 것이 진천에게 몇 대 맞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으리라.

“영지전인가 뭔가 때문에 거짓말을 한 모양입니다. 구슬을 미끼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었다는군요.”

“영지전? 그건 또 뭐냐?”

“낸들 압니까? 힘이 부쳐 그것까지는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주공! 어쩌지요? 우린 돈이 한 푼도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북궁천소가 끼어들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어야지.”

“나 참! 형님 내공을 좀 주시든가요! 가뜩이나 한번 펼치면 다리가 후들거려 돌아버리겠는데…….”

“쩝! 그렇지.”

혁련천후는 진천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너 흑야에게 은신술을 배운 적이 있지?”

“하하! 그럼요. 이젠 흑야 형님도 제가 작정하고 은신하면 쉽게 찾아내지 못합니다.”

진천이 가슴을 쭉 내밀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실력발휘를 해봐.”

“예? 실력발휘라니요?”

“돈이 없으니 훔쳐야지.”

“헉! 지금 저보고 도둑질을 하란 말씀입니까?”

“쓰다가 돌려주면 된다.”

혁련천후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슬쩍 진천의 시선을 피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진천이 다른 존재들의 험악한 눈빛을 받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쩝! 알겠습니다. 저놈들에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물어보고 훔치지요.”

“물어보려면 환술을 또 펼쳐야지?”

“당연하지요. 내일 내공이 돌아오면 그때 물어보겠습니다.”

혁련천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밤 한 명을 데리고 훔쳐.”

“주공!”

“어디 쉴 곳을 찾아봐.”

울상으로 변해버린 진천의 시선을 외면한 그가 걸음을 옮기자 모두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 * *

드웨인은 비록 하위급이지만 준남작의 지위에 인구 1천의 자그마한 영지의 영주라는 신분을 지닌 귀족이다. 자신의 영지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그였는데 지금은 통역마법구슬을 훔치기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밤중을 은밀히 누벼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앞을 걸어가는 진천을 흘긋거리며 울상이 되었다. 그는 지금에서야 확신했다.

‘아! 이 사람들은 소문의 그분들이 아니었어. 흑발에 흑안을 지녀 그분들이라 생각했던 나의 착각이야. 이걸 어쩌지? 영주의 신분인 내가 도둑질을 하게 되었으니…….’

소문의 그들은 신이 보내준 천사라고 소문이 돌 정도로 관대하고 바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대부분이 마계의 최강자라는 발록을 연상시키는 무서운 인상들을 하고 있는 데다 행동 또한 너무 거칠었다. 어떨 땐, 발록이 드래곤의 폴리모프를 배워 인간으로 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필 그곳에 갔을 게 뭐람.’

이들과 엮인 것이 후회막급으로 다가왔지만 도리가 없었다. 거부하거나 도주라도 한다면 자칫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 뻔했다. 마법사들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해치운 이들에게서 도주하기란 드래곤과 맞장을 떠서 이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것, 드웨인은 눈물을 머금고 눈앞의 진천을 따라야만 했다.

상점은 상당히 넓었다.

“이거 엄청난데?”

진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상점의 곳곳을 살폈다. 중원에선 볼 수 없었던 온갖 진귀한 것들이 상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멋진 문양이 새겨진 검들과 방패, 그리고 기사들이 애용하는 마법실드가 쳐진 갑옷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4클래스 마법을 견뎌내는 갑옷에 욕심을 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진천이다. 그저 그에겐 대륙에서 가장 흔한 통역구슬이 최고의 보물이었다.

상점 내부를 둘러보던 드웨인의 얼굴이 더더욱 울상이 되었다.

‘아! 이곳은 왕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인데, 들통 나면 내 인생은 그날로 끝이구나!’

그랬다.

마법도구를 파는 상점은 공국이나 왕국, 제국에서 직접 운영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개인이 운영할 수 있었지만 마법도구의 난립으로 치안이 어지럽게 되자 황제의 명으로 개인의 운영을 금지시킨 것이다.

황제의 재산으로 분류되다 보니 도둑질을 하다가 걸리면 그날로 참수형을 당하게 됨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들도 영지와 귀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신께서 어찌 내게 이런 고난을…….’

신을 원망하면서도 당장의 두려움이 더 컸던 드웨인은 곳곳을 둘러보며 구슬을 찾았다. 통역구슬은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마법도구였기에 그는 손쉽게 그것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구슬을 찾아 진천에게 건네준 드웨인은 진천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필요한 것을 찾았으니 입을 막으려고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강도나 도둑들은 그런 수법을 즐겨한다. 드웨인은 최대한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진천을 바라보았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신께 맹세합니다. 그러니…….”

그 말을 진천이 알아들을 리가 없다.

“이게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빨리 사용법에 대해 말해 봐!”

진천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드웨인이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진천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살핀 드웨인은 말이 통하지 않음을 그제야 깨닫고 황급히 통역구슬에다 대고 주문을 중얼거렸다.

“이제 제 말이 들리십니까?”

“엇!”

진천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구슬을 쳐다봤다. 드웨인의 말이 저절로 중원어처럼 이해되었다.

“야! 이거 정말 대단한데. 하하!”

진천이 구슬을 손에 쥐고서 어린아이처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웨인은 그런 진천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뭐야? 마법구슬을 보고 저렇게 신기해하다니… 꼬마들도 다 사용하는 것인데.’

통역구슬은 각 나라를 여행할 때 반드시 지녀야 하는 필수품목이다. 제국마다 언어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빈민층의 아이들도 알고 있는 그것을 진천은 난생처음 보는 듯 매우 신기해하자 그는 더럭 겁이 났다.

‘헉! 혹시 정말 마족이 아닐까?’

그저 대륙의 언어를 몰라 마법구슬을 원하는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진천의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 듯 보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드웨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가 몸을 벌벌 떨어대자 진천이 물었다.

“이봐! 속이라도 안 좋은 거냐? 표정이 왜 그래? 몸까지 벌벌 떨고…….”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

드웨인의 말속에 담긴 뜻까지 정확하게 이해되자 진천은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렸다.

“오호! 정말 신기한데.”

진천은 주변을 둘러봤다.

일행들의 숫자만큼 가져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구슬은 많았다. 드웨인이게 다섯 개를 더 가져오라고 지시한 진천은 빠르게 상점을 빠져나갔다. 통역구슬을 다섯 개 더 훔친 드웨인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흉갑을 슬쩍 껴입고는 뒤를 따라나갔다. 하나 훔치나 두 개 훔치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 드웨인의 자발적 도둑질이었다.

* * *

“이게 그 구슬인가 보군.”

“정말 대단한 기술입니다. 고작 이따위로 다른 언어가 저절로 통역이 된다니 말입니다. 이거 괜히 내공을 써가면서 환술을 펼쳤지 뭡니까?”

구슬을 보며 요리저리 살펴보는 일행들에게 진천은 마치 자랑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혁련천후는 드웨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은 우리가 너를 죽일까 두려워하는 듯 보이는군.”

“아! 아, 아닙니다!”

드웨인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말이 또렷하게 이해되자 혁련천후는 내심 구슬의 영험함에 감탄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우린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단,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땐…….”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믿어주십시오!”

욘크와 다른 기사도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하나만 물어보지.”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라면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처음 우리를 보았을 때, 너희들의 눈빛은 마치 우리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

혁련천후는 자신들을 보며 반가움을 내비쳤던 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문에 들었던 분들과 흡사한 용모를 지니고 계셔서 그만…….”

“소문에 들었던 자들이라니?”

욘크가 드웨인 대신 대답했다.

“저희들이 찾고 있었던 흑안의 마검사, 그분들과 너무 닮으셨습니다. 흑발에 흑안을 지니시고 검까지 비슷하다 보니 그만 그분들로 착각했습니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을 일어났다. 조윤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도 대번에 안색이 바뀌었다. 주변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그것을 본 셋은 두려움에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자세히 말해 봐!”

나머지 여섯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욘크는 자신이 알고 있는 흑안의 마검사에 대한 모든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그의 말이 더할수록 눈앞의 인물들은 확연한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욘크의 말은 대략 15분이 지나고서야 끝이 났다.

잠시 정적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혁련천후를 응시하는 일곱은 그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뜨거움을 품었던 눈동자가 예의 차가움을 되찾으며 혁련천후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인상착의가 소와 흑야 형님과 비슷합니다.”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5년의 시간차가 발생할 수 있나?”

“뭐, 이런 일 자체가 불가사의 아닙니까? 5년이 아니라 10년의 차이가 있더라도 일단 그들을 찾아보심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공! 일단은 그들을 찾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봐! 그들을 찾아가려면 어떡해야 하지?”

조윤이 드웨인에게 물었다.

“그것은 저희들도…….”

“대충 사는 지역조차 모른단 말이냐?”

“2년 전쯤부터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시는 바람에 지금은 그분들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케논 산맥 근처에서 간혹 그분들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긴 했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말을 타고 가면 반 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몬스터? 그게 뭔데?”

“옛?”

몬스터를 모를 수가 있는가. 욘크가 대답했다.

“케논 산맥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그곳에 하나의 왕국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어 제국에서도 출입금지령을 내려놓고만 있을 뿐,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북궁천소가 험악하게 다시 물었다.

“몬스터들이 뭐냐니까?”

“그게, 매우 사나운 괴수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괴수? 그럼 짐승이란 말이냐? 이거 사람새끼 맞아? 고작 짐승 따위에 겁을 처먹고 지랄이야!”

북궁천소의 험악함에 셋은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이들 중, 그의 기운이 가장 사납고 광포했다. 게다가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을 손짓 한 번으로 죽인 존재가 그였으니 셋은 그에게 가장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윤이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마침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구슬을 하나 챙긴 그가 드웨인을 응시했다.

“그곳까지 안내해.”

“예? 그, 그곳까지 말입니까?”

“원하는 거, 하나를 들어주는 것으로 대가를 대신하지. 나는 네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어투는 담담했지만 드웨인에겐 목숨을 빼앗겠다는 협박성 발언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거절하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혁련천후의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혁련천후가 몸을 돌려 걸음을 놓았다. 사색이 되어 버린 드웨인은 자신을 보며 씩 웃어주는 북궁천소의 시선을 받고는 어쩔 수없이 앞장서 걸어야만 했다.

“영지전이라고 했지?”

진천이 뒤를 따르며 드웨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상대를 이기면 네가 그놈의 영지까지 날로 먹는다며?”

“……!”

“네 영지라는 곳이 어디지? 혹시 케논 산맥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에 있나?”

“그렇긴 합니다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진천이 혁련천후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주공! 대가는 그 영지전인가 뭔가를 대신 뛰어주는 것으로 하면 되겠군요.”

왕전이 끼어들었다.

“그저 한 놈만 죽여주면 되는 거라며?”

“그렇답니다.”

“거 되게 간단하군.”

진천이 얼음처럼 굳어버린 드웨인의 어깨를 치며 씩 웃었다.

“인마! 넌 가만히 앉아서 땅 부자가 되는 거야.”

「흑안의 마검사」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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