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9화 (9/55)

2권

제1장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

소드 브레이커를 어깨에 둘러멘 일단의 무리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탐욕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두목! 꽤 좋은 말입니다! 장물로 넘기면 술값은 넉넉히 떨어지겠는데요?”

“크흠! 좋지!”

거친 머릿결에 한쪽 눈을 시커먼 가죽안대로 가린 거한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선 스물에 달하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섬뜩한 중병들을 손에 쥐고서 그를 따랐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도적단, 그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 험악한 몰골들이었다.

“윈커! 마법을 이용해서 놈들의 마나 정도를 살펴봐!”

일을 벌이기 전에 필수요건이 바로 상대의 힘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황색 로브를 걸친 다소 마른 자가 앞으로 나섰다. 마법사의 전형적인 복장이다.

일개 도적단이 마법사를 고용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중죄를 지어 쫓기는 자가 아니면 어디에서나 대접받는 마법사가 도적단에 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과거가 의심스러워 마법사가 달려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셋을 제외하면 나머지 일곱은 계집보다 못한 약골들입니다! 두목!”

“그래? 크흐! 이거 신이 오늘 내게 축복을 내리시는군. 시작해!”

지시가 떨어지자 스물에 달하는 자들이 일제히 달려오는 방향의 가운데를 막아섰다. 그들이 든 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날 부분이 톱니로 된 소드 브레이크는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자아내게 만드는 기병인데, 주로 용병들이 애용하는 검이었다.

하나에 꽤나 값이 나가는 게 그것인데, 보아하니 그동안 수입이 짭짤했던 모양이다.

* * *

“뭐야? 저 새끼들은?”

일단의 무리들이 길을 막아서자 선두에서 말을 몰아가던 북궁천소가 인상을 부라렸다. 진천이 씩 웃는다.

“눈빛을 보니 좋은 놈들은 아니군요.”

그 말에 드웨인과 기사들이 속으로 크게 놀랐다. 지금 자신들과 앞을 막아선 자들과의 거리는 대략 50미터! 그 거리에서 상대의 눈빛을 본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모두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푸르륵!

말들이 질주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서 거친 움직임을 보였다. 그 모습에 앞을 막아선 자들의 얼굴에 지독한 탐욕이 어린다. 그들에겐 그 말들은 술과 여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이분은 아리우스 드웨인 준남작이시오! 길을 막아선 그대들의 신분이 무엇이오?”

욘크가 앞을 나서며 정중하게 물었다.

뒤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천과 사공진무가 욘크의 인사하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북궁천소와 왕전 등은 인상을 그린 채, 앞을 막아선 자들의 행색을 살폈다. 그들의 병기를 본 왕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저거 꽤 멋진 칼이군. 그렇지 않냐?”

“톱날이 세워진 검이라… 상대의 검을 부러뜨리기 좋은 방식이야. 제법인데.”

“몇 개만 뺏어야겠군.”

그들은 대화를 곧 멈추어야 했다.

앞을 막아선 자들이 욘크의 무척이나 정중한 물음에도 대뜸 욕설을 퍼부으며 사납게 나왔기 때문이다.

“준남작? 흐흐! 요즘은 개나 소나 준남작이지. 이봐! 귀족나리! 우리가 누군 거 같아? 앙!”

두목이 욘크가 친절하게(?) 소개한 드웨인을 보며 험악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드웨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록 함께하는 존재들에겐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숙여야만 하는 그였지만 도적으로 보이는 자들에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약골을 아니었다. 비록 최하위급이지만 준남작의 작위도 뛰어난 검술을 인정받아 얻은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가 제법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적들인가?”

“흐흐! 준남작만 터는 위대하신 도적들이다. 왜?”

“크하하하!”

모두가 고개를 젖히고서 크게 웃었다.

챙!

드웨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덩치에 걸맞게 그가 뽑은 검은 그레이트 소드라 불리는 대단히 무거운 중검이다. 양쪽에 날이 세워진 그것을 보자 이번엔 북궁천소가 눈빛을 반짝였다. 멋들어지게 장식된 검신의 문양들이 시선을 끈 것이다.

“감히! 제국의 영토에서 귀족을 털 생각을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들이구나! 드웨인가의 기사들이여! 검을 뽑아라!”

드웨인이 호탕하게 외쳤다.

진천과 사공진무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중원에서 가끔 보았던 경극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들이 줄줄 터져 나오자 둘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조윤과 담대소천도 가볍게 웃었다.

혁련천후를 비롯한 모두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도적들은 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무런 기운조차 발산되지 않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들이 철석같이 믿는 마법사도 눈앞의 셋만 조심하면 된다고 했다.

“두목! 제법 강한 마나를 지닌 놈들입니다!”

“흐흐!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끝내자고.”

“엇! 오러 블레이드!”

드웨인의 검 끝에 어린 푸른색 아지랑이를 본 도적들이 제법 놀란 듯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드웨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욘크와 다른 기사, 칼츠가 드웨인의 좌우로 늘어서며 검을 겨누었다.

그들 역시 검 끝에 가느다란 실처럼 일렁이는 푸른빛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조윤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힘자랑하다간 금방 체력이 고갈되지. 아주 무식한 놈들이네 저놈들.”

“그걸 보고 놀라는 저 새끼들이 더 우습다. 귀찮은데 그냥 쓸어버리고 얼른 가자. 술도 고프고 배도 고프고…….”

북궁천소의 말에 조윤이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어떻게 할까를 눈빛으로 물었지만 혁련천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잠시 지켜보지.”

“화산의 문지기만도 못한 놈들입니다.”

“우린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 사소한 것도 경험이라 여겨둬!”

“그러지요.”

모두는 일부러 말을 고삐를 틀어 전장에서 슬쩍 뒤로 물러섰다.

“이 자식들! 도주하면 쫓아가서 뒈질 줄 알아!”

도적의 하나가 그들에게 버럭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을 했다.

말을 돌려 도주하는 것으로 본 모양이다. 북궁천소의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지켜봐.”

“끄응!”

혁련천후의 제지에 북궁천소는 도적들을 죽일 듯 노려보며 몸을 들썩였다. 그때 혁련천후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그의 시선은 로브를 뒤집어쓴 도적단의 마법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저 복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켜보자던 생각이 짧은 시간에 바뀌었다.

“천소! 저놈을 데리고 와라.”

“다른 놈들은 죽일까요?”

“죽이진 마라.”

“쩝! 알겠습니다.”

북궁천소가 입맛을 다시며 기다렸다는 듯 말에서 뛰어내려 도적단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무지막지한 구타! 싸움은 그의 말 한마디로 시작해 칼질 한 번 못 해본 도적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것으로 끝났다.

모조리 거품을 물고 쓰러진 도적단들을 보며 드웨인은 그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서 있을 뿐이다. 당차게 뽑아 든 검이 무색할 지경이다.

“꿇어 새끼야!”

“사, 살려 주십시오!”

로브를 벗겨내고 속옷만 걸친 도적단의 마법사가 혁련천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혁련천후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친 그는 두려움에 육신을 벌벌 떨었다. 살려 달라는 말조차도 입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했다.

“하나만 묻지.”

“무, 무엇이든, 으으…….”

이가 저절로 부딪혔다.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오가는 방법을 알고 있나?”

“아이고! 전, 그저 마법흉내만 내는 수준입지요. 그런 경지는 대마법사들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요. 전설의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마법이란 말이지?”

“저, 저도 그것은 잘 모릅니다요. 다만 차원을 오가는 마법은 용언마법이나 그에 준하는 서클을 초월한 존재들만이 시전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요.”

혁련천후의 눈이 빛을 번득였다.

“용언마법은 무엇이지?”

“그게,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법인데… 없다고 보는 것이…….”

드래곤은 혁련천후도 드웨인에게서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물론 꾸며낸 말이라 생각하는 그였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 존재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나?”

“드, 드래곤을 말입니까?”

“서클을 초월했다는 존재들 말이다.”

“그거야, 저도 모릅니다요. 그저 마법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전설일 뿐이라…….”

사실 눈앞의 엉터리마법사가 그것을 제대로 알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이곳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선 혁련천후로서는 비슷한 복장을 한 그가 뭔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었지만 당연히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더 이상 물을 것도, 들을 것도 없어지자 혁련천후는 엉터리마법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조윤이 도적들을 한차례 쓸어본 후, 말했다.

“도적질을 한 놈들입니다. 이대로 두고 떠나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합니다.”

그 말에 도적들이 사색이 되었다.

“내공이라도 없애든지…….”

“그런 것조차도 없는 놈들입니다. 그냥 팔 하나를 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으…….”

도적들이 구타당한 상처 부위의 통증도 잊은 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혁련천후의 차가운 눈길이 도적을 쓸고 지나갔다. 내공을 전혀 담지 않았음에도 오줌을 지리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의 시선이 드웨인을 향해 돌아갔다.

“이곳에선 도적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이 다릅니다만, 귀족을 해치려고 든 자들은 무조건 사형입니다. 물론 재판 없이 즉결처분이 가능하지요.”

“일반 백성을 해친 자들은?”

“그야 노예를 죽인 자들과 일반 백성을 해한 자들은 연쇄살인범이 아니면 돈을 주고 죄를 면할 수 있습니다.”

혁련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도 영주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너희 땅에서도 그런 법이 통용되는가?”

“제국의 법이니까요.”

드웨인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혁련천후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이곳이나 중원이나 약한 백성들만 죽어나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에서 은근한 분노가 치밀었다.

‘헉!’

드웨인을 비롯한 셋은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짐을 보고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직감했다. 요즘 들어 인간평등을 외치며 투쟁을 벌여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때로 왕국의 정규군과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극한 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드웨인은 혁련천후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조윤!”

“말씀하십시오!”

“저들의 혈도를 짚어 한쪽 팔을 못 쓰게 만들도록! 단! 오 년이 지나면 저절로 풀어지게 해.”

조윤이 성큼성큼 도적들을 향해 걸었다.

짧은 시간에 스물에 달하는 도적들은 불구 아닌 불구가 되었다.

침을 삼키며 상황을 주시하던 드웨인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서 혁련천후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면 자신과 가문의 기사들은 신의 품속으로 날아가야만 한다.

“소천!”

“예, 주공!”

“넌 저 친구의 교육을 좀 맡아야겠다. 싹수가 보이지 않으면 맘대로 처리해도 좋다.”

“그러지요.”

혁련천후가 말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앞으로 나아가자 모두는 말 위에 올라 그의 뒤를 쫓았다. 살아난 것에 안도한 드웨인은 이동하는 내내 담대소천을 흘긋거렸다. 교육하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에겐 눈앞의 일곱이 거대한 낫을 든 지옥의 사자로밖엔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 * *

레이놀드 백작은 케이론 제국 최강의 초인이자 실질적인 지배자인 테세우드 공작의 근위장 출신으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강자이자 떠오르는 신흥귀족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테세우드에게 충성을 인정받아 백작의 지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권역을 둘러보기 위해 수십 명의 근위기사들을 대동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영지순회를 행하는 중이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는 레이놀드 백작은 마차의 창을 통해 드넓게 펼쳐진 자신의 영지를 보며 한껏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 과연 이곳이 제국에서 으뜸가는 비옥한 영토를 자랑한다고 하더니 과연 대단하구나. 저 황금빛 들판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배가 부르도다!”

멋들어지게 늘어진 수염을 어루만지며 연신 웃음을 터트린다.

황금으로 치장된 마차 주변은 역시 황금색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겹겹으로 호위하며 이동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하며 마차의 지근거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각하! 조금만 더 가면 세비앙의 축복이라는 아르소 영지에 접어듭니다. 이쯤에서 기다리시면 사람을 보내 영접을 나오라 전하겠습니다!”

근위장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공경하게 말했다.

“오! 아르소 영지? 신께 바칠 곡물을 생산한다는 그 아르소 말이냐?”

“그렇습니다! 공기 좋은 이곳에서 만찬을 즐기시고 계시면 지역의 모든 영주들에게 각하를 영접하라 이르겠습니다.”

“좋지! 좋아! 그럼 우리는 이쯤에서 쉬어 볼까?”

“각하를 모셔라!”

근위장의 명령에 다른 마차에서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내리더니 황급히 비단을 깔고 각종 음식이 든 바구니를 풀어 자리를 마련했다. 이동 중임에도 불구하고 차려진 음식은 그야말로 황제가 부럽지 않을 정도의 진수성찬이었다.

끼악!

소식을 전하는 거대한 독수리가 근위장의 손을 떠나 북쪽으로 날아갔다. 여인이 따라준 호박색 술을 한 모금 머금은 레이놀드 백작이 기사들에게 자리에 앉아 쉴 것을 지시하고는 본격적인 술판을 시작했다.

“아르소 영지의 영주가 그렇게도 아름답다지?”

“소문엔 제국의 삼대미녀이자 대륙의 오대미녀에 든다고 했습니다. 제가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각하!”

“허허! 어찌 귀족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테세우드 각하께서 대공의 위에 오르시면 차기 공작의 지위에 오르실 각하이십니다! 그깟 작은 영지의 영주 정도는 감히 각하의 수발을 거절하진 못할 것입니다.”

“이봐! 힐튼! 사람들이 곱게 보지 않을 거야. 백작이라면 당연히 품위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 자네가 소문이 나지 않게 은밀히 추진해 보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둘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 것이 이런 방면으로 꽤나 수작질을 많이 해본 듯 보였다. 모두가 술과 음식으로 흥청거릴 때, 세 번째 마차의 지붕에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늘 속으로 번득이는 눈빛이 무척이나 살벌했다. 그는 레이놀드 백작이 몇 번에 걸쳐 자리를 함께할 것을 원했으나 거절하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백작의 청을 거절할 정도라면 필시 상위 서클의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미련한 돼지 같은 놈!’

여자들을 끼고 흥청거리는 레이놀드 백작을 보며 그는 섬뜩한 눈빛을 발했다. 간혹 지독한 살기마저 품는다.

마법사들이 살기를 품는 일은 매우 드물다. 드래곤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들은 인간세상의 영역을 넘어 신의 영역에 도달할 가장 가능성 높은 존재들, 관조자의 뜻을 품은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살심을 드러내지도, 품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마법사는 그러한 것을 여지없이 뭉개버리고 있었다.

‘6서클이 넘어가면 네놈의 그 추악한 육신부터 소멸시켜 주마!’

놀라웠다. 6서클의 경지라니…….

보통 상위계열의 마법사들을 나눌 때, 기준이 되는 경지가 5서클이다.

5서클이 넘어가는 마법사들은 어지간한 제국의 백작과 맞먹는 대우를 받는다. 본인의 뜻에 따라서는 간혹 큰 영지를 하사받기도 했으며 어떤 이들은 황제나 왕들의 측근에서 호위호식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대륙을 통틀어 5서클의 경지에 든 마법사들은 오십을 넘어가지 못한다. 하물며 6서클은 대륙에 오직 셋만이 존재한다.

‘간악한 자식! 조금만 기다려라.’

필요 이상으로 그는 적개심에 가까운 감정을 보였다.

그때 기사 한 명이 마법사가 앉은 마차로 다가왔다.

“요란 경! 이것 좀 드시지요.”

먹음직한 음식과 술이 기사의 손에 듬뿍 들려 있었지만 마법사는 요지부동,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사도 그냥 물러가지 않고서 그를 보며 서 있었다. 제법 존경의 빛이 담긴 기사의 시선을 마법사는 외면하지 못했다.

“두고 가게.”

그 차가움에 기사는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황급히 되돌아갔다.

‘흥! 불쌍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음식을 내게 먹으라고.’

마법사, 요란의 눈이 일순 번쩍였다.

그러자 술과 음식이 빛의 가루로 변하더니 허공으로 사라졌다. 마침 그를 쳐다보던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크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기침이 저절로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왔다.

자신이 하사한 음식을 손도 대지 않고서 소멸시켜 버린 것에 분통이 터졌지만 요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가 없으면 자신의 백작 지위는 모래성과 같다.

자신과 요란만이 알고 있는 비밀계약에 의해 둘은 한시적으로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레이놀드,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었다.

‘괘씸한 놈! 두고 보자!’

속으로 이를 간 레이놀드는 홧김에 술을 병째 틀어박았다.

* * *

아르소 영지를 가장 먼저 들렀던 독수리는 뒤이어 주변 영지의 모든 성을 빠짐없이 들렀다. 마법사의 전령이 심어진 독수리는 인간의 목소리로 레이놀드 백작의 영접을 전한 뒤, 마지막 하나 남은 영지로 날아갔다.

다른 곳에 비해 영토가 좁고 인구도 적은 그곳은 바로 혁련소가 영주로 있는 다크 영지였다. 빠르게 날아오는 독수리를 보며 흑야가 눈빛을 발했다. 혁련소도 독수리를 보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흠! 백작의 전령인가 봅니다.”

“보나마나 영접을 나오라는 말을 전하러 왔겠지.”

“5년이 지났지만 역시 볼 때마다 대단하단 생각밖엔 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독수리라니…….”

“진천도 그 정도의 능력은 있다.”

“하하! 진천 숙부야 중원에 오직 한 분뿐이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세상엔 그러한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지천에 널렸으니 놀라울 수밖에요.”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이 세상에서 진천을 당할 놈은 없다고 봐도 무방해. 놈은 이곳의 시각으로 보면 그야말로 마검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하하! 그럼 아버님이나 조부님은 드래곤쯤으로 보면 되겠군요.”

“파충류에 두 분을 비교할 셈이냐?”

“하하하! 파충류? 하하! 그렇군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신처럼 여기는 존재를 파충류라고 생각을 하는 분은 아마 숙부님뿐이겠지요? 하하하!”

혁련소는 허리까지 젖히며 크게 웃었다.

흑야가 손을 뻗었다. 팔위로 내려앉으려던 독수리가 갑자기 ‘퍼드득’거리더니 바닥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했다. 흑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미안하다. 난 사람 흉내를 내는 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퍽!

발길질에 독수리는 비명을 지르며 멀찌감치 날아가 처박혔다. 죽지는 않았는지 꿈틀거리며 두려움에 찬 눈으로 흑야를 쳐다보았다.

“전할 말만 전하고 얼른 꺼져!”

“레이놀드 백작 각하의 영접을 명하노니 남작 테베스는 지금 즉시 아르소 영지의 초원으로 와서 각하를 영접하라!”

독수리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흑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퍽!

또다시 이어진 발길질에 독수리가 저만치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즉사한 것이다. 혁련소가 고개를 저으며 흑야를 쳐다봤다.

“하여튼, 숙부의 그 성미는… 아니, 따지고 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새 대가리 주제에 반말은…….”

“하하!”

혁련소가 크게 웃었다.

죽은 독수리의 몸에 장력을 퍼부어 가루로 만들어 버린 흑야가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아직 놈들은 네가 이곳의 영주가 된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테베스라면 네 손에 죽은 그놈이 아니냐?”

“워낙 구석진 곳이라 그들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군요. 뭐, 그게 우리에겐 더 좋은 일이지요. 어쩔까요? 그냥 무시하고 가지 말까요?”

“네 뜻대로 해. 난 상관없다.”

“백작의 목을 자르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까?”

“생각 중이다.”

혁련소가 가볍게 웃었다.

“중원에서의 숙부라면 몰라도 지금의 숙부는 절대 놈의 목을 자르진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난, 변한 거 하나도 없다.”

“하하! 영지민들 때문에 숙부는 절대 놈의 목을 자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백작의 목을 자르는 것이야 사실 마음먹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린 다시 세상을 떠돌아야 되고 이곳에 남겨진 영지민들은 다시 힘들었던 옛 시절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그게 걱정되지 않습니까? 아니, 분명 그 걱정을 하고 계실걸요?”

흑야의 얼굴이 구겨진다.

“젠장!”

“하하하! 하여튼 정말 숙부께서 이렇게 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님과 숙부들이 아시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일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중원에선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으로 불리던 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와서는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게 된 그였다. 옛날처럼 악인이라면 무조건 베고 보는 그가 아니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만 죽이고 비록 악인이라도 개과천선의 여지가 보이면 미련 없이 놓아주는 그런 흑야로 변해 있었다.

그 하나로 인해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중원의 사람들이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왜 진즉에 그러지 않았냐고 성토를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여행을 할 겸,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이 기회에 아르소 영주의 미모도 구경해 보지요. 뭐…….”

흑야의 고요한 눈동자가 혁련소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혁련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아픔을 그가 놓칠 리 없었다. 술잔을 기울인 흑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혁련소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찾을 수 있다.”

* * *

여전히 지붕 위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마법사 요란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감히 레이놀드의 전령을 죽이는 자가 있었다니…….’

독수리에 심어준 자신의 마법이 끊어졌음을 그는 느꼈다.

독수리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심어졌던 마법이 자신에게로 소환된다. 지금의 이 느낌은 분명 독수리의 죽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요란의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나타났다.

‘후후! 누군지 꽤 흥미로운 자군. 이곳은 중소 규모의 영지뿐이다. 고작 그 정도의 세력을 가진 영주가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이곳으로 온다면 남아 있는 흔적으로 알 수 있겠군. 후후! 이거 꽤 재밌어지겠는걸.’

자신의 마법은 소멸될 때, 그 흔적을 남긴다.

직접적으로 상대한 자의 육신에 아주 미세한 양의 마나가 15일 정도 머무르게 된다. 그 흔적으로 상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영주가 있다. 돼지!’

그는 여전히 흥청거리는 레이놀드 백작을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때 먼 곳에서 먼지가 일며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요란의 눈에 보였다. 상당히 화려한 마차였다. 요란의 눈이 투명한 광채를 뿜었다.

아주 먼 거리도 똑똑히 볼 수 있는 특수마법을 펼쳐 마차를 살폈다.

‘아르소의 영주!’

요란은 마차의 외벽을 뚫고 그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 떨리게 만드는 금발의 여인이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바로 제국의 삼대미녀로 불리는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 그녀였다.

그녀의 복장은 여타, 여인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은색갑주에 머리엔 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품엔 여인이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가 들려 있었다.

‘후후! 역시 제국 최초의 여 마스터다운 모습이군.’

그랬다.

아리안은 제국 최초의 여 마스터였다.

그녀는 용맹한 기사이자 후퇴를 모르는 불굴의 여전사로 불린다. 오러를 두른 그레이트 소드를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진하는 그녀를 두고 세인들은 금발의 광전사로 부르기도 했다. 여인에게 붙이기엔 지나치게 섬뜩한 면이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용맹은 전대륙에 소문나 있었다.

두두두!

마차는 빠르게 레이놀드 백작이 흥청거리는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 속도가 엄청남을 본 레이놀드 백작의 근위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앞을 막아서자 그제야 마차는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멈추었다.

덜컹!

마차의 문이 열리며 햇빛에 번쩍이는 눈부신 투구에 금발을 날리며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놀드의 눈이 순간 번쩍 빛을 발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리안의 미모는 실로 대단했다. 마치 미의 요정에게 갑옷을 걸쳐놓은 것처럼 눈부신 외모였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묘한 눈빛을 발했다.

“신분을 밝히시오!”

근위대장이 정중하게 물었다.

물론 아리안의 신분을 알면서도 형식적인 절차 때문에 물은 것이다.

아리안의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가 주변을 느릿하게 쓸어봤다. 레이놀드를 거쳐 마차 위의 요란에게서 그녀는 시선을 멈추었다. 요란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저런 것이 바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강자들의 눈빛임을 그는 새삼 느꼈다.

마스터는 마법사들의 천적이다. 하지만 요란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살짝 섬광을 발한 아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결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수준의 태도였다. 몸짓 하나에 고매한 품격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지간한 남자들도 고개를 흔드는 용맹함이 숨겨져 있음을 모두는 알고 있다.

“어서 오게! 그대가 그 유명한 아르소의 영주인가? 허허! 과연 대단하구나! 대단해!”

레이놀드의 두 눈에 탐욕이 번득였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놓칠 아리안이 아니다. 슬쩍 미간을 찌푸렸던 아리안이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제일 빨리 온 것 같군요. 다른 영주들이 올 때까지 저는 제 마차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일까?

품격이 느껴지던 조금 전과는 판이한 차가움이 그녀에게서 발산되었다.

여인의 나긋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지독한 아름다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니 그것만큼 사람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것이 또 있으랴.

“아가씨! 마차로 가시지요.”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아리안은 성큼 마차로 걸음을 놓았다. 순간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그녀의 다소 오만한 태도에 화가 치민 것이다. 평소의 그였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흐흐! 반드시 네년을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 * *

아리안이 도착하고 1시간 정도가 지나자 2명의 영주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아리안과는 달리 그들은 레이놀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짓을 다 떨었다. 그들을 쳐다보는 요란의 눈이 레이놀드를 볼 때와 같아졌다.

속이 울렁거림을 참아낸 그는 그들에게서 마나의 흔적을 살폈다.

‘아직 그자가 오지 않았군.’

독수리에게 심어 놓았던 마나의 흔적은 그들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네놈들 따위가 그런 행동을 할리 없지.’라고 생각한 요란은 마차에 등을 대고 누웠다.

초원 위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술자리는 그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다져진 레이놀드 백작은 야외에서의 술자리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초원에 술판을 벌여놓고 영주들을 오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나도 나머지 둘이 오지 않자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이 슬슬 붉어졌다.

화가 난 것이다. 아리안이라도 술판에 끼었다면 나머지 둘이야 오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여겼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차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발끈 성질을 부린다.

“이봐! 왜 아직 오질 않는 거지? 그리고 화이트도 올 때가 지났지 않느냐?”

화이트는 레오날드 백작이 무척 아끼는 애완용 독수리다.

물론 흑야의 발길질에 죽어 버린 그 독수리다. 요란은 화이트의 죽음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탓이다.

근위대장이 조금은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며칠 전까지 이곳 북부지역에 꽤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마차의 속도가 더딘 듯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요. 그리고 화이트는 종종 오늘처럼 늦었던 적이 있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오다가 사냥이라도 하는가 봅니다.”

“크음! 아직 오지 않은 자들이 북부지역의 영주들인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너무 늦잖아! 크흠! 이봐 술 남은 것 더 가져와!”

술이 제법 취한 레이놀드 백작의 말투는 전쟁터를 누빌 때의 거친 스타일로 변해 있었다.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는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모습에 영주들은 내심 그를 비웃었다. 그들은 품위와 격식을 목숨처럼 여기는 전형적인 귀족들, 당연히 전쟁에서 공을 세워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을 이루어낸, 낙하산 귀족의 전형인 레이놀드 백작이 그들의 눈에 찰 리 없었다. 그가 지닌 배경이 두려워 굽실거릴 뿐,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 * *

두 필의 백마는 적당한 속도로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말 위의 인물들은 모두 긴 흑발에 제국의 복장과는 다소 다른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레이놀드에게로 향하는 혁련소와 흑야였다.

호위로 따라오겠다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오직 둘만이 길을 나선 지 하루가 지났다. 일부러 천천히 주변 경관을 구경하며 다니던 터라 아직까지 아르소 영지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대지를 두 개의 달이 고고함을 뽐내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언제 봐도 믿기지 않는 신기한 광경입니다.”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을 보며 혁련소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힐끗 달을 쳐다봤던 흑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신기한 게, 저것뿐이겠나. 난 아직도 모든 게 신기할 뿐이야. 먹는 음식까지도 말이야. 빵이 뭐야. 빵이…….”

“하하! 이젠 식습관은 바뀔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전 간편하고 좋기만 하던데…….”

“마음에 들지 않아.”

둘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느릿하게 말을 몰았다.

“아르소가 보이는군요. 과연 우리가 사는 곳보단 훨씬 크고 발전한 모습입니다. 이 시간에 저런 불빛이라니…….”

먼 곳에서 거대한 불꽃의 덩어리가 보였다.

아리안이 영주로 있는 아르소가 보이자 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야경을 감상했다. 길게 늘어진 도시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도 불구하고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도시의 발달을 불꽃이 대변해 주고 있었다.

“모든 공국의 왕들이 탐을 낼만도 하군요. 성곽을 끼고도는 강에다가 저 넓은 곡창지대를 보십시오. 제대로 확장하면 제국의 수도로 삼아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듯싶습니다.”

“여인이 다스리기엔 지나치게 넓고 비옥한 땅이지. 그녀가 마스터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벌써 누가 먹어도 먹었을 곳이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한 여인입니다. 마스터라면 중원의 시각으로 본다면 절정을 초월한 수준이 아닙니까? 중원에서도 그 정도 수준의 여인은 흔치않았는데 말이지요.”

흑야의 얼굴에 옅은 그리움이 떠오른다.

언제나 가슴 한구석을 진하게 물들인 그리움은 때를 가리지 않고 스멀거리며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흑야의 얼굴을 흘긋거린 혁련소가 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빨리 가시죠. 우리 때문에 다른 영주들이 꽤 고생하고 있을 테니…….”

“……!”

둘을 실은 전마가 바람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 * *

여인의 농염한 육신을 탐하던 레이놀드는 근위대장의 보고를 받고 거처에서 나왔다. 임시로 세워진 거처라지만 거대한 쇠가죽을 염색하고 그 위에 온갖 장식을 박은 천막은 황제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괘씸한 놈들! 이제야 도착을 하다니…….”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테베스가 아닌 다른 자들이 왔습니다. 더욱이 흑발을 한 자들이 둘씩이나 됩니다.”

“뭣이! 흑발? 혹시 흑안은 아니더냐?”

“혹시나 해서 자세히 살폈습니다만 다행히 옅은 갈색의 눈동자를 지녔으니 소문의 그자들은 아닙니다.”

레이놀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모든 대륙을 통틀어 가장 소문이 거창하게 난 존재들이 바로 흑안의 마검사란 존재였다. 부정을 저지르고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은 그들을 지옥의 사자처럼 여긴다. 언제 어디서 그의 검이 목을 자르고 지나갈지 몰라서였다. 스스로가 좋은 귀족이라 여기지 않는 레이놀드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둘은 빠르게 영주들이 모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두둑!

통나무가 울음을 터트리며 굵은 불줄기를 뿜어냈다.

동이 트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영주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불을 쬐고 있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혁련소와 흑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사들이 건넨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혁련소는 남자처럼 갑옷을 걸친 아리안을 흘긋거렸다.

역시 소문대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녀였다. 게다가 어깨에 걸친 그레이트 소드와 이질적인 기운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상당한 미인이군.”

“괜히 제국의 삼대미녀란 소릴 듣겠습니까.”

“얼굴보단 검이 눈길을 끄는군. 저 정도면 남궁세가의 중검은 저리가라겠어. 파괴력을 우선하는 여검사라… 확실히 대단한 여인이군.”

흑야의 시선은 아리안의 그레이트 소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 온 지 5년이 지나는 동안 여인이 그레이트 소드를 주병으로 삼은 것은 그도 처음 보았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를 바라보는 여인 또한 아리안이 처음이다.

“저자군요. 낙하산 백작이라는 자가…….”

“소문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자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레이놀드가 근위대장과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장신에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레이놀드에게 던져진 흑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영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혁련소와 흑야도 느릿하게 일어났다.

“다들 모였군. 늦은 자들은 다음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별히 유의하도록!”

레이놀드가 백작의 권위를 한껏 발산하려는 듯 영주들에게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짐짓 근엄한 시선으로 영주들을 느릿하게 쓸어본 그가 혁련소를 보며 물었다.

“그대가 테베스의 영주인가?”

“지금은 다크로 바뀌었지요.”

“내가 알고 있는 그곳의 영주는 분명 테베스였다. 어찌된 일이지?”

“몇 개월 전에 바뀌었습니다. 영지를 꼼꼼히 챙기다 보니 아직 보고 드리지 못한 점, 이해하십시오!”

말은 무척이나 정중했으나 표정과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다소 못마땅했던 레이놀드가 인상을 쓰고서 다시 물었다.

“영주의 자리에 취임하면 상신기간이 1주일로 정해진 것이 제국의 법도이거늘, 법을 어기는 자가 어찌 영지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은가?”

“영지에 통신마법구가 없는 바람에 그만…….”

“크음! 통신마법구가 없다니… 그러고도 영주라고 할 수 있는가? 촌구석은 어쩔 수가 없군! 그건 그렇고 저자는 누구냐?”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린 레이놀드가 흑야를 가리키며 물었다. 흑야가 자신의 시선을 감히 피하지 않자 그는 눈매가 매우 가늘어졌다. 근위대장이 험악한 표정으로 흑야에게 시선을 돌릴 것을 눈빛으로 지시했다. 그때야 흑야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돌아가는 그의 눈빛이 순간 섬뜩함을 발산했으나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영지의 근위장입니다.”

“근위장? 푸하하! 꼴에 영주랍시고 별걸 다하는구나!”

“하하하!”

근위대장과 일부 영주들이 혁련소를 보며 비웃음을 터트렸다. 흑야의 눈이 섬광을 발한 것을 본 혁련소가 전음으로 그를 말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하하! 같은 권역에 계신 영주님들을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속이 뒤틀린다. 적당히 해.]

[흠! 싸워서 좋을 게 있겠습니까? 거슬려도 좀 참으세요.]

흑야는 혁련소의 밝은 얼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레이놀드를 슬쩍 쳐다봤다.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잡으려고 기를 쓰는 그를 보자 다시금 죽이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중원에서나 이곳에서나 저런 종자들을 싫어하는 성정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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