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마법사 요란
레이놀드의 무게 잡기는 20분 정도 더 이어졌다.
먼동이 트며 붉은 일출이 시작되자 레이놀드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을 설친 탓에 오후에 출발할 것을 지시하고는 이내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영주들도 설친 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마차로 들어갔다. 아리안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본 혁련소와 흑야는 마차가 없는 탓에 근처의 나무 밑에 가서 앉았다.
“놈의 행차에 함께할 생각이냐?”
“어쩌겠습니까.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고 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나치게 느긋하군. 언제까지 영지에 머무를 작정이지? 그 아이를 찾으려면 세상을 돌아다녀도 쉽지 않을 터인데…….”
“당분간은 영지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머무르면서 마법사들을 구해볼 생각입니다.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법사만 구해지면 그녀를 구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최소 5클래스를 넘어야 한다. 넘어섰다고 해도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말이야. 그리고 그 정도의 놈들이라면 벌써 모든 제국이나 왕국에서 손을 뻗쳤을 것이다. 그런 놈들을 어디서 어떻게 구한단 말이냐? 설사, 지금껏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가 있다고 치자. 가만히 있어도 귀족작위가 주어지는데 과연 촌구석까지 오려고 하는 놈이 있을까?”
“방법이 생기겠지요.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서둘렀습니다. 천천히, 확률이 높은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서는군요.”
물을 한 모금 마신 흑야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네 좋을 대로 하자. 눈 좀 붙여둬. 저 돼지 같은 놈이 일어나려면 꽤나 걸릴 테니…….”
“그러지요.”
둘은 이내 눈을 감았다.
사실 그들 정도의 고수는 그다지 수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피곤하면 운기를 통해 해결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와서 그들은 조금 변해 있었다. 세상 천지에 아는 사람이라곤 단둘뿐이니 중원에서와는 달리 모든 면에서 다소 느긋해진 것이다.
* * *
아리안은 자신의 마차에서 시녀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마법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낸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썹을 곱게 찌푸렸다.
“아가씨께서 보셔도 너무 아름다우시죠?”
호위 여기사이기도 한 시녀가 짐짓 질투하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필요 없어. 미모 따위…….”
“에그… 또 저러신다. 그 말씀을 세상의 여자들이 들었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나하곤 상관없어. 한 잔 더 마실래.”
무뚝뚝하게 대답한 아리안이 찻잔을 내밀었다.
마법램프로 끓인 차의 맛이 일품이다.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차를 즐기던 아리안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사내가 스치고 지나갔다. 흑발을 늘어뜨리고 세상의 모든 차가움을 한몸에 지닌 듯한 사내의 영상이었다.
‘낯이 익어…….’
그랬다.
분명 처음보는 사람들인데 가슴 한구석이 가볍게 뜀을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만났던 사람들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혁련소의 준수한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남자 따위… 필요 없어!’
하지만 이내 본연의 차가움을 되찾은 그녀는 마차의 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눈부신 태양이 초원을 뜨겁게 달구려는 듯 빛을 뿌렸다. 레이놀드 백작의 기사들과 각 영주들이 데려온 기사들이 각자 호위하는 마차의 주변을 철통처럼 경계하는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레이놀드 백작의 문양이 표시된 마차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마법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로브를 걸친 그는 전날 밤부터 신경을 자극하던 그 마법사였다.
‘저 사람… 흑마법사가 분명해.’
지나치게 음울한 기운을 뿌린다.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이 지닌 공통된 분위기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백작 정도의 귀족이라면 절대 흑마법사를 대동하진 않는다. 상대적으로 지탄받는 대상인 흑마법사를 대동하면 상당한 비난을 받게 된다. 약아빠진 레이놀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을 거다.
‘기분 나빠, 저 사람…….’
보는 것만으로 꺼림칙하며 싫었다.
“왜 그러세요?”
“응? 아니야. 아무것도… 좀 자둬. 조금 후면 며칠 동안 꼬박 시달려야 할 거야.”
“아가씨도 좀 주무세요. 마법알약을 드시는 것보다 그냥 수면을 취하는 게 건강에 좋대요.”
“알았어.”
아리안이 갑주를 벗고 막 융단 위에 누우려는 때였다. 갑자기 마차가 크게 휘청거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말들의 울음이 크게 들려왔다.
“어머! 무슨 일이지?”
시녀가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황급히 갑주를 걸친 아리안과 여호위기사가 밖으로 나섰다. 모든 마차의 말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기사들이 말들을 진정시키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가씨! 저기를 보세요!”
아리안은 여호위기사가 가리킨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놀람의 빛이 나타났다. 하늘의 제왕이자 먹이사슬의 최상층부에 존재하는 와이번이 광포한 움직임을 보이며 사방을 날고 있었다. 그것도 두 마리씩이나… 와이번이 나타났으니 먹이사슬의 아래에 놓인 말들이 놀라 날뛰는 것이 당연했다.
“어머! 이쪽으로 와요!”
챙!
아리안이 그레이트 소드를 뽑아 들었다.
두 마리의 와이번 중, 하나가 자신들의 마차로 쏜살같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발을 적당한 너비로 벌렸다.
치르륵!
그녀의 검이 푸른색 아지랑이를 품었다. 세상에 못 벨 것이 없다는 소드오러다. 와이번은 어지간한 검으로는 피부에 상처도 내지 못한다. 오직 소드 오러만이 두꺼운 가죽을 뚫어낼 수 있다.
“감히! 몬스터 주제에!”
그녀의 초승달 같은 눈썹이 상큼하게 위로 올라갔다.
쾅!
순간, 와이번의 몸에 불꽃이 작렬했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던 와이번이 허공에서 휘청하더니 이내 방향을 선회하여 다시 날아올랐다. 아리안이 불꽃을 작렬시킨 주인공을 찾았다. 자신의 오감을 자극하던 그 마법사였다.
‘바보같이… 두었으면 베었을 것을!’
도와준 것이라면 그다지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온다!”
“한꺼번에 공격하라!”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오직 둘 만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와이번을 구경하고 있었다. 흑야와 혁련소다. 검조차 뽑지 않은 그들을 보며 아리안은 보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와이번 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의 실력을 지녔단 말인가?’
와이번은 쉽게 볼 상대가 아니다.
드래곤이 없는 세상에서 와이번은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오른 몬스터의 제왕이다. 엄청난 힘을 지닌 와이번의 발톱은 마법방어막이 심어진 갑옷도 쉽게 찢어발긴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인간들만이 상대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먼저 상대의 몸에 검과 발톱을 찌르는 쪽이 이긴다.
히히힝!
기사들의 방어를 우습게 뚫어낸 와이번이 말 한 마리를 꿰차고 하늘로 날아갔다. 발톱이 파고든 말의 몸통에서 붉은 피가 후드득 쏟아지며 기사들의 육신을 더럽혔다. 레이놀드가 고함을 질렀다.
“요란! 요란은 어디 있느냐!”
그는 마법사를 찾았다. 마차 위에 여전한 자세로 앉아 있는 요란을 발견하고는 시뻘게진 얼굴로 분통을 터트렸다.
“나의 말이 저지경이 될 때까지 넌 뭐 했느냐? 네놈에게 들어가는 돈이 도대체 얼만 줄 알고나 있느냐? 돈을 받아 처먹었으면 밥값을 해야지. 팔짱만 끼고 똥 멋을 부리라고 네놈에게 오백 골드를 처바른 줄 알아! 내, 오늘 네놈의 목을 베고 다른 마법사를 찾겠다!”
레이놀드는 매우 분노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요란을 대동한 것이다.
그러나 요란은 마차 위에서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사태를 방관했다. 요란의 효용가치 때문에 가급적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레이놀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까지 요란이 자신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한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각하! 고정하십시오!”
근위대장이 황급히 레이놀드를 만류했다.
“비켜라!”
“각하! 이번 영지순찰까지는 그가 있어야 합니다. 고정하십시오!”
레이놀드는 제국에 소문난 마스터다. 비록 낙하산 귀족이라 비난을 받고는 있지만 그도 한때는 엄연한 제국의 장군이었으며 일대일로는 어지간해선 지지 않는 강자였다. 그런 레이놀드가 검에 오러를 품고서 길길이 날뜀에도 불구하고 요란의 얼굴은 차가움 그대로였다.
“요란 경! 어서 각하께 사과하시오!”
“뭘 사과하란 말인가?”
“저, 저…….”
근위대장이 할 말을 잃었다. 그저 머리 한 번 숙이면 끝날 것을 항상 저런 식이다.
“이곳이 와이번의 영역임을 모르진 않았을 테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흥청거려 와이번을 자극한 게 누군데? 흥! 드래곤이 안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요란의 차가운 시선이 삶은 돼지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레이놀드를 향했다. 이건 도저히 같은 편으로 봐줄 수 없는 상황이다. 혁련소는 요란을 매우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흑야의 무심한 눈길도 요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추악한 마법사 놈! 넌 오늘부로 계약해지다! 나와 계약해지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네놈도 잘 알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 앞에서 꺼져버려!”
“각하…….”
근위대장이 죽을상을 하고서 만류했건만 상황은 기어코 최악으로 결말이 나버렸다. 요란이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계약해지 좋지! 내놔!”
그가 손바닥을 레이놀드에게 내밀었다.
“이, 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레이놀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당신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했으니 남은 임금은 지불해야지. 안 그래?”
“요란 경!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근위대장이 소리쳤다.
이미 요란의 주위는 레이놀드의 기사들이 둥그렇게 에워싼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란은 전혀 위축된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남은 임금까지 요구하고 있다.
* * *
“제법 배짱이 있는 자군요.”
“힘에서 자신이 있어서 저러겠지. 조금 전 저자가 날린 마법공격을 보니 꽤 높은 상위계열의 마법사로 보이더군. 그 정도면 최소 5클래스야.”
흑야는 요란이 아리안을 덮쳐가던 와이번에게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날려 보낸 것을 보았었다. 혁련소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5클래스! 그게 정말입니까?”
“틀림없어. 언젠가 6클래스의 흑마법사와 싸운 적이 있었지. 그때 그놈과 저자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한 수준이야. 저 돼지가 미쳤군. 말 한 마리 때문에 저 정도의 마법사를 해고하다니…….”
흑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눈길을 레이놀드에게 주었다.
마법사들은 매우 존중받는 존재들이다. 인간의 영력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그들을 확보하기 위해 거의 모든 제국들은 거금을 쏟아 붓는다.
지금은 상위계열의 마법사와 마스터의 보유수가 국력의 척도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세상을 통틀어 50여 명에 불과한 5클래스의 마법사라면 그 어떤 제국이나 왕국을 가더라도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그런 귀중한 자원을 레이놀드가 내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우리가 고용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예!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제대로 된 마법사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좀 배우기도 하고…….”
“좋긴 하다만, 돈이 많이 들 텐데…….”
“제게 금강석이 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보수야 그것으로 충분하겠지만 과연 저자가 촌구석에 오려고 할까. 그게 문제지. 지금 당장 홀베른으로만 가도 후작은 그냥 줄 텐데 말이지.”
혁련소가 입맛을 다셨다. 듣고 보니 그랬다.
제국 인근에서 가장 강성한 공국인 홀베른에만 가도 요란은 최고의 귀빈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인구 1천의 보잘것없는 도시의 영주인 자신에게 고용될 가능성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봐야 했다.
혁련소의 실망 어린 얼굴을 본 흑야이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네가 원하면 강제로 해줄 순 있다.”
“에이! 사람을 강제로 부리면 언제 나를 찌를지 모르는 칼을 품은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냥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어! 그냥 저렇게 끝나는군요.”
혁련소가 눈을 동그랗게 했다.
“저 돼지가 제법 판단력이 있었군. 그저 꼬리에 불붙은 성질 더러운 돼지로만 보았더니 그게 아니었어.”
“사실 저 백작 정도면 5클래스의 마법사라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실력인데, 마법사를 죽였다고 소문나면 앞으로 다시는 마법사를 고용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물러나는군요.”
혁련소는 레이놀드의 육신에 잠재된 내공, 이 세상에선 마나라고 칭하는 것을 대번에 꿰뚫었다. 상당한 마나가 레이놀드의 몸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제아무리 5클래스의 마법사라도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선 마스터의 검을 피할 수 없다. 마나를 배열하는 시간에 이미 목이 날아갈 것이다.
혁련소의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꽤 재밌는 작자야.’
그는 커다란 금덩어리를 손에 쥐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요란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초원을 걸어가는 요란의 뒤에 대고 갖은 욕설을 퍼붓는 레이놀드가 조금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 * *
레이번의 기습으로 벌어진 사태는 의외의 결말을 맞았다.
홧김에 요란과 계약을 해지한 레이놀드가 영지순방을 철회하고 자신의 땅으로 돌아갔다.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영주들도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다. 요란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초원에 덩그러니 남게 된 둘은 레이놀드가 버리고 간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고는 자신들도 영지로 출발하기 위해 준비했다.
말들에게 푸짐하게 배를 채우게 한 둘은 아르소의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혁련소가 밝은 표정으로 흑야를 돌아봤다.
“어이없게 끝났군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전 숙부께서 그자의 목을 벨까 무척 염려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하하!”
“레이번이 그놈을 살렸지.”
“하하하!”
“아르소에 들렸다 가지 않겠느냐?”
“그곳엔 왜…….”
“그곳의 밀을 영지에 심어볼까 해서… 같은 토양에서 그토록 품질의 차이가 나는 이유를 알아야겠어. 종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재배방법에서 다른 뭔가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언제는 영지를 떠나 세상을 돌아다니자고 하시더니…….”
“네가 그곳에 남겠다며?”
“그렇군요. 하하! 좋습니다! 기왕 아르소에 간다면 마법주머니와 통신석도 좀 구입해야겠습니다. 없으니 무척 불편하군요.”
둘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았다. 이 정도의 속도로 가면 영지까지는 이틀 정도가 걸린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둘의 머리 위로 두 개의 달이 떠오른다. 둘의 모습이 초원에서 완전히 사라질 즈음, 그들이 있던 곳에 사람 하나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요란이었다.
“저자야, 저자가 독수리를 죽였어.”
그는 둘이 사라져간 방향을 응시하며 눈을 반짝였다.
“훗훗! 재밌겠군.”
무엇이 재미있단 말일까. 요란의 눈이 반짝 빛을 발하더니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아르소는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의 밀은 황실과 귀족들에게 매우 높은 가격에 납품할 정도로 제국에서 최고로 뽑힌다. 밀에 못지않게 보리 또한 상당한 양을 재배하는데, 그 때문에 아르소는 술 문화가 상당히 발달했다.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맥주를 파는 집이 술집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그중에서도 나그네의 쉼터라는 술집이 아르소에선 최고로 유명했다.
수용인원이 300명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그곳에 혁련소와 흑야가 들어선 것은 오후가 지나고 저녁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대단하군. 이 정도의 술집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번창한 도시군요. 이러니 공국에서 탐을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술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독한 거면 아무거나…….”
둘은 적당한 곳에 앉아 술과 음식을 시켰다.
자신의 영지와는 달리 매우 활기찬 아르소의 곳곳을 구경하며 혁련소는 내심 자신의 영지도 이렇게 발전시키고 싶다는 생각했다.
전 영주의 혹독했던 정책 때문에 다크 영지의 주민들은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이 영주로 부임한 지 수개월이 지났건만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귀족이라면 으레 전 영주와 같다고 모두는 여기는 것 같았다.
‘기왕 맡은 거면 제대로 키워보는 것도 괜찮겠지.’
사실 혁련소는 영지에 그다지 의미를 두진 않았다.
자신은 돌아갈 곳이 있고 찾아야 할 여인이 있다.
어쩌다가 영주가 되긴 했지만 언제 그곳을 버리고 떠날지는 자신도 몰랐다. 물론 전 영주의 재물을 털어 영지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긴 했지만 그건 의적들도 하는 것이다. 영주라면 영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본분이다.
‘마법사를 구하면 그녀를 본격적으로 찾아 떠나야 하는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흔들고는 심호흡을 했다.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기로 작정한 것이다.
‘후후!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 세상에 완전히 물들어가는군.’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다크 영지가 떠오르는군요. 제가 조금은 우습기도 하고 말입니다.”
“비교되나 보군. 이곳과…….”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저 사람들을 보십시오. 삶에 대한 즐거움과 희망이 가득한 것이 마치 신마성의 식구들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크 영지의 주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희망이란 게 없지 않습니까?”
흑야가 눈을 가늘게 하고서 혁련소를 본다.
“갑자기 영주의 소임을 제대로 하고 싶단 생각이라도 한 거냐?
“예, 그러고 싶단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언젠간 떠나야겠지만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떠나는 건 차후문제니 마음을 그렇게 먹었다면 제대로 한번 해봐. 어차피 중원으로 돌아가면 넌 신마성과 강호 전체를 다스려야 한다. 사전에 한번쯤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사전연습이라 생각해.”
“글쎄요…….”
혁련소는 즉답을 못 하고 쓴웃음만 지었다.
그때 금발에 뚱뚱한 여인이 술과 음식을 들고 왔다.
크리스털로 만든 술병의 마개를 열자 독한 주향이 주변을 진동했다. 대부분이 맥주를 마시지만 흑야는 워낙 독한 술을 좋아했다. 해서 제국에서 가장 독한 여신의 키스라는 술을 시켰다. 몇 잔만 마시면 정신 줄을 놓아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시! 술은 독해야 제 맛이지.”
“크! 항상 이걸 마실 때면 숙부들과 아버지 몰래 마시던 화주가 떠오릅니다.”
“화주에 비하면 이건 술도 아니지.”
값으로 치면 화주 수십 병을 살만한 술이 여신의 키스였지만 그래도 고향의 맛과 같을까.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엔 최고였기에 둘은 자주 여신의 키스를 즐기곤 했다. 몇 잔을 주고받은 둘이 한 병을 더 시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술집의 정문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부분이 평민들이라 기사들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술집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술집 안을 한차례 둘러본 기사들 중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테세우드 권역의 기사들이다. 공작 각하의 명을 전달하러 왔으니 모두들 주목하라!”
모두가 숨죽여 기사들을 지켜봤다.
잠시 뜸을 들인 기사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지난번에 징집에 대한 공고를 한 바 있음은 모두가 알 것이다. 공작 각하에 대한 충성으로 모든 영지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본 공국의 징집에 스스로 자원하였으나 유독, 이곳 아르소만은 아니었다. 해서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전한다. 이달 말까지 19세에서 30세 이하가 되는 남자들은 무조건 아르소의 북쪽에 주둔한 공국의 1군단 마법병과에서 신체검사와 적성검사를 받아야 한다. 어기는 자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웅성웅성!
다시 웅성거렸다. 징집은 곧 군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제대로 수련을 받지 않은 이들 같은 사람들은 군대에 들어가 살아 돌아올 확률은 극히 미미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선두에서 육탄방패가 되는 것이 하급병사들의 주요 임무였기 때문이다.
흑야는 창밖을 슬쩍 쳐다보았다.
다른 기사들이 술집의 곳곳에 커다란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테세우드 공작의 직인이 찍힌 공고문이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기사들이 전한 공고령에 입맛을 잃은 듯 술잔을 깔짝거렸다.
몇은 노골적으로 기사들을 노려보며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나서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싸워서 이길 힘도 없었지만 싸워서 될 자들이 아니었다.
테세우드의 기사들은 제국 내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높은 자들이다. 자칫 그들의 심기를 거슬리면 영주라도 무사하기 힘들다. 모두가 테세우드 공작의 권력이 엄청났던 까닭이다.
“오늘의 경고를 잊지 마라!”
기사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술집은 다시 소란스럽게 변했다. 곳곳에서 징집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이 이십대 초중반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라 술집은 삽시간에 공국에 대한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징집을 하다니… 전쟁준비라도 하는 걸까요?”
“모르지. 다크 영지에도 징집에 대한 공고를 보냈던가?”
“전혀… 이럴 땐, 촌구석이 좋군요. 인구가 적으니 신경조차 쓰지 않은 모양입니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에 징집령을 내리다니… 확실히 웃기는 놈이군.”
술을 한 모금 머금은 흑야가 주변을 돌아보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 밝았던 사람들이 징집령을 듣고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인간이란 단순한 동물이야.’라고 생각한 흑야는 안주를 씹으며 혁련소를 쳐다봤다.
“그만 일어서지. 살 것도 있다면서?”
“그러지요. 술값은 숙부가 내십시오.”
“근위장이 영주 술값도 내야 하나?”
“하하! 나중에 한 방으로 갚겠습니다.”
둘은 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섰다.
언제 붙었는지 공고령이 건물들의 곳곳에 도배되어 있었다. 말을 찾으러 술집의 마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둘은 자신들의 말 주변에 서 있는 기사들과 일반 병사들로 보이는 자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뭐 하는 거지?”
중얼거린 혁련소가 흑야를 쳐다봤다. 흑야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어갔다. 묻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대번에 깨달은 것이다.
그가 성큼 기사들에게 걸어갔다.
“이봐! 남의 말에게 무슨 짓이야?”
기사들이 둘을 돌아봤다. 아래위를 기분 나쁜 눈초리로 쓸어본 기사들이 명령조로 말했다.
“공작 각하의 명령으로 기마병들이 사용할 말을 징집 중이다! 그대들의 소유인가?”
“누구 마음대로 남의 말을 함부로 가져간단 말이지?”
“지금 공무를 수행 중인 우리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냐?”
“시비? 웃기고들 자빠졌네.”
“뭐야! 이놈들이…….”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 시늉을 했다. 영주라도 테세우드 공작가의 기사들에겐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하물며 평범한 자들로 보이는 흑야가 오만한 태도로 굴었으니 기사들은 고리눈을 하고는 둘을 노려봤다.
“감히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그따위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일가친척들을 모조리 노예로 만들고 싶으냐!”
“좋은 말로 할 때, 말에서 손을 떼고 꺼져. 테세우드의 자식새끼라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감히 각하를 모욕하다니! 놈을 잡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섰던 혁련소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지 않았다면 주변은 금방 피바다로 되었을 것이다.
“영주들의 말도 징집대상에 포함되는 것이오?”
“뭐, 영주? 누가 어디의 영주란 말이냐?”
“다크에서 왔소. 그곳의 영주이기도 하오만…….”
영주라는 말에 검을 뽑았던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비록 영주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테세우드의 기사들이지만 그들도 영주를 함부로 대해선 곤란하다. 황제가 인정한 남작의 지위를 지닌 귀족이 아니던가.
“젠장!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모두 물러나라!”
수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건 도저히 영주에 대한 존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영주의 신표를 보여 주시오!”
“신표? 그런 게 있었소?”
“아니 뭐요? 영주라는 사람이 그것을 모른단 말이오?”
기사의 눈이 대번에 의심의 눈초리로 바뀌었다. 물러섰던 기사들이 다시 둘에게로 다가섰다.
“영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렀소. 신표는 없으나 내가 영주임은 사실이오?”
“후후! 이거 말이 된다고 지껄이시나. 신표가 없는 영주라니? 여기가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말이야. 이봐! 촌놈! 영주를 사칭한 죄가 참형에 속함을 알고는 있겠지?”
기사의 태도가 돌변했다.
쓴웃음을 지은 혁련소가 흑야를 돌아보며 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두들겨 패야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흑야가 앞으로 나섰다. 그때 모두의 뒤쪽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그분이 영주임은 제가 증명하죠!”
뜻밖의 상황에 혁련소와 흑야가 뒤를 돌아봤다.
아리안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은빛 갑옷에 탐스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그녀는 기사들을 보며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무례하군요. 본 영주의 허락 없이 함부로 아르소에서 징집을 행하다니… 정식으로 황실에 항의하겠어요.”
“그, 그건… 공작 각하의 명령이 계셨소.”
“흥! 설마 공작 각하가 황제 폐하보다 우선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말에 기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말보다는 그녀가 마스터라는 것이 그들을 온순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녀는 황태자가 점찍었다고 전해진 인물이니 당연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아르소의 하얀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그만 물러가세요! 영주를 욕보인 행위만으로도 당신들은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마세요.”
법으로만 따지면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눈앞의 기사들은 그런 법의 위에서 살아가는 테세우드의 가신들이다. 당연히 그녀의 말에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하지만 더 버틸 수는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는 말을 타고 사라졌다.
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불만을 늘어놓는 기사들, 그런 기사들을 응시하던 흑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쩌면 아리안의 등장으로 가장 혜택을 입은 자들이 기사들이라고 봐야 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혁련소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나타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여기서 또 뵙는군요. 영주님!”
“그렇군요. 아르소의 술맛이 최고라기에 들렀다가 그만… 하하! 아무튼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아리안 영주님!”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영지민들을 위해 모든 재산을 내놓으셨다죠? 아르소의 영지민들도 다크 영주님의 선정을 칭송하고 있어요. 귀하신 분이 오셨으니 제가 직접 모시지요. 두 분을 성으로 모시세요!”
기사들이 말을 끌어와 혁련소와 흑야의 앞에 섰다.
오만했던 조금 전의 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에겐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와 예절이 보였다. 내심 가볍게 감탄하였다. 혁련소가 흑야에게 눈웃음을 짓고는 말 위에 올랐다. 흑야도 어쩔 수 없이 말 위로 올랐다.
아르소가 탄 마차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혁련소와 흑야가 따랐다. 10여 명의 기사들이 마차와 둘의 주변을 호위하며 아르소의 성으로 향했다.
* * *
[그녀가 눈에 익지 않았습니까? 왠지 어디선가 본 듯, 기분이 묘합니다.]
[전혀… 워낙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거 아니냐?]
[그런가요…….]
혁련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를 응시했다.
분명 처음 보는 아리안이다. 물론 레이놀드를 영접하는 자리에서 보았지만 이토록 자세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뭐지? 이런 느낌은…….]
가슴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그리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이상한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생겨났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생겨나는 감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문득 연소민이 떠올랐다. 전혀 닮지 않은 두 여인의 얼굴이 저절로 교차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흑야가 그런 혁련소를 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수련을 게을리 해서 집중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냐? 돌아가면 만사를 제쳐두고 수련에 집중해.”
“돌아가진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당연하지. 지금의 널 주공께서 보시면 혼나는 것은 나다.”
혁련소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오른다.
“이젠, 솔직히 돌아간다는 거에 대한 희망은 지웠습니다. 자신도 없고…….”
“너답지 않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가지 못하면 그분께서 오신다. 그러니 마음 강하게 먹어.”
“하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일행은 30분 정도를 달린 후에 온통 흰색으로 세워진 아르소의 성에 다다랐다.
성을 보던 흑야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오른다. 아름다웠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아르소의 성은 마치 고향의 신마성을 떠올리게 했다.
* * *
둘은 귀빈들을 모시는 별관에 앉아 주변을 구경했다. 아리안은 잠시 자신의 거처에 들렀다 온다고 가버린 뒤였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군요. 이 정도면 상당한 세금을 징수했을 텐데… 설마 악덕영주는 아니겠지요?”
온갖 장식품으로 치장된 별관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자신의 그것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도가 지나치자 아리안의 품성이 저절로 의심되기까지 했다.
“여자라서 그런가?”
“아르소는 재정적으로 풍족한 영지라서 그럴 거다. 밀을 수출해서 버는 돈만 해도 다크 영지의 수십 배는 족히 되고도 남겠지, 게다가 다른 농수산물 역시 제국에서 으뜸으로 쳐주는 곳이 이곳이다. 당연히 세금이 여타의 영지보다는 많을 수밖에.”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은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다크 영지와는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흑야가 가는 눈으로 물었다.
“네가 생각만 바꾸면 짧은 시간에 다크 영지도 이곳만큼 발전시킬 수 있다.”
“하하! 그럴까요?”
“꼭 세상을 떠돌아야만 그 아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인으로서 그 정도의 무력이라면 결코 아리안 영주보다 못한 대접을 받진 않을 게다. 영지를 발전시키며 힘을 기르다 보면 마땅한 방법이 찾아질 수도 있어.”
“흠! 살아 있었다면 세상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겠지요. 사실 숙부와 저를 두고 흑안의 마검사라며 무척 시끄럽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녀라면 우리를 의심했을 테고, 그렇다면 찾아왔어야죠.”
흑야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한곳에 정착을 했던 시간이 3개월이 고작이다. 만약 그 아이가 상당히 먼 곳에 있었다면 시간적으로 찾아오기가 힘들 수도 있었겠지. 정작 왔는데 우리가 떠나고 없었을 수도 있었겠고 말이다. 해서 하는 말인데… 다크 영지를 제국 최고의 영지로 만들어보는 것도 그 아이를 찾는 좋은 방법일 듯싶다.”
“그게 좋은 방법이 된단 말입니까?”
“그렇지. 단순히 세상에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어. 하지만 강력한 영지를 가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힘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취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가 넓어지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느냐?”
혁련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사실 그동안 일부러 소문을 내려고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몬스터 토벌이나 국경지역에서 발발한 대규모 국지전에 참전하기도 했었다.
덕분에 흑안의 마검사라 불리며 유명세를 탔지 않은가. 물론 일부러 동공의 색을 바꾸어 신분을 감추고는 있지만 어차피, 그녀는 자신을 알아볼 것으로 생각하고 움직였던 자신이다.
하지만 5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녀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다.
“만약에 말이다. 그 아이를 찾지 못하고 중원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된다면 이 세상, 제대로 한번 흔들어봐야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난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야.”
“흠! 중원을 통일한 아버지처럼 숙부와 저도 이 세상을 한번 뒤집어 볼까요?”
“난, 진심을 말하는 거야.”
“훗! 저도 그런 생각, 가끔 해봅니다. 정말 억울해서라도 왕국을 건설해 보고 죽어야지…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흑야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왕국? 그렇지! 왕국이 좋겠군. 작은 영지로는 사실 부족해. 적어도 한 나라를 세워보고 죽어야 한이 풀리겠군. 하하! 좋은 생각이다!”
“그게 말이 그렇지. 가능하겠습니까? 그냥 해본 소립니다.”
“누군 처음부터 왕으로 태어나더냐? 의지와 꿈을 가지고 작은 것부터 해 나가다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정색을 하고서 말을 하는 흑야를 보며 혁련소가 가볍게 웃었다.
“정말 왕국을 세워보실 생각입니까?”
“지금 결정했다. 그렇게 하기로…….”
“참! 하여튼 숙부는…….”
그때 문이 열리며 아리안이 들어섰다.
갑옷을 벗고 깔끔한 평상복을 입은 그녀는 소문 이상으로 상당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혁련소는 또다시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거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낯이 익어…….’
그러나 기억을 살펴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죄송해요. 일이 있어 조금 늦었군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저를 따라오세요. 마침 좋은 술이 몇 병 있어 그것으로 대접할까 해요.”
“대접까지야…….”
“선정으로 명성이 자자한 다크 영주께 그깟 술 몇 병이 대수겠어요?”
가볍게 웃어 보인 아리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향기로운 향수가 까다로운 후각을 자극했다. 아리안의 뒤를 따라가며 흑야가 전음을 보냈다.
[손을 보니 상당한 수련을 거쳤어. 확실히 대단한 여자야.]
[그렇…….]
대답을 하려던 혁련소가 입을 다물었다.
아리안의 손, 하얗고 긴 손이지만 굳은살이 눈에 띄는 다소 투박한 손이었다. 그런데 그 손이 연소민의 그것과 너무 흡사했다. 순간적으로 혁련소는 그녀의 뒷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이런… 내가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졌군.]
금발에 조금 더 큰 키, 게다가 흑안이 아닌 벽안에 새하얀 피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심 씁쓸함을 금치 못한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와 비슷한 분위기라 헷갈리나 보군.]
[숙부도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엔 분위기가 너무 흡사해서 그 아이가 변장을 한 줄 알았다만… 확실히 아니더군.]
[손이 닮아서 잠시…….]
흑야가 그의 어깨를 툭 쳐주며 위로했다.
아리안은 성곽의 우측을 돌아 상당히 높은 건물로 올라갔다.
영지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엔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아담한 외야석이 있었는데 술과 각종 음식이 그 위에 놓아져 있었다.
시녀로 보이는 여인, 둘이서 그들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둘은 시녀들이 빼준 의자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 아리안이 앉았다. 무심결에 술병을 보던 혁련소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인다.
“이건 케논 산맥에서만 난다는 과일로 만든 술이군요. 상당히 귀한 것으로 아는데…….”
“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이건 어지간한 주당들도 몰라보는 것인데, 케논 산맥에 다녀오기라도 하신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그곳에 감히 어찌 갑니까? 오우거들의 천국에다 와이번의 번식지가 그곳이 아닙니까. 마스터들이 아니면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지요.”
아리안의 하얀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떠오른다.
손을 저으며 대답하는 혁련소가 그녀의 눈에는 제법 귀엽게 비쳤기 때문이다. 그녀가 술의 마개를 열고 술을 따랐다. 시녀들이 따르는 것이 옳았지만 소문처럼 그녀는 격식 따위는 따지지 않는 듯 보였다.
“저도 아직은 그곳엘 가보지 못했어요. 이 술은 몬스터 토벌에 참전했던 지인이 선물로 준 겁니다. 오늘 첫 개봉을 하는군요.”
향이 무척이나 향기로웠다.
둘은 처음 마셔보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하지만 둘은 이 술이 처음이 아니다. 케논 산맥의 몬스터 토벌에 참전했을 때, 위기에 처한 엘프족 청년을 구해준 대가로 질리도록 마셨던 적이 있었다.
순간 혁련소는 생각했다.
‘이걸 만들어 팔면 떼돈을 벌겠군. 제조법도 잘생긴 그 친구가 가르쳐줬으니…….’
그는 문득 아르소 영지의 밀을 떠올렸다. 그 밀로 인해 아르소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다크 영지가 만약 이 술을 대량으로 제조한다면 아르소의 밀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르소의 밀, 몇 포대를 팔아야 이 술을 한 병 살 수 있다.
흑야가 묘한 빛으로 전음을 보냈다.
[흠! 너도 그 생각을 한 모양이군.]
[숙부도 그럼…….]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흑야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갑자기 둘이 말이 없어지자 아리안이 의아한 빛으로 둘을 보았다. 혁련소가 너스레를 떨었다.
“흠! 역시 귀한 술이라 뒷맛이 일품이군요. 이런 귀한 것을 맛보게 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호호! 무슨 말씀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낯이 다 뜨거워지는군요. 술은 많으니 양껏 드세요. 좋은 분들과 함께 마시니 술맛이 더 좋군요.”
아리안은 벌써 석 잔을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하던 술자리는 달이 하늘의 가운데로 떠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셋은 그동안 5병의 술을 비웠다. 어지간한 영지민들의 반 년치 생활비가 그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아리안이 물었다.
“아시겠지만 테베스는 무척 포악한 자였어요. 영지민들의 원성이 이곳까지 들릴 정도로 말이에요. 사실 다크 영주께서 그곳의 영주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같은 족속이겠거니 생각도 했었어요. 아! 제가 말이 좀 지나쳤군요. 사과드려요.”
“하하! 아닙니다. 계속하십시오.”
살짝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아리안의 얼굴이 무척 고혹적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소문이 돌더군요. 영주님의 재산을 몽땅 가난한 영지민들에게 베풀고 식사도 영지민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한다고 말이에요. 처음엔 믿기 힘들었죠. 세상에 그런 귀족이 어딨을까 하면서 말이죠. 나중에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고 나니 제가 다 부끄러워지더군요. 해서 사실, 영주님을 한번 만나러 갈까 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저를 말입니까?”
“호호! 그곳에 다른 영주라도 있나요?”
“저 같은 보잘것없는 하급 귀족을 왜…….”
그 말에 아리안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그 말씀은 저를 욕하는 것과 같군요. 하급 귀족이라뇨. 호호! 저도 영주님과 같은 준남작이랍니다.”
혁련소가 모른 척, 눈을 동그랗게 했다.
“영주께선 명성이 드높은 마스터가 아닙니까? 그런데 고작 준남작이라뇨. 저는 최소한 영주께서 남작이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부족하다고 여기고는 있었지만…….”
“그저 칼질 좀 잘한다고 직위가 높아지면 세상이 군인들 천지로 변하게요? 전, 사실 마스터라는 것 때문에 받은 작위는 아니에요. 돌아가신 제 의부께서 물려주신 거죠.”
‘의부?’
아리안이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법을 연구하던 분이셨어요.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을 연구하시다가 그만…….”
“이거, 괜히 저희들 때문에…….”
혁련소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아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주책을 떤 제가 미안하군요. 그나저나 사실 영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사실 그 부분 때문에 영주님을 찾아뵈려고 했었어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부탁이라는 게…….”
아리안의 눈부신 벽안이 혁련소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순간 혁련소는 그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리안이 입술을 몇 번에 걸쳐 실룩거리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아르소를 맡아주세요!”
“예, 예?”
혁련소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지간한 흑야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느닷없이 아르소를 맡아달라니… 다른 자라면 ‘이게 웬 떡이냐.’라며 내심 웃을 일이다. 아리안이 포근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당분간 이곳을 비워야 합니다. 몇 개월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영주님처럼 영지민들을 아끼는 분이라면 저보다 더 아르소를 잘 이끌 것이라 믿어요.”
혁련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당황했던 스스로를 자책하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없습니까?”
“솔직히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얼마 전, 테세우드 공작가의 권역에 흑발에 흑안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7명 정도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사람들을 찾아 떠날 생각이에요.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답니다.”
우우우웅!
순간 실내가 광포한 기운으로 요동쳤다.
아리안이 크게 놀란 얼굴로 몸을 흠칫했다. 기운의 주인공은 바로 흑야와 혁련소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토록 강력한 마나를 지녔다니…….’
지금 둘이 발산하는 기운은 자신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실내를 장식하고 있던 테라스가 파삭! 하는 소리를 내며 가루로 변해 흩날릴 정도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아리안을 응시하는 흑야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흔들렸다.
아리안은 무지막지한 기운이 흑야에게서 발산되자 흠칫, 상체를 뒤로 뺐다.
그뿐이 아니다. 혁련소는 어떤가. 그저 영민하고 밝은 성정으로만 여겨졌던 그가 마스터는 그냥 한입에 삼킬 듯, 가공할 마나를 풀풀 쏟아내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힘을 감추고 있었어. 이 사람들…….’
아리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묻겠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다고?”
“숙부!”
흠분을 가라앉힌 혁련소가 흑야를 말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흥분을 했군요. 영주님! 그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변을 몰아쳤던 광포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흑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아리안을 감정 없는 시선으로 보았다. 아리안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무지막지한 기운이 소멸되자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혁련소와 흑야를 보며 물었다.
“힘을 감추고 계셨군요. 놀라워요. 마스터인 제가 움찔할 정도라니…….”
“그게, 가문의 비법을 좀 배웠을 뿐입니다. 흥분하거나 화가 나면 몸 안의 마나가 일시적으로 끓어올라 상대를 두렵게 몰아가는… 별 대수롭지 않은 수법입니다. 실전엔 전혀 효과가 없지요.”
혁련소가 대충 둘러댔다. 둘러대고 보니 제법 그럴싸했다.
“두 분도 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군요. 이유는 묻지 않겠어요. 물론 그럴 자격도 없지만… 좋아요. 말해 주죠! 얼마 전에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것도 테세우드 공작의 성, 지척에서 말이죠. 사인은 내부 장기가 모조리 가루로 변한 것이라 하더군요. 마치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의 마법처럼 말이죠.”
“마법사들을 죽인 게, 바로 흑안에 흑발을 지닌 그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래요. 며칠 전, 통신구를 통해 제국의 전역에 그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어요. 모르셨나요? 어지간한 영지엔 전부 송신을 했다고 들었는데…….”
다크 영지엔 통신구가 없다.
혁련소가 그것을 팔아 영지민들의 쌀을 사주었기 때문이다. 혁련소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혹시, 통신구로 전송된 영상을 저장하는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없어요!”
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물어본 혁련소도 내심 씁쓸했다. 그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가자!]
[그래야겠지요?]
[당연하지. 여기서 이 계집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어쩌면 주공과 놈들이 이곳으로 왔을 수도 있어. 서둘러!]
삶의 전부인 그들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조금의 의혹만으로도 그들은 달려가야 했다. 혁련소는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술을 벌컥 마신 혁련소가 아리안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을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지를 버리고 갈 정도로 대단한 일입니까?”
“죄송해요.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혁련소는 잠시 아리안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악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 벽안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며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영지를 맡아 달라는 말씀, 죄송하지만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아리안 영주님!”
혁련소는 허리를 깊게 숙여 진심으로 미안함을 전했다.
흑야도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태도에 아리안은 놀란 얼굴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흑야가 다소 풀어진 낯빛으로 아리안에게 물었다.
“지금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소?”
“그것까지는… 다만 테세우드 공작가에서 발표하기를 그들의 이동 동선이 케논 산맥으로 향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설마 현상금을 노리고 그들을 찾으러 가는 것은 아니겠죠?”
조금 전, 둘이 극강의 기운을 발산하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못했던 질문이다. 마법사들을 떼로 죽인 자들을 당해낼 정도의 강자는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질문이 저절로 입에서 나온 것이다.
“현상금? 현상금이 붙었단 말이냐?”
흑야가 또다시 광포함을 드러냈다. 이번엔 조금 전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리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십만 골드가 붙었어요. 물론 생포하면 두 배로 준다고 하더군요.”
“……!”
“숙부님! 그만 돌아가시죠.”
흑야는 그들이 혁련천후와 자신의 벗들이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혁련소는 가급적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대했다가 아니면 그동안 진정시켰던 마음이 도로 참기 힘들 지경으로 떨어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영주님! 오늘의 환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둘은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아리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둘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슴이 몇 시간을 뛴 사람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검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 저 사람들… 설마!’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하며 벌떡 일어섰다. 제국에 떠도는 소문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흑발을 날리며 악의 무리들에겐 사형집행인이라 불리는 그들, 흑안의 마검사.
‘아니야. 분명 그들의 동공은 연한 갈색이었어. 그들은 마족과 같은 검은색이라고 했어. 아니야.’
그녀는 다시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무지막지했던 흑야의 얼굴이 새삼 떠올랐다.
‘무례한 그자! 제국의 연회에서 보았던 테세우드 공작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아!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아리안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전 그가 발산했던 마나의 양이라면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황제가 주최한 제국의 연회에서 그녀는 황실의 기사단장과 시범대련을 펼치던 테세우드를 보았었다. 자신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무의 장벽을 보고서 얼마나 절망했던가.
‘혹시 그자가…….’
그녀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악인들이여! 달이 뜨는 밤이면 그가 찾아온다. 그는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악몽과도 같으니, 죄인들이여! 타인에게 원한을 산 자들이여! 그대들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어찌 볼 수 있으랴.”
“다크 어쌔신!”
아리안의 고운 입술에서 신음성과도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불끈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만약 그자가 소문의 그라면… 그가 그들을 노린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리안의 행동이 빨라졌다.
시녀를 불러 떠날 채비를 지시한 그녀는 곧장 자신의 거처로 뛰어갔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출생비밀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들을 다크어쌔신보다 자신이 먼저 만나야 했다.
비밀.
그녀에겐 반드시 풀어야 할 비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