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케논 산맥으로
한 달이 지나갔다.
똑같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건만 중원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계는 여전히 낯설었다. 일행은 드웨인의 영지에 도착했다. 약속을 지키기기 위해 드웨인을 도와주기로 작정한 혁련천후는 드웨인이 내준 별관에 여장을 풀고 그곳에서 수하들과 함께 간단한 술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중원보다 훨씬 넓은 세상이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문명을 지닌 국가가 있었다는 게, 사실 지금껏 믿기지 않습니다. 통치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고 말입니다.”
사공진무의 그 같은 말에 다른 모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이 이어갔다.
“소와 흑야 형님을 찾는 것이 우선이긴 합니다만, 돌아갈 방도 또한 미리 강구해 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 얼치기들 말을 들어보면 이 세상엔 마법사라는 자들이 상당히 많다고 하더군요. 그중 몇은 텔레포튼가 뭔가 하는 방법으로 말을 타고 반년을 가야 할 거리를 눈 깜박할 시간에 오간다고 합니다. 그 마법사라는 자들이 차원을 오가는 방법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자들을 잡아서 족치면 되겠네.”
“그렇지.”
북궁천소와 왕전이 거들었다. 듣고만 있던 혁련천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왔으니 돌아갈 방법 또한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일단은 소와 흑야를 찾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 다른 건 차후에 생각해.”
“혹시라도 돌아가지 못하면…….”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사공진무가 모두의 험악한 눈빛을 받고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혁련천후가 술잔을 입으러 가져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찾아서 돌아간다. 반드시…….”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신들이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그녀들도 이곳으로 오기 위해 연못으로 뛰어들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이곳에 그녀들이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것이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공진무는 자신의 말실수가 마음에 걸린 듯 술을 거푸 마셨다.
진천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했지만 북궁천소와 왕전 등의 험악한 눈길은 여전했다. 어색한 침묵은 드웨인이 들어서면서 깨졌다.
“음식들이 입에 맞으십니까?”
양손에 술과 음식을 잔뜩 든 시녀들이 그와 함께 들어섰다.
작은 영지라고 하더니 성의 규모나 술과 음식의 양과 질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이 정도면 중원에선 어지간한 황족들도 맛보지 못할 진수성찬이다. 물론 이곳의 음식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진천의 생각에 그렇게 느껴졌다. 진천이 드웨인을 가볍게 노려보며 물었다.
“거짓말을 했군. 보잘 것 없는 영지라더니 이게 보잘것없는 영지의 주인이 먹는 밥상이냐?”
드웨인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들이나 먹음직한 음식들이 아니더냐! 이 자식이 어디서 거짓말이야! 죽고 싶어?”
진천이 온갖 음식들을 보며 화를 내자 드웨인은 그때야 뜻을 알아차린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하! 다른 대륙에서 오셔서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이곳의 영주들이라면 손님이 오셨을 때, 이 정도의 대접은 일반적인 것이지요. 뭐, 조금 과하게 차리긴 했습니다만, 왕족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준이 못 됩니다.”
“이곳의 왕은 어떤 자지?”
느닷없이 혁련천후가 물었다.
대번에 드웨인의 표정과 몸짓이 황제를 대하듯 공경스럽게 바뀌었다.
그에겐 혁련천후가 황제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물론 그보다는 험악한 북궁천소와 왕전이 더 두려웠지만…….
“율리우스 공작께서 황제의 승인을 받아 이곳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공작은 일개 귀족이라면서 나라를 통치한단 말이냐?”
“왕국이나 공국은 제국의 위성국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체적인 세력이 강성한 공작들을 왕에 봉하여 제국을 호위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지요. 물론 전쟁이 발발하면 제국에 귀속됩니다.”
조윤이 혁련천후를 보며 말했다.
“고대 중원의 제후국이라 보면 되겠군요. 세력이 강성한 공작들에게 적당한 땅을 내주어 그들의 불만을 위로하고 결속을 다지는, 뭐, 그런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대가 아니더라도 중원에서도 황제들이 장성한 왕자들을 번왕으로 위임하지 않았습니까?”
“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가 드웨인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귀족들은 세습제로 유지되느냐?”
“대부분이 그런 경우이긴 합니다만, 때론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면 귀족으로 봉해지는 경우도 무척 많습니다. 당대 제국을 뒤흔드는 공작들이 대부분, 그런 경우로 왕에 봉해진 것이지요. 해서 전쟁을 바라는 호전적인 귀족들이 상당히 많은 게 현실입니다. 출세를 보장받기 때문입지요.”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흐흐! 싸움만 잘하면 귀족이 될 수 있단 말이군. 주공! 이거 괜찮은 세상이군요.”
북궁천소가 험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드웨인이 움찔한다. 북궁천소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인물이다.
“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제도군요. 인물이 뛰어나든, 모자라든 무조건 세습으로 황위에 오르는 중원보다는 낫습니다. 모두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그렇겠군.”
틀린 말이 아니다.
중원은 황권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었고 대부분의 관직도 세습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아주 특출한 인재들이 황제에 의해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역설적으로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느냐.’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영지전이라는 거… 언제 열리지?”
“제가 그곳에 도전장을 보내면 쌍방협의 하에 날짜가 정해집니다만 왕실의 결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써튼이라는 작자가 벌써 왕실의 결재를 받았을 테니, 저와 그자의 합의만이 남은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드웨인의 얼굴이 다소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영지전을 떠올리자 근심이 구름처럼 생겨났다. 눈앞의 존재들이 대신 해준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이들의 대리자격을 왕실에서 인정해 줄지가 걱정이었다.
써튼의 끈이 닿아 있는 왕실이 만약 이들의 대리 출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써튼의 칼에 목숨을 잃든가, 영지를 내주고 야인으로 떠돌든가, 둘 중 하나의 신세로 전락해야만 한다.
“표정이 뭐냐?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왕전이 고리눈으로 물어오자 드웨인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5분 정도 드웨인의 말이 끝나자 조윤이 물었다.
“영지전이라는 게, 꼭 대가리들끼리 일대일 결투로만 행해지는 것인가?”
“아닙니다. 영지 간의 전면전 방식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영지민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그것은…….”
왕전이 더 들을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됐네. 전면전으로 바꿔. 그쪽 놈들 대가리만 몇 놈 없애면 간단하게 끝나겠네. 왕실의 결재를 받니 마니 할 필요도 없고 좀 쉬우냐? 그렇지 않습니까?”
듣고만 있던 혁련천후가 나지막이 물었다.
“전면전도 결재라는 것을 받아야 하나?”
“아닙니다. 선전포고만 하면 가능합니다만, 그들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탓에…….”
“그건 상관없다! 전면전이 더 빨리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
혁련천후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무언가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 곧잘 보이는 버릇이었다. 모두가 그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드웨인의 속내는 가시덤불을 맨발로 걷는 기분이다.
전면전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수많은 영지민들이 죽어나간다.
그렇게 해서 이긴다고 해도 영지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안한 것보다 못한 경우로 전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힘만을 믿고 전면전을 벌여 주변의 영지를 복속시켰던 수많은 영주들이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 것을 드웨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근심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음성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일 써튼인가 하는 자에게 선전포고를 해. 하루 만에 전쟁을 끝내고 우린 케논 산맥으로 간다.”
* * *
180미터의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는 30대 중반의 인물은 자신의 탁자 위에 놓인 붉은색 첩지를 내려다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런 인물의 앞에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와 금색 갑주를 걸친 기사 하나가 마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도 가소롭다는 빛이 가득했다.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감히 내게 선전포고를 해오다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써튼 영지의 영주 써튼 남작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기사에게 물었다. 성정이 지나치게 급하고 오만했던 그는 영지도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지금 드웨인이 보내온 선전포고문을 가지고 수하들과 의논을 하던 중이었다. 로브 밑으로 하얀 눈동자를 번득이던 마법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전면전은 영지민들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최악의 방법이지요. 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선전포고를 해왔다면 전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을 모든 영지민들에게 공고를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영주님은 오히려 좋은 명분을 얻는 것이지요.”
마법사의 음성은 무척이나 사악했다.
눈동자에 어린 붉은색 기운은 그가 흑마법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꺼리는, 특히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꺼리는 흑마법사와 써튼이 계약한 것이다. 흑마법사를 계약하고 부리면 제국의 법에 의해 참수형을 당한다.
하지만 일이 터지면 그는 백마법사로 위장하여 움직였기 때문에 진정한 신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더 상위계열의 마법사가 있다면 대번에 들통이 날 일이지만 이런 변방에 그 정도의 마법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법사를 바라보는 써튼의 눈동자에 살짝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막돼먹은 귀족의 전형인 그가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써튼이 이내 눈빛을 고치고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좋아! 드디어 비옥한 드웨인의 영지가 이 써튼의 품으로 들어오는구나! 스스로 갖다 바친다면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겠느냐? 흐흐! 일단 드웨인의 영지를 손에 넣고 난 다음, 제라드의 영지를 노려야겠군.”
그때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기사가 말했다.
“그자가 무엇을 믿고 전면전을 택했을까요? 그냥 결투를 했다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 텐데, 굳이 100% 죽을 수밖에 없는 전면전을 택했다면 뭔가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강한 기사들과 계약을 했다든지, 상위계열의 마법사를 구했다든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써튼의 친동생이자 써튼 영지의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었다. 그 말에 흑마법사가 대답했다.
“그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에 제 수족이 잠입해 있음은 두 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며칠 전, 돌아온 드웨인이 몇 명의 이방인과 함께 왔다고는 했지만 마나의 양이 보잘것없는 작자들이라고 전해왔습니다. 그 말은 곧, 전력보강이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속삭이듯 말하는 흑마법사의 음성이 어찌나 사악한지 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슬쩍 인상을 찌푸렸던 써튼이 껄껄 웃었다.
“넌, 그게 탈이다. 그렇게 소심해서 언제 나처럼 작위를 받겠느냐? 좀 대범하게 굴어라. 이놈아! 장차 몇 개의 영지가 손에 들어오면 네 밑으로 수십의 기사들과 수만의 사병들이 굴러들어올 텐데 그런 소심함으로 어찌 부릴 수 있단 말이냐?”
“전, 단지 걱정이 되어서…….”
“됐다! 그대들은 돌아가서 출전준비를 하여라. 당장 내일 드웨인의 영지로 쳐들어갈 것이다. 아! 서류도 반드시 챙겨야겠지? 내일 오후쯤이면 놈의 피 묻은 도장을 찍게 될 테니 말이야. 하하하!”
써튼의 웃음이 밤하늘로 울려 퍼지는 그때, 써튼 영지로 숨어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시커먼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당한 속도로 영지의 성곽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모두 8명이었는데 바로 혁련천후 일행과 드웨인이었다.
성곽의 지척에 다다른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식아! 너무 빨리 왔잖아. 내일 아침이 되어야 싸울 수 있다며? 이런 빌어먹을!”
왕전이 드웨인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이렇게 빠르실 줄은…….”
드웨인은 그들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자신을 기준으로 시간을 책정하고 출발했는데 5시간이나 빨리 도착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자신은 왕전의 억센 손아귀에 안기다시피 달려왔다.
“그냥 무시하고 쓸어버리자.”
어둠 속에서 북궁천소의 하얀 이를 드러났다. 드웨인은 그저 혁련천후만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였다. 그 말고 다른 존재들은 무서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저 북궁천소와 왕전은 머리가 돌아버린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언제나 가져다주는 존재들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잠 좀 자둬.”
“쩝! 멍청한 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담벼락 노숙을 하게 생겼네.”
“그러게.”
“죄송합니다!”
* * *
두 개의 달이 지고 태양이 떠올랐다.
성문이 열리며 1,000명에 달하는 써튼의 영지군이 드웨인의 영지를 향하기 위해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선두에 마법실드가 채워진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횡으로 늘어서 써튼의 좌우를 호위했고 그 뒤를 300기의 전마에 몸을 실은 기마병과 나머지 보병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일개 영지의 규모치고는 상당한 군세였다.
대부분의 영주들도 1,000명 정도의 군세는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써튼처럼 기사만 30명에 기마대 300명은 좀처럼 드문 경우다.
영지전이든 국가 간의 전쟁이든 기사들의 숫자와 마법병단의 화력이 승부의 열쇠다. 당장 드웨인의 영지만하더라도 기사 소리를 듣는 사람은 고작 10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마법사는 2클래스 수준의 백마법사 하나가 달랑 있을 뿐이다.
이 정도면 상대가 되지 않는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라고 봐야 했으니 드웨인이 해법을 찾아 제국의 곳곳을 뒤지고 다닐 법도 했다.
“흠! 날씨 한 번 좋구나!”
선두에선 써튼 남작의 표정은 마치 유람을 떠나는 듯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전력상의 절대 우위에서 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그의 옆을 바짝 붙어 이동 중인 마법사는 역시 흑색 로브를 벗고 백색을 걸치고 있었는데, 얼굴색까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완벽한 변신이었다.
하늘을 향해 던져져 있는 그의 눈동자에 가끔 공허함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써튼이 간혹 보였던 눈빛과 그것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뿌우웅!
국가의 정규군에나 있을 법한 거대한 뿔나팔이 울려 퍼졌다.
길가에 나온 영지민들이 손을 들어 그들을 배웅했다. 주인이나 사병들이나, 모두 승리를 확신하는 듯 조금의 긴장감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무도 당당하게 진군하던 그들은 조금 못 가 이동을 멈추어야 했다.
그들이 이동 중이던 도로의 전방에 소수의 정체 모를 인물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써튼의 눈이 옆으로 쭉 찢어진다.
“감히 본 남작의 앞길을 막아서다니! 가서 냉큼 잡아오너라!”
“옛!”
기사 셋이 빠르게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갔다.
* * *
“확실히 이곳 놈들은 허우대만 멀쩡하군요.”
말을 몰아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며 북궁천소가 코웃음을 쳤다. 혁련천후는 써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상당한 거리였지만 눈동자를 통해 그의 심성이 대략은 파악이 되었다. 그가 진천을 돌아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사악한 기운이 골수까지 스며든 놈이군요. 죽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공진무가 물었다.
“죽일 놈들만 죽이고 나머지는 겁만 줘서 보내. 어차피 저 친구가 이곳을 다스릴 때, 필요한 사병들이 아니냐.”
드웨인은 황당함에 두려움도 잊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승리는 이미 따놓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당장 1,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건만 고작 여덟이서 죽일 자와 살릴 자를 정하고 있다니…….
‘혹시! 정말 폴리모프 한 드래곤은 아니겠지?’
지나치게 여유로운 이들의 태도에 드웨인은 다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드래곤이라면 그저 브레스 한 방이면 눈앞의 1,000명은 그대로 몰살이다.
차가운 목소리에 드웨인은 상상에서 깨어났다.
“저놈만 죽이면 너의 자격이 인정되는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간단하군.”
혁련천후가 눈빛으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북궁천소가 히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을 잡으러 오는 기사들이 5미터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일반 기사들이 지니기엔 과할 정도로 값비싼 루비가 박힌 그레이트 소드를 뽑아 든 기사들은 북궁천소가 자신들을 보며 씩 웃음을 날리자 순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쾅!
말과 사람이 통째로 하늘을 날더니 써튼의 근처까지 날아가 떨어졌다. 말은 즉사하고 기사들은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놀람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한 광경이 벌어졌다.
“이게 대체…….”
“으아…….”
그 엄청난 광경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써튼의 옆에 있던 마법사가 앞으로 나서며 두 팔을 느릿하게 앞으로 뻗었다.
“저잡니다! 저자가 이곳의 마법삽니다.”
드웨인이 손을 들어 소리쳤다.
혁련천후의 눈가에 잔혹한 기운이 어리기 시작한 것은 써튼의 마법사가 주문 같은 것을 막 외우려던 때였다.
“놈을 잡아와!”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왕전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마법사의 옆에 나타났다. 캐스팅을 하던 마법사가 혼비백산의 모습을 보이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왕전이 마법사의 목줄을 움켜쥐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써튼을 비롯한 그 누구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으…….”
놀람은 지켜보던 드웨인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넌! 조금 있다가 좀 보자.”
왕전의 손가락이 마법사의 육신을 툭 건드리자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린다.
북궁천소의 손짓 한 번으로 말과 기사들이 하늘을 날고, 써튼의 마법사가 납치되어 기절을 하는 데까지 걸린 시각은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으…….”
온몸에 한기가 저절로 찾아든다.
약삭빠른 써튼은 짧은 시간에 자신의 차후 행동을 그리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며 손과 발에 감각이 없어진다.
세상에 저런 존재들은 오직 초인이라 불리는 다섯뿐이라고 그는 여겼다.
하지만 자신이 마법영상으로 늘 보면서 동경했던 초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인간임이 확실했다.
초인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가 일곱이나 자신을 노려보며 서 있었으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가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가 재빨리 말 위에서 내려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는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사태를 짐작한 모든 자들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으며 소리쳤다.
* * *
“저것들이 미쳤나.”
“위대하신 분? 흠! 주공에 대한 소문이 이곳까지 전해진 모양이군.”
“그러게.”
일행들은 광신도들처럼 행동하는 써튼의 무리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침 드웨인을 돌아보던 북궁천소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런데?”
드웨인도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는 벌벌 떨고 있었다. 북궁천소가 그의 목줄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뭘 잘못 처먹었냐? 벌벌 기기는… 가서 계약선가 뭔가에 도장 받아와!”
“아이고…….”
“뭐야? 이 자식…….”
드웨인이 사색으로 감히 북궁천소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모두가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며 어이없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소천! 가서 해결해라.”
담대소천이 광신도들처럼 연신 절을 해대는 써튼의 사병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1,000여 명에 달하는 써튼의 사병들이 사색이 되어 더욱 빠른 몸짓으로 절을 하기 바빴다. 전설의 드래곤이라면 자신들은 브레스 한 방이면 먼지로 녹아 사라진다.
담대소천이 든 무기는 이 세상에선 처음 보는 무지막지한 기병이니 그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임은 더더욱 확신으로 다가왔다.
“네가 써튼인가?”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제가 미천한 써튼이 틀림없습니다!”
담대소천의 입가가 슬쩍 올라간다.
자신과 일행들은 분명 다른 존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가 드웨인이라는 친구와 영지전을 벌이기로 했지?”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제가 그 써튼이 확실합니다!”
써튼은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자신을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시는 환생이 불가능한 먼지로 화해 사라진다.
“패배를 인정하면 죽이지는 않겠다. 어때? 인정하겠나?”
“당연합니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이 써튼이 무조건 졌음을 신께, 아니 위대하신 존재 앞에서 맹세하나이다!”
술술 막힘없이 잘도 대답한다.
“그럼 패배를 인정하는 증표를 줘!”
써튼이 촌각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말안장을 뒤지더니 뭔가를 내밀었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조각이었다. 담대소천이 드웨인을 불렀다. 생애 최고의 속도로 드웨인이 달려오자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황제가 인정한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금패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네가 이곳의 영주가 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담대소천이 그것을 쑥 내밀었다.
“그럼 네가 가지면 되겠군. 이것으로 약속은 지킨 것이다. 알겠나?”
“그, 그렇습니다!”
자신의 영지보다 두 배는 넓은 써튼의 영지가 고스란히 드웨인의 것이 되었음에도 그는 전혀 반가운 기색이 아니다. 담대소천의 미간이 슬쩍 구겨진다.
“뭐지? 표정이 왜 그래? 불만이라도 있는 거냐?”
“헉!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드웨인을 이상한 놈 보듯 쳐다본 담대소천이 혁련천후를 돌아보며 물었다.
“주공! 이놈들의 처리는 어떻게 합니까?”
순간 써튼과 사병들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제 저 차갑게 생긴 존재의 말 한마디에 자신들의 삶과 죽음이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드래곤의 주인이라면 분명 저 흑발을 늘어뜨린 존재는 드래곤의 왕이라는 로드가 분명했다.
혁련천후의 말이 떨어졌다.
“영주라는 놈만 제압하고 다른 이들은 그 친구에게 맡겨!”
“알겠습니다!”
기어코 써튼이 눈물을 줄줄 흘려낸다. 반대로 기사들과 사병들은 엄청난 속도로 혁련천후에게 절을 해댄다.
“감사합니다! 로드시여!”
* * *
드웨인의 영지로 돌아온 일행은 케논 산맥으로 이동하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준비라고 해봐야 드웨인만 여정을 갖추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겨버렸다. 새롭게 차지한 영지의 처리문제 때문이었는데, 주인인 드웨인이 없으면 황실에 보고하는 등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처리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곧 문제는 해결되었다.
드웨인을 대신하여 써튼과 사로잡은 마법사가 길잡이로 결정되었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감지덕지한 그들은 최고의 길잡이가 될 것을 맹세하고 모두는 길을 떠났다.
괴팍하다고 알려진 드래곤들이 그냥 순순히 물러가자 드웨인은 온갖 것을 그들에게 바치며 혹시 모를 뒷일을 예방했다. 드웨인에게 영지를 잘 다스리라는 말을 해주고 길을 떠난 일행들은 빠른 시간에 오코모스라는 큰 도시에 이르렀다.
“대단하군. 확실히 문명이 중원과는 차이가 나는 세상이야.”
조윤은 도시의 화려한 야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부분이 목조로 이루어진 중원의 건축물과는 달리 이곳은 대리국의 대리석과 비슷한 자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눈으로 보기에도 무척 견고함이 느껴졌다. 높이 또한 중원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여관을 잡겠습니다!”
써튼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위대하신 존재시여! 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혁련천후가 사용을 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일행들은 써튼이 찾은 나그네의 쉼터라는 여관으로 들어섰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삼층 규모의 여관은 무척 깨끗하고 화려했다. 대부분의 여관이 그렇듯 일층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층이 객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행들은 객실에 짐을 놓고는 일층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이봐! 써튼!”
“예!”
조윤의 부름에 써튼은 신입병사처럼 씩씩하게 대답했다.
나이 30세에 남작이라는 직위를 지닌 귀족인 그가 졸지에 최하급 인생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써튼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전설의 드래곤들과 함께하니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어쩌면 그의 본색이라 할 수 있는 모험심이 발동했던 까닭이다.
소싯적 꿈이 파티를 구성해 대륙을 여행하며 모험을 즐기는 것이었는데, 비록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얻은 기회였지만 써튼은 조금씩 재미를 붙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까지 얼마 정도 더 남았느냐?”
“지금 속도로 가신다면 5개월은 더 걸려야 합니다만, 텔레포트를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만 있다면 10분도 안 걸립니다!”
“자식아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이걸 그냥!”
써튼의 고개가 자라처럼 움츠려들었다.
“네가 마법사라고 했지?”
조윤의 시선을 받은 마법사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털어놔 봐. 마법에 대한 모든 것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의 마법에 대한 모든 것을 늘어놓았다. 장황한 써튼의 설명은 20분을 이어졌다.
“그러니까. 6클래스에 이른 마법사들만이 그런 재주를 지녔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 자식! 지금 어디 있지?”
북궁천소의 험악한 표정에 겁을 집어먹은 써튼이 일순 입을 열지 못했다.
‘인간이 이분들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을 싫어하시는구나. 말하면 모두 죽임을 당하는 것 아닐까?’
써튼은 불안했다.
제국에 5클래스를 넘어가는 마법사는 단 세 명뿐이다. 그중 둘은 황실에, 나머지 하나는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 있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들의 정점에 올라 있는 대마법사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는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생활한다. 텔레포트는 오직 그만이 가능했다. 그것은 제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게 이곳에서 상당히 먼 곳에 있습니다. 황실에 두 분이 계시고 한 분은 테세우드 공작 각하의 권역에 계시는지만 확실하게 텔레포트가 가능한 분은 황궁에 계십니다.”
“여기서 얼마 거리지?”
“황실은 말을 타고 달려도 8개월은 족히 걸리고도 남을 거립니다. 그리고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은 왔던 길을 되돌아 한 달을 가면 됩니다.”
“젠장! 더럽게 큰 나라군. 이 정도면 중원보다 더 크다고 봐야겠는데? 주공! 한 달 걸린다면 그곳에 있는 마법사 놈을 족쳐서 가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계산으로 북궁천소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됐어! 그냥 걸어서 간다. 가면서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괜찮겠지…….”
말끝을 흐린 혁련천후는 써튼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써튼이 최대한의 공경한 자세로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마주보았다. 두 손까지 아랫배에 착 붙인 써튼에게 그가 물었다.
“흑안의 마검사라고 들어보았겠지?”
“대륙에 그분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워낙 유명하시니까요.”
“최근 그들이 출현한 지역이 어딘지 들은 소문이라도 있나?”
써튼은 막힘없이 줄줄 대답했다.
“케논 산맥에서의 몬스터 토벌 작전 이후로는 그분들에 대한 소문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몇 개월 전에 홀베른 공국과의 접점지역에 위치한 영지에서 악덕영주로 소문났던 테베스라는 영주가 죽음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분들께서 벌이신 일이라 말하는 자들이 있긴 했습니다.”
혁련천후의 눈빛이 변했다.
“그곳이 어디냐?”
“왕국의 최북단지역으로 케논 산맥을 넘어 1개월은 더 가야 합니다.”
“더럽게 멀군.”
북궁천소가 투덜거렸다.
“그곳도 이 나라의 영토이더냐?”
“그곳까지만 케이론 제국의 영토입니다. 요란 제국과 맞물린 최전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혁련천후가 더 이상 묻지 않자 써튼은 주문한 음식을 재촉하러 주방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써튼의 성화에 못 이긴 주방장이 다른 손님들이 주문했던 것을 먼저 일행들에게 내주었다. 써튼의 익힌 음식을 꽤 잘 먹는 그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드래곤의 주식은 오크나 와이번 같은, 살아 있는 맹수들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지상최강의 몬스터라는 오우거도 드래곤에겐 인기 있는 식사거리 중 하나로 알고 있는 써튼이다.
식사를 하던 담대소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6클래스에 이른 마법사들 중 하나가 테세우드 공작가에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써튼이 재빨리 대답했다.
“전에 우리가 죽였던 마법사들의 주인이라는 그놈도 테세우드가 아니었나?”
“맞습니다. 덜떨어진 남작놈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진천이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써튼이 순간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껏 최대한 조용히 있던 마법사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마법사들을 죽였다고? 그렇다면 이분들이 그…….’
그는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제국에 내려진 체포령. 바로 테세우드 공작이 직접 공고한 체포령은 지금 제국을 들끓게 만들고 있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써튼이 일행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흑안에 흑발! 게다가 일곱! 헉…….’
마법신문에 올랐던 범인들과 인상착의가 똑같다. 창백하게 질렸던 써튼은 순간 테세우드 공작의 멸망이 눈앞에서 그려졌다.
‘그분도 지지리도 운이 없는 분이군. 하필이면 위대하신 존재들을 현상수배하다니…….’
아직 이들은 자신들에게 현상수배령이 내려진 것을 모르는 듯했다. 알았다면 당장 테세우드 공작가로 날아가서 불바다를 만들어버렸을 일이다. 써튼의 착각은 끝을 모르고 더욱 심해져만 갔다.
‘엄청난 광경일 거야.’
써튼의 머릿속은 허공을 선회하며 브레스를 뿜어대는 드래곤들의 영상으로 가득 채워졌다.
“야! 인마! 뭔 생각을 그리 뚫어지게 해!”
북궁천소의 험악한 주먹이 써튼이 뒤통수에 작렬했다.
눈물을 찔끔거린 써튼은 막힘없이 둘러댔다.
“어떻게 하면 케논 산맥으로 빨리 갈까에 대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호! 그래? 찾았냐?”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마법사가 손을 들고 말했다.
지금껏 두려움에 떨어왔던 그가 스스로 말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혁련천후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이상하게 로브를 걸친 자들이 싫었다. 아들을 데려간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이다. 그의 눈치를 힐끗 살핀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이트 마법을 말에게 걸면 지치지 않고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절반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라이트 마법은 또 뭐냐?”
“말이 체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입니다.”
“오호! 그래? 이거 놀라운 기술이군. 그런데 그걸 왜 이제 말하지?”
놀라움을 나타냈던 북궁천소가 험악하게 인상을 그리고 묻자 마법사는 사색이 되었다. 모두가 두려운 존재였지만 특히 북궁천소는 눈길만 마주쳐도 오금에 힘이 풀릴 정도다.
“그게… 너무 두려워서…….”
“이런! 썅!”
북궁천소의 주먹이 위로 올라갔다.
“네가 그걸 할 수 있단 말이지?”
혁련천후가 마법사에게 물었다. 여전히 그를 쳐다보는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위대하신 존재들에 비하면 태양과 호롱불 차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괜히 이들 앞에서 마법을 뽐냈다가 한줌 먼지로 소멸될 것이 두려웠던 마법사는 애처로운 얼굴로 빌었다.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넌 어느 정도지?”
“예……?”
“클래스라고 하는 것 말이야. 몇 클래스 수준이지?”
“4클래스 정도 됩니다만… 저는 흑마법사인지라…….”
“흑마법사?”
혁련천후가 의아함을 비추자 마법사의 장황한 설명이 다시 20분간 이어졌다. 말하면서도 최대한 이들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알면서도 묻는 사람에게 대답하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는 법이다.
설명이 끝나자 마법사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적셔졌다.
마침 후식이 나왔다. 물렁물렁한 두부같이 생긴 것을 포크로 먹는 것에 실패한 왕전이 성질을 부리려 할 즈음 혁련천후가 일어서는 것으로 식사는 끝났다.
* * *
다음 날, 일행은 여관을 나와 다시 여정에 올랐다.
확실히 말의 속도가 배 이상으로 빨라졌다. 상당한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말들은 지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하루 만에 그들은 상당한 넓이를 자랑했던 대도시 오코모스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코모스를 빠져나오자 또다시 인가라곤 거의 없는 넓은 평원지대가 그들을 맞이했다. 중원과는 달리 숲의 밀도가 떨어진 탓에 이동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대략 1시간쯤을 달렸을까? 일행들은 말의 고삐를 당겨 이동을 멈추어야만 했다. 둔덕을 넘어서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드넓은 초원이 나타났는데 그 위에 수천의 군막들이 쭉 펼쳐져 있었다.
써튼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국의 군사들입니다.”
“이 나라의 군사들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곳은 요란 제국과의 국경지대와 인접한 곳이라 항상 일개 여단 규모가 상주하고 있습니다.”
대충 봐도 거의 이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었다.
군막의 우측에 펼쳐진 초원 위에서 풀을 뜨고 있는 말들의 숫자만 어림잡아 만이 넘어갔다. 그렇다면 기병여단으로 봐야 했다. 조윤이 혁련천후를 보며 물었다.
“우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가 초원의 좌우를 살폈다. 군사들이 상주한 곳과 상당한 거리에 수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곳으로 돌아가야겠군.”
“모두! 우측으로 방향을 튼다!”
조윤이 모두에게 우회해서 돌아갈 것을 전하자 모두는 말머리를 틀었다. 그들이 둔덕에서 우측으로 이동하려고 할 즈음, 그들의 머리 위, 공간이 일렁이더니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허공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가 황급히 외쳤다.
“마법병단의 결계에 발각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
“대규모 군이 상주하는 지역은 마법사들이 가장 먼저 결계를 쳐 놓습니다. 적의 출현을 사전에 감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지요. 어서 떠나심이…….”
확실히 이 세상은 중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술수를 부려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이런 것은 솔직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군사들이 옵니다!”
50여 기의 기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자 혁련천후는 슬쩍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나 그렇다고 도망가려니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이날까지 도망이란 단어와는 전혀 친숙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냥 쓸어버릴까요?”
“이렇게 된 거 그냥 정면을 뚫읍시다. 뭐, 자식들이 순순히 보내주면 그땐 그냥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북궁천소와 왕전이 달려오는 기마병들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써튼과 흑마법사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혁련천후만을 쳐다봤다. 마침 그가 자신을 돌아보자 써튼은 고개를 움츠렸다.
“당분간 너의 호위병들이라 해야겠군.”
“예? 그게 무슨…….”
“저들에게 우리의 신분을 그렇게 둘러대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두두두!
가슴 부근에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멋들어진 갑옷을 걸친 기마병들은 이내 그들의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턱수염을 기른 자가 앞으로 나서며 탁한 음성으로 거칠게 물어왔다.
“제국의 시민인가?”
써튼 대신 마법사가 나섰다.
“그렇소! 이분은 써튼 로이안 남작이시며 저분들은 남작 각하를 호위하는 기사들이시오!”
“남작?”
“그렇소! 신분을 알았다면 당장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시오!”
의외로 마법사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지켜보던 모두가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을 물어왔던 기사가 여전히 말 위에서 써튼의 아래위를 살피더니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곳은 제1군단 이글스 여단의 경계지역이오! 남작임을 증명하기 전엔 인정할 수 없소!”
기사의 얼굴은 무척 근엄했다. 각진 얼굴에 두꺼운 입술은 전형적인 군인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었다.
써튼이 품에서 남작임을 증명하는 패를 보여주자 그때야 기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허리를 굽혔다. 남작은 엄연한 귀족이다. 당연히 장군들이 아니면 무조건 예를 표해야 한다.
“이글스 여단의 7대 대장 가투소라고 합니다. 군사지역이라 어쩔 수없이 무례했던 점을 용서하십시오!”
“아니네. 모든 게,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가. 이곳이 군사지역임을 모르고 들어선 나의 실수일세.”
써튼이 짐짓 귀족스러운 행동을 취했다. 북궁천소와 왕전의 입가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꼴에 귀족이라고 제법인데?]
[흐흐! 그러게. 완전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더니만 의외야.]
그들을 한번 쳐다본 가투소가 다시 물었다.
“이곳부터는 상당히 위험한 지역입니다. 남작께선 어디를 가는 길이십니까?”
“여행 중이네. 케논 산맥의 절경이 최고라고 하기에 그곳으로 가던 길이네.”
“케논 산맥을요? 그곳은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곳임을 모르십니까? 고작 이 인원으로 들어섰다간 무슨 봉변을…….”
놀란 가투소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우린 그냥 그 근처까지만 갔다가 돌아올 생각이네. 그건 그렇고 그곳으로 가려면 군영을 지나가야 하는데 허락할 수 있겠는가?”
가투소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함께 가시지요! 단장님의 결재가 있어야 하니 군영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써튼이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반말로 묻긴 물어야겠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조윤이 대신 말했다.
“돌아가면 시간이 너무 지체되니 결재를 받고 곧장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주님!”
“그, 그럴까……?”
가투소가 말머리를 돌리며 소리쳤다.
“남작님을 군영으로 모셔라!”
기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써튼을 호위하듯 늘어섰다. 절도 있는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상당히 잘 훈련된 기사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혁련천후와 일행들도 말머리를 돌려 군영으로 향했다.
[조금 전 놈의 눈빛을 보셨습니까? 흐흐!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니 완전 허접으로 취급하더군요. 흐흐흐!]
북궁천소가 히죽 웃는다.
조금 전 가투소가 자신들을 보고 보였던 반응은 자신들이 중원에서 다른 강호인들을 볼 때의 눈빛과 같았었다. 당연히 얕보는 것이다.
[그곳으로 빨리 가야 한다. 군영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도록!]
혁련천후는 모두에게 전음으로 그렇게 전하고는 느릿하게 주변을 구경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한 규모였다. 천막으로 보았던 것들은 천이 아닌 하얀 벽돌로 지어진 일층 높이의 구조물이었는데 그 안에서 병사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곧 소식을 보내겠습니다!”
다른 구조물들과는 달리 제법 크고 높은 건물 앞에서 모두는 멈추었다.
군사들이 주둔하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넓고 깨끗한 곳이었다. 기사들이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을 좌측으로 끌고 가자 일행은 구조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 다른 사람은 전혀 없었다.
“주변 곳곳에 요상한 기운들로 넘는데, 아마 저놈이 말했던 마법병단의 결계라는 것이겠지?”
“이거 좀 배워볼까? 꽤 쓸 만한 것들이 많아.”
“마법 말이냐?”
“그래. 환술과는 판이하게 달라. 그거 배우면 텔레포튼가 하는 것도 할 수 있다며? 그 공간이동을 하는 것 말이야.”
“자식아! 잊었냐? 6클래스에 도달해야 가능하다잖아.”
진천과 사공진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써튼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6클래스에 오른 마법사들은 대륙을 통틀어 셋뿐입니다. 올라서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진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그러니까? 나는 꿈도 꾸지 말라… 이거냐?”
“헉! 아, 아닙니다!”
써튼이 식겁을 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주먹을 쥐었던 진천이 눈을 부라리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6클래스에 오르면 공간이동이 확실한 것은 사실이지?”
“그, 그렇습니다.”
“좋았어!”
진천이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반짝 빛냈다.
모두가 그런 진천을 흘긋 쳐다본다. 저 진천은 한다면 하는 인간이다. 비록 이곳 세상의 마법과는 다소 달랐지만 중원에선 환술로서 고금최강이란 소릴 들었던 진천이다.
“이세상의 마법사라는 놈들이 조만간 밥줄이 끊기겠군.”
“얼른 6클래스에 올라봐라. 그 텔레포튼가 뭔가 하는 거, 직접해 보면 꽤 재밌을 것 같은데.”
“하하하!”
진천이 어깨를 펴 보이며 호기롭게 말했다.
“두고 보슈. 이 세상 마법사들의 족보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테니…….”
지혜로 반짝이는 진천의 눈동자가 단호한 결의의 빛을 담고 있었다. 훗날 드래곤을 초월한 대마법사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