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12화 (12/55)

제4장

케이론 제국의 공주, 레이나

어둠이 내리고 두 개의 달이 떠오른 초원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초식동물들이 사라진 밤은 먹이를 찾아 나선 야수들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들로 가득했다.

사람의 냄새가 초원을 진동하자 초원의 늑대들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푸른색 갈기를 지닌 이곳의 늑대들은 중원의 늑대들과는 차원이 다른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황소만 한 늑대들, 수백 마리가 이글스 여단의 외곽지역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는데, 바로 혁련천후 일행이 들어간 건물의 주변이었다.

“저게 늑대냐? 황소냐? 더럽게 큰 놈들이군.”

“저거 호랑이와 붙여놔도 한입에 꿀꺽 하겠는데요.”

창문을 통해 늑대들을 쳐다보며 신기해하는 일행들, 써튼이 다가오며 말했다. 요즘 들어 부쩍 말이 많아진 써튼이다.

“아이언 울프라고, 오크와 일대일로 싸워도 지지 않는 맹수들입지요. 간혹, 돌연변이가 있기도 한데, 그건 거의 오우거 급입니다. 놈의 발톱은 어지간한 갑옷은 한 번에 찢어발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몬스터 토벌에서 대부분 멸종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저놈들이 떼거리로 있다니 놀랍습니다.”

듣던 조윤이 물었다.

“그렇게 흉성이 강한 놈들이라면 말들을 해칠 수도 있을 텐데, 이곳의 대장은 왜 가만히 두고 있을까? 있음을 모르는 것일까?”

“그건 아니겠지. 놈들을 봐. 우리를 보면서도 전혀 움직이지 않아. 저 태도로 보아 사람과 꽤 많은 접촉을 했던 놈들이야. 분명 이곳의 군사들도 저놈들의 존재는 알 테지. 일부러 잡지 않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담대소천이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흑마법사와 가투소가 함께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황실에서 귀한 분이 갑작스럽게 내려오시는 바람에 내일 아침에나 결재를 올려야 할 듯 싶습니다.”

가투소는 써튼에게 오른팔을 가슴에 대며 정중하게 말했다.

써튼이 무의식적으로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역시 조윤이 대신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날 수밖예요. 그건 그렇고 저 맹수들 때문에 말들이 해를 입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만…….”

은근슬쩍 말을 돌려 아이언 울프를 거론했다. 가투소가 어둠 속에서 시뻘건 안광을 번득이는 수백 마리의 아이언 울프를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저놈들은 이곳 여단에서 기르는 놈들이오. 야생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일부러 기른단 말이오?”

“그렇소. 와이번의 식량으로 오래전부터 길러오던 놈들이오.”

그 말에 써튼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소리치듯 물었다.

“와, 와이번의 식량이라니… 와이번을 사육한단 말인가?”

“하하! 아닙니다. 그 난폭한 와이번을 어찌 사람이 기른단 말입니까? 다만 이곳 주변에 와이번의 서식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놈들이 간혹 군의 전마들을 잡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이언 울프의 종자를 번식시켜 들판에 풀어놓은 것입니다.”

써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꼴깍 삼키자 조윤이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이곳의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을 자신들만 모르는 것으로 비쳐지면 자칫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 염려해서다. 흑마법사가 바깥을 둘러보더니 나지막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흠! 그래서 저쪽 산악지역까지 결계가 쳐진 것이구나…….”

그 말에 가투소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보기엔 그저 그런 하위급 마법사로 보이는 그가 대번에 산악지역의 입구까지 펼쳐진 결계를 알아보자 그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그가 혹시 상위에 오른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상위에 오른 마법사들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엘 가더라도 최상급의 대우를 받는다. 그들 하나가 있으므로 해서 속한 부대의 전투력은 거의 수배에 가깝게 상승한다.

‘혹시 신분을 위장한 제국의 고위급인사들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가투소는 다시 모두를 슬쩍 살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눈앞의 마법사는 자신의 여단에 속한 마법사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마법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이들이 결코 남작 정도의 지위를 지녔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존중받는 마법사가 고작 음식심부름이나 하질 않았던가.

마법사를 부리는 사람들은 황실의 고위급 귀족들이거나 마스터의 경지를 초월한 존재들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눈앞의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은 형편없었다. 그렇다면 황족에 버금가는 고위관료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외에는 공작이나 후작이라도 상위계열의 마법사와는 서로 동등한 관계를 지닌다.

“부탁을 좀 해야겠네.”

써튼이 가투소를 보며 조금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말씀하십시오.”

“먼 길을 급히 오다 보니 아직 식사를 하지 못했다네. 해서 음식과 술을 좀 부탁해도 되겠는가?”

“하하! 아닙니다. 부탁이라니요. 그렇지 않아도 당번병들에게 지시를 해놓았으니 곧 가져올 것입니다.”

“고맙네.”

모두를 다시 가볍게 살핀 가투소가 군례를 취하고는 돌아갔다.

사공진무와 진천은 널찍한 침상에 올라 벌써 잠이든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음식과 술이 들어오자 술 냄새를 맡은 둘은 벌떡 일어났다.

“흠! 이놈의 나라는 엄청 부자인가 보군. 뭔 군의 식사가 이래?”

“그러게. 이 정도면 중원에선 부자들이나 먹음직한 것이잖아.”

“남작이라고 신경 좀, 썼나 보군. 하물며 일반 사병들이 이런 음식을 먹겠냐?”

“그래도 이건 과하다. 생각보다 군기가 썩은 곳인가?”

모두가 병사들이 가져온 음식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짧은 시간에 준비한 음식치고는 무척 요란했다. 기름을 발라 구운 오리고기와 돼지고기를 다져서 만든 길쭉하게 생긴 요리,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죽처럼 생긴 요리가 그들을 유혹했다.

써튼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일반 사병들은 절대 이런 음식이 나가지 않습니다. 이건 기사들에게 지급되는 식사입지요.”

“이 정도 규모의 군대라면 그 기사라는 놈들이 몇이나 되지?”

“여단이면 거의 이만 명 병력입니다. 그렇다면 기사들은 대략 7,000명은 된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부대에 따라 70%가 기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도 간혹 있긴 합니다만…….”

왕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기사라는 놈들은 죄다 귀족이냐?”

“작위를 받지 않은 기사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모두가 시종을 둔 하위급 귀족임은 맞습니다. 물론 저처럼 남작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기사들도 무척 많습지요. 대부분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신분상승을 노리고 군에 투신하는 경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너는 왜 군에 투신하지 않았지? 남작에 만족하는 모양이군.”

“아, 그게… 검술이 워낙 약해서…….”

써튼이 머리를 긁적이자 조윤이 마법사를 쳐다보곤 써튼에게 물었다.

“저 친구는 꽤 실력 있는 마법사로 보이는데 남작 정도의 지위에 검술까지 형편없는 네가 어떻게 고용하고 있었지?”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비싼 몸값으로 고용했습지요.”

“새끼! 영주민들 피를 빨아서 마련한 돈이겠지?”

북궁천소가 험악한 웃음을 짓고 물어오자 써튼은 입술까지 떨며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때 독한 술은 묵묵히 마시던 혁련천후가 써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흑발의 마검사들 말이야…….”

“……!”

“그들에 대해서 네가 들은 것 모두를 말해 봐.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예! 알겠습니다!”

대화를 주고받으며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던 써튼이 다시 부동자세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써튼은 동이 트는 아침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토끼잠을 잔 써튼은 불게 충혈된 눈으로 가투소를 맞이했다.

잠을 더 자야 한다며 밖에서 만나라는 북궁천소 때문에 그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건물 밖에서 가투소를 맞이했다. 한참을 뭔가에 대해 말을 주고받던 써튼이 놀란 표정으로 입이 벌어졌다.

“그럼, 그분들과 함께 가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침 그분들도 그곳과 가까운 곳으로 가시는 길이라 그렇게 결정되었나 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투소가 전할 말을 하고는 바삐 돌아갔다.

써튼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왕전이 대뜸 성을 낸다.

“야, 이 자식아! 무조건 거절했어야지!”

“예?”

써튼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써튼은 모두가 왕전과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설마 대화를 들었단 말이야?’

상황을 보니 분명 그랬다.

자신과 써튼은 그다지 큰소리로 대화를 나눈 게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과 이들 사이에는 두꺼운 철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들을 수 있는 거지?’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불가해한 일이다. 하지만 이내 써튼은 그들의 정체를 되새김했다.

‘정말 드래곤들이 맞는 걸까? 아닌데… 텔레포트를 모르는 드래곤은 없잖아.’

써튼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최초 이들을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그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그 부분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마법 부분이었다.

마법의 시조라는 드래곤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처음엔 일부러 그런다고 여겼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것도 아닌 듯했다. 해서 그는 이들이 드래곤이 아닐 가능성을 조금씩 의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두려운 건 드래곤이든 아니든 별반 차이가 없었다. 북궁천소의 험악한 눈길을 본 써튼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레이나 공주님은 황제 폐하께서 무척 아끼는 분이시라 감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고 나발이고 행여 이동속도가 늦어지면 너 죽을 줄 알아!”

“……!”

써튼은 그저 눈만 멀뚱거렸다. 덩달아 마법사까지 온몸이 굳어졌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들 해. 상황 봐서 늦어지면 그때 따로 가면 되겠지.”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존재들이 써튼을 보며 한 번씩 험악한 눈길을 주자 써튼은 그 자리에 얼음이 되었다.

* * *

금발에 옥처럼 하얀 피부를 지닌 여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일행들이 모습을 나타내자 그녀는 황금으로 치장된 마차에 오르며 황금색 갑주를 걸친 자들에게 손짓을 했다. 상당한 덩치를 지닌 기사 하나가 혁련천후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큰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써튼인가?”

“그렇습니다만…….”

“난, 황실기사단의 드와이트 헤론 후작이다. 그대들은 본 행렬의 뒤쪽에서 후방을 경계하며 따라오도록 하여라! 공주마마를 모시는 일이니 한 치의 허술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헉!”

순간 써튼이 허리가 90도로 굽어졌다.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앞의 사내를 본 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만 했다. 드와이트 헤론은 공작 다음가는 후작의 지위를 지닌 상위귀족이며 그보다는 소드 마스터에 오른 엄청난 무력으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다. 써튼 정도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그야말로 제국의 최상위층 인사가 헤론 후작이었으니…….

써튼의 행동을 보고 뭔가를 대충 짐작한 일행들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물론 귀찮은 일이 벌어짐을 싫어한 혁련천후의 뜻 때문이다.

[싸가지 하고는…….]

[아서라.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면 너 혼난다.]

[젠장…….]

북궁천소와 왕전에게 조윤이 전음으로 경고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타부타 인사조차 없이 일행은 공주가 탄 마차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헤론 후작은 주변을 둘러보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혹시 모를 몬스터의 기습을 우려한 그는 이동속도가 다소 늦어지더라고 마차 주변을 철통처럼 호위하며 이동했다.

헤론 정도라면 지상최강의 몬스터라는 오우거도 두렵지 않을 정도의 강자다. 그러나 혹시나 공주가 놀라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로 호위의 실패라고 여기는 완벽주의자인 탓에 헤론 후작은 어지간한 작은 왕국의 국왕보다 막강한 자리에 있음에도 스스로 주변을 경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뒤를 따르던 일행들이 그런 헤론 후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구파의 장문 정도 되는 수준인데, 지위가 후작이라면… 우린 그냥 이 세상의 공작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 아니겠습니까? 흐흐!”

“저놈에게 도전해서 죽이면 네가 후작이 되는 것이냐?”

“모르지.”

북궁천소와 왕전이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들에겐 제국의 강자라는 헤론 후작도 그저 그런 인물로 보일 뿐이었다. 조윤이 마차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차 안의 공주라는 계집이 꽤 중요한 듯 보이는군요. 최상위층 귀족이라는 후작이 직접 호위하고 마법사 둘에 작위를 받은 기사들만 오십을 넘어가다니…….”

“진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계집인지, 아니면 중원의 모 계집처럼 바람이 잔뜩 들어간 계집인지도 모르지. 코앞을 나서도 황궁의 금군 1,000명을 대동하고 움직인 계집이니…….”

관산악이 명황실의 사고뭉치 공주를 거론했다.

“주공! 저들과 케논 산맥까지 함께할 생각이십니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지. 그곳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테니, 조금 늦어지는 것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어.”

“원하시면 당장 그곳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물어오겠습니다.”

왕전이 눈을 부라리며 나섰다.

그 모습에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다.

이들은 차원을 넘어오면서 옛날, 젊은 시절의 성격들로 돌아가 있었다. 나이 자체가 젊어진 건지 아니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성격만이 바뀐 것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수하들 모두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정까지 20대 청년 때의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꽤나 기분을 흡족하게 만들어주었다.

“사고치지 마라.”

“흐흐! 사실 좀 심심하긴 합니다. 중원 같았으면 뇌음사나 동영의 잡졸들을 쓸면서 재밌게 보냈을 텐데 말입니다. 안 그러냐?”

북궁천소가 왕전을 보며 씩 웃었다. 왕전이 마주보며 험악한 웃음을 짓는다.

“목적지에 가면 몬스턴가 하는 것들이 많다며. 놈들을 상대로 몸 좀 풀어 보자. 이 세상의 공기가 중원보다 다소 가벼우니 무공의 위력이 더 강해졌을 테지……?”

“좋아! 이봐 써튼! 몬스터는 그냥 죽여도 되는 것들이라며?”

써튼이 재빨리 말을 몰아 둘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지금껏 오로지 둘의 눈치만을 살피며 이동하던 그였다. 가장 무서운 존재들이라 그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써튼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최대한의 공경스런 자세로 대답했다.

“몬스터는 죽이면 죽일수록 좋습니다. 혹시 오우거라도 때려잡으신다면 작위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제국의 남작들 중에 그런 식으로 귀족이 된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오호! 그래?”

둘의 눈동자가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그것처럼 반짝 빛을 냈다. 조윤이 둘을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자식들은 그저 싸움질만 생각하는군. 나중에 우린 가만히 있을 테니 네놈들이 몽땅 때려잡아라.”

“흐흐! 좋지. 좋아!”

써튼은 정말로 좋아하는 둘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드래곤인가? 아니면 오우거를 모르는 것일까?’

써튼은 다시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클어졌다. 그들의 진정한 신분을 파악하는 게, 그에겐 당장의 지상과제였다. 현세에 드래곤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아니 요란 제국의 전직 드레곤 사냥꾼이 드레곤을 봤다고 떠들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아! 머리야…….’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 * *

태양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기운도 조금씩 서늘하게 변해갔다.

울창한 수림으로 빽빽한 산맥의 초입을 돌아가던 일행들은 온갖 짐승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신기한 눈초리를 주었다.

중원에선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짐승들이 엄청 많았는데, 호랑이의 몸에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낸 괴수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마차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그것은 선뜻 다가들지 못하고 상당한 거리 밖에서 으르렁거리며 뒤를 따랐다.

“저게 호랑이냐?”

왕전의 물음에 써튼이 대답했다.

“샤벨 타이거라고 무척 사나운 놈입니다. 맛은 별로일 것 같습니다.”

“맛? 그럼 식용으로도 잡아먹는단 말이냐?”

“그게 아니고…….”

써튼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줄곧 그들이 드래곤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엉겁결에 그들의 식사거리로 말을 뱉은 것이다. 그때 헤론 후작 주변에서 우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헤론 후작이 주변을 배회하는 맹수들을 향해 손을 뻗는 시늉을 하자 침을 흘리며 흉성을 드러내던 샤벨 타이거들이 모조리 꼬리를 말고 도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에 써튼의 옆을 이동하던 마법사가 자칫했으면 말에서 떨어졌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의 마나를 느낀 탓이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호들갑은…….”

왕전이 눈을 부라리자 흑마법사는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헤론 후작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는데, 눈에 보이게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건 분명 상위클래스의 마법이었다. 설마 마스터가 마법까지…….’

그가 놀란 이유는 그것이었다.

검으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자가 마법까지 상위클래스에 들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봐야 했다. 마법이란 평생을 수련해도 그 끝을 볼 수 없는 무척 어렵고 난해한 분야다. 하물며 검과 그것을 동시에 수련하기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고 또, 지금껏 그런 인물도 없었다.

‘역시 세상은 넓구나.’

마법에 막연한 동경심을 지니고 있던 그는 자신의 능력을 돌아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 때, 이동하던 마차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헤론 후작이 손을 들어 모두의 이동을 멈추게 하고는 마차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마차의 창을 통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할 것이다. 마마께서 묵으실 장소를 마련하고 기사들은 식사를 준비하라! 그리고 마법사들은 몬스터들의 접근을 차단할 결계를 설치하고 주변을 살펴라!”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이 가장 먼저 좌우로 흩어지더니 두 손을 올리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뿌연 안개 같은 기운이 스멀거리며 생겨나더니 주변을 두르기 시작했다.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흑마법사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역시 황실의 마법사들은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감히 자신이 꿈꿀 수 없는 경지를 그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지금 자신의 마나를 최대한 은폐하고 있었다. 자신은 흑마법계열의 마법을 익히고 있다. 자칫 그 기운이 저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백마법사들은 흑마법사를 무척 싫어한다. 이단아들이라 생각하며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봐! 남작!”

헤론 후작이 써튼을 불렀다. 써튼이 재빨리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직 공주는 마차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 저놈들 중에서 텔레포트를 시전할 실력이 되는 놈이 있지 않을까?”

왕전이 결계를 두르고 돌아오는 마법사들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조윤이 눈을 빛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런 실력이 된다면 왜 이 고생을 하겠나. 쓱싹 가버리면 될 것을…….”

“혹시 아냐? 공주라는 계집이 그냥 유람을 하며 가자고 했는지.”

“그럴 수도 있겠군. 주공! 놈들에게 물어볼까요?”

왕전이 대뜸 혁련천후를 보며 물었다. 역시 최강의 단순파가 왕전과 북궁천소다. 둘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여기서 고개만 까닥이면 그는 곧장 마법사들에게 달려가 협박을 할 것이다. 그걸 아는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강제로 물어볼 순 없다. 기다려봐. 때가되면 알게 되겠지.”

“주공! 너무 느긋해지신 것 같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듣고만 있던 진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온다. 혁력천후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써튼의 말을 들어보니 그 흑안의 마검사들이 소와 흑야임을 확신하지 못하겠더군. 마족들도 우리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고 하니 어쩌면 그들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겠지. 느낌이다만, 어쩌면 그들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으니 가급적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얻고, 겪어보는 게 좋겠지.”

“정보라시면 그냥 적당한 놈을 때려잡아서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훨씬 빠를 듯싶습니다만…….”

북궁천소가 그다운 말을 한다.

“경험이 강제로 얻어지더냐? 조바심을 버려!”

“쩝!”

그의 어조가 단호함을 느낀 모두는 입맛을 다시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써튼이 돌아왔다. 그는 무서운 존재들의 주인 노릇을 하려니 내심 두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들에게 전하기 두려운 말을 건네야만 한다.

“저, 저희들더러 주변 경계를 좀 보라고 하십니다.”

써튼이 잔뜩 두려움에 찬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말을 건네면서도 자신들에게 경계를 서라고 한 것에 대한 노여움을 보이지 않을까, 써튼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전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고리눈으로 바뀌었다.

“흐흐! 우리 보고 경계를 서라고 했단 말이지? 저 비실비실한 새끼가…….”

“주공! 그냥 공주고 나발이고 몽땅 때려잡고 갈 길을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저 허약한 새끼부터 주둥아리를 작살내야겠습니다.”

둘은 항상 중원에서보다 더 불 같은 성격을 보여준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당장에라도 헤론 후작을 작살내려고 들 듯 으르렁거렸다.

북궁천소가 몸을 움직이려 하자 써튼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는 오직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혁련천후만을 쳐다봤다.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건이 터지느냐, 마느냐가 달린 것이다. 혁련천후는 잠시 헤론 후작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우측의 숲 속을 눈빛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경계를 선다고 여길 것이니 모두들 저리로 간다.”

“주공!”

불만에 가득 찬 눈빛을 주는 모두와는 달리 써튼과 마법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칫했으면 제국의 공주와 헤론 후작이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일행들은 마지못해 경계를 서겠다고 전하고는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끼니를 해결한 공주 일행은 달이 하늘의 가운데로 떠오를 즈음, 모포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

헤론 후작을 비롯한 일부도 잠을 청했는데, 약 20명에 달하는 기사들은 마차 주변을 에워싸고서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언뜻 비치더니 마차지붕으로 내려앉았다.

그 움직임이 유령처럼 은밀했기에 그림자를 본 자,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는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공주마마! 그냥 이대로 돌아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안 돼. 지금 요란 제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제국은 상당한 피해를 입을 거야. 케논 산맥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고 전쟁은 피해야 해.”

“누가 케논 산맥을 요란 제국에 넘겨주는 것을 염려한답니까? 그들이 공주마마를 요구하니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시녀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공주의 것으로 여겨지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짙은 한숨을 내쉰다.

“그건 아직 속단할 수 없어. 협상만 잘되면 케논 산맥만으로 그들의 욕구를 풀어줄 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될 거라 확신해. 자신도 있고…….”

“그 음흉한 요란 제국의 황태자가 쉽게 물러날 위인이 아님은 마마께서도 아시는 사실이잖아요. 그러니 그냥 여기서 돌아가서 훗날을 도모하심이… 전 마마께서 왜 스스로 자청을 하셨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질 않아요. 정말…….”

시녀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절절 묻어난다.

“휴!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테세우드 공작이 직접 나섰겠지. 그러면 결과는 무조건 우리에게 불리한 쪽으로 나게 되겠지. 그는 오히려 전쟁을 반기는 위인이야. 전쟁이 일어나면 제국은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되겠지. 그러면 제국은 다시 군인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회귀하게 될 거야. 그것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피가 제국을 적셨는지 너도 알잖아. 그러니 이제 그만 해.”

“마마!”

“그만 하래도!”

공주의 단호한 음성이 이어졌다.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조금을 더 기다렸던 그림자는 더 이상 대화가 들려오지 않자 유령처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주변을 경계하던 기사의 고개가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엔 어둠을 타고 날아가는 한 마리 새만 보일 뿐이었다.

* * *

“뭔가 사정이 있었군.”

“그렇습니다. 어떤 놈이 전쟁을 빌미로 공주와 많은 것을 요구한 듯 싶습니다.”

“이 정도로 문물이 발달한 나라에서 눈치를 보는 나라가 있었단 말이냐? 놀랍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 나라도 왕국이 아닌 제국인데 그런 제국을 위협하는 또 다른 제국의 힘이 보통이 아닌 듯 여겨집니다. 중원으로 치면 옛날의 강국, 몽골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진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조금 전, 마차 위의 그림자는 다름 아닌 진천, 그였다. 들었던 모든 것을 혁련천후에게 전했다. 호기심으로 모두는 눈을 빛냈다. 혁련천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팔짱을 하고서 나무에 등을 기댄 그를 보며 모두는 침을 삼켰다. 그들은 뭔가 흥미로운 사건이 전개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보였다. 물론 혁련소와 흑야를 찾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흥미를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혁련천후가 입을 열었다.

“케논 산맥으로 가서 그들의 정체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뭔가를 기대했던 모두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죽여주더군.”

“그래? 얼굴도 낮에 언뜻 봤었는데 상당히 아름답더라. 주모님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더라니까.”

진천과 사공진무가 소곤거렸다.

“내공, 아니지 마나라고 해야겠군. 아무튼 대화 도중 감정이 격해져서 순간적으로 뿜어냈던 마나가 상당했어. 저 헤론 후작이라는 자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더군.”

“공주잖아. 당연히 어려서부터 몸에 좋다는 영약을 입에 달고 살아서 그렇겠지. 수련을 통해 쌓은 내공은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지만 인위적으로 축적한 내공은 다르지. 물론 주공과 우리는 예외지만…….”

사공진무가 머리 뒤로 팔을 끼고는 벌렁 누우며 말했다. 진천도 그 옆에 같은 자세로 누우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 주모님이 해주시던 요리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쯤이면 고려식으로 만든 바다음식을 배 터지게 먹고 있었을 텐데… 쩝!”

“후후! 그러게.”

진천이 사공진무를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혹시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주모님도 그곳으로 뛰어드시는 것은 아닐까? 충분히 그러시고도 남을 분들인데…….”

“내 생각도 그렇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분명 이리로 오겠다고 나설 분이지. 둘째 주모라면 벌써 그러고도 남으셨겠지?”

“큭큭! 그래. 난 그분이 따라오지 않은 게 지금도 신기하다.”

“큭큭!”

둘은 자신들의 둘째 주모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 * *

눈을 감고 잠을 청했던 혁련천후는 수하들이 돌아가자 눈을 떴다.

지금껏 이 세상에 넘어와서 제대로 잠을 청했던 적이 없었던 그였다. 평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갔다.

‘살아만 있어다오.’

간절한 염원을 담고 두 개의 달을 응시했다.

달 속에 자식의 얼굴과 두고 온 아내들의 얼굴이 교차되며 떠오른다. 그러더니 이내 차가운 사내의 모습이 나타난다.

‘너를 믿는다. 흑야…….’

믿을 건 오직 흑야뿐이었다.

그라면 지옥에서도 자신의 아들을 지켜낼 거라 믿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그의 얼굴을 쓸고 지나간다. 주변에서 자신들을 향해 움직이는 기운들도 느껴진다. 정체 모를 짐승들의 기운이다. 그런 기운 따위는 무시해 버린 그는 이내 눈을 감고 상념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지난날의 기억으로 빠져들어 갈 때였다.

쾅!

공주 일행이 있는 곳에서 강력한 폭발음이 터졌다. 동시에 기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모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만 그동안 무척 지쳤던 써튼과 마법사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사람의 기운이 아닙니다.”

조윤이 다가오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랬다. 느껴지는 기운들은 사람의 호흡으로 보기 힘든 상당히 거친 느낌이었다. 혁련천후가 공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자 모두는 그의 뒤를 쫓아 경공을 펼쳤다.

* * *

캬오오!

괴수의 울부짖음이 주변을 진동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불줄기들! 현장에 들어선 모두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새의 형상에 눈을 크게 했다. 불줄기는 괴조가 뿜어내고 있었는데,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 불줄기가 마차로 떨어짐을 막아내고 있었다. 한참을 떨어진 자신들의 얼굴까지 뜨겁게 달구는 강력한 불줄기가 마차 주변에서 그대로 흩어졌다.

콰광!

거대한 방어막이 불길을 튕겨냈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마차는 심하게 흔들렸다. 당장에라도 넘어질 듯 위태해 보였다.

헤론 후작이 검을 뽑아 들고 푸른색 기운을 줄기줄기 괴조를 향해 뿜어냈다. 그러나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 탓에 번번이 빗나가고 말았다.

“모두 일제히 놈에게 오러를 퍼부어라!”

헤론 후작이 고함을 지르며 거대한 괴조가 움직이는 동선을 가리켰다.

허공에서 한바퀴 선회한 괴조는 다시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일행들은 눈에 내공을 끌어올려 새의 형상을 살폈다. 붉은 눈동자를 번득이는 새는 거대한 날개와 코끼리도 대번에 낚아챌 듯, 엄청난 발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실로 엄청났다.

“엄청나게 큰 놈입니다. 저게 도대체 뭘까요?”

어지간한 왕전이 다 놀란 모습이다. 크기로 보아 중원의 전설에나 나오는 봉황 정도는 되어 보였다.

캬오오!

시뻘건 불줄기가 이번엔 말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말들을 보호하라!”

헤론 후작의 다급한 음성에 마법사들이 황급히 손을 그곳으로 뻗었다. 그러나 워낙 창졸지간에 벌이진 일이라 화염의 일부가 말들에게 떨어졌다.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오르며 죽어갔다. 한 번의 공격에 여섯 마리가 시커멓게 탄 채로 쓰러졌다. 가공할 위력에 모두는 혀를 내둘렀다.

“도울까요?”

사공진무가 물었다.

“괜히 힘을 보였다간 귀찮아져.”

“위험한 듯 보입니다만…….”

“저자들, 저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자들이다. 지금은 당황해서 그러니 그냥 지켜보도록 해.”

혁련천후는 담담했다.

대도를 손에 쥐었던 북궁천소와 왕전이 입맛을 다시며 눈길을 거대한 괴조에게 돌렸다. 헤론 후작의 검이 시퍼런 불길을 토해내며 지상으로 다가온 괴조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 빠르기와 파괴력이 대단했는지 모두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캬오!

광포한 움직임을 보이던 거대한 새의 동체가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와중에 날개에 부딪힌 말 한 마리가 피를 뿌리며 엄청난 거리로 날아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괴력이었다.

“와이번이 도망갑니다! 후작님!”

기사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과연 거대한 괴조, 와이번은 그대로 시커먼 하늘 속으로 사라져갔다. 헤론 후작이 재빨리 마차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공주와 시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괜찮으십니까? 마마!”

“괜찮아요. 후작께서는 괜찮으신가요?”

“경호를 소홀히 한 점, 죄송합니다!”

헤론 후작의 얼굴엔 진심으로 걱정하는 빛이 다분했다.

제아무리 공주라도 후작의 신분을 지닌 헤론이 보일 태도를 넘어선 공경스러운 모습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세상에서의 견문이 소꼬리만큼 짧았지만 후작이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대단한 충신이군.”

“그러게. 중원에서도 저 정도의 인물은 없는데 말이지.”

모두가 헤론 후작의 태도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론 후작을 바라보는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가 사라진다.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의 마음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문득 그는 옆의 수하들과 흑야를 떠올렸다.

‘저 여인도 나만큼 좋은 사람을 두었군.’

저절로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다. 그는 수하들을 돌아봤다. 재밌는 일에 끼어들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그들을 보며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쩝! 모처럼 재밌는 일이 벌어졌는데 말이야.”

“케논 산맥에 가면 많다니까, 참자.”

“그러지.”

* * *

어수선했던 장내가 빠르게 수습되었다.

헤론 후작은 이내 떠날 것을 결심한 듯 기사들에게 짐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혁련천후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다친 자들은 없는가?”

마침 뒤늦게 잠을 깨고 온 써튼이 허리를 굽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서둘러 출발할 것이니 그대들도 준비를 하여라.”

헤론 후작이 돌아가자 써튼은 혁련천후를 쳐다봤다. 물론 그의 지시가 떨어져야만 움직이는 써튼이다.

“말들을 데려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써튼과 마법사가 빠르게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둘이 말들을 끌고 오자 모두는 말 위로 몸을 싣고는 마차의 뒤를 따랐다.

“지금 몇 시쯤 되었지?”

혁련천후의 물음에 써튼이 빠르게 대답했다.

“곧 있으면 동이 틀 시간입니다.”

“별자리가 확실히 중원과는 다르군.”

별자리가 완전히 다른 탓에 시간을 추측할 수가 없었다.

문득 자신이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자 씁쓸함이 밀려온다. 앞서 이동하던 마법사들이 힐끗 뒤를 돌아본다. 그들은 진천과 사공진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혁련천후는 마법사들의 몸을 날카롭게 살폈다.

‘확실히 현묘한 뭔가가 몸속을 흐르고 있어.’

종류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마법사들에게서 느껴졌다.

아들을 데리고 간 자의 영상이 새삼 떠오른다.

그와 눈앞의 마법사들이 교차되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순간 지독한 살심이 생겨나며 그의 눈동자에 새파란 광망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잘못되었다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불길한 생각은 머리를 흔들어 떨쳐냈다. 무조건 살아 있어야 하며 무조건 자신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의 모든 마법사들을 죽여서라도 데려간 놈을 찾겠다!’

살심이 분노로 바뀌었다.

심호흡을 한 그의 눈동자가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헤론 후작이 뒤를 돌아보며 의아함을 담은 눈동자를 일행들에게 던지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머리를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혁련천후가 순간적으로 보였던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마법사들도 다시 뒤를 돌아본다. 그들은 여전히 진천과 사공진무를 흘긋거렸다.

“뭘 보니 자식들아!”

사공진무가 환하게 웃으며 중원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진천도 손을 흔들어주자 슬쩍 노기를 드러낸 마법사가 동료의 만류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법사들에게 둘의 행동은 천한 시민들이나 하는 경박한 행동이다. 작위를 받은 귀족들이니 그러한 반응은 당연했다.

* * *

거대한 산의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하늘을 향해 그 머리를 내밀고 있다.

만년설이 두른 산의 정상은 생명체의 접근을 불허하며 하늘과 그 높이를 겨루고 있다.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온통 숲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넓이가 어지간한 공국의 영토보다 넓었으며 거대한 강이 숲의 가운데를 오만하게 가르며 그 고고함을 뽐내고 있었다.

캬오!

거대한 와이번들이 하늘을 선회하며 울부짖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이곳이 자신의 왕국임을 숲의 모든 생물에게 경고하듯 보인다. 두 마리의 와이번은 왕국을 둘러보는 제왕의 그것처럼 오만하고 위압적인 모습이다.

그런 와이번들의 시선이 산맥의 북쪽을 향하더니 이내 그곳으로 빛살처럼 날아가며 모습을 감추었다.

와이번이 사라져간 방향, 그곳에 붉은색 갑옷을 걸친 상당수의 병력이 숲 가운데를 흐르는 강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일만은 되어 보이는 병력들은 마치 거대한 뱀이 움직이듯 했다.

푸르륵!

전마들이 숲을 보며 두려움에 찬 몸짓들을 한다.

먹이사슬의 상위에서 군림하는 맹수들과 몬스터의 기운을 느낀 것일까? 숲의 가운데로 들어갈수록 전마들은 현저하게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선두에서 이동하던 자의 곁으로 날카로운 눈매의 기사가 빠르게 다가왔다.

“각하! 아무래도 더 이상의 진입은 힘들 듯합니다. 이 부근에 군영을 차리고 상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흠! 그러지.”

기사가 허리를 굽히고는 로브를 걸친 자들을 쳐다봤다. 그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전군! 멈추어라!”

가볍게 속삭인 그 말이 공간을 타고 일만의 병사들 모두에게 전해졌다.

대지가 울리며 군의 이동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하나하나의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보아 특수한 훈련을 받은 군인들로 여겨졌다.

“마법사들은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줄 결계를 서둘러 설치하고 나머지는 사단의 마법진에 따라 군막을 설치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일만의 군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각하라 불린 자가 다소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살폈다. 태양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황금색 갑주에 그레이트 소드를 허리에 찬 그는 옆에 선 기사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곳이 본 요란 제국의 번영을 천년만년 동안 이어지게 할 것이다. 이 풍요로운 대지를 보라. 이곳의 풍요로움이 고스란히 제국의 것이 된다면 본 제국은 그 어떤 제국보다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옆의 기사는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내민 그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드래곤, 아이아스의 전설이 깃든 성지이니 네 발달린 짐승의 피로 제를 올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각하!”

“하하! 소리아노! 산맥의 공기를 흠뻑 취해본 뒤에 제를 올리자꾸나. 나, 베린스가 케논 산맥의 지배자가 되려고 첫발을 디딘 날이다. 오늘은 병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이고 흥겹게 놀게 하라!”

“예! 각하!”

소리아노가 군례를 취하고는 빠르게 밑으로 내려갔다.

“흠! 과연 몬스터의 왕국이라는 별명이 걸맞군. 숲 전체가 이토록 완벽하게 보전되어 있었다니…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베린스의 눈동자가 야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때 그의 옆으로 로브를 걸친 마법사 하나가 다가왔다.

“공작 각하! 폐하께서 통신을 보내셨습니다!”

“뭣이? 폐하께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베린스는 서둘러 마법사의 뒤를 쫓았다.

진의 정 가운데 마련된 군막 안으로 들어간 베린스는 성인남자의 얼굴크기만 한 구슬 앞에 섰다. 구슬 안에는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머리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관을 쓴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요란 제국의 12대 황제인 칼 드베인 막스가 그였다.

“충!”

베린스가 군례를 올리자 통신석 안에서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군. 베린스.”

“중간에 몬스터들을 토벌하느라 하루가 지체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흠! 그랬군. 어떤가? 그곳을 직접 보니…….”

“폐하의 명대로 제국의 1군단을 이곳에 상주시킨다면 천하요새로 거듭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드옵니다! 서둘러 요새를 짓고 1군단을 이곳으로 이동시키겠습니다!”

막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조만간 놈들에게도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베린스!”

“폐하의 명을 가슴에 새겨두었습니다!”

“후후! 좋아. 그대만 믿고 있겠다. 베린스!”

팍!

통신석이 빛을 거두자 황제, 막스의 영상도 사라졌다.

보이지도 않는 황제에게 군례를 한 베린스는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가 그를 따랐다.

“만약 놈들이 소식을 접하고 대군을 몰아온다면 1군단이 올 때까지 우리가 막아야 한다. 하니 결계를 보다 강력하게 설치해야 한다. 알겠느냐?”

“지금 레이나 공주가 이곳으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협상을 하기도 전에 설마 군사를 일으킬까요?”

“그들은 우리 측 협상단만 이곳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만의 병력이 들어온 것을 안다면 테세우드, 놈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놈이 병력을 끌고 온다면 우리로선 더 좋은 경우가 되겠지.”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일단 병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이도록 해. 나는 좀 씻어야겠다.”

“준비하겠습니다. 각하!”

“자네들도 오늘 만큼은 즐기라고. 알겠나?”

“감사합니다.”

베린스가 자신의 군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서쪽으로 조금씩 떨어지는 시간이 되자 군사들은 솥을 걸고 불을 피워 본격적인 저녁준비에 들어갔다.

* * *

속이 답답해서 마차 위에 올라앉은 레이나 공주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다.

시원한 바람이 제법 불었지만 그녀의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았다. 행렬의 뒤쪽에서 이동 중인 진천과 사공진무는 그녀의 폭발적인 아름다움에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화려한 금발에 새하얀 피부, 보석처럼 빛나는 벽안은 중원의 미녀들과는 색다른 아름다움을 풍겼다.

“죽인다.”

“그래, 죽인다.”

“저 정도면 큰 주모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냐?”

“흠!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화려하기로는 저 공주라는 여인이 한 수 위겠지만…….”

다른 존재들은 둘을 보며 혀를 찼다.

“침 좀 닦고 봐라. 자식들아!”

“흐흐! 거시기가 불끈 달아오르는 모양이군.”

“하하!”

그들을 바라보는 써튼과 흑마법사는 거의 기절 일보 직전까지 간 기색이다.

저렇게 큰소리로 말을 한다면 공주와 헤론 후작의 귀에 들릴 것이다. 당연히 헤론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둘은 다름 아닌 헤론 후작을 걱정했다.

어쩌면 제국의 공주와 충신이 객사를 할 지경에 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둘의 걱정과는 달리 헤론 후작은 이들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주변을 살피며 경계를 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헤론 후작님 정도면 충분히 들었을 거린데…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써튼을 보며 북궁천소가 험악하게 웃었다.

“왜 걱정되냐?”

“예? 무,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가 떠드는 소릴 저 털복숭이가 들을까 봐 말이다.”

“헉!”

속내를 들킨 써튼은 기겁을 했다.

“흐흐! 넌 앞으로 우리랑 계속 다니려면 그 간덩이부터 키워야 해. 주공의 길잡이라면 적어도 호랑이 아가리에 대가릴 밀어 넣을 정도는 되어야지. 잘 봐라.”

북궁천소가 고개를 돌리더니 느닷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공주야! 이놈들이 널보고 껄떡거린다!”

“으아…….”

써튼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공주와 헤론 후작의 다음 행동을 예상했다. 보나마나 칼부림이 날 거다. 흑마법사와 써튼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죽을상을 했다.

그때 흑마법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그냥 가시는데요?”

“그러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둘은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방금 북궁천소가 지른 소리는 200미르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장난치니 재밌냐? 이 무식한 놈아!”

왕전이 북궁천소를 보며 혀를 찬다. 담대소천과 다른 이들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조윤이 써튼과 흑마법사를 향해 손가락을 슬쩍 움직였다.

순간 둘은 주변이 완벽하게 진공상태로 변해가는 듯, 착각을 일으켰다. 귀가 멍해지면서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보며 껄껄 웃는 북궁천소의 웃음도 들리지 않는다.

팟!

“이제 알겠냐?”

갑자기 북궁천소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렸다.

그들은 지금 호신강기로 주변을 차단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헤론 후작이 들을 리가 없었다.

써튼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눈동자를 굴리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흑마법사는 상황을 이해했다.

‘대단한 마나의 소모를 필요로 하는 공간차단을 이렇듯 간단하게 시전하다니… 정말, 이분들은 드래곤이란 말인가?’

마법사의 기준으로 본다면 방금 조윤이 펼쳤던 수법은 5클래스에 이른 자들만이 가능한 경지였다. 하물며 방금은 공주의 주변까지 그 범위가 뻗친 듯했으니 마법사는 놀람을 넘어 경이로움마저 들었다.

장난을 중단한 일행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주변 경관을 살폈다.

제법 울창한 수림이 그들의 이동방향 앞에 나타났다. 헤론 후작이 손을 들어 행렬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기사 둘을 뽑아 숲 속으로 정찰을 보냈다.

“잠시 저들이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린다!”

기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공주도 마차에서 내려 주변의 바위에 앉아 시녀가 건넨 음료를 마셨다. 진천과 사공진무의 눈동자는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침 뒤쪽을 돌아보던 레이나 공주의 시선과 혁련천후의 시선이 부딪혔다.

레이나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시녀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썹이 하늘로 올라갔다.

“저런 무례한 작자를 보았나!”

“그만 해. 난 괜찮아.”

“공주님!”

“그만두라니까!”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자 시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그녀의 뒤쪽에 공손히 시립했다. 혁련천후를 다시 슬쩍 돌아본 그녀는 이내 시선을 전방의 숲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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