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아리안의 이어지는 꿈
“솔직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금 저 공주라는 여인의 표정을 보면 일부러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제국에 있다는 상위마법사의 텔레포트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냥 간단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일부러 고생길을 택하다니 말입니다.”
조윤의 말에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조윤이 혁련천후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우리만 이동한다면 훨씬 빠르게 그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됐어. 그냥 이렇게 가.”
모두가 다소 의아한 시선으로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보다 절실한 그가 이렇듯 여유를 보이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이 소와 흑야가 아닐 수도 있다.”
“……!”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흑야와 소가 아니라면 우린 상당한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최대한 빨리, 많이 익혀두는 것이 좋아. 그러니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의문 따윈 품지 말도록 해.”
[주공의 말씀대로 해. 누구보다 초조하신 분이 그분이니까. 우리가 서두르는 모습을 보여줘선 곤란하겠지.]
조윤이 모두에게 전음으로 그같이 전했다.
푸르륵!
그가 탄 말이 거친 투레질을 한다. 고삐를 당겨 말을 진정시킨 혁련천후가 말을 이었다. 꽤나 단호한 어조였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을 찾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이 세상에 없다면 다른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을 것이다.”
조윤을 비롯한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알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언제나 이럴 때 나서는 것이 북궁천소다.
그는 다른 존재들을 돌아보며 눈을 부라린 후, 혁련천후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앞장서서 이동하던 헤론 후작이 다시 뒤를 돌아본다.
조금 전, 혁련천후가 발산했던 기운 때문이다.
“새끼! 생긴 것과는 달리 꽤나 예민한 놈이군.”
“그러게. 너하곤 다른데?”
“뭐야! 이 새끼가…….”
북궁천소와 왕전이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린다. 지켜보던 써튼과 흑마법사만 괜히 두려움에 몸을 떤다.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기사들과 혁련천후 일행도 걸음을 멈추었다. 조윤이 써튼을 보며 말했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써튼은 달리고 있었다.
“넵!”
* * *
헤론 후작은 통신구를 응시하며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다.
[그러니까, 이동을 잠시 멈추고 우리가 그곳까지 갈 동안 기다리란 말이다!]
“너무 긴 시간입니다.”
[헤론! 명을 어길 셈이냐?]
“황제 폐하의 명은 공주마마를 그곳까지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신, 헤론은 황명을 받들 뿐입니다.”
헤론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헤론! 놈들이 그곳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만약 공주께서 놈들에게 인질로 잡히기라도 한다면 네가 책임지겠느냐!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본 공작이 제국의 지휘권을 갖는다는 것을 잊었더냐!]
“……!”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근처의 적당한 도시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어라! 본 공작이 부대를 이끌고 그곳에 도착하면 통신을 넣겠다. 가볍게 행동하지 말고 무조건 본 공작과 함께 케논 산맥으로 가야 할 것이다! 헤론!]
“공주마마의 의견을 들어본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헤론은 통신석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굽힌 후, 통신을 꺼버렸다. 그때 레이나 공주가 그에게도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케논 산맥에 요란 제국의 전투부대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전투부대라뇨? 협상단이 아니고, 전투부대가 들어왔다는 말인가요?”
레이나 공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헤론이 머리를 조아린다.
“테세우드 공작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테세우드가 거론되자 그녀는 눈빛이 달라졌다. 대번에 차갑게 굳은 그녀가 다시 물었다.
“다른 말은요?”
“공작께서 부대를 이끌고 케논 산맥으로 가시겠답니다. 하오니 부대와 합류할 때까지 이동을 멈추고 기다리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레이나 공주의 고운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발끈하여 뭐라 말을 쏟아낼 것만 같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발로 바닥을 한번 굴렀다.
“어쩔 수 없지요. 전투부대가 들어왔다면 협상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하니…….”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마마!”
“그럼요. 희망을 버리진 않아요. 다만 이런 상황이라면 테세우드 공작이 제국의 지휘권을 갖는다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 그러니 따를 수밖에요.”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분노와 안타까움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헤론 후작은 그런 그녀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책도 헤론 후작을 괴롭혔다.
“후작님! 인근 도시로 들어가요. 그곳에서 공작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어요.”
“조금 더 이동하면 그랜트 백작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지요.”
“그랜트 백작이라면 제3기병사단의 사령관이라는 그분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몇 안 되는 제국의 충신이지요. 그라면 공주마마를 환영할 것입니다.”
“좋아요. 그곳으로 가요.”
레이나 공주는 다시 마차로 들어갔다.
헤론 후작이 다시 전진을 명령하자 행렬은 이동을 재개했다.
* * *
써튼이 돌아왔다.
공주와 헤론 후작만의 대화였기에 아무런 정보도 얻질 못한 써튼은 북궁천소와 왕전의 험악한 눈초리를 피해 행렬의 후미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때 흑마법사가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방향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저쪽은 케논 산맥을 향하는 방향이 아닙니다. 키토라는 도시로 이어진 길인데…….”
조윤이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혁련천후가 눈빛으로 대답하자 그는 다시 써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상황을 짐작한 써튼이 부리나케 앞으로 말을 몰았다. 써튼은 금방 돌아왔다.
“키토로 가신답니다!”
“케논 산맥은?”
“그냥 키토로 가신다고만 하셨습니다.”
조윤이 다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우측으로 방향을 트는 마차를 응시하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린 혁련천후는 조윤에게 지시했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 직진한다!”
“알겠습니다. 이봐! 넌 가서 헤론인가 하는 작자에게 전해. 우린 케논 산맥으로 간다고 말이다.”
“넵!”
써튼이 다시 말을 몰아 헤론 후작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헤론에게 말을 건네자 헤론이 뒤를 돌아봤다. 마차가 멈추면서 헤론이 말머리를 돌려 혁련천후 등에게로 다가왔다.
모두는 눈빛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 눈빛을 죽이지 못한 북궁천소와 왕전은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지금 위험하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든가, 아니면 우리와 키토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일 때문에 그곳으로 간다고 전해.]
써튼은 귓속을 울리는 가느다란 음성에 흠칫 놀라고는 뒤를 돌아봤다. 혁련천후의 차가운 눈빛을 본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흰 볼일이 있어 그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함께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후작 각하!”
“어허!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리고 곧 출입금지령이 떨어질 것이다. 괜한 헛수골랑 말고 생각을 바꿔라!”
[산맥 근처까지만 간다고 해.]
“저희는 산맥 근처까지만 가면 됩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헤론 후작은 더 이상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 같았으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성을 냈겠지만 그는 그런 종류의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써튼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건네고는 마차로 말을 몰아 돌아갔다. 곧 마차가 우측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자 진천과 사공진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주공! 속도를 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자! 우리도 전속력으로 달린다!”
두두두두…….
라이트 마법이 걸린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그들은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흐흐흐…….”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섬뜩한 미소에 여인은 검을 뽑아 들었다.
허리띠처럼 하늘거리던 그것은 지독한 검강을 품으며 독을 머금은 독사처럼 머리를 치켜세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과 함께했던 존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여인을 향해 천을 뒤집어쓴 존재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여인이 소리쳤다.
“누구냐!”
“흐흐! 너를 악마의 성지로 데려갈 사자이니라.”
“닥쳐라! 더 이상 다가오면 벨 것이다!”
여인의 손에 쥐어진 검이 검강을 뿜어냈다. 그때 어디선가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민! 소민!”
여인의 고개가 급격하게 뒤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가오던 존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 존재도 사라지고 없었다. 불안감이 밀려든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소!”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다. 절망이 밀려오며 그녀의 두 다리에서 힘을 빼앗아 가버렸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무릎에 고개를 묻은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여인의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 그녀는 백색의 성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야! 이곳으로 오너라.”
허공에서 공명이 들려온다.
너무나도 인자하게 생긴 백발의 노인이 자신에게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포근하게 녹아든다.
성으로 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탐스럽던 흑발은 점점 화려한 금발로 바뀌어갔으며 아이의 그것처럼 새카맣게 빛나던 눈동자는 벽안으로 변해갔다.
“아리안… 내 이름은 아리안이야.”
갑주를 걸치고 그레이트 소드를 든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성의 첨탑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잊었다. 드넓게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며 그녀는 두 팔을 뻗어 올리며 소리쳤다.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 신의 자식이 되었음을 고하나이다!”
우웅!
갑작스럽게 하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가리며 세상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넌, 아리안이 아니다!”
차가운 음성에 아리안은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흑발에 검은 옷을 걸친 차갑게 생긴 사내가 자신을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역시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자신을 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난,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다!”
“웃기지 마. 넌 신교주 연무극의 딸이야. 결코 이 세상의 계집이 아니란 말이다.”
“닥쳐!”
아리안은 사내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가 뿌려지며 사내들은 힘없이 죽어갔다. 자신을 보며 차갑게 웃던 사내의 입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름이 흘러나온다.
“소민!”
“소민……?”
[약속해요. 나를 지켜주겠다고…….]
자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또다시 천을 뒤집어쓴 존재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흐흐흐!”
콰우우…….
검은 구름들이 광포한 움직임을 보이며 서서히 세상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두려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 무작정 뛰었다.
“소!”
또다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
[약속해요. 나를 지켜주겠다고… 소!]
폭우 속을 달리던 아리안은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린 사내를 향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다시 달렸다. 죽어가고 있는 사내는 자신을 향해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달려가는 아리안의 육신은 어느새 흑발에 흑안으로 변해 있었다.
“소!”
손을 뻗었지만 사내는 소멸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 * *
“영주님!”
“아가씨!”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었다. 익숙한 목소리들이다.
언제나 자신의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리안은 눈을 떴다.
‘또 그 꿈을 꿨어…….’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된 아리안은 고개를 묻었다.
꿈속의 사내를 떠올려봤지만 얼굴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나 이랬다. 흑발에 흑안만 떠오를 뿐이다. 게다가 생소한 자신의 이름이라 부른, 연소민이란 단어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또 악몽을 꾸셨군요. 아가씨.”
시녀가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아리안은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르륵…….
투명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흐른다.
그 꿈을 꾸면 헤어날 수 없는 지독한 슬픔이 밀려온다. 그녀는 슬픔에 자신을 맡기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기억조차 없건만 슬픔은 도저히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오 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그녀였다.
“출발해.”
감정을 다스린 아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호위이자 시녀인 안제리나가 근심 어린 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숄케는 여기서 돌아가세요. 당신이 없으면 영지민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어요.”
“영주님!”
“내 걱정은 마세요. 그러니 얼른 돌아가세요.”
갑주를 차려입은 아리안은 담요를 걷어 말에 묶고는 위로 올랐다. 안제리나도 말에 몸을 싣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부디 몸조심 하십시오. 영주님!”
허리를 숙이는 숄케를 뒤로하고 둘은 빠르게 말을 몰아갔다.
* * *
“크악!”
기사들의 검과 창이 오크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베린스 공작은 기사들을 지휘하며 주변 산맥의 오크들을 차례로 토벌하는 중이었다.
소리아노가 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놈들을 죽이고 북쪽으로 이동한다!”
수백에 달하던 오크들이 몰살을 당했다. 제아무리 오크라도 오러로 무장한 기사들에겐 식후 간식거리도 되지 못했다.
삼천에 이르는 기사들이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각하! 저곳만 토벌하면 군단병력이 상주할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후후! 좋아. 꽤 싱겁게 끝나는군.”
“제아무리 케논 산맥의 몬스터들이라도 각하께서 직접 단련시킨 기사들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하하하!”
소리아노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북쪽을 응시하던 베린스 공작이 이동을 지시하자 기사들은 빠르게 북쪽으로 질주했다. 능선을 하나 넘어가자 거대한 평원이 펼쳐졌다.
산맥의 일부인 그곳은 놀라울 정도로 광활한 넓이를 자랑했다. 요란 제국의 이름난 무인인 베린스 공작은 거침없이 토벌명령을 내렸다.
두두두두…….
삼천의 기병들이 지축을 울리며 평원으로 돌진했다. 숲의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잡혔다. 기병 일부가 숲으로 돌진해 들어가 살육을 시작했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으하!”
이들은 요란 제국 최강의 돌격부대다.
모두 일만의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이들은 제국전쟁 때, 그 용맹을 대륙 전체에 뽐냈던 자들로서 그야말로 최강, 최고의 무력부대라 불린다. 선두에서 말을 몰아가던 베린스 공작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오러가 검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그것은 강자만의 전유물이다.
“오우거는 가죽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 씨를 말려라!”
거칠 것이 없었다.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오크들과 하위몬스터 고블린들은 말발굽 아래 짓밟혀 그대로 죽어갔다. 삼천의 기병이 평원의 중앙까지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대규모의 오크병력이 그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베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열을 바꾸어 횡으로 펼친 그는 그대로 밀려오는 오크들을 향해 돌진을 명령했다.
“요란 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줘라!”
“공작 각하를 위하여!”
콰지지직!
피와 살이 난무했다.
마법실드가 펼쳐진 전마들은 먹이사슬의 위에 있는 몬스터들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친 몸짓으로 오크병사들의 중앙으로 짓쳐들었다.
캬오!
측면에서 거대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으악!”
기사 하나가 피를 뿌리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오우거다!”
“좌측에 오우거가 나타났다!”
쾅!
지축이 울리며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오우거가 기마병들의 좌측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없는 세상에선 최강의 몬스터라 불리는 오우거가 출현하자 용맹했던 기사들도 얼굴이 굳어졌다.
오우거의 몸에 검을 먼저 쑤셔 넣느냐, 아니면 오우거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먼저 작렬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기병은 그대로 오크부대를 덮쳤다.
베린스 공작과 소리아노, 그리고 일부 기사들만이 오우거의 주변을 맴돌며 공격 기회를 노렸다.
크아아!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침입자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새파란 오러를 품은 베린스 공작의 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오우거는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관통당하고 말았다. 녹색 선혈이 뿜어지며 거대한 동체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심장을 관통당한 것이다.
“접근하지 마라! 원거리 공격으로 놈들을 처치하라!”
베린스 공작이 다른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던 기사들은 일제히 오우거를 향해 검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의 검은 베린스 공작과는 달리 오우거의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했다. 다만 깊숙이 박혀들어 부상을 입혔을 뿐이다.
콰직!
오우거의 주먹이 기사 하나를 덮쳤다.
다행히 기사는 간발의 차이로 주먹을 피했지만 전마는 그러지 못했다.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전마가 핏덩어리가 되어 날아갔다.
가공할 파괴력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기사는 재빨리 베린스 공작의 주변으로 몸을 피했다. 살아남은 오우거의 몸짓은 그야말로 광란에 가까웠다.
무지막지한 공격이 이어졌다. 놀란 전마들이 앞발을 들어 피하기 급급하자 기사들은 말을 버리고 땅으로 내려섰다.
“비켜라!”
베린스가 기사들을 물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감히 몬스터 따위가……!”
그는 그레이트 소드를 주병으로 사용한다.
같은 그레이트 소드라도 베린스 공작은 훨씬 크고 무거운 것을 애용했다. 당연히 파괴력이 배가된다.
오우거의 붉은 눈동자가 베린스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크르르르…….
“일 검에 네놈을 죽여주지.”
베린스 공작의 육신이 그대로 오우거를 향해 날아올랐다.
기사들은 숨죽여 베린스 공작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오우거가 양손으로 날아드는 베린스 공작의 육신을 잡아갔다. 잡힌다면 그대로 뼈가 으스러져 즉사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베린스 공작은 요란 제국에서 최상위에 드는 강자였다.
오우거의 움직임보다 그의 검이 더 빨랐다.
서걱!
세상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오러가 오우거의 목에 작렬하자 섬뜩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베린스 공작을 덮쳤다.
“역시!”
“역시 공작 각하시다!”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막강한 오우거를 베린스 공작은 말처럼 단 일 검에 목을 벤 것이다.
“가죽을 수거하고 나머지는 싸움을 끝내라!”
“예! 각하!”
기사 몇이 죽은 오우거의 가죽을 벗기고 나머지는 오크부대와 전투 중인 부대에 합류했다. 인간 대 몬스터의 전투는 거의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끝났다.
“각하! 모두 죽였습니다!”
소리아노가 머리를 숙이며 보고했다.
그러나 베린스 공작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그는 죽은 기사들의 시신을 모아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수천의 오크들을 죽인 대가로 그는 세 명의 수하를 잃었다. 압도적인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베린스 공작은 굳은 얼굴로 죽은 자들의 시신 앞에서 한참을 기도했다.
* * *
폭우가 쏟아졌다.
군단의 주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몬스터 토벌 작전을 벌인 베린스 공작과 그의 부대는 재빨리 임시천막을 치고 폭우를 피해 몸을 숨겼다.
“각하! 주변의 모든 몬스터들이 죽거나 도주했습니다. 폭우가 그치면 곧바로 공병부대를 불러 개간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아. 지금쯤이면 1군단도 그랜드 대평원에 들어섰을 것이다. 통신을 보내어 공병부대를 먼저 보내달라고 해.”
“예!”
소리아노가 군례를 취하고 마법병단의 천막으로 갔다.
뜨거운 홍차 한 잔에 피로를 녹이던 베린스 공작은 야전침대에 몸을 뉘였다. 비록 본토의 침실만은 못했지만 등과 허리를 아늑하게 감싸드는 푹신함에 그는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동시에 그의 천막 주변은 마법실드로 둘러졌다.
언제나 베린스 공작은 잠을 잘 때 소음을 막아주는 실드를 쳤다. 워낙 예민한 성격 탓에 약간의 소음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 때문이다.
쏴아아!
번쩍!
쿠르릉!
천둥벼락이 연신 케논 산맥으로 떨어졌다.
“젠장맞을! 갑작스럽게 웬 폭우가 쏟아지고 난리야.”
통신을 보내고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온 소리아노는 하늘을 보며 인상을 썼다. 부관이 그에게 독한 럼주를 내밀었다. 언젠가 케논 산맥 근처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얻은 전리품인 그것은 소리아노가 가장 즐겨 마시는 애주였다.
“리드! 마법결계는 확실히 쳐졌겠지?”
“두 번에 걸쳐 확인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좋아! 너도 한잔 마셔.”
소리아노와 그의 부관 리드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번에 한 병을 비웠다. 술맛이 돈 소리아노가 하나를 더 가져오라고 지시하자 리드는 보급천막으로 가기 위해 천막을 나섰다.
그때였다.
지이잉!
삼천 기병의 주둔지를 두른 결계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가장 먼저 마법병단 소속의 마법사들이 천막 밖으로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결계에서 경고음이 들렸습니다! 당장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하위마법사가 소리가 들려온 지역으로 몸을 날렸다. 베린스 공작의 휘하에서 마법병단장을 맡고 있는 코넬이 뒤이어 밖으로 나섰다.
“경고성이 미약했다. 몬스터가 결계에 걸려든 것은 아니냐?”
“지금 알아보러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단장님!”
“혹시 모르니 너희들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각별히 유의하여라.”
코넬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소리아노가 검을 든 채로 마법병단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술 냄새가 주변을 진동했다.
마법사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소리아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몬스터가 결계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몬스터가? 결계엔 어지간한 상위몬스터들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할 힘이 쳐져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몬스터가 걸려들었단 말이냐?”
소리아노가 따지듯 묻자 마법사들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하극상에 가까운 모습이다.
유달리 키가 작은 마법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람을 보냈으니 그만 들어가서 술이나 드시지요. 이곳은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다분히 비꼬는 어조였지만 소리아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좋아!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연락해라.”
소리아노가 질퍽이며 천막으로 돌아가자 마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소리아노에 대한 것들이었다.
“낙하산 주제에…….”
“어쩌겠나. 공작 각하의 인척이니 더러워도 우리가 참아야지.”
평소 마법사들을 존중하지 않는 소리아노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법병단의 마법사들은 그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어, 어!”
그때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이봐! 왜 그래?”
“저, 저기……!”
모두의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순간 모든 마법사들의 눈이 찢어질듯 크게 떠졌다. 그들의 시선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 허공에 둥실둥실 몸을 띄운 채, 마법사들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있었다. 사람이 허공에 몸을 띄운 것으로 마법사들이 이렇게 놀라지는 않는다.
철퍽!
마법사들의 발치로 무엇인가가 떨어져 흙탕물을 튕겼다.
사람의 머리였다. 바로 조금 전, 결계의 이상을 알아보러 갔던 그 마법사의 것이었다. 목이 잘렸지만 잘린 부위엔 핏방울 하나의 흔적도 없었다.
“깍! 나쁜 놈들!”
허공에 뜬 존재의 입에서 기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화려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상당히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양어깨가 불룩하게 솟아 있는 상의에 몸에 착 달라붙은 가죽 소재의 하의는 대륙에선 이용되지 않는 양식이었다. 그림책에서나 볼 법한 뛰어난 용모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눈부셨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보는 이의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누, 누구냐!”
“카루가!”
“카루가? 그게 뭐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기사들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구심을 가졌다.
펑!
허공에서 폭죽이 터졌다.
신호탄이었다. 누군가가 쏘아올린 것이다.
“저놈이 대장이지? 저 못생긴 놈이 대장 맞지?”
금발 존재가 우측으로 시선을 던지며 어린아이처럼 따지며 물었다.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오싹한 기운이 주변을 몰아쳤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냐!”
신호탄을 듣고 달려온 베린스 공작은 매우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마법사들을 향해 던지듯 물었다. 마법사들의 눈짓에 베린스 공작은 이내 금발 존재가 떠 있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헉!”
베린스 공작은 순간, 육신에서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착각을 일으켰다.
[흥! 꽤 뛰어난 육신을 지니고 있구나. 미약한 인간 주제에…….]
공명이 베린스 공작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챙!
“이놈!”
베린스 공작이 검을 뽑아 들며 노기를 드러냈다. 마법사들과 근위기사들도 일제히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감히! 위대하신 존재의 흉내를 내다니!”
“위대하신 존재? 그게 뭐지? 혹시 드래곤을 말하는 거야? 깍! 그 우스꽝스럽게 생겨먹은 파충류와 내가 닮았단 말이야!”
길길이 날뛰는 그를 보며 베린스 공작은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에 비해 하는 행동은 어린아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닥쳐라! 놈을 공격하라!”
베린스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이 일제히 손을 위로 뻗었다. 강대한 기운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내려다보는 눈빛엔 조금의 긴장조차도 없었다.
“깍! 나쁜 놈들 모조리 죽일 거야!”
쩌어엉!
마법사들이 퍼부은 힘들이 금발 존재의 주변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소멸되었다. 동시에 무지막지한 반탄력이 마법사들을 덮쳤다.
“우악!”
반탄력에 휩쓸린 마법사들이 낙엽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베린스 공작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거느리고 온 마법사들은 최고는 아니지만 5서클에 근접한 자가 둘에다 대부분이 4서클의 경지를 밟은 상위마법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저, 정말 드래곤이라도 된단 말인가?’
베린스는 이곳에 드래곤, 아이아스의 레어가 있다는 전설을 떠올렸다. 만약 저 허공에 뜬 존재가 아니아스라면 자신과 일만 여단 병력은 몰살을 당할 것이다.
“깍! 더 덤벼보시지.”
금발 존재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베린스 공작은 순간 갈등했다. 워낙 가까운 거리였기에 자신이 검으로 그를 베고자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거리였다. 그러나 그가 만약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물론 오러를 품은 검이 드래곤의 몸에 작렬한다면 드래곤도 죽을 수밖에 없다. 드래곤도 분명 뼈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니까.
그러나 실패한다면, 단 일 검에 죽이지 못하면 결과는 자신을 포함한 전병력이 몰살당하는 것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자신의 조국, 요란 제국까지도 위험하게 될 수도 있었다.
베린스 공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가까이서 보니 고작 스물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반말로 물어온다.
베린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카루가! 이 산의 왕이다!”
순간,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에 이채가 맺혔다.
“이곳은 드래곤, 아이아스의 레어가 있는 곳이다. 감히 왕을 자처하다니…….”
짧은 순간에 베린스 공작의 태도는 돌변했다.
강력했지만 그가 드래곤 아이아스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사소한 것도 절대 진실만을 말하는 종족이 드래곤이다.
방금 자신이 드래곤으로 의심했던 존재는 자신의 이름을 아이아스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아스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드래곤은 동족이 함께 살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드래곤일 가능성도 전무했다.
그것으로 베린스 공작은 움츠렸던 스스로를 추스르며 오러를 뿜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네? 내가 널 죽일 거야!”
베린스 공작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마나를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허공에 뜬 카루가를 덮쳤다.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베린스 공작의 속도와 검에 실린 파괴력은 카루가도 흠칫하게 만들었다.
서걱!
허공을 벤 검이 쏟아낸 힘의 몇 배를 담고서 베린스 공작의 육신에서 중심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중심을 바로잡은 그는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팔랑!
작은 천 조각이 폭우 속을 살랑거리며 흩날렸다.
“깍! 이, 이 나쁜 놈이…….”
허공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베린스 공작을 포함한 모두가 허공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루가가 웃던 얼굴이 아닌 지독히도 차갑게 굳어버린 얼굴로 육신을 바르르 떨고 있었는데, 옷자락 끝부분이 잘려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베린스 공작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카악!”
“으윽!”
카루가가 괴성을 터트리자 베린스 공작을 포함한 모두는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운 몸짓들을 했다. 그중 수준이 낮은 자는 코와 입에서 핏물을 흘려내며 쓰러졌다.
화악!
허공에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으악!”
몇이 더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금발이 시뻘건 눈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크지 않았던 육신도 점점 크기를 더해가며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불가사의한 광경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마나의 폭풍이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본진으로 퇴각하라!”
심각함을 깨달은 베린스 공작이 명령을 내리자 모두는 케논 산맥의 초입지에 마련된 주둔지로 몸을 날렸다.
주인을 잃은 전마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비명을 질러댔다. 베린스 공작은 몸을 날리는 와중에도 뒤를 돌아보았다.
“젠장! 정체가 뭐지?”
전설에도, 그 어떤 것에도 지금과 같은 현상에 대해 나와 있는 것은 없었다. 그때 베린스 공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것은……!”
“각하! 발록입니다!”
그랬다.
마계의 전왕이라 불리는 발록이 허공에 나타나 있었다.
부릅떠진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은 빛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부터였다.
“너무 작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명 생김새는 마계의 전왕, 발록의 모습, 그대롭니다!”
“으아! 쫓아옵니다!”
발록의 모습으로 변신한 존재가 허공을 가르며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모두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변신한 존재가 발록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마법병단과 근위기사들은 각하를 보호해라!”
뒤늦게 합류한 소리아노가 소리쳤다.
마법사들이 뒤를 돌아보며 마법공격을 펼쳤지만 근처에 가기도 전에 거대한 방어막에 막혀 소멸되어 버렸다. 놀라운 광경에 마법사들은 공격할 의지마저 잃어버렸다.
쾅!
“으악!”
채찍에서 뿜어진 불덩어리가 도주하던 기사들을 덮치자 불덩이에 휩싸인 기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기사들이 용기를 내어 검을 휘둘렀지만 마법공격과 마찬가지로 육신에 닿기도 전에 검이 가루로 변해 사라진다.
퍽!
채찍에 휘감긴 육신이 그대로 가루로 화해 사라지는 끔찍한 광경에 모두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깔깔! 모조리 죽이겠다!”
불붙은 채찍을 휘두르며 섬뜩한 눈동자를 오직 베린스 공작의 육신에 고정시킨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뒤를 쫓아왔다. 조금 전의 어린아이와도 같았던 그가 아니었다.
악마의 화산처럼 전신을 백색으로 물들인 그는 화염을 두른 채찍을 휘둘렀다.
베린스 공작의 앞부분에 화염이 떨어졌다.
그러나 베린스 공작은 그대로 화염 속을 뚫고 질주했다. 그가 걸친 갑주는 최상위마법 공격에도 끄떡없는 실드가 입혀진 것이기에 강렬한 화염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둘의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살아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결코!”
베린스 공작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생각조차 못 해본 그는 오직 살기 위해 마나를 다리에 모아 질주만을 거듭할 뿐이었다.
쾅!
“으악!”
뒤쳐진 기사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마법사들도 반 수 이상이 불길에 휩싸여 재로 흩어졌다. 그나마 사방으로 흩어졌기에 베린스 공작을 따르는 기사들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무지막지한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쾅!
“우욱!”
베린스 공작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던 기사 하나가 묵직한 비명을 지르며 행렬에서 떨어져나갔다. 동료의 죽음에도 모두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쏴아악!
채찍이 공간을 가르며 날아드는 소리에 베린스 공작은 저절로 목을 움츠렸다.
돌아보면 속도가 떨어지기에 그는 채찍이 등에 작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서 질주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측을 호위하던 기사의 육신이 화염에 휩싸이며 멀어졌다.
“본진이 가까워졌다! 각하를 보호하라!”
마법병단의 단장이 소리쳤다.
그러자 한 무리를 이루어 질주하던 모두의 주변에 뿌연 안개 같은 기운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들 모두가 한꺼번에 마나를 발출한 것이다.
“응! 무슨 수작이지?”
카루가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상당한 양의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공격사정권에 들어서던 그들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시야에서 멀어지자 괴성을 터트린다.
“카악! 감히!”
지금껏 허공에서만 뒤를 쫓던 그가 바닥으로 내려섰다.
전신을 덮었던 화염은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며 본모습이 드러났다. 적발에 붉은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생김새는 변신하기 전의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방을 싸늘하게 노려본 그가 바닥을 차고 직선으로 쏘아져나갔다.
“죽일 거야!”
쾅!
* * *
케논 산맥의 우측을 타고 흐르는 거대한 롱고리아 강은 요란 제국의 티아누스 고원에서 발원하여 대륙의 끝, 바다까지 이어진다. 두 개의 제국과 여덟 개의 공국을 가로지르는 그 강을 사람들은 여신의 심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강을 따라 수많은 문명들이 명멸해 갔기 때문이다.
“언제 봐도 대단한 곳입니다.”
“꽤나 섬뜩한 곳이기도 하지.”
혁련소는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케논 산맥의 웅장함에 경탄했다.
말을 버리고 배를 타고 강을 질러온 그들은 곧 있으면 도착할 케논 산맥을 바라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 연소민을 찾고자 명성을 얻으려 몬스터 토벌에 참여했던 그들이다.
덕분에 흑안의 마검사란 호칭까지 얻게 된 그들은 삼 년 만에 다시 케논 산맥을 보자 감회에 사로잡혔다.
“정말 그분들이 맞을까요?”
“모르지.”
“우리가 먼저 도착한 것은 아닐까요?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몇 개월은 걸리는 거린데 말입니다.”
흑야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우며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양 제국 간의 협상단이 그곳에서 협상을 한다고 들었는데, 요란 제국의 전투부대가 케논 산맥에 먼저 들어섰다고 하더군. 자칫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야 뭐, 소문의 그 사람들만 확인하면 그뿐 아닙니까? 솔직히 전쟁에 대한 걱정 따윈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혁련소의 다소 염세적인 대답에 흑야가 그를 돌아보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영지민들이다. 그래도 걱정되지 않는다니, 너답지 않군.”
혁련소가 쓴웃음을 지으며 흑야를 마주보았다.
“그냥 속마음이 그렇단 말이지요.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만사를 제쳐두고 영지로 달려가겠지요. 물론 아버지와 숙부들을 만난다면 달라지겠지만…….”
혁련소는 아련한 눈빛을 품고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아련함에 흑야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앞부분이 뾰족하게 생긴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강을 타고 내려갔다. 선원들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곧 있으면 케논 산맥의 초입에 위치한 작은 포구에 다다른다.
그곳은 흉맹한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다. 제법 이곳을 오갔던 선원들은 혹시 모를 몬스터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무기들을 챙겼다.
작은 선박치고는 트롤도 한 방에 보낸다는 자이언트 에로우(거대한 화살)까지 갖추고 있었다. 마침 선원들의 움직임을 흘긋 쳐다보던 흑야가 자이언트 에로우를 보고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냈다.
“후후! 저걸 맞을 몬스터가 있을까?”
“글쎄요. 움직임이 둔한 트롤이나 오우거는 충분히 맞힐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맞으면 그대로 즉사가 될 테니 꽤나 든든한 무기죠. 물론 오우거는 제외겠지요. 그 두꺼운 가죽을 뚫어내지는 못할 테니 말입니다.”
“끝부분에 강기를 두른다면 오우거도 한 방에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하! 그거야 당연하죠. 하지만 저렇게 큰 화살에 강기를 어떻게 두른단 말입니까?”
“방법이야 찾아보면 있을 거다.”
혁련소가 눈을 반짝이며 흑야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기에 관심을 보이시네요?”
“후후! 그냥 심심해서…….”
“숙부야 맨몸으로도 오우거를 보내지 않습니까? 어울리지 않습니다.”
혁련소의 그 같은 말에 배 위의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흑야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거, 미쳐도 제대로 미친 작자들이군.”
“그러게. 오우거를 맨몸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제국의 초인들이라면 모를까.”
“냅두게. 저렇게 객기를 부리다가 오우거는 고사하고 오크에게 잡혀 죽은 자들이 한둘인가. 쯧
속삭이는 음성들이 모조리 둘의 귓속으로 들렸다.
둘은 쓴웃음을 짓고는 이내 시선을 케논 산맥으로 던졌다.
* * *
두두두!
레이나공주 일행과 헤어진 혁련천후 일행은 거의 매일을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꽤나 먼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라이트 마법이 걸린 말에다 자신들의 내공까지 심었으니 그 속도와 지구력은 가히 상상 속의 유니콘에 필적할 만했다.
일행은 인구 수천의 소도시로 접어들었다.
낡은 옷가지와 이동에 필요한 소품들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선두는 써튼의 몫이었다.
그는 꽤나 밝은 표정으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동안 이동하면서 써튼은 혁련천후 일행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라 여겼던 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그들이 살인을 하거나, 심지어 동물들을 죽이는 것조차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번에 걸쳐 검문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을 하인 대하듯 한 병사들을 해치지 않았다. 드래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진천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마법사라고 여겼다.
일행이 하나같이 강력한 이유도 그가 마법으로 힘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했다. 종종 전설에 그러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아무튼 인간으로 여겨지자 써튼은 그들을 대함에 있어 조금씩 친밀감이 붙기 시작했다. 물론 북궁천소와 왕전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만약 생김새만으로 서열을 매긴다면 단연 둘은 대륙최강에 들 것이다.
써튼이 뒤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옷을 파는 상점이 있습니다. 이곳으로 가시지요.”
“괜찮은 술집은 없냐?”
“당연히 있습지요. 저만 따라오십시오.”
왕전의 물음에 환하게 대답한 써튼은 일행들을 번잡한 중심도로로 안내했다.
중소도시였지만 중심지는 꽤나 화려했다. 온갖 식당들과 술집이 오가는 행인들을 유혹하며 자리 잡고 있었는데, 왕전과 북궁천소의 눈길은 오직 술집을 향하고만 있었다.
도시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자 모두는 말에서 내려 걸어야만 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원래 이렇게 붐비는 곳이 아닌데…….”
써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흑마법사 역시 같은 표정이다. 그때 써튼이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무슨 일이냐?”
그것을 본 조윤이 물었다. 황급히 몸을 돌린 써튼이 뒤로 돌아가라는 손짓을 하며 되돌아 걸었다.
“이 자식이! 무슨 일이냐니까?”
왕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써튼을 험악하게 노려보았음에도 써튼은 연신 손짓을 하며 뒤로 미는 시늉까지 했다.
“테세우드 공작가의 기사들입니다.”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예? 그, 그게…….”
“그놈들이 왜?”
마법사가 말을 더듬으며 머뭇거리자 북궁천소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것을 본 써튼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체포령 때문입니다. 테세우드 공작께서 체포령을 내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담대소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왕전과 북궁천소를 말렸다.
“그만 해. 우리를 걱정해서 그런 것 아니냐.”
혁련천후의 눈가에 슬쩍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써튼과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뒤쪽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둘에게 시선을 던지며 담담한 투로 물었다.
“우리를 걱정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혁련천후는 말없이 둘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들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진심이었다. 써튼은 혹시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고개를 자라처럼 움츠렸다.
“우리가 저들보다 약하다고 보느냐?”
“절대 아닙니다!”
“그럼 왜 우릴 걱정해 주는 거지?”
“그냥…….”
써튼은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이유는 물론 테세우드 공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이 비록 마법에 의해 순간순간 강력해지기는 하지만 테세우드 공작은 제국의 초인이다. 그의 가신과 적으로 돌아선다면 테세우드 공작과 적이 되는 것이다.
써튼은 그것을 염려한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간다.”
“어! 주공!”
왕전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담대소천과 조윤 등은 혁련천후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웃는 얼굴로 걸음을 돌렸다. 진천이 왕전과 북궁천소를 보며 얼른 돌아가자는 시늉까지 하자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행의 뒤를 따랐다.
* * *
탁!
술잔을 내려놓는 혁련천후의 손길이 유달리 경쾌하게 느껴졌다.
“이름이 뭐지?”
그는 마법사를 보며 물었다.
지금껏 모두는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묻지도 않았고, 또 알 필요도 없었던 까닭이다. 마법사는 여전히 그를 두려워했기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우드라고 합니다.”
“부르기 편한 이름이군.”
그가 술병을 들어 우드에게 내밀었다. 우드는 재빨리 두 손으로 술잔을 들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독한 럼주가 술잔에 가득 채워졌다.
“마셔.”
우드는 단숨에 그것을 마셔버렸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장까지 짜릿하게 자극해 오자 우드는 그만 사레에 걸렸다.
“콜록! 컥!”
“마법사는 술도 잘해야지.”
조윤이 슬쩍 우드의 등을 손가락으로 툭 쳐주자 거짓말처럼 사레가 사라졌다.
써튼도 술을 받고는 한입에 마셨다. 술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써튼이라 오히려 입맛을 다시다가 북궁천소의 고리눈을 보고는 얼른 술잔을 내려놓았다.
담대소천이 둘에게 물었다.
“며칠 정도 남았느냐?”
“요즘 같은 속도로 간다면 7일 정도면 가능합니다.”
“흠! 제법 빨리 왔군. 야! 인마! 네 덕분이다.”
왕전이 우드를 보며 거칠게 말했다.
고맙다는 표현이었지만 우드에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협박성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때 진천이 묘한 표정으로 우드를 쳐다보았다. 우드는 그가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자 내심 바짝 긴장했다. 여전히 우드는 모두가 두렵고 낯선 존재였다.
“왜 그랬지?”
진천의 뜬금없는 질문에 우드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진천이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곳 대륙에 우리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건 우리도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검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우리를 몰라보더군. 변장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
모두가 우드를 응시했다.
“가끔 묘한 기운이 육신을 감싼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지. 그 기운 때문에 병사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물론 그 기운의 주인공은 당연히 너겠지?”
그 말에 써튼도 놀랍다는 표정으로 우드를 쳐다보았다.
조윤이 물었다.
“그것도 우리를 위해서 한 일이냐?”
“그렇습니다.”
“우린 네게 잘해준 적이 없다. 더욱이 너와 같은 복장을 한 마법사라는 놈들을 싫어하는 것 또한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우리를 보호하려고 드는 거지?”
우드가 갑자기 독한 럼주를 잔에 붓더니 그대로 들이켰다. 얼굴이 시뻘게지면서도 다시 한잔을 부어 더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엔 그냥 무섭기만 했습니다. 언제 우리를 죽일지 몰라, 매일 밤을 두려움에 떨면서 지냈습니다. 도망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다 잡히면 당장 죽을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레이나 공주님과 동행할 때 숲 속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을 끊은 써튼이 혁련천후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우드가 말을 이었다.
“아드님 때문에 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혁련천후가 고개를 들어 우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게 왜 이유가 되는 것이냐?”
갑자기 싸늘하게 변한 혁련천후의 음성에 둘은 내심 당황했다. 주변에 광포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둘은 사색이 되었다.
대답은 써튼이 대신했다.
“우드 경도 몇 년 전에 아드님을 잃으셨습니다.”
“……!”
“국경지역에 여행을 가셨다가 마침 그곳에 수련을 왔던 제국의 마법사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때 그만 실수로 우드 경의 아드님이 마법에 휩쓸려 소멸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제국의 판관에게 마법사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시다가 저의 영지로 좌천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와 인연이 되었고 지금껏 보잘것없는 제 영지에서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흑마법사가 될 필요도 없었고 지금쯤 홀베른 공국에서 귀족으로 사셨을 텐데…….”
“소멸이라면 죽은 것인가?”
“확신할 순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우드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도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이 피어올랐다.
다시 주변 공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은 느닷없는 공기변화에 목을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마셔!”
우드는 그가 따른 술을 다시 마셨다.
한 잔, 두 잔으로 이어진 술잔은 다섯 잔째에 이르러 우드가 정신을 잃고 탁자에 고개를 박으면서 끝났다.
* * *
“으……!”
잠에서 깨어난 우드는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머리가 해머로 맞은 듯,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속은 독약을 마신 것처럼 뒤틀리고 쓰렸다.
모두가 어젯밤에 마신 술 때문이다.
덜컥!
문이 열리며 써튼이 들어섰다.
“죽을 맛이지요?”
“물, 물 좀…….”
“그럴 줄 알고 여기 마법으로 얼린 시원한 냉수를 가져왔지요.”
써튼이 은으로 만들어진 물잔을 내밀었다.
우드를 대하는 써튼이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 밤, 우드의 신분을 밝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우드가 써튼 영지의 일개 마법사로만 행동했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복수를 위해 흑마법사로 돌아선 우드다.
그것이 알려지면 그는 모든 백마법사들의 적이 된다. 당연히 그 대가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흑과 백,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마법사의 세계에서 적을 살려주는 아량이 마법사들에겐 전혀 없었다.
벌컥벌컥!
물을 마신 우드는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흔들리며 하늘이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써튼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니 술을 드시더니 마법도 잊어버리신 겁니까? 치료마법 한 방이면 될 것을…….”
“응! 그렇지!”
우드가 벌떡 일어서며 손뼉을 쳤다.
팍!
우드의 전신에서 독한 주향이 수증기로 화해 뿜어졌다. 마법치료의 효과는 대번에 두통과 메스꺼움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드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써튼에게 물었다.
“그분들은 뭐 하시는가?”
우드의 말투도 바뀌었다.
“식당에 계십니다. 서두르세요.”
“얼른 가지!”
둘은 빠르게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약간의 물품을 구입하고는 다시 케논 산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우드가 전과는 다르게 제법 활기에 넘쳤다.
확연히 달라진 그의 모습에 모두는 가볍게 웃어야만 했다.
* * *
로드브릿지라는 도시의 입구에서 모두는 걸음을 멈추고 써튼만이 도시로 들어갔다.
그간의 정보를 알아보려고 들어갔던 써튼은 30분 후에 돌아왔다. 써튼의 얼굴 표정이 꽤나 어둡자 모두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큰일 났습니다. 제국 간에 전쟁이 곧 발발할 듯하답니다!”
“전쟁?”
“케논 산맥에 요란 제국의 전투부대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때문에 케이론 제국에서 그들에게 경고문을 보냈다고 하는데, 지금껏 그들이 그곳에서 철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쪽에서도 군사를 보냈다고 하더냐?”
써튼이 다소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1기병여단이 케논 산맥으로 출진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 테세우드 공작가의 근위대들도 그곳으로 향할 것이라 했습니다.”
“기병여단이라면 전에 만났던 그자들이군요.”
조윤이 고개를 돌려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써튼의 말을 듣고 있던 그는 전쟁이 대수냐는 표정으로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우린 그 아이들의 흔적만 찾아보면 그뿐이다. 전쟁 따윈 우리완 상관없는 일이지.”
그가 말을 몰아 서서히 속도를 높이자 모두는 뒤를 따랐다.
전쟁의 기운은 그들이 지나치는 도시마다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케논 산맥이 가까워지면서 모든 도시는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는데, 가는 곳마다 북쪽으로 향하는 병사들의 행렬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통제 때문에 일행은 길을 버리고 숲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속도는 무척이나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간혹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재미로 모두는 지루함을 달랬다.
* * *
간신히 본진으로 들어선 베린스 공작은 마법방어막 밖에서 허공을 배회하는 악마 같은 존재를 바라보면서 이를 갈았다.
“교활한 놈! 결계를 넘어서지 않다니…….”
결계를 넘어서면 그를 잡을 비장의 수가 있었다.
평소부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준비해 놓았던 블러드 에로우가 그것이었다. 수천이 동시에 실드를 전문적으로 뚫어내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화살을 쏘고 그 화살에 마법병단의 모든 마나를 모조리 심는 방법으로, 드래곤도 반쯤 죽여 놓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그였다.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지만 워낙 넓은 범위로 펼쳐지는 탓에 어지간한 존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요란 제국만의 특수공격기술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발록을 축소시켜 놓은 듯, 생겨먹은 저 악마 같은 존재는 결계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서 연신 채찍질을 해대고 있었다.
쐐액!
수많은 화살들이 허공을 찢으며 발사되었다.
“깍!”
따다다다당!
그러나 접근하기도 전에 모조리 튕겨 나갔다.
채찍에서 발출된 화염이 결계 근처에 세워진 건물들에게 떨어지자 주변은 이내 뜨거운 불줄기가 솟구치며 불바다로 변했다.
히히힝!
전마들이 이리저리 날뛰며 거품을 물었다. 날뛰던 전마들에게 화염이 떨어지며 떼죽음을 당하자 베린스 공작의 눈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준비해라!”
“각하! 사정거리 밖입니다!”
“아니다! 소수만 근처까지 접근하여 놈의 육신을 노려라!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 서둘러라!”
소리아노가 황급히 뒤로 뛰어가더니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과 백여 명의 궁병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서 놈을 맞춰야 한다! 여기서 두려움을 주지 못하면 놈은 절대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들과 궁병들이 눈에 힘을 주고는 은밀하게 결계 쪽으로 이동했다.
“화살을 퍼부어라!”
베린스 공작은 모든 병사들에게 화살을 쏠 것을 명령했다. 이동하는 자들이 발각되는 것을 감추기 위한 엄호사격이었다. 수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새카맣게 덮으며 날아갔다.
따다다당!
“깔깔! 어림없다!”
소용없었다.
오히려 강력한 반탄력에 되돌아온 화살들이 병사들을 덮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베린스 공작은 초조했다.
‘강한 존재일수록 몸을 아끼는 법이다. 여기서 성공하지 못하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는 은밀하게 이동하는 마법사와 궁병들을 주시했다.
백 명의 궁병들은 특수한 물체로 제작된 화살을 지니고 있었는데, 와이번의 가죽도 관통시키는 대단한 위력의 화살이다.
악마 같은 존재, 카루가와 마법사들 간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 * *
“너희들이 죽인 몬스터들의 복수를 할 거야! 덤벼! 전부 다 죽여주겠어!”
거침이 없었다.
날아오는 화살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육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마음 놓고 화염을 발출했다.
“깔깔! 응!”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트리며 주변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던 존재가 어느 순간, 모든 행동을 뚝 멈추었다.
허공에 뜬 채로 그는 남쪽으로 시선을 던져놓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깍! 마계의 기운이야. 너무 강한 마계의 기운이야…….’
남쪽에서 가공할 만한 기운이 전해졌다.
마계의 황족들만이 지니는 강력한 마기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그의 육신이 더 높은 공간으로 올라갔다. 강력한 마법을 동공에 운용하자 엄청나게 먼 거리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이잖아!”
어느새 하얗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놀람의 기운이 어렸다.
자신을 자극했던 기운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시커먼 머릿결에 역시 시커먼 옷을 걸친 사내 두 명이 케논 산맥의 능선을 타고 오르는 것이 그의 눈에 잡혔다.
“이거 말이 돼? 어떻게 인간이 저런 강력한 마기를 지닐 수 있는 거지?”
날카로운 인상에 허리에 장검을 두른 사내의 시선이 마침 자신을 향하지 그는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뒤쪽으로 날아갈 뻔했다.
“카악! 설마 저 거리에서 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어림없어! 인간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해!”
두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가만히 떠 있는 모습은 마치 귀여운 아이처럼 보였다. 누군가 보았다면 조금 전까지 그가 했던 모든 행동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말없이 두 사내를 주시하던 그는 이내 시선을 베린스 공작의 주둔지로 돌렸다.
그때였다.
땅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순식간에 그의 코앞에 빛을 품은 화살들이 쇄도해 들었다. 순간 하얗게 변했던 눈동자가 급격히 커지면서 비명을 쏟아냈다.
“캬악!”
퍼퍼퍼퍽!
* * *
“성공이다!”
베린스 공작이 그 자리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던 탓이다. 그는 검을 뽑아 들고 마법사들과 궁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추락하면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볼 셈이었다.
“카악!”
허공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시퍼런 녹색 선혈이 후드득 대지로 떨어져 마법사들의 로브를 더럽혔다. 당장에라도 추락할 듯 휘청거렸다. 그러나 베린스 공작의 바람과는 달리 고통스러운 몸짓을 보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젠장!”
베린스 공작이 발을 구르며 안타깝다는 몸짓을 보였다.
죽일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에 그는 한참을 그대로 선 채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존재에다 무지막지한 힘을 보유했던 존재, 베린스 공작은 그에게 입은 피해보다는 잡을 수도 있었던 그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각하! 군수품창고가 모조리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리아노의 목소리에 그제야 베린스 공작은 시선을 허공에서 거두었다.
소란스러운 장내상황이 그대로 전해진다. 마법사들은 치솟는 불길을 잡느라 여념이 없었고 기사들은 죽은 병사들과 부상당한 병사들을 따로 나누는 작업으로 분주했다.
“각하! 통신병과의 통신석들이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베린스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통신석이 없다면 자신들은 완전히 고립되는 상황에 처한다. 그는 잠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각하! 명을 내려주십시오. 각하!”
소리아노의 말에도 베린스 공작은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서 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공황!
그렇다. 베린스 공작은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지금껏 이러한 경우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였다. 패배를 모르고 살아온 그였고 제국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떠받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상위귀족의 삶을 살아왔던 그였기에 카루가, 하나에게 당한 참혹한 피해는 그의 머릿속을 심하게 흔들어놓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