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15화 (15/55)

제7장

해후

테세우드 공작은 사령실에서 예하부대장들의 보고를 받았다.

척후를 담당했던 부대장의 보고가 끝나자 그는 차갑게 웃으며 찻잔을 입으러 가져갔다.

“상당한 규모의 전투 흔적을 보았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수백이 넘어가는 기사들의 시신이 산맥의 가운데에 자리한 평원에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거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자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커다란 덩치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그는 바로 레이놀드 백작이었다. 용맹스러운 기운을 풀풀 풍겨내는 모습이 술에 절었을 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어떤 세력이지? 요란 제국의 전투부대를 겁내지 않을 정도의 세력이 이곳에 있었나?”

“척후를 나갔던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흑안의 마검사로 추정되는 자들을 보았답니다.”

테세우드 공작의 눈동자에 섬광이 돌았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자들이 곤경에 처한 아군을 구해줬다고 합니다. 어쩌면 요란 제국의 전투부대와 싸운 것도 그들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우우웅!

그때 사령실의 가운데 박혀 있는 통신석에 불이 들어왔다. 레이놀드 백작이 재빨리 통신석의 천을 걷었다.

“각하! 적진 근처에서 적, 마법병단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엄청난 마나의 흐름으로 보아 대규모 병력으로 예상됩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테세우드 공작은 굳은 얼굴로 통신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고가 이어졌다. 이번엔 다른 부대에서 보낸 통신이었다.

“적, 사령관인 케이시 공작이 수천의 기마병들을 이끌고 움직였습니다. 이동방향이 아군의 선발부대가 포진한 곳으로 보입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 보고에 테세우드 공작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숙적이 움직인 것이다.

“병력의 수는?”

“사천 정도로 보입니다!”

“사천? 고작 사천을 이끌고 놈이 직접 움직였단 말이냐?”

“틀림없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각하!”

통신석 안의 부대장은 무척 다급해 보였다. 테세우드 공작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는 레이놀드 백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출전준비를 하여라! 내가 직접 출전하겠다!”

“예! 각하!”

모두가 빠르게 사령실을 벗어났다.

“아군이 갈 때까지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방어에만 주력해라! 말론!”

“알겠습니다! 각하!”

팍!

통신석이 꺼졌다.

테세우드 공작은 서둘러 갑주와 흉갑을 착용하고 검을 들었다. 그의 부관들이 부대기를 들고 그를 따랐다.

* * *

혁련천후는 낙담했다.

막연한 방법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서 둘의 흔적을 조사했지만 전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주공! 저쪽에도 없습니다.”

진천이 다가오며 머리를 긁적였다. 좌측을 살폈던 사공진무도 역시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주공!”

“반드시 만나게 될 겁니다.”

둘이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가보자.”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우울해 보이자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천천히 평원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진천의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환술을 펼친 것이다. 사공진무는 눈을 감고 걸었다. 그 역시 기이한 술법을 펼친 상태였다.

울창한 숲은 태양빛이 들어오지 못할 만큼 빽빽한 밀도를 자랑했다. 곳곳에 흉측한 맹수들이 그들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지만 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완전히 맹수들 천지구나.”

“몬스터라는 것들이겠지. 하여튼 괴상한 세상이야. 이곳은…….”

사공진무와 진천은 잠시 환술과 술법을 거두고 걸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급격한 내공의 소모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식과 시전을 번갈아 해야만 했다.

“해골이다!”

진천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자신들의 이동방향 앞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들이 몇 구가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유심히 살펴보던 사공진무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뼈에 아무런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는 앞을 걸어가는 혁련천후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늘따라 유달리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사공진무는 다시 술법을 펼쳤다.

오감을 극한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그 술법은 그만의 비기였는데, 일단 펼치면 짐승보다 더한 예민함을 지니게 된다. 진천도 환술을 다시 펼쳤다.

혹시 모를 천살강기와 흑야의 암흑마기의 흔적을 포착하기 위해서다. 운이 좋아 죽은 시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여지없이 그의 환술에 걸려들 것이다.

물론 막연한 바람이다.

그때 진천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황금색이 더욱 짙어지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앞서 걷던 혁련천후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사공진무도 진천을 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대단하다…….”

“엄청난 힘이 움직이고 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야.”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진천이다.

그러나 지금의 진천은 놀람을 넘어서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혁련천후가 진천과 사공진무에게로 걸어왔다.

“주공! 저 밑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인가?”

“그건… 윽!”

진천과 사공진무가 머리를 감싸며 환술과 술법을 풀었다.

엄청난 두통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혁련천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산의 능선 쪽으로 던져졌다.

그도 느낀 것이다. 술법이나 환술이 아닌 순수한 상태에서 거의 같은 시각에 느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세상에 이런 기운을 지닌 존재가 있었나…….”

강력했다.

내공에서 발출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힘인지는 몰라도 느껴지는 기운은 전율이 생겨날 만큼 강력했다.

그때 그의 눈에 수백 수천의 폭발이 잡혔다.

워낙에 먼 거리여서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는 없었지만 연속적으로 빛의 폭발이 상공에서 이어졌다. 진천과 사공진무도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게 뭐지?”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키다니, 대단한 공격방법이다.”

“힘의 주인공이 만들어낸 것일까?”

“글쎄…….”

둘은 굳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거리로 보면 어림잡아 이 세상의 단위로 10킬로미터는 되어 보였다. 물론 폭발이 나타난 상공지점은 그보다 가깝다.

진천이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어!’

진천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 사공진무도 마침 혁련천후를 돌아보다가 진천과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부들부들.

그가 떨고 있었다.

정마대전의 가운데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가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를 느낀 진천은 급히 환술을 극성으로 펼쳤다.

“주공!”

진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쾅!

혁련천후의 육신이 바닥을 차고 능선으로 쏘아졌다. 사공진무는 그와 진천을 번갈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했다. 진천이 환술을 풀고 소리쳤다.

“천살강기야! 천살강기의 기운이 저곳에서 느껴져! 서둘러!”

“정말이냐!”

“그래! 정말이다!”

쾅!

* * *

두두두두…….

라이트 마법을 두른 전마들은 가파른 길을 평지처럼 달렸다. 선두에 백색의 전마에 몸을 실은 테세우드 공작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마치 자연의 일부인 양, 전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노인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말을 타지 않고서 맨몸으로 허공을 날고 있었다.

요란 제국의 대마법사, 율튼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는 바로 케이론제국의 대마법사이자 테세우드 공작의 사부이며 수하이기도 인물이었다. 노인의 눈동자가 순간, 섬뜩한 기운으로 번득였다.

“놈이 움직였습니다!”

“놈이라면, 율튼, 그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기운은 분명 놈의 것입니다.”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국전쟁 때나 나타날 법한 대마법사 율튼이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눈빛을 차갑게 고쳤다.

자신의 옆에도 결코 그에 못지않은 대마법사가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믿었다. 자신의 사부이며 동료이고 수하이기도 한 그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두두두두!

기마들의 속도는 상상을 불허했다.

모두가 마법병단의 마법 덕분이다. 가장 뒤쪽에 마법병단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연신 주문을 외우며 사천의 전마들에게 지속적으로 마법을 걸고 있었다.

“마법병단은 수위를 높여라!”

테세우드 공작이 소리치자 전마들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전마들이 지나가는 주변은 폭풍이 몰아쳤다. 나무며 돌들이 사방으로 솟구치며 자욱한 먼지구름을 만들어냈다.

비록 사천에 불과한 수였지만 이들은 테세우드 공작이 직접 수련시킨 최정예기사들로 제국 최강의 집단전 돌격부대였다.

레이놀드 백작이 부대장이었다.

두두두두…….

우측에 우뚝 솟아 있는 절벽을 돌아서자 대마법사 쉐인은 요란 제국의 대마법사 율튼의 힘에다 다른 기운까지 느껴지자 흠칫했다.

‘이건 마계의 기운!’

놀람을 모르는 대마법사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그것만으로 뭔가를 짐작한 테세우드 공작이 물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마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것도 상당한 힘이…….”

“마계의 기운이라니요? 마계의 존재들이 강림했다는 말은 없었지 않습니까?”

“이상한 일입니다.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의 강림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니…….”

마계나 천계의 존재들이 강림하면 신전의 신관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이 강림하면 신관들이 가장 먼저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대마법사에게도 우선적으로 소식이 들어간다. 그들이 있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쉐인은 전혀 그러한 소식을 접한 적이 없었다.

대마법사 쉐인이 테세우드 공작을 돌아보았다. 그의 의중을 짐작한 테세우드 공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로 갑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테세우드 공작이 쉐인을 쳐다보았다. 그도 불길함을 느꼈을까? 순간적으로 테세우드 공작의 눈동자가 출렁거렸다.

그러나 그는 내려진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 * *

서걱!

섬광이 번득이자 피가 튀며 투구가 하늘로 솟구쳤다. 투구안의 임자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갔다.

쾅!

마법병단의 무지막지한 장거리 공격이 대지를 흔들었다.

“깍! 죽어!”

카루가의 뾰족한 음성은 더 이상 기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존재들에 대한 공포감이 모두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5천에 달하는 기사들이 단둘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쩔쩔매는 정도가 아니었다. 폭풍처럼 움직이는 그들을 잡을 방도가 없었다.

죽어가는 기사들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전장의 외곽에서 지켜보던 케이시 공작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마법사 율튼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각하! 흑안의 마검사들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분명 그들의 동공색이 푸른색이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기사들이 겁에 질린 상황에서 잘못 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들이 흑안의 마검사가 아니라면 대륙에 저 정도로 강한 자들은 초인들과 크로우 기사단의 마스터들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마계의 존재들이 아닌 것은 확실하오?”

율튼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대답했다.

그의 탐스러운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아닙니다. 순수한 인간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자들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마법왜곡장안에서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니…….”

그랬다.

지금 율튼은 마법왜곡장을 펼쳐놓은 상태였다.

오직 적에게만 발현되는 그것은 공간 안의 중력을 수배로 높여 적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최상위마법이었다. 어지간한 마스터들도 그 안에 들면 움직임이 수배는 느려지고 금방 체력이 고갈될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왜곡장이다.

하지만 지금 저 둘은 반 시간 동안 거침없이 기사들의 생명을 신의 품속으로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지막지한 화염을 뿜어내던 카루가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대량살상이 가능했던 화염공격이 거의 무력화되자 기사들은 둘에게 집중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소용없었다.

“율튼 공! 놈을 죽여 주시오!”

케이시 공작은 카루가를 가리켰다.

눈에 띄게 움직임이 더뎌진 카루가 만큼은 쉽게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애초에 엄청난 피해를 준 그를 죽이기 위해 직접 출전한 터였다. 뜻밖의 인물들에게 더한 피해를 입고는 있었지만 카루가 만큼은 죽이고자 작정한 것이다.

대마법사 율튼이 전장으로 날아갔다.

* * *

“숙부! 피해야겠습니다! 꺼림칙한 놈이 접근합니다!”

혁련소은 허공을 날아오는 율튼을 보고는 흑야에게 소리쳤다. 흑야도 율튼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주변이 보이지 않는 기운으로 차단되어 있다. 뚫는 게 쉽지가 않아.”

흑야는 덤벼드는 기사를 베어버리고는 혁련소의 곁으로 날아왔다.

마법병단 전체가 그들의 주변을 결계로서 차단하고 있었다. 물론 기사들은 적용대상에서 제외였다. 오직 적에게만 적용되는 요란 제국의 마법은 그래서 강력했다.

“저자의 마법 때문에 몇 배의 중력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다. 이 상태에서 또 다른 상위마법이 펼쳐지면 꽤나 힘들겠어.”

흑야는 날아오는 율튼을 노려보며 살기를 드리웠다.

자신들과 싸우는 수천의 기사들보다 그 하나가 더 꺼림칙했다. 카루가의 반응도 한몫했다. 무서움을 몰랐던 카루가가 그를 보자마자 두려운 기색을 보인다.

“저 인간은 대마법사! 피해야 해!”

“대마법사?”

“맞아! 분명 대마법사가 맞아. 저기 주변에 흐르는 마나가 안 보여? 저건 6서클을 넘어가는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엄청난 힘이란 말이야.”

급박한 상황에서도 카루가의 음성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들렸다.

둘은 다가오는 율튼이 대마법사라는 카루가의 말에 얼굴이 돌처럼 경직되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바로 대마법사들이었다.

물론 일대일이라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마법사들은 언제나 상위마법사들을 몰고 다닌다. 게다가 그 주변은 항상 마스터들이 철통 같은 방어진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율튼의 주변은 백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과 강력한 기운을 발산하는 기사들 몇이 함께 날아오고 있었다.

흑야는 순간 고민했다. 그는 혁련소를 흘긋거렸다.

‘일단 이 아이만이라도 탈출시켜야 한다!’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다. 둘이 동시에 탈출하기엔 확률이 낮았다. 보이지 않은 강력한 차단막 때문이다. 그것을 뚫기 위해 둘이 동시에 힘을 소진한다면 다가오는 마법사의 공격에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자신이 방어막을 뚫고 그곳으로 혁련소를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쾅!

달려드는 기사들에게 강력한 검법을 퍼부은 흑야는 혁련소에게 따라오라는 눈빛을 주고는 높은 지대로 몸을 날렸다. 그곳이 방어막의 가장자리였고 뚫어만 낸다면 곧장 숲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도주하기가 용이한 장소였다.

물론 혁련소를 위한 선택이었다.

혁련소는 흑야의 속내를 모른 채, 검을 휘두르며 뒤를 쫓았다. 기진맥진한 카루가는 그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화염을 뿜어내며 기사들의 접근을 막아냈다.

“카루가! 꽉 잡아!”

“알았어!”

흑야가 질주하는 공간이 좌우로 벌어졌다.

기사들이 두려움에 덤벼들지 못하고 길을 내준 것이다.

“공격해라!”

허공에서 율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기사들은 주춤거리며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흑야의 오른손에 쥐어진 가늘고 긴 검은 이미 그들에겐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들은 똑똑히 보았었다. 실드가 쳐진 검과 방패, 갑주를 동시에 베어버리는 그 가공할 장면들을…….

율튼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흑야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다. 방어막을 뚫어내고 숲으로 들어가면 둘의 가공할 능력을 감안했을 때, 자신이라도 찾아내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의 육신이 빛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창의 형태로 변해갔다. 율튼은 혁련소의 등에 매달린 카루가를 노렸다. 마계의 기운이 풀풀 느껴지는 그만이라도 무조건 죽여야 했다.

그의 정체를 몰랐지만 저 정도의 기운이라면 마계의 상위종족이 분명할 것이라 확신했다. 백마법사들의 영원한 숙적이 바로 마계의 종족들이다.

그들과 계약한 흑마법사들로 인해 그 얼마나 많은 백마법사들이 죽어갔던가. 그들에 대한 살심은 백마법사들의 본능이었다.

“가라!”

대마법사 율튼의 손이 앞으로 쭉 펼쳐졌다.

동시에 공기를 찢어내는 소음과 함께 마나로 만들어진 창이 엄청난 속도로 카루가를 향해 날아갔다.

* * *

혁련천후는 달렸다.

점점 아들의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심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바람처럼 질주하는 그의 머릿속은 아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의 영상으로 가득했다.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넌, 그들과 다른 운명으로 태어났다.’

‘그 운명이 도대체 뭡니까? 왜 아버지의 운명을 제가 이어받아야 합니까? 싫습니다. 천하제일도, 신마성의 성주도 다 싫습니다!’

성을 나가기 전날, 자신에게 소리치던 아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더 이상의 영상도, 아들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주공! 천살강기와 엄청난 마법의 힘이 뒤섞였습니다!”

진천이 소리쳤다.

그도 아들의 기운과 한데 섞인 묘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법사의 기운임은 모르고 있었다. 환술을 지닌 진천이 그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숲을 빠져나오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끊임없이 늘어선 엄청난 수의 군막들, 그리고 평원을 가득 메운 채 풀을 뜯고 있는 수만 마리의 전마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십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어딘가를 보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고함을 지르는 자, 환호성을 보내는 자, 그리고 안타까움에 탄식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들은 산맥의 능선으로 몸을 향하고 있었는데, 혁련천후도 번득이는 기운들로 난무하는 산의 능선으로 시선을 던졌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보였다.

그곳에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흑야가 있었다.

“저곳입니다!”

“소와 흑야 형님입니다!”

진천과 사공진무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러나 해후의 기쁨으로 기뻐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허공을 가득 메우고 날아가는 빛을 두른 화살들, 그리고 거대한 빛의 장창들, 그 모든 것들이 혁련소와 흑야의 육신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스르릉!

혁련천후의 손에 검이 쥐어졌다.

쐐액!

공간을 가르며 수백 발의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놈들의 동료가 나타났다! 공격하라!”

“놈들을 막아서라!”

엄청난 수의 병력들이 좌우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따다다다당!

화살들이 불꽃을 튕기며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그 놀라운 광경에 화살을 날린 병사들이 일순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지독한 섬광이 피어났다.

“길을 뚫어라! 막아서면 모두 죽여라!”

혁련천후의 명이 떨어졌다.

뒤를 따르던 진천과 사공진무의 육신이 급속도로 방향을 선회하며 기사들의 가운데로 떨어졌다.

콰과과광!

폭발이 일어났다.

“으아악!”

“피해라!”

아수라지옥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혁련천후도 혁련소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직선거리를 달리고자 했던 그의 앞으로 인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혁련천후의 앞을 막아선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곳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는 이동방향에 걸려드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비명도 없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죽은 자들이 남긴 육신만이 대지를 핏물로 적셔놓을 뿐이었다.

“으…….”

“인간이 아니다.”

그 용맹하다던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두려움에 몸을 뒤로 물렸다.

십만의 대병력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이 생겨났다. 간혹 용기를 내어 덤벼드는 자들이 있었지만 어김없이 목이 날아갔다.

* * *

두두두두…….

테세우드 공작의 돌격부대는 케논 산맥을 우회하여 적진의 가까운 곳으로 질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멀리서 적진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손을 들어 부대를 세웠다.

대마법사 쉐인이 다가왔다.

“저쪽을 보십시오!”

그는 마법경을 테세우드 공작에게 건네며 산맥의 우측 능선을 가리켰다. 테세우드 공작이 마법경을 눈으로 가져갔다. 아주 먼 곳까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것은 쉐인이 직접 개발한 것이다.

“놀랍군…….”

테세우드 공작의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마법경을 통해 생생하게 보이는 능선의 전투, 수천에 둘러싸여 검을 휘두르는 두 사내의 모습이 그의 눈에 잡혔다.

놀라웠다.

그 단단한 기사들의 갑주가 검과 함께 칼질 한 번에 종이처럼 잘려나가는 광경에 그는 하마터면 마법경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의 시선이 우측으로 돌아갔다.

“율튼!”

대마법사 율튼의 모습이 보였다.

허공에 떠 있는 그의 육신은 눈부신 광채로 둘러져 있었는데, 그 광채에서 거대한 빛의 장창이 연속적으로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장창이 떨어지자 강력한 폭발이 지상에서 일었다. 보는 것만으로 전율이 일어나는 가공할 공격력에 테세우드 공작의 손이 가는 떨림을 보인다.

“본진과 케이시 공작과의 거리는 고작 10분에 불과한, 상당히 짧은 거립니다. 각하!”

레이놀드 백작이 공격불가의 뜻을 내비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테세우드 공작은 대답을 않고서 마법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마법경이 요란 제국 1군단의 본진으로 돌아갔다.

“저게, 무엇이냐!”

놀람의 연속이다.

십만 대군의 가운데를 질주하는 자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대마법사 쉐인이 하나의 마법경을 더 꺼내어 자신의 눈으로 가져갔다. 탐스러운 백염이 가늘게 떨린다.

“오… 놀랍도다!”

모두가 쉐인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존재인 그가 놀랄 만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이 당연했다. 레이놀드 백작은 자신도 마법경을 통해 그곳을 보고 싶었지만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침을 삼켜야만 했다.

쉐인이 마법경을 레이놀드 백작에게 건네며 테세우드 공작에게 말했다.

“각하! 적의 적은 곧 각하의 편이 아니겠습니까? 적당한 거리에서 저들을 돕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테세우드 공작도 마법경을 눈에서 떼었다.

꽤나 굳어진 얼굴로 묵직하게 말을 받았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끌어들일 만한 자들입니다. 저들들 우리에게로 끌어들인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능력들이 아닙니까?”

테세우드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하나만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도 도움이 아니라 엄청난 전력의 상승을 가져온다. 마법경을 통해서 본 그들의 능력은 대륙의 초인이라는 자들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초인들 중 하나는 자신이다.

“저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들을 어떻게 내가 모를 수가 있지…….”

그랬다.

지금 요란 제국의 본진을 흔들고 있던 자들의 수준이라면 무조건 자신의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게 당연했다.

적이든 아군이든 주요 인물들에 대한 모든 정보는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쉐인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저들이 순수한 인간의 마나만으로 움직인다고 여기십니까? 당연히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마법에 의해 순간적으로 잠력을 격발시켜 능력을 배가시키는 방법을 사용했겠지요. 아마 저들에게 그러한 마법을 심어준 자가 저쪽 어딘가에 은신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자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굳어졌던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쉐인은 테세우드 공작을 보며 다소 의아한 빛을 보였다. 필요 이상으로 그가 긴장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공께서 작전을 짜보십시오! 저들이 다치기 전에 우리가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최대한 가까운 거리까지 은밀하게 접근한 뒤에 제가 마법으로 저들을 돕겠습니다. 각하께선 혹시 모를 적의 저격수들만 막아주시면 됩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테세우드 공작은 명령을 내리기 위해 기병들을 돌아보았다. 그때 그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응!”

마법경을 눈에 대고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떨고 있는 레이놀드 백작을 본 것이다. 담력이 좋아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레이놀드 백작이다. 그는 레이놀드 백작도 요란 제국의 군단을 휘젓고 있는 자들이 자신처럼 순수한 인간의 마나로만 싸운다고 여긴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하고는 가볍게 웃으며 레이놀드 백작의 어깨를 쳤다.

“이봐! 레이놀드! 이동한다!”

“예, 예!”

마법경을 눈에서 떼는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이 참으로 묘하게 구겨져 있음을 본 테세우드 공작은 껄껄 웃고는 말머리를 능선 쪽으로 돌렸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대마법사께서 공격가능한 지점까지 이동한다! 출진!”

전마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놀드 백작도 전마의 엉덩이를 걷어차 속도를 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참으로 묘했다. 마치 정령에 홀린 것처럼 눈의 초점이 다소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보았었다.

요란 제국 1군단의 중심을 가로지르던 셋 중에 가장 선두에서 달려가던 자가 보였던 무지막지한 광경을 말이다.

앞을 막아서던 기사들이 전마와 통째로 하늘로 솟구치며 핏물로 화해 사라져가던 그 광경은 소설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가공할 광경이었다. 어림잡아 10기는 되어 보였다. 핏물로 화해 사라져버린 머릿수가 말이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레이놀드 백작은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며 부대의 앞으로 전마를 몰아갔다. 그는 테세우드 공작과 대마법사 쉐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과연 대단하신 분들이다. 그런 자를 보고서도 담담하시다니…….’

불행히도 레이놀드가 목격한 광경은 테세우드 공작과 대마법사 쉐인은 보지 못했다.

* * *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을 태운 전마는 바람처럼 달렸다.

세 시간 전에 케논 산맥의 초입에 다다른 그녀는 뱃길에서 흑안의 마검사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자들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무작정 케논 산맥의 외곽으로 전마를 몰았다.

두두두!

최고의 혈통을 자랑하는 베인스종마의 속도는 상상을 불허했다.

마법이 실린 전마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리안을 케논 산맥으로 이끌고 있었다. 질주하는 아리안의 머릿속은 무척 복잡했다.

다크 영지의 영주라는 사람의 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눈에 익었었어. 그땐 몰랐지만 분명 언젠가 보았던 사람이야. 틀림없어!’

그를 본 이후로 그의 영상이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았다.

‘찾아야 해! 무조건 그들을 찾아서 알아봐야 해!’

테세우드 공작의 마법사들을 살해한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인물들, 흑발에 흑안을 지녔다는 그들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는 전마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차며 속도를 높였다. 막연한 질주였다. 그들이 이곳으로 갔다는 정보 하나만으로 그녀는 영지까지 포기하고 달려왔다. 하지만 그 막연함에 기대고 싶을 만큼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밝혀야겠다는 욕구가 너무나도 컸다.

거대한 절벽을 돌아가던 그녀가 갑자기 전마의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전마가 앞발을 들고서 질주를 멈췄다.

파파파팍!

그녀가 달려가던 20미터쯤 전방에 수백 발의 화살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챙!

대번에 사나운 기세로 돌변한 그녀는 날카로운 빛으로 화살을 날린 자들을 찾았다. 마나를 운용해 좌우 숲 속까지 기감을 열었지만 걸려드는 것은 짐승들의 기운뿐이었다.

그때 또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며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 더욱 많은 화살들이 그녀의 전방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화살을 응시하던 아리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건 나를 조준해서 발사한 화살이 아니다. 상당히 먼 곳에서 날아온 것들이야.’

그랬다.

화살들이 힘이 없었다.

그녀는 마나를 극도로 끌어올려 다시 주변을 감지했다. 그러자 희미하게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싸우는 소리잖아.’

전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감지되었다.

전마의 속도로 달린다면 금방 도착할 거리였다. 그녀는 순간 갈등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싸움 때문에 시간을 소비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본능은 전투현장으로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제국 최초의 여 마스터가 그녀다.

전투에 대한 호기심은 마스터들의 본능이다.

아리안의 눈에 섬광이 돌았다.

“이랴하!”

전마가 바닥을 박차고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방향은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 곳이었다. 뽑아 든 그녀의 검이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 * *

쾅!

거대한 나무가 박살이 나며 쓰러졌다.

뒤이어 여섯 개의 그림자가 그 자리를 바람처럼 가르고 지나갔다. 담대소천과 왕전 등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박살내며 질주했다.

천살강기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것이 느껴졌다면 자신들의 주인이 싸우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무조건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가장 뒤쪽에 우드가 써튼의 팔을 잡고 달려오고 있었다. 마법의 힘으로 속도를 내었지만 앞을 질주하는 존재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쾅! 우지끈!

박살이 나며 쓰러지는 거목들이 우드와 써튼을 덮쳤지만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우드는 그들을 쫓았다.

“우…….”

써튼은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넋이 반쯤 나간 모습이다.

자신이 수십 번 칼질을 해야만 가능한 거목들이 그들의 손짓 한 번에 그냥 무너져 내린다. 그것도 격타당한 부분은 아예 가루로 변한 채 말이다.

놀랍기는 우드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따르면서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지금 자신들은 상당한 거리를 질주했다. 질주의 이유도 우드는 알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그들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말이 안 돼…….’

질주해 온 거리를 대략 감안하면 거의 수 킬로 미르에 달했다.

그렇다면 그 엄청난 거리에서 기운을 감지했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든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거리였다.

“어! 위험해요!”

“힉!”

잠시 상념에 잠겼던 우드는 거대한 나무가 자신들을 덮쳐오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방향을 틀어 피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앞을 달려가던 존재들과 엄청난 거리로 벌어지자 둘은 낙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으합!”

우드는 생애 최고의 속도로 달렸다.

“주공의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소의 것이다!”

모두가 격동의 빛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조윤이 날카롭게 외쳤다.

“하나의 기운이 줄어들고 있다!”

“소의 것이야! 소가 위험하다!”

스르릉!

달려가며 모두는 자신들의 병기를 뽑아 들었다. 상황은 보지 않아도 짐작되었다. 줄어드는 천살강기의 기운, 자신들의 주인이 그럴 지경에 처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무조건 혁련소가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소중하기는 그도 자신들의 주인과 별반 차이 없다.

* * *

쾅! 쾅! 쾅!

케이시 공작은 뒤쪽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폭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군단의 본영에 피안개가 생겨나고 있었다.

“저게, 뭐다요!”

자신도 모르게 감추고자 했던 사투리가 튀어 나올 정도로 그는 경악했다. 대마법사 율튼의 마법공격을 감상하고 있던 소리아노도 뒤늦게 그 광경을 보았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존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이 전마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며 피를 뿌려댄다.

“이쪽으로 옵니다! 각하!”

케이시 공작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하나가 아니었다.

자신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자의 뒤쪽에 둘이 더 있었다. 피안개는 둘에게서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수하들이 흘린 피로 만들어진 안개였다.

“케이론의 놈들이구나!”

케이시 공작은 이를 갈았다.

그는 케이론 제국의 테세우드 공작이 보낸 자들이라 여겼다. 그 생각을 깨준 것은 다름 아닌 소리아노였다.

“케이론에 저만한 강자는 테세우드, 하나뿐입니다!”

“그렇지! 그럼 저놈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그러는 와중에도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케이시 공작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대마법사 율튼을 찾았다.

마지막 한 방을 위한 거대한 마법공격이 막 지상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율튼과 모든 마법병단의 마법사들이 거대한 마나의 구슬을 만들어 카루가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손을 뻗었다.

콰오오…….

대지를 찢는 굉음이 모두의 귀를 막게 만들었다.

* * *

혁련천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거대한 빛의 구슬이 아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겪었던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이 구슬에 담겨 있음을 깨달은 그는 선천진기까지 끌어올려 바닥을 차고 올랐다.

쾅!

케이시 공작은 자신들의 머리 위를 넘어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소리아노가 기사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기사들이 검을 버리고 석궁을 들었다.

모든 기사들이 자신들의 머리 위를 넘어가는 존재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그러나 그들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개자식들!”

“비켜!”

콰지지직!

진천과 사공진무가 그들을 휩쓸었다.

“우아악!”

파괴적인 기운에 휩쓸린 기사들의 육신이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이 세상에서 오러라고 부르는 검강이 뇌전처럼 번뜩이며 사방을 난무했다.

“으헉!”

소리아노가 엉겁결에 검으로 그들을 베었지만 검과 함께 소리아노의 육신이 대열의 외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케이시 공작은 느닷없는 상황에 경악하면서도 검을 뽑아 자신의 주변을 오러로 둘렀다.

과연 요란 제국 최고의 무인다운 빠른 반응이었다.

진천의 검이 케이시 공작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의 검에 맺힌 푸른색 기운을 본 케이시 공작은 혼신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꽝!

쩌저정!

주변 공간이 기이한 소리를 울리며 요동쳤다. 파생된 기운이 기사들을 덮치자 갑주가 그대로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진천의 머리를 넘어 사공진무가 날아올랐다.

“제법이군! 늙은이!”

사공진무의 검이 케이시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합!”

케이시 공작의 검이 회전을 일으키며 사공진무의 검을 막아냈다. 굉음이 터지며 둘의 육신이 반대방향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케이시 공작의 두 눈은 불신의 빛으로 역력했다.

무슨 말이라도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핏물이 그대로 쏟아질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의 제국의 초인이다.

대륙최강이라는 케이론 제국의 테세우드 공작과도 별 차이가 없는 자신이 정면충돌을 하고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둘씩이나…….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진천과 사공진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엉뚱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멈춰!”

대지를 울리는 고함이 케이시 공작의 뒤쪽에서 터졌다. 케이시 공작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뒤로 돌아갔다. 마나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대마법사 율튼과 마법사들의 전력이 담긴 마나구가 흑안의 마검사로 추정되는 인물들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나구가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던 케이시 공작의 눈동자에 흑발 사내의 영상이 채워졌다. 그는 강력한 마나의 폭풍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또 있었다.

허공에 뜬 마법사들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들.

“저, 저것은……!”

케이시 공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번쩍!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을 둘렀던 방어막이 소멸되며 파생된 기운들이 기사들을 휩쓸었다.

콰과광!

거대한 빛의 폭발이 이어지자 세상은 온통 백색이 되었다.

「흑안의 마검사」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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