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제1장
공작들 간의 전투
레이나 공주는 바깥에서 소란이 일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기사들이 바삐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그녀는 아무나 붙잡고서 물었다.
“출전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출전명령?”
“그렇습니다! 모든 부대에 출전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기사는 허리를 숙이고는 바삐 어디론가 뛰어갔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적이라면 보나마나 요란 제국이다.
‘전쟁이 발발한 것인가?’
군단 전체에 출전명령이 떨어졌다면 적도 그에 상응하는 병력을 몰고 왔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조건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테세우드 공작의 호전성을 감안하면 제국전쟁으로 확전까지 걱정해야만 했다.
‘왜……!’
참담한 심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토록 피했던 제국전쟁이다.
전쟁광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협상을 자원해서 오지 않았던가. 전쟁은 온건적인 정책을 펴왔던 황실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더 나아가 권좌를 강경파들에게 내주게 만들 것이다.
그 강경파의 수장이 테세우드 공작이다.
“마마!”
헤론 후작이 바삐 뛰어오며 그녀를 찾았다.
“전쟁인가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요란 제국 측에서 케이시 공작과 대마법사 율튼이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갑니다.”
레이나 공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들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왔단 말인가요?”
“전령이 그렇게 전해왔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전장으로 가봐야 하니 마마께선 이곳에 계십시오!”
“아니에요! 저도 가겠어요!”
헤론 후작이 놀란 표정으로 만류했다.
“마마! 그곳은 위험합니다!”
“제가 약하지 않음은 후작께서도 아시잖아요. 앞장서세요!”
레이나 공주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헤론 후작은 어쩔 수 없었다. 따라오려는 시녀들을 물리친 레이나 공주는 헤론 후작과 함께 바삐 걸음을 놓았다.
주둔군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돌격부대는 벌써 출전 채비를 끝내고 주둔지의 외곽을 돌아 북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일으킨 먼지가 하늘을 덮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이 합류할 부대를 찾던 레이나 공주 앞으로 강인한 인상의 기사가 전마를 몰아 달려왔다. 고삐를 당겨 전마를 세운 그는 훌쩍 뛰어내리더니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주마마!”
“그대는 이글스여단의 가투소 대장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마마! 저게 마마를 호위하겠습니다. 저희부대와 함께하시지요.”
“고마워요.”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헤론 후작도 적잖이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이글스여단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몇 되지 않는 부대들 중 하나다. 그들이 레이나 공주를 호위한다면 요란 제국과의 전쟁도 그렇지만 난전 중에 혹시 모를 정적들의 암습에서도 레이나 공주를 보다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부탁하네.”
“목숨으로 호위하겠습니다.”
헤론 후작에게 힘주어 말한 가투소는 레이나 공주를 이글스여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헤론 후작은 그녀와 함께하지 못했다. 전시에 그는 별도의 단독부대를 이끌어야 한다. 총 병력, 5천의 기마병단이 그의 직속에 놓이는 것이다.
후작이라는 상위귀족에 걸맞지 않는 소규모 병력이었지만 헤론 후작은 평소부터 그것에 대한 불만은 일절 없었다. 천성적으로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투소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던 레이나 공주가 걸음을 멈추고 헤론 후작을 돌아봤다. 그는 그때까지도 제자리에 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레이나 공주의 눈에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황실에 충성한 대가로 그는 실세인 테세우드 공작과 앙숙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몸조심하세요! 후작!”
레이나 공주의 근심 어린 눈빛을 받은 헤론 후작은 따뜻한 웃음으로 화답한 후, 전마에 몸을 실고서 질풍처럼 자신의 부대로 달려갔다.
* * *
케논 산맥의 능선은 지형이 바뀔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케이시 공작과 대마법사 율튼은 참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은 기사들만 천을 넘어갔다. 전투불능의 중상을 입은 기사들도 수백을 헤아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둘을 참담하게 만든 것은 마법병단의 몰살이었다. 당초 50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케논 산맥으로 왔었는데, 지금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율튼을 포함하여 고작 스물에 불과했다.
카루가를 죽이려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자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스스로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더 싸웠더라면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각하! 서둘러 진영을 전투대형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케이론 제국의 군대가 곧 몰려들 것입니다.”
율튼의 진언에도 케이시 공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각하! 놈들은 잊으십시오. 당장은 테세우드의 맹공을 막아내는 것이 시급합니다.”
“이런 피해를 준 놈들을 어찌 잊겠소.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잡아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소.”
“그 일은 차후, 제가 돕겠습니다. 하오니…….”
율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을 놓친 것은 자신이다. 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아 펼쳤던 미증유의 공격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자가 뛰어드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섬뜩하게 만들었던 흑발 사내의 광포했던 눈동자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아났다.
‘인간의 눈빛이 어찌 그토록 사나울 수 있단 말인가?’
드래곤의 성난 눈빛이 그럴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찬바람이 불었다.
율튼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장은 신호탄을 쏘고 뒤로 물러난 테세우드의 예상된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테세우드는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생생하게 보고 물러섰다. 기사들의 죽음은 그다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테세우드가 보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슷한 전력에서 마법사들의 수가 많고 적음은 상당한 전력상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것이 율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율튼 공!”
케이시 공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율튼을 불렀다.
“예! 각하!”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시오. 놈은 약점을 보고 쉽게 물러날 놈이 아니오. 우리가 한 번은 막아낸다 하더라도 놈은 끊임없이 마볍병단의 부재라는 약점을 물고 늘어질 것이오. 어차피 저들과 군단이 부딪히면 제국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초전을 우리가 잡아야 하오.”
제국전쟁이란 단어는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율튼조차도 전율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율튼의 생각도 케이시 공작과 같았기에 그는 품에서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오직 대마법사들만이 사용가능한 이동식 통신석이었다.
율튼이 요란 제국으로 통신을 하는 사이, 케이시 공작은 자신과 부딪혔던 자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콰콰쾅!
대마법사 율튼과 마법병단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마나의 덩어리는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져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케이시 공작은 순간, 그 안으로 뛰어드는 흑발사내를 보았다.
제국에 몇 없는 초인인 자신이라도 그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당연히 뛰어든 자는 흔적조차 없이 소멸될 게 뻔했다.
“어헉!”
케이시 공작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엄청난 마나의 폭발이 동그랗게 쳐진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서 난폭한 소용돌이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여파는 주변을 둘렀던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휩쓸었다.
상당수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다.
“이, 이게 도대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머리 위로 또 다른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서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케이시 공작은 홀린 듯, 시선을 위로 던졌다.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보였던 그의 두 눈이 또다시 찢어질 듯, 거칠게 올라갔다.
허공에 떠 있던 마법사들이 피를 쏟아내며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개새끼들!”
“모조리 썰어주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발에 흑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광포한 기운은 지상에 선 케이시 공작의 육신을 자극할 만큼 강력했다.
퍽! 퍽!
마법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그들의 마법공격은 나타난 자들의 육신 근처에도 못 가고 소멸되었다. 저 정도면 대마법사가 몇 년 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제조한 마법갑옷에 버금가는 방어력이었다.
기사들이 허공에 뜬 자들을 향해 공격을 펼쳤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몇 배는 더 빨랐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틀어대는 그들을 요격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마법사들이 뿌린 핏물이 비처럼 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피해!”
케이시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대로 두면 모조리 몰살이다. 지금 그의 눈에는 세상에 셋뿐인 대마법사 율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라면 그 정도의 위기는 극복할 능력이 있었다. 물론 케이시 공작도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자들의 가공할 힘에 당황해버린 그는 율튼의 위대한 마법능력까지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위험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력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그것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느낀 그는 최대한의 힘으로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그가 섰던 자리에 강력한 기운이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영문을 모르고 죽어나갔다. 그 엄청난 파괴력에 케이시 공작은 입이 벌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시 공작은 자신을 노려보는 존재를 보았다. 죽은 듯, 늘어진 청년을 품에 안고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가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조만간 돌아와서 지옥을 보여주겠다.]
“욱!”
귓속을 파고드는 충격에 케이시 공작이 비틀거리자 기사들이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왔다.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린 처참한 모습의 율튼 대마법사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케이시 공작에게로 다가왔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고통으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케이시 공작은 마나를 끌어올려 갑주에 방어막을 두르고는 안정을 되찾았다. 귀를 송곳으로 찌르듯 고통을 주었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율튼 대마법사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망연자실, 넋을 놓았다.
그는 율튼이 공격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로지 공격만을 했을 뿐이었다.
“파생된 기운만으로 대마법사가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다니, 도대체…….”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에게 덤비던 금발과 흑발의 청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을 때, 마법사들을 일방적으로 도살하던 존재들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느냐…….”
한순간 케이시 공작의 모든 두뇌가 정지되었다.
피를 뿌리며 죽어간 마법사들도, 간신히 바닥으로 내려선 대마법사 율튼도,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케이론입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엄청난 피해로 인해 패닉상태로 빠져들던 케이시 공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율튼이 산맥의 초입에 펼쳐진 평원을 가리켰다.
그곳에 자신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고 있는 자가 있었다. 테세우드 공작이었다. 그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보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케이시 공작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놈이 모든 것을 목격했습니다.”
“젠장!”
좀처럼 하지 않는 욕설이 케이시 공작의 입에서 쏟아졌다.
* * *
“각하! 각하!”
케이시 공작은 율튼이 몇 번을 부르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율튼의 얼굴에 어린 다급함을 본 그는 직감적으로 케이론 제국의 공격을 예감했다.
“케이론 제국의 1군단 병력이 20분 거리에 들어섰다는 보고입니다!”
“20분 거리?”
“그렇습니다! 요격이 불가능한 거립니다.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이곳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놈의 부대를 모조리 끌고 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10만을 상회하는 병력입니다.”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교활한 놈!”
케이시 공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예상대로였다. 자신의 마법병단이 엄청난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서 그냥 보고 있을 테세우드가 아님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대규모 전투가 목전에 닥치자 혼란스러웠다. 그는 빠르게 자신의 군단 전체를 둘러보고는 물었다.
“마법병단이 도착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요?”
“텔레포트의 좌표를 불러줬으니 그들보다 먼저 이곳에 당도합니다.”
“좋소! 그럼 이곳에 방어진을 펴고 놈들이 오기를 기다립시다! 베린스 공작을 불러오너라!”
율튼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을 내린 케이시 공작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베린스 공작이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대는 병력 오만을 이끌고 저쪽으로 이동해 명령을 기다려라.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마라! 알겠느냐?”
“적의 측면을 노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서둘러라!”
베린스 공작이 허리를 굽히고는 빠르게 돌아갔다.
혁련천후와 그 일행에 대한 충격을 지워내자 그의 냉철함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율튼은 그런 케이시 공작을 바라보니 마음이 놓였다.
“차라리 잘되었소. 놈은 본 제국에 텔레포트를 운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율튼 공, 당신뿐이라 알고 있을 것이오. 당연히 마법병단의 지원이 불가능하다 여기고 방심하고 있을 게 분명하오. 다시 통신을 보내시오! 더 많은 마법사들을 보내라고 말이오! 이번 기회에 놈의 콧대를 완전히 밟아줘야겠소!”
케이시 공작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그리하겠습니다.”
율튼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케이시 공작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율튼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율튼은 상당한 마나를 손실한 상태였다.
카루가와 함께 있던 흑발의 존재들을 상대할 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뛰어들었던 흑발사내와의 단 일합으로 그는 마나의 80%를 손실해 버렸다.
그러고도 그들을 모조리 놓친 것이다.
‘이 일을 황제께 무어라 보고를 해야 할지…….’
죽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빠른 시간에 보충이 가능한 부분이다.
요란 제국은 엄청난 인적자원을 발굴하여 끊임없이 인재양성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발사내들과의 싸움에서 잃어버린 전력이 비록 크나큰 손실이기는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보충이 가능한 전력이다.
하지만 정보에 없던 새로운 적의 출현이 마음에 걸렸다.
그 정도의 강자들이 케이론 제국의 인물들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근소하게 우위에 섰던 힘의 균형이 비슷해지거나, 오히려 자신의 조국이 약세로 돌아설 수도 있는, 실로 크나큰 문제였다.
‘그들이 만약 케이론의 인물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불러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전면에 나서면 나의 입지가 좁아진다.’
요란 제국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케이시 공작도 모른다. 오직 황제의 명령만을 따르는 그들은 하나하나가 자신도 무시 못 할 강자들이다. 그런 강자들이 서른에 달한다.
크로우기사단.
요란 제국 최고의 비밀이 그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직속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강력한 무력으로 제국의 2인자로 올라선 자신에게 그들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당연히 정적들은 그들과 연계하려들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많은 귀족들도 흔들릴 게 뻔했다.
그것이 케이시 공작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때 부관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각하! 본국에서 마법병단이 도착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케이시 공작은 상념을 떨쳐내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일단은 테세우드, 놈부터 쳐부수는 것이 우선이다. 나의 1군단이 제국 최강임을 보여주마!’
* * *
카루가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는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분노할 때와 그러지 않았을 때의 카루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보인다. 지금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옆에서 우드가 그를 달래주고 있었다.
고개를 든 카루가는 좌측의 조그마한 건물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 안에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모여 있다.
마계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들은 사납고 무서웠다. 특히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혁련소와 무척 닮은 존재는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괜찮을까?”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우드가 카루가에게 공경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다른 이들이 보면 의아할 광경이겠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드는 흑마법사로 변환하면서 마계의 황족과 계약을 맺었다. 카루가가 마계의 왕자라면 당연히 우드는 그를 왕자로 모셔야 한다.
“나를 구하려다 그렇게 된 거야. 나를 구하려다…….”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리는 카루가를 우드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처음 그가 마계의 왕자임을 알아보고는 얼마나 놀랐던가? 죽음이란 단어와 가장 친숙한 존재들이 마계의 존재들이며 파괴와 살상을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루가는 달랐다.
그의 눈동자는 조금의 혼탁함도 느껴지지 않는 순백의 순수함으로 가득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질 정도였다.
“그분을 좋아하셨군요.”
우드가 물었다. 카루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왕자님께서 그분을 구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뭐?”
반사적으로 카루가의 얼굴이 발딱 세워졌다. 우드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분은 백마법에 당했습니다. 치료를 하려면 그분의 몸에 심어진 기운보다 더 강한 기운이여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마법사보다 강한 마법사는 없으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치! 지금 장난치는 거다?”
흥분하자 다시 말이 꼬이는 카루가, 우드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백마법과 상극인 흑마법은 가능합니다. 물론 대마법사 율튼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존재가 계셔야지요. 마계엔 그런 분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카루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존재라면 마계에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내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계의 존재들은 앞으로 수백 년 동안은 인간세상으로 강림하지 못해. 나는 특별한 경우라서 왔지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쳐?”
“그곳으로 보내시면 되지요. 저분을 말입니다.”
풀죽었던 카루가가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 빛냈다.
“그렇구나!”
“하하! 왕자님께선 마계의 황족이시니 계약을 맺지 않고서도 저분을 그곳으로 보내실 수 있으니 방법은 찾았군요. 다만 다른 한 분이 조금은 고생을 하셔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만…….”
우드가 웃자 카루가도 웃었다.
* * *
쾅!
격하게 열린 문이 너덜거렸다.
침묵 같은 정적 속에서 모여 앉았던 모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상기된 표정으로 실내로 들어온 카루가는 침상을 응시했다.
죽은 듯, 누워 있는 혁련소와 전신을 천으로 동여매고 침상 옆에 앉아 있는 흑야가 보였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몸이 떨려오는 존재들이 침상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다.
“고칠 수 있어요!”
카루가가 소리쳤다.
모두의 고개가 급격하게 돌아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만…….”
우드가 들어서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이 돌았다.
“그게 무엇이냐?”
우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두는 숨을 죽이고 우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의 암울했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혁련천후의 차가웠던 눈동자는 뜨거운 열기마저 내뿜었다.
우드의 말은 10분 동안 이어졌다.
실내가 뜨거운 기운으로 요동쳤다. 꼼짝없이 죽을 줄로만 알았던 혁련소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녔다는 사공진무도 손을 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혁련소의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그를 살려낼 수 있단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는 혁련천후만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혁련천후의 시선이 카루가를 향했다.
“부탁한다.”
“응! 알았어!”
인간세상의 예의범절을 잘 모르는 카루가가 반말로 대답했다. 평소였으면 주먹이 날아들었을 테지만 모두는 들뜬 눈빛으로 카루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저씨가 저 형의 아버지야?”
어린아이처럼 물어오는 카루가에게 혁력천후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카루가의 얼굴에 천진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헤헤! 닮았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시작해.”
“알았어.”
* * *
“그러니까, 소가 돌아올 때까지 주공께선 절대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왕전의 물음에 우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모두는 우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우드는 식은땀이 등골을 적셨다.
“요상한 치료방법도 다 있군. 그 방법 말고는 없는 거냐?”
“그렇습니다.”
우드의 대답은 여전히 간단했다.
이들과 대화하면 자신도 모르게 단답형으로 변한다. 여전히 두렵기 때문이다. 그의 속내를 알고 있는 써튼은 슬쩍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젠장! 돌아올 때까지 그 새끼들을 작살내려고 했더니… 빌어먹을!”
북궁천소가 으르렁거리자 웃던 써튼의 얼굴도 돌처럼 굳어진다.
“소가 회복돼서 돌아오기만 한다면 복수는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 그나저나 놀랍군. 저 어린놈이 오백 년이나 살았다니…….”
“인간세상으로 치면 열 살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제대로 완성된 힘이 아닐 텐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마계의 왕자는 전 차원을 통틀어 최상위에 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우드의 확신에 찬 어조에 모두는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때였다.
주변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덮으며 주변공간이 은은한 진동을 보였다.
“지독한 마기군.”
침묵을 지키던 조윤이 창을 잡으며 일어섰다. 중원의 마두들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력한 마기가 모두를 긴장시켰다. 주변 공간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기는 점점 강력하게 커져만 갔다.
“지독하군.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마기를 뿌려대는 거지?”
“신경 쓸 거 없다. 적이라면 죽이면 그뿐이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써튼은 이미 얼굴이 노랗게 떠 있었다.
그가 감당할 마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우드는 전혀 힘든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우드가 소리쳤다.
“성공하셨습니다!”
“뭐?”
모두가 그를 돌아봤다.
“하하! 마계의 문이 열리는 현상입니다. 역시 마계의 왕자다우시군요! 이토록 빠른 시간에 차원의 문을 열다니…….”
우드의 얼굴엔 기쁨과 경탄이 어우러져 있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가 눈앞에서 발현되자 오래전, 마법에 입문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 성공한 것이냐?”
왕전이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일단 그분께서 마계로 소환되어 가신 것은 분명합니다.”
모두가 조금은 들뜬 표정으로 지독한 마기로 일렁이는 집을 응시했다. 누구보다 흑야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혁련소가 저렇게 된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있었던 그는 모처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 *
날이 밝았다.
다소 지친 기색이 역력한 혁련천후가 카루가를 품에 안고 나왔다. 잠이 덜 깬 것인지, 아니면 혁련소를 소환시키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힘을 사용한 탓인지 카루가는 품 안에서 잠이든 상태였다.
우드가 카루가를 건네받아 자신의 전마에 태웠다.
혁련천후도 전마에 몸을 싣고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수하들과 함께 혁련소가 지냈다는 다크 영지로 가려는 참이었다. 그곳에서 혁련소가 돌아올 때까지 지낼 생각이었다.
아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자들에 대한 복수는 잠시 미루어야만 했다. 자신이 사람을 죽이면 아들이 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하나의 제약이 더 있었다.
자신과 카루가만이 아는 비밀이다.
수하들에게 자세한 것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담대소천이 묵직한 어조로 물었다.
“그곳에서 소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십니까?”
“그래야겠지.”
“소를 그렇게 만든 놈은 죽여야지 않겠습니까? 흑야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됐어! 놈은 소가 돌아오면 소에게 맡긴다. 그때까지 우린 할 일이 있다.”
담대소천이 다시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지.”
그 말에 담대소천은 입을 닫았다. 혁련소를 살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그것이다. 모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전마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 * *
케논 산맥을 휘감아 흐르는 강변에 수백에 달하는 기마병들이 어디론가 이동을 하고 있었다. 갑주를 걸치고 거대한 깃발을 든 그들은 모두가 케이론 제국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용맹스러움을 발산해야 할 그들이었지만 보기에도 그들은 패잔병을 연상시키는 초라한 몰골들을 하고 있었다.
전마들이 더위에 못 이겨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방어막이 쳐진 전마전용 마갑을 걸치고도 고작 날씨 때문에 쓰러지는 전마는 없다. 그렇다면 이미 부상을 입었거나 마갑의 방어막을 넘어서는 공격을 당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푸르륵!
거품을 게워내며 죽어가는 전마를 바라보며 기사들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바탕에 황금색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도 곳곳이 찢어지고 불에 그으려 있었다. 기사단이 이동하면 당연히 보여야 할 마법사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두에서 이동하던 기사가 갑자기 전마의 고삐를 당겼다.
강인한 용모의 그는 이글스여단의 돌격대장 가투소였다. 그에게도 패전의 암울한 기운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힘을 내라! 조금만 더 가면 아르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군단으로 복귀할 것이다!”
투박한 수염에 각진 얼굴의 강인한 용모를 지녔지만 흐려진 눈동자로 보아 그도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도 상당히 지친 듯 보였다.
하지만 자세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힘들어도 내색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리를 이끄는 수장들의 숙명이다.
“사냥이라도 해서 배를 채우고 이동합시다! 이러다가 모두 아르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리겠소.”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맞소! 적의 추격부대가 이곳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배고픔부터 해결합시다!”
“옳소!”
곳곳에서 거친 소리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착잡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바라보던 가투소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대장! 일단 기사들의 말대로 사냥이라도 해서 배를 채우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모두가 며칠 동안 물만 마시며 이동했지 않습니까? 이러다간 아르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조리 탈진해서 쓰러지겠습니다.
“놈들의 마법병단이 언제 들이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배를 채운다면 싸울 힘이라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부관의 얼굴에서 간절함을 본 가투소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주변 숲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숲이라, 사냥을 하면 배를 채울 정도의 짐승들을 잡는 것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좋다! 각 부대에서 몇 명씩 숲으로 가서 사냥을 하고 나머지는 불을 피우고 조를 이루어 혹시 모를 적의 출현에 대비해라!”
“우아!”
기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평소라면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갔을 그들이다.
하지만 패잔병의 위치에선 신분의 고하도, 능력의 고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장의 배고픔에 그들은 명예 따위는 지나가는 개에게 던져줄 수도 있을 정도로 극한의 상황까지 이르러 있었다.
숲으로 사냥을 하러가는 기사들이 전쟁터에서의 몸놀림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손에 석궁과 강궁을 든 그들이 숲으로 사라지자 남은 기사들은 방어대형으로 진을 갖추고 그 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가투소도 자신의 전마에게 남은 물을 먹여주고는 적당한 곳에 앉아 대지를 등받이로 삼아 하늘을 보며 누웠다.
‘젠장! 이토록 처참한 패배를 당하다니…….’
그랬다.
각각의 나라에서 최고라 자랑하던 1군단 간의 전투에서 케이론 제국이 패배한 것이다. 요란 제국의 지원부대가 그토록 빨리올 것을 미처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요란 제국에 대마법사, 율튼을 제외한 다른 자가 텔레포트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니… 이렇게 되면 힘의 균형은 완전히 깨어졌다고 봐야 한다.’
패배의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텔레포트는 대마법사의 전유물이다.
케이론 제국에도 오직 대마법사 쉐인만이 가능한 것이 그것인데 요란 제국엔 율튼 말고도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또 있었다. 그것은 곧 대마법사에 준하는 엄청난 상위마법사가 요란 제국에 더 있다는 것을 뜻한다.
대마법사 하나가 갖는 전쟁억제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당장 가투소 자신의 조국인 케이론 제국도 쉐인이라는 걸출한 마법사를 배출함으로서 왕국에서 제국으로 강성해지지 않았던가. 그런 실력자가 요란 제국에 당대의 대마법사 율튼 말고도 더 있다면 요란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고 봐야 했다.
“훅!”
가투소는 거친 숨결을 한껏 토해냈다.
“대장! 전방에 요란 제국의 기병댑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가투소는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고서 대열의 앞쪽으로 뛰어갔다.
“적이 확실한가?”
“적의 1군단기가 확실합니다!”
탁 트인 평지의 끝부분에서 자욱한 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는데 먼지 사이로 보이는 깃발이 요란 제국의 부대기가 확실했다. 가투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모두 전투대형으로! 서둘러 전마에 몸을 실어라!”
“적이다! 요란 제국의 기병이다!”
막 휴식을 취하려던 기사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전마에 몸을 실었다. 일어나는 먼지의 크기로 보아 적, 기병의 수가 아군보다 훨씬 많아 보이자 기사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가투소는 재빨리 주변 지형을 살폈다.
“빌어먹을!”
거친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싸워보고자 했지만 탁 트인 평원에 뒤는 제법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오직 백병전뿐이다.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을 주시하던 기사들의 얼굴이 동요를 넘어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적, 기병의 선두에 로브를 걸친 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마법사는커녕 마법의 마 자를 익힌 자조차 없었다. 마법사들이 있다면 백병전도 무의미해진다. 마법사들이 펼쳐댈 장거리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젠장! 마법사도 끼었어.”
“대장! 궁병도 보입니다.”
모두가 가투소를 간절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가투소도 뾰족한 대응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이 끼었다면 궁병들도 함께 왔을 것이 분명했다. 화살에 마법을 실어 적을 살상하는 공격방법은 요란 제국의 주공격방식이다. 기병만이 있는 그들로선 장거리 화살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가투소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삶의 불꽃을 태워 적과 싸우다 죽기로 작정한 것이다. 흐려졌던 그의 눈동자에 강렬함이 나타났다.
“적을 죽여야만 우리가 살 수 있다! 두려워말고 용감하게 돌진하라!”
“돌진하라!”
가투소는 목청껏 소리쳤다.
용맹을 잃지 않은 몇몇이 부대를 돌며 기사들에게 용맹하게 싸울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미 떨어진 사기는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가투소의 눈동자에 섬광이 맺혔다.
“개죽음을 당하겠느냐! 아니면 비굴하게 도망치다가 잡혀죽겠느냐! 싸우다 죽자! 그래야 죽어서도 가족들에게 떳떳하지 않겠는가! 움직여라! 검을 들어라! 그리고 돌진하라!”
가투소의 입을 통해 붉은 선혈이 튀었다.
“대장…….”
“젠장! 그래, 까짓것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개새끼들! 한 놈은 목을 따고 가야 덜 억울하겠다!”
“그래, 같이 죽자!”
곳곳에서 가투소에게 반응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점점 번지기 시작한 그것은 이내 전체를 뜨거운 기운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기사들이 앞다투어 대열의 앞쪽으로 전마를 몰았다.
“젠장! 대장은 죽지 마십시오. 누군가는 살아서 우리가 어떻게 죽었는지 제국에 전해야 합니다. 대장이 그래주셨으면 합니다. 어서 가십시오!”
“그렇습니다! 여긴 우리가 맡겠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제임스! 톰슨! 입 다물어라!”
가투소의 격한 반응에도 기사들은 그에게 자리를 벗어날 것을 거듭 전해온다. 가투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가 검을 하늘로 치켜세우며 돌격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쾅!
화염이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을 덮쳤다. 수십 기가 그대로 꼬꾸라지며 뒤따르던 전마들의 발길에 무참히 밟히고 있었다.
가투소를 비롯한 모든 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지원군, 지원군이다!”
“설마…….”
“이런 오지에 아군이 있을 리 없잖아. 1군단 소속의 기사들인가?”
기사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연이어 화염이 떨어지며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때 요란 제국 기마병들의 상공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과광!
“으악!”
순식간에 피안개가 생겨났다.
가장 먼저 마법사들의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전마와 기사들의 육신이 통째로 썰어지는 가공할 광경이 펼쳐졌다. 지켜보던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은 넋을 놓고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