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아리안을 만나다
“개새끼들! 잘 걸렸다!”
“모조리 죽여!”
북궁천소와 왕전은 누구보다 잔혹한 살수를 펼쳐냈다.
대도에 걸려드는 자들의 육신이 종이처럼 잘려 날아갔다. 어지간해선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진천과 사공진무도 지금은 잔혹한 살기를 품고서 요란 제국의 기사들 사이를 누볐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했던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며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초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존재들, 반격은 그저 무의미한 손짓에 불과했다.
쾅!
엄청난 열기를 동반한 화염이 기사들의 육신을 불덩이로 만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라 불리는 강자들의 전유물이 사방에서 난무하며 기사들의 육신을 종이처럼 찢어발겼다.
서걱!
“으악!”
처참한 비명이 산천초목을 울렸다.
“방향을 틀어라! 퇴각한다!”
요란 제국 제1군단 105여단의 돌격부대장 케릴 자작은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으로 퇴각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상대는 퇴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일방적인 살육전은 마지막 생존자였던 케릴 자작의 목이 잘림으로서 그 끝을 보았다.
피 냄새가 평원을 덮었다.
참혹한 살육의 현장은 이내 침묵과도 같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지켜보던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은 넋 나간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우욱!”
숲 속에서 혁련천후와 담대소천, 그리고 써튼과 우드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오던 써튼은 그 참혹한 광경에 허리를 구부리고 구토를 했다. 우드는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외면했다.
카루가만는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두두두!
북궁천소는 전마 한 기가 빠르게 달려오자 북궁천소가 대도를 겨누며 달려 나갈 자세를 취했다. 써튼이 황급히 그를 막아섰다. 써튼은 달려오는 자가 가투소임을 알아보았다.
“써튼 남작 아니십니까?”
“오랜만이네. 가투소 대장!”
가투소는 전마에서 뛰어내리며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는 북궁천소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써튼을 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보다시피 적을 모조리 때려잡았지 않은가?”
입가에 묻은 오물을 재빨리 닦아낸 써튼이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런 써튼을 가투소는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신분을 감춘 상위귀족이셨군.’
힘과 세력으로 결정되는 게 귀족들의 서열이다. 이토록 놀랄 정도의 강자들을 기사로 부리는 써튼이라면 최소한 공작이라고 그는 여겼다.
‘응! 뭐야?’
확신을 다져가던 가투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써튼이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투소도 아는 인물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남작께서 고작 기사에게 저런 태도를…….’
써튼이 공경을 보인 인물은 혁련천후였다.
여단의 주둔지에서 보았던 그는 분명 써튼의 기사라고 했었다. 머릿속이 혼란해진 가투소의 어깨를 누군가 건드렸다.
“좀, 비켜줄래?”
가투소가 고개를 돌렸다.
무지막지한 인상의 북궁천소가 가투소의 눈, 한가득 들어왔다. 가투소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섰다. 그를 슬쩍 쳐다본 북궁천소가 써튼에게 소리쳤다.
“이봐! 뭐 해! 이 새끼들의 검을 거두라니까!”
“하하! 예!”
그도 분명 써튼의 기사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가투소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허리를 건드리자 가투소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을 펴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귀여운 소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카루가였다.
카루가는 가투소의 위아래를 짐짓 건방진 태도로 쓸어보고는 물었다.
“너, 뭐야?”
“……!”
그 내면에 감추어진 무서움을 모르는 가투소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고는 인상을 그렸다. 가지 않으면 한 대 쥐어박을 기세였다.
카루가가 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어! 인상 쓰네? 얘가 인상 써요!”
가투소는 황급히 카루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순간!
찌르르…….
전신에 전류가 흐르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감을 느낀 가투소는 광속으로 손을 뗐다. 자신의 손과 카루가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부릅뜬 가투소를 다른 이들이 웃으며 쳐다본다.
“퉤! 퉤! 아씨! 더럽게!”
“꼬맹이, 그만 까불고 저기 저것들 모조리 집어넣어.”
“끙! 알았어요.”
가투소를 요상한 눈빛으로 제대로 째려본 카루가는 산더미처럼 쌓인 검들에게로 걸어갔다. 카루가의 손에 시커먼 천으로 된 주머니가 나타났다. 사과 몇 개만 들어가도 모자랄 정도로 작은 그것을 들고 카루가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짤막한 주문이 끝나자 카루가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헤헤! 이제 담아요!”
“정말 그 안에 다 들어간단 말이지?”
“그럼요.”
“너, 이 새끼! 만약 거짓말이면 통째로 기름을 발라 구워버린다.”
북궁천소와 왕전 등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쳐다보며 집어넣을 생각을 못했다. 검을 하나 집어든 우드가 웃으며 시범을 보였다.
“어! 정말이네?”
“오호! 이거 정말 놀랄 노 자군.”
진정 신기했다.
그 큰 검이 작은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당연히 주머니가 찢어져야 정상이지만 찢어지기는 고사하고 검이 들어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카루가의 자랑이 이어졌다.
“헤헤! 내 인벤은 무지 크니까, 드래곤도 들어갈걸?”
* * *
“초인이라는 테세우드 공작과 대마법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패했단 말인가?”
“상대도 케이시 공작과 대마법사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마법병단의 위력에서 적이 훨씬 강력했습니다. 패인은 그것이죠.”
툭! 툭!
모닥불이 불꽃을 튕겨내며 활활 타오른다.
주변에 둥그렇게 둘러앉은 모두는 가투소에게 양국의 1군단 간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뒤쪽의 넓은 풀밭에는 오백에 달하는 기사들이 곳곳에 거대한 불을 피워놓고 커다란 짐승을 굽고 있었는데, 모두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전쟁도, 패전에 따른 아픔도 모두 잊어버렸다. 우드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법으로 불의 강도를 조절하기 바쁜 모습이고 카루가는 혁련천후의 등에다 머리를 대고는 코를 골고 있었다.
담대소천이 물었다.
“어리석은 지휘관이군. 적의 힘을 가늠해 보지도 않고서 무작정 전면전을 벌였다니, 그대가 말한 그 공작이라는 자가 이 나라에서 최고의 무장이라고 들었는데, 고작 그 정도였단 말인가?”
반말임에도 가투소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써튼에게서 모든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혁련천후를 다크 영지의 영주라고 소개한 써튼이었다. 물론 담대소천을 비롯한 모두가 작위를 지닌 기사들이라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텔레포트 때문입니다.”
“텔레포트?”
그때 혁련천후의 눈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어렸다. 언제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눈동자가 가투소에게로 돌아갔다. 텔레포트는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자세히 말해 봐.”
잠시 호흡을 고른 가투소가 말을 이어갔다.
“텔레포트를 운용할 수 있는 마법사들은 대륙 전체에 오직 셋뿐이라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요란 제국의 율튼 대마법사입니다. 공작께서는 그가 전장에 있음을 보시고 다소 자만하신 듯, 보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해!”
왕전이 짜증을 내자 대번에 얼굴이 굳어진 가투소의 입놀림이 빨라졌다.
“텔레포트가 아니면 요란 제국의 국경주둔군에서 케논 산맥까지 지원 병력이 오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적의 마법병단을 깡그리 쓸어버리는 것을 목격하신 각하께서는 충분히 적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아군의 마법병단을 믿으셨지요.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텔레포트를 이용해 엄청난 마법병단을 보내왔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5서클에 근접한 자들만 열에 가깝게 보였으니…….”
“그러니까, 마법병단에서 밀리는 바람에 졌다, 그 말이냐?”
“비슷한 전력에서 마법병단이 더 강한 쪽이 승리할 확률은 거의 100%라고 보시면 됩니다.”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드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마법사가 하나가 아니었다니…….”
“확실합니다.”
가투소가 힘주어 말했다.
듣고만 있던 진천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텔레포트를 운용할 수 있다는 놈들이 전에는 없었나? 그 정도로 대단한 놈들이라면 꽤 오래 살 텐데 말이야. 늙은 노물이라도 하나쯤은 더 있지 않을까?”
황제와 거의 동급으로 존중받는 대마법사를 놈이라 칭한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가투소는 물을 마시고는 이내 대답했다.
“오십 년 전쯤에 한 분이 계시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실종되셨습니다.”
“실종?”
듣고 있던 우드가 대신 대답했다.
“새로운 마법을 창안하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성공해서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소문일 뿐입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마법을 연구했단 말이냐? 텔레포트와 다른 것인가?”
“텔레포트는 동시간대의 공간으로만 이동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소문의 그 마법은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면 그곳으로 이동이 가능한, 그런 마법으로 보시면…….”
혁련천후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혁련소를 이곳으로 데려온 자를 모두는 동시에 떠올렸다.
“그자가 살던 곳이 어디지?”
“홀베른 공국입니다.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과 근접한 곳입니다.”
조윤이 눈빛을 발하며 전음을 보냈다.
[처음 떨어졌던 그곳입니다.]
그랬다.
자신들이 떨어졌던 곳이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 근처라고 했었다. 혁련천후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자와 지금의 대마법사들과 비교하면 어때? 누가 더 강한 거냐?”
진천의 물음에 우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게 비교하기가 좀…….”
“홀베른은 어떤 곳이지?”
이번엔 조윤이 물었다.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우드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정성껏 늘어놓았다.
보다 못한 써튼이 우드를 도왔지만 날이 꼬박 새고 나서야 둘은 새우잠을 잘 수 있었다.
* * *
땡 땡 땡!
소집을 알리는 종소리가 케이론 제국의 수도방위사령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짧은 시간에 연병장은 수천의 기사들이 대열을 이루고 사령관 케시우스 후작을 기다렸다. 정자세로 꼿꼿이 고개를 들고 전방을 응시하는 기사들의 표정은 꽤나 경직되어 있었다. 세 번의 종소리는 출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열의 선두에 선 부사령관 데포 백작의 입에서 우렁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군! 차렷!”
처척!
전신을 붉은색 갑주로 두른 인물이 건물의 중앙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니콘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든 기사들이 인물의 좌우를 호위하며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사령관 케시우스 후작이었다.
“사령관님께 경례!”
“충!”
연병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손을 들어 화답한 케시우스 후작은 연단에 오르기가 무섭게 확성마법을 통해 명령을 전달했다. 성정이 급하기로 유명한 그답게 목소리는 우렁차면서도 힘이 넘쳤다.
“오늘 우리는 1군단의 병사들을 구하러 케논 산맥으로 출진할 것이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우리의 임무는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케논 산맥을 떠도는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다! 최후의 일인까지 반드시 구출한다! 알겠느냐!”
“충!”
기사들이 단호한 결의를 담은 표정으로 우렁차게 대답하자 케시우스 후작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라 떠오른다. 그는 데포 백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데포 백작!”
“예! 사령관님!”
“마법병단은 모든 준비를 마쳤겠지?”
“사령관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다! 출진한다!”
기사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관들이 끌고 온 전마에 몸을 실은 케시우스 후작이 가장 먼저 연병장의 정문으로 이동하자 모든 부대들이 빠르게 연병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웃기는 놈들이군.”
그들이 빠져나가는 광경을 보며 차갑게 미소 짓는 인물이 사령부 건물의 옥상에 있었다. 화려한 황금색 갑주에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이 인상적인 그 인물은 케시우스 후작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후후! 어리석은… 지금 간다고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지. 가는 동안에 패잔병들은 모조리 죽어 있거나 뿔뿔이 흩어져 제국의 곳곳을 떠돌아다니겠지. 그렇지 않나. 맥마흔!”
“글쎄…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지. 혹, 케논 산맥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적과 싸우며 아군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도 있지 않을까?”
뒤쪽에서 다소 염세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금발 청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다시 말했다.
“적은 케이시 공작이다. 그자는 절대 케이론의 기사들을 용납하지 않을 거야.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죽이려고 들 작자가 케이시 공작이지. 어쩌면 지금쯤 그곳은 전투에서 떨어져나간 패잔병들을 사냥하기 위한 피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거야. 놈은 언제나 그런 걸 즐겼지.”
맥마흔이라 불린 청년이 금발 청년의 옆으로 다가와 이젠 먼지로밖에 보이지 않은 케시우스 후작의 부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5만이 죽고 3만이 후방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나머지 2만이 떠돈다는 소린데… 방관하기엔 너무 많은 숫자야. 당연히 구하러가는 것이 옳다. 루안!”
“후후! 맥마흔. 넌 언제쯤 그 유약함에서 벗어날래? 케논 산맥은 이미 요란 제국의 점령지로 변했다. 어쩌면 지금쯤 요란 제국의 1군단 외에도 특수여단들도 들어섰을 가능성이 높지. 그런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그 2만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기사들을 보낸다? 후후후! 더 많은 희생만 늘 뿐이야.”
맥마흔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의 명이시다! 더 이상 그 문제를 가지고 너와 설전을 벌이고 싶지 않다!”
“하하! 그렇지. 지엄하신 황명이었지. 하하하!”
금발 청년, 루안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맥마흔의 눈가에 지독한 짜증이 묻어났다. 그는 사나운 눈으로 루안을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돌아가 버렸다.
한참을 웃던 루안이 웃음을 멈추고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리석은 황제여,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 때문에 난 당신을 외면할 수 없어. 어리석게도, 이 좁은 가슴은 이미 그녀의 영상으로만 채워졌거든. 그래서 나 루안은 결정했지. 내가 직접 케논 산맥으로 가겠다고, 가서 죽음의 능선을 헤매는 기사들을 구해주겠어. 물론 어리석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지…….”
루안의 금발이 바람에 날리자 견갑 부근에 새겨진 작은 문양이 드러났다.
붉은색 동체를 지닌 드래곤의 형상이었다.
* * *
“이잉…….”
카루가는 자면서 이상한 소리를 계속해서 해댔다. 몸을 뒤척이면서 손을 휘젓기도 하고 다리를 올리기도 했다.
“야! 인마!”
왕전이 카루가의 머리를 툭 때렸다. 카루가가 눈을 떴다. 용수철처럼 일어선 그는 고개가 부러져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굴이 두려움으로 가득한 것을 본 왕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꿈꿨냐?”
“꿈이었구나. 헤헤!”
카루가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깊은 바보처럼 웃었다.
“무슨 꿈인데?”
“그냥…….”
표정이 밝아진 카루가는 저만치에 앉아 있는 혁련천후에게로 폴짝거리며 뛰어갔다. 혁련소를 마계로 소환시킨 이후로 그가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저씨! 뭐 해?”
“무슨 꿈을 꾸었느냐?”
“음! 아저씨 아들 꿈!”
혁련천후의 눈에 아련함이 슬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다시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린 그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꿈속에서 뭐라고 하더냐?”
“그냥, 서로 약속했어. 형은 꼭 살겠다고 했고 난 반드시 살려 주겠다고 했어.”
“그랬구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물어봐.”
카루가는 혁련천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형을 소환시킬 때, 아저씨 내면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어. 사실대로 말해 줘. 아저씨, 혹시 마계에서 온 거 아니야?”
혁련천후가 시선을 카루가에게 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너무 강해서…….”
“내가 강하게 보이느냐?”
“놈의 마법공격을 막아냈잖아. 사실 그때 그 공격은 마계의 전왕이라는 발록이라도 쉽게 막아낼 수 없었던 거란 말이야.”
말을 하는 카루가가 몸을 떨었다.
놈이란 바로 대마법사 율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 때문에 마계에서 온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아니! 아저씨와 저 아저씨들 몸에선 마기가 느껴져. 이 세상이 마스터라고 부르는 자들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야. 마기는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것이거든.”
순간 혁련천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들이 마기를 지녔을 리 없었다. 마공이나 사공이 아닌 정통 무공을 익힌 자신들이다.
하지만 카루가는 마기로 보고 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군.’
그랬다.
이 세상에 넘어오면서부터 자신은 평정심을 다소 잃어버렸었다.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리라. 항상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만 있었던 스스로를 그는 자책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내가 살던 곳을 구경시켜주마.”
“에이! 마계는 볼 것도 없는데.”
“후후! 내가 마계에서 왔다면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마계는 무척 넓어. 왕인 아버지도 누가 누군지 다 모를 정도로 말이야. 지금껏 인간 세상에 강림했던 자들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마계란 말이야.”
“나중에 가보면 그곳이 어딘지 알게 되겠지.”
혁련천후는 카루가의 머리를 어루만져주면서 일어섰다.
카루가도 따라 일어섰다. 다른 모든 이들도 일어섰다. 모두는 다시 다크 영지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뒤쪽은 가투소가 이끄는 오백의 기사들이 따랐다.
푸르륵!
상당히 지쳤던 전마들은 싱싱한 풀로 배를 채우자 제법 활발한 몸짓을 보였다.
기사들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체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기사들은 북궁천소와 왕전 등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대부분이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을 쓸어버릴 때, 그들의 놀라운 무력에 대해 입을 놀렸다. 왕전 등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속삭인다고 속삭였지만 모조리 그들의 귀에 들렸다.
드래곤이 폴리모프를 한 것은 아닐까라는 말이 들렸을 때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이동속도는 다소 느렸다.
좁은 길목과 주변을 두른 울창한 수림은 전마들이 질주하기엔 마땅치 않았다. 자그만 산의 능선을 타고 돌아가자 시야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 정도의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모두는 능선을 버리고 평원으로 전마를 몰아갔다.
그들이 막 평원으로 들어설 때, 담대소천이 혁련천후를 불렀다.
“주공!”
혁련천후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전과 북궁천소가 말머리를 돌려 뒤쪽으로 이동했다. 담대소천은 혁련천후의 옆을 지켰다.
혁련소 때문에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제약 때문에 싸울 수 없는 그를 호위하기 위함이었다.
“왜 저러지?”
갑자기 선두가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자 뒤를 따르던 모두는 의아함을 내비쳤다.
써튼과 우드도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했다. 왕전이 가투소를 보며 손짓을 보냈다. 가투소가 전마를 몰아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을 구해줄 때의 가공할 무력이 가투소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왕전이 전방을 응시하며 짤막하게 말했다.
“전투대형!”
“옛?”
“적의 기병이다.”
가투소는 왕전의 시선을 쫓아 후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투소를 보며 모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에 보일 리 만무했다. 비웃음을 담은 눈초리가 왕전이 뒤통수에 일제히 쏟아졌다.
“누군가 쫓기고 있는 모양이군.”
조윤이 중얼거렸다.
가투소는 여전히 영문을 몰라 눈을 멀뚱거렸다.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가투소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자신들이 이동해 온 후방에 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점점 그 크기를 달리하는 먼지구름의 크기로 보아 상당한 병력으로 보였다.
“적입니까?”
“적이라고 했잖아.”
여전히 가투소의 눈에는 적아가 구분되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왕전 등을 믿었다. 아니 그들의 능력을 믿었다. 가투소가 전마를 몰아 기사들에게로 달려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말머리를 뒤로 돌리며 횡렬로 늘어섰다.
‘저 엄청난 거리를 다 본단 말인가?’
왕전 등을 바라보는 가투소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 * *
‘찾았어!’
아리안은 전방에 자신이 찾던 존재들이 서 있음을 보고는 질주에 박차를 가했다.
뒤를 쫓는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은 케논 산맥의 강변에서부터 쫓아오는 자들이었다. 자신의 갑주에 새겨진 문양이 케이론 제국의 황실기사단의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문양은 죽은 그녀의 양부가 전직 황실기사단의 기사였기 때문에 새겨 넣은 것이다. 황실기사단의 기사들은 대대로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모든 자손들은 문양을 넣을 권리를 갖게 된다.
그녀도 그 이유 때문에 갑주에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이다.
쐐액!
따다당!
강전들이 그녀의 갑주에 닿았지만 마법방어막이 쳐진 갑주는 끄떡도 안 했다. 아리안은 내심 갈등했다. 눈앞에 자신이 그토록 찾았던 인물들이 있었다. 아르소를 포기하면서까지 만나봐야 할 그들이다.
하지만 이대로 달려가면 요란 제국의 기사들과 저들이 부딪히게 된다.
싸움을 붙이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방향을 틀자니 다시는 저들을 만나지 못할 거란 불안감이 생겨났다.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좀처럼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였다.
전방에 섰던 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리안의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 빛을 발했다.
‘이쪽으로 온다! 싸우려는 걸까?’
움직이는 자들은 고작 여섯에 불과했다. 뒤쪽에 늘어선 기사들은 무기를 뽑아 든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설마 저들만으로……!’
아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는 사이에 여섯은 아리안의 옆을 지나갔다. 극히 짧은 순간에 아리안은 누군가의 시선과 부딪혔다.
‘뭐지?’
아리안은 가슴이 쿵쾅거림을 느꼈다.
형용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전율처럼 솟아올랐다. 아리안은 황급히 전마의 고삐를 당겨 방향을 뒤쪽으로 돌렸다.
동시에 요란한 소음이 울렸다.
콰지지직!
그녀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전마와 사람이 동시에 사방으로 솟구치며 피를 뿌렸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던 여섯이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을 그대로 밀고 지나갔다. 전마끼리 부딪혔다면 쓰러져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들은 기마병들을 좌우로 가르며 지나갔다.
“우……!”
그 엄청난 광경에 가투소의 기사들은 입을 벌렸다. 이미 그들의 신위를 한 번 보았던 그들이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거리가 제법 가까웠던 까닭에 그들의 시력으로도 모든 광경이 생생하게 보였다.
* * *
아리안의 눈빛이 변했다. 이미 그녀의 손에는 그레이트 소드가 쥐어져 있었다.
함께 싸우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대장! 우리도 도와야지 않을까요?”
“그래요! 놈들을 쓸어버립시다!”
기사들이 흥분으로 불끈거렸다.
기사들의 몸짓이 예사롭지가 않자 가투소는 결단을 내렸다. 물론 끼어들지 말라는 담대소천의 말을 어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눈앞에 자신들의 동료를 무참히 쓸어버린 적을 놔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좋다!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준다! 전원, 돌격!”
가투소의 명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을 시작했다. 담대소천이 그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끄응! 나도 싸울래. 저놈들, 나쁜 놈들이야.”
카루가 만큼은 혁련천후가 놔주지 않았다.
“넌 앞으로 내가 허락할 때만 싸워라.”
“저놈들, 나쁜 놈들인데…….”
몸을 움찔거리는 카루가의 어깨엔 혁련천후의 손이 올려 있었다. 그저 얹고만 있었지만 카루가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전장을 지켜보는 혁련천후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아들, 혁련소를 죽음의 지경까지 몰고 갔던 요란 제국이다. 당연히 보이는 족족 모조리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아들 때문에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 * *
쾅!
“그게 지금 말이라고 내게 전하는 것인가! 베린스!”
케이시 공작의 분노는 대단했다.
베린스 공작은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참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같은 공작이지만 케이시 공작은 곧 대공의 위치에 오를 신분이다. 대공은 일국의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자리, 당연히 베린스 공작은 그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율튼 공은 어디 있는가?”
부관 하나가 급히 대답했다.
“마법병단의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당장 내게 오라고 전해라!”
부관이 빠르게 막사를 빠져나가자 케이시 공작은 거푸 술잔을 들었다. 베린스 공작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요즘 그는 연이어 케이시 공작에게 질책을 들어 기분이 엉망이었다.
연이어 터진 막대한 피해로 인해 그에 대한 케이시 공작의 신임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분을 삭인 케이시 공작이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1군단의 제2여단장으로 임명된 게 몇 년이 지났는가?”
“5개월이 지나면 4년이 됩니다.”
“4년이라…….”
케이시 공작이 깍지를 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베린스 공작은 케이시 공작의 태도에 내심 불안했다. 불안은 현실로 이어졌다.
“동부전선의 제7기동여단을 자네가 맡아줘야겠네.”
“예?”
베린스 공작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냉소를 지우지 않은 케이시 공작은 다시 술잔을 입으러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제7기동여단은 케이론 제국 최고의 밀 생산지라는 아르소와 인접한 곳이자 적의 기습을 막아내야 하는 주요거점이지 않은가. 자네가 그곳을 맡아주게. 꽤나 중요한 곳이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걸세.”
“……!”
베린스 공작은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이며 눈을 감았다.
말이 중요한 거점이지, 그곳은 제국의 모든 이들이 가장 꺼리는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불명예퇴직의 필수코스가 바로 그곳인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그때 율튼이 들어섰다.
케이시 공작은 베린스 공작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참담한 심정의 베린스 공작은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막사를 나섰다.
“빌어먹을!”
저절로 욕설이 쏟아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출세일로를 걸었던 자신이다.
하지만 단 두 번의 패배가 자신을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하나는 엄밀히 따진다면 대마법사 율튼이 지휘했던 작전이었지만 자신에게 몽땅 뒤집어씌웠다.
율튼 대마법사는 케이시 공작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지만 그것을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령막사를 노려보고는 자신의 막사로 사라졌다.
* * *
레이나 공주는 자신의 방에서 며칠째 움직이지 않았다.
양 제국의 최정예라는 1군단 간의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는 케이론의 황실을 암울한 분우기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2만에 달하는 병력들이 생사도 모른 채, 그곳을 떠돌고 있음을 생각하자 그녀는 눈물마저 머금었다.
그녀도 쉐인 대마법사의 도움으로 사로잡힐 위기를 모면하고 간신히 황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분해!”
눈물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지금 테세우드 공작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쉐인의 텔레포트를 이용해 황궁으로 돌아온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의 권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누구도 그에게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묻지 못했다. 황제인 자신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작위를 박탈당했을 정도의 큰 패배였지만 테세우드 공작은 조금의 미안함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 많은 신료들 중, 단 한 명도 그런 부분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분하게 만들었다.
“무능한 인간들!”
분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시녀가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어?”
“루안 공께서 직접 케논 산맥으로 가셨답니다.”
“직접 갔단 말이야?”
“예! 마마. 황실기사단의 맥마흔 부단장께서 가시는 것을 직접 보셨답니다. 폐하께는 상신을 올리지도 않으신 듯합니다.”
레이나 공주가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준비해! 다시 그곳으로 가야겠어.”
“예?”
시녀의 눈동자가 구슬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레이나 공주는 벌써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놀랍게도 평상복이 아닌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마마! 어찌하시려고…….”
“나 혼자서 갈 거야. 케티를 좀 데려와줘.”
케티는 레이나 공주가 애마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시녀는 레이나 공주를 흘끔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시녀가 나서는 것을 본 레이나 공주는 재빨리 방문을 열고 어디론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쉐인 대마법사에게 텔레포트를 부탁하려는 것이다. 말을 타고가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 * *
케이론 제국의 황실마법병단의 수장인 쉐인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두꺼운 서적을 읽고 있었다.
쿵!
“계셨군요.”
레이나 공주가 들어서자 그는 재빨리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비록 정적이라지만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그는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가 그녀의 복장이 예사롭지가 않자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대략 짐작이 갔던 까닭이다.
“케논 산맥으로 보내주세요. 부탁이에요.”
역시 예상했던 것을 꺼내 들자 그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루안 공 때문입니까? 그렇습니까?”
“역시 쉐인 공의 눈은 벗어날 수가 없군요.”
레이나 공주는 내심 감탄했다.
언제나 쉐인은 모든 것을 본 듯 정확하게 예측했다. 어떨 땐, 그에게 예지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쉐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냥 보내주세요. 말을 타고가기엔 너무 늦어버렸군요.”
“케논 산맥은 너무 위험합니다. 혹, 놈들의 손에 잡히시기라도 한다면 제국은 꽤나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인질로 이용당할 거면 혀를 물고서라도 죽을 작정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간다고 해도 루안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찾는단 말입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공께선 그냥 저를 그곳까지만 데려다주세요.”
레이나 공주가 생각 이상으로 단호하게 나오자 쉐인은 난감했다.
자신은 테세우드 공작의 사람이다. 레이나 공주와 그는 가장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정적의 입장이었다. 당연히 그로서는 섣불리 도와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흠……!”
“쉐인 공!”
레이나 공주의 목소리에 힘이 더 들어가자 쉐인은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신이 아무리 제국의 실력자인 테세우드의 인물이라고 해도 그녀는 엄연한 제국의 공주다. 이렇듯 단호하게 나온다면 거절할 방도가 없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 *
적 사망자 160명, 아군 사망자 전무, 부상자 9명.
전투의 결과였다.
압도적이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전투현장은 죽은 자들의 검을 줍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검들은 카루가의 마법주머니로 줍는 족족 사라졌다.
“내가 직접 같이 싸웠으면서도 이건 도저히 못 믿겠다.”
“나도 그렇다. 아무튼 이겼으니 속은 좀 후련하다. 이대로 돌아가면 분해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기사들은 검을 주우며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대장이 저분들에게 쩔쩔매는 게 사실 이상했는데, 당연한 거였어. 저 남작이라는 사람이 저들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보면 분명 제국의 최상위급 귀족임이 확실하겠지?”
“저 정도의 엄청난 강자들을 거느렸다면 그건 당연한 거지. 하지만 최상위급 귀족이라면 대부분이 마법신문이나 황실행사를 통해 얼굴을 알 텐데, 저분들은 전혀 기억에 없어. 혹시 제국에서 비밀리에 양성하고 있다는 특수부대가 저분들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군. 솔직히 제국에 흑안에 흑발을 한 귀족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너희들은 들어봤냐?”
“당연히 못 들었지.”
기사들은 저마다 의아함을 잔뜩 품고서 혁련천후와 주변 인물들을 흘긋거렸다.
애초 그들은 혁련천후 일행을 흑안의 마검사로 생각했었지만 가투소가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기사들의 궁금함은 끝이 없었다.
“저분이 그 유명한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 남작이시구나.”
“봤냐? 놈들과 싸울 때 저분의 검법을… 왜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라고 하는지 대번에 알겠더군. 놈들의 갑주가 종이처럼 뜯겨나가더라니까!”
“오! 하여튼 오늘 엄청난 강자들을 너무 많이 봤어! 이거 완전 눈이 호강했잖아!”
아리안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아름다움에 강인한 여전사의 이미지가 겹쳤으니 기사들은 초점 흐린 눈으로 그녀를 연신 흘긋거렸다.
갑주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아리안은 기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슬쩍 몸을 돌렸다.
“흐흐! 꽤 인기가 좋군.”
“저 정도면 괜찮지. 빵빵한 몸매에다 뽀얀 피부라니…….”
왕전과 북궁천소가 주고받은 말은 고스란히 아리안의 귀로 들어갔다. 그녀는 슬쩍 짜증이 솟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갑주를 정리한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저 사람…….’
나무에 등을 기대고서 먼 곳을 응시하는 혁련천후가 보였다. 그의 옆모습이 무척 눈에 익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영상이 흐르는 물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크 영주!’
그랬다.
나무그늘 밑의 사내는 그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사내의 옆에는 역시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붕대를 감고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카루가를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뭐야! 저 꼬맹이는…….’
“예쁜 여자, 성질은 별로구나. 쳇!”
‘저게!’
카루가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발끈한 아리안이 노려보자 카루가는 혁련천후의 등 뒤로 숨었다. 그때 혁련천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헉!’
아리안은 심장을 칼로 쑤시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혁련천후의 무심한 눈길은 이내 먼 곳으로 던져졌다. 카루가가 고개를 빠끔 내밀고는 아리안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무섭지?”
* * *
죽은 자들의 검이 모조리 카루가의 마법주머니 안으로 사라지자 모두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기사들은 승전에 대한 들뜸으로 꽤나 표정들이 밝았다. 참패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복수는 한 것이라는, 스스로의 만족에 가투소의 얼굴도 모처럼 밝았다.
중간 중간에 사냥으로 배를 채우며 이동하기를 반복한 그들은 며칠이 지나서 아르소의 초입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광활한 곡창지대의 풍요로움이 눈을 시원하게 했다.
그들은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잠시 후, 모두는 아르소의 영내로 진입했다.
영내를 구경하던 모두는 다소 의아한 표정들을 했다.
“뭐야? 이 분위기는…….”
거리는 지나치게 한산했다. 북방지역, 최고의 번화가라고 소문난 아르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케논 산맥에서 케이론 제국의 패배가 전해지면서 아르소의 영지민들 중, 상당수가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리안의 표정이 꽤나 무거웠다.
그녀는 간혹 보이는 영지민들을 보면서도 나서서 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전마에 몸을 맡겼다.
오백에 이르는 기사들이 전마에 몸을 싣고 시내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저마다 몸을 숨기고 문을 닫기에 바빴다. 비록 제국의 기사들이었지만 전쟁 중엔 적군이나 아군이나 일반 영지민들에겐 똑같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가투소의 표정에 씁쓸함이 어렸다.
제국의 기사들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물 한 잔, 꽃다발 하나조차 건네지 않았다.
비록 패잔병일지라도 기사들이 이동하면 관례처럼 행해지는 것이 그것일진대 무슨 유령 보듯 전부 몸을 숨기기 바빴다.
“고작 국지전의 패배에 이 정도로 가라앉다니, 제국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볼만 하겠군.”
가투소의 중얼거림을 들은 왕전이 히죽 웃었다.
“인기가 형편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가투소의 얼굴을 가득 채운 씁쓸함이 더욱 짙어진다.
저 멀리로 아르소의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유려한 풍경에 모두는 감탄했다.
아리안이 전마를 몰아 무리의 앞으로 달렸다. 그녀가 다가가자 성문이 열리며 집사를 비롯해 몇 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기사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성곽 주변에 펼쳐진 푸른 잔디밭에 전마들을 풀어 놓고 그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가투소만이 혁련천후 일행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많은 수의 시종들이 음식과 술을 잔뜩 들고 기사들을 찾았다. 곳곳에서 환호성과 휘파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성의 집사 쉘트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흠! 이제야 사람 사는 맛이 나는군.”
모처럼의 소란이 그는 무척 반가웠다. 아리안이 없는 동안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