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18화 (18/55)

제3장

아리안의 눈물

찌르르…….

우드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자 흑야는 전신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지금 그는 우드에게서 마법치료를 받는 중이다. 의술에 조예가 깊은 사공진무가 있었지만 마법공격에 의해 입은 부상은 마법치료만이 답이라는 우드의 말에 따른 것이다.

사공진무가 곁에서 눈을 반짝거리며 우드의 손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법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이 꽤나 흥미로웠다.

“형님! 효과가 납니까?”

“제법…….”

“이거 나도 좀 배워야겠군요. 중원에 돌아가면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습니다. 하하!”

우드는 땀을 뻘뻘 흘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포션이 통하지 않았다. 덕분에 신통치 않은 자신의 마나를 몽땅 쏟아 붓고 있었다.

그때 아리안이 들어섰다. 갑주를 벗고 화려한 옷을 걸친 그녀는 눈이 번쩍 뜨이도록 아름다웠다. 흑야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에게 던져졌다.

“좀 괜찮아지셨나요?”

“……!”

흑야는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아리안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가 부상을 입은 이유를 들어서 알기 때문이다. 대마법사 율튼과 싸우고서 살아남은 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표정을 고친 아리안이 활짝 웃었다.

“오해했었어요. 저분들을 노리는 줄 알고… 사과드려요.”

“상관없다.”

흑야의 냉랭함에 아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흑야를 다크 어쌔신으로 짐작했던 그녀는 그가 혁련천소 등을 노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아르소에서 그들 소식을 전했을 때, 흑야와 혁련소가 보였던 반응은 충분히 그렇게 오해하고도 남을 정도로 격정적이었다.

“식사들 하셔야죠. 내려오세요.”

그녀가 몸을 돌려 내려갔다. 사공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소도 그런 말을 하더군.”

“그랬습니까? 흐음…….”

우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치료가 끝났으니 내려들 가시지요.”

“흠! 형님! 일단 배부터 채웁시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지가 꽤 오래됐습니다. 하하!”

사공진무가 자기 배를 두드리며 걸음을 돌리자 흑야도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돌려본 그는 꽤 상태가 좋아진 듯, 느껴지자 옷을 걸치고 사공진무의 뒤를 따랐다. 뒤를 따르는 우드의 얼굴이 꽤나 굳어 있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마나를 지니고 계셨어. 도대체 이분들은…….’

치료할 때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서 스캔마법을 이용해 흑야의 힘을 살폈다. 그것은 마나의 양을 측정할 때나 몸속에 박힌 파편의 위치를 확인할 때 사용하는 마법이다.

아리안이 들어섰을 때, 순간적으로 감지되었던 흑야의 마나는 우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양이었다.

‘대마법사의 공격에도 살아남은 게 운은 아니었어.’

심호흡을 한 우드는 걸음을 빨리했다.

* * *

“대승을 거두고도 가만히 있다니, 웃기는 놈들이군.”

왕전이 가투소와의 대화 도중 요란 제국의 태도를 거론했다. 그의 식탁 앞에는 아르소의 명물인 맥주가 통째로 놓아져 있었다.

“국가 간의 전쟁이 무슨 무림 문파 간의 땅 따먹기와 같은 줄 아냐?”

북궁천소가 심드렁하게 받아치자 왕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성을 냈다.

“누가 네놈한테 물었냐? 그냥 술이나 처먹어, 자식아!”

“이런 백정새끼가…….”

둘의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조윤이 혀를 찼다.

“너희 두 놈은 언제 철들래?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하다.”

“뭐가?”

“그런 성질머리로 어떻게 무공을 배웠냐?”

“사돈 남 말하고 자빠졌네. 너도 그냥 술이나 처먹어라. 자식아!”

왕전의 걸쭉한 욕설에 가투소는 실소를 머금었다.

“제국전쟁은 양국 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전면전으로 확전된다면 제국과 관련이 있는 모든 왕국과 공국들도 일제히 전쟁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게 됩니다. 혹, 승리한다고 해도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제후국들이 그 틈을 노려 독립을 선언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란 제국도 그 점을 인식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연합전선?”

“그렇습니다. 사실 대륙엔 제국에 못지않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왕국과 공국들이 몇 있습니다. 홀베른 공국이 그 대표적인 곳입니다. 비록 수에서는 상대가 되질 않으나 대마법사에 근접한 상위마법사들과 수십의 마스터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혼란을 틈타 제국의 황실을 침공한다면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담대소천이 의문을 나타냈다.

“당연히 최소한의 방어병력은 남겨두지 않는가?”

“그들을 막아낼 정도의 병력이라면 최소 2개 군단과 상위마법사 열 명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국 간의 전면전에서 전력의 약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설혹, 그들이 왕궁을 노리지 않고 거래를 통해 어느 한곳과 동맹을 맺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승패는 갈린다고 봐야 합니다. 역사에서 그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담대소천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당분간 제국 간의 전면전은 없다고 봐야겠군. 물론 패배한 케이론 측에서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당장은 떠도는 패잔병들을 구출하기 위한 특수부대만을 파견했다고 하니 당분간, 우려했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테세우드 공작의 심중이 변수가 되겠지만 그분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잃은 마법병단은 대부분이 그분의 직속이었으니까요.”

가투소의 그 같은 말에 북궁천소가 묘한 빛으로 이죽거렸다.

“상대도 꽤 많은 마법사새끼들이 뒈졌지. 모조리 죽였어야 했는데…….”

“예?”

“흐흐! 아니다.”

가투소는 그들이 요란 제국의 마법사들을 반 이상 몰살시킨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들이 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요란 제국에서 텔레포트로 대규모의 마법병단이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가투소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요란 제국이 승세를 몰아 케이론 제국의 본토를 들어서지 못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혁련천후와 그의 일행들 때문이었다. 모든 군권을 쥐고 있는 케이시 공작은 그들의 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케논 산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마법사 율튼의 공격을 뿌리치고 자신들이 노렸던 자들을 데려간 그들이다.

만약 자신이 확전을 꾀하고 케이론으로 밀고 들어갔을 때, 난전 중에 그들이 자신을 비롯한 고위급인사들의 저격을 노린다면 막아내기란 무척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엇비슷한 전력이라면 마스터 급 고수들의 수가 승패를 가늠한다.

마법병단의 위력에선 요란 제국이 우월했지만 그들도 마스터 급의 고수들에겐 큰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그것 때문에 케이시 공작은 케이론 제국의 상징적인 인물인 테세우드 공작을 부수고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케이론 제국은 혁련천후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각설하고…….

아리안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들이 정말 소문의 흑안의 마검사들이 맞는 걸까?’

대륙에 흑발을 지닌 사람은 많다.

하지만 흑안을 지닌 사람은 마족, 외에는 없다. 마족이라면 당연히 백마법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족이 아니었다.

들어보니 이글스여단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단에 상주하는 마법사들에게 발각되었을 것이고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졌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의문점은 이들의 강력함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을 도륙하던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뛰었다. 마스터인 자신이 놀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투가 끝났을 때, 보여준 이들의 호흡이었다. 다소 숨이 가빴던 자신과는 달리 이들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것은 곧 자신보다 엄청나게 강력한 마나를 이들이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틀림없을 거야.’

이토록 강력한 힘과 흑안, 아리안은 이들이 소문의 그들이라 확신했다.

“꼬마야!”

왕전이 카루가를 불렀다. 양 볼을 과일로 볼록하게 채운 카루가가 그를 쳐다보자 왕전이 물었다.

“그쪽에다 연락 같은 것은 불가능하냐?”

“으응!”

카루가가 고개를 가로젓자 왕전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크흠! 그럼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단 말이군.”

카루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진천이 물었다.

“무조건 돌아오는 것은 확실하지?”

“응! 무조건…….”

카루가의 대답에 모두는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마법사는 분명한데, 세상에 저렇게 어린 마법사가 있었나?’

카루가를 바라보는 아리안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닌 마법주머니는 전설로 전해지는 드래곤의 마법창고에 뒤지지 않았다. 그 많은 검들이 들어갔음에도 부피는 작은 주머니 정도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이상한 존재들이야.’

아리안은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식히려고 식사에 열중했다.

* * *

혁련천후는 홀로 성의 첨탑에 올라 수려한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 있었다. 아들을 위기에서 구해냈지만 그는 지금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물론 살아서 돌아올 거라 믿었지만 믿음만큼이나 불안감도 컸다.

문득 중원에 있을 아내들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그녀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향수병인가…….’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의 얼굴이 아련함으로 물들었다.

“헤헤!”

뒤에서 카루가의 웃음이 들렸다.

“뭐 해?”

“많이 먹었느냐?”

“배가 터지려고 그래!”

배를 쑥 내밀고 손으로 퉁퉁거리는 카루가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난 누구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아.”

“후후! 그래?”

“형 생각하는 거지?”

“……!”

“나도 무척 보고 싶은데 참고 있어. 그러니까 아저씨도 참아! 내가 꼭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줄 테니까. 헤헤!”

“그래줄 수 있겠느냐?”

“헤헤! 난, 왕자야. 반드시 약속 지켜!”

혁련천후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루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슴이 아파온다. 지금껏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기억이 없다.

“아저씬 배 안 고파?”

“별로…….”

“흠! 내가 저 강물에서 싱싱한 생선을 잡아서 구워줘?”

“됐다.”

혁련천후가 몸을 돌리자 카루가는 옷소매를 잡고 바짝 붙었다. 둘은 느린 걸음으로 성곽의 계단을 밟으며 걸었다. 구불구불한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성안의 사람들이 둘을 보고는 뭐라 수군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다정한 부자지간이라며 부러워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며 이상한 눈초리를 보냈다.

아무리 작게 속삭여도 모두 생생하게 들렸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카루가는 여전히 자신의 팔을 잡고 있었다.

“화가 나면 본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더군.”

“응. 나도 그 모습이 싫은데, 화가 나면 어쩔 수 없어…….”

“변하지 마라. 넌, 지금의 이 모습이 더 좋다.”

“그게 쉽지 않다니까…….”

“화를 안 내면 되지 않느냐.”

“쳇! 그게 더 어렵지.”

* * *

케논 산맥 북부 평원에 주둔한 요란 제국 제1군단은 완벽한 시설의 설비를 마치고 도로를 닦는데 주력했다. 본토에서 그곳까지 진입할 진입로 개척은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었기에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었다.

투입 인원에는 포로로 잡힌 케이론 제국의 병사들도 2천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는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 말고도 오백여 명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최소, 남작에서 자작의 지위를 지닌 귀족들이었기에 작업에 투입되지 않았다.

포로라도 귀족은 최소한의 존중을 받는다. 그것은 수백 년을 내려온 대륙의 전통이자 불문율이었다.

“젠장! 패배는 지들이 해놓고 고생은 우리가 다 하는구나! 빌어먹을!”

“인마! 그래서 전공을 세워 작위를 받아야 하는 거라고. 제기랄! 그것 하나만 믿고 군에 투신했다만 첫 전투에서 포로가 되는 신세라니…….”

“신도 우리 같은 놈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을 거다. 이참에 종교를 바꿀까 생각 중이다. 젠장! 확, 요란 제국으로 전향을 해버려?”

“이 자식이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닥치고 돌이나 날라! 인마!”

포로들은 별도로 지정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군 귀족들을 바라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을 감시하는 적군보다 그들이 더 얄미울 지경이었다.

“잡담 금지!”

감독관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서야 그들은 잠잠해졌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종소리와 함께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포로들에게 지급되는 식사는 감자 1개와 허여멀건 수프가 전부였다. 반면에 같은 포로라도 귀족들은 고기가 지급되었다.

포로에게 지급되는 고기는 대부분 케논 산맥에서 사냥해서 잡아온 짐승들의 고기였지만 병사들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엔 자존심과 명예 때문에 음식을 거부하던 귀족들도 차츰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변해갔다. 어떨 땐, 배급을 놓고 다투는 일도 벌어졌고, 서로 결투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 모든 것이 요란 제국의 기사들에겐 즐거운 눈요깃거리였다.

“하하! 고상한 척하더니만 고기 한 점을 놓고 다투는 꼴이라니…….”

“원래부터 케이론의 놈들은 겉만 번지르르 기름이 흐르고 속은 똥으로 가득한 놈들이라 소문났었지. 직접 보니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군. 저런 것들도 작위를 받아 귀족이라 거들먹거리며 살았겠지?”

“하하! 놈들이야, 작위를 세습하는 제도를 가졌지 않느냐. 당연히 상대가 안 되지. 실력을 우선시하는 본 제국을 따라오려면 아마, 천 년은 더 지나야 할 거다.”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식사를 하며 저마다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에 대한 흉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식사는 푸짐했다.

군단 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황제의 특별포상이 있었기에 특별한 날에만 먹던 진귀한 음식들이 나날이 지급되고 있었다. 당연히 기사들과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참에 케이론 제국의 북부지역을 모조리 쓸어버리자고 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승리는 이래서 좋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제국들은 본격적인 전면전에 앞서 벌어지는 전초전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전군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 덕분에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가장 뛰어난 무장을 전초전의 선봉으로 삼는다.

그들로 하여금 적장과 일대일의 결투를 벌여 전군에 사기를 드높이는 방법을 선호했는데, 그러한 전투방식은 고대 때부터 이어져온 전투방식이었다.

물론 케논 산맥에서의 전투는 그런 것과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벌어진 전투형태였다. 워낙 많은 수의 병력이 전면전을 벌인 탓이기도 했지만 양측에 대마법사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땡! 땡!

갑자기 종소리가 울렸다.

“이건,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잖아!”

“서둘러!”

늘어졌던 기사들이 장갑을 갖추고는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갔다.

전마에 올라 포로들을 감시하던 기사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포로들은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상황을 주시했다.

“아군이 온 것은 아닐까?”

“설마, 이곳은 이미 적의 주력부대가 모조리 몰려들었다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토록 깊숙한 곳까지 오지는 않을 거다.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겠지.”

“그렇겠지…….”

잠시 희망을 품었던 그들은 이내 낙담한 빛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때였다.

쾅!

노역 현장의 끝부분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어찌나 강력했는지 대지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포로들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갔다.

쾅!

다시 폭발이 일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하늘로 솟구치며 주변을 온통 뿌옇게 만들었다. 우측에서 요란 제국의 기마병, 백여 기가 빠르게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잡혔다.

“분명해! 이건 아군이 온 거야!”

“제발…….”

낙담했던 포로들의 얼굴이 다시 희망으로 물들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던 전마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이며 순식간에 주변은 혼란에 빠졌다.

“지원을 요청하라!”

“마법병단에 통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라!”

다급한 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졌다.

“으악!”

전마들의 사이에서 황금빛이 번득이자 어김없이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황금색 갑주를 걸치고 그에 못지않은 찬란한 금발을 늘어뜨린 사내는 기마병들의 곳곳을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움직임이 워낙 빠르다 보니 기사들도 일제히 전마를 버리고 바닥으로 내려서서 상대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상당한 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고작 이따위들에게 패한 거야? 웃기지도 않는군.”

여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는 자신을 포위하며 서서히 좁혀오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가 검을 멈추자 죽음의 광풍도 멈추었다.

지켜보던 포로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지원부대라 여겼건만 달랑 혼자였던 것이다. 사방에서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을 뿐이었다.

“비켜라!”

기사들의 뒤쪽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

“궁병이다!”

“젠장맞을 놈을 죽여라!”

요란 제국의 궁병들은 다른 여타의 궁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궁술을 자랑한다.

화살에 마나를 싣는 기술은 케이론 제국도 할 수 없는 고차원적 기술이다. 위력이 10배가량 증폭하는 그것은 궁병 10명이 오우거 하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라 소문나 있었다.

케논 산맥에서의 전투에서도 궁병들의 활약은 대단했었다. 그런 이유로 기사들의 궁병에 대한 믿음은 대단했다.

“놈을 죽여라!”

로브를 걸친 자의 고함에 궁병들이 금발사내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금발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흥! 고작 그따위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지?”

쾅!

그가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동시에 마나를 두른 화살들이 그에게로 쏘아졌다.

지켜보던 포로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화살들이 금발사내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콰자자자자!

“으아악!”

“피, 피해라!”

예상은 빗나갔다.

황금빛을 번쩍 뿌리더니 일거에 10명의 궁병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모조리 죽여주마!”

제법 강인해 보이던 기사들이 사내를 막아섰다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것일까? 사내는 더욱 광포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검을 들어 막으면 검과 사람이 함께 동강이 났다. 화살을 쏘면 화살이 튕겨 날아가 엉뚱한 동료들의 목을 꿰뚫었다.

“으… 인간이 아니다!”

도주하는 기사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내는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도약거리를 보여주며 도주하는 기사들의 목을 잘라냈다.

“바보들! 뭐 해! 땅을 팔 힘이 남아 있으면 도망들을 가란 말이야!”

포로들의 귓속으로 생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제야 넋을 놓았던 포로들의 눈에 빛이 돌았다. 이미 귀족포로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섰던 감시하던 기사들을 때려눕힌 그들은 죽은 자들이 흘린 검을 주워 들고 싸움에 끼어들고 있었다.

갑주가 없었지만 그들은 힘이 넘쳤으며 용맹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비난하던 일반 사병들도 주변에 널린 검들을 주워 들고 한 무리를 이루면서 뛰었다.

“누가 너희들보고 싸우랬어?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도망가란 말이다!”

달려가던 병사들이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목소리가 뇌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케논 산맥의 서북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가면 제국의 변방인 아르소가 나온다.

“포로들이 탈출한다! 막아라!”

뒤늦게 발견한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전마를 몰아왔다.

“흥! 어딜!”

사내의 검이 포로들을 쫓아가던 전마들에게 떨어졌다.

어김없이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기사들, 짧은 시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달려들 생각을 잊었다.

공들여 닦았던 도로가 미처 다져지기도 전에 전마들의 발굽 아래 산산이 파헤쳐졌다. 금발사내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공간은 넓었고 기사들의 수는 많았다. 그의 공격범위를 벗어난 기사들의 검에 의해 뒤처졌던 포로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기사들과는 달리 일반 사병인 그들이 전마에 몸을 싣고서 달려드는 기사들을 상대하기란 계란으로 바위에 부딪히는 형국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서른이 넘어가는 포로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화해 대지를 뒹굴었다.

“젠장! 이러다가 모조리 다 죽겠어! 흩어져라!”

“흩어져 새끼들아!”

포로들은 사력을 다했다.

어떤 이들은 도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두 팔을 들어 올리다가 그대로 목이 잘려 쓰러졌다. 포로들을 사냥하던 기사들 앞에 황금빛이 번득이며 나타났다.

“후후! 사냥을 너무 실감나게 하는군. 이젠 너희들이 사냥감이 될 차례야!”

검이 번득이자 기사 둘의 수급이 하늘을 날았다. 질주하던 전마들이 황급히 방향을 틀어 금발사내를 피하고자 했지만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렸기에 스스로 그 앞에 목을 들이미는 결과로 이어졌다.

연이어 핏물이 터졌다.

싸움이 아닌 살육이었다. 기사들은 절망했다. 그 용맹하다는 요란 제국 1군단의 특수부대 소속인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쐐액!

허공을 찢는 소음과 함께 거대한 빛의 화살들이 금발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기사들의 얼굴이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지원군이 왔다!”

콰과광!

금발사내의 주변에 강력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여력에 휩쓸린 기사들이 전마와 함께 통째로 날아갔다. 실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모든 이들이 폭발이 일어난 지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자욱한 연기가 모든 것을 가렸다. 연기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강력한 폭발이었기에 사람이라면 죽었어야 옳았다. 연기에 가려 육신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을 적신 핏물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바닥은 파헤쳐진 돌들만 있을 뿐 사람의 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휘이익!

바람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옆으로 로브를 걸친 자들이 내려섰다. 모든 기사들이 그들에게 공경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놈은 살아 있다!”

나타난 마법사들은 모두 다섯, 그들은 좌우로 길게 늘어지며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뿌연 연기 속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살아 있다는 말에 기사들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후후! 고작 이 정도였어? 이 정도에 패배한 건가? 그 잘난 테세우드가…….”

시커먼 실루엣이 연기 사이로 비쳤다.

무릎까지 덮은 황금색 부츠가 먼저 연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팔 하나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육신과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구 사이로 늘어진 금발이 태양빛을 받아 눈부신 광채를 발산했다. 사내의 견갑과 흉갑은 핏빛처럼 붉었는데 그곳엔 드래곤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루안이었다.

놀라웠다. 불과 이틀 전에 케이론의 황궁에 있었던 루안이다. 텔레포트가 아니라면 이 시간에 이곳에 그가 있을 수는 없었다.

“신분을 밝혀라!”

“루안.”

루안은 짤막하게 이름만을 밝히고는 성큼 마법사들을 향해 걸었다. 팍!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루안의 갑주를 적셨던 핏물들이 붉은 안개처럼 솟아나며 소멸되었다. 마법사들을 응시하는 루안의 눈동자에 새파란 광망이 어렸다.

“켈베로스! 놈의 냄새가 네놈들에게서 나는군. 불쌍하게도 나 루안이 가장 싫어하는 놈의 수족이었구나. 후후후!”

쩌저저정!

루안이 걸어오는 주변 공간이 괴상한 소음을 울리며 요동쳤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공격으로 집중포화를 가했다. 공격이 작렬한 루안의 육신 주변이 파생된 마나로 난무했다. 칼날처럼 날카롭기 그지없는 마나의 파편들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베어버리고 쓰러뜨렸다.

“으… 끄떡없다!”

소용이 없었다.

“모두 죽어야겠어.”

루안의 눈동자에 붉은 광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법사들은 문득 루안의 눈동자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한한 공포가 몰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죽어가며 느낀 이승에서의 마지막 감정이었다.

* * *

케이시 공작은 통신석을 통해 급보로 전해진 소식을 접하고는 분통을 터트렸다.

적의 기습공격으로 수천의 포로들이 탈출했다고 전해왔다. 그 와중에 죽어나간 기사들이 수백이 넘었으며 지원을 하고자 달려간 마법병단의 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이게 말이 된단 말이냐? 고작 하나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다니…….”

그랬다.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적이 고작 한 명이란다.

심각한 표정의 대마법사 율튼이 케이시 공작을 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케이론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상당한 강자들을 대거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이번엔 금발이라고 했습니다. 지난번의 그자들과는 또 다른 강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마스터 급, 이상의 강자들은 본 제국의 정보망에 의해 모조리 감시되고 있는 상황이오. 그들이 케이론으로 향했다는 보고는 없었소.”

“각하! 대륙은 넓습니다. 수억의 인구가 세상의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강자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보셔야 합니다. 당장 저번의 그들만 하더라도 다시 붙으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자들이지 않았습니까?”

케이시 공작은 입을 열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속을 식히려 연신 냉수만 들이켰다. 율튼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케이론에서 어쩌면 전설로 전해지는 아이아스의 레어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만약 그들이 아이아스의 레어에서 용언마법과 그 외의 것들을 얻었다면 위험한 것은 본 제국이 될 것입니다.”

율튼의 그 같은 말에 케이시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생겨났다.

“율튼 공! 그건 지나친 근심이 아니오? 설사 그들이 용언마법을 얻었더라도 인간이 어찌 드래곤의 서적을 해석할 수 있겠소? 그리고 그것과 그놈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소? 설마 놈들이 그것 때문에 강해졌다고 보는 것이오?”

“답답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케논 산맥에서의 그자는 지금도 제 심장을 떨리게 만듭니다. 마치 마계의 발록을 보듯 사나운 눈동자는 소름이 끼칠 정돕니다.”

미간을 찌푸린 케이시 공작은 딱딱하게 굳은 율튼을 다소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율튼이 말을 이었다.

“제 마법이 그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죽음 직전에 처한 흑발청년을 구하려고 뛰어들었을 때, 그 엄청난 파워가 그에게 작렬했습니다만,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지 않았습니까? 마스터를 초월한 초인들이라도 불가능한 경지였습니다. 그걸 단순히 스스로 단련하고 수련하여 올라선 경지라고 보기엔…….”

케이시 공작도 그 부분에서는 인상을 쓰지 못했다.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장면이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울화가 불끈 치밀었다.

“테세우드와 쉐인! 두 놈만 견제하면 케이론은 별것이 아니라고 여겼건만…….”

“고정하십시오. 각하! 일단은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케이론에 잠입해 있는 스파이들을 통해 최대한 빠른 시간에 정보를 알아내겠습니다.”

“반드시 알아내시오! 율튼 공!”

그때였다.

찌이잉!

통신석이 울렸다. 율튼이 손짓을 하자 통신석에 불이 들어오며 누군가의 영상이 나타났다. 마법병단의 단주였다.

“조금 전 상당한 마나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직접 오셔야겠습니다!”

“내가 직접 가야 할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율튼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마법병단의 단주다. 그러나 영상 속의 얼굴은 꽤나 긴장한 듯, 보였다. 그것은 곧 마나의 움직임이 대단했다는 것을 뜻한다.

“각하! 다녀오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거든 즉시 연락하시오!”

빠르게 사령실을 빠져나가는 율튼을 보며 케이시 공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 때문에 그는 짜증이 가실 날이 없었다. 지금도 율튼의 표정을 보니 꽤나 심각한 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이아스의 레어라…….”

율튼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요란 제국으로서는 커다란 위협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아니야! 그게 사실이라면 군단 간의 전투에서 그들이 그토록 쉽사리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우일 뿐이다!”

한 개 군단이 몰살을 당했다.

율튼의 말처럼 그들이 아이아스의 레어에서 강력한 힘을 얻었다면 그런 패배를 용납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미치자 케이시 공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제아무리 전력에 여유가 있더라도 1개 군단을 버리지는 못한다.

“케이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너희들은 곧 본 제국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설사 너희들이 아이아스의 유물을 얻었다고 해도 우리에겐 세상이 모르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계의 전사들인 그들이 곧 우리의 전력으로 편입되면 그날이 너희, 케이론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케이시 공작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사령막사를 나섰다. 곧 있으면 베린스 공작이 새로운 부임지로 출발한다.

비록 연이은 실패로 자신의 눈 밖에 난, 베린스지만 지나치게 홀대할 순 없는 인물이 베린스 공작이다. 자칫 그가 자신의 정적들 편으로 돌아선다면 꽤나 골치 아플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 *

율튼은 마법병단의 척후조가 주둔하고 있는 산맥의 북부지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합 스물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곳은 산맥 내의 모든 마나의 움직임이 포착 가능한 주요거점이었다.

혹시 모를 적국의 마스터들의 습격을 대비해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기사들, 백여 명도 마법병단을 호위할 목적으로 상주하고 있었다. 마법병단의 책임자이자 마법사로는 드물게 백작의 작위까지 받은 샤르만은 율튼이 도착하자 황급히 그를 맞았다.

“상세히 말해 보아라!”

율튼은 대뜸 보고내용부터 물었다.

연이은 사건으로 그는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그것을 아는 샤르만은 막사로 걸음을 옮기면서 보고했다.

“놀라울 정도의 마나의 움직이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살펴보았느냐?”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결계를 세밀히 살폈지만 몬스터들을 제외하고는 걸려든 흔적이 없었습니다.”

막사에 들어선 율튼은 마법사들이 건넨 찻잔을 물리고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샤르만을 응시했다.

“대략 어느 정도의 양이었지?”

“텔레포트를 시전할 정도의 양은 충분했습니다!”

“뭔가 착각한 것은 아니냐? 설마 케이론의 쉐인이 다시 이곳에 왔을 리는 없지 않느냐?”

“혹시, 케이론에서 대대적인 마법병단을 보낸 것은 아닐까 의심됩니다만…….”

샤르만의 말에 율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마법병단만 보낼 리가 있겠느냐? 저번 전투에서 케이론은 전체 마법병단의 이할에 가까운 전력을 잃었다. 그런 그들이 마법병단만 보내겠느냐? 그러다가 모조리 죽어버리면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우는 것을 그들도 모를 리 없다!”

“하오면…….”

율튼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짐을 지고 막사 안을 천천히 오가며 생각에 잠겼다. 샤르만은 두 손을 모으고 율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존재가 율튼이다. 샤르만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명한 판단을 내려줄 거라 샤르만은 믿었다.

샤르만의 기대대로 율튼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정찰독수리를 산맥의 곳곳에 띄우고 그곳은 내가 직접 가보겠다. 너는 이곳을 지켜야 하니 아이들 몇 만 데리고 가겠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어허! 너는 한시도 이곳을 비워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됐으니, 민첩한 아이들 셋만 데리고 오너라.”

샤르만이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샤르만이 다소 젊어 보이는 마법사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율튼은 그들을 한차례 쓸어보고는 이내 마나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서북쪽의 능선으로 몸을 날렸다.

* * *

레이나 공주는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깊은 숲 속을 우회해서 산맥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 험악하다고 소문난 케논 산맥에 단신으로 들어선 그녀는 두려움 없이 빠르게 질주를 거듭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왔기에 요란 제국의 마법병단에 의해 마나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이 몰려오기 전에 빠르게 벗어나야 했다.

“흥! 꽁지가 빠져라, 돌아가는 꼬락서니 하고는…….”

그녀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다주고 황급히 돌아가던 쉐인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아무리 제국에 하나뿐인 대마법사라도 자신은 엄연한 제국의 공주다. 빈말이라도 함께하겠다고 나섰어야 옳았지만 쉐인은 오기가 무섭게 돌아가 버렸다.

모든 게 황실의 힘이 약해서라고 생각한 레이나 공주는 달리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두고 봐! 반드시 강력한 황권을 이루어낼 테니까!”

휙휙!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저 기본적인 무술만 익혔다고 여겼지만 아니다. 그녀는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라는 아리안에 버금가는 강자였다. 물론 그것은 자신과 극소수의 측근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얼마가지 않아 우측 숲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우거!’

거대한 그림자가 나무들 사이로 비쳤다.

케논 산맥에서만 서식한다는 블랙 오우거였다. 레이나는 황급히 방향을 반대편으로 틀었다. 싸워서 이겨낸다는 보장이 없는 몬스터가 바로 블랙 오우거였다.

크르르…….

숲에서 머리를 내민 오우거가 거대한 이빨을 드러내며 침을 흘렸다.

하지만 워낙 레이나 공주의 속도가 빨랐던 탓에 오우거는 가슴을 몇 번 주먹으로 후려치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뒤따르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레이나 공주는 적당한 곳에서 이동을 멈추고 거대한 나무의 꼭대기로 올랐다.

“아직 멀었어. 고작 반시간을 뛰고 지치다니…….”

가쁜 숨을 몰아 쉰 그녀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색색의 구슬들이 들어 있는 병의 마개를 열어 구슬 하나를 꺼낸 그녀는 그것을 삼켰다. 마법사들이 특별히 제조한 그것은 고갈된 마나를 단시간에 보충해 준다.

효과는 대단했다.

다소 거칠었던 그녀의 호흡이 대번에 잠자는 아기처럼 고르게 돌아왔다.

끼아악!

상공에서 소름끼치는 울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회색의 독수리가 그녀의 머리 위, 상공을 선회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흉측해…….’

레이나 공주는 시뻘건 독수리의 눈을 보고는 소름이 돋았다. 그때 독수리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레이나 공주가 있는 거목의 끝부분이었다.

‘사람을 공격하는 몬스터였나?’

레이나 공주는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미물 따위가!”

그녀의 검이 새파란 광채를 품었다. 하찮은 독수리 따위에게 드러낼 오러가 아니었지만 인간을 공격하는 것에 화가 치민 것이다.

서걱!

카악!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던 독수리가 그대로 두 조각으로 잘라지며 선연한 핏물을 뿜어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독수리의 주검을 바라보는 레이나 공주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검에 묻은 핏물을 마나를 주입시켜 태워버린 그녀는 땅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콰직!

꿈틀거리던 독수리머리를 그냥 사정없이 밟아버린 그녀는 시선을 전방으로 던졌다. 산맥 반대편엔 요란 제국 1군단의 주둔지가 있다. 그곳에 루안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나 공주는 다시 달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죽은 짐승들을 먹고사는 작은 포유류들이 사방에서 우글거리며 나타났다. 죽은 독수리의 사체는 그들에겐 만찬이었다. 짧은 시간에 독수리는 뼈만을 남기고 자연의 일부로 화해 소멸되었다.

* * *

상당한 속도로 질주하던 레이나 공주가 어느 순간, 두 눈을 부릅뜨며 급하게 멈추었다. 전방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율튼!”

백발백염의 노인이 질주하던 방향을 가운데를 막아서며 나타나 있었다.

그를 호위하는 젊은 마법사들은 검처럼 날카롭게 생긴 지팡이를 레이나 공주에게 겨누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쉐인이 다녀간 모양이군. 오랜만이오! 공주!”

레이나 공주를 바라보는 율튼의 눈동자엔 차가운 한기가 채워져 있었다. 레이나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흥! 요란 제국의 개가 되더니 낯빛이 무척 좋아졌군요. 율튼!”

“후후! 주는 밥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모욕적인 언사에도 율튼은 담담했다. 아니, 상당히 차갑고 냉철했다. 젊은 마법사들이 발끈하여 공격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율튼이 그들을 말렸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웃었다.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고도 텔레포트를 사용하다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오?”

“겁날 것도 없죠.”

레이나 공주는 당차게 나갔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재빨리 주변을 살폈지만 마땅히 도주할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린아이가 마스터에게 덤비는 것과 같은 꼴이다.

‘방법이 없어!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지?’

위기였다.

죽는 것보다 이들에게 잡혀 인질로 활용될 것이 더 두려웠다. 특히 눈앞의 율튼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알고 있는 인물이다.

“공주! 도망갈 곳은 없소. 품위를 손상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순순히 나와 함께 갑시다.”

“흥! 당신도 품위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여전히 냉랭한 레이나 공주를 율튼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도주할 방도가 없음을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앗!”

레이나 공주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순간 그녀의 검이 무지막지한 오러를 뿜어냈다.

쾅!

율튼의 지척에서 폭발이 일었다. 흠칫한 율튼의 양팔이 좌우로 교차되며 앞으로 뻗어졌다. 좌우를 섰던 마법사들도 일제히 레이나 공주가 섰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율튼의 얼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이런 방심을…….”

눈앞에서 레이나 공주가 사라지고 없었다.

재빨리 스캔 마법을 운용한 율튼의 귓속으로 동북쪽으로 멀어져가는 레이나 공주의 기운이 포착되었다.

“흥! 감히!”

율튼의 얼굴에 독한 기운이 서리더니 그대로 쏘아진 화살처럼 동북쪽으로 날아갔다. 헛손질을 했던 마법사들도 이내 방향을 틀어 율튼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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