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20화 (20/55)

제5장

아르소의 전운

다음 날 다크 영지의 모든 주민들이 평원에 모였다.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들던 사람들은 평원에 펼쳐진 요리의 향연을 보고는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곳곳에 걸린 솥들이 무럭무럭 김을 피워냈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구수한 향기가 평원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통째로 구워지는 돼지고기 주변엔 벌써 몰려든 아이들도 가득했다.

기사들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다고 달랬지만 배고픔에 주렸던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진천은 여전히 양손에 칼을 들고는 요리를 하기 바빴다. 모두가 신마성의 숙수 홍무에게 배운 솜씨였다.

사사삭!

그의 손이 거친 돼지고기는 어김없이 얇게 저며져 접시에 올려졌다.

먹기 좋은 크기와 두께로 썰어진 그것은 노인들과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나눠졌다.

그저 모이라고만 해서 모였던 영지민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면서 눈치를 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먹으며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면서 다크 영주의 부친께서 마련한 자리라고 말을 전해주자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게 감사를 했다.

물론 혁련소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에겐 폭정을 일삼던 테베스를 몰아내고 자신들에게 자유를 안겨준 그가 여전히 최고의 영주였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혁련천후는 성에서 바라보았다. 흑야가 그 옆에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즐겁게 먹고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혁련천후의 얼굴은 미세한 회한의 감정이 나타나 있었다.

“언제나 놈이 불만이었다.”

혁련천후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말이 흘러나왔다. 흑야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가볍게 눈을 찌푸린 혁련천후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어냈다.

“항상 놈이 강해지길 원했었다. 나보다 더 강해져서 더 위대한 절대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었지…….”

“그건 불가능합니다.”

혁련천후는 흑야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성곽에 섰다. 그가 나가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보내왔다.

가볍게 미소로 화답한 혁련천후는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 놈이 내게 이런 말을 하더군.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강호의 절대자도, 신마성의 주인도 다 싫으니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이지.”

흑야는 말없이 혁련천후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게 놈이 바랐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웃고 울며, 때로는 삶의 중심에서 운명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위대한 삶이었습니다.”

“위대한 삶이라…….”

흑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무사들에게 꿈을 심어주셨으며 그들에게 정의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악이 무엇인지, 그 악을 왜 벌해야 하는지를 실천하셨습니다. 위기에 빠진 강호를 구원하셨으며 세상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명멸해간 수많은 선조들 중에서도 주공과 같은 삶을 살아가신 분은 없습니다. 위대하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다면 그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혁련천후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너도 변했군.”

“예?”

“천하의 살왕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

“주공!”

흑야의 어깨에 그의 손이 얹혀졌다.

“수십 년을 함께했던 내가 아닌, 내 아들이 너를 변화시켰군. 최강의 자객에다 따뜻한 인간을 더 얹혀서 말이지.”

말뜻을 이해한 흑야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혁련천후의 얼굴에 이 세상에 온 이후, 처음으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려가지. 맥주라는 것을 마셔보고 싶군.”

* * *

케이시 공작은 연이어 들어오는 비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탈출하는 포로들을 제압하러 출전한 기사들이 몰살을 당했다. 그리고 레이나 공주를 발견했다고 전해온 율튼이 어이없게도 동행했던 마법사들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혼자서 낭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케논 산맥과 케이론 제국과의 접점지역에 주둔했던 2개 대대병력이 모조리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보고까지 이어졌다.

“이 모든 게, 설마 놈들이 벌인 것이란 말인가?”

그는 혁련천후와 그 일행들을 의심했다.

율튼의 보고에 의하면 케이론의 접점지역에서 그들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그들 때문에 레이나 공주를 잡을 호기를 놓쳤다는 것 역시 보고를 통해 들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놈들은 케이론의 인물들이었어.”

케이시 공작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케이론과는 상관없는 자들이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사실 테세우드 공작을 박살내고 그 상승세를 몰아 케이론의 본토를 쓸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들 때문이었다.

자칫 그들에 의해 마법병단이 또다시 피해를 입게 된다면 그는 회복불능의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은 그와 경쟁하는 정적들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파악에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서 지금껏 첩보수집에 심혈을 기울여온 케이시 공작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을 끌어내야만 한다.”

탁!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선 그는 벽에 걸어두었던 검을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출전준비를 하고 있는 각 부대장들을 소집시킨 그는 야외막사에서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낭패한 모습으로 회의를 듣고만 있던 율튼이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소 이른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이 최선인 듯 여겨집니다.”

“그들은 아직 완벽한 상태가 아니지 않소. 자칫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제국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오. 율튼 공!”

“그렇다고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분명 케이론의 짓입니다. 놈들도 제국전쟁을 대비하여 특수한 능력을 지닌 자들을 양성하고 있음은 각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초인들이 아니면 감히 해낼 수 없는 엄청난 파괴력이었습니다. 그놈들이 전면에 나선 것이 분명합니다. 본 제국도 그들을 보내어 응당한 복수를 해주어야 합니다.”

율튼은 다소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대마법사는 인간의 감정을 모두 초월한 경지에 오른 초월적인 존재들임을 감안하면 전혀 그답지 않는 태도였다. 그만큼 몇 번에 걸쳐 당한 것이 분했던 것이다.

가볍게 한숨을 고른 케이시 공작이 좌중을 돌아보며 다른 사안을 물었다.

“홀베른과 다른 왕국들의 움직임은 어떻소?”

“케이론 측과 동맹관계에 놓인 왕국들은 전시동원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본 제국에 우호적인 왕국들은 다소 케이론 제국을 얕보는 경향이 있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흠! 본 제국을 믿는 것은 좋으나, 그들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발 빠르게 움직여주면 좋을 텐데…….”

“그리하라고 사신을 보내겠습니다.”

“아니야. 아직은 그럴 단계는 아니네. 케이론 측에서 먼저 군사행동을 개시할 가능성은 없으니 정국을 지나치게 경색시킬 필요는 없네. 당장의 문제는 케논 산맥 근처를 돌아다니며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놈들을 색출하는 것이지. 제7강습여단은 언제 도착하는가?”

“약 보름 후면 주둔지로 입성할 것이라 전해왔습니다. 아! 황태자께서도 이번 출정에 직접 자원하셨다고 했습니다. 강습여단과 함께 오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뭣이! 황태자가 직접?”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케이시 공작의 미간에 깊게 파였다. 그에겐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자신의 조카이지만 가장 큰 정적이기도 했다.

“그가 온다면 아이언나이츠들도 오겠군?”

“전 부대가 함께 황궁을 나선 것으로 들었습니다.”

“뭣이! 전 부대가 모조리 나섰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폐하의 승인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케이시 공작의 주름이 더욱 깊은 골을 만들었다. 아이언나이츠는 말 그대로 강철처럼 강력한 기사들의 집단을 뜻한다. 황태자의 직속부대로서 오직 황제와 황태자의 명령만을 받는 그들은 요란 제국 최고의 무력집단이다.

율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전부 황궁을 비운다면 문제가 될 터인데…….”

“낸들 알겠소. 만약 홀베른이나 케이론에서 텔레포트를 이용하여 마스터들을 황궁에 난입시킨다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케이시 공작이 은근히 노기를 드러냈다. 율튼이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도 그걸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설마!”

“그들이 벌써 전면으로 나섰다는……!”

케이시 공작과 율튼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딱딱하게 굳어졌다. 부대장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회의를 이쯤에서 마치겠네.”

서둘러 막사를 벗어나는 케이시 공작의 뒤를 율튼이 쫓았다.

* * *

베린스 공작은 새로운 부임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부대의 편제를 새롭게 바꾸었다. 방어에 치중했던 전임 사령관의 잔재를 씻어내고 보다 공격적인 부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주둔 병력은 기병 1만에 보병 2만으로 여단 급에 불과했지만 베린스 공작은 이들만으로도 접점지역에 위치한 케이론의 영지들을 휩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다.

전임 부관이었던 소리아노가 전사하는 바람에 새로운 부관을 임명한 그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마법병단의 전력보강에도 힘썼다.

다행히 케이시 공작의 결재가 떨어져 스물에 달하는 상위마법사들을 휘하에 두게 된 그는 공을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케이론 제국 최고의 밀 생산지로 이름 높은 아르소를 첫 번째 공격대상으로 정하고 기회를 노렸지만 주변 공국들의 반발로 나날을 군사훈련에만 몰두하며 소일했다.

그가 새로 부임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베린스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사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새롭게 보낸 기사들마저 모조리 죽어버렸다. 몇 번에 걸쳐 계속되자 강한 기사들과 마법사 하나를 엮어서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발견하였느냐!”

베린스 공작은 차갑게 식어버린 아홉 번째 희생자들의 주검을 바라보며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순찰임무를 교대하려던 기사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의 흔적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역시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군의관을 불러 부검을 해서라도 사인을 알아내라!”

“그렇잖아도 지시를 내려놓았습니다.”

기사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죽은 자들의 몸에는 전혀 외상이 없었다. 격투를 벌인 흔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독에 당한 흔적도 없었다. 오히려 죽은 자의 혈색이 자신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였다.

그는 군의관들에게 부검을 하려던 마음을 바꾸었다.

“시신들을 1군단으로 보낼 준비를 하여라. 아무래도 율튼 공께 부검을 의뢰하는 것이 낫겠다.”

“율튼 공께 말입니까?”

“마법에 의한 살해 가능성이 높다. 마법의 종류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니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부관이 기사들을 불러 시신들을 들고 갔다. 죽은 자의 육신에서 마법의 종류를 알아내는 것은 대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베린스 공작은 서둘러 통신실로 이동했다.

* * *

연소민은 새롭게 생긴 숙부들과 차를 나누며 담소를 즐겼다.

이젠 제법 친숙해진 그들은 스스럼없이 숙질 간의 감정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거친 북궁천소와 왕전도 그녀에겐 더없이 따뜻하고 좋은 숙부였다.

과묵하지만 누구보다 광명정대한 심성을 지닌 담대소천은 레이나 공주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그들을 단순한 영지의 기사들로만 여겼던 그녀는 연소민이 숙부라 칭하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연소민과는 전혀 다른, 마족에 가까운 용모를 지닌 그들을 처음엔 무척 이상하게 여겼던 그녀는 연소민이 그들을 돌아가신 양부의 의동생들이라 둘러대자 그제야 스스럼없이 그들을 귀족으로 대했다.

그녀도 그들을 숙부라고 불렀다.

연소민이 중원의 언어로 그들을 숙부라고 불렀기에 뜻도 모른 채 그냥 따라하는 것이다.

탁!

“흐흐! 이거 제대로 발효되었군. 죽이는데?”

왕전이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술잔을 내려놓으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지금 붉은색을 띤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산에서 따온 과일을 주정에 담가 속성으로 발효시킨 중원식으로 제조한 과일주였다.

레이나 공주도 전혀 새로운 술맛에 연신 술잔을 비웠다.

“으흠! 향이 끝내주는군요. 도대체 이런 주조법은 어디서 배웠어요?”

“흐흐! 이게 다 홍무라는 놈의 작품이지요.”

“홍무? 홍무가 뭔가요?”

왕전이 북궁천소에게 눈을 부라리고는 둘러댔다.

“그게, 저희 고향에 술을 꽤 잘 담그는 놈이 있었소. 그놈한테 배운 것이오. 크흠!”

“그래요? 그럼 다음에 그 사람을 황궁으로 불러야겠군요. 폐하께서도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아요. 황궁의 요리사로 채용할까?”

“우리도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소만… 흐흐흐!”

왕전이 뒷말을 흐렸다.

연소민이 얇게 저민 쇠고기를 석쇠에 구워서 만든 먹음직한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담으며 환하게 웃었다.

“곧 황궁으로 돌아가셔야죠. 언제까지 이런 변방에 계실 순 없잖아요.”

“흠! 그렇지 않아도 오라고 난리들이야. 곧 있으면 황궁에서 마법사들이 이곳으로 올 거야. 그때 돌아갈까 생각 중인데… 뭐, 가기 싫으면 여기서 아리안과 함께 살지 뭐.”

“훗! 그러시던가요. 저야 언제든 대환영이랍니다.”

“숙부들은 어때요?”

레이나 공주가 셋을 돌아보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살짝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매우 고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제국의 삼대미녀에 속하는 미녀이니 비록 여자에 관심이 없는 그들이라도 가슴이 은근히 떨릴 정도였다.

“흐흐! 우리도 환영이오.”

“흐흐! 그래요?”

레이나 공주가 북궁천소의 흉내를 내며 웃었다. 그런 그녀가 말없이 묵묵히 술잔만을 기울이는 담대소천에게 시선을 던졌다.

“담대 숙부는… 아이 참! 아직 성이 입에 붙질 않네. 담대 숙부도 찬성이죠?”

담대소천은 옅은 미소로 대신 대답했다.

“원래 그렇게 말수가 적은 편인가요?”

대답은 왕전이 대신했다.

“저놈이 말수에선 주공과 막상막하지요. 하여튼 멋대가리라고는 개뿔도 없는 놈이지.”

“주공? 주공이 뭐예요? 주인을 뜻하는 건가요?”

“형님이시오. 우리 고향에선 형님을 그렇게 부르오.”

“아! 그렇군요. 숙부들 형님이면 무척 험악하게 생겼겠군요.”

그 말에 셋은 대답을 못했다. 연소민도 대답을 못했다. 지금껏 혁련천후의 용모를 잘생겼다, 못생겼다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그 존재감만으로 자신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 버린 그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아르소의 수비대장인 토레시라는 기사였다.

“마마! 북부2군단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레이나 공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한손을 가슴에 대었다. 레이나 공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전령? 통신이 아니고 전령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들라 이르세요.”

잠시 후, 전령이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그레이트 소드를 어깨에 두른 이십대 중반의 젊은 기사였다. 두 눈에 가득 어린 총기가 매우 인상적인 그는 품속에서 전령을 꺼내어 레이나 공주에게 건네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기다렸다.

전령을 읽어가던 레이나 공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모두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짧은 시간에 전령을 다 읽은 레이나 공주가 다소 짜증스러운 투로 전령을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요?”

연소민이 물었다.

“아니야. 그냥 귀찮은 일이 좀…….”

“말해 주면 곤란한 것인가요?”

“응! 나중에 알려줄게.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좋은 꿈들 꾸세요.”

레이나 공주가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자 남은 모두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전령을 전해준 기사가 막 일어서려던 것을 아리안이 잡았다.

“영주, 아리안이라고 해요. 2군단 소속이신가 보군요.”

“2군단 마법병단의 제노 허벤슨입니다.”

연소민을 바라보는 허벤슨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라는 그녀는 대륙에선 상당히 유명한 존재였다. 그녀 자신이 그걸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요란 제국에서 무슨 움직임이라도 있었나요?”

“저는 그저 전령을 전해줄 뿐이라 아는 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다고 해도 대답할 리 없음을 안 연소민은 알겠다는 말을 하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왕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북궁천소도 같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혹시 그것 때문에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흐흐! 모르지.”

담대소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둘의 표정을 보니 뭔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고를 친 모양이군.”

“사고는 무슨, 그냥 산에 놈들의 정찰병들이 보이기에 그냥 손 좀 봐줬다. 한, 아홉 번쯤 되니까 열 좀 받았을 거다.”

“손만 봐줬냐?”

“흐흐흐!”

담대소천의 물음에 왕전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둘을 번갈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인 담대소천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잘했다.”

“정말이냐?”

“그래, 장하다.”

* * *

루안은 케논 산맥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케이론의 포로들을 탈출시키고 마법병단을 몰살시킨 그는 이틀 전에 이곳으로 올라와 지금까지 머물고 있었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혹한이 몰아치는 케논 산맥의 정상에서 장비 없이 맨몸으로 이틀을 견뎌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루안의 얼굴엔 화색마저 돌았다. 갑주도 선홍색에 보라색 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흠! 언제나 이곳은 아름답군.”

눈을 감고 턱을 내민 그는 맑은 공기를 한껏 즐겼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흩날리더니 이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로 변했다.

갑자기 루안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바뀌었다.

“지금쯤 황궁에 돌아왔을까? 그냥 한번 가볼까?”

누구를 떠올렸는지 루안의 얼굴이 이내 잔잔한 미소로 물들었다. 콧등에 수북이 쌓인 눈송이를 입으로 불어서 날린 그는 케논 산맥의 북쪽 평원지대로 시선을 던졌다.

요란 제국의 1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꽤 강력한 놈이었어. 역시 대마법사들은 까다로운 놈들이야. 신경 좀 써야겠어.”

그는 율튼을 떠올리며 콧등을 실룩거렸다.

“좋아! 다음엔 반드시 베어주겠어. 누가 먼저 공격을 성공시키느냐에 달린 것이라면 속도에선 내가 앞서지. 후후!”

루안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넘쳤다.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눈은 자신의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소리쳤다.

“레이나!”

그는 레이나를 계속 외쳤다.

바보처럼 웃기도 하고 아이처럼 주변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쌓인 눈 위로 벌렁 누워 쏟아지는 눈을 입으로 받아먹으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루안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섰던 곳에 눈처럼 하얀 은색 갑주를 걸친 인영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발이 달빛에 부딪혀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뿌려대며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견갑의 끝부분에 새겨진 조각은 루안의 것과 동일한 드래곤의 문양이었는데 다만 그 색이 루안과는 달리 은은한 청색이었다.

한동안 케논 산맥의 북쪽을 내려다보던 인영의 입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서운 존재가 저곳에 있어. 누굴까? 인간이 지닐 수 없는 힘을 지녔다니…….”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내자 주변이 인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최고의 명장이라도 결코 붓으로 그려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름다움은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고혹적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모두 여덟, 그중 하나는 나도 장담 못 해.”

살짝 찡그린 미간은 내리는 눈마저도 부끄러워 피해갈 정도로 백옥처럼 희었다. 고혹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던 얼굴이 이내 환하게 밝아졌다.

“후훗! 어쨌든 나의 호기심을 이끌어낸 사람이니 만나는 봐야겠지?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미남이면 좋을 텐데…….”

* * *

베린스 공작은 1군단에서 지원 나온 마법사들을 별도의 부대로 편성하여 자신의 주변에 두었다. 본국에 서신을 보내 기사들의 수도 2천 이상을 늘여놓은 그는 아르소의 약점을 파악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파악되면 곧장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주변 공국들의 반발은 무시하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그들은 정치적으로 적당히 합의점만 찾으면 그뿐이다.

전면전을 염려한 측근들의 만류에도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케이시 공작도 공식적으로 그를 지지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의지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기에 그는 더욱 아르소 정벌에 박차를 가했다.

성공하면 비록 변방에 불과하지만 군량확보에 상당한 도움이 될 곡창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아르소를 점령하고 그곳에 군사를 주둔시킨다면 아르소의 뒤쪽에 위치한 케이론의 중,소 영지들은 완전히 고립되는 효과까지 얻어낼 수 있다.

더 크게는, 비록 공국이지만 왕국보다 강력함을 자랑하는 홀베른 공국과 케이론 제국의 교통로를 자신들이 중간에 막아서는 형국으로 이어진다.

전쟁 발발 시 케이론에 우호적인 홀베른의 병력이동이 사실상 그곳에서 막히게 된다. 당연히 요란 제국에선 그런 날을 대비해서 그곳에 홀베른의 병력을 막아낼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상주시킬 것이다.

베린스 공작은 그 부분을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자주 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국의 상당한 관심을 이곳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황제의 관심을 이끌어내어 출세를 보장받기 위해선 그것만이 최선이라 여겼다. 그는 전임 사령관을 비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낸 것들을 그가 먼저 행했더라면 벌써 상당한 공적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이곳보다 더한 한직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가는 베린스 공작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바로, 수색을 나섰던 기사들이 의문을 죽음을 당한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도 1군단에서 추가지원을 올 마법사들이 합류하면 쉽게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 * *

끼아악!

거대한 독수리가 아르소 상공을 배회하며 소름끼치는 울음을 토해냈다.

그 크기가 와이번이라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독수리들은 붉은 광망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아르소의 곳곳을 누볐다. 독수리들의 붉은 눈동자만큼이나 섬뜩한 광망을 발하는 존재가 지상에서 독수리들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흑야였다.

그는 아르소와 다크의 접점지역을 배회하는 독수리들을 보며 눈빛을 발했다.

‘놈들이야. 중원에서 나와 소를 쫓던 그 독수리들…….’

그랬다.

금역의 상공에서 거대한 불꽃 공격을 퍼부었던 그 독수리들의 눈빛과 지금 저 하늘을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눈빛이 닮아 있었다. 소름끼치는 울음 역시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땐 그저 지나쳤던 부분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인 이곳에서 보게 되자 의구심이 강하게 생겨났다.

‘중원에선 서식하지 않는 거대한 놈들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놈들이 그곳으로 넘어갔다는 말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신교의 놈들이 저놈들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지?’

진천이 다가왔다.

“뭘 그리 유심이 보십니까?”

“저것들…….”

“좀 크긴 하지만 그냥 독수리네요. 눈빛이 시뻘거니 재수 없게 생긴 놈들이군요. 그래도 그 와이번인가 하는 놈에 비하면 아주 귀엽게 생겼습니다. 하하!”

웃던 진천은 흑야의 태도가 지나치게 무겁자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표정을 바꾸었다.

“저놈들, 중원에서도 보았었다. 소와 함께 놈들의 추격을 받을 때 말이지.”

“예? 그게 정말입니까?”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확실하다.”

농담이지요, 라고 말하려던 진천은 흑야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보고는 열려던 입을 닫았다.

그때 상공을 배회하던 독수리들이 서북쪽으로 날아가며 사라졌다.

“놈들이 사라져간 지역이 어딘지 아느냐?”

“요란 제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곳이 아닙니까.”

흑야가 몸을 돌렸다.

“주공을 만나야겠다.”

“그렇잖아도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팍!

둘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연소민은 자신의 방에서 성곽을 오가며 훈련에 몰두 중인 가투소와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레이나 공주가 이곳에 온 까닭에 가투소는 복귀하지 않고 줄곧 아르소에 머물렀다. 그는 꽤나 이곳, 아르소가 좋은 눈치였다.

수려한 풍경에 넓은 곡창지역과 온순한 영지민들은 자신이 살았던 제국의 거대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따뜻함과 소박함이 있었기에 그는 수련 도중에도 영지민들이 일하는 경작지로 내려가 그들의 일손을 돕고는 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그런 가투소가 불만이었다. 그들은 대도시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출세를 하려면 대도시가 유리했다. 이런 오지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모두는 여겼다.

그러나 수련만큼은 모두가 열심이었다. 무기력하게 패했던 케논 산맥에서의 전투와 혁련천후 일행이 보여주었던 강력함이 동기요소로 작용한 탓이다.

“으랏차!”

챙! 챙! 챙!

기사들의 기합성이 성곽 주변을 울렸다.

“응!”

연소민의 눈동자에 살짝 빛을 발했다. 기사들이 수련하는 성곽에 담대소천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옛 생각이 나신 건가?”

그가 명 제국의 도독출신임은 중원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담대소천의 얼굴이 가볍게 찌푸려져 있음을 본 연소민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후훗! 오합지졸로 보시는구나.”

“당연하지.”

뒤에서 거친 음성이 들렸다. 연소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왕전이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섰다.

“놈의 눈에 저런 오합지졸들이 눈에 차겠냐. 아마 몸이 근질거려 죽을 맛일 게다.”

“중원과는 전투방식이 완전히 다른 걸요. 이곳엔 장거리 공격이 가능한 마법병단이 있어요.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법병단의 전술에 맞추어 군사훈련을 시켜요. 케이론 제국도 마찬가지에요.”

“전쟁이 별거냐. 먼저 쓸어버리는 놈이 이기는 거지. 아무튼 소천, 저놈은 이 세상에서도 아마 최고가는 명장이 되고도 남을 놈을 거야. 때론 강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놈이니까.”

“저도 숙부님의 생각에 백번 동감이랍니다. 내려갈까요? 숙부님! 오늘 메뉴는 특별히 중원식으로 했답니다.”

“흐흐! 그거 좋지.”

둘은 성의 연무장 뒤편에 마련된 넓은 야외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련했던 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식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형 솥에선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며 구수한 냄새를 사방으로 흘렸다.

“한 끼에 들어가는 돈만해도 엄청나겠군. 저놈들에게 돈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

“공주님께서 금과 보석을 대신 내주셨어요. 저분들이 몇 년은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이 주셨으니 돈 걱정일랑 마세요.”

“그 싸가지가 그런 면도 있었군.”

“호호! 그럼요.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데요. 숙부님들께도 요즘은 잘하시잖아요.”

“그래도 싫다! 노랑머리에 재수 없는 시퍼런 눈깔하고는…….”

“어머! 저도 지금 딱, 그 모습인데요?”

“흐흐! 너야 속에 다른 모습이 있질 않느냐.”

둘은 웃으며 사람들도 북적대는 식당의 가운데로 걸었다. 담대소천와 북궁천소는 이미 탁자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들! 끼니때는 제때 챙기는군.”

“오늘 식단이 제법이야. 이 세상에서도 자주 해먹었던 모양이지?”

연소민을 바라보는 북궁천소의 눈빛은 꽤나 따뜻했다. 중원에서의 그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본능이었겠죠. 살면서 저도 모르게 조금씩 생각이 나더군요. 해서 가끔 만들어 먹곤 했었어요. 맛이 별로라도 많이 드세요. 숙부님들.”

“흐흐! 술은 없냐?”

“훗! 그러실 줄 알고 제일 독한 것으로 준비했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연소민이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자 왕전도 둘의 옆에 털썩 앉으며 담대소천의 어깨를 툭 쳤다.

“심심하냐?”

“즐거울 것도 없다.”

“심심하면 저놈들을 한번 단련시켜 보던가. 뭐, 근골이 별로라서 제대로 따라올 순 없겠지만 저, 가투소라는 놈은 잘만 가르치면 꽤 유능한 놈이 될 것 같아.”

그 말에 담대소천이 가투소를 흘긋 쳐다봤다.

“의지가 남다른 친구지. 눈빛도 꽤 마음에 들고…….”

“화산의 꼴통들하고 비슷하지?”

“그렇더군.”

북궁천소가 끼어들었다.

“쓸데없이 엉뚱한 놈들한테 힘 쏟을 필요가 있을까? 저놈들은 공주가 돌아갈 때, 함께 돌아갈 놈들이다. 다시는 못 볼 놈들이란 말이지. 차라리 소민이가 영주로 있는 이곳 놈들을 수련시키자고.”

“오호! 그렇군. 내가 그걸 생각 못했네. 흐흐! 개차반, 제법인데?”

“뭐, 개차반? 이 새끼가…….”

“그만들 해. 소민이 온다.”

“끙! 빌어먹을 백정새끼!”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둘은 연소민 앞에선 언제나 순한 양이 되었다. 연소민이 양손에 잔뜩 술병을 들고 담대소천의 옆에 앉았다.

“이게 대륙에서 가장 독하다는 여신의 키스라는 술이거든요? 지금껏 이걸 한 병 이상 마신 사람이 없다고 해요. 어때요? 한번 도전해 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방금까지 으르렁대던 둘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돈다.

“크흐흐! 이곳의 약골들하고 비교하는 거냐? 있는 대로 몽땅 가져오너라.”

“크허허! 차반아, 내하고 내기할까?”

“흐흐! 좋다 백정새끼야! 대신 내공 없이 마시기다?”

“흐흐! 당연하지. 지는 놈이 저 산속에 들어가서 두 발 달린 소 새끼를 잡아와 가죽을 벗겨 외투를 만들어주는 거다. 알겠냐?”

“네놈 덕분에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게 생겼군. 흐흐흐!”

연소민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다 이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 미노타우르스를 말씀하는 거군요. 두 발 달린 소 새끼? 호호!”

“거, 소 새끼 이름이 되게 복잡하군. 자식아! 시작이다.”

왕전과 북궁천소의 본격적인 술내기가 시작되었다.

연소민은 즐거운 표정으로 음식을 잘게 썰어 안줏거리를 만들었다. 둘의 술내기가 사람들 사이로 퍼져가자 이내 주변은 구경하러 몰려든 기사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가 기가 질린 표정으로 멍하니 둘을 응시했다.

어지간한 주당도 한 병을 다 마시면 하루를 꼬박 누워 있어야 하는 술이 바로 여신의 키스다.

하지만 둘의 주변은 벌써 빈병 네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러고도 둘이 멀쩡하다는 것이다.

언제 왔는지 레이나 공주도 연소민의 옆에 앉아 마치 괴상한 몬스터를 보듯, 마냥 인상을 찌푸린 채, 구경했다.

“담대 숙부도 끼시죠?”

레이나 공주가 담대소천에게 말을 건넸다. 셋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친근감이 묻어났다. 담대소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사람이라서…….”

“훗! 그럼 저 둘은 짐승이네요?”

“비슷하지.”

결국 둘은 다음 날 아침까지 술판을 벌이고서야 승부를 보았다.

결과는 마지막에 한 병 남은 술병을 먼저 낚아챈 왕전의 승리로 이어졌다. 물론 북궁천소는 무효를 주장하며 불복했다.

하지만 승부엔 운도 중요하다며 담대소천이 왕전의 손을 들어주자 투덜거린 북궁천소는 30분 만에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를 잡아와 가죽을 벗기고야 말았다.

* * *

혁련천후는 귀엽게 생긴 꼬마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어머니는 괜찮으실 거다.”

“정말 저분이 엄마의 병을 고쳐주신단 말이세요?”

“그는 훌륭한 의원이다.”

루크는 자신의 엄마를 진찰하는 사공진무를 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쥐어진 작은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후!”

사공진무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일어섰다.

루크가 혁련천후를 올려다보았다.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가 사공진무에게 물었다.

“상세는?”

“한잠 자고 일어나면 케논 산맥을 뛰어다닐 겁니다.”

환하게 웃는 사공진무에게 혁련천후는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크가 벌떡 일어서며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우리 엄마가 다 나은 건가요?”

“당연하지. 이 아저씨가 꽤 유명한 의원이거든. 이제 됐으니 넌 아저씨하고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깨어나실 때 너의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면 더 좋아하실 거다.”

“알았어요. 밥 많이 먹고 씩씩해질게요.”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자! 가볼까?”

사공진무가 루크를 품에 안고는 밖으로 나갔다.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을 흘긋 쳐다본 혁련천후도 등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국경지역에서 돌아온 흑야와 진천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주공!”

“거처로 가지.”

셋은 혁련천후의 거처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긴 그들은 원형의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이곳 기사들의 말로 요란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 병력도 늘어나고 접점지역에서 노골적인 도발까지 해온다고 말이야.”

잠시 뜸을 들인 혁련천후가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놈들의 진영으로 가봐야겠다. 가서 전체적인 상황을 좀 살펴보는 것이 좋겠어.”

“이 세상의 일에 관여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윤이 조금은 놀란 빛으로 물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어차피 이들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하! 당연히 군림하며 살다가 가야죠. 까짓것 별로 대단한 놈들도 없던데요?”

“아예, 왕국을 하나 건설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사공진무와 진천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조윤이 다시 물었다.

“주공의 생각도 이놈들과 같습니까?”

혁련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가 아끼고 소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냥 지켜주고 싶을 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조윤이 일어서자 사공진무와 진천도 따라 일어섰다. 그때 흑야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

일어섰던 모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흑야를 돌아봤다. 혁련천후도 담담한 빛으로 흑야를 응시했다. 흑야는 중원에서 자신이 겪었던 것들과 조금 전, 상공을 배회하던 독수리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이 돌았다. 조윤이 가볍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의도적으로 공간을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넘어가서 신교와 엮였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로선 전자가 좋겠지. 의도적으로 넘어갔다면 누군가는 차원을 오가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찾아낼 방도가…….”

이래나 저래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천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당장은 두 가지 방법뿐입니다. 황당무계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이라는 놈을 잡아서 족치거나, 아니면 대마법사들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두 번째 방법이 현실성이 높긴 합니다만, 셋밖에 없다는 그들도 다른 차원으로 오가는 텔레포트가 가능한지는 직접 잡아서 족쳐보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방법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드래곤을 찾는 것 외엔…….”

사공진무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 드래곤이라는 놈이 정말 존재하는 생명체가 맞긴 한 걸까?”

“모르지. 듣기에 놈이 마법이라는 것을 인간 세상에 퍼트렸다고 하더군. 한마디로 마법의 조종이 되는 셈이지.”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 간단하게 해결되는데… 쩝!”

모두는 드래곤을 지나가는 개쯤으로 여겼다. 나라 전체가 덤벼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말이다. 드래곤을 모르니 당연했다.

“차라리 그때 놈을 사로잡았어야 했다.”

혁련천후의 자조 섞인 말에 조윤이 위로했다.

“그땐 소의 상태가 워낙 급박해서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조금만 늦었으면 소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하하! 곧 다시 잡을 기회가 있겠지요. 그땐 저희들이 꽁꽁 묶어서 대령시키겠습니다.”

진천도 환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혁련천후는 율튼을 끌고 오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저희는 놈들의 진영으로 잠입해서 정보를 알아오겠습니다. 진무는 이곳에 있어라.”

“무슨 일이 터지면 부르세요.”

* * *

스스슥!

조윤은 나무 위에서 요란 제국의 군진을 살폈다. 진천도 다른 각도에서 면밀히 곳곳을 살피며 눈빛을 발했다. 흑야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간 것이다.

“대단한 숫자군요. 기병만 거의 일만에 육박합니다. 이 정도면 변방의 경계 병력으로 봐주기엔 지나친 규몹니다. 게다가 마법사들까지 있습니다. 이거 어느 놈이 부대장인지는 몰라도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입니다. 형님!”

진천은 군영의 중심부에 위치한 막사를 가리켰다.

막사 앞에 로브를 걸친 자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머리를 맞댄 모습이 보였다. 조윤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소민의 말로는 상주병력이 수천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놈들이 목적을 가지고 수를 늘인 모양이다. 저 정도 전력이면 아르소와 다크 영지의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겠어.”

“우리가 있잖습니까? 하하!”

“그렇긴 하지.”

둘은 나무를 내려와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은밀하게 접근했다. 앞서 걷던 진천이 손을 들어 걸음을 세웠다.

“결계가 쳐졌군요.”

둘은 잠시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결계에 걸린다고 해봐야 위험한 상황에 처할 그들이 아니지만 그래도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자 둘은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진천이 우측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죠.”

사사삭!

둘의 육신이 그림자처럼 우측으로 이동할 때였다.

“헤헤! 여기 있었구나.”

“흡! 이 자식이, 놀랐잖아!”

그들이 이동하는 방향의 허공에 카루가가 손을 흔들며 둥둥 떠 있었다. 진천이 빨리 내려오라는 시늉을 하자 어느새 카루가는 진천의 옆에 나타나 있었다.

“여긴 웬일이냐?”

“심심해서…….”

“주공이 계시잖아.”

“쳇! 어디 가고 없어. 나만 빼놓고…….”

조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말씀도 없이 어딜 가셨단 말이냐?”

카루가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자신들에게 말없이 움직였던 적이 없었던 혁련천후였다.

“그냥 바람쐬러가셨겠지요. 마무리 짓고 우리도 돌아가야죠.”

“넌, 함부로 날아다니지 말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어!”

조윤이 엄포를 놓자 카루가는 고개를 재빨리 조윤의 팔을 잡았다. 진천이 그런 카루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고 치면 혼난다.”

“사고 안 쳐.”

“좋아. 사고만 안 치면 반말해도 봐준다.”

“반말이 뭐야?”

“됐다.”

셋은 다시 본연의 임무로 들어가 빠르게 요란 제국의 군영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카루가가 숲 안에 가득한 과일을 따겠다고 떼를 쓴 것 말고는 별다른 탈 없이 무사히 정찰을 마친 셋은 해질녘이 되어서야 다크 영지로 돌아갔다.

* * *

우우웅!

주변 공간이 심하게 요동쳤다.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우드는 마나를 조심스럽게 다스리며 천천히 손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희미한 원형의 빛이 생겨났다.

“우훅!”

순간, 거친 숨결이 토해지며 우드는 그 자리에 털썩 팔을 짚고 무릎을 꿇었다.

“헉! 헉! 역시 아직은 무리구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적셔진 그는 한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좀처럼 숨이 진정되지 않자 뒤로 벌렁 누우며 축 늘어지는 우드의 입가로 가는 핏줄기가 비쳤다.

“틀렸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헉! 헉!”

소매로 피를 닦아낸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땅을 짚고는 간신히 일어섰다. 힘이 빠져나간 다리는 한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아직 멀었어. 오만한 놈들의 콧대를 꺾으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다.”

쿵!

우드의 주먹이 나무에 작렬했다.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주르륵 땅으로 흘러 떨어졌다. 초점 흐린 눈동자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했다. 호흡이 조금 진정되자 나무에 등을 기대고는 멍한 얼굴로 밤하늘을 응시했다.

“휴…….”

분노가 사라지자 서글픔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생겨났다.

사라진 아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내 두 눈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모두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우드는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그는 매일 밤, 남몰래 피나는 수련을 해왔다.

자신의 아들을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을 만나, 그를 꺾어야만 했다. 그래야 아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감당할 존재가 아니었다. 대마법사에 준하는 엄청난 실력자인 그를 꺾으려면 자신도 흑마법의 상위 포지션까지 올라야만 승부가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은 2년 전부터 더 이상의 높은 경지로 오르지 못하고 현재의 수준에서 성장이 멈춰버렸다. 3서클의 백마법사만 만나더라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수준이다.

“빌어먹을!”

쿵!

우드의 주먹이 다시 피를 뿌리며 나무를 후려쳤다.

“그러다가 손이 남아나지 않겠군.”

뒤쪽에서 들려온 차가운 음성에 우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혁련천후가 그곳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수련 중이었나?”

“예……!”

혁련천후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의 소용돌이에 살짝 이채를 발했다. 양이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기운의 종류가 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금역의 혈지에서 느꼈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마계와 계약하면 모두 같은 종류의 기운으로 바뀌는 것인가?”

“강하고 약함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마나의 속성은 같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놈도 마계의 힘을 이었군.’

아들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자의 기운이 우드과 같았다. 그렇다면 그도 마계의 인물이거나, 아니면 우드처럼 마계의 존재와 계약을 맺은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팍!

고개를 숙였던 우드는 바람이 살짝 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혁련천후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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