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아이아스의 레어를 찾아서
카루가는 하품을 하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느닷없이 수많은 질문을 퍼붓는 혁련천후에게 정성껏 대답해 준 그는 졸린 눈으로 진천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는 눕더니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혁련천후는 암울한 기색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마계의 인물이라면 카루가가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계약을 맺은 자가 스스로 밝히기 전에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고 했다. 결국 그자를 찾아내는 것만이 방법이라는 결론이었다.
조윤이 그를 위로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주공! 반드시 돌아갈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생각을 바꿔야겠어.”
“예?”
“드래곤의 레어라고 했나? 케논 산맥에 있다는 그것 말이다.”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그건 왜……?”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창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연 혁련천후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케논 산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곳으로 간다. 드래곤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는 저곳 말이다.”
“주공!”
“왠지 실존할 거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설사 없더라도 찾아는 봐야겠어. 아르소에 전령을 보내, 소민을 지켜주며 기다리라고 전해라.”
“그럼 저희들도 함께 가는 겁니까?”
진천의 물음에 느릿하게 몸을 돌린 혁련천후는 조윤을 응시했다.
“너와 흑야는 이곳을 지켜라. 진천과 진무만 나와 함께 간다.”
“저희들도 함께 가겠습니다.”
조윤이 나서자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를 놈들의 도발을 생각해야지. 소가 아꼈던 이곳이 피에 잠기는 건 용납하지 못하겠다. 너희들이 지켜라. 이곳을…….”
혁련천후는 조윤과 흑야에게 몇 가지 당부를 건네고는 거처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문이 열리며 우드가 들어섰다. 여전히 지친 기색이 다분한 그는 들어서기가 무섭게 무릎을 꿇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데려가주십시오!”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우드의 눈에 어린 열망을 읽어낸 그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곳이 위험하다고 너희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목숨 따위 잃어도 상관없습니다. 아이아스의 레어를 찾는 데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리고 찾아낼 확률이 높은 방법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혁련천후와 모두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단호한 결의를 얼굴 가득 품은 우드가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데려가야만 말하겠다는 것으로 보이는군.”
“죄송합니다. 가고 싶습니다.”
“좋다. 출발은 내일 아침에 할 것이니 각자 거처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도록.”
* * *
“그러니까, 그 작자를 찾으려면 직접 감옥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그가 요란 제국에 수감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진천은 황당한 표정으로 우드를 쳐다봤다.
황당하기는 혁련천후와 사공진무도 같았다. 카루가만 그저 이들의 대화하고는 상관없이 싱글벙글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 풍경을 구경하기 바쁜 모습이다.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놈이 허풍을 떨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군. 그건 왜지?”
“그는 대륙을 통틀어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전직, 드래곤 헌터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 그의 집을 요란 제국에서 압수수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집에서 드래곤의 뼈가 대량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물론 소문일 뿐이지만 워낙 유명했던 자였기에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습지요.”
진천이 실소를 머금었다.
“우습군. 그런 유명한 작자가 황족을 간음하고 감옥에 갇혔다니… 살려둔 요란 제국도 우습긴 마찬가지네. 구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중죄인을 살려두다니 말이야. 하여튼 요상한 곳이다. 이곳은…….”
“어쩌지. 주공 정말 감옥으로 들어가 볼까요?”
사공진무의 말에 우드가 기겁을 하고 나섰다.
“그곳은 일반 감옥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지는 곳이 아니며, 들어간다고 해도 살아서 나오기가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건 왜? 무슨 지옥에다 가두기라도 하는 거야?”
가슴을 쓸어내린 우드가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곳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소멸성 마나홀이 형성된 곳이라고 합니다. 소멸성 마나홀이란 인간이 지닌 모든 마나를 저절로 소멸시키는, 그야말로 순수한 인간의 기운만을 남겨두고 모조리 빼앗아 가버리는 지옥과도 같은 곳입니다.”
“소멸성 마나홀? 거, 이름 하나 되게 복잡하군.”
“마스터들도 그 안에 들어가면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되는 것이지요. 물론 초인도 마찬가집니다. 주로 정치범들이나 역적을 도모했던 자들을 가두는 곳인데, 거의 모든 제국에 하나씩은 있습니다.”
“하하! 마나를 자랑하기 바쁜 이 세상 놈들에겐 정말 지옥이 따로 없겠군.”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어지간한 죄로는 들어갈 엄두도 못 내겠군. 죄목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지?”
“……!”
우드는 그의 눈빛을 보고는 즉답을 못 했다.
말해 주면 정말로 그렇게 해서라도 들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드가 머뭇거리자 진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간단하겠네요. 그 사냥꾼처럼 황실의 여인들 중, 하나를 응응 해버리면 되지 않겠… 윽!”
진천의 뒤통수에 사공진무의 주먹이 작렬했다.
“추잡한 생각하고는…….”
“그럼 자식아! 한 천 명쯤 살인이라도 해버릴까?”
“끙!”
사공진무도 입을 닫았다.
“무조건 큰 죄를 짓는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단순한 살인자들은 붙잡힌 도시에서 판결을 거친 후 곧바로 처형당합니다. 그곳은 마스터들이나 적국의 장수 같은 유명 인사들만 가두는 곳이라…….”
“젠장! 복잡하네. 그러니까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극악한 죄악을 저질러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황실에서 직접 운영하고 관리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유명인들이기에 처형할 때면 제국의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쏠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제국에서도 관심을 보일 정돕니다. 요란의 황제 입장에선 자신이 정치적으로 불리할 때, 국면 전환용으로 써먹기엔 그저 그만인 셈이지요.”
“추잡하기는 이곳이나 저곳이나 똑같군. 주공! 어쩌지요? 잠입이 불가능하다면 죄를 짓고 잡혀가길 바라야 하는데, 죄를 범해도 반드시 그곳에 수감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진천이 혁련천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방법은 가면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
혁련천후는 생각을 정리하고 당장은 요란 제국으로 들어가는 것에 신경을 썼다. 모두는 빠르게 국경지역으로 말을 몰아 달렸다. 그리고 2시간이 지나,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이라고 해봤자 양측의 군사들이 커다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아르소와 다크의 접점지역으로 제국에서 가장 외곽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대규모 군사행동이 불가능한, 무척이나 좁고 거친 지형을 지니고 있었기에 양측의 군사들은 고작 수백에 불과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겠습니다.”
주변 지형을 살펴본 진천이 그렇게 결론은 내리자 모두는 말에서 내렸다. 사공진무가 우드를 보며 투덜거렸다.
“쩝! 너도 순간이동이라는 텔레포트를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우드는 머리를 긁적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카루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거 내가 할 줄 아는데…….”
“뭣이! 정말이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카루가를 향해 모아졌다.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카루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헤헤! 하지만 좌표를 몰라서 소용없어.”
“좌표? 그게 뭔데?”
진천이 묻자 우드가 대신 대답했다.
“이동할 곳의 지형에 대한 일종의 지도인 셈입니다. 모르고 섣불리 사용했다가는 자칫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기 십상이지요. 운이 없으면 죽기도 하고…….”
“젠장! 갈수록 복잡하군. 그나저나 너 확실히 그게 가능한 거냐?”
“헤헤! 그럼.”
“자식아! 근데 왜 지금껏 말하지 않았냐!”
“물어봤어?”
“끙!”
혁련천후가 자신의 팔을 잡고 선 카루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돌아올 때는 가능하겠구나. 이곳의 지형을 미리 보았으니…….”
“헤헤! 당연하지. 이곳이 아니라 예쁜 누나가 있는 아르소도 가능해.”
천진난만하게 웃음 짓는 카루가를 바라보는 우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텔레포트는 모든 마법사들이 꿈꾸는 이상의 경지다. 대마법사들만의 전유물인 그것은 보유한 자체로 엄청난 전쟁억제력과 전력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잠시 자신을 책망했다.
‘이분이 마계의 황족임을 잠시 잊었구나.’
마계의 황족이라면 최상위의 흑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직계라면 타고나면서 저절로 어지간한 마법사들이 평생을 수련해도 모자랄 양의 마나를 지니게 된다. 우드는 부러움이 가득한 빛으로 카루가를 바라보았다.
사공진무는 카루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카루가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그를 마주 보았다. 사공진무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카루가는 슬쩍 혁련천후의 등위로 숨기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사공진무가 물었다.
“너, 혹시 차원이동도 가능하냐?”
“내가 무슨 드래곤인 줄 알아?”
* * *
요란 제국은 생각보다 화려하고 번성했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활력으로 넘쳤다.
“오! 이거 전혀 생각 밖입니다. 케이론보다 오히려 분위기가 밝습니다.”
예상외로 활력에 넘치는 도시의 풍경에 모두는 놀랐다.
전쟁광이라 소문난 황제에다 케이론에서 떠도는 좋지 않은 소문으로 인해 요란 제국에 대한 선입견은 꽤나 나빴었다.
하지만 직접 본 이곳은 전혀 달랐다.
“대단하군요. 국경 근처라면 제국에선 변방일 텐데 이 정도라니 말입니다. 전쟁을 해서 엄청난 전리품이라도 벌어들인 것일까요?”
“더 두고 봐야지.”
“사람들 표정이 일단, 너무 밝고 활기가 넘칩니다. 독재자라 여겼건만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황제가 전쟁광에 독재자라면 결코 백성들이 저렇듯 밝을 수는 없는 법인데… 소문이 틀렸나 봅니다. 물론 더 두고 봐야겠지만 확실히 의외군요.”
우드가 나섰다.
“요란 제국의 황제는 호전적이긴 하지만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어떤 제국의 황제들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거두어들인 전리품도 황실엔 최소한의 양만 남겨두고 모조리 국민들에게 베푼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집권 20년 동안 단 한 번의 반란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가 다른 제국이나 왕국에 소문이 좋지 않은 이유는 워낙 호전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요란 제국은 대대로 대부분의 황제들이 비슷한 성정을 지녔다고 하니 유전적으로 호전성을 타고 나는 것 같습니다.”
“이 제국의 역사가 천 년이 넘는다고 했나?”
“제국으로 올라선 것은 100년에 불과합니다. 그전엔 평범한 왕국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평범한 왕국이 제국으로 올라서려면 엄청난 군사력이 있어야 가능할 텐데, 100년 전부터 갑작스럽게 강해졌다는 말이냐?”
“그건 저도…….”
우드가 머리를 긁적이자 혁련천후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들에게 손을 흔드는 금발의 아가씨들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일행은 도시의 곳곳을 구경하며 이동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흘긋거렸다. 모두가 대륙에선 보기 힘든 흑안을 지녔기 때문이다. 진천이 눈동자를 벽안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었지만 혁련천후가 거부감을 드러냈기에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일이다!”
카루가가 길가에 잔뜩 쌓인 노점상의 과일을 보고는 소리쳤다. 꽤나 배가 고픈 모습이었다.
“주공! 어디 한적한 곳에 들어가 식사라도 하고 이동하시죠.”
“그러지.”
그러고 보니 모두는 지금껏 식사를 하지 못했다.
적당한 식당을 발견한 우드가 모두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작은 규모의 식당은 대부분의 테이블이 실외, 길가에 놓아져 있었다. 안이 비좁아 야외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간단한 식사를 주문하고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카루가는 노점상에서 과일을 사와 식사를 대신했다.
“넌 언제까지 과일만 먹을 거냐? 그러니까 키가 요만하지.”
“냠냠! 변신하면 큰데. 한번 보여줄까?”
“됐다! 그냥 과일이나 많이 먹어라.”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지. 마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
“싫어. 형들과 여기서 같이 살 거야. 거긴 재미없어. 매일 싸우기나 하고… 그 형이 돌아오면 나도 함께 데려가줘야 해?”
진천이 피식 웃었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네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준다. 그러니 데려간 놈한테 잘하라고 소식이나 전해.”
“그게 불가능하다니까. 바보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진천이 눈을 휘둥그레지고서 카루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요게, 말이 느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콱! 꽁꽁 묶어서 달고 다닌다!”
“씨… 미안해.”
혁련천후가 맞은 곳을 손으로 쓰다듬어주자 카루가는 대번에 환하게 웃으며 과일을 입 안 가득 물었다. 천진한 모습에 진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잠시 후, 꽤나 뚱뚱한 주방장이 음식을 가져다주자 일행은 식사를 시작했다. 여전히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지만 모두는 하나도 남김없이 먹었다.
후식이라면서 시커먼 차를 내어오자 인상을 찌푸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오가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하더니 모두가 한곳으로 가리키며 몰려갔다.
“무슨 일이지? 구경거리라도 났나? 주공 가볼까요?”
“어! 기사들입니다.”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전마에 몸을 실은 기사들이 도로의 가운데에 모습을 나타냈다. 좌우 두 줄로 이동 중인 그들은 죄수를 가두는 것으로 짐작되는 철창이 세워진 마차를 끌고 있었다. 어른의 팔뚝만 한 굵기의 쇠창살 안에는 죄수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곳곳이 피로 얼룩진 그는 두터운 갑주를 걸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전신이 굵직한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다.
“포로로 잡힌 인물인가 본데, 어지간히 묶어놓은 걸 보니 꽤나 신분이 높은 자거나 흉악범이겠군요.”
“어!”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공진무가 갑작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우드도 크게 놀란 얼굴로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생겨났다.
죄인으로 보이는 인물은 그들, 모두가 아는 인물이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충직한 모습으로 남아 있던 헤론 후작이었다.
“놀랍군요. 저 정도의 인물이 포로로 잡히다니… 꽤 강하게 보였는데 말입니다.”
“저들도 고수들이다.”
혁련천후의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마차의 지근거리에서 이동 중인 인물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기사들의 복장과는 달리 그들은 중원의 무복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섬뜩한 안광을 발하는 그들은 각종 병기들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는데, 중원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처음 보는 기병이었다.
“놈! 시선을 돌려라!”
섬뜩한 음성이 귓속을 울렸다.
혁련천후는 붉은 광망으로 일렁이는 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선두에선 육중한 체구의 인물이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감히 크로우나이츠와 눈싸움을 하려 들다니, 죽고 싶으냐?”
속삭이듯 전해지는 음성은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섬뜩했다. 얼마나 섬뜩했는지 우드는 시선을 돌리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소리쳤다.
“이분들은 크로우기사단의 영웅들이시다. 눈을 깔고 머리를 숙여라!”
기사들은 크로우기사단이라는 자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기사들 중, 하나가 눈짓으로 어서 고개를 숙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혁련천후와 모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전신에 거대한 쇳덩어리를 주렁주렁 단 흑의인의 입가가 치켜 올라갔다.
“흐흐! 죽고 싶은 모양이군.”
호송하던 기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는 혁련천후를 향해 한 인물이 말머리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개소리 마라! 이놈들아! 무고한 백성에게 시비나 거는 놈들이 무슨 영웅이라 나불거리는 것이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크하하하!”
헤론 후작이 느닷없이 광소를 터트렸다. 혁련천후에게 말머리를 돌렸던 자의 시선이 헤론 후작에게 돌아갔다. 하얀 이를 그대로 드러나는 섬뜩한 웃음을 짓고는 손을 앞으로 슬쩍 뻗는 시늉을 했다.
퍽!
“욱!”
헤론 후작의 육신이 휘청거리더니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갑주를 걸친 기사가 황급히 그자를 말렸다.
“죽이시면 곤란합니다. 그를 무조건 어둠의 숲으로 데려오라는 폐하의 황명이 계셨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그 말에 흑의인은 혁련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놈!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섬뜩한 웃음을 흘린 크로우 기사가 전마를 전방으로 몰아가자 호송단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혁련천후가 몸을 일으켰다.
“기분 나쁜 놈들입니다.”
진천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그가 기분이 무척 상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던 모두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둠의 숲이라고 했지. 그곳으로 간다.”
“예?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랐습니까?”
“어쩌면…….”
* * *
레이나 공주는 황궁에서 보내온 통신을 받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어떻게 그분이 사로잡힐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헤론 후작이 요란 제국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그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가 감금된 곳이 전 대륙에 악명 높은 어둠의 숲이라고 전해오자 레이나 공주는 눈물마저 머금었다.
“폐하의 힘이 되어주어야 할 분이 그 지경이 되시다니…….”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녀는 한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이 고집을 피워 케논 산맥으로 오지만 않았다면 헤론은 지금쯤 황궁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있을 것이다. 스스로 호위를 자청하던 헤론 후작의 모습이 아른거리자 기어코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의 옆에는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그들의 앞에는 꽤나 날카롭게 생긴 중년인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레이나 공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마! 서둘러 돌아가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무척 진노하고 계십니다.”
그는 황궁에서 온 황실마법단 소속의 패튼이라는 인물이었다. 물론 레이나 공주를 데려가기 위해서 내려온 것이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었군요. 요란 측이 헤론 후작을 포로로 잡고 있어요. 그들이 자진해서 그러한 사실을 알려왔다면 보나마나 그분을 석방하는 대가로 뭔가를 요구할 것이 틀림없어요. 폐하께 보고 드리세요. 요란과의 협상은 제가 직접 진행하겠다고 말이에요.”
“마마!”
“돌아가세요! 패튼 경!”
패튼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노골적인 짜증스러움이 그의 얼굴에 묻어났다. 결코 공주인 그녀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강제로라도 모셔오라는 황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의 곤란함을 마마께서 헤아려 주셔야 합니다.”
우웅!
마나가 요동치는 소리를 들은 레이나 공주는 발끈하며 검을 뽑을 자세를 취했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고 드느냐!”
“지엄하신 황명입니다. 마마!”
“흥! 황명? 테세우드 공작이 내린 밀명이겠지? 그렇지 않나요? 패튼 경!”
“저희들이 받은 명령서는 분명 폐하의 직인이 찍힌 황명이었습니다.”
다른 자들도 빠르게 레이나 공주의 주변을 둘러쌌다. 패튼의 말처럼 강제로라도 데려갈 심산이 분명해 보이자 레이나 공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검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테세우드 공작의 측근들임을 떠나 그들은 케이론 제국의 소중한 마법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전쟁이 벌어지면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황실마법단의 재원들이었다. 레이나 공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연소민이 들어섰다. 뒤이어 북궁천소와 담대소천, 그리고 왕전도 함께 들어섰다.
이미 실내의 상황을 직감한 연소민이 레이나 공주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응, 아니에요. 그냥…….”
패튼에게 시선을 돌린 연소민은 다소 차가운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불경하군요. 감히 마마를 강제로 모시려고 하다니…….”
“웃기는군. 감히 남작 주제에 어딜 끼어드는 게냐? 영지를 몰수당하고 보잘것없는 작위마저도 박탈당하고 싶으냐?”
패튼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연소민은 굽히지 않고 받아쳤다.
“여긴, 제 성이고 공주마마는 지금 아르소에 손님으로 오셨으니, 경이 마마께 불응하는 경위를 물어보는 것은 영주인 저로서는 당연한 권리이자 객을 보호하는 자위권이라고 보는데요? 틀렸나요?”
레이나 공주가 나섰다.
“패튼 경! 난 돌아가지 않아요. 그러니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강제하겠다면 무력을 사용하겠어요.”
순간 패튼의 눈동자에 미미한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황명은 폐하를 제외한 제국의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패튼의 음성이 제법 차가워졌다. 해볼 테면 해보란 태도였다.
“거, 참 끈질긴 놈일세. 공주께서 싫다고 하잖아! 당나귀처럼 생겨먹은 빌어먹을 새끼야!”
걸쭉한 욕설이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당사자는 물론이오, 레이나 공주와 연소민도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북궁천소를 돌아봤다. 이미 이마에 골을 깊게 만든 북궁천소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숙부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의 성정을 아는 연소민이 전음으로 말렸다. 당장에 주먹을 날릴 것처럼 보였던 북궁천소가 그녀를 돌아보고는 뒤로 물러섰다. 북궁천소의 광포한 성정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왕전의 전음이 들려왔다.
[자식아! 네가 그렇게 설쳐대면 나중에 소민이 곤란해지잖아? 생각 좀 하며 살자.]
[지랄을 해라. 생각은 개뿔!]
[하여튼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네놈은…….]
[뭐? 이런 백정새끼가!]
둘 사이의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이내 불꽃은 담대소천에 의해 소멸됐다. 둘을 보며 좌우로 머리를 흔든 담대소천은 팔짱을 하고서 묵묵히 패튼을 응시했다. 태어나서 가장 강도가 높은 욕설을 얻어먹은 패튼의 얼굴은 삶은 돼지고기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국의 백작인 자신이다.
게다가 실질적인 케이론의 지배자, 테세우드 공작의 무한한 신임까지 얻고 있다. 어지간한 왕국의 왕들도 자신을 두려워한다. 케이론 제국의 위성국가 중, 하나인 체스비 공국의 체스비 대공은 자신에게 상석까지 내어준다.
그런 자신이 까다 만 밤송이처럼 생겨먹은 북궁천소에게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쌍욕을 들었으니 코에서 불길이 뿜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당나귀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다. 그의 별명이 코 큰 당나귀였던 것이다.
“놈을 잡아라!”
“예!”
마법사들이 일제히 북궁천소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레이나 공주의 날카로운 고함에 마법사들은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패튼을 바라보는 레이나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은 한기가 돌았다.
“저 사람들은 나와 각별한 관계이니 나를 봐서라도 그냥 넘어가주세요. 패튼 경.”
“모욕을 당하면 죽음을 건 결투조차 마다하지 않은 게, 케이론의 정신입니다. 비켜주십시오!”
패튼은 물러날 기미가 없어보였다.
‘싸우면 무조건 저들은 죽어. 말려야 해.’
레이나 공주는 패튼과 그의 수하들의 강함을 알고 있다. 결투를 한다면 무조건 북궁천소와 일행들이 당할 것이라 여겼다. 빠른 시간에 그녀는 해답을 찾았다.
“그들은 나의 호위로 임명된 기사들이에요. 황족의 호위는 특별한 범죄가 아니면 면책특권을 지닌다는 것쯤은 아시겠죠?”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북궁천소를 비롯한 셋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서로 언제 그런 계약을 맺었냐는 질문을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저게 미쳤나?]
[졸지에 호위로 전락했네. 킁!]
[우리를 구하려고 그런 것이니 이해들 해라.]
셋은 전음을 주고받으며 고리눈을 치켜떴다. 다행히 레이나 공주는 등을 돌리고 있어 실룩거리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편 레이나 공주의 말에 패튼은 입술을 곱씹으며 분을 삭였다.
‘교활한…….’
그녀에게 저런 호위기사들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저들을 구해주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즉흥적인 기사임명은 황족의 권한이기에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게다가 그녀의 말처럼 황족이 호위로 임명한 기사들은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나의 무서움을 보여주면 고분고분, 황궁으로 돌아가겠지.’
패튼은 내심 독하게 마음먹었다.
“좋습니다!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그건 황족, 당사자들만 제외하곤 모든 자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마마께서도 아시겠지요? 당연히 모욕을 받은 당사자가 신청을 했으니 저들이 거부할 권리가 없음 또한 아시리라 믿습니다. 참관인은 마마께서 해주셔야겠습니다.”
일순, 레이나 공주는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
패튼은 분명히 모욕을 받았다. 모욕을 받았다면 황족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것이 케이론의 법이다. 만약 모욕을 가한 대상자가 결투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면 상대를 모욕한 행위가 범죄로 인정되기 때문에 귀족이라면 작위가 박탈당하고 시민은 금고형이나 구금형을 살게 되며, 평민은 처형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지금껏 결투가 성립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레이나 공주는 순간 막막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북궁천소를 돌아보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녀는 대마법사 율튼도 두려워하는 그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 때문에 율튼이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덕분에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부분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율튼이 돌아간 이유를 케이론의 국경을 넘어 영토를 침범하면 정치적인 분쟁사태로 번질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돌아간 것으로 그녀는 착각하고 있었다.
‘저들은 아리안이 무척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 결코 이렇게 죽게 내버려둘 순 없어!’
레이나 공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짧은 시간에 그녀는 연소민과 무척 가까워졌다. 황실에선 언제나 혼자였던 그녀였기에 마땅한 말동무조차 없었다. 해서 비슷한 연배에 말이 통하는 연소민이 그녀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북궁천소가 죽음을 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때 그녀의 복잡한 속내를 무참히 짓밟는 목소리가 걸쭉하게 울렸다.
“결투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
북궁천소였다.
“그냥 그걸로 끝이에요. 정당한 죽음, 그 자체로 제국에서 인정하니까요.”
연소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녀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패튼이 불쌍할 뿐이었다.
“흐흐! 그럼 저 새끼가 뒈져도 귀찮아질 일이 없단 말이군.”
북궁천소가 패튼을 가리키며 히죽 웃는다. 패튼의 두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이, 이런 고릴라 같은 놈이……!”
그는 레이나 공주가 빨리 수락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응……?’
레이나 공주는 당연히 울상이 되었어야 할 연소민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연소민은 마스터다. 당연히 마나의 측정된 양으로 둘의 승부를 예견할 수준이 넘는다.
“아리안! 괜찮아요?”
“예? 아, 예! 괜찮아요.”
북궁천소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거렸다.
“배고프다. 얼른 시작하자.”
* * *
슈나이더는 아르소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책임지는 행정관이자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이기도 했다.
올해 나이 35세로, 거의 모든 행정을 자신이 도맡는 바람에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노총각인 그는 의술에도 제법 일가견을 지닌,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라 할만 했다.
의사는 그다지 대단한 직업은 아니다.
하지만 슈나이더는 달랐다. 작금의 세상은 마법이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대였기에 어지간한 치료는 마법이나 포션으로 대부분 해결된다.
하지만 그건 상당한 돈이 들어가는 치료였기에 가난한 평민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은 의사를 찾는다.
슈나이더는 꽤 의술이 뛰어난 편에 속했고, 누구보다 친절하게 평민들을 진료했다. 해서 아르소의 평민들은 그를 무척 존경했다.
그런 슈나이더에게 오늘 아침, 정신 줄을 놓아버린 환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복장으로 보아 꽤 지위가 높아 보이는 그들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쯧쯧! 이러고도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군. 도대체 몇 군데가 부러진 거야?”
슈나이더는 침상 위에 축 늘어진 패튼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는 아주 골고루 뼈가 부서진 상태였다.
얼굴은 퉁퉁 부어서 독 오른 두꺼비를 연상시켰다.
“이분들은 마법사이시니 깨어나면 스스로 치료하시겠지. 괜히 잘못 봤다간 경을 칠 테니 그냥 통증을 완화하는 약품만 투여하고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겠어.”
슈나이더는 조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다지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슈나이더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조수는 푸른색이 감도는 물약을 패튼의 입을 강제로 벌려서 먹였다.
“쯧쯧! 이렇게 높으신 분이 어쩌다가 이 지경을…….”
패튼의 입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부러진 이만 다섯 개가 넘었고 약을 넣을 때 숟가락에 살짝 건드렸는데도 흔들리는 게 세 개가 넘었다. 패튼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상상만 해도 끔찍했는지 조수는 측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 * *
“크하하하!”
헤론 후작의 웃음이 주변을 시끄럽게 울렸다. 통한이 묻어나는 광소였다. 크로우기사단의 눈동자가 매섭게 돌아갔지만 기사들의 만류로 그들은 섬뜩한 시선으로 헤론을 노려보고는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탁! 탁!
모닥불에 올려놓은 고기가 기름을 흘리며 노릇하게 익어갔다.
헤론 후작의 호송을 책임진 고르디 자작은 크로우기사단의 기사들에게 먼저 고기와 향료를 건네고 자신들은 미미한 양만을 가지고 배를 채웠다.
“젠장! 상전도 저런 상전이 또 있을까?”
“시끄럽다.”
불만을 늘어놓는 기사에게 고르디가 눈치를 주었다.
“엄연하게 저들과 우린 소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건, 완전히 공작 각하 모시듯 해야 하니…….”
“듣는다. 이놈아!”
“흥! 들으면 들으라지요.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불만이란 감추었다가 표출하면 자제하기 어려운 법이다. 지금, 고르디 자작의 앞에 앉은 기사가 그랬다.
퍽!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무엇인가가 바위에 박혔다. 기사들 모두가 흠칫하며 나무를 응시했다. 순간 모두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바위에 박혀 파르르 떨고 있는 포크가 보였다.
“입조심!”
싸늘한 목소리가 크로우기사단 쪽에서 들렸다.
기사들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을 입에 대고서 차갑게 웃는 크로우기사단의 인물이 보였다. 모두가 그의 접시로 시선을 던졌다.
포크가 없었다.
‘으…….’
고르디 자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등골을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불만을 늘어놓았던 기사는 손에 힘이 빠져 포크까지 떨어뜨렸다.
“이봐, 자작!”
누군가가 고르디를 불렀다. 고르디가 재빨리 일어섰다.
“놈에게도 먹을 걸 줘야지. 굶겨 죽일 셈이냐?”
“알겠습니다!”
고르디가 눈짓을 보내자 기사 하나가 구운 고기와 포도주 한잔을 들고 헤론이 갇힌 마차로 뛰어갔다. 다가오는 기사를 노려보는 헤론 후작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기사가 창살 사이로 음식을 넣어주려고 팔을 뻗어갈 때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육신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크로우기사단의 고개가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갔다. 바닥에 꼬꾸라진 기사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마차의 뒤편 숲에서 다섯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젠장! 적이다!”
뒤늦게 발견한 기사들이 소리쳤다.
크로우기사단이 어느새 장내로 들어선 다섯을 에워쌌다. 놀라울 정도로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장대한 체구의 인물이 가소롭다는 투로 물었다.
“케이론의 놈들인가?”
“그렇다! 헤론 후작을 데려가기 위해서 왔다.”
“후후! 꿈을 꾸고 있군.”
그가 고갯짓을 하자 크로우기사단 전체가 넓게 포진하며 다섯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다만 앞으로 나오는 자는 둘뿐이었다. 둘로 다섯을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포위된 다섯은 모두가 금발에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상당히 왜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감히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다니, 저자들을 생포해 주십시오!”
고르디 자작이 크로우기사단에게 소리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크로우기사들은 이미 행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싸움은 시작되었다.
고르디를 비롯한 기사들은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주변을 포위하고만 있었다. 그들이 끼어들 수준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헤론 후작을 구출하기 위해 나타난 케이론의 인물들을 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무섭고 사나운 크로우기사단의 둘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비록 둘이라지만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는 고르디 자작은 다섯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축을 흔드는 강력한 폭발이 연신 터져 나왔다. 시간이 제법 흐르자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용맹하게 덤벼들던 다섯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이 더 지나자 검을 놓고 손을 들었다.
유독 날카로운 인상을 한 인물이 가운데 인물의 목에 검을 가져가며 물었다.
“후후! 꽤 성가신 놈들이었다. 신분이 무엇이냐?”
옆의 청년이 소리쳤다.
“이분은 케이론 제국의 다크 공작이시다! 예의를 갖춰라!”
그 말에 크로우기사단과 기사들이 흠칫했다. 보통은 아닌 줄 짐작했지만 설마 공작일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후후! 이거 거물이 오셨군.”
제국의 공작이면 어지간한 왕국의 왕과 맞먹는다. 대륙에 끼치는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타국에까지 끼칠 정도다. 크로우기사단의 얼굴에 희열로 번득였다. 후작에 이어 공작까지 사로잡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후후! 어떻게 된 공작이 후작보다 약하지? 너희 케이론은 웃기는 곳이군.”
“모욕을 줄 셈이냐! 어서 죽여라!”
“후후! 아니지. 네놈들은 귀중한 전리품들이니 소중하게 모셔야지. 후후! 고르디 자작! 놈들을 태울 마차부터 구해야겠군.”
“조금을 더 가면 북부군단의 본영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마차를 구하겠습니다.”
“좋아.”
레이번의 가죽으로 만든 밧줄이 다섯을 묶었다.
마법이 실린 그것은 마스터의 오러가 아니면 절대 끊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내구성을 지닌다.
“황궁에 통신을 넣어라!”
고르디 자작이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사로잡힌 다섯을 헤론 후작이 타고 있는 마차로 데려갔다. 철창은 보기보다 넓었다.
다섯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헤론 후작의 눈동자는 안타까움과 의구심이 뒤섞여 있었다.
* * *
[주공! 놈들이 제대로 속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젠 그곳으로 수감되기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군요. 공작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어둠의 숲 속이라는 그곳으로 보내주겠지요?]
[운을 믿어볼 수밖에… 틀어지면 힘으로 해결한다.]
[후후! 알겠습니다. 그런데, 금발에 벽안이 꽤, 어울리십니다.]
[……!]
헤론 후작이 변장한 진천을 돌아봤다.
한쪽 눈을 찡긋 감아주는 그를 보며 헤론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포로로 잡힌 자가 보일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던 헤론 후작이 입을 열려고 할 때, 그의 귓속으로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린 제국이 비밀리에 양성해 온 특수부대니 당연히 모를 거요. 너무 혼란스럽게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니 그러려니 하고 있으시오.]
헤론은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냥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잡힌 것이오. 나중에 탈출할 때 데려가 줄 테니 그동안은 전혀 내색하면 곤란하오. 아시겠소?]
헤론 후작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 사납고 무서운 적의 기사들은 자비를 모르는 족속들이다. 자신의 수하들 수백 명이 저들 몇 명에게 피를 뿌리고 죽어갔다. 자신도 하나를 당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들과 싸워서 다치지 않고 일부러 져줄 정도면 자신보다 훨씬 강자라는 소리다. 자신이 아는 케이론 제국에 그러한 자들은 몇을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후후! 그냥 그렇거니 하는 게 건강에 이롭소.]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