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22화 (22/55)

제7장

의문의 인물, 다크 공작

테세우드 공작은 여전히 자신의 권역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는 그가 패배의 아픔을 다스리며 복수를 준비한다고 여겼다. 지고는 못 사는 그의 성미는 케이론 제국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모든 이들이 그의 다음 행보를 궁금하게 여기고 있을 즈음, 테세우드 공작은 자신의 거처에서 통신석을 통해 들어온 보고를 받고 얼굴을 붉혔다.

“다크 공작이라니… 제국에 그런 자가 있었나.”

요란 제국에 심어놓은 첩보원이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헤론 후작을 구출하려다 잡힌 케이론의 기사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공작의 신분을 지닌 인물이 있었는데, 그 공작의 이름이 다크라고 전해온 것이다. 당연히 테세우드 공작이 알 턱이 없다.

“나 몰래 비밀세력이라도 만들었단 말인가?”

그는 황제를 의심했다.

자신과 황제는 군신간이지만 양립불가의 정적이기도 했다.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암중세력을 양성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들이 구출하려고 했던 헤론 후작은 대표적인 황제파가 아니던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우드득!

굳게 쥐어진 주먹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그는 통신석을 끄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 문을 열고 나서자 수십의 기사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이다.

“레이놀드에게 통신을 보내어 최대한 빠른 시간에 이곳으로 오라고 전하라!”

“예! 각하!”

명령을 내린 테세우드는 성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얼마 전에 황궁에서 돌아온 대마법사 쉐인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마법서적을 읽고 있던 쉐인은 들어서는 테세우드 공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보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헤론을 구출하려던 제국의 기사들이 오히려 포로가 되었답니다.”

“어허! 그게 사실입니까? 그런 작전이 있었다면 왜 제게…….”

“나도 모르는 작전입니다. 잡힌 자들도 전혀 모르는 위인들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쉐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각하께 의논도 없이 황실이 추진한 작전이란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테세우드 공작이 다소 짜증스러운 투로 물었다.

“다크 공작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다크 공작? 요란 제국의 인물입니까?”

예상대로 쉐인도 몰랐다. 테세우드 공작의 눈매가 몹시 심하게 가늘어졌다.

“포로로 잡힌 본 제국의 공작이 그자랍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제가 모르는 공작이 제국에 있었다니 말입니다.”

“허! 그런 일이…….”

그 말에 쉐인은 크게 놀랐다.

“황제가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작 다섯만으로 헤론을 구출하려고 적국으로 뛰어들 마음을 먹었다면 잡힌 자들은 상당한 고수들로 봐야 합니다.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해주십시오. 가서 따져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텔레포트를 준비하는 동안, 기사들을 부르십시오.”

* * *

다크 공작이라는 인물이 요란 제국에 포로로 잡혔다는 보고는 황궁에도 들어갔다. 혼란스럽기는 황제도 테세우드 공작에 못지않았다.

그 역시 다크 공작을 알 리가 없었다.

“다크 공작이라니, 본 제국에 짐이 모르는 공작이 있었단 말이냐?”

케이론 제국의 황제, 아리우스 2세는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보고를 올린 핀투스 후작에게 물었다. 그 앞에는 용맹한 인상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는데, 불굴의 사자검이란 별명을 지닌 핀투스 후작이 그였다.

“저들의 주장이 그렇습니다. 폐하!”

아리우스 2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이젠 작위까지 함부로 내린단 말인가! 테세우드, 이자가 감히……!”

“폐하! 속단하기엔 사안이 지나치게 큽니다. 적들의 이간책일 수도 있으니 조금 더, 신중하게 여기시옵소서.”

“이간책은 무슨! 필시 테세우드, 그 작자가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그자들이 정말로 테세우드 공작이 몰래 양성한 자들이라면 왜 헤론 후작을 구출하려 했겠나이까. 누구보다 헤론 후작을 싫어하는 테세우드 공작이 그럴 리는 없사옵니다. 소장의 생각으로는 요란의 추악한 음모로 의심되옵니다.”

핀투스 후작의 말이 그럴 듯하자 아리우스 2세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분을 삭였다. 그렇다고 의심이 가신 건 절대 아니었다. 핀투스 후작의 말이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일단은 적의 요구를 기다려보시고 차후, 대책을 마련하시는 게, 옳을 듯하옵니다.”

“놈들이 아직 석방에 대한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괘씸한 요란 놈들! 석방조건을 내세우지 않을 거면서 포로들의 신분을 보내오다니, 이건 짐을 모욕주려는 처사가 아니더냐!”

아리우스 2세의 얼굴이 분기로 인해 벌게졌다.

핀투스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말처럼 명백한 모욕행위였기 때문이다. 전쟁 중, 포로로 잡힌 귀족은 보석금을 주면 풀어준다는 것이 전 대륙에 불문율로 정해져 있다.

당연히 헤론 후작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전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요란 제국은 그러지 않고 포로로 잡힌 것만을 전해주고는 차후, 처리에 대한 아무런 말조차 없었다. 그리고 통신을 보내온 자의 직위 또한 아리우스 2세의 심기를 건드렸다.

자작에 불과한 자가 케이론의 황실로 직접 통신을 보내온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최소한 공작 이상의 고위급 인사가 최초 전문을 보내는 것이 대륙의 관례였다.

“막스! 이 미치광이 같은 놈…….”

아리우스 2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대전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테세우드 공작이었다. 황제의 눈썹이 끝을 모르고 치켜 올라갔다.

눈썹이 올라가기는 테세우드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제께 올려야 할 신하로서의 기본적인 예조차 없이 성큼성큼 아리우스 2세의 면전까지 걸어왔다. 핀투스 후작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어렸다.

“여긴 어인 일이오? 공작!”

“여쭐 게 있어 왔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다크 공작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테세우드 공작은 무례하게도 따지듯 물었다.

“그건 짐이 공작에게 할 소리 같소만…….”

“폐하! 정녕 이렇게 나오시깁니까?”

“테세우드 공작!”

발끈하며 소리치는 테세우드 공작을 향해 핀투스 후작이 호통을 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의 눈은 노기로 가득했다.

“폐하께 그런 태도를 보이시다니요. 예를 갖추시지요.”

테세우드 공작의 눈이 불을 뿜었다. 핀투스 후작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뒤에 시립했던 레이놀드 백작이 핀투스 후작을 향해 움직이려고 했으나 테세우드 공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대는 물러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핀투스!”

“신하로서 예를 다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물러날 것입니다.”

“그만!”

아리우스 2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핀투스 후작은 허리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옥좌에서 느린 걸음으로 내려서는 아리우스 2세의 눈동자는 테세우드 공작에게 고정된 채,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핀투스, 자네는 그만 물러가 보게.”

“폐하!”

“어허! 물러가래도!”

아리우스 2세의 단호함에 핀투스 후작은 어쩔 수 없이 대전을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것을 응시하던 아리우스 2세는 레이놀드 백작에게도 물러나라 명했다. 머뭇거리던 레이놀드 백작은 테세우드 공작이 눈짓을 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물러갔다.

대전엔 둘만 남았다.

한 사람은 제국의 황제요, 다른 하나는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쥔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튕겼다.

* * *

퍽! 퍽!

온갖 오물들이 마차로 날아들었다.

“케이론의 개들! 추악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죽어 버려라! 케이론의 악당들!”

고르디 자작은 죄수를 압송하는 마차를 가로막은 성난 군웅들을 뚫어내느라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기사들이 길을 트고자 했지만 군웅들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위협적인 태도를 가해왔다.

“악당들을 우리에게 건네시오!”

“케이론의 악당들을 우리 손으로 불태워 죽입시다!”

점점 과격해지는 군웅들을 바라보며 고르디 자작은 당황했다.

크로우기사단원들이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우회해서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자고 했건만 고르디 자작이 중심가를 통해서 황궁으로 갈 것을 고집했기 때문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고르디 자작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서둘러라! 고르디! 시간이 지체되면 우리가 직접 손을 쓸 것이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늦으면 네놈의 목부터 잘라 줄 것이야.”

그들의 협박성 발언에 고르디 자작이 황급히 무리의 선두로 뛰어갔다.

이미 마차는 군웅들에게 잡힌 상태라 꼼짝을 못했다. 투구가 벗겨진 기사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르디 자작을 바라보았다. 군웅들의 과격한 행동에 견갑까지 벗겨진 기사들도 있었다.

군웅들은 창살 안의 여섯에게 욕설과 오물을 퍼부었다.

“의외군요. 그저 나쁜 놈들로만 알았는데, 백성들을 저렇게 두려워할 줄 알다니 말입니다. 중원 같았으면 벌써 사단이 나고도 남았을 텐데…….”

진천의 말에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르디 자작과 기사들을 응시하며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뜻밖이군. 이 나라, 요란 제국이 생각과는 다른 곳인가?’

그는 지금껏 케이론 제국의 사람들만 만났었다.

모두가 요란을 비난하고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도 그들의 말에 따라 요란 제국은 전쟁광인 황제를 두고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려는 야심에 찬 국가로만 여겼었다.

그런 황제는 대부분 철권통치를 기반으로 삼는다.

힘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철권통치를 위해서는 군을 모든 정책의 우선에 두는 것이 당연하다. 당연히 군부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고 군부는 모든 이들의 정점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런 철권통치하의 백성들이 군에게 이런 행동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기사들이 성난 군웅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군웅들에게 화난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진압을 위해 의례 나오기 마련인 폭언이나 고함, 무력행사도 지금껏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이런 상황에 꽤나 익숙해 있다는 것을 뜻하고 또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해왔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케이론은 이렇지 않았다. 평민들은 귀족들의 얼굴조차 마주보지 못했다. 귀족의 폭력은 당연한 거라 여기고 반항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작이 일반 백성에게 쩔쩔매는 모습이다.

중원이라면 벌써 검을 뽑았을 상황이지만 지금껏 그들은 검에 손조차 대지 않았다. 그저 비켜달라며 읍소만 할 뿐 다른 대책이 없어 보인다.

“황명을 받들고 가는 길이니 비켜주시오! 이들의 죄목이 알려지면 그때 수도 광장에 낱낱이 그 죄명을 적어 올려드리겠소!”

“거짓말! 놈들의 옷을 보니 귀족이다! 당연히 몸값을 받고 풀어줄 것이 아닌가! 제국의 국민들을 무참히 도륙한 케이론의 개들을 우리에게 넘겨라!”

“넘겨라! 넘겨라!”

고르디 자작의 읍소에도 군웅들은 오히려 더욱 성을 부렸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상황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크로우기사단의 몇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혁련천후의 눈에 보였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뇌리를 자극했다.

‘설마……!’

느낌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가장 거칠게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군웅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우르르 물러났다. 놀라기는 고르디 자작과 기사들이 더욱 컸다. 그들은 의외의 상황에 넋이 나간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너희들은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고 있다. 비켜서지 않으면 모조리 이렇게 될 것이다!”

섬뜩한 기운이 주변을 몰아쳤다.

평범한 사람들이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지독한 기운이었다. 그들이 앞으로 나서는 시늉을 하자 그토록 흥분했던 군웅들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뛰었다. 짧은 시간에 그들의 앞, 도로는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가 흘린 핏물이 도로를 붉게 물들였다.

“고르디! 황명은 저놈들을 내일 아침까지 황궁으로 데려오란 것이었다. 원망은 굳이 이토록 번잡한 곳으로 길을 택한 네놈, 스스로에게 하여라!”

크로우기사단들은 이내 전마를 몰아 전진을 시작했다. 기사들은 여전히 죽은 자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고르디 자작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미친놈들! 이게 무슨 짓이야!”

이동하던 크로우기사단 전체가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눈에 악독한 기운이 어렸다. 기사들이 고르디 자작을 황급히 말렸으나 그는 다시 소리쳤다.

“이러다가 말 사람들이었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그냥 돌아갈 사람들이었단 말이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고르디!”

“닥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들아!”

챙!

고르디 자작이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들은 어쩔 줄 몰라 양측을 번갈아 응시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혁련천후를 비롯한 모두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고르디 자작이 저렇게 나올 줄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고르디! 제아무리 대공의 총애를 받는 놈이라도 본좌에겐 네놈을 즉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잊었느냐? 지금의 네 태도는 목을 잘라도 충분한 죄임을 생각해야지.”

전마가 느릿하게 고르디 자작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나 고르디 자작은 두 손으로 검을 잡고서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성난 얼굴로 다가오는 자를 노려보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혁련천후의 눈에 이채가 떠오른 것은 방금 크로우기사단의 기사가 말을 하고 난 직후였다.

‘본좌! 그런 표현을 이곳에서도 쓰는 것인가?’

본좌는 중원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다. 이 세상에선 그 어떤 귀족도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었다. 혁련천후는 고르디 자작에게 다가가는 인물을 예의주시했다.

“후후! 이번 일로 인해 네놈의 출세에 지장이 될까 두려운 모양이군. 네놈들, 귀족들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가족도 파는 놈들이니까.”

“너희 살인마들보다야 백 번 낫다!”

고르디 자작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두려움이나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육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마가 뿜어내는 콧김이 고르디 자작의 얼굴을 덮었다. 손을 뻗으면 그의 목이 날아갈 거리까지 다가왔음에도 그는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다른 크로우기사단원이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고르디 자작을 차갑게 노려보던 자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폐하께서 너를 살렸군. 고르디…….”

“……!”

“서둘러 오라는 황명이시다.”

그 말을 끝으로 인물은 말머리를 돌렸다.

고르디 자작은 그때야 검을 내려놓았다. 크로우기사단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엔 여전히 분노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기사들이 그를 위로하며 전마를 끌어왔다. 전마에 오르기 전에 흘긋 마차를 쳐다본 고르디 자작의 얼굴은 분기로 붉어진 그대로였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놈인데, 다른 면이 있었군요.]

[……!]

[아까, 놈이 본좌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이곳에선 처음 듣는군요.]

[기회가 되면 놈들 중, 하나를 잡아서 알아내봐.]

[지금, 당장 할까요?]

혁련천후의 시선을 받은 진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혁련천후는 헤론 후작을 흘긋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였다.

잠시 그를 응시한 혁련천후도 눈을 감고 허리를 폈다.

이동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사건에 대한 말이 퍼졌는지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운 기색으로 피하기에 급급했다.

밤을 낮 삼아 달려 해가 떠오를 무렵이 되어서 그들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만큼 거대한 궁전 앞에 도착했다.

“우와!”

입을 열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카루가가 입을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모두의 눈에도 감탄의 빛이 어렸다.

중원의 자금성조차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궁전이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인다!”

가장 함축적이며 확실한 표현이 사공진무의 입에서 나왔다. 새삼 요란 제국의 대단함을 느낀 그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연신 감탄사를 날렸다.

처척!

백만 명은 족히 수용할 만한 거대한 광장에 이르러서 마차가 멈추었다. 크로우기사단들이 전마를 몰아 궁전으로 들어갔다. 고르디 자작은 기사들에게 마차를 지킬 것을 지시하고는 크로우기사단과는 달리 전마에서 내려 도보로 뛰어갔다.

황궁에서는 전마를 타고 다니지 못한다. 다만 크로우기사단에겐 그러한 제약이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만 내려진 특권이었다.

진천이 기사들에게 물었다.

“이봐!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상당히 불량스러운 말투에 기사의 눈이 대번에 고리눈으로 바뀌었다. 진천의 아래위를 쓸어보고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쇼!”

“걱정은 개뿔! 귀족은 죽이지 않는다며?”

“예외도 있으니 너무 맘 놓지 마쇼. 혹시 아쇼? 그 예외가 당신에게 적용될지.”

“기대하지. 그건 그렇고 이 나라 황제는 어떤 사람이냐? 감히 군의 이동을 백성들이 막아서게 만들고 말이야. 그래서 쓰겠어?”

순간 기사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덩치가 가장 큰 기사가 경멸의 빛을 담고서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당신들, 케이론에선 당연히 상상도 가지 않는 일이겠지. 시민이나 평민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폐하께서 네놈들, 케이론을 없애고자 하시는 거다! 전쟁광이라고? 개소리! 백성들 피를 빨아먹으면서 호의호식하는 아리우스 2세보다야 백 번, 천 번 훌륭하신 분이다.”

“닥쳐라!”

헤론 후작이 고함을 쳤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서 묶인 육신을 들썩이며 기사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기사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은 여전했다.

“당신은 우리 요란에서도 꽤 유명해. 케이론의 소문난 충신이라고 말이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아리우스 2세의 몇 되지 않는 진정한 충신이라고 말이야! 하하하!”

“이놈!”

헤론 후작의 두 눈이 피라도 쏟아낼 듯 격하게 붉어졌다. 그때 궁으로 들어갔던 고르디 자작이 그다지 밝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눈빛으로 기사들을 나무라고는 전마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자작님!”

“그곳으로 간다.”

“예? 그곳이라면…….”

“어둠의 숲!”

고르디 자작의 그 말에 창살 안의 사람들의 희비가 교차되었다. 헤론 후작은 두 눈을 감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나머지 다섯은 기쁨을 억지로 숨겼다.

“재판도 거치지 않고 곧장 말입니까? 이건 국제법 위반이 아닙니까?”

“재판 날까지 그곳에 수감하라는 말론 원수의 명령이시다. 서둘러라! 해가 떨어지기 전에 그곳에 도착해야 한다.”

“자작님!”

“그만 해! 우린 군인이다! 명령이 떨어졌으면 그대로 실행하면 그뿐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어서 마차를 이동시켜!”

고르디 자작이 발끈 성을 냈다.

기사들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기사들은 그가 크로우기사단과의 충돌 때문에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하고는 서둘러 이동을 준비했다. 기사들이 이동을 준비할 때 고르디 자작은 전망에 올라 궁전을 바라보았다. 이동준비가 끝날 때까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오직 궁전만을 바라보았다.

* * *

마차는 올 때와는 달리 외곽지역으로 달렸다.

군의 병사들과 전차들의 전용도로인 까닭에 도로는 상당히 넓었으며 오가는 사람 또한 없었다. 당연히 이동속도는 매우 빨랐다.

덜컹!

마차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그러나 마차 안의 모두는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들은 공간에 몸을 띄운 상태였다. 유이하게 흔들리는 마차의 움직임에 몸을 들썩이는 헤론 후작과 우드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다. 놀라워. 군의 전용도로가 이 정도라니…….”

“폭우가 쏟아져도 이동에 전혀 지장이 없게끔 만들었어. 배수시설도 완벽하고 말이지. 이거 확실히 케이론과는 다른 것 같아.”

진천과 사공진무는 마차가 질주하는 도로를 보며 감탄했다.

다소 거칠었지만 모든 도로에는 흙이 아닌 돌이 깔려 있었다. 많은 양의 비가 내려도 전차나 보급마차의 이동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도로의 가장자리엔 도로 가운데로 물이 흘러들어가지 못하게끔 별도의 배수로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거의 반나절을 이 속도로 달렸다면 어지간한 성, 하나는 달렸다고 봐야 하는데 그 엄청난 거리를 모조리 이렇게 만들어놓았다니…….”

평소 기관토목에 관심이 많았던 사공진무는 도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거나,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내서 만들었겠지. 만약 둘 중에 하나를 건다면 넌, 어디에 걸 거야?”

“난, 전자!”

진천이 혁련천후를 돌아보다가 그가 눈을 감고 있자 우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드는 헤론 후작을 흘긋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저도 전자에 걸겠습니다.”

“나도! 전자!”

“넌 빠져, 쨔샤!”

손까지 들고 말했던 카루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진천을 노려봤다. 카루가를 짐짓 협박하는 눈빛으로 쳐다본 진천은 묘한 표정으로 헤론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당신 생각은 어때?”

헤론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예 등을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사공진무가 그러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자 진천은 코를 실룩거리고는 헤론 후작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기분이 엿 같을 텐데 자극하지 마라.]

[저렇게 죽상을 쓰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 같으면 탈출할 궁리라도 하겠다.]

[혹시 모르지. 탈출할 궁리를 하고 있을지도…….]

[아닐 거다. 이곳의 귀족 놈들은 하나같이 정신상태가 약해 빠졌어. 포로로 잡혀도 돈을 주면 풀려난다니까 탈출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거다.]

진천과 사공진무가 헤론 후작을 보며 전음을 주고받는 사이에도 마차는 질주를 계속했다. 혁련천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빠르게 질주하던 마차가 돌에 걸려 한바탕 크게 휘청거리고는 멈추었다.

“무슨 일이냐?”

“바퀴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마차를 살펴보던 기사의 얼굴이 난감한 표정이다.

“휠이 부러졌습니다. 아무래도 마차를 버리고 도보로 이동해야 할 듯합니다.”

“한곳에 모두 타고 가면 되지 않을까?”

“이쪽도 휠이 나갔습니다! 자작님!”

“젠장!”

고르디 자작이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쳤다.

기사들이 자물쇠를 끌러 모두를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지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아이론자일로 두 손을 단단히 묶고는 도보로 이동을 속개했다.

헤론 후작은 혁련천후를 흘긋거렸다.

후작 이상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하지만 다크 공작은 전혀 기억에도, 들어본 적도 없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마침 혁련천후가 자신을 돌아보자 가볍게 머리를 숙인 그는 이내 시선을 전방으로 던졌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미련하게도 키워놨군.’

갑주를 벗은 헤론 후작의 근골은 꽤나 우람했다.

헐렁한 옷 사이로 비치는 팔뚝의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중원에선 근육이 발달한 무인들은 하수로 친다. 대부분이 외공을 익힌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무인들은 대부분이 근육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큰 체격에다 근육을 키웠으니 초고수의 필수조건인 순발력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어떨까?’

문득 사람들이 대륙의 초인이라 칭송하는 자들은 어떨까 궁금했다. 전혀 생소한 무공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최강자라고 불린다면 결코 만만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날, 케논 산맥에서 부딪혔던 케이시 공작을 떠올렸다.

‘진무와 엇비슷했다면 결코 약한 자들은 아니다. 만약 그자보다 더 강한 자가 있다면 조금은 신경이 쓰이겠어…….’

사공진무의 말로는 손이 저릴 정도로 케이시 공작의 힘이 대단하다고 했었다. 그때 진천의 고함이 상념을 깨트렸다.

“이봐! 굶겨죽일 작정이야?”

앞서 걷던 고르디 자작이 날카로운 눈매로 뒤를 돌아봤다.

씩 웃는 진천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손을 들어 모두를 세웠다.

“여기서 1시간 동안 쉬었다 가겠다. 기사들은 식사준비를 해라!”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마의 전낭에 담겼던 음식들과 솥을 꺼내어 요리를 준비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공진무가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나쁜 놈은 아니군요.”

“아직은 모르지.”

“그나저나,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아닙니까?”

일이 너무 쉽게 풀리고 있었다. 신분을 공작이라고 속인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생각 밖으로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렀다.

“그 사냥꾼이란 놈을 데리고 탈출했는데, 놈이 만약 거짓말을 한 거라면 어쩌죠?”

“그땐 대갈통을 부숴버려야지!”

사공진무가 그답지 않게 과격한 말을 쏟아냈다. 카루가가 배를 부여잡고 측은한 눈빛으로 진천을 올려다보았다.

“배고프냐?”

“응!”

“넌, 지금 성인으로 변신했잖아. 그럼 말투도 고쳐야지.”

“알았어. 그런데 과일 좀 따달라고 하면 안 될까?”

“그러다가 너 칼 맞는다.”

* * *

아르소 영지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국경 인근의 요란 제국 진영이 세를 불려가자 케이론 제국도 일개 여단병력을 아르소로 인근에 주둔시키며 혹시 모를 침공을 대비하기에 이르렀다.

패전했던 1군단의 병력도 속속들이 아르소로 모여들자 일거에 군세는 3만에 이르는 대군으로 발전했다. 아르소와 반나절 거리에 인접한 평원에 군영이 마련되자 요란 제국의 침략을 겁냈던 아르소는 다소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황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아르소에 남은 레이나 공주 역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챙! 챙!

“으합!”

아르소 성곽의 너머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우렁찬 기합성이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성곽에서 팔짱을 끼고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북궁천소와 왕전의 얼굴이 심드렁했다.

“새끼! 신났군.”

“그러게. 덕분에 아르소의 기사 놈들만 좋아졌지.”

“그런데 표정은 영 아니올시다군.”

“놈의 훈련방식이 좀 억세냐. 신마각의 그 독종들도 입에 거품을 물었으니 저 약골들은 아마 죽을 맛일 게다.”

둘은 가투소와 오백의 기사들, 그리고 기존의 아르소 영지에 주둔했던 오백의 기사들을 더해 도합 1천을 훈련시키고 있는 담대소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갑주를 걸친 담대소천은 중원의 훈련방식으로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모두가 연소민의 부탁에 의해서였다. 물론 가투소는 스스로 자청하여 훈련에 참여하고 있었다.

“훈련이 실전이다!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러라!”

내공을 담은 그의 목소리가 넓은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벌써 2시간째 휴식조차 없이 검술훈련에 매진 중인 기사들은 녹초가 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어지간한 가투소도 입을 벌리고 거친 호흡을 쏟아내기 바빴다.

“젠장! 더 이상 못 해!”

쨍그랑!

기사 하나가 검을 놓고서 뒤로 벌렁 누웠다. 연쇄반응은 무척 빠르게 나타났다. 하나가 눕자 검을 버리고 바닥에 주저앉는 자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담대소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만!”

그의 고함에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담대소천은 주저앉은 자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을 집어라.”

반응이 없었다.

“검을 잡고 일어서라.”

최초로 벌렁 누웠던 기사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솔직히 우리가 왜 당신 명령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소. 우린 제국의 1군단, 이글스여단의 기사들이오! 고작 변방 영지의 영주 따위가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오! 가투소대장! 그렇지 않습니까?”

퍽!

기사의 얼굴이 돌아가며 입에서 핏물이 튀었다.

담대소천의 발길질이 턱에 작렬한 것이다. 다른 기사들이 발끈하며 일어섰다. 개구리처럼 널브러진 기사는 비록 준남작의 작위를 지닌 최하위 귀족이었지만 일개 변방의 귀족이 폭력을 행사해서는 곤란한 자였다.

“이거 너무하잖소! 폭력이라니!”

가투소가 재빨리 다가왔다.

“그만! 그만들 해!”

“대장! 우린 더 이상 저 작자에게서 훈련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레이나 공주께서 돌아가실 때 수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훈련하겠습니다.”

삽시간에 연무장이 소란에 휩싸였다.

“명령이다! 모두 대열로 돌아가라!”

가투소의 고함도 소용없었다.

미간을 찌푸렸던 담대소천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몸을 돌려 아르소의 기사들에게로 걸어갔다. 아르소의 기사들은 달랐다. 누군가가 담대소천에게 물을 건네며 눈빛으로 위로를 전했다.

“힘든가?”

“힘들지만 견딜 만합니다.”

“저희들 강하게 만들어주십시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들은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담대소천은 이들과 가투소의 기사들을 비교했다. 실력이나 모든 면에서 이들은 가투소의 부대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하지만 의지만큼은 이들이 앞섰다.

‘간절한 자가 앞서는 법이지…….’

사실 같은 기사라도 그들과 가투소가 이끄는 기사들은 엄청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제국의 군단에 소속된 기사들은 대부분이 막강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특히 테세우드 공작이 이끌었던 1군단 소속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비록 그들이 전투에서 패배한 패잔병이라도 아르소와 같은 변방의 기사들에겐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올라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신분의 차이 때문에 훈련 시에도 아르소의 기사들은 가투소의 기사들과 부딪히는 것을 극히 꺼렸다.

때론 그들이 놀려도 그저 묵묵히 훈련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어디서 아가리를 빽빽 놀리고 지랄들이야!”

북궁천소의 험악한 목소리에 담대소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느새 성곽에서 몸을 날린 북궁천소와 왕전이 가투소의 기사들 앞에 나타나 있었다. 둘이 나타나자 발끈하며 소란을 피웠던 기사들이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이 새끼들이 저놈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우리는 겁나고 저놈은 우습게보이냐?”

기사들은 북궁천소와 왕전의 험악함에 대꾸를 못했다.

사실 그들은 담대소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금껏 그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반대로 북궁천소와 왕전은 달랐다.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을 휩쓸 때의 그 난폭함은 죽는 그날까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만 해라.”

담대소천이 다가왔다.

“잠깐만 기다려라. 은혜를 모르는 호래자식들은 그저 매가 약이다.”

“그만두라니까!”

담대소천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하지만 내공이 담겼기에 모두의 귓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성을 내던 기사들이 귀를 막으며 오만상을 썼다. 왕전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담대소천을 바라봤다.

“이 자식이 왜 우리한테 성질을 부리고 지랄이야.”

“가서 술이나 마시자.”

담대소천은 몸을 돌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굴러들어온 복을 스스로 걷어찼구나. 쯧쯧! 멍청한 새끼들…….”

“이 새끼들아! 저놈이 누군지 알아? 투왕이라고, 투왕! 네놈들 말로 싸움의 신이라는 말이다! 병신들아!”

왕전이 가투소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어지간하면 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어라. 저놈에게 훈련을 받는 것은 네놈들에겐 평생에 한 번 없을 기회일 수도 있어.”

둘은 기사들에게 험악한 눈길을 주고는 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레이나 공주와 연소민은 모든 광경을 성의 첨탑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너무 과격했어. 기사들에게 발길질이라니…….”

연소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중원이라면 발길질이 아니라 칼질을 당하면서라도 담대소천에게 훈련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운이 없는 사람들이군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운이 없단 말이지?”

“저 기사들 말이에요.”

“왜 그렇지?”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훗! 그냥 해본 소리여요. 식사하셔야죠. 얼른 가세요. 공주님!”

* * *

술잔을 기울이던 셋은 레이나 공주와 연소민이 들어섰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나 공주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한 달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꽤 친숙해진 탓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에 그녀가 물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음이 상했나 보군요. 대낮부터 술이라니…….”

“숙부님들! 제가 한잔 올릴게요.”

연소민이 생긋 웃으며 모두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레이나 공주도 자리에 앉더니 술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잔 줘.”

“훗! 괜찮으시겠어요?”

“취하면 자러 가지 뭐.”

“흐흐! 꽤 변했소? 그러다가 우리처럼 되는 것 아니오?”

“나쁘진 않죠. 숙부들처럼 거칠 것 없이 사는 것도 꽤 매력적인 삶이겠단 생각도 들곤 해요. 그건 그렇고 셤셔라는 곳, 아름다운 곳인가요?”

셤서는 레이나 공주에게 자신들의 출신지역을 둘러댄 지명이다. 중원의 섬서를 셤서로 바꾸어 대답한 것을 레이나 공주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아름답지, 세상에 그곳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지…….”

담대소천이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레이나 공주의 눈에 살짝 빛이 발해졌다. 그녀는 담대소천이 걸친 갑주를 보며 물었다.

“진즉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 갑주는 제국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군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아 보이는데, 방어막이 둘러진 갑주를 하나 선물하고 싶군요. 어때요?”

“난 이게 좋소.”

“흠! 그래도 선물하겠어요. 성의를 무시하지 말았으면 해요.”

연소민이 활짝 웃으며 대신 감사를 나타냈다.

“고마워요. 공주님! 기왕이면 최신형으로 주시고, 두 분 숙부님들 것도 주시면 고맙겠네요.”

그 말에 왕전과 북궁천소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둘은 레이나 공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뒷말을 기대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갑옷 하나 주고 조건은 무슨…….”

왕전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레이나 공주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숙부들이 강한 건 인정해요. 패튼 경을 그렇게 쉽게 제압하는 경지라면 마스터와 비슷한 수준이거나 조금 못한 정도겠죠. 그 정도라도 어지간한 국가에서 최소, 자작 이상의 작위는 받을 수 있으니까, 거기에 걸맞은 최상급 갑옷을 선물하겠어요.”

“마스터라면……?”

북궁천소가 연소민을 쳐다봤다.

“강호에서 절정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절정? 우리가 말이야?”

둘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담대소천은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레이나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되물었다.

“절정이 뭔가요?”

“호호! 저희 셤서 지방에선 강한 사람들을 그렇게 불러요.”

“조건이 뭐요?”

선물이 궁금했던 북궁천소가 급하게 나오자 레이나 공주는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르소에서 지내는 동안 나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되어주세요. 작위는 자작으로 내려주겠어요. 당연히 임시 작위가 아닌 영구적으로 임명되는 거니까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요?”

연소민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 모습을 본 레이나 공주는 내심 만족했다. 자신이 건넨 조건은 제국의 기사들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것이다. 당연히 변방의 기사들인 이들이 거부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연소민의 놀란 눈동자는 이내 조금의 불안감을 담고는 셋을 번갈아 살폈다. 담대소천은 걱정되지 않았다. 왕전과 북궁천소의 반응이 불안했다.

[이 계집! 죽여도 되냐?]

왕전의 전음성이 그녀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그냥 숙부님들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니 이해하세요.]

[확, 껍데기를 벗겨서 소금을 쳐버릴라!]

[꼴 보기 싫으니 얼른 데리고 나가거라.]

[훗! 그럴게요. 적당히 드세요.]

연소민은 레이나 공주를 쳐다봤다.

눈을 반짝거리며 셋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가는 것을 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륙의 모든 이들이 꿈으로 치는 직업이 공주의 호위기사인데, 왕전을 비롯한 셋의 얼굴은 몬스터 똥을 밟은 듯, 심하게 구겨져 있었으니 레이나 공주로서는 의아함이 당연했다.

“표정들이 왜 그래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워낙 엄청난 선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아 이러시니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공주님!”

그제야 레이나 공주의 표정이 제대로 돌아왔다.

“좋아요. 대답은 내일까지 듣겠어요.”

“우린 밖으로 나가요. 술을 몇 잔 마셨더니 속이 답답하군요.”

연소민이 레이나 공주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잠시 더 할 말이 있었던 레이나 공주는 연소민의 완력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연소민의 귓속으로 북궁천소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강물에 처넣어버려라!]

“호호!”

연소민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터졌다.

* * *

흑야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전방에 요란 제국의 군영이 보였다. 곳곳에 피워진 거대한 횃불 통이 주변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지만 흑야의 움직임을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외곽을 철통처럼 두른 결계를 짐승 한 마리를 그곳에 놓아둠으로서 해결한 그는 자신이 찾고자하는 대상을 찾아 군영의 곳곳을 빠르게 누볐다. 그는 지금 거대한 독수리를 찾고 있었다.

다크 영지의 상공을 배회했던 독수리들이 사라져간 방향은 분명 이쪽이었다.

하지만 곳곳을 모조리 살폈지만 독수리는 보이지 않았다.

푸르륵!

전마들이 흑야를 발견하고는 놀란 몸짓들을 해댔다. 평원에 말뚝을 박아서 만든 거대한 울타리엔 1만에 육박하는 전마들이 갇혀 있었다.

흑야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머금었다.

‘선물은 주고 가야겠지.’

그는 우측에 자리한 요란 제국의 군막을 살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다.

퍽! 퍽!

그의 손에서 발출된 강기가 말뚝을 차례로 박살내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20미르 정도의 넓은 공간이 생겨났다. 흑야의 육신이 유성처럼 전마들의 가운데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지독한 살기를 발산하며 전마 하나의 엉덩이를 손으로 쳤다.

짐승 특유의 예민함으로 살기를 느낀 전마들이 일제히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뚫어진 구멍으로 전마들이 몰려나가기 시작하자 주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뭐, 뭐야! 말들이 도망간다!”

“잡아라! 막아라!”

조용했던 군영에 일대 소란이 일었다.

취침을 위해 막사로 들어갔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허겁지겁 튀어나왔다. 베린스 공작도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소란이 일어서 나와 보니 이렇게…….”

“뭣들 하느냐! 전마들을 진정시켜라!”

놀란 전마들을 진정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전마들은 일제히 북쪽으로 달렸다. 1만에 달하는 전마들이 일제히 질주를 시작하자 대지가 흔들렸다. 베린스 공작의 얼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결계가 있으니 주둔지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말들이 놀라지 않게 주의해라!”

부관들이 빠르게 전마들의 뒤를 쫓았다.

뒤늦게 밖으로 나온 마법사들도 전마들의 뒤를 쫓았다. 그때 베린스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당연히 주둔지 외곽에서 멈추었어야 할 전마들이 결계를 뚫고 숲으로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 결계를 뚫어놓았습니다.”

“이런! 경계를 어떻게 서고 있었기에 결계가 뚫리는 것도 몰랐단 말이냐!”

“그건…….”

“당장 결계를 설치하고 더 이상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 따라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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