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제1장
아르소 전투
두두두…….
베린스 공작 휘하의 일만 기병이 대지를 울리며 아르소의 국경으로 질주를 거듭했다. 선두에서 전마를 몰아가는 베린스 공작의 얼굴엔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질끈 깨문 입술이 그의 마음가짐을 대변했다.
자신의 모든 과오를 일거에 뒤집기 위한 독단적인 출진이다. 승리하면 다시 한 번 출세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패배하면 그걸로 자신의 인생은 끝장이다.
부관 하나가 전마를 몰아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소리쳤다.
“각하! 30분 거리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쯤에서 척후병들의 정보를 살핀 후에 아르소를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보 따윈 무시한다! 어차피 전력은 우리가 우세하다. 속전속결이다!”
“각하! 케이론 1군단의 패잔병들과 새롭게 보강된 전력이 3만에 이릅니다. 그들이 아르소로 구원을 온다면 자칫,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그깟 허수아비 같은 놈들이야 백만이 있어도 두렵지 않다! 그대로 돌진할 것이니 속도를 높여라!”
베린스 공작은 요지부동이었다.
부관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대열로 돌아갔다.
1만 기병이 만들어내는 흙먼지는 엄청났다. 건조한 날씨 탓에 뒤쪽에서 질주하는 기마병들은 얼굴을 덮어오는 흙먼지 때문에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두두두…….
지축이 흔들렸다.
저 멀리 아르소의 평원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에 강렬한 염원이 어린다.
‘반나절 만에 전투를 끝내야 한다. 케이론의 북부여단이 구원을 올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아르소를 쓸어버려야 한다.’
보병과 창병은 아예 합류조차 시키지 않았다. 오로지 속도만을 중시했던 작전 때문이다.
우르릉…….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빗줄기가 날렸다. 베린스 공작의 얼굴에 초조함이 나타났다. 비가 오면 기동력이 떨어진다.
‘망할……!’
두두두…….
그를 태운 전마가 더욱 빠르게 직선으로 쏘아졌다.
* * *
“저게 뭐냐?”
“적, 적군인가?”
아르소의 성곽을 경계하던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서 거대한 먼지구름을 쳐다봤다.
“북부여단으로 이동하는 아군인 모양인데?”
“그런가? 그런데 그런 소식은 들을 적이 없었는데?”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사색으로 변했다.
“저, 적이다!”
“신호를 울려라! 적의 기습이다!”
뿌우웅!
성곽을 따라 드문드문 세워진 첨탑에서 일제히 나팔소리가 울렸다. 반쯤 열렸던 성문이 빠르게 닫혔고 몇 없어 보이던 성곽에 수백 명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올라섰다. 모두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달려드는 기마병이 어림잡아 일만은 넘어 보였다. 고작 1,000명이 안 되는 병력으로 막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5미르에 달하는 성곽이 위안거리였다.
장대한 체구에 은빛 플레이트를 걸친 천인장 맥슨이 큰 소리로 외쳤다.
“통신병들은 북부여단에 적의 기습을 알리고 나머지는 공성전을 준비해라!”
맥슨의 고함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빌어먹을 새끼들! 케논 산맥에 이어 아르소까지 넘보다니…….”
맥슨은 이를 갈며 활을 잡았다.
타고난 힘이 장사인 그는 성인남자의 키만 한 활을 들어 선두에서 질주해 들어오는 적의 수장을 조준했다.
퉁!
맥슨이 쏜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명중된다면 몇 미르는 날아가서 떨어져야 할 정도로 강력함이 담겨 있었지만 적의 수장은 소문난 강자인 베린스 공작이다. 가벼운 고갯짓만으로 그는 화살을 피해내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들은 성곽 위의 적을 섬멸하라!”
베린스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법병단이 앞으로 나서며 일제히 장거리 공격을 준비했다. 대응할 마볍병단이 없다면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것이 마법공격이다.
파이어 에로우가 허공을 가득 덮으며 성곽을 향해 날아갔다.
“피해라! 파이어 에로우다!”
콰과광!
순식간에 성곽 위는 불바다로 변했다.
전신이 불꽃으로 휩싸인 병사들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떨어져 꿈틀거리는 병사들의 육신은 전마들의 발굽에 의해 산산이 찢어졌다.
촤르륵!
“으아악!”
성곽을 타고 질주하던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에게 펄펄 끓는 기름이 쏟아졌다. 실드를 쳐야 할 마법사들이 미처 마나를 배열하기 전에 받은 공격이라 수십 기에 달하는 기마병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쾅!
성문에 불꽃이 작렬했다.
그 단단해 보이던 성문이 한 번의 공격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버렸다. 마법사들의 가공할 위력에 아르소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일제히 성안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성문을 통해 베린스 공작의 기마병단이 들이닥쳤다.
“남자로 보이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라!”
* * *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연무장의 외곽 숲에서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왕전과 북궁천소, 담대소천은 허겁지겁 뛰어오는 연소민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전쟁이라도 났냐? 왜 그리 허둥대는 거지?”
“큰일 났어요. 요란의 기마병단이 북문을 부수고 진입했다고 해요. 숙부들께서 도와주셔야겠어요!”
셋이 가볍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담대소천이 묵직한 어조로 물었다.
“병력은?”
“기마병만 일만에 이른다고 하는군요. 북부여단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들이 오기까지는 이틀이 걸릴 텐데…….”
“하루거리라고 들었는데?”
“상급부대에 보고하고 출전명령이 떨어지는 것까지 포함해서에요.”
“적이 쳐들어왔는데 뭐가 그리 복잡해.”
담대소천이 술잔을 치우고 일어섰다.
왕전과 북궁천소는 잔뜩 인상을 쓰고서 남은 술을 허겁지겁 마셔버리고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때, 연무장의 우측에서 먼지가 일어나며 전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투소와 그의 기사들이었다.
가투소의 옆에는 놀랍게도 갑주를 차려입은 레이나 공주가 함께하고 있었다. 빠르게 그들의 앞까지 달려온 기사들은 레이나 공주가 손을 들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함께 갈 거죠?”
레이나 공주가 담대소천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담대소천이 왕전과 북궁천소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좋냐? 자식아!”
“우린 네놈처럼 허접한 놈들의 패싸움 따윈 질색인데 말이야. 어쩌랴? 도와주랴?”
담대소천에게 불퉁거린 왕전이 연소민을 보며 당연한 걸 물었다.
“말을 준비하겠어요.”
“튼튼한 놈으로 골라 오너라. 그리고 기왕이면 그 톱날처럼 생긴 칼도 몇 자루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그걸 써보고 싶거든…….”
북궁천소의 말에 연소민은 웃음으로 대답하고는 빠르게 자신의 전마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전마 세 필과 소드 브레이크 두 자루를 쥐고 연소민이 아르소의 정예라 할 수 있는 기사들과 함께 돌아왔다.
소드 브레이크를 받아 쥔 왕전과 북궁천소가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레이나 공주가 전마의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다.
“북부여단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그들을 막아야 해요. 제가 선두에 서겠어요.”
단호한 결의를 비치는 그녀를 보며 기사들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흐흐! 제법인데?]
[괜히 황제가 왕자들을 제쳐두고 저 아이를 총애하겠냐?]
[그래도 계집은 계집일 뿐이다. 간만에 몸 좀 풀어볼까?]
[좋지!]
청룡언월도를 어깨에 비껴 두른 담대소천은 연소민에게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지 말 것을 주의시키고는 말 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모두들 폐하를 위해서, 아르소를 위해서 적들과 맞서 싸우세요!”
레이나 공주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는 북쪽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를 시작했다.
* * *
아르소의 북부는 짧은 시간에 처참하게 부서졌다.
거리는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흥건히 적셔졌고 살아남은 자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용감하게 싸웠던 천인장 맥슨의 목이 베린스 공작의 검에 의해 잘려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두 시간에 불과했다.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베린스 공작에게 부관이 다가오며 큰 소리로 물었다.
“각하! 아르소의 본성으로 곧장 가시겠습니까?”
“당연하지! 피해는?”
“200명가량이 당했습니다!”
“젠장!”
베린스 공작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성곽을 넘어서는데 200명이 죽었다면 극히 미미한 피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린스 공작은 분통을 터트렸다. 아르소가 케이론의 최북단 외지에 불과한 자그마한 영지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정규군이 없는 곳에서의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 조련시킨 기사들, 200명의 죽음은 예상외의 피해였다.
“각하! 서둘러야 합니다! 어서 명을 내려주십시오!”
갑주를 죽은 자들의 핏물로 적신 베린스 공작이 남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그에겐 없었다. 지금쯤이면 케이론의 북부여단에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루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그 안에 아르소를 평정하고 적의 지원 병력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심호흡을 한 베린스 공작이 검이 남쪽을 가리켰다.
“본성을 친다! 출진!”
기마병단이 다시 먼지를 일으켰다.
죽은 자들의 시신이 전마들에 의해 또 한 번의 죽음을 당했다. 가장을 잃은 어미와 아이들, 자식을 잃은 부모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인들의 통곡이 전장을 울렸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기사들 몇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일까? 아니면 죽은 동료들에 대한 서글픔일까? 그것은 오직 그들만이 알 뿐이다.
* * *
아르소는 소문난 곡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취약한 곳 중 하나다.
본토와 워낙 떨어진 변방에다가 천연의 방어막을 형성해준 케논 산맥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요란 제국인지라 아르소 정도의 곡창지역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전쟁에서 자유로운 곳이 아르소였다.
당연히 방어시설이 미비했고 주둔한 정규군은 전무했다.
아르소 자체병력과 인근에 주둔 중인 정규군이 수시로 교환근무를 하는 것이 전부인지라 방어력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덕분에 베린스 공작은 별다른 저항 없이 아르소의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요란 제국의 북부여단은 아르소 본성의 외곽을 가로지른 성곽 앞에서 진군을 잠시 멈추었다.
베린스 공작은 성곽 위에 늘어선 적들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이쯤 되면 항복할 때가 되었을 텐데, 영지민들을 모조리 죽게 놔둘 셈인가!”
그의 목소리는 확성마법을 통해 성곽 위의 인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일만의 기병들이 당장에라도 성곽을 넘어설 듯, 거친 움직임을 보이며 시위를 했다.
전쟁경험이 있는 인물이라면 항전보다는 항복이 당연했다. 게다가 이곳의 영주는 비록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여인인 아리안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베린스 공작은 내심 여유만만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베린스 공작의 예상과는 달랐다.
“이곳은 케이론의 영토! 지금 그대들이 전쟁을 도발했다는 것을 아느냐!”
성곽의 가운데에 금발의 늘어뜨린 미모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베린스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레이나 공주였다.
하지만 베린스 공작과 기사들은 그녀가 아리안이라 생각했다.
“케논 산맥이 이미 본 제국의 영토로 되었으니 이곳도 더 이상 케이론의 영토가 아니다!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한다면 목숨만은 보전해 주겠다!”
“흥! 고작 그 정도의 기병으로 아르소를 넘본 것이냐! 웃기지도 않는구나! 어디 뚫어낼 수 있으면 뚫어 보아라!”
레이나 공주는 당당했다.
“가소롭구나! 너의 그 허세 때문에 아르소는 피로 물들 것이다.”
베린스 공작은 레이나 공주를 노려보고는 말머리를 돌려 본대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연소민이 근심스러운 빛으로 레이나 공주를 응시했다.
“수적인 차이가 거의 열 배에 이르는군요.”
“성곽에서 버틸 때까지 버텨야 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마마는 지금이라도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리안! 아르소는 케이론의 영토야. 제국의 공주로서 그럴 수는 없어!”
레이나 공주의 단호함에 연소민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마마께 부탁이 있어요.”
“부탁? 지금 이 시점에서 부탁이라니?”
“전투의 지휘권을 다른 분께 맡겼으면 해요. 그래 주실 수 있으시죠?”
그 말에 레이나 공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부탁이 그거였어? 그러지 않아도 가투소 대장에게 맡기려고 했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니 잘 해낼 거야.”
연소민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다른 분이 계세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주실 분이 말이에요.”
레이나 공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연소민이 담대소천을 바라보았다.
“맡아 주실 거죠? 숙부님!”
담대소천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뒤쪽에서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아르소의 기사들과는 달리 가투소가 이끄는 기사들은 의혹 어린 눈빛으로 담대소천과 연소민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들의 엄청난 무력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무력만 강하다고 군을 통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적은 아군의 열 배에 달했다. 이럴 때일수록 뛰어난 지휘관이 절실한 법이다.
“흐흐! 저 새끼들이 못 믿는 눈치군. 이보시오, 공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줘야겠는데…….”
북궁천소의 말에 레이나 공주는 움찔했다.
사실 그녀도 담대소천이 지휘권을 갖는 것에 찬성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들이 제법 강한 자들임은 알지만 싸움과 전쟁은 엄연히 다르다.
그녀마저 미덥지 못한 태도를 보이자 왕전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연소민이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
담대소천이 특유의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착각들을 하고 있군. 난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야. 이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서지. 그러니 지휘를 받기 싫은 자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단, 전투 중에 방해가 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베어주겠다. 그러니 받기 싫은 자들은 지금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평소의 담대소천이 아니었다.
왕전과 북궁천소가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로 그는 매섭고 사나운 기세를 발산했다. 연소민은 빙그레 웃으며 담대소천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서 나선다는 말에 그녀는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좋아요! 허락하겠어요. 담대 숙부가 지휘권을 맡으세요! 대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이곳을 꼭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세요.”
레이나 공주가 힘주어 말했다.
“노력해 보지…….”
담대소천이 몸을 돌렸다.
마법사들을 앞세운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이 서서히 성곽으로 진군해 오는 것이 보였다. 담대소천이 활을 든 기사를 응시했다.
“그것 좀 빌려주겠나?”
기사가 활을 건네자 그는 시위를 먹였다. 모두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곽에서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까지는 유효사거리 밖이다. 쏘아봤자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떨어질 것이 뻔했다.
몇몇은 비웃음마저 비쳤다.
“저, 저기… 그건 2백 미르까지가 유효사거린데…….”
활을 건넨 기사가 말을 더듬을 때, 담대소천이 먹인 화살이 날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날아가는 화살을 따라 이동했다.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날아간 화살은 정확하게 선두에서 달려오던 기사의 목을 뚫었다.
거리는 거의 4백 미르에 달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활이 언제 이렇게 성능이 좋아졌는지를 의심했다. 담대소천이 청룡언월도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모두 성곽 가까이 붙어서 몸을 낮추고 적의 마법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려라!”
명령을 내린 담대소천은 가투소를 불렀다. 가투소가 빠르게 달려왔다.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가투소는 그들 말이라면 껌벅 죽는 시늉이라도 할 태세였다.
“전령을 다크 영지로 보내. 이곳에서 싸움이 일어났다고 말이야.”
“그곳에는 병력이…….”
“내 벗들에게 전하란 말이다.”
그제야 가투소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투소가 물러가자 그는 왕전과 북궁천소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을 본 둘이 씩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담대소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기세를 조금은 꺾어줘야겠지?”
“흐흐! 중원식으로 하지.”
“그럼 내가 선봉인 셈이냐?”
둘이 몸을 돌려 성곽 밑으로 내려갔다. 레이나 공주가 둘에게 물었다.
“어딜 가는 거죠?”
“흐흐! 구경이나 하시오.”
레이나 공주는 둘과 담대소천을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함을 내비쳤다. 그때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이 공격을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덮은 마나덩어리들이 불꽃을 일렁거리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성곽에 바짝 붙어 몸을 낮춰라!”
기사들은 재빨리 몸을 낮추고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렸다. 레이나 공주와 연소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기사들과 섞였다.
콰과과광!
성곽 위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화염계열의 마법은 살상범위가 상당히 넓기 때문에 비록 방패로 막았다고는 하지만 뜨거운 열기로 인해 상당수가 죽어나갔다.
“위,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담대소천을 보며 소리쳤다.
엄청난 폭발이 작렬하는데도 그는 오연하게 선 채 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청룡언월도가 은은한 울음을 냈다.
연소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 청룡언월도가 움직이면 그는 무적의 투왕 담대소천으로 변모한다.
“이봐요! 미쳤어요?”
레이나 공주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담대소천은 오직 적을 노려보고만 섰다. 그의 주변, 모든 곳에 화염들이 작렬했다. 폭발의 여파로 불에 타서 죽어간 기사들만 50명이 넘었다.
20여 분이 지나가자 공격이 멈추었다.
“함성!”
담대소천이 짤막하게 명령을 내리자 아르소 영지의 기사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악다구니를 썼다. 멈칫하던 가투소의 기사들도 일어서며 적을 향해 목청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와아악!”
이전처럼 성문을 공격하려던 베린스 공작이 멈칫했다.
성곽 위의 적의 수가 의외로 많았다. 횡으로 늘어선 탓에 시각적으로 더 많아 보였다. 부관이 그에게 재촉했다.
“각하! 허세일 뿐입니다. 돌진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잠시만!”
베린스 공작이 손을 들어 전진을 멈추게 했다.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세기의 전마가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기는 사람이 타지 않고 있었는데, 다른 두 기엔 익숙한 모습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베린스 공작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눈에 익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항복을 하려나 봅니다.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나는군요.”
부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성곽 위에서 이 세상의 것과는 다른 갑주를 걸친 자가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섬뜩한 중병을 비껴든 그가 전마에 올라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베린스 공작은 그제야 그들이 누군지 생각해냈다.
“저, 저자들이 왜 이곳에……!”
“각하!”
그들을 처음 보는 부관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베린스 공작을 쳐다봤다. 부릅떠진 눈이 금방이라도 찢어질듯 붉게 충혈되어 보였다.
* * *
“서, 성문을 스스로 열다니…….”
신음처럼 말을 내뱉은 레이나 공주는 사색이 되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가투소도, 다른 모든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연소민만이 가볍게 상기된 표정으로 셋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이 생기지 않아. 저분들이라면 일만의 기병도 어쩌지 못할 거야.’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원에선 무적의 전사들이라 불리는 그들이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신화이자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녀도 그 전설을 들으며 성장했다. 오늘 그 전설과 신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문득 혁련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날 지켜줘요.’
검을 뽑아 든 연소민은 레이나 공주를 돌아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성을 부탁해요!”
“……!”
무슨 말이냐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나 공주를 뒤로하고 그녀는 훌쩍 성곽으로 뛰어내렸다. 휘파람을 불자 성안에서 백색의 전마가 바람처럼 달려 나왔다.
“저, 저…….”
모든 사람들이 말을 잃었다.
그건 담대소천과 왕전, 그리고 북궁천소도 마찬가지였다. 달려오는 연소민을 보고 셋의 얼굴이 구겨졌다.
담대소천이 중얼거렸다.
“신교주의 딸인 것을 잠시 잊었군.”
신교는 전사들의 대지, 그곳의 주인이 낳은 핏줄이라면 당연히 그녀도 전사의 기질을 타고 났을 것이다. 연소민이 그들의 옆에 전마를 세웠다.
“저도 함께하겠어요.”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저도 강하니까 염려 마세요.”
연소민은 환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셋이 피식 웃고는 이내 시선을 전방으로 던졌다. 일만에 달하는 기병 앞에서도 그들은 담담했다.
왕전이 목을 이리저리 돌리자 뼈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나가지. 모든 힘을 다 보여주면 꽤나 번거롭게 될 것 같으니까 적당히 하자고.”
“저놈은 내가 맡지.”
담대소천이 베린스 공작을 가리켰다.
케논 산맥에서 보았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넷은 간격을 넓게 가져가며 베린스 공작의 부대를 향해 서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전혀 항복을 하러 온 것으로 보이지 않자 베린스 공작의 부관들이 코웃음을 쳤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들이군. 고작 넷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설마 놈들이 탄 전마가 최상위 라이트 마법이 걸린 것은 아니겠지?”
“이런 오지에 상위마법사가 있을 리 없지.”
최상위계열의 라이트 마법을 걸면 전마는 하루에 수백 킬로를 달릴 수 있게 된다. 지구력뿐만이 아니라 속도 역시 보통의 전마보다 두세 배가 빨라진다. 그런 전마를 이용해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펼치는 것은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니다. 마스터 급의 강자들이 적의 수가 많을 때 종종 애용하는 전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북단 변방인 이곳에 마스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영주, 아리안이 제국 최초의 여 마스터라 소문났지만 그것도 케이론에서만이다. 요란 제국에서 그것을 믿는 자들을 거의 없었다.
베린스 공작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10,000명 대 4명이다. 게다가 하나는 여인이다. 그럼에도 망설여진다.
“각하!”
부관들이 재촉했다.
누구보다 집념을 보였던 그가 아르소의 본성을 코앞에 두고 머뭇거리자 부관들을 비롯한 기사들은 다소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때였다.
“엇!”
누군가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게 뭐냐?”
“엄청난 도약이다!”
무시무시한 중병을 비껴 든 적의 장수가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놀란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 높이가 실로 대단하자 베린스 공작의 얼굴에 떠오른 불안감이 짙어졌다.
“오, 온다!”
30미르를 떠올랐던 담대소천이 대열의 선두에 늘어선 마법병단을 향해 곧장 떨어져 내리자 선두에 늘어선 기사들에게서 동요가 일어났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떨어지는 속도는 만고불변의 법칙인 관성을 무시한 상상불허의 속도였다.
콰앙!
“우아악!”
처참한 비명이 곳곳에서 터졌다.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며 육신의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게 신호였다.
왕전과 북궁천소가 전마를 박차고 기마병단의 가운데로 날아서 떨어졌다. 연소민도 뒤를 따랐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마법사 여섯이 핏물로 변해 날아갔다.
놀람을 넘어 황당함마저 비추던 기사들이 재빨리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놀라울 정도의 반응속도였다. 그들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던 것이다.
빠르게 공격범위 밖으로 전마를 물리고는 대열을 갖추었다.
“천인장, 넷은 성곽을 공격하라!”
베린스 공작의 명령이 드디어 떨어졌다.
그는 병력의 수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 * *
레이나 공주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의 우아하고 품격 넘치던 그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절로 꽉 쥐어진 주먹은 이미 흥건하게 땀으로 적셔진 상태였다.
“믿을 수 없어…….”
그들이 강하다는 것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저건 그냥 강한 정도가 아니라 초인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놀라워, 정말 놀라워…….”
놀란 목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적들의 일부가 들이치고 있습니다!”
가투소의 다급한 목소리에 레이나 공주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의 눈에 성곽으로 달려드는 수천의 기마병들이 보였다.
‘일부를 빼돌릴 생각을 하다니, 무시 못 할 자가 적을 이끌고 있어.’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려 각오를 다졌다.
지금 아군의 수는 1,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성곽을 끼고 있기 때문에 쉽게 돌파를 당하지 않을 자신이 그녀에게 있었다.
“적의 마법병단이 큰 피해를 입었으니 성문 위쪽에 궁병들을 배치하고 물러서지 말고 자리를 지키세요!”
그녀는 스스로 지휘를 자청했다.
애당초 가투소에게 넘기려던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질주해 들어오는 기병들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생각보다 적은 수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부분의 화살들은 기사들의 방패에 모조리 튕겨나갔다. 쏜 자들의 마나가 요란 제국의 기사들보다 약했기에 방패를 뚫어내는 화살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눈먼 화살에 쓰러지는 기사들의 수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들이 성곽까지 질주해 들어오는 동안 아리소의 기사들은 세 번의 화살공격을 할 수 있었다. 대략 2백에 달하는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쓰러졌지만 남은 수는 여전히 아르소의 병력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질주해 들어오던 선두의 기사들이 말 잔등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말 등에서 성곽까지는 2미르가 채, 안 되는 높이다. 수련을 거친 기사들이라면 쉽게 올라설 수 있는 높이였다.
“성곽 위로 뛰어오른다!”
“랜서들은 어디 갔느냐! 올라오는 적을 막아라!”
가투소의 고함에 뒤늦게 창병들이 성곽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상당수의 기사들이 올라온 뒤였다.
좁은 성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레이나 공주도 검을 뽑아 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검술은 실로 놀라웠다. 여자라고 우습게 여기고 달려들던 기사들이 대번에 목이 날아갔다.
“물러서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가투소는 용맹하게 싸우면서도 전황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으악!”
그의 검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 기사의 육신이 아래로 떨어지며 다른 기사를 덮쳤다. 졸지에 밑에서 올라가려던 기사들이 목이 부러져 함께 횡사를 당했다.
“기름!”
촤아악!
“으아아…….”
미리 설치되었던 커다란 솥에서 펄펄 끓는 기름이 성곽 아래로 쏟아지자 밀집해 있던 요란 제국의 기사들, 상당수가 참변을 당했다. 제법 떨어져 있던 기사들도 기름이 튀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전투력을 상실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살아남은 마법병단의 공격이 아르소의 기사들에겐 가장 큰 문젯거리였다. 화염계열의 공격에 상당수가 불길에 휩싸여 죽어갔다. 더욱이 가투소의 기사들은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은 기병출신이 대부분이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베린스 공작의 편이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넷에게 최소한의 전력을 던져주고 성곽을 공격한 것이 주효했다. 워낙 수적인 열세에다 익스퍼트 급 기사들의 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자 서서히 아르소는 밀리기 시작했다.
“성곽으로 돌아가야겠다!”
“독한 새끼들!”
북궁천소와 왕전은 성곽이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을 보고는 몸을 날렸다. 담대소천은 병력들 사이에 몸을 숨기기 바쁜 마법사들만을 골라 격살하고 있었는데,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기사들 때문에 다소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군.’
지금까지는 최대한 살생을 금했던 그였다.
적당히 겁을 주고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이면 그대로 물러날 거라 여겼던 것이 판단착오였다.
“소민! 너도 성곽으로 돌아가서 저들을 도와라!”
“조심하세요! 담대 숙부님!”
연소민이 재빨리 왕전과 북궁천소의 뒤를 따랐다.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강력한 도강으로 휩싸였다.
“지금부터 너희들을 나의 생사대적으로 간주하겠다.”
담대소천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살기가 떠올랐다.
이미 그의 주변은 커다란 원형의 공간이 생겨나 있었다. 달려들기가 두려웠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마법사들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웅웅웅!
청룡언월도가 공명을 토해내며 허공을 가르자 상상불가의 강력한 힘이 주변을 쓸었다. 검을 들어 막은 자들이 검과 함께 두 토막으로 잘라지며 피를 뿌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마법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눈 녹듯 사라지며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땅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살 수 있다!”
담대소천의 사자후가 주변을 울렸다.
“으아…….”
쾅!
피와 살이 난무했다. 죽어가는 자들이 흘린 비명은 산 자들에게 극한의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모두 성곽으로 도주하라!”
누군가의 입에서 엉뚱한 명령이 터졌다.
이곳보다 적의 주 병력이 몰려 있는 성곽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담대소천의 파괴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기사들이 전마를 돌려 성곽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우위를 점해가던 성곽의 전투도 전장으로 난입한 왕전과 북궁천소 때문에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워낙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인 까닭에 둘이 양방향에 떡하니 버티고 서자 뚫어낼 방도가 없었다. 인해전술도 상대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보이는 경지라면 통한다.
그러나 북궁천소와 왕전은 그들이 어찌할 수준을 넘어선 존재들이다. 당연히 마스터라고는 베린스 공작, 하나뿐인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이 둘의 방어를 뚫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나마 마법병단이라도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면 가능성이 높아졌겠지만 그들은 벌써 몇을 남기고 모조리 죽어버린 상황이었다.
집요하게 마법사만을 노렸던 넷 때문이었다.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가 절망을 넘어 광기를 비쳤다.
“각하! 퇴각하셔야 합니다!”
“크로우기사단이 아니면 저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모조리 죽습니다. 퇴각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각하! 마법 병단이 전멸했습니다! 속히 퇴각을… 으악!”
부관 하나의 머리에 화살이 박혀들었다.
화살은 연이어 베린스 공작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부관들의 목을 꿰뚫었다. 크게 놀란 베린스 공작은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곽의 끝부분에서 황금색 갑주에 붉은 흉갑을 두른 인물이 그의 눈에 잡혔다. 바람에 금발을 날리며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는 베린스 공작을 보며 웃고 있었다. 참혹한 전장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움이 그에게서 묻어났다.
베린스 공작의 부릅떠진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후후! 운이 없다고 생각해.”
어느새 베린스 공작의 곁에 나타난 인물이 속삭이듯 말했다. 달려들던 기사들이 그의 가벼운 손짓에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그녀를 괴롭혔으니 당연히 죽어야지.”
퍽!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가 찢어질듯 커졌다. 그리고는 서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을 뚫고 등까지 삐져나온 팔이 빠져나가자 베린스 공작의 육신은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으아! 각하께서 전사하셨다!”
“퇴각하라!”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이미 성곽 밑의 기마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루안!”
레이나 공주가 베린스 공작을 죽인 인물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소리치며 뛰어왔다. 루안이 그녀를 보며 눈부신 미소를 머금었다.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히는 루안의 미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후후! 당신의 기운이 느껴지더군. 그래서 왔지.”
“때마침 잘 와주었군요.”
“잠시만 기다려.”
루안의 육신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허공에서 멈춘 그는 북쪽으로 도주하는 요란 제국의 기사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의 양팔이 허공에서 교차되며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도주하는 기사들에게로 날아갔다.
쾅!
쾅!
도주하던 기사들이 화염에 휩싸여 죽어갔다. 루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극한의 살기가 그에게서 뿜어졌다. 주변을 둘렀던 기사들이 흠칫하며 물러설 정도로 대단한 살기였다.
“모두 죽여주지. 궁극의 화염, 레파온!”
루안의 육신 주변이 시퍼런 광망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미 성곽 위는 전투가 끝나 있었다. 성곽 위로 난입했던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전의를 잃고 항복을 해버렸다. 모두는 죽은 동료의 시신도 마다한 채, 허공에서 거대한 화염을 만들어내는 루안을 넋 나간 모습으로 쳐다봤다.
그때였다.
지상에서 누군가가 루안을 향해 날아오르며 소리쳤다.
“멈춰!”
“응!”
루안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오르며 퇴각하는 기사들을 향했던 화염덩어리가 날아오르는 인물에게로 날아갔다.
콰아앙!
허공에서 가공할 만한 폭발이 일어났다.
지켜보던 모두가 손으로 황급히 눈을 가렸다.
드드드…….
폭발의 여파로 인해 성곽의 가장자리가 폭삭 무너졌고, 가까이 있던 기사들이 폭풍에 휩쓸려 사방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욱한 폭연이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레이나 공주와 연소민은 초조한 기색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저놈은…….”
북궁천소가 레이나 공주에게 물었다.
그의 어조가 반말에다 싸늘함까지 묻어났지만 그녀는 미처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루안이라고 나를 도우러 온 사람이에요.”
“완전히 미친 새끼군. 전의를 잃고 도주하는 자들을 죽이다니…….”
“예?”
그제야 레이나 공주는 북궁천소를 돌아봤다.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북궁천소와 왕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 같았으면 몰라도 그들의 강력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꼈던 터라 저절로 긴장감이 몰려왔다.
왕전이 소드 브레이크를 버리고 자신의 대도를 어깨에서 끌러 손에 쥐면서 중얼거렸다.
“무사의 기본을 모르는 새끼는 적이든, 아군이든 두들겨 맞아야지.”
“지금 루안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그렇다.”
왕전의 반말에 레이나 공주의 눈썹이 상큼, 치켜 올라갔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루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뭐지?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허공이 아닌 성곽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담대소천과 루안이 마주보며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일제히 몰렸다. 엄청났던 폭발의 중심에서도 담대소천은 멀쩡했다. 루안 역시 그와 같았다.
담대소천의 얼굴엔 은은한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전의를 잃고 도주하던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살수를 펼치다니, 이것이 케이론이 내세우는 정의인가?”
“정의? 크! 우습군. 전쟁터에서 정의를 찾다니, 꽤나 낭만적인 친구군. 제법 강하던데 어디서 온 누구지?”
“입이 예의를 모르는 놈이군.”
루안의 하대에 담대소천은 청룡언월도를 횡으로 잡아가며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껏 여유를 보이던 루안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담대소천이 말을 이었다.
“무사는 덤비지 않는 약자는 비록 적이라도 해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 나와 싸우겠다고?”
“그릇된 네놈의 정신을 제대로 잡아줄 생각이다. 검을 뽑아라. 금발머리!”
루안은 대답을 못 하고 두 팔을 올리며 어이없다는 시늉을 보였다. 그때 레이나 공주가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그만! 싸우지들 말아요!”
왕전과 북궁천소, 연소민도 담대소천의 곁에 내려섰다. 셋을 응시하던 루안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뭐야! 이놈들도 저놈보다 약하지 않아 보이잖아!’
왕전과 북궁천소에게서 느껴지는 강력함에 루안은 내심 적잖이 놀랐다.
비록 여유를 보이고는 있었지만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담대소천은 강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서 팔짝 뛸 일인데 그와 엇비슷해 보이는 둘이 더 나타나자 놀람은 배가되었다. 그러나 이내 예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놈은 누구지?”
담대소천이 레이나 공주에게 물었다.
루안의 눈동자에 새파란 광망이 어렸다. 자신에게 반말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너, 입조심해야지. 감히 공주에게 반말로 지껄이다니…….”
“착각하고 있군. 우린 케이론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다.”
“뭐야?”
다시 싸울 분위기가 조성되자 레이나 공주가 언짢은 기색을 그러내며 소리쳤다.
“그만들 해요! 같은 편끼리 왜이래요!”
“같은 편?”
왕전이 삐딱하게 되물었다. 연소민이 말렸으나 그는 루안을 노려보며 다가섰다.
“우린 케이론을 도운 게 아니야. 이 아이를 도왔을 뿐이지. 그러니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와 같은 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알아두라고. 공주!”
“이봐! 너희들, 죽고 싶어!”
루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그였지만 레이나 공주를 함부로 대하는 셋의 태도에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다른 이들을 몰랐지만 루안은 화가 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레이나 공주는 루안을 말렸다.
“루안도 그만 해요. 이들 덕분에 아르소를 지켜냈어요.”
“건방지잖아!”
반대로 연소민은 왕전과 북궁천소를 말리느라 땀을 흘렸다. 그녀의 간곡한 만류 덕분에 사고는 터지지 않았다. 평소의 성격으로 보아 지금까지 주먹을 날리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담대소천이 몸을 돌렸다.
“술이나 마시자.”
“나중에 찾아뵐게요.”
연소민은 레이나 공주에게 옅은 미소를 보여주고는 셋과 함께 성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