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25화 (25/55)

제2장

드래곤 사냥꾼

아르소의 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와!”

“영주님! 만세!”

연소민과 담대소천 등을 향한 함성이었다. 가투소를 비롯한 1군단 소속의 기사들도 검을 하늘로 치켜 올리며 경의를 표했다. 일만에 달하는 적의 기마병단으로 돌진해 들어갔던 그들의 용맹스러움은 이미 기사들의 가슴속,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담대소천 등을 고깝게 여겼던 기사들도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러댔다.

“지금부터는 그대가 인솔하도록!”

담대소천은 가투소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함성이 다시 터졌다.

레이나 공주와 루안이 뒤이어 들어섰기 때문이다. 레이나 공주는 꽤나 상기된 얼굴로 기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공주마마! 만세!”

믿기지 않는 승전이었다. 10분지 1의 병력 차이를 극복해낸 것이다. 물론 성곽에서의 난전으로 아군도 반수 이상이 목숨을 잃었지만 기사들은 승전에 대한 기쁨으로 열광했다.

몇몇 기사들만이 죽은 동료들에 대한 슬픔으로 고개를 숙였다. 담대소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변을 쓸어보고는 전마에 몸을 실었다.

“성으로 돌아가야겠다.”

“제가 모시겠어요.”

“영, 찝찝하군. 이놈들, 이런 놈들이었나?”

왕전의 얼굴도 꽤나 불편한 기색이다. 환호하는 기사들을 보며 혀를 찬 그들은 전마에 몸을 실고는 연소민의 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봐요! 승전을 축하하는 술이라도 마셔야죠!”

레이나 공주가 소리쳤다.

“너희들이나 배터지게 마셔라. 우린 간다!”

“기분들이 별로신가 봐요. 먼저 갈게요.”

셋이 전마를 몰아가자 연소민은 레이나 공주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레이나 공주는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빛이 역력했다.

사실 도주하는 적을 사살했던 루안의 태도는 케이론의 입장에선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포로가 아닌 전투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적의 기사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담대소천 등은 달랐다.

그들이 살아온 강호는 무사들의 세계, 비록 적수라도 최소한의 무도는 지키며 살아가는 곳이 그곳이며 더욱이 그들은 천하의 정점에 오른 신마성의 주축 고수들이었으니 누구보다 그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갈등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봐야 했다.

사라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레이나 공주의 표정이 묘했다.

“저놈들, 아는 놈들이었군. 누구지?”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의 의숙부들이에요. 셤서라는 곳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셤서? 그런 곳도 있었나?”

“이 넓은 대륙에 우리가 모르는 곳은 얼마든지 있어요. 저쪽으로 가요.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켜낸 기사들에게 술과 음식이라도 내려야겠어요.”

레이나 공주가 루안의 팔을 끌었다.

루안은 끌려가며 물었다.

“이길 줄 알고 미리 술이라도 사온 건가? 이런 전장에서 술과 음식이라니…….”

“내게 그런 예지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레이나 공주는 자신의 전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 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루안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오호! 그것을 아직도 지니고 있었군.”

“당신이 제게 처음 준 선물인데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죠. 이 안에 수백 명이 먹고도 남을 술과 음식이 있어요. 사실 주변의 가난한 영지민들에게 나눠주려고 담아두었었는데…….”

가죽주머니는 루안이 레이나 공주가 열다섯이 되던 해의 생일날에 선물로 주었던 이동식 인벤이었다.

루안이 입맛을 다셨다.

“좋아! 놈들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는데 술로 기분이나 풀어야겠어.”

“조금만 마셔요. 기사들이 마실 것도 모자라니까…….”

“쩝! 그러지.”

* * *

쾅!

“으윽!”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려난 아이작의 입가로 가느다란 핏줄이 비쳤다. 다른 기사들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고쳐 잡으려던 아이작이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서 앞으로 꼬꾸라졌다. 혁련천후의 시선은 보우를 향했다.

“이제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라.”

보우는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을 쳐다보며 씁쓸함을 비추었다. 그는 금발여인을 흘끗 쳐다본 뒤, 혁련천후에게도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여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혁련천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진정, 소문의 그 흑안의 마검사들이 분명한가요?”

오직 자신만이 멀쩡하게 서 있었지만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게 네게 중요한 일인가?”

“그래요. 진 빚은 갚아야 하니까요.”

“후후! 빚이라…….”

보우는 근심스러운 눈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자칫 이들이 그녀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죽어선 절대 안 될 신분이다.

“다크 영지라고 들어보았나?”

“다크 영지? 케이론인가요?”

“우린 그곳에 머물지. 물론 때가 되면 떠날 테지만… 빚을 갚고 싶다면 그곳으로 언제든 오면 된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거죠?”

“죽여야 하나?”

“……!”

혁련천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차후, 복수를 꿈꾸고 찾아온다면 그때 죽여주지.”

그 말을 끝으로 혁련천후는 보우의 어깨를 잡아끌고 기이한 기운으로 요동치는 텔레포트 진으로 들어섰다. 진천과 사공진무 역시 여인에게 눈을 찡긋거리고는 진안으로 들어섰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혁련천후의 싸늘함에 진저리를 친 보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주문 같은 것을 외웠다. 셋의 얼굴이 다소 긴장감을 보였다.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험을 다시 겪게 되는 것 때문이다. 제아무리 천하를 일통했던 혁련천후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보우의 주문이 끝났다.

눈을 감은 보우는 체념을 한 듯 좌우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뭐야? 아무런 반응이 없잖아!”

진천이 보우를 노려보며 물었다.

눈을 뜬 보우도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사공진무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보우는 황급히 다시 주문을 외웠다.

한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묘했다.

“됐습니다!”

그들이 들어선 공간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여인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일행이 이동된 곳은 예상과는 달리 번화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자그마한 산의 깊숙한 곳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장대한 케논 산맥은 아닌 듯 보이자 진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봐! 여긴 케논 산맥이 아니잖아! 너, 개수작을 부렸지?”

“텔레포트 진은 지정된 장소로만 이동이 가능한 법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타고 온 진은 케논 산맥이 아닌 이곳으로 지정되어 있었단 말이야?”

“그렇소.”

진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말을 왜 지금 하는 거지? 분명 케논 산맥으로 가자고 했을 텐데?”

진천에게 멱살을 잡힌 보우의 육중한 몸이 허공에 떴다. 혁련천후가 보우에게 물었다.

“왜 이랬지? 말해라.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면 드래곤의 레어를 포기하겠다.”

그것은 곧 보우를 죽이겠다는 말과 같았다.

보우는 그가 결코 협박에만 그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짐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겪어본 보우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직선적이고 단순하다는 것, 반대로 수틀리면 뒤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보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걸 놓아주시오.”

진천이 눈을 부라리고는 멱살을 놓아주자 보우는 다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곤의 마법 때문이오?”

“넌 그저 그곳으로 우릴 데려가면 그뿐이다.”

“이유 정도는 알려줘도 될 것 같소만…….”

혁련천후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볼일이 끝나면 널 죽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

“약속하지. 네가 우릴 그곳에만 데려가 준다면 너를 그냥 보내주겠다.”

보우의 얼굴에 자조가 어린다. 그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독한 연기가 그것을 통해 흘러나왔다.

“모두가 당신처럼 그렇게 말을 하더군요. 제국의 황제도, 공국의 왕들도 하나같이 안심해라, 나를 믿어라…….”

“……!”

“하지만 정작 때가 되니 나를 죽이려고만 했소. 다른 자들과 레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싫어서 말이오. 물론 나도 바보가 아니오. 당연히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아이아스의 레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적은 없었소.”

혁련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그자들과 반대야.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죽고, 그 반대면 살 것이다.”

“데려가겠소. 어차피 드래곤의 레어를 찾는다고 해도 당신들이 얻어낼 것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진천이 끼어들었다.

“주공! 놈의 뇌를 제압하고 움직이시죠. 아무래도 믿을 만한 놈이 아닙니다.”

말을 하는 그의 손은 벌써 하얀빛으로 둘러져 있었다.

필요한 정보만을 지닌 부분적인 백치로 만들어버리는 환술이 진천에겐 다양했다. 보우의 태도를 미심쩍게 여긴 진천은 혁련천후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에 환술을 시전할 생각이었다. 혁련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그냥 출발한다.”

“주공!”

혁련천후는 보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 믿음을 깨지 않기를 바란다. 사냥꾼!”

진천의 손을 쳐다보며 침을 삼키던 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이 그런 보우에게 다시 으르렁거렸다.

“수작을 부리면 네놈을 살아 있는 강시로 만들 테니 알아서 해!”

보우가 강시를 알 턱이 없다.

하지만 그의 손에 떠오른 기운만으로 그는 심상찮음을 직감하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공진무가 다소 의아한 빛을 보였다.

“드래곤의 레어는 케논 산맥에 있다고 들었는데 왜 이곳으로 온 거야? 그건 말해 줘야지!”

“드래곤의 레어만 찾으면 될 것 아니오. 데려다 줄 테니 따라오기나 하시오.”

“어라! 저거 태도 좀 보게?”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보우의 말투는 불량했다.

아마 천성이 그런 듯싶었다. 사공진무는 보우의 옆을 바짝 붙어서 걸었다. 잠시 후, 일행은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혁련천후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저 도시에 있다는 것은 아니겠지?”

“저곳에 있소.”

“……?”

모두가 보우를 돌아봤다.

눈매가 가늘어진 진천이 다시 손에 환술의 기운을 품었다. 보우가 말을 이었다.

“케논 산맥에 드래곤, 아이아스의 레어가 있다는 것은 헛소문이오. 전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깊은 산맥에 자신의 레어를 짓고 던전을 만든다고 알려졌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오. 아이아스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다른 존재였소.”

“계속해.”

“그는 천 년 이상을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살았던 존재였소. 인간을 하등동물로 여기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리 아이아스는 인간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었소. 그래서 직접 도시를 짓고 그곳에 자신의 레어와 던전을 세운 것이오.”

혁련천후의 시선이 화려한 도시의 야경으로 던져졌다.

“저곳이 그가 세운 도시란 말이군?”

“그렇소. 제국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닌 곳, 아이아스를 신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자들의 왕국, 홀베른이 바로 저곳이오.”

진천이 끼어들었다.

“드래곤의 후예라면 고작 공국에 만족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터, 너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그게 말이 된다고 지금 지껄이는 거냐?”

“믿든 말든 난, 알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오.”

“주공! 그냥 환술로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는 놈입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습니까?”

진천은 여전히 보우에게 믿음이 가질 않았다. 첫인상부터가 별로였다. 혁련천후가 없었다면 보우는 벌써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백치가 되었을 것이다.

혁련천후는 말없이 보우를 쳐다봤다. 보우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내심 덜컥 겁이 솟아났다.

저절로 진천의 손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자들은 절대 허풍을 떨 자들이 아니다. 젠장! 진실을 말해 줘도 믿질 않으니…….’

그랬다.

자신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물론 세상에서 홀베른 공국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그들에게 데려가기 전에 내가 죽을 수도 있겠어.’

제국의 황제나 왕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이들에게 쉽게 알려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까지만 데려가면 이들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자신이 해를 당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거짓말이 아니오. 내가 속였다면 내 목을 걸겠소.”

“그런 지저분한 목 따윈 관심 없거든!”

치르륵!

진천의 손에 떠오른 기운이 섬뜩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금은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보우의 얼굴엔 초조함이 어린다.

진천이 보우에게 다가서며 짐짓 음흉하게 말했다.

“죽지는 않는다. 아프지도 않고, 대신 넌 죽을 때까지 그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멍청이가 될 뿐이야.”

“저, 정말이란 말이오!”

보우는 뒷걸음을 치며 혁련천후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쳐다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까불면 더 심한 것으로 할 거야! 그러니 고분고분하게 말 들어, 인마!”

“이 사람 좀 말려주시오! 모든 게 사실이란 말이오!”

보우는 기어코 혁련천후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진천은 그제야 피식 웃고는 손을 두른 기운을 풀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보우는 다리가 후들거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 *

흑야와 조윤이 아르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가 끝난 뒤였다.

함께 온 써튼이 담대소천 등을 찾기 위해 기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아리안의 성으로 돌아간 그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영주님의 성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빨리도 갔군. 우리도 그곳으로 가봐야지?”

조윤과 흑야는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그때 죽은 자들을 수습하던 가투소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 이겼다고?”

“하하! 모두가 그분들 덕분입니다. 아! 저리 가셔서 술이라도 한 잔 하시지요.”

조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옆에 두고도 술이 넘어가는가 보군. 우린 일없다.”

가투소는 머쓱한 표정으로 써튼을 돌아봤다.

“하하! 이분들을 모시고 영주님의 성으로 가야겠네.”

“아, 예! 나중에 성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가투소가 머리를 숙일 때, 조윤과 흑야는 벌써 저만치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 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곳에 왜 저런 강한 놈들이 득실거리는 거야?’

루안이었다.

그는 멀어져가는 조윤과 흑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과 격돌했던 담대소천과 비슷한 분위기를 그들이 발산하고 있었다.

“뭘 그리 유심히 보세요?”

“저놈들…….”

루안이 쳐다보는 곳으로 레이나 공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사람들이 왜요?”

“기분 나쁜 놈들이야. 아까 그놈들처럼…….”

레이나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상당한 거리 밖을 걸어가는 그들을 그녀는 몰라봤다. 무심결에 루안을 응시하던 레이나 공주은 흠칫했다.

‘긴장?’

루안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테세우드 공작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는다.

* * *

조윤은 담대소천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놀랍군. 네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의 강자가 있었단 말이냐?”

“묘한 놈이더군. 격돌할 때, 놈의 눈동자는 인간의 그것과는 달랐어. 그런 눈빛은 중원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인데…….”

담대소천의 얼굴은 꽤나 굳어 있었다. 왕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워낙 요상한 무공들이 많은 곳이라 그럴 꺼다. 제대로 붙으면 설마 네놈이 지겠냐?”

“혹시 초인이라는 그놈들 중, 하나가 아닐까?”

북궁천소의 말에 연소민이 대답했다.

“초인들 중에 그렇게 젊은 사람은 없어요. 놀랍군요. 전, 그냥 담대 숙부께서 봐주신 줄 알았는데, 그가 그토록 강했다니…….”

그들은 다름 아닌 루안에 대해서 말을 나누는 중이다.

결코 자신들의 아래가 아니라는 담대소천의 말 때문에 모두들 놀라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섰다.

“헤헤! 여기서 뭐 해?”

카루가였다.

뒤이어 우드가 들어섰다. 모두의 얼굴이 반색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왔다면 혁련천후도 왔다는 것을 뜻한다.

“주공은 어디 계시냐?”

“우리 먼저 왔어. 다크에 갔는데 여기로 갔다고 해서 날아왔지.”

“그럼 주공께선 돌아오지 않으셨단 말이냐?”

우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희들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해결되는 대로 곧 돌아오신답니다.”

조윤이 물었다.

“그 사냥꾼을 찾긴 했느냐?”

“그가 있는 곳으로 떠나시는 것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장소를 아셨으니 지금쯤이면 찾으셨을 겁니다.”

왕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너희들을 먼저 보내셨지?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하셨나?”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니 그러셨겠지.”

북궁천소의 노골적인 말에 우드와 카루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연소민이 카루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빙그레 웃었다.

“배고프지?”

“응!”

“우드 님도 가요. 시장하실 텐데…….”

연소민이 둘을 데리고 나갔다.

“드래곤의 레어가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있다고 해도 들어보니 놈들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던데, 유물을 얻는다고 해석이 가능하겠냐?”

“그거야 모르지.”

“차라리 대마법사라는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납치를 하든가 족쳐서 알아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북궁천소가 그다운 방법을 꺼냈다. 왕전도 동의하는 눈치다.

“그들이 방법을 알고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확신할 수 없지 않느냐. 괜히 벌집을 건드려 소란만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각 나라에서 그들은 거의 보배처럼 다루지 않느냐?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나라 전체가 우리를 잡으려고 들 거다.”

“흠! 그렇겠군.”

그때, 카루가와 우드를 데리고 나갔던 연소민이 다시 들어왔다.

“공주께서 좀 보자세요.”

“왜?”

“훗! 글쎄요.”

퉁명스럽게 반문하는 그들에게 연소민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 * *

전투는 끝났지만 여파는 살아남은 자들을 슬픔 속에 가두었다.

죽은 기사들의 가족들은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부상당한 기사들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행방조차 묘연한 기사들의 가족들은 불안한 가슴을 부여안고 곳곳을 오가며 그들의 행방을 물었다.

“대장! 30여 구의 시신이 더 발견됐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가투소의 얼굴은 참담하게 구겨졌다. 승전에 대한 기쁨도 잠시,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자들이 죽었다. 완치불능의 중상자들도 예상보다 배는 더 되었다.

그들 중, 반수 이상이 이글스여단의 소속 기사들이었다.

“아직 북부여단의 소식은?”

“아직 받은 것이 없습니다.”

“젠장! 반나절이면 올 거리를 하루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다니…….”

“혹시,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간 것은 아닐까요?”

“군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쓸데없는 소릴랑 집어치우고 다시 통신을 보내! 부상자들이 많으니 마법병단을 빨리 보내달라고 독촉해 봐!”

가투소의 과격한 명령에 기사는 황급히 통신실로 뛰어갔다.

답답한 마음에 가투소는 바람이 부는 성곽으로 올라섰다. 눈앞에 펼쳐진 평원은 죽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흘린 피로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독한 놈들! 시신을 수습하러 오지도 않다니…….”

전투가 끝나면 죽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대륙의 관례다. 비록 적이라도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에는 절대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요란 제국 측에서는 시신을 수습하러 오겠다는 연락조차 없었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이곳은… 젠장!”

가투소는 치를 떨었다.

담대소천 등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곳에서 평원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루안에게 죽은 적의 수장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승리한 것이 믿기지 않는 그였다.

10분지 1의 병력으로 승전한 경우는 역사에 없는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도 대륙에 소문난 마스터나 초인도 없이 이루어낸 성과였으니 흥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확전으로 이어지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그것이 불안했다.

아르소에서의 전투를 빌미로 양 제국 간의 전면전으로 확전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잔뜩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평원을 바라보던 가투소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응! 누구지?”

평원이 이어지는 둔덕 부근에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

제법 멀었기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의아한 빛으로 바라보던 가투소가 어느 순간, 눈을 부릅떴다.

분명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실로 엄청났던 까닭이다. 순식간에 얼굴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나타나 있었다.

* * *

“지독하군. 요란 제국이 이곳까지 넘본 모양이군.”

마법사 요란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곳곳에 널린 시신들은 벌써 부패를 시작했는지 고약한 악취를 풍겨내고 있었다.

“하필이면 나라 이름을 요란으로 지어 가지고…….”

우연하게도 요란 제국과 자신의 이름이 같았다. 요란 제국의 언어로 요란은 영원불멸의 불사신을 뜻한다. 물론 자신의 이름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응! 기산가?”

요란은 성곽 위의 가투소를 발견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에게 장난삼아 손을 흔들어준 그는 성곽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가투소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 요란이 마법사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마법사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아르소의 기사시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국에서 오신 마법사이십니까?”

“나도 그런 건 아니오만… 흠! 전쟁이라도 치르신 모양이오? 저기 저, 죽은 자들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로 보입니다만?”

“케이론 제국의 소속인지 먼저 밝혀 주십시오!”

가투소는 정색을 하고서 물었다. 요란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얼마 전까진 레이놀드 백작의 마법사였소. 물론 지금은 그 돼지와 헤어졌소. 되었소?”

“아! 그러시군요. 제1군단, 이글스여단의 가투소라고 합니다.”

가투소는 그제야 자신을 밝혔다.

사실 요란의 음습한 분위기에 그는 내심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 요란 제국이 보낸 마법사가 아닐까 의심도 하며 주변을 살피기도 했었다.

“아르소엔 누굴 찾아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냥 세상을 떠도는 중이오. 이곳의 맥주가 최고라기에 맛이라도 보고 가려고 들른 것이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사들에게 시내로 모시라고 하겠습니다.”

가투소는 깍듯했다.

레이놀드 백작의 마법사였으면 보나마나 상위계열의 마법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대륙의 그 어디에서도 환대와 존중을 받는 존재들이다.

요란은 가투소를 따라 성내로 들어섰다.

여전히 주변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울부짖는 사람들을 슬쩍 찌푸린 눈으로 쳐다본 요란은 낡은 막사로 안내되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도시로 모시겠습니다.”

“어찌된 일이오?”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막아내기는 했지만 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단하군. 아르소는 변방이라 정규군도 없다고 들었소만, 어찌 막아낸 것이오?”

요란의 질문에 가투소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물든다.

“이곳에 지금 대단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 덕분에 1천이 안 되는 병력으로 1만의 적, 기병을 물리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흥분됩니다. 하하!”

요란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작 1천으로 1만을? 그것도 기병을 말이오? 제국의 마스터들이라도 있단 말이오?”

“하하! 마스터보다 더 강한 분들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그분들께 모시겠습니다. 거의 정리가 다 되어갑니다.”

가투소는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요란은 낡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마스터보다 강한 자들이라… 이곳에 그런 존재들이 있었단 말인가? 혹시, 그 다크 영지의 그자들일까?”

그는 지난 날, 보았던 흑야와 혁련소를 떠올렸다.

그들이라면 어쩌면 마스터보다 강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의 대승이라면 곧 제국에 소문이 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자들에 대한 소문 역시 퍼질 것이다. 후후! 이거 이곳이 폭풍의 중심이 될 수도 있겠군.”

요란의 눈동자에 하얀 백색의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담대소천 등은 성의 첨탑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담소를 즐겼다. 아직 다크 영지로 돌아가지 않은 흑야와 조윤도 함께했다.

찻잔을 나르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모조리 우드의 몫이었다. 연소민이 옆에서 도왔지만 우드는 등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뜨거운 불 앞에서 요리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드,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요즘 우드는 중원식 요리를 배우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생전 처음 먹어본 중원의 음식에 흠뻑 빠진 탓이다. 우드는 즐거웠지만 그것을 먹어야 하는 담대소천 등은 달갑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저 인간이 마법을 포기하고 요리사로 전직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군. 덕분에 내 혓바닥만 고생이잖아. 젠장!”

“흐흐! 난 탕수에서 그런 오묘한 맛이 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얼마 전, 그들은 우드가 직접 요리한 탕수를 한 젓가락도 삼키지 못했었다. 고춧가루를, 그것도 지독하게 매운 고춧가루를 향신료로 오인하여 듬뿍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매운 것을 유달리 못 먹는 북궁천소에게 맞아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엄청나게 매운 탕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의 옆에서 카루가가 젓가락을 들고서 뭔가를 열심히 입에 넣었다. 과일을 갈아서 만든 향긋한 요리였다. 북궁천소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맛있냐?”

“응! 맛있어. 좀 줄까?”

“됐다. 많이 먹어라!”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돌아온 북궁천소는 우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춧가루는 멀찌감치 갖다놔, 인마!”

“저것 좀 봐라. 아주 지랄을 한다. 지랄을…….”

북궁천소의 고함에 깜짝 놀란 우드가 그만 펄펄 끓는 솥에다 고춧가루를 통째로 떨어뜨렸다. 먹으면 치사량에 가까운 고춧가루를 쏟아 붓는 바람에 당황한 우드는 향신료까지 솥 안으로 떨어뜨렸다.

배가 고파서 음식이 다 되기만을 기다렸던 모두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아저씨 때문이야. 냠냠!”

카루가가 북궁천소를 가늘게 흘겼다.

“그게 왜 내 탓이냐?”

“소리 질렀잖아!”

“맞다. 네놈이 소리를 질러서 일이 벌어진 거니 네놈이 책임져라.

왕전이 거들었다. 북궁천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겁을 한 우드는 재빨리 도망쳤다.

“서! 안 서?”

“오늘은 기사들이 먹는 것으로 하시지요. 제가 후다닥 가져오겠습니다.”

도망치는 우드는 무척이나 빨랐다.

퍽!

“어이쿠!”

밑으로 내려가려던 우드가 마침 첨탑으로 올라오던 가투소와 부딪혔다. 워낙 뒤도 안 보고 달렸던 탓에 충격은 대단했다. 둘은 한동안 머리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다. 가투소와 함께 올라온 요란은 흑야를 발견하고는 이채를 발했다.

‘후후! 역시 저자였어.’

요란 제국의 1만 기병을 물리쳤다는 존재들을 소개받기 위해 온 그였다. 내심 흑야와 혁련소를 떠올렸던 그는 흑야가 그곳에 있자 확신을 굳혔다.

흑야도 요란을 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좀처럼 웃음이 없는 요란이 씩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오.”

흑야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요란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때 가투소가 일어나 요란을 소개했다.

“마법사 요란 님이십니다. 여행 중에 이곳을 들르셨다고 하기에 모시고 왔습니다.”

“왜?”

왕전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가투소는 멀뚱거렸다. 요란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단한 전투를 치르신 분들을 만나 뵙고 싶다고 제가 졸랐습니다. 요란입니다.”

전날의 요란과는 무척 달라진 태도였다.

마치 흑마법사처럼 음습하고 차가웠던 그가 아니라 천성이 그런 것처럼, 표정이나 태도가 꽤나 밝았다. 전날의 요란을 기억하고 있던 흑야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요란을 직시했다.

“이쪽으로 모셔라.”

담대소천의 묵직한 음성에 가투소는 재빨리 요란을 빈 의자로 안내했다. 요란을 흑야와 담대소천을 제외한 모두가 자신을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내심 흠칫했다.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날카로운 칼날이 몸을 쑤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몇 클래스요?”

왕전이 물었다. 안하무인격이 태도에 요란은 내심 언짢았으나 얼굴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보잘것없는 수준이라 밝히기가 부끄럽습니다. 하하!”

요란은 쑥스럽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제법 강한 친구다. 소가 탐을 냈던 적이 있었지.]

흑야의 전음이 모두의 귓속을 울렸다. 그 말에 모두는 새삼스러운 빛으로 요란의 전신을 훑었다.

모두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변하자 배짱 좋은 요란도 움찔했다.

“다크 영주님은 보이지 않으시군요.”

분위기를 돌리고자 한 말이 주변 공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뭐야, 이거…….’

요란은 한동안 입을 다물어야 했다.

* * *

혁련천후는 홀베른의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보우의 말로는 왕궁의 깊숙한 곳에 아이아스의 레어로 통하는 입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대단한 기운들이 곳곳에서 번득입니다. 확실히 요상한 곳입니다.”

진천이 옆에 섰다.

그의 말대로 왕궁 주변에서 포착되는 강력한 기운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중엔 혁련천후 자신도 측정이 불가능한 기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붙어보기 전엔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궁 전체를 두른 결계라는 것이 상상 이상입니다. 숨어서 잠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쩌죠?”

“생각 중이다.”

혁련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온 이후로 가장 강력한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반대로 저곳이 드래곤의 레어가 존재하는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세상의 초인이라는 케이시 공작을 그는 근접거리에서 보았었다. 꽤 강력했지만 자신과 비교하면 상당한 격차가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홀베른의 왕궁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강력함을 느끼게 했다. 드래곤의 후예라는 보우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사냥꾼은?”

“수혈을 짚어 재웠습니다.”

“깨워!”

“예?”

“놈에게 왕궁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방법을 물어봐야겠어.”

* * *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깊은 잠을 자다가 깬 보우는 혁련천후의 물음에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말을 늘어놓았다.

검술대회.

바로 그것이었다.

홀베른의 왕은 검술대회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위인이란다. 그래서 일 년에 다섯 번에 걸쳐 검술대회를 개최하는데 곧 올해의 네 번째 대회가 개최될 시기란다. 우승자는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는 영광과 함께 후작의 지위가 내려지고, 준우승자는 백작의 지위에 역시 왕실기사단에 입단하는 특혜가 주어진단다.

보우의 말에 혁련천후는 눈빛을 발했다.

소란 없이 자연스럽게 왕궁으로 들어갈 방법치고는 지나치게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검을 당할 자, 없다고 자신한 그는 곧바로 왕궁 근처의 도시로 이동했다.

홀베른의 수도는 멀리서 바라보던 것보다 훨씬 번잡하고 화려했다.

케이론에선 볼 수 없었던 화려함이 도시 전체에 깔려 있었다. 주변을 늘어선 상점은 손님들도 넘쳤고 술집은 빈자리가 없어 아예 도로의 가장자리까지 탁자로 넘쳤다.

곳곳에서 화려한 공연들이 펼쳐졌고 요란한 복장의 광대들이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와! 죽이는군요. 요지경에 든 것 같습니다.”

“돈이 남아도는 곳이군요. 금을 두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거 강도짓 몇 번만 하면 떼부자가 되고도 남겠습니다.”

진천과 사공진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번에 걸쳐 이곳을 들렀던 그였지만 마지막으로 다녀간 시점이 2년 전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홀베른은 확연히 달랐다.

“사람들이 엄청 모였네? 뭐지?”

“벽에 뭔가 붙었는데?”

사공진무가 커다란 술집의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큼지막한 대자보가 붙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사공진무가 보우를 손짓으로 불렀다. 대화야 통역구슬이 있어 가능했지만 읽은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간 보우가 이내 돌아왔다.

“검술대회에 관한 공고문입니다.”

“오! 그래?”

사공진무와 보우는 재빨리 돌아와 그 같은 사실을 혁련천후에게 전했다.

“일주일 후에 왕궁의 특설연무장이라…….”

“주공! 일이 너무 쉽게 풀립니다. 하하!”

“왕궁으로 들어간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여튼 그때까지 최대한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움직이도록 하지. 그리고 넌, 성과가 있긴 한가?”

혁련천후의 물음에 진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미흡합니다만… 새로운 기술 몇 개 정도는 익혔습니다. 나중에 실전에서 보여드리지요. 꽤 쓸 만합니다. 하하!”

그는 요즘 마법과 환술을 혼합하여 새로운 공격무기를 개발 중이었다. 기초적인 마나의 배열 같은 것은 우드에게서 배웠다. 워낙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탓에 마법을 익히고 그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응용하는 속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혁련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넌 한동안 다른 사람으로 지내야겠어.”

“예엣? 그게 무슨 말씀…….”

“일이 끝나면 정상으로 돌려질 것이다.”

혁련천후가 진천에게 눈짓을 보냈다. 씩 웃은 진천이 보우의 뒷덜미 부근을 가볍게 만지자 보우의 눈빛이 흐릿하게 변했다. 정신을 제압당한 보우는 숨만 쉬는 나무토막과도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왕궁 가까운 곳에 방을 잡도록 해봐. 가급적이면 조용한 곳으로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돈이…….”

혁련천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돈이 없었다. 어둠의 숲에 갇힐 때, 소지품을 몽땅 털린 것을 깜빡한 것이다.

무심결에 보우를 쳐다보았다. 이내 쓴웃음이 맺혔다. 그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놈 털까요?”

진천이 물어온다.

“그게 좋겠군.”

사공진무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진천이 그런 사공진무에게 씩 웃어주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 * *

강도짓을 통해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린 진천은 그 돈으로 넓고 깨끗한 객실을 두 개 얻었다. 물론 돈을 강탈당한 사람에겐 자신의 환술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아마 그는 죽는 날까지 병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빼앗긴 금화보다 더욱 소중한 것을 얻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물론 당사자는 그걸 모르지만 말이다.

“그 기운들 말입니다. 정말 드래곤의 힘을 이은 자들이 맞을까요?”

“모르지.”

“솔직히 정점에 오른 마법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녔을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대마법사라는 자들만 보더라도 중원에선 절대고수로 불릴 만한 능력입니다. 그런 자들이 숭배하는 드래곤이라면 엄청날 텐데 말입니다.”

“드래곤이 실재한다면 모르겠지만 유적을 얻어 그것을 익힌 자들이라면 두려워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이 대마법사라 칭하는 자들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가 아니겠나.”

듣고만 있던 사공진무가 끼어들었다.

“솔직히 조금은 이상하기도 합니다.”

둘이 그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사공진무가 말을 이어갔다.

“그토록 강한 놈들이 왜 노골적으로 기운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말입니다. 그냥 기운을 감출 수준을 충분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긴 하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왕궁에서 제법 떨어진 산의 정상에서 확연히 느껴질 정도의 기운이었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당연히 기운을 갈무리할 수준은 넘어설 것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혁련천후가 섬광을 발했다.

“그 기운 말이야…….”

“무슨……?”

“유달리 강력했던 기운 말이다.”

“예! 놀랄 정도로 강했던 기운이 하나 있었지요. 헌데 그건 왜……?”

“혹시, 그 기운이 드래곤의 레어가 아닐까?”

순간 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다른 기운들은 그곳을 지키는 자들이고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럴듯했다.

하지만 이내 사공진무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이상합니다. 그곳을 지키는 놈들은 왜 기운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결코 만만치 않은 자들이 분명한데, 꼭 그렇게 힘을 과시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진천이 대답했다.

“혹시 모르지. 기운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다거나, 아니면 특수한 능력을 지닌 자들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그곳으로 들어가 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겠습니다.”

“7일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다른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고, 진천, 너는 아르소와 수시로 연락이 가능하게끔 해봐.”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하하! 당장 나가서 새 한 마리를 잡아오겠습니다.”

“서둘러.”

“알겠습니다.”

진천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혁련천후는 사공진무를 보며 다른 말을 했다.

“어차피 검술대회에서 왕궁으로 들어갈 사람은 둘뿐이니 진천과 내가 검술시합에 출전할 것이다. 넌, 그동안 다른 신분을 찾아서 함께 들어갈 방안을 마련해 봐.”

“그냥 몰래 들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나가서 술 좀 사와.”

“넵!”

술이라는 말에 사공진무는 번개같이 밖으로 나갔다. 혁련천후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조용한 곳을 고른다고 골랐지만 여전히 밖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제법 늦은 시각임에도 거리는 불꽃으로 휘황찬란했다.

용하게도 어디서 잡았는지 하얀 새 한 마리를 쥐고 뛰어오는 진천이 보였다. 독수리처럼 매섭게 생긴 새였다. 진천의 환술이 심어지면 훌륭한 통신수단이 될 것이다.

통신석을 구할까를 생각했었지만 그건 정해진 위치에서나 가능했다.

하지만 새는 다르다.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

커다란 술통을 통째로 들고 오는 사공진무가 보이자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젠 가족 이상의 존재로 발전한 그들이다.

그들이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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