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26화 (26/55)

제3장

검술대회에 출전하다

금화 1,000크로!

검술대회에 걸린 우승자의 상금이었다. 물론 그것보다는 왕실기사단에 든다는 것이 더욱 매력적이지만 금화 1,000크로는 대저택을 두 채나 살 수 있는 거금이었기에 검술대회의 출전자들은 나날이 홀베른의 수도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며칠 전, 모든 이들을 들뜨게 만든 일이 홀베른의 왕궁에서 벌어졌다. 우승자가 미혼자일 경우, 본인이 원한다면 공주와 혼약을 시키겠다고 왕이 직접 공표한 것이다.

홀베른 전체가 들썩거렸다.

소식은 진천과 사공진무에게도 들어갔다. 진천은 희희낙락이었고 사공진무는 검술대회에 출전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홀베른의 공주는 엄청난 미모를 지닌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까닭이다.

홀베른의 수도는 각지에서 몰려든 출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상점들은 넘쳐나는 손님들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대부분이 구경을 하기 위해 타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출전자들은 당장 내일로 다가온 대회 탓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출전자격을 얻기 위해 대회장에 마련된 지정된 장소에서 참가수속을 밟기에 여념이 없었다.

혁련천후와 진천도 그곳에 있었다. 둘은 금발에 벽안으로 변장을 하고서 순서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순서가 돌아오자 둘은 검사관 앞에 섰다.

검사관의 찢어진 눈이 둘의 전신을 훑었다.

“어디서 오셨소?”

“케이론!”

차가운 대답에 검사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혁련천후를 올려다보았다. 혁련천후는 피하지 않고 더욱 차가운 시선을 그에게 주었다. 움찔한 검사관이 다시 물었다.

“작위가 있으시오?”

“남작!”

“거, 말이 너무 짧으신 양반이군. 여기다 이름과 나이를 적고 저쪽에서 1차 시험을 치르면 되오! 통과하면 그곳에서 다음 시험을 알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냉큼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오!”

혁련천후는 검사관이 건넨 종이를 건네받고는 앞으로 나갔다. 뒤이어 진천이 검사관 앞에 섰다.

“어디서 오셨소?”

“케이론!”

검사관의 눈이 또 찢어졌다.

“작위가 있으시오?”

“없어!”

“없어? 없는데 반말이야? 이 자식이 출전하기도 전에 내손에 죽어볼래?”

검사관이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솥뚜껑만 한 주먹을 진천의 코앞에 들이밀고는 콧김을 씩씩 뿜어댔다. 진천은 장난기가 발동했지만 혁련천후는 그에게 빨리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진천은 눈에 매서운 기운을 담고 검사관을 직시했다. 움찔한 검사관은 둔한 몸뚱이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여기다 이름과 나이를 적으시오. 크흠!”

“미혼은 따로 적어야 하나?”

“거기에 기재란이 있지 않소!”

진천은 미혼란에 유달리 진하게 표시를 했다.

* * *

혁련천후와 진천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출전하는 바람에 1차적으로 걸러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문은 울타리가 처진 둥근 원형의 경기장에서 괴상망측하게 생긴 몬스터와 싸우는 것이었다. 이기면 통과, 지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겁을 먹고 포기하면 살 수는 있었다.

“저게 오크라는 거군요.”

진천이 흉측한 몰골을 한 몬스터를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일그러진 얼굴만 제외하면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견갑에 흉갑까지 두른 오크는 커다란 덩치에 베틀 엑스를 두른 청년과 싸우고 있었다.

“오크 주제에!”

퍽!

싸움은 간단하게 끝났다.

청년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오크의 가슴에 작렬하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죽어버렸다. 청년은 오크의 시신에 침을 뱉고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뒤이어 다른 출전자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새로운 오크는 경기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출전자에게 달려들었다. 이번 싸움은 꽤 치열했다. 10분 가까이 이어진 치열한 싸움에서 승자는 출전자였다.

줄지어 선 출전자들이 속속들이 경기장으로 투입되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오크들도 경기장 좌측에 마련된 입구를 통해 나왔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출전자들이 이겼다. 오크가 비록 흉맹스럽기는 하나 제대로 검술수련을 받은 검사들을 이겨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진천은 발길질 한 번에, 혁련천후는 주먹질 한 번에 오크를 기절시켰다.

수준이 떨어지는 출전자들을 솎아내려던 주최 측은 새로운 방법을 들고 나왔다. 경기장을 지켜보던 출전자들 중, 상당한 인원이 기겁을 했다.

“크어어!”

무시무시한 트롤이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혁련천후와 진천은 트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호! 저런 몬스터도 있었군요. 꽤 무식하게 생겼습니다.”

“상당수 출전자들이 스스로 물러나겠군.”

혁련천후의 말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300명에 달하던 출전자들 중, 100여 명이 출전포기를 선언하고 물러섰다. 트롤은 어지간한 기사들도 이겨내기 힘든 강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기상천외한 대회방식에 성토를 하는 자들도 생겨났으나 대부분은 흥미로운 빛으로 대회를 즐겼다.

“미친놈들! 트롤을 이기면 오우거라도 내보내겠다는 거야?”

“출전자들의 목숨 따윈 아무렇지 않다 이거지? 국왕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자식들아! 귀족작위에 왕실기사단, 그리고 공주를 아내로 맞는 것이 쉬운 줄 알았냐? 오우거가 아니라 와이번이라도 싸워야지!”

“너나 싸워라! 난 목숨이 더 소중해.”

출전자들이 저마다 제 목소리를 내며 웅성거렸다.

잠시 후, 북소리가 들리며 트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진천이 가장 먼저 경기장으로 들어설 차례였다.

“적당히 힘을 감춰.”

“하하! 알겠습니다.”

진천은 여유로운 태도로 경기장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섰다. 침을 질질 흘리며 진천을 노려보는 트롤의 눈동자는 섬뜩하게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르르르…….

트롤은 방망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맹수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다가왔다.

“넌, 운이 좋은 놈이군. 죽이지는 않고 기절만 시켜주마.”

진천은 오른 주먹을 붕붕 돌리며 트롤을 놀렸다.

크아!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엄청난 파워가 실린 몽둥이가 얼굴 지척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린 진천은 손가락으로 몽둥이를 때렸다. ‘꽝’ 하는 타격음과 함께 트롤이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지었다. 진천이 손가락으로 몽둥이를 때리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워낙 빨랐던 탓이다.

축 늘어진 트롤은 일어서지 못했다. 기절을 한 것이다. 그가 경기장을 나설 때까지도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진천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생김새만 무서운 놈입니다. 하하!”

“쓸데없는 힘자랑은 그만둬!”

혁련천후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잠시 정신을 놓았던 사람들은 다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견갑까지 두른 트롤이 튀어나왔다.

크아아!

죽은 동료의 시신을 흘끔거린 트롤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했다.

“죽이지는 않으마.”

혁련천후는 느릿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시장에서 몇 푼을 주고 산 철검이었다. 그는 가급적 다른 출전자들의 수준과 동일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괜한 관심은 번거로움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깡!

몽둥이와 검이 부딪히며 불꽃을 튕겼다. 트롤의 광포한 공격에 혁련천후는 뒤로 물러나며 수비에만 급급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트롤에게 당할 거라 생각했다.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혁련천후가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검기를 일으켜 트롤의 장기를 강타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오직 내부 장기만을 노리는 내가중수법과도 같은 묘수에 트롤은 외마디 비명을 토하고는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혁련천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일부러 그렇게 보이려는 것이다.

“오! 대단한데?”

“와아! 잘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진천은 자신도 다음엔 일부러 시간을 끌며 멋지게 눕히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하니 배정받은 숙소로 가시지요.”

“진무는 도착했겠지?”

“졸지에 시종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입이 이만큼은 나왔을 겁니다. 하하!”

사공진무는 둘의 시종이라는 신분으로 경기장으로 미리 들어와 있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각 출전자들은 시종을 동반할 수 있었다. 물론 대회가 끝나고 우승자가 결정되면 우승자의 시종 역시 황궁에 들 수 있게 된다.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그들로서는 의외로 쉽게 풀린 것이다.

둘은 경기장과는 다소 떨어진 곳에 지어진 커다란 건물로 걸었다. 몬스터들과의 대결을 통과한 사람들만이 들 수 있는 곳이었다.

“여깁니다!”

2층에서 사공진무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한눈에 보아도 시종임을 알 수 있는 복장으로 바꿔 입은 그를 보고 진천이 크게 웃었다.

“하하! 진짜 잘 어울린다! 죽이는데? 하하하!”

“시끄러워, 자식아!”

“주공! 올라가시죠. 하하하!”

배정된 방은 꽤나 넓었다.

2인이 방 하나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련천후와 진천은 같은 방을 쓸 수 있었다. 방안에 놓인 탁자 위에 술과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출출하실 것 같아 미리 준비 좀 했습니다. 식사시간은 오후 7시쯤이라고 하니 그동안 이걸로 요기하십시오.”

“수고했다. 사냥꾼은 잘 재웠겠지?”

“염려 마십시오. 돌아가는 은밀한 곳에 진법을 펼쳐 놓았으니 깨어난다고 해도 절대 도망가지 못할 겁니다.”

“대회가 끝나면 그자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하니 그전에 한 번씩 들려봐. 술은 둘이서 마셔. 난 좀 씻어야겠어.”

탁!

윗옷을 벗어버린 혁련천후는 조그맣게 마련된 욕실로 들어갔다. 중원과는 달리 흐르는 물을 끌어다 각각의 방에 연결된 배관을 통해 항상 물이 흐르게끔 만들어놓은 욕실을 보고 그는 가볍게 감탄했다.

“괜찮은 방식이군.”

여전히 놀라운 것이 많은 세상이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고는 그 안에 누웠다. 반쯤 열린 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쾌적함을 배가시켰다.

문득 아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마저 생겨났다.

‘돌아오지 못하면 내가 그곳으로 갈 수밖에…….’

그는 눈을 감고 모든 상념을 지워냈다.

* * *

아르소의 본성, 이층의 창가에 레이나 공주가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그녀는 연무장을 어슬렁거리는 마법사 요란을 유심히 살폈다.

당초, 음습한 분위기의 그가 무척 거슬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에 대한 흥미로움이 생겨났다.

‘레이놀드, 그 돼지와 함께했었다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야.’

레이놀드 백작은 모두가 아는 테세우드 공작의 충신이다.

마법자원이 넘쳐나는 그곳에서 테세우드 공작이 가장 신임하는 레이놀드 백작이 선택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필시 상위레벨의 마법사일 것이다.

그와 싸우고 헤어졌다는 것이 어쩌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끌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테세우드 공작만큼이나 레이놀드 백작을 싫어했다.

‘만약 5클래스 수준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포섭해야 해. 아바마마에게 힘이 되어줄 마법사의 수가 너무 부족해.’

그랬다.

비록 제국의 황제라도 아리우스 2세는 마법병단의 전력에 있어 테세우드 공작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스터의 수는 양측이 엇비슷한 전력이지만 테세우드 공작에겐 대마법사 쉐인이 있다. 그것만으로 전력은 테세우드 공작에게로 기울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루안이 있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연에 불과했다. 아리우스 2세의 전력으로 평가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부른 바람을 한껏 들이켠 레이나 공주는 연무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삑삑!

그녀의 거처에 놓아진 통신석이 소리를 울렸다.

“응! 어디지?”

레이나 공주는 다시 몸을 돌려 통신석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통신석에 얹자 영상이 나타났다. 영상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테세우드 공작이었다.

“안녕하셨소. 공주!”

“공작께서 어쩐 일로 통신을 다 보내시나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곳에 루안이라는 자가 있소?”

“그건 왜 물으시죠?”

영상 속의 테세우드 공작은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그가 루안을 들먹이자 내심 불안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을 테세우드 공작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던 그녀였다.

“놈이 사고를 쳤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이런 시기에 적국과 다툼을 벌이다니, 전쟁으로 확전이라도 시킬 생각이었소?”

“흥! 확전은 공작께서 바라는 것이 아니었나요? 그리고 포로로 잡힌 아군을 구한 일이 잘못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제국의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요? 게다가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 공작의 병사들임을 모르지는 않겠죠?”

레이나 공주는 음성에 힘을 실었다.

불안감이 오히려 그녀를 단호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얘들 장난인 줄 아시오? 놈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케논 산맥에 놈들의 황태자와 아이언기사단, 강습여단이 몰려들었소!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곳을 탈환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단 말이오!”

“애초에 빼앗긴 건 공작이었죠. 그걸 왜 루안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거죠? 그는 목숨을 걸고 포로로 잡힌 아군을 구출한 영웅이에요!”

“공주! 이런 다툼은 서로를 피곤하게 할 뿐이오. 루안에게 전하시오! 지금 당장 황궁으로 복귀해서 내게 오라고 말이오.”

“흥! 루안은 떠났어요. 물론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요. 아시잖아요. 그가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인 것을…….”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마치 코앞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착각에 레이나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에게 전하시오. 7일 안에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군법에 의해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말이오!”

“사형! 미쳤군요! 공작!”

“케이론의 모든 군사적인 움직임은 나의 결재 하에 가능함을 잊었소? 준 전시상태에서의 독단적인 행위는 군법에 의해 사형을 할 수도 있음은 엄연히 제국의 법령에 명시되어 있소. 누구보다 공주가 잘 아실 테니 내말 명심하기 바라오!”

팟!

통신석이 꺼졌다.

“이……!”

레이나 공주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화를 참지 못해 몸을 떨었다. 그때 다시 통신석에 불이 들어오며 테세우드 공작의 영상이 나타났다.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어서…….”

“……!”

“곧 30만 대군이 케논 산맥으로 출전할 것이오. 공주께서 그곳 주변의 모든 영주들을 소집시키고 가능한 한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주셨으면 하오.”

그 말에 레이나 공주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전쟁이라도 벌이겠단 말인가요?”

“놈들이 그곳에 점점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소. 우리도 당연히 대처해야지 않겠소? 공주의 나라이니 알아서 병력을 모으리라 믿겠소.”

통신석은 다시 꺼졌다.

레이나 공주는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30만이면 제국의 50%에 해당하는 전력이다. 그만한 전력이 케논 산맥으로 몰려온다면 그건 전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요란이 그걸 모를 리 없을 것이고, 안다면 당연히 그들도 그에 상응하는 전력을 보내올 것이 분명한 것이다.

갑자기 그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 * *

우드는 모처럼 써튼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었다.

다크 영지에 있던 써튼은 조윤과 흑야가 돌아오지 않자 자신도 이곳으로 온 것이다. 술이 적당히 취한 써튼은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완전히 주방보조로 전락하셨군요. 하하!”

“쩝! 웃지 말게. 난 무척 힘들단 말이네.”

“보기 좋은데요. 하하!”

미간을 찌푸린 우드는 술잔만 거푸 기울였다.

“게다가 백마법사로 보이는 사람이 이곳에 있어.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라니까.”

“우드 님의 내면을 뚫어보려면 어지간한 레벨로는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설마 이런 촌구석에 그 정도의 상위마법사가 있단 말입니까?”

“그게, 들어보니 제국의 백작가에서 마법사로 지냈다더군. 당연히 상위레벨이 아니겠나. 내가 흑마법사임이 드러나면 난 죽은 목숨일세.”

우드는 꽤나 침울했다. 눈을 동그랗게 했던 써튼이 그를 위로했다.

“제아무리 상위마법사라도 그분들이 계신데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마음 놓으세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전, 그분들이 더 이상 무섭지 않습니다. 이젠 하루만 안 봐도 보고 싶을 지경이니까요.”

“그건, 나도 그래. 그 성난 얼굴들이 이젠 정답게 느껴지니…….”

우드와 써튼은 담대소천 등과 제법 상당한 기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동안 꽤나 깊은 정이 든 것이다. 물론 담대소천 등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우드와 써튼의 입장에선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든든한 보호막을 두른 것과 진배없었다. 아직 세상에 소문이 돌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들이 벌였던 사건들이 알려지면 그들은 하루아침에 전 대륙에서 주목하는 유명인사가 될 것이다.

써튼이 물었다.

“마법은 좀 발전하고 있습니까?”

“조금…….”

“아니면 그분께 부탁해 보시지요.”

“그분?”

“진천 님 말입니다. 마법과는 달랐지만 엄청난 능력을 보유하고 계신다고 얼핏 들었거든요. 그분이라면 우드 님의 진전에 상당한 도움이 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눈빛을 반짝거렸던 우드가 이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나 같은 놈에게 시간을 내어주실까?”

“하하! 우드 님은 아직 그분들을 다 파악하지 못하셨군요. 비록 무섭긴 하지만 속정은 무척 따뜻한 분들이 그분들입니다. 돌아오시면 부탁해 보세요. 분명 들어주실 겁니다. 이 써튼이 장담합니다! 하하!”

“그, 그럴까?”

“하하! 이제 그만 얼굴을 펴시고 저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지요!”

둘이 술잔을 들어 허공에서 잔을 마주쳤다.

탁!

“여기서 뭐 해?”

문이 열리고 카루가가 들어섰다. 손엔 반쯤 먹은 과일을 든 카루가는 술 냄새가 진동을 하자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오래!”

“……!”

“천소 아저씨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오래!”

우당탕!

써튼과 우드는 엄청난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은 개뿔, 여전히 무섭기만 한 그들이었다.

* * *

“술 마셨냐?”

“아, 예! 아주 조금 마셨습니다.”

“조금?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그, 그게…….”

써튼은 북궁천소의 물음에 쩔쩔맸다. 우드는 뛰어오면서 마법으로 냄새를 없앴기 때문에 멀쩡했으나 써튼은 얼굴이 제법 붉어져 있었다.

“술 마시러 아르소까지 온 모양이네?”

“아닙니다!”

써튼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연소민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북궁천소를 가볍게 노려보고는 써튼과 우드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자리에 앉으려던 우드는 멈칫했다. 반대편에 요란이 앉아 있음을 뒤늦게 본 것이다. 요란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우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드는 내심 철렁했다.

‘뭐지? 저 웃음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느낌에 우드는 식은땀마저 흘렸다. 흑마법사는 백마법사의 영원한 천적이다. 눈에 띄면 무조건 죽이고 보는 것이 양측의 입장이었다.

“백마법의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군.”

요란의 중얼거림에 우드는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간신히 의자를 짚고 견뎌낸 우드는 입술까지 파리하게 떨렸다. 그 앞에 대마법사들도 어찌하지 못한 강력한 존재들이 버티고 섰건만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왕전이 우드를 보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앉으시오. 흑마법사 나리!”

요란의 말이 이어졌다.

역시 눈치 채고 있었다. 우드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감히 요란을 마주보지 못했다. 연소민이 우드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져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두려워 마세요.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계실 분이니까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예?”

우드가 연소민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요란이 손을 내밀며 웃었다.

“후후! 요란이오. 백마법사이긴 하지만 그다지 놈들을 좋아하지는 않으니 당신이나 나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오. 잘 지내봅시다.”

우드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요란의 손을 잡았다. 지켜보던 북궁천소가 히죽 웃었다.

“벌벌 떨긴… 앞으로 이 친구에게 마법을 좀 배워봐. 5클래스라니까 꽤 도움이 될 거야.”

“5, 5클래스!”

“후후! 어설픈 5클래스요. 필요한 게 있으면 성심껏 돕겠소.”

연소민의 옆에 찰싹 붙어 앉은 카루가가 요란을 보며 옹골차게 말했다.

“우드를 괴롭히면 나한테 혼날 거야?”

“하하! 알겠습니다. 왕자님!”

요란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처음 카루가가 마계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그를 공격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만큼 백마법사들에게 마계의 존재들은 천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왕전이 카루가를 보며 짓궂게 물었다.

“둘이 싸우면 네가 이기냐?”

“그럼! 지금 한번 싸워볼까?”

“아닙니다!”

요란이 손을 저으며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헤헤! 무섭지? 그러니까 우드에게 잘 해줘야 해. 알았어?”

“이를 말씀입니까? 형제처럼 지내겠습니다.”

“형제? 와! 그럼 누가 형이야?”

카루가의 뜬금없는 질문에 요란은 우드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굳어 있던 우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39살입니다.”

“40살이니 제가 형입니다.”

“헤헤! 그럼 우드가 동생이네? 참고로 난 500살이야.”

천적인 둘은 졸지에 형제가 되어버렸다.

* * *

케논 산맥의 요란 제국 주둔지는 매우 혼잡스러웠다.

특수전을 목적으로 창설된 제7강습여단의 2만 병력이 새롭게 합류한 탓이다. 그들을 이끌고 온 인물은 요란 제국의 차기 황제가 유력한 황태자 카르스였다.

마스터의 반열에 오를 만큼 강력한 검술을 지닌 카르스는 친위부대인 아이언기사단까지 모조리 이끌고 케논 산맥으로 입성했다. 기존의 사령관인 케이시 공작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지휘권을 내주어야만 했다.

비록 정적의 입장에다 황태자의 숙부인 그였지만 카르스는 엄연한 제국의 황태자, 서열상 그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마법사들은 텔레포트진을 통해 본국에서 엄청난 물자들을 수송하기 바빴다.

황태자 카르스는 높은 산에 올라 주둔지를 내려다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역시 드래곤의 성지라는 전설이 깃든 곳답게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천연광물도 수백 년을 사용하고 남을 만큼 엄청나답니다. 한마디로 금광을 잡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전하!”

아이언기사단의 단장 폭스 후작이 맞장구를 쳤다.

“저곳에 나만의 궁전을 짓습니다. 황궁보다 더욱 크고 화려한 대 건축을 시작할 것이며, 완공이 되면 그곳은 나, 카르스를 경배하는 위대한 궁전이 될 것입니다!”

“저하! 지금은 시기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승인하신 일입니다! 곧 본토에서 20만에 달하는 인부들과 기술자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단장께선 그전에 케논 산맥의 모든 몬스터들을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전하!”

카르스의 눈동자가 야망으로 번득였다.

시원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신 그는 폭스 단장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숙부께선 어쩌고 계십니까?”

“기분이 좋을 리 없지요. 지휘권 이양에다 부대감찰까지 받게 되었으니…….”

“감찰은 어쩔 수 없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상당한 마법병단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폐하께서 원하십니다. 감찰은 단장께서 직접 행해주셔야겠습니다. 물론 지휘권은 폐하의 명으로 보장해 드릴 것입니다.”

폭스 후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테세우드를 격파한 공로가 있지 않습니까? 부대감찰보다는 전하의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카르스의 시선이 폭스 후작을 향했다.

순간 폭스 후작은 흠칫했다. 그의 눈에 어린 열망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말입니다. 나와 적이 되려고 하는 사람에겐 추호도 자비를 베풀 마음이 없습니다. 그건 숙부라도 마찬가집니다. 그분은 나를 넘어 차기 황제의 위를 노리는 분입니다. 당연히 내겐 정적을 넘어 생사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폭스 후작은 입을 닫았다.

케이시 공작이 차기 황제를 노리는 것은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자신도 아이언기사단의 단장을 맡기 전에, 한때는 그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바람이 조금 거세졌다.

카르스가 걸친 망토가 심하게 펄럭였다.

“바람이 거셉니다. 그만 군영으로 내려가시지요.”

“오늘 같은 날은 술이 최고지요. 오늘은 아이언기사단과 함께 연회를 갖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둘이 몸을 돌려 밑을 향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었다. 붉은 광채가 감도는 적주를 걸친 그들은 황태자 카르스를 24시간 호위하는 아이언기사단의 단원들이었다.

주변을 섬뜩한 시선으로 돌아본 그들은 이내 소리 없이 둘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 * *

벌컥!

케이시 공작은 독한 럼주를 물처럼 마셨다.

“지휘권을 그런 애송이에게 넘기라고? 빌어먹을! 나이가 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쾅!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씩씩거렸다. 대마법사 율튼이 옆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케이시 공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정하십시오. 기회는 언제든지 또 오게 마련입니다. 자중하시고 기다리는 것이…….”

“테세우드, 놈이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성싶소? 보나마나 대군을 몰고 이곳으로 진격해 올 것이오. 보초를 서는 일반 병사도 예상하고 있는 일이 아니오? 그런데 황실에서 화초처럼 살아온 애송이가 과연 테세우드의 상대가 된다고 보시오? 어림도 없소!”

“각하……!”

“폐하의 명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겠소만, 전쟁이 터지면 1군단은 별도로 움직일 것이니 공께서도 그렇게 알고 준비하시오!”

율튼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각하! 그건 황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쩌시려고…….”

“그럼, 저 소중한 부하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내몰란 말이오? 저 애송이가 2, 30만의 대군을 통솔할 수 있다고 보시오? 지금껏 황궁에서 고작 30명에 불과한 아이언기사단과 노닥거렸던 것이 전부인 놈에게 3개 군단에 달하는 병력을 맡긴다면 저, 늑대 같은 테세우드가 좋아서 춤을 출 것이오!”

케이시 공작은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오히려 말을 꺼내니 분기는 더욱 거세졌다. 그런 케이시 공작의 속내를 이해하는 율튼은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지휘권이 카르스에게 넘어가면 자신도 그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 케이시 공작만큼이나 율튼도 카르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각하! 일단은 분을 삭이시고 기회를 기다려야 합니다. 저들은 황명을 업은 자들입니다. 자칫 정적들에게 각하를 공격할 명문을 줄 수도 있으니 제발 자중하십시오.”

“빌어먹을!”

쾅!

율튼의 말이 옳았다.

황명을 거슬린다는 인상을 심어주면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정적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 뻔했다. 케이시 공작은 자신의 형이자 황제를 떠올렸다.

‘두고 봅시다! 누가 이기는지…….’

뿌드득!

그때였다.

“각하! 긴급전령입니다!”

“무슨 일이냐?”

“케이론이 대군을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곳곳에서 날아들고 있습니다.”

케이시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율튼이 재빨리 통신석을 켰다. 통신석 안의 인물이 부동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잡혔다.

케이시 공작이 물었다.

“누군가?”

“울프여단의 맥나마나 백작입니다! 각하!”

“보고하라!”

다소 짜증이 섞인 케이시 공작의 명령에 맥나마나 백작은 지체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케논 산맥과의 접점지역으로 적의 3개 군단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적의 사령관은 테세우드 공작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모조리 한곳으로 몰려온단 말이냐?”

“1개 군단은 카티르 평원과 인접한 곳으로 방향을 틀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곳은 적의 보급부대가 상주하고 있는 곳으로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각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케이시 공작이 짜증스럽게 말을 뱉으려는 순간, 율튼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케이시 공작을 바라본 율튼은 맥나마나 백작에게 자신이 대신 말했다.

“오늘부터 카르스 전하께서 지휘권을 인수하셨네. 부대의 모든 채널을 그곳으로 돌리고 보고나 명령 또한 그분께서 관할하실 것이네.”

팍!

율튼은 일부러 통신석을 꺼버렸다.

그는 부관들을 모두 물러가게 만든 다음 여전히 구겨진 얼굴의 케이시 공작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각하! 차라리 이번 기회에 황태자의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대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이번 일은 상당히 벅찬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의 부족함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오히려 정국은 각하께 유리하게 돌아갑니다.”

케이시 공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겠소. 그동안 공께서 1군단을 맡아주시오.”

“폐하와 독대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아니오! 다른 볼일이 좀 생겼소. 카르스에겐 공이 대신 좀 전해주시오.”

“각하! 자중하셔야 합니다.”

율튼은 케이시 공작이 행여나 황궁에서 소란을 부릴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케이시 공작은 그런 율튼의 속내를 짐작한 듯, 가볍게 웃어주었다.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 놓으시오.”

* * *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평원이 며칠 사이에 군막들로 가득 채워졌다.

케이론 제국과 요란 제국의 접점지역인 그곳은 언제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기도 했다.

평원 뒤쪽엔 케이론의 군사도시이자 보급부대가 상주하는 몰리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평원까지 이어지는 길목에서 도로건설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하급병사들과 임금을 받고 동원된 평민들 수천 명이 땀을 흘리며 자재를 나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두두두두…….

아직 제대로 닦아지지 않은 도로 위를 빠르게 질주하는 마차가 있었다. 다져지지 않았던 탓에 바퀴자국이 굵게 파여 버리자 인부들은 저마다 욕설을 퍼부었다.

“저런, 젠장맞을!”

“빌어먹을! 옆길로 달리면 될 것을! 하여튼 귀족들은 머리가 비었어!”

마차는 욕설을 뒤로하고 먼지를 일으키며 카티르 평원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져갔다. 평민들과 어우러져 욕설을 퍼붓던 하급병사들은 마차의 깃발을 보고는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저, 저건 테세우드 공작 각하의 마차잖아?”

“맞다! 제국에서 저 깃발을 달 수 있는 분은 그분뿐이지.”

“빌어먹을! 텔레포트진으로 오면 될 것을 괜히 마차를 타고 와서 일을 두 배로 만들었잖아!”

“야! 인마! 입조심해. 그러다 감독관이 들으면 넌 그냥 이거야! 자식아!”

동료 하나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나무랐다. 주변을 둘러본 병사는 다시 투덜거렸다.

“놈들이 신경이나 쓰냐? 아침부터 처먹고 놀기 바쁘구먼.”

“어허! 이놈이 입에다 가시를 박았나.”

“어차피 전쟁이 벌어지면 네놈들이나 나나, 최전선에서 몸으로 때우다가 죽겠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 같지 않겠냐? 그러니 할 말이라도 하고 죽어야겠다. 이놈들아!”

“그건 그래! 젠장! 죽어서 환생하면 제발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병사들은 그늘 밑에서 껄껄거리며 노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평민들은 그런 병사들이 측은했는지 물과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급병사들과 평민들이 땀을 흘리며 도로확장에 여념이 없는 한편, 케논 산맥의 정상에서는 요란 제국의 아이언기사단이 몬스터 토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틀 전에 오우거와 와이번의 서식지라고 알려진 옹고르 분화구로 들어선 그들은 케이론의 군사적인 움직임으로 비상이 걸린 본진과는 다르게 한껏 주변 풍경을 즐겨가며 오우거와 와이번을 찾아 움직였다.

이미 오크와 고블린 같은 하급 몬스터들은 수천 마리가 그들의 손에 죽었다. 황태자를 호위할 최소한의 기사들만을 남겨두고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온 아이언기사단의 무력은 실로 막강했다.

1,000마리가 넘어가는 오크 떼의 기습에도 그들은 단 하나의 사상자 없이 물리쳤다. 다른 지역의 오크와는 달리 케논 산맥의 오크들은 근골부터가 튼튼하고 덩치 또한 상당히 컸지만 오러로 무장한 기사들을 당해내지는 못한 것이다.

“하하! 이거 너무 싱겁잖아. 얼른 오우거라도 나타나야 싸울 맛이 날 텐데 말이야.”

단장을 대신하여 기사단을 이끌고 온 크루즈 백작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기사들은 저마다 크게 웃으며 호응했다.

“부단장님! 오우거를 잡으면 포상휴가라도 주십니까?”

“당연하다! 가장 많이 잡는 조는 단장께 상신하여 5일의 포상휴가를 내리겠다. 그러니 눈에 불을 켜고 잡아보아라! 하하하!”

“하하! 우리 5조가 포상휴가를 갈 것이니 너희들은 꿈도 꾸지 마라!”

“웃기는 소리! 포상휴가는 우리 4조의 것이다!”

지상최강의 몬스터라는 오우거를 그들은 하찮은 고블린 정도로 여겼다. 힘에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5인 1조로 모두 5개조로 나눈 그들은 사방으로 산개하며 분화구에 조성된 울창한 수림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간혹 운 없이 걸려든 고블린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들이 분화구의 가운데쯤에 들어섰을 때였다.

콰르릉!

갑자기 하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장! 비가 오려나 봅니다.”

4조에 속한 기사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짧은 시간에 하늘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장, 멜빈 자작이 소리쳤다.

“비를 피할만한 곳을 찾아보자! 몬스터들은 비를 싫어하니 비가 그칠 때까지 우리도 쉰다!”

다섯은 주변을 살피며 동굴 같은 것을 찾았다.

하지만 넓은 분지에 조성된 숲에서 동굴을 찾기란 어려웠다.

“저쪽에 큰 나무가 있습니다. 저 정도면 충분히 비를 피할 수 있겠습니다! 조장!”

“모두 저쪽으로 이동한다!”

기사들은 빠르게 전방에 우뚝 솟아 있는 거목으로 이동했다. 얼마나 거대했던지 수십 명은 피하고도 남을 거대한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변덕스러운 곳이군. 갑작스러운 폭우라니…….”

빗줄기는 상당히 거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멜빈 자작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기사들에게 건넸다.

“한 모금씩 마셔!”

술이었다.

기사들은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마시고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쏴아아…….

“이거 상당히 오랜 시간 퍼붓겠는걸?”

“이곳은 지대가 낮은 곳이라 이 정도로 더 쏟아지면 물에 잠길 위험성이 높습니다.”

“하하! 설마 그 정도가 될 때까지 쏟아질까? 걱정 말고 피곤한 사람은 잠깐 눈이라도 붙여라! 비가 그치면 엄청 뛰어다녀야 할 테니까.”

멜빈 자작의 그 같은 말에 기사들은 거목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멜빈 자작도 이내 등을 기대로 낮잠을 청했다.

꽈르릉…….

쏴아아…….

쫘자자자작…….

천둥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요란스러워 눈을 감았던 기사들은 다시 눈을 떴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지막이 소리쳤다.

“누가 다가옵니다!”

“다른 조의 기사겠지.”

멜빈 자작이 눈을 뜨고 기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폭우 속에서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희미한 실루엣이 비쳤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서 실루엣의 정체를 확인했다.

“오우거다!”

“오호! 빗속에 돌아다니는 오거라니, 이거 횡재했군요.”

기사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당연히 그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어야 할, 멜빈 자작이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기사 하나가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조장! 왜 그러십니까? 잡아야지요.”

멜빈 자작은 대답이 없었다. 얼굴을 내밀어 그의 표정을 살핀 기사가 흠칫하며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멜빈 자작의 떨리는 목소리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무리생활을 하지 않는 오우거가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조, 조장! 20마리가 넘어 보입니다!”

그랬다.

다가오는 실루엣은 오우거였다. 놀라운 것은 그 수가 20마리가 넘는다는 것에 있었다. 오우거는 집단생활을 하지 않는다. 한 마리가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몬스터의 제왕으로 군림한다. 먹이사슬의 균형을 위해 신이 그렇게 창조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4조를 향해 다가오는 오우거는 확실히 20마리가 넘었다. 수가 그 정도면 얘기는 달라진다. 싸우면 무조건 기사들이 필패다. 마스터도 오우거 2마리 이상은 상대하지 못한다. 인간의 영력을 넘어선 초인들이라면 물론 가능하겠지만 이곳에 그러한 강자는 없었다.

“다른 조들과 합류한다! 뛰어!”

5명의 기사들은 빠르게 동쪽방향으로 뛰었다. 동시에 괴성과 함께 오우거들이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크아아!”

쿵! 쿵! 쿵!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는 기사들에게서 조금 전까지의 자신감을 깨끗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은 오우거의 거친 손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자신들의 육신들에 대한 공포뿐이었다.

“젠장! 너무 빠르다!”

추격해 오는 오우거들은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그들이 지금껏 봐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제야 멜빈 자작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조, 조장! 앞쪽에도 오우거들입니다!”

“으아! 빌어먹을! 더 많아!”

멜빈 자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상당한 수의 오우거들이 앞쪽을 차단하고 있었다. 모두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크아!

다른 오우거들과는 달리 온통 검정색 털로 둘러싸인 거대한 오우거가 가슴을 치며 괴성을 질러댔다. 우두머리였을까? 다른 오우거들이 두려운 빛을 보이면서 슬금슬금 뒤쪽으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르르…….

새빨간 광기를 번득이는 블랙 오우거는 기사들을 노려보며 서서히 다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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