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몬스터의 준동
2조장 토린 자작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다, 다 죽었어…….”
처참하게 찢겨죽은 동료들의 육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죽어버린 동료들의 육신은 전신이 시뻘건 가죽으로 둘러싸인 고블린들에 의해 산산이 찢겨지고 있었다.
카악!
크아아!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덩치를 지닌 블랙 오우거가 괴성을 질러댔다. 마치 승리에 대한 기쁨의 표출로 보였다.
“오우거가, 블랙 오우거가 이곳에 있었다니…….”
토린 자작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전설에나 나오던 블랙 오우거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최초, 오우거의 기습은 다섯이 힘을 합쳐 막아냈었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블랙 오우거에 의해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음을 당했다.
오직 그 한 마리에 의해서 말이다.
오러를 품은 검도 통하지 않았다. 세상에 못 벨 것이 없다는 오러도 블랙 오우거의 가죽에 가벼운 자상을 입히는 것에 그쳤다. 반면에 최고 레벨의 방어막을 두른 신형갑주는 블랙 오우거의 손짓에 종이처럼 찢겨나갔다.
크르르…….
괴성을 지르던 블랙 오우거의 섬뜩한 눈동자가 토린 자작에게 고정되었다. 토린 자작은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베린스 공작의 보고엔 이곳에 블랙 오우거가 있다는 소린 없었어!”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쿵! 쿵!
블랙 오우거가 그를 향해 걸음을 놓았다.
거대한 육신이 대지를 밟자 폭우 속에서도 지축이 흔들리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토린 자작은 신께 살려 줄 것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게 빗줄기만을 쏟아냈다.
쏴아아…….
* * *
와아…….
군웅들이 쏟아낸 함성이 경기장을 흔들었다. 1차 관문을 통과한 참가자들은 무작위 추첨으로 지명된 상대와 승리를 향한 치열한 시합을 치르고 있었다.
한쪽이 스스로 패배를 선언하면 그것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녹다운 방식이었다. 패배를 선언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죽어도 문제되지 않았다. 다만 패배를 인정한 상대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 어느 제국의 검술대회보다 잔인한 방식이었지만 참가자들과 군웅들은 그것에 이견을 달지는 않았다. 승자에게 돌아가는 포상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혁련천후와 진천, 사공진무는 출전자 대기석에서 경기장을 응시했다. 2차 관문에 들어선 참가자는 모두 40명,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하루에 2경기를 치르면 최종 10강에 들 수 있었다.
이미 20강에 든 출전자들도 생겨났다. 아침부터 전개된 대회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이 되자 18명의 승자가 결정되고 나머지 2명만을 가리는 시합만이 남았다.
진천이 먼저 출전했다.
“너무 쉽게 끝내지 말고 조금 끌어.”
“옙!”
진천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곳곳에서 야유가 터졌다. 어제 벌어진 오우거와의 시합을 기억한 사람들은 그가 반칙을 저질렀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반칙? 이 자식들이……!”
진천은 인상을 구기며 군웅들을 노려봤다. 더욱 큰 야유가 돌아오자 입맛을 다시고는 상대를 쳐다봤다. 조잡해 보이는 흉갑을 두른 상대는 섬뜩한 소드 브레이크를 들고는 혀로 검신을 핥았다.
진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맛있냐?”
“이곳에 네놈의 피를 묻혀 핥아주지.”
“어이구! 사양한다. 인간아!”
진천은 짐짓 무섭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도발했다. 심판관이 시합 개시를 알리기가 무섭게 상대가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이곳 수준이 낮은 것 같습니다. 공주의 신랑감을 뽑는데 고작 저 정도라니 말입니다.”
사공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은 모른다. 우리처럼 일부러 실력을 감추고 있는 자들도 있겠지.”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주공의 눈을 속일 만한 자들이 과연 있을까, 의문입니다.”
“……!”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혁련천후의 눈을 속이고 기운을 감출 정도의 고수라면 적어도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에 필적할 만한 강자라야 가능하다. 그 정도의 강자들은 스스로 기운을 드러내기 전에는 혁련천후라도 눈치 채기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 진천의 주먹이 상대의 턱에 작렬했다. 검을 뽑지도 않고서 상대를 눕히자 야유는 환호로 바뀌었다. 손을 터는 시늉을 하며 진천이 올라왔다.
“하하!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 주공만 남으셨네요. 내려가시지요.”
혁련천후가 일어섰다.
무기상에서 몇 냥을 주고 산 싸구려 철검을 허리에 두른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삼류처럼 보였다.
“와아!”
그가 나서자 군웅들이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어제 있었던 트롤과의 결투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를 바라보는 상대 출전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고작 트롤 따위에게 고전하더군. 그 실력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까? 난 말이야. 두 방에 트롤을 잠재웠거든, 너처럼 질질 헤매지 않고 말이야.”
혁련천후는 무시하고 심판관을 쳐다봤다. 빨리 시작하란 뜻이었다. 심판관이 지체 없이 대결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조금은 시간을 끌어주려고 했는데, 그 입 때문에 그냥 끝내주지.”
혁련천후는 똑바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검을 뽑지도 않았다.
“건방진 놈! 눕게 만들어주마!”
상대는 검을 뽑아 들며 혁련천후를 향해 겨누었다.
멋들어진 문양이 새겨진 검이 태양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세가 대단하자 상대는 움찔하는 기색을 보인다.
“누워라!”
검이 허공을 횡으로 가르며 날아들었다.
혁련천후는 걸어가는 그대로 날아드는 검으로 손을 뻗었다. 보기엔 스스로 팔을 내미는 형국이었다. 군웅들이 탄성이 크게 울렸다.
깡!
막강한 힘을 담고 날아오던 검이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동시에 검을 부러뜨린 손가락이 상대방의 명치에 작렬했다.
“끄억!”
혁련천후는 괴상한 신음과 함께 그 자리에 꼬꾸라지는 상대를 오연하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트롤보다 못한 놈이었군.”
어이없는 결과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던 경기장에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체술의 달인이 나타났다!”
“저 두 사람은 검을 뽑지도 않고 상대를 이겼어! 대단한데!”
“우승 후보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탄을 쏟아내며 웅성거렸다. 심판관이 오전 대회를 종료하는 신호를 보냈다. 승자들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고 패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후 대결까지 2시간이 남은 관계로 셋은 식사를 할 요량으로 출전자들을 위해 마련된 식당으로 걸음을 놓았다.
‘뭐지?’
혁련천후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에 진천과 사공진무도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패자들과 출전자들이 한데 섞여 각자의 목적지로 이동하는 것 외에는 특이한 건 없었다. 그러나 혁력천후는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봤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그랬다.
오감을 자극하는 묘한 기운이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러나 특별한 인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사공진무와 진천도 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는 눈매를 가늘게 하고서 주변을 살폈다.
역시 특별한 건 없었다.
“가지.”
혁련천후는 다시 걸음을 놓았다.
진천과 사공진무는 주변을 다시 쓸어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 놀라운데? 나를 느꼈단 말이야? 이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간이네?”
은발에 유달리 큰 눈동자를 지닌 인물은 20강에 든 출전자였다.
그는 식당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훗! 어쩌면 나와 대결할 수도 있겠네. 재밌겠어. 훗훗!”
여인을 연상시키는 화사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의 치렁치렁한 은발이 유달리 태양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흠! 맛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좀 먹어야겠지?”
그도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점점 바뀌기 시작한 기운은 식당에 다가가서는 그저 평범한 검사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가 섰던 곳에 또 다른 자들이 나타났다. 역시 20강에 든 출전자들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흑발에 적안을 지니고 있었다.
식당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는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저런 기운을 지닌 자가 있을 수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대종사께 보고를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은 아니다! 비슷한 무공을 익힌 자들일 수도 있으니 내가 말하기 전에는 보고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때, 다른 인물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전주님! 모두 모였습니다!”
“알았다!”
전주라 불린 자는 잠시 식당을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다른 자들 역시 주변을 살피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종사나 전주라는 호칭은 중원에서나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지칭했다.
그렇다면…….
* * *
은발청년은 식당으로 들어서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식당의 좌측, 모퉁이를 돌아가는 일단의 무리들을 보며 그는 묘한 눈빛을 발했다. 그는 그들이 사라져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끝까지 쳐다봤다.
“뭐지? 저 사람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네? 친군가?”
자신을 자극했던 혁련천후와 그들의 분위기가 흡사했다.
“둘은 꽤나 강해 보였어. 왜 저런 강자들이 이 세상에 자꾸만 나타나는 걸까?”
혁련천후 때문에 케논 산맥에서 이곳까지 그를 쫓아왔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뒤를 쫓고 있음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이는 자들이 더 있었다. 느껴지는 힘도 누가 더 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했다.
“흐음! 나 아리엘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짜증이 나려고 하네.”
푸념을 늘어놓은 은발청년, 아리엘은 뒤를 흘긋 돌아보고는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웅성웅성!
식당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출전자들에다 대회를 주관하는 기사들이 한데 어우러지자 그 수가 백이 넘어갔다. 은발청년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혁련천후와 일행을 발견하고는 일부러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물론 완벽하게 기운을 감춘 상태로 말이다.
음식은 투박한 스테이크와 감자를 삶아 다진 이름 모를 요리였다. 그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진행요원들이 음식과 음료수를 탁자에 올려놓고 사라졌다.
“뭐야?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주는 거야? 맛도 없고 싱싱하지도 않고, 쩝! 최악이군.”
가볍게 미간을 찌푸린 아리엘은 이내 음식을 입안에 꾸역꾸역 넣고 씹었다. 예상대로 최악의 맛이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씹어 삼킨 아리엘은 다시 혁련천후를 흘긋 쳐다봤다.
마침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눈을 찡긋거려 준 아리엘은 음료수를 마시며 컵을 통해 다시 그를 살폈다.
그는 이미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훗! 변신을 풀면 어떤 얼굴일까? 저 사람, 지금 두 번에 걸쳐 가짜를 걸치고 있어.’
놀랍게도 아리엘은 혁련천후가 두 번의 변신을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내공으로 근육을 움직여 변장했음에도 그것을 알아본다면 상당한 경지라고 봐야 했다.
“윽!”
우걱우걱 음식을 씹던 아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돌!”
손톱만 한 돌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잔뜩 인상을 쓴 아리엘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나르기에 여념이 없는 진행요원들을 불렀다.
“이봐! 음식에서 돌이 나왔잖아!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가져다 준 거야?”
그가 큰소리로 따지자 진행요원들이 기겁을 하고는 뛰어왔다.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아리엘을 쳐다봤다.
“돌이잖아! 돌! 돌!”
“금방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소리는 좀…….”
“이에 금이 갔으면 당신들이 물어 줄 거야?”
난데없는 소란에 아리엘을 응시하던 진천이 눈매를 가늘게 했다.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주공.”
“다 먹고 가야지.”
“돌 나왔다는데요?”
사공진무가 자신의 음식을 포크로 일일이 뒤져보며 중얼거렸다. 진천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사공진무를 노려보고는 일어섰다.
“음료수가 맛있네요. 더 가져오겠습니다.”
“난, 파란색으로!”
“난, 빨강색!”
진천은 아리엘의 소란으로 대부분의 운영요원들이 그곳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는 직접 음료수를 가지러 입구에 마련된 음료수 거치대로 걸어갔다.
그가 음료수 거치대 앞에 섰을 때, 문이 열리며 다섯이 들어섰다. 문과 가까운 곳에 거치대가 있었기에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던 진천은 무심결에 그들을 쳐다봤다.
그중 하나와 진천의 시선이 부딪혔다.
‘응……!’
상대가 시선을 돌렸으나 진천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볍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진한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순간적이었지만 틀림없는 마기였다! 어떻게 이곳에 마기가 있을 수 있지?’
마계의 마기가 아니다.
중원의 마도고수들과 비슷한 기운이었다. 진천은 혁련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느끼지 못하신 건가?’
혁련천후는 새롭게 들어선 인물들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느꼈다면 당연히 그들을 주시했을 테지만 워낙 순간적으로 발산되었었기에 느끼지 못한 것이다. 진천은 다시 그들을 응시하고는 음료수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진천의 굳은 얼굴을 본 혁련천후와 사공진무는 의아한 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표정이 왜 그래?”
사공진무가 물었다. 진천은 곁눈으로 조금 전, 그 인물들을 가리키며 전음을 사용했다.
[이상한 놈들이 있습니다. 신교의 고수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놈들입니다.]
[……!]
혁련천후는 진천이 응시한 인물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런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다시 진천을 돌아봤다.
[잘못 본 것은 아니냐?]
[아닙니다! 순간적이었지만 틀림없는 마도고수들의 기운과 같았습니다!]
[인마! 네가 잘못 보았겠지. 신교의 고수들이 이곳엘 어떻게 올 수 있단 말이야?]
사공진무가 끼어들었다.
[대회에 출전한 놈들입니다. 놈들과 대결을 할 수 있도록 제가 조정해 보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진천은 사공진무에게 눈을 부라리고는 밥이나 먹으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진천은 다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음을 느낀 진천이 물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습니까?]
[아니다. 식사나 하지.]
진천과 사공진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혁련천후에게서 받았다. 그러나 둘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 게 있다면 당연히 자신들에게 말해 줄 거란 생각에서였다.
* * *
오후 시합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진천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다녀오겠다면 나간 진천을 기다리며 둘은 다른 출전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진천을 거슬렸던 인물들은 가장 끝자리에 함께 모여 있었다.
그들을 유심히 살피던 사공진무가 심드렁한 투로 중얼거렸다.
“별다른 느낌이 없는데요? 아무래도 진천이 잘못 본 모양입니다.”
“……!”
“설마 금역 말고도 이 세상으로 오는 문이 존재할 리 있겠습니까?”
“모르지.”
“설마 가능하다고 여기십니까?”
“우리가 왔다면 다른 사람들도 올 수 있겠지. 세상은 넓고 우리가 모르는 신묘한 것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법이다. 전대의 실종된 사람들이 조금은 거슬려.”
“……!”
혁련천후는 금역의 비사를 떠올렸다.
그 옛날, 자신의 세가를 배신하고 떠났던 자들의 흔적이 이곳으로 통하는 혈지에서 끝났다고 전해졌었다. 그들이라고 이곳으로 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껏 생각조차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진천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그것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렸다.
그때, 진천이 돌아왔다.
“어떻게 되었냐?”
“하하! 자식아! 내가 누구냐? 고금최강의 환술사가 아니냐? 주공! 놈들과 맞붙게끔 조정했습니다.”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중원에서 사용하던 무공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단순한 초식만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뿌우웅!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주변이 소란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확신하는 출전자에게 돈을 걸었고 두 번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인 출전자들에겐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다. 홀베른의 왕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3번만 이기면 되었다.
늦은 번호인 혁련천후와 진천이 느긋한 표정으로 출전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 카티르 평원에 군영을 차린 케이론 제국의 대병력은 난데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 *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테세우드 공작은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현장에 망연자실, 고개를 저었다. 냉혈한인 그가 죽은 수하들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500필이 넘어가는 전마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와이번들이 떼로 몰려와서 그만…….”
레이놀드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죽은 전마들과 기사들이 그의 소속부대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곳곳에 치솟고 있는 불길은 기사들이 달려들어 진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에 분기가 떠오른다.
“와이번은 오우거처럼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다. 떼로 몰려왔다면 이건 분명 요란의 와이번기사단의 짓이다! 괘씸한!”
“각하! 라이더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놈들이라면 라이더들이 있어야지 않습니까?”
“뭣이? 라이더들이 보이지 않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분명 와이번들만 떼로 몰려왔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야생 와이번이 떼로 몰려다닌다니…….”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먼 곳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오우거다!”
“오우거가 떼로 몰려온다! 오크도 있어!”
테세우드 공작과 레이놀드 백작의 고개가 급히 그곳으로 돌아갔다. 평원의 끝이자 산맥이 시작되는 초입에 주둔했던 부대 쪽이었다.
“각하! 엄청난 숫잡니다!”
레이놀드 백작이 손으로 산의 능선을 가리켰다. 테세우드 공작도 이미 그곳을 보고 있었다. 엄청난 수의 오크들이 산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능선 전체가 움직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감히! 몬스터 따위가!”
테세우드 공작의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당장 저것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쓸어버리고 주변 지역을 모조리 초토화시켜서 아예, 몬스터의 씨를 말려버려라!”
“알겠습니다!”
레이놀드 백작이 자신의 말에 몸을 싣고는 빠르게 오크부대가 출몰한 지역으로 달려갔다. 뒤를 이어 마법병단과 기사들이 레이놀드 백작의 뒤를 쫓았다.
테세우드 공작의 뒤에 대마법사 쉐인이 나타났다. 자신의 막사에서 뭔가에 골몰했던 그는 밖에서 소란이 일자 나온 것이다.
오크부대를 발견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몬스터들이 날뛰다니 묘한 일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와이번에 오우거라…….”
테세우드 공작이 쉐인을 돌아봤다.
“뭔가 짐작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의아할 뿐입니다.”
둘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 *
요란 제국의 황태자 카르스는 처참하게 짓이겨진 기사들의 주검을 내려다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 앞에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오우거의 짓이란 말이지…….”
분을 이기지 못해 뱉어내는 말이 가늘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놈들이 갑작스럽게 떼로 몰려드는 바람에…….”
“오우거…….”
“전하! 고정하십시오!”
폭스 단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르스를 위로했다. 카르스가 크루즈 백작을 쳐다봤다. 섬뜩한 기운이 광포하게 몰아치는 그의 눈동자에 크루즈 백작은 내심 두려움이 덜컥 들었다. 카르스는 좋을 땐 한없이 좋지만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스타일이다.
“죽어라!”
“저, 전하!”
폭스 후작이 놀란 얼굴로 카르스를 쳐다봤다.
크루즈 백작은 제국이 알아주는 인재다. 결코 이런 일로 죽여선 안 되는 인물이다. 크루즈 백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카르스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스르릉…….
크루즈 백작은 자신의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폭스 후작이 그의 팔을 잡으며 카르스에게 소리쳤다.
“전하! 기회를 주십시오! 크루즈는 제국이 인정하는 인재입니다. 이렇게 죽이신다면 적국에게 이로움을 줄 뿐입니다!”
“지금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크루즈!”
“……!”
“네게 기회를 주겠다. 기사들과 마법병단을 이끌고 다시 케논 산맥으로 올라가라! 가서, 그곳의 몬스터들을 씨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리고 오란 말이다! 오우거는 가죽을 벗겨 내게 가져오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귀를 잘라 내게 가져오라! 알겠느냐!”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크루즈 백작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안도의 숨을 내쉰 폭스 후작은 짐짓 엄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 또 실수하면 내가 스스로 너를 벨 것이다! 알겠느냐?”
“반드시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해보이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크루즈 백작이 나가자 폭스 후작은 다시 한 번 카르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카르스는 여전히 차가운 눈동자로 푹신한 털이 덮인 의자에 앉았다.
“블랙 오우거가 나타나다니…….”
“놀랍습니다! 전설 속에 드래곤의 가디언으로 알려진 그들이 현존했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설마, 드래곤이 레어를 깨고 세상에 나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폭스 후작의 말에도 카르스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뭔가 다른 말을 하려던 폭스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카르스의 표정이 너무나도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스는 두 손을 깍지를 하고 생각에 잠겼다.
폭스 후작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거처를 나가야만 했다. 생각에 잠겼을 때, 방해받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카르스였다. 그저 이럴 땐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최고임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그였다.
밖으로 나온 폭스 후작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대마법사 율튼을 발견하고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제국의 신하였지만 서로가 모시는 주인이 다르니 둘의 사이도 꽤나 껄끄러웠다.
율튼이 다소 흥분한 어조로 폭스 후작에게 물었다.
“갑작스럽게 마법병단을 케논 산맥으로 출전시키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오?”
“전하의 명이시오!”
“몬스터 따위를 잡는데 마법병단을 출전시킨단 말이오?”
율튼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폭스 후작도 짜증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몬스터 따위라니? 전하께서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신 것들은 블랙 오우거란 말이오! 블랙 오우거에 따위라는 말을 붙이다니, 그럼 죽은 대 수하들이 그런 따위에게 당한 하찮은 아이들이란 말이오?”
“이보시오! 후작! 지금 내말이 그게 아니잖소!”
둘의 격앙된 목소리는 카르스에게까지 들렸다. 카르스가 군막을 젖히고 나왔다. 율튼은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율튼 공!”
“전하! 몬스터 토벌을 목적으로 한 마법병단의 출전소식을 들었습니다.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명을 거두라?”
“케이론이 카티르 평원에 대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마법병단을 빼는 것은 극히 위험합니다. 재고해 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율튼의 어조는 단호했다.
카르스의 눈가에 차가움이 번득였다. 그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율튼 공! 놈들이 설사 공격을 가해온다고 하여도 이곳까지 오려면 최소 3일이 소요되오. 3일이면 마법병단이 케논 산맥으로 출전한다고 해도 돌아올 시간은 충분하지 않겠소? 그러니 서둘러 크루즈와 함께 몬스터 토벌에 힘을 쏟으시오!”
“전하!”
“율튼 공! 난, 한번 내린 명령을 거두어 본 적이 없소.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러니 더 이상 내 앞에서 다른 말은 하지 말았으면 하오. 더 이상의 발언은 명령불복종으로 간주하겠소. 아시겠소?”
율튼은 얼굴을 바르르 떨며 입을 열지 못했다.
카르스는 차가운 웃음을 머금고 몸을 돌렸다. 조금을 걸어간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숙부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소. 지휘권자인 내게 보고조차 없이 말이오. 전하시오. 돌아오면 군법으로 처리하겠다고…….”
그 말을 끝으로 카르스는 군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폭스 후작도 율튼을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노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율튼의 수염이 심하게 떨렸다.
“감히! 대마법사인 나를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현기로 가득한 율튼의 눈동자에 순간 섬뜩한 기운이 번득였다가 사라졌다. 결코 초월자의 영역에 든 대마법사가 보여선 안 될 기운이었다.
“켈베로스의 망령에 물든 악마의 종자들이 감히!”
율튼은 분노했다.
그의 분노는 변수였다. 장차 그것이 요란 제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몰랐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 * *
“으합!”
깡!
아리엘의 힘찬 손짓이 상대방의 검을 튕겨내며 육신마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이어진 주먹공격이 상대의 명치에 작렬하며 승부는 아리엘의 승리로 끝났다.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아리엘은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였다. 아리엘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혁력천후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진천과 사공진무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눈을 부라리자 아리엘은 크게 웃었다.
10강전을 거쳐 4명이 결정되었다. 이제 남은 자리는 하나, 혁련천후와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이며 올라온 붉은 눈동자를 지닌 출전자와의 대결만이 남아 있었다.
혁련천후는 느린 걸음으로 경기장으로 나섰다.
“우! 우!”
“이번에도 압승을 거둬라!”
“하하! 보나마나 승부는 결정되었다!”
“빨간 눈동자! ‘무조건 네가 이긴다.’에 돈을 걸었다! 보내버려!”
관중들은 그보다 상대방에게 압도적인 환호를 보냈다.
매번 아슬아슬하게 접전을 벌여온 혁련천후보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온 상대방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혁련천후를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대부분이 그에게 돈을 건 사람들이다.
그가 이기면 엄청난 배당의 몫이 떨어진다. 배당은 거의 20배에 달할 정도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혁련천후가 패배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혁력천후는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노려보는 상대방을 담담한 빛으로 마주보았다. 그러나 표정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매우 날카롭게 돌아갔다.
‘싸우면서 놈의 힘을 끌어낸다!’
의문의 힘이 진정 중원의 신교교수들이 가진 마기와 같은 것인지, 그것을 알아내야 했다. 식당으로 들어서기 전, 자신을 자극했던 기운은 아니었다.
진천이 그들을 의심했다. 진천의 오감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그가 의문을 품었다면 결코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다.
“우와와!”
심판관이 대결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자 환호성은 극에 달했다.
혁련천후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공격을 해오기를 기다리며 양팔을 늘어뜨린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의외군.’
상대도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는 초전에 압살을 하는 방식으로 대결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후후! 설마 감추어진 힘을 깨달을 정도의 고수는 아니겠지?’
혁련천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갈 때, 상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바닥을 미끄러지듯 다가온 상대는 단순한 찌르기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힘은 놀라울 정도로 막강했다.
혁련천후는 몸을 슬쩍 비틀며 검의 옆면을 손으로 후려쳤다. ‘깡’ 하는 쇳소리가 울리며 방향을 잃은 검이 옆으로 튕겨나갔다. 상대가 반탄력을 이용해 횡으로 검을 그어오자 혁련천후는 내심 감탄했다.
‘좋은 수법!’
깡!
이번에도 손과 검이 부딪혔다. 붙었던 둘의 육신이 떨어지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켜보던 관중들의 환호성은 더욱 열렬하게 뜨거워졌다. 맨손으로 검을 후려친 혁련천후의 신기에 관중들만이 아니라 이미 관문을 통과한 출전자들마저도 놀란 빛을 보였다. 아리엘의 눈동자에도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훗! 역시 마음에 드는 자야. 그런데, 저놈은 왠지 거슬려. 인간이 저런 마기를 품을 수 있다니, 분명 마계의 마기는 아니야. 그렇다면 다른 세상에서 온 놈인가?’
아리엘은 혁련천후와 싸우는 상대를 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아리엘이 눈빛을 반짝일 때, 붉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상대가 입을 열었다.
“후후! 언제까지 건방을 떨지 두고 보지.”
그는 혁련천후의 허리에 걸린 검을 차갑게 노려봤다.
“검을 뽑을 만큼의 실력은 아닌 것 같군.”
“후후! 과연 그럴까?”
붉은 눈동자가 더욱 붉어졌다. 혁련천후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슬쩍 올라갔다.
‘쉽게 도발에 말려드는군. 잘못 보았단 말인가?’
고수는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신교의 고수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철저하게 인간의 감정을 죽이는 법부터 배운다.
“목을 잘라주마!”
거친 음성과 함께 강력한 검강이 날아들었다.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지자 혁련천후도 손에 내공을 조금 더 실었다. 역시 이번에도 몸을 틀어 상대의 검을 후려쳤다.
꽝!
쇳소리가 아닌 폭발에 가까운 굉음이 터졌다. 잠깐 움찔했던 상대의 검이 연속적으로 허공을 가르며 그를 노렸다.
꽝! 꽝! 꽝!
쫓아 들어가는 자와 물러나는 자의 주변이 연신 불꽃을 튕겨냈다. 환호를 보내던 관중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지금까지의 대결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점점 빨라지던 둘의 속도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관중들의 눈에 그저 흐릿한 형태만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놈이 꽤 강한데? 검을 뽑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게.”
진천과 사공진무의 눈동자는 빠르게 둘의 움직임을 살폈다.
상대의 공격이 점점 파괴력을 더해갔다. 그에 대응하여 혁련천후의 움직임도 더욱 민첩함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주공이시군. 검을 뽑지 않으셔도 중원에서 당할 자가 없겠어.”
“언제까지 수비만 하실 생각이지? 아직도 놈이 밑천을 다 드러내지 않았단 말인가.”
“놈은 아직까지는 이곳의 무인들과 같은 기운을 사용하고 있어. 우리가 의심하는 마기를 드러내려면 주공께서도 공격을 하셔야 할 것 같아. 위기에 몰리면 드러내겠지.”
“그냥, 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니냐? 솔직히 우리 말고 다른 놈들이 넘어왔다는 게, 난 믿기지 않는다.”
“지켜보자고.”
“어! 공격하신다!”
사공진무의 말대로 혁련천후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수비만 해오던 그는 손을 검처럼 사용하며 상대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꽝! 꽝!
두 번의 공격을 막아낸 상대의 몸이 휘청거렸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얀 섬광이 순간적으로 번득이며 그의 오른손에 검이 쥐어졌다. 천살강기가 아닌 단순한 검기만을 품은 그의 검이 전광석화처럼 상대의 팔을 노리고 뻗어졌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황임에도 상대는 검을 휘둘러 그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러나 중심이 흔들린 상태에서 강력한 직격을 당하자 입에서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털썩!
둘의 움직임이 멈추자 장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어느새 검을 도로 집어넣은 혁련천후가 쓰러진 상대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 모두의 눈에 보였다. 여전히 입에서 꾸역꾸역 피를 흘리고 있는 상대방은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혁련천후의 담담한 눈동자가 그를 향해 고정되었다. 지독한 분노를 담은 상대의 붉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착각했군. 더 할 텐가?”
“……!”
혁련천후는 심판관을 돌아봤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섰던 심판관이 왼팔을 들어 올리며 혁련천후의 승리를 외쳤다.
“우아아!”
“체술의 달인이다!”
“대단해! 설마 체술의 마스터는 아니겠지?”
“으하하! 20배야! 20배가 터졌다!”
관중들의 환호에 씁쓸한 웃음을 지은 혁련천후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때, 간신히 몸을 일으킨 상대출전자는 관중석의 한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말렸습니까?]
[우리가 잘못 봤다. 놈은 우리가 예상했던 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괜히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선 곤란하지 않겠느냐. 네가 떨어졌다고 해도 전주께서 결승에 오르셨으니 왕궁에 우리가 들어간다. 수고했다!]
[젠장!]
울컥, 선혈을 게워낸 그는 혁련천후를 죽일 듯, 노려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아닙니까?”
“아니다.”
“그럴 리가…….”
진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공진무가 그런 진천에게 핀잔을 주었다.
“네놈도 틀릴 때가 있었네? 차원이동을 하면서 지능이 떨어진 것은 아니냐?”
“이게!”
“거처로 가야겠다. 결승은 내일이니 좀 씻어야겠어.”
여전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성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혁련천후는 숙소로 걸음을 놓았다. 진천은 여전히 머리를 갸웃거렸고 사공진무는 쏟아지는 환호에 대신 두 팔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대단한데? 나도 출전했으면 좋았을걸…….”
“개창피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흘흘! 내가 나갔으면 넌 죽었어. 자식아!”
최종 5인이 가려졌다.
다음 날 아침부터 속개될 결승전은 서로 대결을 펼치는 방식이 아닌 홀베른에서 내세우는 자들과 대결을 펼쳐 이기는 자들이 올라가는 방식이다.
다섯이 모두 이기면 또 다른 자들이 나선다. 결국,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대결은 펼쳐지게 되어 있었다.
걸어가는 셋의 앞으로 은색 갑주를 걸친 기사가 뛰어왔다.
“머무르실 숙소가 변경되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바뀌어? 어디로?”
“하하! 최고대우로 모시라는 전하의 명이 계셨습니다. 숙소에 있는 짐은 시종들이 가져올 것이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좋은 곳으로 간다면 당연히 좋았다. 진천이 사공진무를 흘긋 쳐다보고는 기사에게 물었다.
“시종도 당연히 데려갈 수 있겠지?”
“아, 그건…….”
“이봐! 그럼 당신이 우리 잡일을 해줄 거야?”
“아, 데려가십시오! 대신 더러운 옷은 갈아입어야…….”
일부러 시종으로 변신한 사공진무는 상당히 낡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혁련천후가 기사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이 숙소로 옷 한 벌만 가져다주시오.”
“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조금은 덜떨어진 모습에 모두는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대회가 끝나는 동안 당신이 우리 담당이오?”
“그렇습니다! 영광입니다!”
“……!”
진천과 사공진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무릇 기사란 언제나 당당하고 호기로우며 예를 지녔다.
하지만 눈앞의 기사는 개방의 거지에 갑주를 걸쳐놓은 듯 도무지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기사가 앞장서서 성큼 걸음을 놓았다.
[야! 저거 다리까지 절잖아!]
[완전 짝퉁기사잖아!]
[이거 어쩐지 개고생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 *
새롭게 배정된 거처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청났다.
어지간한 왕국의 왕족들이 기거하는 곳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넓었다. 배치된 시종들과 시녀들의 수만 해도 10명이 넘었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옷이며 신발을 벗는 것까지 수발을 들었다.
물론 사공진무는 예외였다. 오히려 그에게는 노려보기까지 했다.
“오우! 확실히 강자는 어딜 가나 대접을 받는다니까요. 이거 완전히 초호화판입니다! 하하!”
진천이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며 소리쳤다.
“저, 저기 이곳은 이분의 거처인데요?”
기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진천을 쳐다봤다. 대자로 침대에 벌렁 누웠던 진천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기사에게 물었다.
“함께 사용하는 것이 아냐?”
“저기, 검사께서 쓰실 거처는 옆방입니다.”
“옆방?”
“예. 한 분에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습니다. 옆방에서 시종들이 무척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시녀도 있지?”
“10명이나 있습니다!”
기사가 손가락을 펴 보이며 대답하자 진천은 용수철이 튕기듯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녁에 놀러오겠습니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진천을 보며 사공진무는 배가 쓰렸다.
“너도 가.”
“예?”
“가서 진천의 수발을 들어주라고.”
“정말입니까?”
“싫은가 보군?”
“저녁에 뵙겠습니다!”
사공진무도 바람처럼 사라졌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혁련천후는 시종과 시녀들을 물리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욕실부터가 달랐다. 뜨끈하게 데워진 물이 가득 찬 욕조엔 온갖 꽃들이 뿌려져 있었고 최고급 술과 요리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후후! 자신들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수작인가?”
첨벙!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꽃들이 발산하는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스르르…….
모처럼 느끼는 아늑함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욕조 주변이 뿌연 수증기 같은 기운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뿜어내는 수증기는 아니었다.
천살강기였다.
목욕을 하면서 천살강기를 발산할 이유는 없다. 잠을 자고 싶었다. 무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수면, 요즘 들어 부쩍 꿈을 꾸는 것에 취미를 붙여가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들과 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퐁!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울릴 때, 그는 비로소 잠이 들었다.
* * *
똑! 똑! 똑!
잠결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을 깨기가 싫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아내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잠이든 꿈이 이대로 지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아내들의 영상이 사라지며 눈을 떴다.
“주공!”
진천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목소리가 짜증스러웠다.
“들어와!”
삐거덕!
문이 열리며 진천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수증기는 어느 순간 말끔하게 사라졌다.
“주무셨습니까?”
“무슨 일이지?”
“모두 모이라는 전갈입니다. 왕이 직접 온다고 합니다.”
첨벙!
혁련천후가 일어섰다. 전신이 검상으로 가득한 그의 탄탄한 육신이 드러났다. 욕실에 걸린 천으로 하체를 가린 그는 물기를 닦을 생각조차 않고 그대로 욕실을 나섰다. 진천이 뒤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우승자와 결혼할 공주도 온답니다. 하하!”
“그게 내가 좋아할 일이냐?”
“아, 예! 제가 좋지요. 하하!”
머쓱한 표정의 진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영문을 몰라서다.
“어디냐?”
“궁전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밖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무는?”
“시종들도 데려가도 된답니다.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혁련천후가 진천을 차갑게 응시했다.
“다음부터 잠을 잘 때는 절대 깨우지 말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