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28화 (28/55)

제5장

홀베른의 왕궁으로

다섯 대의 마차가 일렬로 늘어서서 달렸다.

왕궁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워낙 도로가 잘 닦인 탓에 마차가 질주하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1시간 정도를 달리자 거대한 왕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란 제국의 엄청났던 황궁과는 다소 손색이 있었지만 홀베른의 왕궁도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

혁련천후는 마차의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여전히 강력한 기운들이 자신의 오감을 자극했다.

왕궁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더더욱 극명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엄청난 기운입니다.”

사공진무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운은 강력했다. 혁련천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란 것인가?’

그랬다.

사람이라면 호흡을 할 때, 미세하게나마 변화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느껴지는 기운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곧 왕궁입니다! 준비하십시오!”

마차를 모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왕궁이 가까워지자 주변을 늘어선 기사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거대한 왕궁의 정문에 이르러 다섯 대의 마차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멈추었다.

“내리시지요.”

네 번째 마차를 타고 온 진천이 재빨리 뒤로 뛰어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기사가 뻘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진천은 개의치 않고서 혁련천후가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문을 잡았다.

다른 마차에서도 출전자들이 내렸다. 먼저 내린 아리엘이 다시 눈을 찡긋거리는 것을 본 진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새끼, 혹시 변태 아냐?”

“주공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사공진무는 둘의 매서운 눈길을 받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두 번째 마차에서 내린 인물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색 갑주를 걸치고 어깨까지 흑발을 늘어뜨린 기사였다. 혁련천후에게 패했던 붉은색 눈동자를 지녔던 자와 동료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세 번째 마차에서는 금발에 벽안을 지닌 전형적인 대륙의 용모를 지닌 청년이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겨졌다. 셋, 모두가 혁련천후와 진천을 흘긋거리고는 안내하는 기사의 뒤를 따랐다.

성문의 좌우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발산하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중앙에 황금색 갑주를 걸친 중년인과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출전자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출전자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표정이 꽤나 차가웠다. 마치 나오기 싫은 자리에 억지로 나온 듯, 그녀는 간혹 짜증스러움을 비추기도 했다.

“표정을 고쳐라.”

“억지로 그러지 못함을 아시잖아요.”

“어쩌면 저들이 왕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것은 네게 달려 있음이야.”

“딸의 인생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아버지가 놀라울 뿐이에요.”

냉랭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둘은 여전히 걸어오는 출전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과 5미터 거리에서 출전자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도열한 기사들의 가장 앞쪽에 섰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묵직하게 소리쳤다.

“모두 예를 갖추라!”

출전자들을 안내했던 기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국왕 전하이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처처척!

모두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오른쪽 손을 가슴에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인사하는 방법을 몰랐던 혁련천후와 진천은 조금 늦게 그들과 행동을 맞추었다. 사공진무는 아예 근처까지 오지도 못했다.

시종들을 적정 거리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게 기사들이 제지했기 때문이다.

“최종 5인에 든 사람들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전하! 하나같이 출중한 자들이옵니다!”

“흠!”

여인과 대화를 주고받던 중년인이 놀랍게도 홀베른의 국왕이었다. 그렇다면 여인은 당연히 우승자와 결혼을 한다는 그 공주일 것이다.

“모두들 일어서거라.”

“일어서십시오!”

처척!

출전자들이 모두 일어섰다. 그들을 바라보는 왕의 눈동자엔 흡족함이 묻어났다. 그는 한 사람씩 차례로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공주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매서웠다.

왕의 시선이 혁련천후에게서 멈추었다.

“그대의 작위가 어찌되는가?”

“남작입니다.”

“케이론에서 왔는가? 복장이 그러한데?”

“다크 영지에서 왔습니다.”

“오호! 다크 영지라면 흑안의 마검사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곳이 아닌가? 그래 그들을 한 번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혁련천후는 내심 죽을 맛이었다.

하필이면 자신에게 질문을 쏟아낼 게 뭔가. 그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왕은 다른 출전자들을 살폈다. 그러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단장은 이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하게.”

왕과 공주가 돌아가자 예의 그 기사가 출전자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형형한 안광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그가 바로 홀베른의 최강자라는 왕실기사단장의 단장, 룻거 후작이다. 이미 20년 전에 마스터를 넘어섰다고 알려진 그는 대륙의 초인들과 차이가 없다고 알려진 강자임과 동시에 마법까지도 부릴 수 있다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각자 무기를 해지하기 바란다.”

모두가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검을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기가 없었던 진천은 몸수색을 당했고 형편없는 철검을 내려놓은 혁련천후는 모두의 의아한 시선을 받았다.

“체술을 익혔나?”

“그렇소.”

룻거 후작이 묻자 혁련천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에게까지 극존칭을 쓰려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룻거 후작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등을 돌리고 앞장섰다.

“따라들 오게.”

모두가 룻거 후작을 따라 연회장으로 이동할 때 사공진무는 마차에 기대어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젠장! 이게 뭐냐고?”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기사 한 명이 시종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시종은 그만이 아니었다. 다른 출전자들이 데리고 온 시종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배불리 먹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전하의 은덕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국왕 전하 만세!”

사공진무가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심기가 뒤틀렸던 그는 배불리 먹여준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까짓것 공짜로 술을 준다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방 기분이 풀어진 사공진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사의 뒤를 따랐다. 다른 시종들도 연신 웃음을 발했으나 단 한 명은 예외였다. 붉은 눈동자를 지녔던 출전자의 시종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응……?’

사공진무는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채를 발했다. 마침 사공진무를 돌아보던 그는 시선이 부딪히자 재빨리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상한 놈이네?’

고개를 갸웃거린 사공진무는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사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 * *

연회장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출전자들을 제외하면 왕과 공주, 그리고 룻거 후작만이 참석했다. 시중을 드는 시종 하나를 제외하면 근위병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왕이 배짱이 있어 보입니다.]

[자신감이겠지.]

[저 룻거라는 작자도 보통이 아닙니다. 저 정도면 헤론 후작은 상대가 안 되겠군요. 이거, 확실히 의심스러운 곳입니다.]

혁련천후는 홀베른 국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기운을 갈무리할 수준의 고수였다. 룻거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면 중원에서도 강자로 군림할 정도다. 이 세상에 와서 가장 강한 고수들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저쪽이다.’

혁련천후의 눈동자는 홀베른 국왕의 뒤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듯, 전신에 가볍게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 엄청난 기운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서두르지 마라.]

둘의 전음은 홀베른 국왕이 입을 열면서 멈추었다.

“마음껏 들고 마시게. 오늘은 그대들을 위한 날이니 필요한 것은 뭐든지 말만 하게나.”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금발의 청년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 외의 다른 출전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도 그 청년기사만 홀베른 출신인 듯 보였다. 출전자들의 문호를 적국만 아니라면 모두 개방했기 때문에 혁련천후와 진천처럼 케이론이나 다른 왕국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연회를 시작하기 전에 이 아이를 소개해야겠지. 홀베른 왕국의 꽃이라는 내 딸아일세.”

국왕의 말이 끝나자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미라고 해요.”

그녀는 아주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얼굴은 한기가 돌았다. 진천의 눈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강제로 혼인을 시키는 모양이군요. 표정이 장난이 아닙니다. 하하!]

[잘해봐라.]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셋째 주모님을 모실 수도 있습니다. 하하!]

[결승에선 너한테 져주지.]

[정말입니까?]

[……!]

에이미 공주는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아리안으로 행동하는 연소민이나 케이론 제국의 레이나 공주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한기가 풀풀 뿜어지는 차가운 표정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돋우고 있었다.

‘셋째부인? 어림도 없지…….’

자신에겐 천하최강의 말썽꾸러기 아내가 있다.

만약 자신이 세 번째 부인을 데려간다면 아마 세 번째 부인이 될 여인은 온몸으로 그녀의 성질을 받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문득 그녀가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종이 일일이 술잔에 술을 채웠다. 모두의 술잔에 술이 채워지자 홀베른 국왕이 잔을 들었다.

“여러분들 중, 3명은 홀베른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물론 본인이 사양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홀베른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면 홀베른은 그대들을 소중히 대할 것이며 가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나머지 2명도 본인이 원한다면 왕실기사단의 단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내일, 모두가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며 다치는 자가 없기를 신께 비는 바이다!”

모두가 동시에 잔을 비우는 것을 시작으로 연회는 시작되었다.

* * *

두 개의 달이 세상을 비추는 늦은 밤, 홀베른 왕궁의 좌측에 자리한 울창한 숲 속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울창한 숲을 상당한 속도로 달렸음에도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한 번 도약으로 상당한 높이의 암벽을 뛰어넘은 그림자는 경계병들이 상주하는 초소 근처에서 질주를 멈췄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눈동자는 섬뜩하게도 붉은 광망이 흘렀다. 주변을 날카롭게 살핀 자가 손짓을 하자 좌우에서 또 다른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저곳입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그자가 연회장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보고를 받던 인물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빌어먹을! 일부러 이날을 택했건만…….”

“다음을 노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시간을 끌면 왕궁에 있는 그자의 수하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집니다. 일단, 연회에 참석하신 전주님께도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젠장!”

분기를 떠올려서 그런 걸까? 모두의 눈동자가 야수의 그것처럼 진한 광망을 쏟아냈다. 그들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사공진무였다.

‘전주! 전주는 중원에서 사용하는 단어, 그렇다면……!’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진천이 느꼈다는 중원의 마도고수들의 마기가 어쩌면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그것은 곧 자신들처럼 이 세상으로 넘어온 중원의 고수들이 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전주라는 놈이 연회에 참석했다면… 그놈이군! 어쩐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이거, 주공께 알려드려야 하는데, 어쩌지.’

자신은 시종의 입장이라 왕궁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고 슬쩍 잠입해서 알리자니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자칫 들키기라도 한다면 레어를 찾으려고 왕궁에 들어서려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공진무가 잠시 갈등을 하고 있을 때,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던 자들이 어디론가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포기하는 모양이군.’

그랬다.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사공진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단은 놈들의 정체를 조금 더 알아보자! 다른 일은 주공께서 알아서하시겠지.’

사공진무의 육신이 사라진 자들을 쫓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사라졌던 자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사공진무는 기운을 죽이고 다시 나무에 몸을 숨겼다.

‘뭐야? 왜 저렇게 허둥대는 거지?’

그랬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에 쫓기는 듯, 허둥대고 있었다. 사공진무의 시선이 그들의 너머로 던져졌다. 순간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그가 눈을 부릅떴다.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그 사이에 사람이 떠 있었다. 아니 떠 있는 게 아니라 날아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나가는 주변의 모든 숲이 태풍을 만난 듯 크게 휘청거렸다.

‘엄청나다! 저런 고수가 있었다니…….’

경공으로는 천하제일이라던 사공진무다.

그런 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흥! 가소로운 것들! 감히 이곳을 침범하고도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쫓기던 자들의 앞으로 떨어져 내린 존재는 은발에 은색 갑주를 걸치고 새하얀 광채로 둘러싸인 검을 든 미청년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백색 일색인 그의 주변공간이 아지랑이가 일듯 일렁거렸다. 어두운 밤임에도 그것이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라면 미청년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었다.

“길을 잃어서 들어온 것일 뿐, 결코 고의로 숲을 침범한 것은 아니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긴장감이 다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흥! 교활한 놈들! 네놈들이 이곳에 나타날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셈이냐? 그리고 나무 위의 너! 너도 내려오는 게 좋을 거야.”

사공진무는 다시 놀랐다.

흑야를 제외하고는 은신과 잠입에 최고봉이라 자부하던 자신이 들킨 것이다.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중원에서 온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도 놀란 눈으로 그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쩝! 거, 되게 귀가 밝은 친구군.”

사공진무가 사뿐히 땅으로 뛰어내렸다.

어느새 긴장감을 몰아낸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였다.

“너희들 때문에 나까지 들켰으니 알아서들 해.”

“네놈은 다크 남작이라는 놈의 시종!”

“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오호! 그러고 보니 그 눈알이 시뻘건 놈의 동료였던 모양이구나?”

사공진무는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입 조심하지 않으면 사지를 잘라주겠다.”

“지랄! 지금 그럴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팔짱을 한 사공진무는 전혀 긴장한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에 은발 미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겁에 질려 설설 기어도 모자랄 판에 저런 여유를 부려? 이거 웃기는 놈이잖아?’

사공진무는 그런 미청년을 빠르게 살폈다.

‘엄청난 힘을 지녔어. 일부러 발산하는 것 같지가 않은데 저 정도라니… 젠장! 잘못하면 피 좀 보겠는데.’

한껏 여유를 보였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상대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자신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미청년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스스로 죽을 기회를 주겠어. 너희처럼 사악한 놈들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그러니 어서 죽어!”

사공진무를 포함한 여섯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이봐! 난 그냥 달밤에 바람 쐬러 나왔단 말이야. 그러다가 저 친구들이 작당을 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을 뿐인데, 그런데 나보고 죽으라니, 이거 너무한 것 아니냐?”

“이곳을 침범하면 왕이라도 죽어야 한다. 홀베른에 왔으면 홀베른의 법을 미리 배웠어야지. 그러니까, 당연히 너희들은 죽어야 해.”

“참, 이거 웃기는 곳이군. 사람목숨을 무슨 똥파리쯤으로 여기는 거야, 뭐야? 이봐! 당신들, 왜 가만히 있어? 뭐라 말 좀 해봐!”

사공진무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섯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미청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사공진무도 그들이 거론했던 자가 미청년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만만치 않아 보이는 그들이 이토록 긴장하는 미청년의 정체가 궁금해서 말을 돌려본 것이다.

그때였다.

그들을 차갑게 노려보던 미청년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발했다.

“너희들, 흑안을 지녔구나. 그렇다면 마족들이겠군.”

사공진무는 재차 놀랐다. 미청년이 나타나면서부터 놀람의 연속이었다. 설마 자신이 변신을 한 것까지 눈치 챌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이거 정말 놀라운 놈이군. 동공 색을 바꾼 것까지 간파하다니…….’

사공진무는 실로 강적을 만났음을 직감했다.

“마족이라면 내가 직접 죽여주지! 감히 이 신성한 아이아스의 영토에 마족이 들어오다니!”

‘아이아스의 영토? 그렇다면 이곳이 맞긴 맞는 모양이구나!’

사공진무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미청년의 전신이 새하얀 빛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이 심상치 않은 요동을 보이자 사공진무는 내심 긴장했다.

다른 자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붉은 광망이 더욱 짙어진 눈을 보니 싸우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그들이 작정하고 기세를 발산하자 주변이 은은한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 * *

드드드…….

갑작스럽게 건물이 흔들렸다.

유리잔과 유리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홀베른 국왕과 에이미 공주가 자리에서 다급히 일어섰다.

“이게 무슨 일이냐?”

“지진인 듯합니다!”

룻거 후작은 벌써 둘의 뒤쪽으로 이동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지진이라는 말에 홀베른 국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지금껏 지진이라곤 한차례도 없었던 이곳에 웬 지진이란 말이냐? 나가서 알아보고 오너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국왕의 주변을 차단하고 섰던 자들이 유령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 출전자들도 술잔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앉은 자세로 여전히 술잔을 기울였다.

[주공! 지진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느꼈던 기운들 중, 하나와 같은 것입니다!]

[……!]

[놀랍군요.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은…….]

진천의 말 대로였다.

다만 가장 강력한 기운은 지금 이 순간도 움직임이 없었다. 술잔을 쥔 혁련천후의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다.

팍!

술잔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그의 옷을 더럽혔지만 그는 여전히 앉은 자세로 일어서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진천이 그런 그를 보며 의아함을 보였다.

그가 조금 이상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놈을 예의주시하도록.]

혁련천후가 눈짓으로 검은색 갑주를 걸친 출전자를 가리켰다. 진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새빨간 광망을 발했다 사라지는 것을 혁련천후는 놓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밖으로 사라졌던 자들이 돌아와 홀베른 국왕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했다. 홀베른 국왕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룻거 후작도 귓속말을 들었는지 안색이 돌처럼 굳어졌다.

“연회는 이것으로 마치겠네. 그대들은 거처로 돌아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기를 바라네!”

홀베른 국왕이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룻거 후작과 기사들이 뒤를 따랐으나 에이미 공주는 연회장에 남았다. 아리엘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두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검술대회는 이것으로 끝인가 보군.”

에이미 공주가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리엘의 표정이 묘했다. 그는 혁련천후와 다른 출전자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자들이 너무 많아. 홀베른이 꽤나 시끄러워지겠어. 뭐, 나야 상관없지만…….”

혁련천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러나 아리엘이 눈을 찡긋거리자 이내 혁련천후는 시선을 돌렸다. 금발의 청년기사와 검은색 갑주의 기사도 아리엘을 차갑게 응시했다.

에이미 공주가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지금 말씀하신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해요.”

“응? 아, 아니요. 그냥 해본 소립니다. 하하!”

“아리엘이라고 했죠? 목적을 가진 자들이 누구죠? 그냥 간과해선 안 될 말을 했으니 밝혀줘야겠어요.”

에이미 공주의 어조는 단호하면서도 상당히 차가웠다. 아리엘이 멀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팔을 어깨 위로 올려 보이며 다른 출전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금발의 청년기사가 나섰다.

“밖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 같은데, 저희들도 돕겠습니다!”

“전하의 명을 잊으셨군요. 여러분들은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돕는 거겠죠?”

에이미 공주의 다소 오만한 말투와 행동에 진천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그것을 본 혁련천후가 눈빛으로 그를 제지했다.

혁련천후가 일어섰다.

“우린 거처로 돌아가겠소.”

모두가 그를 돌아봤다. 아리엘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혁련천후를 볼 때면 언제나 그는 신비한 보석을 보듯 눈빛을 발하곤 했다. 그 안에 숨은 의미심장함은 오직 아리엘만이 알 뿐이었다.

“내일 봅시다!”

진천이 손을 흔들며 혁련천후의 뒤를 따랐다. 에이미 공주는 어쩐 일인지 말없이 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른 둘도 뒤이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검은색 갑주의 기사는 다소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아리엘이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둘이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아리엘도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쩝! 파장 분위기니 저도 가야겠지요?”

“당신은 아직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어요.”

“아, 나 참! 그냥 해본 말이라니까요?”

“답하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하겠어요.”

에이미 공주의 그 같은 말에 아리엘의 눈빛이 달라졌다. 에이미 공주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지금 이곳엔 내일부터 당신들과 대결을 펼치려던 기사들이 은신해 있어요. 내가 신호만 보내면 그들이 당신을 상대할 거예요. 그러니 다시 묻겠어요. 목적을 가지고 온 자들이 누구며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아리엘의 눈동자가 장난기에서 차가움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동시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게 무력을 사용한다고 했어요?”

아리엘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얼핏 들으면 여인으로 착각할 만큼 가늘어져 있었다. 등을 돌렸던 아리엘이 에이미 공주를 향해 돌아섰다.

“호호! 웃겨요. 정말!”

완연한 여인의 목소리, 주변공간에 갑작스럽게 한기가 몰아쳤다.

동시에 아리엘의 갑주가 눈처럼 흰 은색으로 바뀌었다. 견갑에 선명한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는 케논 산맥에서 나타났던 아름다운 여인의 것과 닮아 있었다. 에이미 공주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자신의 눈앞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모아놓은 여인이 나타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돌연한 변화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호위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리엘의 표정이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들은 나타났어야 했다.

완전한 변신을 끝낸 아리엘의 육신 주변에 눈꽃송이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고혹적인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듣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 홀베른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볼까요?”

* * *

밖으로 나온 혁련천후와 진천은 경계를 서던 기사에게 시종을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다.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가보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았지만 목적을 위해서 둘은 참아야 했다.

그들보다 조금 늦게 연회장을 나온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어둠 속으로 마차를 몰아 사라져가는 검은색 갑주의 출전자를 유심히 쳐다보던 진천이 물었다.

“아까, 놈을 지켜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동이 느껴졌을 때, 놈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요상하게 변하더군.”

“요상하게요?”

“네가 말했던 그 기운과 흡사했지.”

진천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그렇다니까요. 분명 중원의 마도인들이 발산하는 분위기와 비슷했지 않았습니까? 주공! 그럼 놈을 잡아서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놈들이 만약 중원에서 넘어온 것이 맞으면 드래곤의 레어를 찾지 않아도 돌아갈 방법이 당연히 있을 겁니다. 그럼 이런 개고생을…….”

“확실하지 않은 것에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아.”

혁련천후의 단호한 어조에 진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쩝! 내가 너무 설쳤군.’

절박함을 깜빡한 것이다.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지상과제였다. 물론 혁련소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했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했다.

이곳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음을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내일 펼쳐질 대회에서 통과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궁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돌아갈 방법을 발견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자들을 쫓다가 그것마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혁련천후였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그들을 잡아서 족쳤을 것이다. 아니, 드래곤의 레어를 확인한 다음엔 당연히 그렇게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진천은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사공진무를 데리러 간 기사가 혼자서 돌아왔다. 진천이 기사에게 물었다.

“시종은?”

“거처에 없었습니다.”

“엥! 없어?”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천은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둘의 시선은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던져졌다. 물론 기사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가봐야겠어.]

팟!

둘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다른 곳을 보았던 기사는 금방까지 있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눈을 비비며 껌벅거렸다.

* * *

“젠장! 뭐, 이런 놈이 있어!”

사공진무는 난감한 표정으로 경공을 펼쳤다. 6대 1의 대결이 펼쳐진 지, 이미 10분이 지났다. 그동안 자신이 한 것이라곤 피하는 것뿐이었다.

상대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이건 공격이 아예 먹혀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군이 되어버린 기분 나쁜 자들은 이미 둘이 목숨을 잃었다. 미청년의 강력한 주먹에 종잇장처럼 찢겨져 죽어버린 것이다.

“후후! 고작 이따위로 마족이라 할 수 있느냐?”

쾅!

사공진무가 섰던 곳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한 사공진무는 지금껏 뽑지 않았던 검을 뽑기로 작정했다. 물론 내공을 응축하여 만들어내는 무형의 검이다. 가급적 중원의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는 혁련천후의 명대로 지금껏 피하기만 했었지만 상대는 피해서만 될 존재가 아니었다.

자칫, 한 방이라도 걸리며 그것으로 자신이 죽을 판이었다.

쾅! 쾅!

미공자의 육신에 검강이 작렬했다. 살아남은 셋의 연합공격은 상당히 매섭고 파괴적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청년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뿌연 연기 사이로 미청년의 얼굴이 흐릿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후후! 케니언 크로우라고 들어봤나? 절대 뚫을 수 없는 통곡의 벽, 케니언 크로우의 수장이 바로 나, 데얀이다!”

셋은 망연자실, 자신들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최후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니 실패가 아니라 소용없음을 깨닫자 절망이 그들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미청년, 데얀이 셋을 향해 빛처럼 쏘아졌다.

“어딜!”

사공진무의 육신이 그에 못지않은 빠르기로 데얀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셋의 목숨을 취하려던 데얀이 흠칫하며 방향을 바꾸어 뒤로 멀찌감치 벗어났다.

셋의 앞을 막아선 사공진무의 손에는 내공으로 만들어진 무형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데얀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놈! 힘을 감추고 있었구나! 감히 이 데얀의 눈을 속이다니!”

“저 친구들은 내게 꽤 소중하거든. 그러니 이제부터 나 혼자, 너를 상대하겠다.”

“후후! 가소로운 놈! 그 정도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느냐? 좋아! 나도 내 힘을 모두 사용해 주지.”

사공진무가 그 말에 흠칫했다.

‘뭐? 그럼 지금까지 전력으로 싸운 게 아니었단 말이야? 뭐, 저런 괴물 같은 자식이 다 있어?’

참으로 놀랄 노 자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사공진무는 돌아보지 않은 자세로 뒤쪽에 선 셋에게 협박조로 말했다.

“너희들, 도망가면 죽어. 너희들에게 물어볼 게 무척, 많거든.”

“……!”

셋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사공진무가 왜 자신들을 대신해서 혼자 싸우려고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 쥐어진 무형의 검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자신들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였다.

사공진무는 데얀의 변화를 무거운 기색으로 직시했다.

역시 달랐다. 무지막지했던 조금 전보다 더 파괴적인 기운이 그의 전신을 두르고 있었다. 중원에서도 몇 손가락에 들 정도의 힘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엄청난 강적을 만난 것이다.

우우웅!

데얀의 손에 쥐어진 검이 시뻘건 화염을 두르기 시작했다. 후끈한 열기가 사공진무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후후! 어디 막아볼 수 있으면 그렇게 해봐!”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데얀의 검이 곧장 사공진무를 향해 돌진했다. 검과 육신이 하나가 되는, 중원에서는 검신합일이라고 하는 극강의 경지를 데얀은 아무렇지 않게 펼쳐냈다.

꽝!

사공진무 역시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놀라울 정도의 파괴력이 엄청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주변 숲의 나무들이 사정없이 부러져 날아갔다. 뒤쪽에 섰던 셋은 황급히 몸을 충격파의 사정권 밖으로 날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그들은 어쩐 일인지 도주하지 않았다.

격돌은 데얀의 근소한 우위로 나타났다.

그 자리를 지킨 데얀에 비해 사공진무는 다섯 걸음 정도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표정은 데얀이 더욱 굳어져 있었다.

“놀랍군. 마계의 하위전사 주제에 나의 일격을 받아 내다니…….”

“난, 마족이 아니라 사람이거든? 괴물은 오히려 네놈 같은데?”

“후후! 너희, 사악한 마계의 놈들에겐 괴물일 수밖에…….”

“이 자식이 사악함이란 단어의 뜻도 모르는가 보네? 인마! 지금 네가 하는 짓거리가 사악한 거잖아?”

사공진무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때 데얀의 공격이 재차 이어졌다. 첫 번째와는 달린 사공진무는 빠른 보법으로 공격을 피했다. 그가 섰던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힘 하나는 엄청 센 놈이군.”

사공진무는 혀를 내둘렀다.

정면으로 부딪혀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단 한 번의 격돌로 그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주특기인 순간이동과 진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뒤쪽에 선 셋이 마음에 걸렸다. 사공진무는 그들 셋이 어떤 형태로든 중원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데얀과 싸울 때, 그들이 발산했던 기운은 틀림없는 마도고수들의 마기였다. 그래서 그들을 돕고 나선 것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니까…….

“젠장!”

사공진무가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공격전에 조금의 시간차를 두던 데얀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쾅! 쾅!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형국이 당분간 이어졌다. 빗나간 공격은 주변을 초토화로 만들었다. 지켜보던 셋은 둘의 사정권 밖으로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여전히 도주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회전하며 피하기에 급급했던 사공진무의 육신이 갑자기 꺼지듯 사라졌다. 목표를 놓친 데얀이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였다.

깡!

“쥐새끼!”

데얀의 어깨에 불꽃이 작렬했다. 몸을 휘청거린 데얀이 그대로 검을 횡으로 그으며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사공진무의 육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이동으로 공격을 성공시켰건만 사공진무의 얼굴은 결코 좋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데얀의 어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거야? 멀쩡하잖아……?”

방금 그는 검으로 완벽한 빈틈을 노리고 데얀의 어깨에 공격을 성공시켰다. 강철이라도 잘라낼 힘이 실렸건만 데얀의 어깨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데얀의 견갑은 흠집조차 없었다. 사공진무의 입장으로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정말 괴물이네. 저놈…….”

사공진무는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후후! 세상에 나의 갑주를 뚫어낼 것은 없지. 너희들이 전황이라 받드는 무식한 발록의 채찍도 소용없다. 하지만 조금은 아프군. 뼈가 조금 다친 것 같단 말이야.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데얀의 눈동자가 새하얀 섬광을 발했다.

“이제 그만 네놈을 소멸시켜주겠다.”

“그만!”

차가운 음성이 뒤쪽에서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숲을 헤치고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 그리고 기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데얀의 눈초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그를 바라보는 홀베른 국왕의 표정은 매우 엄중했다. 룻거 후작이 나섰다.

“왕께서 납시었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느닷없는 상황에 사공진무는 잠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왕이라는 말에 그는 이곳 방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뒤쪽에 섰던 자들도 역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는 고개를 숙였다.

“데얀 공! 왕께 예를 갖추시오!”

여전히 가만히 선 그대로였던 데얀에게 룻거 후작이 소리쳤다. 심사가 뒤틀린 듯, 짜증이 다분한 데얀의 얼굴 근육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실룩거렸다.

“됐네!”

홀베른 국왕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데얀을 제쳐두고 사공진무와 셋을 엄중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홀베른의 백성들인가?”

“후후! 레어를 노리고 온 쥐새끼들이오.”

데얀이 대신 대답했다. 홀베른 국광이 데얀에게 차가운 눈길을 주고는 다시 사공진무와 셋에게 물었다.

“대답하라! 홀베른의 백성들인가?”

챙!

기사들이 검을 뽑으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케이론에서 왔습니다.”

“웸블리에서 왔습니다!”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홀베른 국왕이 뒤쪽의 셋에게 시선을 던졌다.

“웸블리라면 요란 제국의 우방공국이 아니더냐? 룻거!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게…….”

룻거 후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홀베른 국왕의 눈동자에 매서운 빛이 떠올랐다.

“스파이로 들어온 모양이군. 그런 즉결처형이 가능한 것도 알고 있느냐?”

“아닙니다! 저희들은 검술대회에 출전한 자작님의 시종들입니다.”

홀베른 국왕이 다시 룻거 후작을 응시했다. 엄한 질책이 담긴 그의 눈빛에 룻거 후작은 고개를 숙였다.

요란 제국과 그곳의 위성국가나 공국은 이번 검술대회에 참여할 수 없다. 홀베른이 케이론의 우방공국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출전자 심사에서 거부되었어야 할 그들이 출전했다면 뭔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했다.

“시종들이 지금껏 남아 있었다면 연회장에 있는 다섯 중, 하나이겠군. 누구냐? 너희들이 모시는 자의 이름이?”

홀베른 국왕의 추상같은 물음에 셋은 서로를 마주보며 머뭇거렸다.

기사들이 검을 들어 그들의 목에 대었다. 손만 까딱하면 목 없는 시체가 될 판이었다. 룻거 후작이 다그쳤다.

“말하지 않으면 당장에 목을 칠 것이다! 어서 대답하라!”

“펠론 자작이십니다!”

룻거 후작이 기사들 중, 하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자를 당장 체포해라!”

“예!”

기사 한 명이 사라졌다. 그의 가공할 만한 신법에 데얀과 사공진무도 가볍게 놀란 빛을 보였다. 홀베른 국왕의 시선이 이번엔 사공진무를 향했다.

“복장을 보아하니 그대도 시종인 듯한데, 모시는 자가 누구이더냐?”

“다크 남작이십니다.”

“다크 남작이라면……?”

“체술을 익힌 그자입니다.”

룻거 후작의 말에 홀베른 국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혁련천후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데얀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툴툴거렸다.

“후후! 고작 시종 정도가 초인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다니, 웃기지도 않군.”

홀베른 국왕은 그의 말을 흘려버리고는 다시 물었다.

“데얀의 말이 옳다. 시종이 데얀과 싸울 수는 없는 법! 네 주인이 말하기를 다크 영지에서 왔다고 하던데, 진정 그 말이 사실이더냐?”

어쩐 일인지 사공진무를 대하는 홀베른 국왕의 태도는 다소 부드러웠다.

“그렇습니다.”

“허어! 주인보다 강한 시종이라…….”

홀베른 국왕이 놀랍다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사실 내색을 자제하고는 있었지만 그와 룻거 후작은 무척 놀라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데얀이 어느 정도 강한지 알고 있다. 어쩌면 대륙의 초인들보다 데얀이 더 강하다고까지 여기고 있었다.

그런 데얀과 일대일로 싸워서 멀쩡한 사공진무가 일개 남작의 시종이라니,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홀베른 국왕이 이번엔 데얀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데얀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왕에게 할 태도는 아니었지만 왠지 그게 꽤나 어울렸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홀베른 국왕도 그런 데얀에게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평소에도 이런 식이었던 모양이다.

“이들은 국법으로 처리하겠네. 그러니 자넨 이쯤에서 물러나줘야겠어.”

데얀의 눈초리가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놈들은 이곳을 침범했소! 설마 우리와의 협약을 어기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협약은 지킬 것이네. 다만 이들은 검술대회의 출전자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이니 이번만큼은 과인에게 양보하게.”

“아니 될 말씀!”

이건 도저히 왕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홀베른 국왕은 역정을 내지 않았다. 룻거 후작과 기사들만이 데얀을 노려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나타낼 뿐이었다.

“데얀…….”

홀베른 국왕이 데얀을 나지막이 불렀다. 깊게 가라앉은 홀베른 국왕의 눈동자를 데얀은 외면했다.

“젠장! 알았소! 대신 저놈은 나중에 내게 넘겨주시오! 결판을 내야겠소!”

데얀이 사공진무를 가리켰다.

사공진무는 그런 데얀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데얀의 눈초리가 다시 치켜 올라갔다.

“그 웃음이 언제까지 가는가 보겠다.”

“좋을 대로…….”

“이, 이익!”

사공진무의 느긋함에 데얀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몸을 들썩였다.

“고맙네. 양보해 줘서…….”

“흥!”

홀베른 국왕과 사공진무를 한차례 노려본 데얀이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홀베른 국왕의 육신이 잠깐 흔들렸다. 룻거 후작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손을 들어 그를 뿌리친 홀베른 국왕은 사공진무와 뒤의 셋에게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 * *

“놀라울 정도로 무식한 놈이었습니다.”

진천은 숲 속으로 사라진 데얀을 거론했다.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는 홀베른 국왕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둘은 숲 속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갈까요?]

사공진무가 전음으로 물어온다. 이미 그들이 이곳에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일단은 그렇게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뛰쳐나오고…….]

[하하! 죽기야 하겠습니까? 드릴 말씀도 있고 하니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다 들었다. 나올 생각일랑 말고 그 안에서 알아볼 것이 있으면 최대한 알아봐.]

[그러지요.]

기사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는 사공진무, 모두가 사라지자 혁련천후와 진천은 초토화된 주변을 살피며 느릿하게 숲 속에서 걸어 나왔다.

“엄청난 화공계열의 무공입니다. 진무 혼자로서는 벅찬 상대로 보이네요.”

“힘으로만 따지면 그렇겠지.”

“예?”

“힘을 바탕으로 한 공격방식은 시간이 흐르면 한계가 드러나는 법, 장기전에서는 진무가 유리하다.”

“하긴, 진무, 그놈은 요상한 술법이 있으니 지진 않겠군요. 그래도 더럽게 강한 놈이었습니다. 저 정도면 구파의 장문 정도는 그냥 날름 해먹을 수준입니다.”

진천은 여전히 데얀이 보여준 파괴력에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보였다.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늦게 현장에 도착했더라도 데얀에게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데얀이 보여준 공격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혁련천후가 허리를 숙여서 뭔가를 집어 올렸다. 진천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짝 다가갔다.

“뭡니까?”

혁련천후의 손에는 새카맣게 그을린 나무파편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을린 부분을 슬쩍 긁었다. 그러자 가루가 아닌 시커먼 부분이 그대로 지워지며 나무의 속살이 드러났다.

“화염이 아니라 마법이었군.”

“그렇군요. 열을 동반한 화염이었다면 탄 부분이 가루로 떨어질 텐데 말입니다.”

“이 정도로 강력한 마법공격을 대마법사라는 자들은 과연 가능할까?”

혁련천후는 지난 날, 요란 제국의 대마법사 율튼을 떠올렸다. 결론은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엄청났던 공격도 조금 전, 데얀에는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곳이군. 이곳 홀베른은…….”

혁련천후는 기를 끌어올려 예의 강력한 기운들을 감지했다. 역시 가장 강력한 기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외의 다른 몇은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데얀처럼 엄청난 강자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국왕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글쎄…….”

“드래곤의 레어 말고도 뭔가 커다란 비밀이 있어 보입니다.”

혁련천후도 진천의 생각과 같았다. 왕궁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의문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놀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왕도 그렇고 결코 그에 못지않은 룻거 후작,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숲도 그랬다. 물론 데얀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혁련천후는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일단은 이곳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고 확인되었으니 용언마법의 흔적을 찾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진무가 혹, 무슨 해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음먹으면 충분히 헤쳐 나올 능력이 있음을 알잖느냐?”

“쩝! 그렇긴 합니다만…….”

“그만 돌아가자.”

찬바람이 불어왔다.

초토화된 숲이 바람에 부대끼며 섬뜩한 울음을 토해낼 때,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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