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29화 (29/55)

제6장

몬스터 전쟁

케논 산맥은 때 아닌 피바람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인간 대 몬스터, 죽은 동료의 복수를 위한 양 제국의 기사들은 각자 반대반향에서부터 케논 산맥의 모든 몬스터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출진했다. 우습게도 몬스터들을 토벌하기 위해 테세우드 공작과 카르스 황태자 간에 6개월간의 불가침협정이 맺어졌다.

전임, 케이시 공작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지만 카르스는 그와 달랐다. 삶에 자존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둘 간의 공통점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고, 한편으로는 몬스터에 대한 인간 본연의 두려움과 증오심이 작용한 탓도 있었다.

특히 블랙 오우거와 와이번이라는 강력한 몬스터의 무더기 출현은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타협이 불가능한 몬스터들은 그 세력이 팽창하기 전에 무조건 꺾어놔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빠른 성장속도를 보이는 몬스터들이기 때문에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전에 일정 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적아를 막론하고 인간세상, 자체가 위험에 놓이게 된다.

수천 년 역사를 교훈 삼은 테세우드와 카르스의 협정으로 인해 제국전쟁의 전운은 엉뚱하게도 케논 산맥의 몬스터들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제국의 유능한 인재라던 아이언기사단의 단원들을 잃은 카르스 황태자는 테세우드 공작보다 더한 복수심에 이를 갈았다.

협정으로 인해 적의 기습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 그는 대마법사 율튼까지도 케논 산맥으로 출전시켰고 당초, 생각을 바꿔 자신이 직접 토벌군을 이끌기에 이르렀다.

반면, 테세우드 공작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레이놀드 백작을 토벌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용맹한 기사들, 5,000명을 그의 휘하에 넣고서 출전시켰다. 물론 대마법사 쉐인이 마법병단을 이끌고 참여했다.

거기에 인근 영지의 영주들과 기사들을 강제징집하여 별도의 별동대를 구성했는데, 거기엔 아르소와 다크 영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놀드 백작은 연소민에게 무조건 참전할 것을 종용했고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연소민은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기사들만을 이끌고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 최소한의 기사들은 당연히 담대소천 등을 위시한 팔왕의 다섯에다 마법사 요란과 우드, 그리고 가투소와 그의 기사들이었다.

레이나 공주도 당연히 그들과 함께했다.

* * *

“젠장! 팔자에도 없는 괴수사냥이라니…….”

“흐흐! 근질거리던 차에 잘됐지. 게다가 성과가 좋으면 포상도 짭짤하게 내린다고 했으니 깡그리 잡아보자고.”

“블랙 오우건가 하는 놈을 잡으면 대박이다. 흐흐! 덩치 큰 시꺼먼 놈을 만나기만을 바라야지.”

마스터도 일대일로는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는 블랙 오우거를 고블린 취급하는 이들은 당연히 왕전과 북궁천소였다.

아르소를 떠나 케논 산맥으로 향한 지 15일이 지나서 겨우 산맥의 초입에 도착한 그들은 다른 영지의 기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가투소와 기사들은 담대소천에게 전수받은 기마전술을 익히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당초 전원이 오려고 했지만 아르소와 다크 영지의 치안을 위해 100명만이 토벌에 참여했다.

어쩌다가 이들과 함께하게 된 마법사 요란의 도움으로 기사들의 전마엔 마법방어막이 쳐진 마갑이 둘러져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기사들은 매우 들떠 있었다.

마법방어막을 두른 마갑은 자작 이상의 귀족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위마법사가 직접 마갑에 실드를 입혀줘야만 가능한 것이 그것인데 자신들 같은 최하위 귀족이거나 아예 작위조차 없는 기사들이 상위마법사의 은혜를 받을 길은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그런 귀중한 것을 요란이 해주었으니 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저 자식들! 완전 닭대가리네? 또 저기서 방향을 저렇게 틀고 지랄이야!”

“인간아, 기마전술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줄 아냐?”

“똑바로 못 하냐!”

왕전 등은 기마전술을 훈련 중인 기사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연소민은 레이나 공주와 케논 산맥을 두르고 흐르는 강변으로 잠시 나간 탓에 보이지 않았다. 전 부대의 지휘권은 담대소천에게 있었다.

베린스 공작의 공격을 막아낸 이후부터 그에 대한 레이나 공주의 신뢰는 대단했다. 비록 후작인 헤론이 있었지만 그는 본대와 합류하면 자신의 부대를 다시 이끌어야만 했기에 담대소천이 아르소와 다크의 연합군을 이끌게 된 것이다.

꽈르릉…….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뭐야? 비가 올 모양인데?”

“해가 쨍쨍 떴는데 천둥이라니, 웃기는군.”

왕전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빠른 속도로 어둡게 변해갔다. 그리고 이내 빗줄기를 쏟아냈다.

훈련하던 기사들이 재빨리 군막을 치며 부산을 떨었다. 강변에 나갔던 연소민과 레이나 공주도 카루가의 손을 잡고 바삐 돌아왔다.

쏴아아…….

빗줄기는 짧은 시간에 폭우로 변했다. 어쩐 일인지 카루가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조윤이 카루가에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그냥,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이상하다고?”

“응! 여기 오면서부터 그냥 이상해졌어. 불안하기도 하고 찜찜하기도 하고…….”

대답을 흐린 카루가는 한쪽에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모두가 그런 카루가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많이 늦는군요.”

연소민이 망토를 갑주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담대소천 등에게 비밀리에 무공을 전수받고 있었던 까닭이다. 엄청난 강자들, 다섯이 달라붙어서 가르치니 나날이 그녀는 강해져가고 있었다.

“어차피 와봤자 도움이 될 것도 아닌데, 그냥 우리끼리 출발하는 게 어떨까?”

“그거 좋지! 사람이든, 음식이든 기다리는 건 질색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요. 곧 오겠죠.”

군막으로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이 들어섰다. 헤론 후작은 예전의 기력을 회복한 듯,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보였다.

“이토록 지독한 비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비가 오면 몬스터들이 활동을 하지 않으니, 빨리 그쳐야 할 텐데…….”

레이나 공주가 갑주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곧 그치겠죠. 이리로 오세요. 공주님! 카루가도 이리 와.”

연소민은 가장 좋은 자리에 레이나 공주와 카루가를 앉혔다. 헤론 후작은 레이나 공주의 옆에 앉았다.

어둠의 숲에서 돌아온 지 제법 시간을 흘렀지만 헤론과 다른 존재들은 여전히 서먹서먹했다. 작위로 보면 후작인 헤론이 당연히 위였지만 담대소천 등은 레이나 공주의 근위기사들로 임명이 되었기에 그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물론 레이나 공주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담대소천 등은 여전히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쩌저저적!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쾅!

굵직한 거목들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며 불꽃을 피웠다. 자연의 엄청난 위력에 모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가투소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통신입니다! 지휘관을 바꿔 달라고 하십니다!”

“누군가요?”

“레이놀드 백작 각하이십니다!”

레이나 공주가 담대소천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휘관이니 그보고 받으라는 빛이었다. 담대소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투소를 따라갔다.

레이놀드 백작이라는 말에 연소민은 흑야를 흘긋 쳐다봤다.

[사고 치시면 안 돼요. 숙부님.]

[노력하지.]

흑야의 차가운 대답에 연소민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잠시 후, 담대소천이 돌아왔다. 모두가 그를 응시했다.

“상당한 수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군.”

레이나 공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 빗속에 몬스터들이 나타났단 말인가요?”

“1개 사단규모의 오크부대가 출몰했다고 하더군… 오우거도 제법 섞였고… 출발해야지 않겠소?”

“알겠어요.”

레이나 공주를 대하는 담대소천의 말투에 헤론 후작의 눈빛이 살짝 변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그들의 말투에 적응이 된 까닭이다.

“기사들 몇 만 남겨두고 출발해야겠다. 기왕 나선 거면 확실히 싸워서 아르소와 다크에 도움을 줘야지.”

담대소천이 무장을 꾸리자 다른 이들도 무기를 챙겨들고 갑주를 걸쳤다. 당초, 레이나 공주가 선물한 갑주를 모두는 어색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거친 용모에 갑주를 걸치니 꽤나 잘 어울렸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정색으로 통일시키자 더욱 파괴적으로 보였다.

“서둘러라!”

“야! 제대로 말아야지!”

기사들이 빗속에서 군막을 재빨리 걷어내고는 빠르게 이동을 준비했다.

연소민은 무심결에 케논 산맥으로 시선을 던졌다. 폭우 속에서도 케논 산맥은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오연하게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찌르르 하는 것을 느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녀는 마지막으로 견갑을 차고는 전마에 몸을 실었다. 모두가 이동준비가 완료되자 타 지역의 영주들을 기다려야 하는 기사들 3명을 제외한 모두는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 * *

케논 산맥의 웅고르 분화구는 인간 대 몬스터의 처절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0만에 달하는 오크병력에 맞서 1만의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악전고투를 벌여나갔다. 그들이 상대하는 오크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평소라면 기사 하나가 오크 열은 거뜬히 당해낼 정도의 우위에 있다.

하지만 옹고르의 오크들은 무척 거칠고 사나웠다. 벌써 1,000명이 넘어가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쾅!

오크병력의 중앙에 강력한 화염이 떨어져 폭발을 일으켰다. 수백의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마법병단의 화염공격은 쉬지 않고 오크병사들의 진영을 강타했다.

대마법사 율튼이 이끄는 마법병단의 위력은 가히 엄청났다. 특히 요란 제국의 주특기인 궁병의 마법화살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했다.

세 마리의 오크를 관통하고도 남을 위력을 지닌 강전은 1시간 가까이 이어진 전투에서 1만 이상의 오크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크의 사단병력을 몰살할 태세였는데…….

“크어어!”

“오우거다!”

“블랙 오우거가 나타났다!”

괴수의 울부짖음과 함께 기사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시커먼 몬스터, 블랙 오우거가 오크무리의 뒤쪽에서 대지를 울리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쿵! 쿵! 쿵!

부딪힌 오크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혼돈은 오크 진영에도 일어났다. 적아를 구분 못 하는 블랙 오우거들의 거친 손짓에 오크들도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아이언기사단은 황태자 저하를 보호하라!”

폭스 후작의 명령에 오크를 도살하던 아이언기사 단원들은 재빨리 카르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오크의 녹색 핏물로 적셔진 검을 든 카르스는 무지막지한 기세로 달려오는 블랙 오우거를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준비해라!”

그가 짤막한 명령을 내리자 아이언 기사들이 등에서 랜서를 뽑아 들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그것은 마나를 주입하자 두 배 이상의 길이로 늘어났다.

날 끝에 오러를 품은 랜서들은 일제히 블랙 오우거를 향해 겨누어졌다. 카르스, 스스로도 기다란 랜서 하나를 잡고서 던질 자세를 취했다.

율튼이 카르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마법병단의 일부도 오크도살을 중단하고 뛰어왔다. 기사들이 랜서를 던지면 마법사들이 화염계열의 마법을 발출해 위력을 배가시킬 목적이었다.

궁병들의 전술을 랜서에 접복시킨 것이다.

이미 위력은 수많은 임상을 통해 증명되었기에 카르스는 블랙 오우거를 쉽게 제압할 것으로 확신했다.

“마주치지 말고 주변으로 물러서라!”

폭스 후작이 전방의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자칫 블랙 오우거의 주변에 있다가는 아군의 공격에 당하기 십상이다. 그것을 미리 예방한 폭스 후작은 굳은 얼굴로 지축을 울리며 질주해 들어오는 블랙 오우거를 직시했다.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을 위시한 강한 기사들은 검에다 오러를 잔뜩 두르고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랜서 공격이 가해지면 그때를 노려 블랙 오우거의 목을 잘라낼 심산이었다.

“이때다! 공격!”

카르스의 입이 고함을 지르자 기사들이 일제히 랜서를 던졌다. 동시에 율튼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손에서 발출된 시뻘건 화염이 랜서의 주변을 두르기 시작했다.

콰콰쾅!

거대한 블랙 오우거의 육신에 수십 발의 불꽃이 작렬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블랙 오우거가 휘두른 손에 맞고 튕겨나간 랜서들이 기사들에게로 떨어져 수십 명의 기사들이 피를 뿌리며 화염에 휩싸였다.

“크아아아!”

화염에 휩싸인 블랙 오우거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광포한 몸짓은 적아를 막론하고 주변을 휩쓸었다. 오우거와 기사들의 육신이 처참하게 찢겨지며 날아갔다.

“모두 뒤쪽으로 물러나라!”

“물러나라니까! 바보들아!”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기사들이 뒤쪽으로 몸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혼돈 중에 오크병력들과 한데 섞여버렸기 때문이다.

카르스의 육신이 번개처럼 날아올랐다.

화염에 휩싸여 광란의 몸짓을 보이던 블랙 오우거의 목이 뎅강 잘려지며 날아갔다. 허공에서 몸을 선회한 카르스는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쿵!

블랙 오우거의 거대한 동체가 대지를 울리며 무너졌다.

카르스의 두 눈이 희열로 채워졌다. 비록 상당한 출혈을 감수한 성과였지만 전설의 블랙 오우거를 잡았다는 것에 그는 만족했다. 게다가 블랙 오우거의 뼈는 드래곤의 뼈, 다음으로 강력한 내구도를 지녔기에 마스터들이 사용하는 검으로 제작한다면 무력이 배가되는 효과로 이어진다. 죽은 기사들의 목숨과 비교해도 결코 아깝지 않았다.

“오크를 마저 쓸어내라!”

카르스는 자신만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율튼과 마법병단들은 다시 전방으로 날아갔다. 블랙 오우거의 출현으로 잠시 주춤했던 몬스터살육이 재개되었다.

“감히 몬스터 따위가…….”

카르스는 검을 고쳐 잡고 다시 전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좌우는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 철통처럼 경계했다. 마스터의 반열을 넘어선 폭스 후작의 검은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했다.

한 번의 휘두름에 10마리에 달하는 오크들이 죽어나갔다.

공격을 가할 때, 2미터까지 늘어나는 오러가 대량살상을 가능하게 했다. 크루즈 백작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 또한 마스터다.

멋모르고 달려드는 오크들은 여지없이 그의 검에 의해 두 동강으로 썰어졌다.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는 오크들이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비록 다른 오크들에 비해 강력했지만 요란 제국의 기사들을 당해낼 순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득의만만해하던 카르스 황태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진 것은 20마리가 넘어가는 블랙 오우거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빌어먹을! 퇴각한다!”

“전하!”

“저놈들 모두를 상대할 순 없어! 설사 죽인다고 해도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죽어야 할 거다.”

카르스는 보통의 황족들과는 달랐다.

물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겨 대세를 그르치지 않았다. 모든 게, 냉철한 그의 성정 때문이었다.

한편, 이들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몬스터 토벌을 행하고 있던 케이론 제국의 레이놀드 백작도 엄청난 강적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쾅!

와이번이 쏟아낸 화염이 기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반경 10미터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불길에 휩싸여 죽어갔다.

“궁병들은 산개하지 말고 집중포화를 퍼부어라! 한 놈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으란 말이다!”

레이놀드 백작이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와이번의 움직임이 워낙 빨랐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지금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와이번은 보통 와이번이 아니었다. 회색의 몸통 대신 시뻘건 핏빛을 띤 그들은 블랙 오우거와 더불어 드래곤의 가디언이라 불리는 전설 속의 블러드 와이번들이었다.

어지간한 검은 흠집을 내는 것에 만족해야 할 만큼 강인한 그들의 육신은 살아 움직이는 최상위마법 갑주를 연상시켰다.

쾅!

“으아!”

“살려줘!”

육신이 불길에 휩싸인 기사들이 절규를 토해냈다. 1시간이 흐르면서 죽어간 기사들의 수는 오백이 넘었다. 반면에 블러드 와이번은 한 마리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엄청난 피해에 레이놀드 백작은 공황상태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그도 이런 황당한 전투는 처음이었다. 오크나 몬스터, 해안에 산다는 놀들은 수도 없이 베었던 그였지만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블러드 와이번은 그로서도 감당이 되질 않았다.

“감히! 몬스터 따위가!”

대마법사 쉐인의 창노성이 주변을 울렸다.

그의 양손이 대마법사의 전유물인 파이어랜서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옛날 드래곤을 사냥할 때 천계의 전사들이 사용했다는 그것은 지상최강의 살상병기다. 블러드 와이번이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즉사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워낙 빨랐던 탓도 있지만 파이어랜서가 날아가면 화염을 뿜어내 도중에서 격추시켰기 때문이다. 쉐인은 기회를 노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는 한 마리도 그의 솜씨에 의한 것이었다.

“쉐인 경! 일단 물러나야겠소!”

레이놀드 백작은 어쩔 수 없이 회군을 결심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 불가피했다. 당초 블러드 와이번은 생각조차 못했던 그는 일반 와이번과 오우거 정도만을 염두에 두고서 최정예를 뽑아오지 않았었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블랙 오우거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요란 제국이 황태자 카르스가 직접 나선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끄아악!”

쉐인의 파이어랜서가 블러드 와이번의 가슴을 꿰뚫었다. 제아무리 사나운 블러드 와이번이라도 대마법사의 마나가 깃든 공격에 명중되면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대지로 추락한 블러드 와이번은 몇 번의 날갯짓을 퍼덕이고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전신을 땀으로 목욕을 한 쉐인은 그제야 레이놀드 백작을 돌아봤다.

“퇴각이라 하셨소?”

“돌아가서 정예를 이끌고 다시 옵시다! 이 전력으로는 놈들을 당해내기가 어렵소!”

쉐인은 어쩔 수 없이 퇴각에 동의해야만 했다.

그는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쏟아지는 빗물은 이미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대지를 붉게 물들여 놓은 상태였다.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기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여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위로 어김없이 화염이 떨어졌다. 공포에 떠는 기사들은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처지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전이다. 쉐인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진다.

“지옥이야, 지옥…….”

* * *

케논 산맥의 중턱쯤에 뒤를 절벽으로 두른 넓은 평지가 있었는데, 그곳이 케이론 제국의 몬스터 토벌군이 군영을 차린 곳이었다.

아르소와 다크 영지의 연합군은 해질녘이 되어서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군영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주변에 묵직하게 깔려 있자 모두는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군영의 곳곳을 살폈다.

곳곳에 신음하는 부상병들이 널렸고 전신을 피로 목욕을 한 마법사들이 부상병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뭐지? 몬스터들에게 당하기라도 한 건가?”

“엄청 다쳤는데?”

헤론 후작이 전마를 몰아 마법사들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일이냐?”

“누구십니까?”

“후작, 헤론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몬스터에게 당하기라도 한 것이냐?”

부상병들을 치료하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비쩍 마른 몸매를 지닌 마법사 하나가 그에게 대답했다.

“블러드 와이번에게 당했습니다! 한둘이 아니라 수십 마리가 달려드는 통에 그만…….”

“블러드 와이번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드래곤의 가디언으로 알려진 블러드 와이번이 틀림없었습니다.”

헤론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익히 그것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때 레이나 공주가 다가왔다. 마법사들이 다시 일제히 허리를 숙여 그녀를 맞이했다.

“블러드 와이번이 나타났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마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친 자들이 이 정도라면 죽은 자는 묻지 않아도 능히 짐작되었다.

“레이놀드 백작은 어디 있느냐?”

“지금 사령막사에서 본대와 통신을 하고 계십니다. 쉐인 공도 함께 계십니다.”

“안내해라!”

둘은 마법사의 안내를 받아 사령막사로 향했다. 적당한 곳에서 전마를 세운 모두는 군영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지가 찢겨 나간 자들과 온몸이 불에 탄 부상자들의 신음이 주변을 난무했다.

“블러드 와이번이 뭐냐?”

왕전이 연소민에게 물었다. 연소민의 얼굴이 꽤나 심각하게 굳어졌다.

“보통의 와이번과는 질적으로 다른 몬스턴데, 수백 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그것들이 나타났다니, 놀랍군요.”

“세냐?”

“흠! 중원의 고수로 친다면 구파의 장문인 정도? 하지만 놈에겐 강력한 화염공격이 있기 때문에 놈에게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군요.”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왕전의 반응에 연소민은 웃어야만 했다.

사실 이들에게 구파의 장문인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자신의 비교가 적절치 않았음을 깨달은 그녀는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부상병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신의 부대소속의 기사들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가투소의 뒷모습에서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꼬락서니를 보니 된통 당한 것 같군. 우리끼리 가볼까?”

흑야였다.

“그것도 괜찮겠지. 다만 꽤 강한 것 같으니, 우리끼리만 가는 게 좋겠어.”

담대소천이 턱 끝으로 가투소의 기사들과 아르소의 기사들을 가리키며 묵직하게 말했다. 연소민인 재빨리 나섰다.

“그건 곤란해요. 레이놀드 백작의 성격으로 단독행동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나중에 이들과 함께 가요.”

“그깟 새대가리 하나 당해내지 못한 새끼가 용납은 개뿔!”

북궁천소가 으르렁거리자 연소민은 웃으며 그를 달래었다.

“나중에 우리가 떠나면 아르소와 다크 사람들이 곤란해져요. 그러니 참으세요. 알았죠?”

“끙!”

당초, 토벌군에 합류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가 직접 오라고 졸랐어도 오지 않았을 이들이었다. 연소민이 화제를 돌렸다.

“그 블러드 와이번의 뼈가 만년한철보다 강한 것을 모르시죠?”

“그게 정말이냐?”

“그럼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물질이 드래곤의 뼈고, 다음이 블러드 와이번과 블랙 오우거의 뼈랍니다. 그것으로 검이나 도를 만들 수만 있다면 아마, 중원에선 고금제일의 명검이 탄생할걸요?”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흑야와 조윤, 담대소천도 솔깃 하는 표정이다. 그들의 속내를 짐작한 연소민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걸 얻는다고 해도 가공할 만한 기술이 현재로선 마땅하지 않아요. 물론 신의 손을 가졌다는 드워프족을 만난다면 모를까…….”

“그건 또 뭐냐?”

“난장이족인데요, 인간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이 그들이에요. 그들이라면 드래곤의 뼈를 가지고도 무엇이든 만들 수 있을 테니, 하물며 와이번의 뼈쯤이야 문제없겠죠?”

“그런 놈들도 있었나? 하여튼 요상한 세상이군. 이곳은…….”

드워프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모두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연소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엘프와 드워프는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존재들이에요. 아주 오래전엔 인간들과 같은 세상에서 살았다고 전해졌는데, 요즘은 나타난 적이 없어요.”

“그럼 그 블러드 와이번의 뼈를 얻어도 무용지물이 아니냐?”

“그건 아니에요. 비록 드워프만은 못해도 대륙엔 뛰어난 장인들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부탁하면 꽤 좋은 무기를 만들어주겠죠. 소문에 의하면 홀베른에 대륙최고의 장인이 있다더군요. 그라면 뭔가를 해낼 가능성이 높겠죠.”

왕전이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그곳은 주공께서 가신 곳이 아니냐? 몇 마리 잡아서 뼈를 발라 주공께 가볼까?”

왕전다운 말에 연소민은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 그런 말씀은 제발 다른 기사들 앞에선 하지 마세요. 호호!”

“왜?”

“아무튼 하지 마세요.”

말하면 당연히 욕이 날아올 것이다. 왕전이 무슨 닭처럼 여기는 블러드 와이번 때문에 1,500명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욕이 아니라 죽자고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그때, 조윤의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다.

“저놈, 제법 강한 놈이야.”

모두가 조윤이 응시하는 인물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흰색로브를 걸치고 기다란 지팡이를 든 노인이 모두의 눈에 잡혔다.

“대마법사, 쉐인 공이군요.”

“대마법사? 저 노인네가 케이론의 유일한 대마법사라는 그 노인네냐?”

“예. 아리안으로 지낼 때, 황궁에서 본 적이 있어요. 눈동자를 보니 더 강해진 것 같군요.”

흑야의 주변이 이내 싸늘한 한기로 채워졌다.

누구보다 마법사에 대한 증오심이 강했던 그였다. 담대소천이 흑야의 어깨를 툭 치고는 눈빛으로 그를 말렸다.

그가 발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일까? 쉐인이 이쪽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땐 이미 한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눈빛을 발한 쉐인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뒤이어 레이놀드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소민의 고운 아미가 슬쩍 찌푸려졌다.

지난날의 기억 때문에 연소민은 그를 꽤나 싫어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가투소의 기사들과 함께 모여 있던 마법사 요란이었다.

그는 레이놀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아예 등을 돌려버렸다.

“아르소의 아리안 영주가 아닌가?”

레이놀드가 연소민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흑야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그 역시 레이놀드 백작을 싫어했다.

“다른 영주님들을 기다리다 조금 늦었군요.”

“이들은?”

“레이나 공주님의 근위기사들입니다. 새롭게 임명된 분들이라 모르실 겁니다.”

“근위기사?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레이놀드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그는 하나같이 거친 분위기를 풍겨내는 담대소천 등을 보고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례하군. 인사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흐흐! 공주께서 그러시더군. 황제 폐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지.”

왕전이 험악하게 반응하자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이 대번에 붉게 물들었다. 급한 성정이라면 그도 결코 북궁천소 등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백작이다. 자신보다 높은 후작도 공주의 근위기사에겐 지휘권이나 명령권이 없다.

당연히 분을 삭여야만 했다.

“곧 출전할 것이나 준비하도록!”

연소민에게 말을 건넨 레이놀드 백작은 씩씩거리며 사령막사로 사라졌다.

“근위기사가 이럴 땐 쓸 만하군.”

“기회가 되면 놈에게 전해. 다음에 또 그런 눈으로 널 쳐다보면 눈알을 뽑아놓겠다고 말이야.”

북궁천소가 으르렁거렸다.

그는 연소민을 쳐다보던 레이놀드 백작의 눈동자에 깃든 탐욕을 놓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레이놀드 백작의 눈빛을 보자마자 달려들려고 하던 그를 담대소천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벌써 사단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꼭 전해줄게요. 그러니 참으세요. 아셨죠?”

연소민은 언제나 이들을 달래는 보모와도 같았다. 모두가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들이라 그녀는 결코 싫지 않았다. 중원의 사람들이 알면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숙부들을 둔 여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게다가 잘만하면 시아버지는…….

“훗!”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모두가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볼 때,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이 돌아왔다.

“본대에서 지원 병력이 오면 다시 토벌에 나선다고 하는군요. 그동안 좀 쉬세요.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술을 준비해 볼게요.”

“크흐흐! 좋지!”

술이란 말에 눈에서 광선을 뿜어대는 왕전과 북궁천소를 보며 모두는 실소를 머금었다.

* * *

탁!

찻잔이 흔들리며 차가 조금 밖으로 튀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조금은 화가 난 듯 보이자 진천은 조심스럽게 탁자를 더럽힌 차를 닦아냈다.

사공진무는 찻잔을 바꾸어 새것으로 가져오며 혁련천후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그는 지금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검술대회의 중단 때문이다.

중원의 무공을 익혔을 거라 의심되던 출전자, 펠론 자작에 대한 체포령이 원인이었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가 체포되기 전에는 대회를 속개할 수 없다는 국왕의 선포가 어젯밤에 있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이 목적했던 왕궁으로의 자연스러운 진입이 늦어지는 것을 뜻했고,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곤란해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에 오직 모든 것을 걸었던 혁련천후의 분노는 당연했다.

“주공! 대충 위치는 알아냈으니 은밀하게 잠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놈의 시종들을 잡아다가 물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만…….”

진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현재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혁련천후는 대답이 없었다. 팔짱을 하고서 눈을 감고 있는 그는 그 자세로 30분 동안을 아무런 말조차 없었다.

진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공진무를 쳐다봤다. 사공진무도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혁련천후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말은 꺼내지 못했다. 진천이 뭐라 말 좀 하라는 시늉을 하자 침을 꿀꺽 삼킨 사공진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공! 놈들이 중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 확실하니, 여차하면 놈들을 족쳐서 놈들의 근거지로 쳐들어가는 것도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에 어쩌면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 수도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주공! 방법이 하나 더 늘었으니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혁련천후는 여전히 눈을 뜨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둘은 그의 속내를 충분히 짐작하는 둘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혁련소가 돌아오기 전에 돌아갈 방법을 찾고자 했던 그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둘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혁련천후에겐 혁련소를 그렇게 만든 요란 제국에 대한 복수심보다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욱 절실했다.

혁련소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있다. 혁련소만큼이나 소중한 사람들이 중원에 남아 있다. 혁련천후의 또 다른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놈들이 왕궁의 감옥에 갇혔다고 했나?”

차가웠다.

30분 만에 처음 입을 연 혁련천후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예! 원하시면 밤에 잠입하겠습니다.”

“한 놈을 잡아올까요?”

“함께 간다.”

“예? 주공, 그건 안 됩니다. 그곳에 어떤 놈이 있을지 모릅니다. 자칫 사람을 해쳐선 안 되는 주공께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진무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진천의 간곡한 말에도 혁련천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준비해.”

문고리를 잡아가던 혁련천후가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 똑!

“누구시오?”

진천이 빠르게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문 앞에 룻거 후작이 서 있었다.

“전하께서 찾으시니 나를 따라오시게.”

“전하께서 왜……?”

“그걸 말해야 하는가?”

진천은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혁련천후는 이미 걸음을 놓고 있었다. 진천과 사공진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는 뒤를 따랐다.

혁련천후는 앞서 걸어가는 룻거 후작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런 일에 기사단장이 직접 나섰다면 뭔가 있겠군요.]

[……!]

그랬다.

단순히 찾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보내도 충분하다.

하지만 기사단장이 직접 올 정도의 사안이라면 단순히 자신들을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닐 거다.

그들의 예상은 다르지 않았다. 룻거 후작이 가는 방향은 왕이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사공진무와 데얀이 싸웠던 숲이 있는 쪽이었다.

혁련천후의 눈가에 차가움이 스치며 떠올랐다. 주변에 느껴지는 기운들의 수가 상당했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하는 그들은 자신들에게 기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진천과 사공진무도 그것을 간파하고는 날카롭게 눈동자를 빛냈다.

룻거 후작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조금을 걸어가자 더욱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사공진무와 데얀이 싸웠던 곳보다 훨씬 깊숙한 곳까지 그들을 걸어서 들어갔다.

“어디를 가는 것입니까?”

진천이 물었다.

룻거 후작은 대답이 없었다. 사공진무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서 올라갔다.

“우릴 어찌하려는 모양이군. 그런 것이오?”

“이곳은 홀베른이네. 너희들이 살아가는 케이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지. 그런 비열한 짓거리는 없을 것이니 그냥 따라오기만 하게.”

룻거 후작의 말에는 대단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슬쩍 이채가 떠올랐다. 다시 주변을 감지했다. 여전히 날카로운 기운들이 곳곳에서 번득였지만 결코 자신들을 노리고 뿜어내는 살기는 아니었다.

숲이 끝나고 이번엔 넓은 평원이 나타났다. 왕궁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평원이었다. 평원의 끝에 적당한 규모의 성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룻거 후작은 그곳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성으로 들어서던 셋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엘이 입구에 우뚝 선 채로 그들을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성안에서 홀베른 국왕이 걸어 나왔다. 에이미 공주도 함께였다.

“쉬는 것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어쨌든 와주어서 고맙군.”

꽤나 친근감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셋은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홀베른 국왕을 똑바로 쳐다봤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네. 자! 안으로 들어가지.”

* * *

옥을 깎아서 만든 커다란 원탁에 모두는 모였다.

진귀한 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며 실내를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모두의 찻잔은 비워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홀베른 국왕만이 찻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실내를 감돌았다.

탁!

찻잔을 내려놓은 홀베른 국왕이 잠시 모두를 느릿하게 쓸어 보았다. 에이미 공주와 룻거 후작 역시 모두를 담담한 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홀베른 국왕이 입을 열었다.

“말을 돌릴 필요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모두는 그를 직시했다.

“이곳에 드래곤, 아이아스의 레어가 있음은 그대들도 알고 있을 것이네.”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자 혁련천후와 둘은 흠칫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던 것에 내심, 꽤나 놀랐다. 홀베른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싸웠던 데얀은 바로 그곳을 지키는 수호신의 하나라네.”

그의 시선이 사공진무를 향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왕의 입을 통해 확답을 듣자 모두는 다소 흥분기를 보였다.

“그곳을 가고자 하는 목적을 알고 싶네. 물론, 그것을 가지고 자네들을 핍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음을 미리 말해두겠네. 말해 줄 수 있겠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이계에서 왔노라고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에이미 공주가 나섰다.

“당신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닌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목적을 말씀해 주세요. 결코 해를 입히지는 않을 테니까…….”

혁련천후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어떻게 아셨소?”

대답은 룻거 후작이 대신했다.

“공주께서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셨다. 그 능력으로 그대들의 본모습이 흑안에 흑발임은 진즉에 눈치 채셨지. 물론 당신도!”

그는 아리엘을 쳐다보며 말에 힘을 주었다.

여유만만해하던 아리엘이 처음으로 놀라는 빛을 보였다. 룻거 후작의 말에 혁련천후는 아리엘을 응시했다.

‘당신도……?’

아리엘에게 당신이라는 호칭을 했다.

왕국의 기사단장이 일개 검술대회의 출전자에게 붙일 호칭은 아니었다. 그는 문득 아리엘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에이미 공주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 당신들이 온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닌가요?”

“……!”

혁련천후와 진천, 사공진무는 다시 놀랐다. 아리엘이 끼어들었다.

“후후! 난, 아니야. 나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것쯤은 알겠지?”

“물론이에요.”

“대답들 해. 정말 다른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러 온 거야?”

아리엘이 셋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셋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미 공주는 잠시 혁련천후를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처럼 흑안에 흑발을 지닌 사람들은 이 세상에도 꽤 많아요. 하지만 당신들이 지닌 그런 종류의 힘을 지닌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해요. 도주한 펠론 자작이란 자도 당신들과 같은 용모에 비슷한 힘을 지녔더군요. 그리고…….”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홀베른 국왕을 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는 혁련천후가 두 눈을 부릅뜰 정도였다.

팍!

에이미 공주의 용모가 변했다.

화려했던 금발 대신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이 출렁거렸고, 보석처럼 반짝이던 벽안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새카맣게 빛났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홀베른 국왕도, 룻거 후작도 자신들과 같은 중원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많이 놀라는군요.”

“……!”

“우린 당신들을 기다렸어요. 수백 년 동안을…….”

“우리를 기다렸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감정이 흔들린 혁련천후는 자신도 모르게 중원어로 물었다. 놀랍게도 에이미 공주 역시 중원어로 대답했다.

“신의 계시라고 할까요…….”

진천과 사공진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원어를 하다니…….”

“누구냐?”

채챙!

둘의 손에 무형의 검이 쥐어졌다. 그러나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서 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리엘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혁련천후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원에서 온 것이냐?”

순간, 주변이 광포한 기운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담담함을 유지하던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 그리고 심드렁했던 아리엘의 얼굴이 급변했다.

쩌저정!

대전의 유리창이 모조리 박살이 나며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에이미 공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며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 어떻게 이런 힘을…….”

“중원에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치르륵!

천살강기로 만들어진 검이 홀베른 국왕의 목에 겨누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그가 그곳에 나타나 있었다. 검을 뽑으려던 룻거 후작을 홀베른 국왕이 제지했다.

광포한 기운에 얼굴 근육이 심하게 뒤틀렸음에도 그는 매우 침착했다. 어느새 적당한 거리 밖으로 벗어나 섰던 아리엘은 고개를 흔들며 혁련천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허허! 모든 걸 말하겠네. 그러니 이 검을 치워주겠나?”

“충분히 말을 할 상황은 된다고 보는데?”

“흠! 할 말이 참으로 많다네. 검을 목에 꽂고 그럴 순 없지 않은가.”

스슥!

검이 사라졌다.

“수작을 부린다면 이곳을 세상에서 지워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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