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30화 (30/55)

제7장

해후

700년 전, 대륙은 1차 대륙전쟁이라 불리는 100년 전쟁이 발발했다.

당대 최강의 국가라, 자타가 공인하던 케이힐 제국의 세르비언 왕국침공을 시작으로 발발한 100년 전쟁은 3곳의 왕국과 14곳의 공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그 끝을 보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대륙전쟁은 인간의 삶을 참혹한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 삶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간신히 멸망을 면한 국가들도 방어병력이 형편없이 약해진 까닭에 몬스터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살던 터전을 버리고 대륙의 곳곳으로 흩어졌다.

대륙전쟁의 당사자인 케이힐 제국마저도 간신히 몬스터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대륙은 피폐해져 버렸다. 인간세상이 생겨난 이후로 가장 암울하고 참혹한 시기를 맞은 것이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간을 시기한 신이 저주를 내린 것이다!”

“대륙전쟁은 신의 농간에 의한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을 저주했다.

결국은 전쟁의 광기에서 유일하게 비껴났었던 신성국가, 바르잔을 향해 저주의 칼날을 들이밀기에 이르렀고, 오직 신만을 모시며 살아가던 바르잔은 참혹한 저주의 칼날 아래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인간의 광기는 신의 자비를 넘어섰다.

바르잔의 국민이라면 무조건 죽이자는 법령이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공통으로 합의되었으며 참혹한 인간사냥이 시작되었다. 바르잔의 국민들은 대륙의 곳곳으로 흩어져 삶을 도모했지만 그들의 제외한 모든 국가와 국민들이 바르잔의 적이었기에 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줄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노인들은 세상을 농락한 신의 대리인이라는 명분으로 목이 잘려나갔으며 여인들은 악마의 자식을 잉태한 죄를 물어 참혹하게 죽어갔다. 신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졌던 홀베른 평원이 죽어간 수십만의 바르잔 국민들의 시신으로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홀베른 평원에 일단의 무리들이 빛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달랐다. 흑발에 흑안을 지녔으며 하나같이 신에 버금가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던 여왕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나요?”

사람들은 대답했다.

“이 세상에 마족을 제외하고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여왕이 다시 말했다.

“우리를 마족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대답했다.

“마족은 마계의 종족들이라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을 가는 인간들은 다시는 환생이 불가능한 저주의 소멸을 당하게 되니, 우리는 결코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왕에게 절을 하고는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쳤다.

그때, 사람들은 보았다.

절규하는 여왕의 모습을… 그리고 분노하던 한 노인이 무리를 이끌고 사라지던 광경을…….

몇 년이 흐르자 사라졌던 그들이 다시 홀베른에 나타났다. 전설 속의 존재라는 드래곤의 시신을 끌고 홀베른에 돌아온 그들은 그곳에 성을 세우고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곳은 언제나 구슬픈 여왕의 울음으로 가득했으며 분노한 노인의 광포함으로 인해 생명체가 다가갈 수 없는 죽음의 대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갈 만큼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졌던 전설의 몬스터들이 인간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오우거와 블러드 와이번을 선봉에 세운 몬스터군단은 겨우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려던 인간세상을 침공했다.

100년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1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인간 대 몬스터의 전쟁은 사람들을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흉포한 몬스터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 그런 몬스터들을 지배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마계의 전왕, 발록이었다.

인간세상에 발록을 막아낼 존재는 없었다.

유일하게 발록과 상대할 능력을 지닌 대륙의 초인들은 이미 대륙 전쟁 시, 서로의 가슴에 검을 쑤셔 박고 상잔해버린 뒤였다.

발록은 거침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였으며 항복해 오는 인간들마저도 가차 없이 화염으로 불살랐다. 그러나 2개의 왕국을 멸망시킨 발록은 바르잔의 대평원, 홀베른에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폭우가 멈추고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뜨던 어느 날, 성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여왕과 노인을 비롯한 일단의 존재들이 발록을 향해 걸어 나왔다.

여왕이 발록에게 마계에 자신들처럼 생긴 사람들이 있냐고 물었다. 발록은 화염의 채찍을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은 실로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계의 전왕이라는 발록이 그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분신과도 같은 화염의 채찍이 두 동강으로 잘리고 뿔이 부러진 다음에야 발록은 마계로 도주했다.

도주하면서 발록은 저주를 퍼부었다.

“마계엔 네놈들과 똑같은 마족들이 있다. 마계로 오라! 늦으면 그들은 놈들은 전부 나의 손에 죽을 것이다! 살리고 싶다면, 네가 찾고자 하는 놈들을 보고 싶다면, 마계로 오라!”

그들은 발록을 쫓아 곧장 마계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자 차원의 문이 닫혀버렸다. 돌아가지 못한 몬스터들이 대륙의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인간과 몬스터 간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 * *

“그때, 마계로 들어가셨던 분들 중, 세 분이 돌아오셨네. 우린 바로 그분들 중, 한 분의 후예들이지.”

홀베른 국왕의 이야기는 2시간을 이어져 마침내 끝났다.

“다른 분들도 마계를 빠져나왔다고 들었어요. 다만 그분들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선조께서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린 지금껏 그분들의 후예를 찾고 있었던 거예요.”

“사정이 있어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케이론 제국에 흑안의 마검사들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린 무척이나 흥분했었네. 그들이 그분들의 후예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를 원망했었지.”

국왕과 공주는 서로 말을 이어갔다. 다시 말을 하려던 홀베른 국왕이 흠칫했다.

혁련천후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공!”

진천과 사공진무 역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사공진무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분들의 이름을 알고 있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네. 하지만 그분들의 초상화는 대대손손 전해져왔다네.”

“그곳으로 나를 안내해라!”

혁련천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무엄하다!”

룻거 후작이 소리쳤다.

스슥!

룻거 후작의 목에서 핏물이 튀었다. 혁련천후의 검이 다시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가공할 속도에 아리엘은 혀를 내둘렀다.

“일어서서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란 말이다! 어서!”

혁련천후의 그러한 태도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엔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안내하겠네.”

일어서는 홀베른 국왕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혁련천후의 태도에서 뭔가를 느꼈을까? 앞서 걷는 그의 육신이 휘청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가 홀베른 국왕을 쫓아 어디론가 빠르게 걸었다.

가장 뒤쪽에서 걸어가는 아리엘은 혁련천후와 진천, 사공진무 등을 번갈아 응시하며 묘한 눈빛을 발했다.

‘설마 이 정도까지 강력한 힘을 지녔을 줄이야.’

조금 전, 이들은 케논 산맥에서 느꼈던 강력함을 초월한 기운을 순간적으로 발산했었다. 특히 혁련천후는 자신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엄청났었다.

‘인간이 이런 강력함을 지닐 수도 있는 거야? 그럼 곤란한데…….’

아리엘의 눈동자는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케논 산맥은 말이 산이지 그 넓이와 길이는 어지간한 왕국의 영토를 능가한다.

두 제국을 가로지르고 세 개의 왕국이 산맥에서 발원된 강을 젓줄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대륙 최고의 산맥이자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그곳이 참혹한 피바람으로 휩싸였다. 제국전쟁의 전운마저도 소멸시켜 버린 양제국과 몬스터간의 처절한 전쟁에 대한 소문은 바람을 타고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전설 속의 몬스터가 출현했음이 전해지자 세상은 들끓었다.

“성지를 침범한 인간에 대한 드래곤의 복수다!”

“마계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다.”

“드래곤의 유물을 지키려는 가디언과의 전쟁이다.”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모험을 즐기는 자들이 대륙 곳곳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케이론 제국과 요란 제국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했다.

각각의 제후국들이 제국 간의 전쟁중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케논 산맥에 전설로 떠돌던 드래곤 아이아스의 레어가 있다고 확신하고는 모든 국가가 공동으로 던전탐사에 착수하자는 공동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특정국가가 단독으로 드래곤의 유물을 차지한다면 대륙 간의 힘의 균형이 깨어진다는 불안감이 모든 제후국들의 공통된 걱정거리였다. 특히 거대제국인 요란이나 케이론이 드래곤의 유물마저 얻어간다면 그들은 대대손손 제후국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불만이자 걱정이었다.

“전쟁을 중단하고, 케논 산맥의 몬스터 토벌에 모든 제후국들도 참전하게 하라. 얻어진 이익은 참전한 모든 국가가 공평하게 나눈다.”

요란의 제후국과 케이론의 제후국들이 발표한 공동의 성명은 양제국의 몬스터 토벌이 시작되고 고작 10일 만에 나온 것이었다. 당대의 통신수단이 얼마나 발전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그것은 양 제국의 지배자들에게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제후국들은 발빠르게 정보를 교환하며 양 제국보다 한 발 앞선 움직임을 보였다. 이미 대륙엔 케이론과 요란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죽은 자들의 머릿수까지도 정확하게 퍼져 있었다. 모두가 제후국들이 일부러 정보를 흘린 탓이었다.

드래곤의 레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양제국의 황제들은 대륙의 여론이 그렇게 흘러가자 어쩔 수 없이 한시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고, 몬스터 토벌도 모든 제후국들이 합류할 때까지 작전을 중지해야만 했다.

최초, 케이론의 침공으로 시작된 케논 산맥의 전운은 엉뚱하게도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뒤늦게 전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700년 전에 벌어졌었던 인간 대 몬스터의 처절했던 10년 전쟁을…….

* * *

케논 산맥의 정상.

언제나 만년설로 가득했던 이곳에도 폭우는 쏟아졌다. 태초이래로 이곳에 눈이 아닌 비가 내렸던 적은 단 두 번뿐이었다.

700년 전이 첫 번째였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쩌저저적!

뇌전이 몰아치자 폭우에 녹아들던 만년설이 거대한 눈사태를 만들어내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쓸고 내려갔다.

크르르…….

어디선가 괴수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두 눈만 시뻘겋게 드러난 거대한 아이스 오우거가 하늘을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인간과 참혹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블랙 오우거들보다 훨씬 거대한 육신을 지닌 그것은 뇌전이 번득일 때마다 낮게 으르렁거렸다.

다른 몬스터들은 없었다. 당연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라면 이곳에서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다. 블랙 오우거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정상의 아이스 오우거는 달랐다. 제법 오랜 시간 전부터 이곳을 지켰건만 시뻘건 불길처럼 일렁거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광포했으며 삶의 윤기로 번득였다.

꽈르릉…….

쩌저저저적!

“크릉!”

아이스 오우거가 깜짝 놀랄 만큼의 강력한 뇌전이 천지간을 울리며 허공에서 강력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오우거가 거대한 두 팔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정상을 백색으로 물들인 빛의 폭발은 한동안 이어졌다.

쩌저저정!

공간이 왜곡될 때 발생하는 공명이 울리고 빛 속에서 사람의 팔이 쑥 튀어나왔다. 뒤이어 다른 팔이 나오고 붉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릉…….”

아이스 오우거의 눈에 두려움의 빛이 나타났다.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사람처럼 땅에 고개를 박고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시종의 모습과도 같았다.

“으랏차!”

청아한 음성과 함께 인간의 형태를 갖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의 육신이 더욱 낮게 숙여졌다.

“크르릉…….”

빛이 사라지며 나타난 존재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인간이었다.

눈처럼 부신 은발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 어깨엔 황금색 검을 좌우로 교차했으며 전신은 눈동자만큼이나 반짝이는 흑색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네가 나를 마중 나온 모양이구나.”

아이스 오우거의 어깨를 만져 준 그는 허리를 쭉 펴고는 케논 산맥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하! 역시 공기는 인간세상이 최고야. 그렇지 않냐?”

“크르릉…….”

사납게 쏟아지던 폭우가 뚝 그쳤다.

그리고 이내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발청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인의 그것처럼 상큼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웠어! 정말 고마웠다고!”

그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허공이 울렁거리며 요동쳤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희미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스 오우거보다 더욱 거대한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조심하세요. 주인님!”

굵직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하하! 너도 조심해. 아마 나 때문에 널 괴롭히는 놈들이 많을 거야. 하지만 넌, 강하니까 충분히 견뎌낼 거야. 그렇지?”

“그럼요. 주인님! 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부디 조심하세요.”

“알았어! 우린 나중에 또 볼 거야. 그럼 나, 간다! 가자!”

은발청년과 아이스 오우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상에서 사라졌다. 요동치던 허공도 이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 * *

지독하게도 쏟아 붓던 폭우가 갑자기 뚝 그쳤다.

하지만 이내 폭설이 쏟아지자 케논 산맥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과 왕국, 공국에서 모여든 연합군들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젠장! 도대체 며칠이 걸리는 거야? 제국에서 텔레포트까지 지원했으면 빨리빨리 올 것이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러게. 하여튼 욕심들은 많아서…….”

“홀베른과 아소보만 오면 곧 토벌이 시작된대.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다.”

“요란 제국 쪽은 다 모였다더냐?”

“그곳도 아직 몇 곳에서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래. 뭐, 사실 우리야 토벌이 늦을수록 좋은 것 아니냐? 괜히 일찍 출전하면 일찍 죽기밖에 더하겠냐?”

“하긴…….”

제후국들이 아직 다 모이지 않은 까닭에 몬스터 토벌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케이론은 홀베른과 아소보 왕국이 지금껏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각국에서 모여든 기사들로 케이론 제국의 본영은 매우 북적거렸다. 수가 거의 4만에 육박하자 어쩔 수 없이 주변 숲을 쳐내고 그곳에 임시로 군막과 시설물들을 설치해야만 했다. 다국적군이 모여들자 군율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케이론의 레이놀드 백작이 사령관을 맡고는 있었지만 제후국의 기사들은 그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지휘체계가 아직 일원화되지 않은 까닭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죽어버리는 기사들도 생겨났다.

때론 국가 간에 집단 패싸움도 발생하곤 했다.

레이놀드 백작이 통솔에 애를 먹고 있을 때, 그런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더욱 크게 불을 붙이는 재주를 지녔는데, 바로 왕전과 북궁천소였다.

벌써 그들의 부추김에 의해 벌어진 결투는 수십 건을 넘어갔다.

지금도 케이론 제국의 기사와 알베르 공국의 기사가 쌍방 간에 명예를 손상시켰다며 목숨을 건 결투를 펼치고 있었는데, 왕전이 심판을 보고 있었다.

깡! 깡!

“죽여! 오만한 케이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려!”

“감히, 제국의 기사를 모욕하다니! 목을 잘라버려!”

양 기사를 응원하는 기사들이 거친 소리를 쏟아냈다. 한편에선 왕전이 팔짱을 하고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윽! 졌다!”

케이론의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패배를 시인했다. 견갑 사이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운이 없게도 흉갑과 견갑 사이의 미세한 틈새를 검에 찔린 것이다.

“사과해라!”

알베르 공국의 기사가 검으로 목을 겨눈 채, 소리쳤다.

“패배를 시인한 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 아닌가? 또 무슨 사과를 바라는 거냐?”

“흥! 넌, 우리 알베르 공국의 모든 기사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사과해라!”

패배한 기사가 머뭇거렸다. 그때 주변에서 거친 소리들이 쏟아졌다.

“뭐야? 지금 집단전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알베르 공국!”

“못 할 건 또 뭐냐? 지금 당장 붙어볼까?”

“이런 뭐만 한 자식들이, 너희들 당장 이리와!”

“뭐야? 이런 개 같은 새끼들이! 죽고 싶어?”

귀족이 대부분인 기사들의 입에서 뒷골목 건달들이나 해댈 욕설이 마구 터져 나왔다.

패싸움의 분위기로 이어지자 왕전은 묘한 표정으로 양측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가 불을 붙이기만 하면 꽤 재밌는 볼거리가 만들어진다. 왕전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그때, 카루가가 저만치에서 왕전을 불렀다.

“빨리 오래!”

싸움을 붙이려던 왕전이 뒤를 돌아봤다.

“누가?”

“소천 아저씨가 빨리 오랬어!”

소리치는 카루가가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왕전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패싸움만큼 좋은 구경거리는 없다. 조금 있으면 벌어질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 왕전은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고는 빠르게 걸음을 놓았다.

* * *

군막으로 들어서던 왕전이 흠칫했다.

하나같이 침울한 표정들을 하고는 군막에 마련된 침상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는데, 침상 위에 연소민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제가 왜 저래?”

“앉아라.”

“무슨 일이냐니까?”

왕전이 다급하게 다그치자 담대소천이 대답했다.

“조금 전에 갑자기 쓰러졌다.”

“쓰러져? 왜? 멀쩡하던 얘가 왜 갑자기 쓰러진단 말이냐?”

“우리도 영문을 모르겠다.”

연소민의 파리한 안색은 핏기라곤 없었다. 카루가는 그녀가 그냥 잠을 자는 줄로 알았던지 담대소천의 말에 이내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녀를 진찰하던 우드가 난감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원인을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사공진무가 없어서 그나마 약간의 의술을 익힌 그가 다급한 마음에 나서본 것이다. 조윤이 우드에게 물었다.

“마법치료사들 말고 진료를 할 줄 아는 자들이 있느냐?”

“의사들이 있습니다만 저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보통, 커다란 병은 마법으로 치료하는 것이 수십 년 전부터 횡행했기 때문에 의사들은 간단한 병세를 보는 것에만 이용하는 실정이라…….”

흑야가 요란을 보며 물었다.

“뭐, 아는 작자라도 없나?”

“오래전에 백마법사들의 모임에서 탈퇴한 터라 아는 치료사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도움이 못 돼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흑야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대마법사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지! 그 늙은이가 있었군. 이봐! 우드, 가서 공주 좀 데리고 와.”

조윤의 지시에 우드는 빠르게 군막을 나갔다.

잠시 후, 레이나 공주가 헤론 후작과 함께 들어섰다.

“어머! 아리안! 아리안이 왜이래요?”

레이나 공주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모른 체했다. 그동안 상당한 정이 들었던 까닭이다. 조윤이 침중한 어조로 설명하자 그녀는 직접 대마법사 쉐인을 데리고 와서 연소민의 상세를 살피게 했다.

우드는 그가 오기 전에 이미 밖으로 도망갔다. 흑마법의 기운을 들킬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군막에 들어선 대마법사 쉐인의 얼굴이 다소 구겨졌다.

이들이 레이나 공주가 특별히 아끼는 근위기사들임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허리조차 구부리지 않으니 내심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쉐인 공! 친자매처럼 지내는 아리안이에요.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하니 공께서 좀 봐주셔야겠어요. 부탁해요.”

“흠! 알겠습니다.”

쉐인은 대뜸 연소민의 손에 자신의 손을 밀착시켰다.

스캔을 통해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쉐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5분을 지나 10분이 되어갈 즈음 쉐인이 손을 뗐다.

“어떤가요?”

“흠! 생소한 증셉니다. 어떤 충격에 의해 몸 안의 마나가 엉망으로 얽혀 있습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곧 깨어날 것입니다. 다만…….”

쉐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대뜸 물어보려던 왕전의 어깨를 조윤이 잡았다. 레이나 공주가 다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상한 기운이 섞여 있습니다. 마나와는 다른 것인데… 혹시, 특이한 술법 같은 것을 익힌 적이 있습니까?”

“그건, 나도 몰라요. 그게 위험한 것인가요?”

“그건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나는 다른 기운과는 융합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지금보다 더한 상태로 두 개의 기운이 융용이 되었을 경우 어떤 형태로 변화가 올지는 그때 가봐야 알 뿐입니다.”

“지금 당장은 별 이상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쉐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털었다.

그는 조금은 불쾌한 기색으로 담대소천 등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오만함은 곧 공주님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것이니, 앞으로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주변에서 말들이 많아. 적어도 상위귀족들에겐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갖추는 것이 마마를 위한 길임을 명심하게!”

그 말을 끝으로 쉐인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가 나가자 밖에 숨었던 우드가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그를 보고는 요란이 피식 웃었다.

조윤이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한 기운이란 아마도 신교의 마공을 연성할 때 발생하는 마기를 말하는 것이겠군. 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흠! 이거 잠깐이지만 무척 놀랐잖아. 하하!”

“그게 아니면 어쩌지?”

“그게 아니라도 곧 진무가 돌아오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흐흐! 그럼 이제 괜찮은 거냐?”

모두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사실 연소민은 이제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로 부각되어 있었다. 혁련소의 연인이기보다는 정말 친조카 이상의 정이 모두에게 스며든 까닭이었다. 그 험악하고 사나운 북궁천소와 왕전도 그녀 앞에선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을 정도로 모두는 그녀를 아꼈다.

레이나 공주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삭막한 황궁에서만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이들의 정이 넘치는 교감이 무척 부러웠다.

“부러워요. 정말…….”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헤론 후작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어린다. 누구보다 그녀의 속내를 잘 이해하는 그였다. 왕전이 레이나 공주를 보며 씩 웃는다. 그는 눈짓으로 헤론 후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흐흐! 거, 제법 괜찮은 양반이 사시사철 옆에 딱 붙어 있는데 부럽긴…….”

“그런가요? 그럼 저도 행복한 사람인가요?”

“충분히…….”

헤론 후작이 머쓱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은 레이나 공주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 토벌이 재개될 것 같아요. 미리 준비들 해두세요.”

“홀베른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소?”

“언제까지 기다릴 순 없어요. 다른 지역의 몬스터들이 합류하기 전에 빨리 끝내는 게 좋겠죠. 그리고 숙부들의 부대편성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레이놀드 백작은 공국의 기사들과 함께 편성하고자 하더군요. 숙부들 생각은 어때요?”

담대소천이 나섰다.

“우리만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렇게 되면 지휘망이 너무 분산되어서 곤란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10개 부대 정도로 나뉠 가능성이 높아요. 물론 군영을 지킬 방어병력을 제외한 숫자예요.”

“우리가 지휘를 받아야 하는 거요?”

북궁천소의 거친 질문에 레이나 공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해요. 근위기사들은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명령을 내릴 지휘권도 없어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높은 작위를 내릴 것을 그랬어요.”

“알았소. 그냥 공주께서 적당한 부대에 편성시켜 주시오. 가급적이면 똑똑한 놈이 이끄는 부대에 넣어주시오. 답답한 놈은 성질이 나서… 킁!”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요.”

연소민을 다시 살펴본 레이나 공주는 헤론 후작을 대동하고 군막을 벗어났다. 왕전이 심드렁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짐승을 때려잡는데 작전이 무슨 필요가 있다고 이 지랄들이냐? 젠장!”

“짐승도 짐승 나름이니까 그렇지.”

“이곳의 짐승들은 지휘관이 있어서 명령을 받고 움직인다 하더냐? 그냥 보이는 족족 때려잡으면 그만 아니냐! 작전은 개뿔!”

지켜보던 요란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놈들은 지능이 꽤 뛰어납니다. 어쩌면 놈들을 부리는 지휘관이 있을 가능성도 높고 말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런 일이 또 있었는데, 그땐 인간세상이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지요.”

“아주 오래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하하! 제가 재밌는 전설을, 아니 참혹한 전설을 말씀해 드리지요.”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요란을 쳐다봤다.

물을 한 잔 들이켠 요란은 그때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 대 몬스터 간의 10년 전쟁에 대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수정으로 만들어진 유리관은 마법방어막의 보호 아래 세상에서 가장 음기가 강하다는 홀베른 왕궁의 지하제단에 놓아져 있었다.

수정관은 두 개였다.

주변이 뿌연 수증기로 가득했다. 천연적으로 부패를 막아주는 음기의 결정체가 수정관의 주변을 떠다니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수정관 앞에 혁련천후가 서 있었다.

진천도, 사공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만이 홀로 선 채 수정관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지독한 슬픔이 그의 전신을 둘렀다.

가볍게 흔들리는 어깨는 수정관을 쓰다듬은 손길까지 전해졌다.

뚝!

수정관 위로 맑은 액체가 떨어졌다.

액체는 수정관 안에서 잠을 자듯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잠시 흐려놓더니 이내 바닥으로 미끄러져 흘렀다.

아름다웠다.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여인들은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들의 머리맡에는 붉은색 수실이 달린 황금색 구슬과 푸른색 구슬이 놓아져 있었다.

“생일 선물이오.”

“어머,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흥! 나는 없어요?”

“당신은 파란색이 어울려서…….”

“어머! 이게 더 예쁘다! 호호호!”

혁련천후의 귓속으로 여인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는 하염없이 맑은 액체를 쏟아냈다.

그의 무릎이 서서히 바닥으로 향했다.

단 한 번도 굽혀본 적이 없었던 그의 육신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 *

진천과 사공진무는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도를 쥐고서 두 눈을 부릅뜬 사내가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흑발은 사자의 그것처럼 늘어져 있었고 꽉 다문 입술은 강인한 사내의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금방이라도 대도를 움직일 것만 같은 사내, 그러나 사내는 수정 벽면에 갇혀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다.

“산악 형님! 진천입니다! 진천이 여기 있습니다! 형님!”

“형님! 그 안에서 뭣하십니까? 당장 나와서 주공께 인사를 드려야지요! 형님!”

피눈물을 쏟아내며 둘은 절규를 토해냈다.

그랬다.

수정 벽면의 사내는 바로 관산악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 안에 있단 말인가. 그런 그들의 뒤에는 홀베른 국왕과 에이미 공주, 그리고 룻거 후작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수정 벽면의 사내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 * *

요란 제국의 황태자, 카르스는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해 온 자들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시커먼 묵빛 갑주를 걸친 그들은 모두 다섯, 하나같이 칙칙한 죽음의 냄새를 발산하고 있었는데, 바로 헤론 후작을 사로잡았던 크로우기사단의 단원들이었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대들이 있으니 이젠 블랙 오우거도 두렵지 않군.”

“언제 출전합니까?”

“그대들이 왔으니 당장 가야지 않겠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카르스와는 달리 폭스 후작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크로우기사단을 응시했다. 크루즈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우기사단과 아이언기사단, 두 세력 간의 앙금은 요란 제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아이언기사단은 황태자 직속이고 크로우기사단은 황제직속이다. 어쩌면 차기 황권을 노리는 카르스의 입장에선 크로우기사단이 가장 껄끄러운 정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몬스터 토벌에 끌어들인 이유는 목적이 있어서였다.

물론 카르스만이 알고 있는 목적이다.

“일단은 내일까지 쉬도록 해. 이들을 군막으로 안내하게! 크루즈!”

“따라오시오!”

시큰둥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는 크루즈 백작을 차갑게 노려본 크로우기사 단원들은 카르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를 따랐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폭스 후작이 물었다.

“전하! 놈들을 끌어들일 필요까지야 있습니까? 마법병단을 보강하고 제후국에서 합류하는 마스터들만 있어도 토벌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후후! 아군의 피해를 줄이면 그것으로 득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이야 협정을 맺었다지만 케이론은 반드시 붙어야 할 적이니, 전력손실을 최소화해야지요.”

“놈들을 직접 이끄실 생각이십니까?”

“선봉에 세울 생각입니다. 블랙 오우거의 사냥에 말이지요. 후후후!”

차갑게 웃는 카르스, 그를 바라보는 폭스 후작의 눈빛은 꽤나 복잡했다.

언제나 그는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자신과는 한마디 상의조차 없이 황제에게 크로우기사단의 지원을 요청할 줄은 몰랐었다.

황태자는 자신보다 더 크로우기사단을 싫어한다. 어떨 땐, 증오심마저 비추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크로우기사단을 스스로 불러들였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건지…….’

* * *

“쿠오오…….”

오우거의 울부짖음이 어둠에 잠긴 케논 산맥을 흔들었다. 울부짖음은 옹고르 분화구가 위치한 방향에서 울렸다.

퍽!

“꾸어억!”

울부짖음은 이내 참혹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망치! 큰놈들만 죽여!”

“크르릉……!”

오우거들의 울부짖음 사이로 낭랑한 인간의 목소리가 섞였다. 울창한 수림 가운데로 거대한 오우거의 육신이 떨어졌다. 동시에 거대한 발이 쓰러진 오우거의 가슴을 사정없이 내려밟았다.

“크어어…….”

가슴이 함몰이 된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축 늘어지는 그것은 놀랍게도 블랙 오우거였다. 그런 블랙 오우거를 밟고 선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 바로 케논 산맥에서 은발청년을 마중했던 순백색의 아이스 오우거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블랙 오우거는 모든 오우거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최강의 몬스터다. 그런 블랙 오우거를 먹이사슬의 하위에 있는 아이스 오우거가 죽여 버린 것이다. 놀람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이스 오우거의 거친 손짓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쓰러지자 주변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주변에 쓰러져 있는 6구의 블랙 오우거의 시신이 보였다.

모두가 가슴이 함몰되어 죽어 있었다. 아이스 오우거에 의해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 숲 속에서 은발청년이 뛰어나왔다.

“하하! 역시 망치구나! 잘했어!”

크르르…….

청년의 칭찬에 아이스 오우거가 머리를 긁적이는 놀라운 광경이 이어졌다.

은발청년의 맑은 눈동자가 주변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신비한 빛을 뿌렸다.

“흠! 도망간 놈들을 어쩐다? 블러드 와이번도 잡아야 하는데…….”

드래곤의 가디언이라 불리는 최강의 몬스터 사냥꾼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는 두려움의 대상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크르릉…….”

아이스 오우거가 고개를 치켜들고 으르렁거렸다.

상공을 선회하는 시커먼 물체들, 블러드 와이번이었다. 청년도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흠! 제비가 올 때까지 저놈들은 살려두자고. 그동안 저 시커먼 놈들을 모조리 처치하고 놈을 찾자, 망치! 최대한 빨리 끝내고 아버지께 가자. 하하!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해 드려야지.

“크르릉…….”

“아니, 먼저 아버지께 가야 할까? 어쩌면 어머니들의 행방을 알아내시고 슬퍼하실 수도 있을 텐데…….”

휘이잉!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청년의 은발을 쓸고 지나갔다.

혁련소!

바로 그였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흑발이 은발로 변해 있었으며 얼굴도 여인의 그것처럼 새하얗게 바뀌어 있었지만 틀림없는 혁련소였다.

“흠!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망치! 가자!”

“크릉!”

혁련소가 숲 속으로 뛰어들자 망치도 거대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신속한 몸놀림으로 뒤를 따랐다.

* * *

케이론 제국의 토벌군은 1만에 달했다.

10개 부대로 나뉘어 케논 산맥의 남서쪽 능선을 타고 오르는 그들에게 몬스터가 아닌 다른 장애가 발생했다.

며칠 동안 쏟아진 폭우에 설상가상으로 폭설이 덮쳐 꽁꽁 얼어버리자 대지는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특히 가파른 지역이 많은 산의 지형 탓에 옹고르 분화구로 향하는 토벌군의 이동속도는 매우 느렸다.

마법사들이 얼어버린 길을 녹여내느라 분주히 움직였지만 그 넓은 곳을 녹이기엔 한계가 있었다. 출발한 지 하루가 지났음에도 그들은 옹고르 분화구를 10킬로나 남겨두고 밤을 맞아야 했다.

얼어버린 대지가 발산하는 한기는 정상의 온도만큼이나 주변을 차갑게 몰아쳤다. 떨어진 온도는 기사들의 갑주를 사정없이 얼렸고, 갑주가 발산하는 싸늘한 한기를 참아내기란 상당한 고역이었다.

적당한 분지를 찾아 1차 군영을 세우고 급히 천막을 쳤지만 정상에서 몰아치는 회오리바람 때문에 날아가기가 일쑤였다. 비교적 체력이 약한 기사들은 벌써 정상적인 움직임이 힘들 정도로 녹초가 되었고 지독한 한파에 쓰러지는 기사들도 속출했다.

그곳에 담대소천 등도 있었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헤론 후작의 부대에 합류했다. 레이나 공주가 레이놀드 백작에게 간신히 허락을 얻어낸 결과였다.

다른 부대들과 1시간 거리에서 이동 중인 그들 역시 지독한 한파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공으로 육신주변을 무형의 강기로 두른 담대소천 등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다른 기사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워낙 매서운 추위 때문에 발의 무감각을 호소하는 부상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헤론 후작은 비교적 숲이 울창한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 군영을 차리기로 작정하고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무를 베어 바람을 막고, 구덩이를 파고 모닥불을 피워라! 서둘러라!”

배속 받은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어서 파여지지 않는 땅을 화염계열의 마법으로 녹여 그곳에 기둥을 박고는 재빨리 천을 덮었다. 숲 속이라 매서운 바람에 의해 군막이 날아가는 경우는 없었다.

다른 부대에 비해 절반 정도의 병력인 까닭에 제법 빠른 시간에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군막의 설치가 끝났다.

담대소천 등도 제법 큰 군막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모두 모였다. 중앙에 구덩이를 파고 모닥불을 피우자 온기가 돌았다.

“괜찮으냐?”

담대소천이 연소민을 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생각보다 수척한 모습은 아니었다. 두터운 털옷을 걸친 그녀는 모닥불 앞에서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느라 손이 분주했다.

이 세상에서 수프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말린 육포를 섞어 끓여내는 것으로 전쟁이나 훈련 시에 기사들이 즐겨 애용하는 요리였다. 고소한 냄새가 군막 안을 가득 채우자 모두는 없던 시장기까지 생겨났다.

카루가도 입맛을 다시며 연소민의 옆을 바짝 붙어 있었다. 연소민은 요즘 들어 음식을 조금씩 먹는 버릇을 들인 카루가에게 가장 먼저 요리를 떠 주었다.

몰래 가져온 술을 꺼낸 왕전 등은 요리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작전 중의 음주는 군법에 회부될 만큼의 중죄지만 그들이 어디 그런 것에 신경 쓸 존재들인가.

어지간해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연소민도 몇 잔을 마셨다. 요란 역시 한 잔을 털어 넣고는 오만상을 썼다.

“크윽!”

“쯧쯧! 너희, 마법사는 무슨 재미로 사냐? 술에다 여자까지도 금한다며?”

“이런 맛이라면 안 먹는 게 행복하겠군요. 크으…….”

“호호! 우드 님도 한 잔 드려요?”

우드는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모두가 피식 웃었다.

그때 레이나 공주가 군막을 젖히며 들어섰다.

“흠! 냄새가 좋군요. 나도 한 잔 줘, 아리안.”

그녀는 앉기가 무섭게 술잔에 술을 채우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거푸 석 잔을 마신 그녀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추위 때문에 작전이 곤란하게 되었어요. 요란 측도 꽤나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전령을 보냈는데 추위가 가시면 그때, 연합작전으로 옹고르 분화구를 쓸어버리자고 하더군요.”

“이깟 추위 때문에 작전을 연기하다니, 웃기는 놈들이군.”

“숙부들이나 마스터들은 괜찮지만 다른 기사들은 그렇지 못해요. 게다가 이 정도의 추위라면 몬스터들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괜히 먼저 올라가서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요.”

레이나 공주는 심드렁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왕전과 북궁천소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제는 그들의 거친 태도가 꽤나 익숙해진 그녀는 오히려 그런 태도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말수가 적은 흑야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우린 별도로 움직이겠소.”

그 말에 레이나 공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그 부분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흑야였다. 흑야가 담대소천을 응시했다.

담대소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사전에 정찰 정도는 해둘 필요가 있겠지. 어차피 이 정도의 강추위라면 몬스터들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날이 풀리기 전에 우리가 옹고르 분화구에 다녀오겠소. 물론 우리가 출발한 다음에 날이 풀린다면 그곳에서 합류하면 될 테니까…….”

“너무 위험해요!”

레이나 공주가 뾰족하게 소리쳤다. 흑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런 사냥놀음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그들은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에요. 드래곤의 가디언을 지냈다고 알려진 무지막지한 힘을 지닌 최상위몬스터가 블러드 와이번과 블랙 오우거예요. 마스터도 먼저 맞으면 목숨을 잃어요. 그냥 날이 풀리면 부대와 함께 가요.”

흑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희들은 술이나 마시고 있어. 나 혼자서 갔다 오겠다.”

“새끼! 성질머리하고는…….”

남은 술을 몽땅 털어 넣은 왕전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자 북궁천소도 뒤이어 일어섰다. 조윤까지 일어섰으나 담대소천은 일어서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벗들에게 눈짓으로 연소민을 가리켰다. 뜻을 눈치 챈, 흑야가 연소민에게 시선을 주었다.

“갔다 오마.”

“조심하세요. 숙부님들…….”

“흐흐! 놈들 이빨로 멋진 목걸이를 만들어주마.”

군막을 젖히자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밖은 또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넷은 이내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요란이 벌떡 일어섰다.

“저도 함께 다녀오지요. 아무래도 마법사 하나는 있어야 모양이 서지 않을까요? 하하!”

담대소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요란은 우드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재빨리 눈보라 속으로 뛰어갔다.

레이나 공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정말 못 말릴 사람들이군요.”

그때, 연소민의 무릎에 얼굴을 대고 잠을 자던 카루가가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군막을 둘러보던 카루가는 넷이 보이지 않자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다 어디 갔어?”

“놀러갔다!”

레이나 공주의 뾰족한 대답에 카루가는 인상을 쓰며 입을 삐죽거렸다.

“쳇! 나도 데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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