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의문의 괴물체
다음 날 아침, 기온은 오히려 더 떨어졌다. 밤새 내린 눈은 군막의 중간까지 덮었는데, 여전히 엄청난 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툭!
군막을 젖히자 쌓였던 눈이 우수수 떨어지며 우드의 머리를 하얗게 덮었다. 눈을 털어낸 우드는 주변을 살폈다.
“휴! 많이도 내렸군.”
이른 시간이라 군막 밖으로 나온 기사들은 없었다.
“춥긴 하지만 멋진데?”
군막의 천장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묘한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잠시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우드는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눈을 헤치고 으슥한 곳으로 걸었다.
가슴까지 푹푹 들어가는 눈길이 귀찮았던지 마나를 끌어올려 일거에 녹여버린 그는 절벽 밑으로 가서는 바지를 끌어내렸다. 몽롱한 표정으로 볼일을 본 우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군막으로 향했다.
“으흐! 불알이 꽁꽁 얼었어.”
그곳이 조그맣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린 우드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가늘게 한 그는 건너편 봉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게 뭐지?”
건너편 봉우리에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워낙 먼 거리에다 눈까지 내리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은 틀림없었다.
“엄청나게 큰데, 도대체 저게 뭐야?”
그때였다.
군막 안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루가였다.
“왕자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조금 더 주무시지… 응?”
카루가가 이상했다.
자신이 쳐다보던 건너편 봉우리를 보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갈 때 카루가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놈이 왔어……!”
“놈? 놈이라뇨?”
“전왕! 발록의 스승, 켄빌! 그 나쁜 놈이 왔어.”
“바, 발록이라고요?”
기겁을 한 우드가 벼락같이 고개를 돌려 건너편 봉우리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움직이던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카루가는 그것을 보고 마계의 전왕, 발록의 스승이라고 했다. ‘전설 속의 존재, 발록에게 스승이 있었단 말인가?’
우드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때, 카루가의 작은 육신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왕자님!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카루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여전히 몸을 떨며 건너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진난만함으로 가득했던 눈동자도 서서히 붉은 광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저놈은 스스로 문을 넘어올 수 없어. 그렇다면 누군가가 넘어올 때… 형이야! 형이 온 거야! 형이 왔어!”
“왕자님!”
콰앙!
우드가 그를 잡으려고 뛰어 올랐으나 카루가의 육신은 이미 건너편 봉우리로 날아가고 있었다. 놀란 우드는 황급히 군막으로 뛰었다.
그때, 군막이 젖혀지며 담대소천이 나왔다.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투구까지 쓴 그를 보고 우드는 흠칫했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던 까닭이다. 담대소천의 심유한 눈길이 우드를 향했다.
“옹고르로 가서 친구들을 불러와. 난, 카루가를 따라가마.”
“예엣?”
“서둘러!”
* * *
추위가 가셨다.
요란 제국의 카르스 황태자는 당초 작전을 변경해, 소수 정예만을 거느리고 움직였다. 전공을 세우지 못함을 염려한 제후국의 기사들에게 공평한 분배를 약속한 카르스는 마법병단과 크로우기사단, 아이언기사단, 그리고 제후국에서 온 마스터 급의 강자들만을 대동했다.
제후국의 요청으로 파견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수준이 낮은 대부분의 기사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괜히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으면 사령관인 카르스에게 모든 책임이 몰린다. 그것을 꺼린 카르스는 남은 기사들을 크루즈 백작에게 맡기고는 빠르게 옹고르 분화구를 향했다.
추위가 가셨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산은 눈과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마스터의 반열을 훌쩍 넘어선 강자들이기 때문에 지형은 그다지 장애가 되지 못했다.
선두에서 길을 뚫던 아이언기사 단원 하나가 소리쳤다.
“와이번입니다!”
모두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오만한 몸짓을 보이며 허공을 선회하는 와이번 떼가 보였다.
“저놈들이 케이론을 작살냈다는 블러드 와이번입니다!”
폭스 후작이 낮게 말했다.
마법사들은 혹시 모를 화염공격에 대비해 카르스의 주변을 둘렀다. 대마법사 율튼의 지팡이는 강력한 마나를 이미 두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공격을 가할 태세였다.
크로우기사 단원 하나가 등에서 뭔가를 끌어냈다.
창!
자그마한 작대기가 쇳소리를 내며 길게 늘어지자 끝이 삼각형 모양으로 된 랜서로 변했다. 랜서를 꺼내 든 이유를 짐작한 카르스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선공을 하려는 건가?”
“……!”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로우기사 단원에게 카르스는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먼저 공격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극하는 일을 없어야 할 것이네.”
랜서를 움켜쥔 단원이 자신들의 수장을 흘긋 쳐다봤다. 크로우기사단의 부단장인 아벨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제야 단원은 랜서를 본래의 크기로 접어 등에 걸쳤다.
전혀 공손함이라곤 보이지 않자 폭스 후작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카르스가 눈빛으로 폭스 후작을 말리고는 성큼 걸음을 놓았다.
“케이론도 지금쯤이면 분화구 근처까지 이동했을 테니 서두르지!”
모두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카르스 황태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아벨의 눈빛이 묘했다.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마침 자신을 돌아보는 폭스 후작과 눈빛이 마주치자 아벨은 사악하게 씩 웃었다.
폭스 후작의 얼굴 근육이 뒤틀렸다.
“앞을 보고 걸어야지. 그러다가 넘어지겠어.”
아벨의 비꼬는 말투에 폭스 후작은 그를 사납게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이언기사단과 크로우기사단은 조금 떨어져서 이동했다.
잔뜩 신경을 쓰는 아이언기사단에 비해 크로우기사단원들은 그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간혹 허공을 응시하며 섬광을 발할 뿐이었다.
거친 능선을 넘어서자 옹고르 분화구를 두른 절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하!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케이론이 먼저 도착했나 봅니다.”
“약은 놈들!”
카르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이곳은 대륙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누가 더 많은 전과를 세우냐에 따라 제국 간의 자존심이 엇갈린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카르스는 자신들이 한 발 늦었음에 짜증이 솟았다.
그가 말도 없이 몸을 날렸다. 이미 달려가면서 검을 뽑아 들고 오러까지 품었다. 폭스 후작이 뒤를 따르자 아이언기사단도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후후! 저러다가 블랙 오우거에 머리통이라도 부서지면 어쩌려고 저러나…….”
“대장! 우리도…….”
“됐다! 그냥 걸어간다!”
“예?”
“우리의 임무는 놈을 호위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우거의 머리통, 몇 개만 가져가면 되는 것이니 서두를 것 없다.”
* * *
분화구에 들어선 카르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저건……!”
주변에 널브러진 거대한 주검들, 자신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안겨준 블랙 오우거의 시신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모두가 가슴이 처참하게 박살이 난 상태로 죽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엄청난…….”
사람 하나가 통과할 만큼의 커다란 구멍이 죽은 블랙 오우거들의 가슴에 나 있었다. 상처 부위로 삐져나온 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불러왔다.
“놀랍습니다! 설마 인간이 이런 파괴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폭스 후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쿠아악!”
주변 숲에서 오크와 고블린 무리가 괴성을 지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수가 고작 수백에 불과했다. 아이언기사 단원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오크와 고블린들은 괴성만 지를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 이것은……!”
대마법사 율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오?”
“이건, 인간의 기운이 아닙니다. 마계의 암흑마기가 틀림없습니다!”
“마계의 암흑마기!”
카르스를 비롯한 모두가 크게 놀랐다. 암흑마기는 마계의 상위존재들이 보유한 파괴력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인간과 몬스터 간의 10년 전쟁 때, 강림했던 발록으로 인해 인간세상에 알려진 그것은 마스터도 운이 없으면 한 방에 신의 품으로 보낸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떻게 마계의 존재가 이곳으로 넘어왔단 말인가…….”
율튼은 곳곳을 살펴보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놈들이 이곳에 접근하기를 꺼립니다! 주변에 뭔가가 있습니다! 전하!”
폭스 후작이 하늘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블러드 와이번들은 옹고르 분화구의 근처를 맴돌 뿐,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제왕이 두려움을 가질 만큼의 강력한 존재가 주변에 있음을 모두는 직감했다. 모두가 얼굴이 굳어진 때, 카르스가 소리쳤다.
“율튼 공! 스캔을 펼쳐 주변을 감지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율튼은 곧 두 팔을 벌려 하늘로 세우며 주문을 외웠다.
대마법사의 스캔은 반경 수킬로까지 감지가 가능하다. 물론 한번 펼치면 상당한 마나가 소요되기 때문에 중요한 때가 아니면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다.
크로우기사단원들이 아벨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의 그들은 주변을 흘긋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행동들을 했다.
그들이라고 주변을 흐르는 강력한 암흑마기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스스로의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 표출이라고 봐야 했다.
“사라졌습니다! 반경 2킬로 내엔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오? 숙주가 없는데 암흑마기가 느껴진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존재기에…….”
“의문입니다. 몇 개의 기운이 느껴지지만 암흑마기는 아닙니다.”
율튼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게 파였다. 그때였다. 분화구의 우측 능선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졌다.
“후후! 케이론의 종자들이 왔군.”
아벨이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적국의 기사들이 출현했음에도 카르스와 율튼은 온통 암흑마기에 대한 생각으로 시선조차 주지 못했다.
아이언기사 단원들이 카르스의 주변을 둘러싸며 기운을 발산했다. 비록 한시적인 조약으로 불가침협정을 맺었다지만 케이론은 엄연한 주적이다.
“요란의 기사들인가?”
장대한 체구의 인물이 큰 소리로 물었다.
폭스 후작이 날카롭게 맞받았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이시다! 적의 장수는 예를 갖춰라!”
그 말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던 기사들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지간한 어른의 허리통 굵기만 한 무기를 든 인물이 다시 소리쳤다.
“카르스 황태자란 말인가?”
“무엄하구나! 감히 존엄하신 전하를 함부로 입에 담다니!”
“껄껄! 황태자를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진정 제국의 황태자이신가?”
크게 웃으며 다시 물어오는 자는 바로 레이놀드 백작이었다.
그 옆에 대마법사 쉐인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는 율튼에게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 카르스는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그대의 신분을 밝혀라!”
“껄껄껄! 본인은 케이론의 사자라는 레이놀드 백작! 그대가 요란의 카르스 황태자가 틀림없는가?”
치르륵!
황태자임을 알면서도 불손한 태도를 보이자 폭스 후작과 아이언기사 단원들이 일제히 검에다 오러를 품었다.
레이놀드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호! 협정을 깨고 싸우겠다?”
“닥쳐라! 감히 백작 주제에 전하께 그런 무례를 범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껄껄껄! 당신이 아이언기사단의 수장이라는 폭스 후작인가 보군? 껄껄! 소문대로 충성심이 대단하구먼, 크허허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전혀 거침이 없는 레이놀드 백작의 태도에 카르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명백한 도발행위였다.
엉뚱하게도 이상한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은 잔뜩 긴장감을 드러낸 채, 여차하면 검을 뽑을 태세였다. 그들도 레이놀드 백작의 태도가 의외였던지 조금은 당황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묘한 분위기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크로우기사단의 부단장인 아벨이 넘어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리는 말을 쏟아냈다.
“후후! 산돼지처럼 생겨먹은 놈이 입도 꽤나 거칠구나.”
카르스마저도 그의 그 같은 발언에 깜짝 놀랐다. 아벨은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너희 케이론엔 불알달린 황태자가 없으니 황태자에 대한 예의는 당연히 모르겠군. 이해한다. 돼지!”
“껄껄! 네놈은 누구냐?”
짐짓 호탕하게 웃었지만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정이 과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가 아니었던가.
좋게 끝나기는 그른 것으로 모두는 여겼다.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카르스의 눈동자에 지독한 짜증이 담겼다.
여기서 싸우면 불가침협정은 휴지조각으로 변한다. 물론 그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 황제 때문이다. 자신을 케논 산맥의 주둔군 사령관으로 보낸 것은 자신의 지도력을 제국의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인정받겠다는 황제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자신이 훌륭하게 임무를 다한다면 차기 황제를 놓고 자신과 케이시 공작을 저울질하고 있는 중도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유일한 약점인 경험부족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황제도, 자신도 그것을 노리고 이곳에 온 것인데 여기서 싸우게 된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카르스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벨! 물러서라!”
카르스의 날카로움에 아벨은 그를 흘긋 돌아보며 씩 웃었다.
“후후! 모욕을 참을 생각이오?”
“물러서라고 했다. 아벨!”
카르스의 단호한 어조에 아벨은 피식 웃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카르스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레이놀드 백작을 직시했다.
“모르고 그런 것이니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겠소. 백작!”
“흐흐! 이미 늦었지. 저 새끼 때문에 무척 화가 났거든…….”
“싸우겠다는 것인가?”
“못할 것도 없지.”
레이놀드의 태도로 보아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렸음이 분명했다. 카르스의 속내를 아는지 주변에 차가운 한풍이 몰아쳤다.
“좋다! 지금 이 시간부터 협정은 무효다. 아벨!”
“후후! 부르셨소. 전하!”
“그대들의 힘을 보고 싶군.”
“물러나 계시오. 후후!”
카르스가 뒤로 물러나자 아벨이 느릿하게 앞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다른 넷도 그의 옆으로 포진했다.
“돼지! 네놈이 테세우드의 오른팔이라고 들었다. 꽤 강하다고 소문났던데, 어디 실력 한 번 볼까?”
“이름도 없는 놈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정체가 뭐냐?”
아벨이 어깨에 둘렀던 검을 손에 쥐며 사악하게 웃었다. 유달리 흰 이를 마치 악마의 그것처럼 하얗게 빛을 발했다.
“크로우! 죽음을 대행하는 살인집행자들이 우리지.”
* * *
쿵! 쿵! 쿵!
묵직한 소리에 이어 대지가 흔들렸다.
“뭐지?”
“뭔가가 다가오고 있어.”
양측은 공격할 태세를 중단하고 겨누었던 검을 내렸다.
우측 숲,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날아오르는 부러진 나무들은 점점 옹고르 분화구의 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진동은 갑주에 걸린 장식물이 소리를 낼 정도로 점점 강력해졌는데, 그곳에 가공할 속도로 자신들이 서 있는 곳으로 질주해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로를 향해 달려들려고 자세를 잡았던 양측의 고개가 일제히 우측으로 돌아갔다. 순간 모두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피, 피해라!”
“저게 뭐냐? 피해라!”
후아악!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몰아치자 숲이 일시에 화염으로 휩싸였다. 갑주가 대번에 달아오를 정도로 강력한 화염줄기가 케이론과 요란 제국의 기사들을 덮쳤다.
콰아앙!
“으아악!”
화염이 떨어진 곳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졌다. 케이론의 기사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보통의 붉은색이 아닌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화염에 휩싸인 기사들은 아주 잠시 몸부림치더니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주변은 인육이 타들어가는 냄새로 가득했다.
“쿠오오!”
괴성이 울리며 거대한 무엇인가가 모두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정체를 확인할 시간조차 없이 엄청난 속도로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그것은 이내 옹고르 분화구의 능선을 넘어 사라졌다.
“저게, 도대체 뭐지?”
피아를 막론하고 모두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화염에 휩싸였던 기사들은 이미 한 줌 재로 화해버렸다. 어지간했던 아벨조차도 경직된 얼굴로 괴물체가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또, 옵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공격을 준비하라!”
카르스와 레이놀드가 동시에 소리쳤다. 양측의 마법병단이 동시에 마나를 끌어올렸다. 새까만 점이었던 것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척에 나타나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가공할 속도에 기사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쿠오오!”
괴성에 수준이 낮은 일부기사들이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허공을 날아오는 괴물체는 조금 전과는 달리 몸 전체가 붉은 화염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연상시켰다.
“공격!”
대마법사 율튼과 쉐인이 동시에 허공에다 대고 공격을 퍼부었다. 동시에 양측의 마법사들도 괴물체를 향해 일제히 손을 뻗었다.
허공이 거대한 화염과 빛들로 난무했다.
콰과과과광!
워낙 빠른 속도 탓에 공격의 일부만이 괴물체에 명중했다.
쾅!
“으아아!”
화염은 이번에도 케이론의 기사들을 덮쳤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만 날아오는 속도가 그들의 상상을 넘어섰다. 상당수의 기사들이 화염에 휩싸여 참혹하게 죽어갔다.
화염의 파편들이 요란 제국의 기사들을 덮쳤으나 그들은 재빨리 피해버렸다. 소수 정예만을 데리고 왔던 탓에 하나같이 신속한 몸놀림을 보였다.
“쿠오오…….”
괴물체는 최초, 모습을 드러냈던 숲 속으로 사라졌다.
쿵!
허공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대한 철판처럼 생긴 그것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그 열기가 제법 떨어진 기사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카르스가 재빨리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엄청난 열기가 대번에 갑주를 뜨겁게 달구어놓자 황급히 마나를 끌어올려 열기를 차단한 카르스는 눈에 힘을 주고서 화염덩어리를 살폈다.
레이놀드 백작도 어느새 그의 맞은편에 내려섰다.
“놈의 몸에서 떨어진 것인가?”
“젠장! 설마 고대의 병기, 타이탄이라도 된단 말이야? 어떻게 이런 거대한 쇳조각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지?”
“분명히 살아 있는 생명체의 움직임이었어…….”
둘은 처지를 잊고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다른 이들도 다가왔다. 그제야 둘은 조금의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머쓱한 표정의 레이놀드 백작이 얼굴을 실룩거렸다.
“싸움은 다음으로 미루지.”
“후후! 누구 마음대로…….”
아벨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싸우겠단 말이냐?”
“먼저 싸우자고 한 건 네놈들이지.”
“그만!”
카르스가 소리쳤다. 아벨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카르스의 속내를 짐작한 것이다. 아벨을 슬쩍 쳐다본 카르스는 레이놀드 백작에게 힘주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대들은 물러가라! 단, 저것은 본 제국이 가져가겠다.”
그는 여전히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철판을 가리켰다.
“저것을 넘겨주지 않으면 그냥 보내주진 않겠다. 이건가?”
“싸우면 여기 있는 너희들은 모조리 죽는다. 조금 전 화염이 떨어졌을 때,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카르스의 말이 옳았다.
레이놀드 백작도 그 부분을 이미 간파했다. 비록 수는 자신들이 앞서지만 상대는 하나같이 강한 자들만 추려서 온 정예임을 말이다. 싸우면 무조건 자신들이 필패다.
물론 다른 부대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까지 견뎌낼 자신도 없었다.
‘놈들의 움직임은 결코 나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레이놀드 백작은 크로우기사단원들을 무겁게 응시했다. 괴물체의 난입으로 혼란스러웠던 순간에도 그들은 피하지 않고 괴물체를 공격할 기회만을 노렸었다.
순간순간의 몸놀림은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대단했었다.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자신과는 달리 그들은 기어코 공격을 퍼부어 괴물체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철판을 뜯어내기까지 했다. 레이놀드 백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다음엔 오늘과는 다를 거야. 돼지.”
아벨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에도 레이놀드 백작은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그를 따랐다. 최후까지 자리에 남아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철판을 응시하던 대마법사 쉐인도 아쉬움을 접고 레이놀드 백작의 뒤를 따랐다.
“우리도 돌아간다!”
“그냥 가실 생각이오?”
아벨의 말에 카르스는 그를 돌아봤다.
“블랙 오우거보다 더 엄청난 존재를 발견하지 않았나. 일단은 저것으로 놈의 정체부터 알아내는 것이 시급하다. 그 자신감은 차후, 다시 빌리도록 하지.”
“우린 나중에 돌아가겠소. 볼일이 좀 있어서…….”
카르스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별도로 움직이겠단 뜻인가?”
“후후! 블랙 오우거의 머리통 하나는 들고 가야 체면이 서질 않겠소? 게다가 놈들의 뼈도 좀 필요하고 말이오.”
카르스는 아벨의 성격을 안다.
오만하고 음습하면서도 잔인한 성격을 지닌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황제 외에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물론 황제가 그만한 힘을 그에게 보장한 탓도 있지만 압도적인 무력에서 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황태자인 자신뿐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공의 위치에 오른 숙부, 케이시 공작도 아벨에겐 처벌권이 없었다.
“좋아! 대신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포기하고 돌아오도록!”
“후후! 걱정해 주는 것이오? 이거 고맙군…….”
“걱정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자! 우린 군영으로 돌아간다!”
카르스는 기사들을 이끌고 군영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벨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허약한 놈…….”
“놈이 무능할수록 우리가 좋은 것 아닙니까?”
“후후! 그건 그렇지. 케이시도 슬슬 팔다리를 묶을 때가 되었으니 저놈만 대충 걸러내면 황제도 어쩔 수 없이 우리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란은 저절로 주군의 손에 떨어지겠지. 후후.”
“홀베른으로 간 아이들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혹시…….”
아벨의 눈가에 슬쩍 짜증이 묻어난다.
“며칠을 더 기다려본 뒤, 소식이 없으면 우리 모두가 그곳으로 갈 것이다.”
“모두 말입니까?”
“레어를 찾아서 드래곤의 심장을 얻어야만 주군께서 완벽한 힘을 얻으신다. 당연히 우리가 서둘러야지. 다만 홀베른에 제법 강한 놈들이 있어 마음에 걸린다만 대법을 펼치고 싸우면 우리에겐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벨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새파란 광망을 번뜩였다. 벽안이었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흑안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벽안으로 돌아왔다.
휘이잉…….
매서운 바람이 눈가루를 몰아왔다.
화염으로 불타 죽은 자들의 육신이 바람에 눈가루에 뒤섞여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때 아벨의 고개가 좌측 숲으로 돌아갔다.
“……!”
그곳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묵빛 갑주에 핏빛처럼 붉은 흉갑을 두르고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병을 든 흑발의 사내가 아벨의 뇌리를 충격으로 흔들었다.
사내의 주변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그것은 극강의 마나가 발산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사내의 차가운 눈동자가 아벨을 향했다.
“누구지?”
“……!”
아벨은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네놈들이 발산했던 기운이 꽤 익숙하더군.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들의 것인데, 어떻게 네놈들이 그걸 익혔지?”
쿠오오…….
사내의 육신이 가공할 기운을 뿌려댔다.
“이, 이것은……!”
아벨을 비롯한 크로우기사단원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사내가 뿜어내는 기운, 그것은 자신들과 상극의 기운이었다.
[궁극의 힘을 얻기 전에 만난다면 무조건 도주하는 것이 살 길이다.]
아벨은 전설을 떠올렸다.
자신들의 가문에서 수백 년을 전해져 온 전설 속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설은 무조건 도망치라고 전해왔지만 아벨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이미 전신 근육이 얼굴만큼이나 굳어졌기 때문이다.
“누, 누구냐?”
치르륵…….
거대한 칼이 광포한 기운을 뿜기 시작했다. 사내가 한 발 내디디며 중얼거렸다.
“투왕, 담대소천! 네놈들이 익힌 기운의 주인들이 그렇게 부르더군.”
「흑안의 마검사」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