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32화 (32/55)

5권

제1장

마계전사 칸빌

온 세상이 백색으로 덧칠을 했다.

다시 내리기 시작한 폭설은 불과 2시간 만에 성인 남자의 가슴높이까지 쌓이는 대단한 폭설을 기록하고도 계속 쏟아졌다.

“마마! 이대로 정상으로 가기엔 무립니다! 군영지로 돌아갔다가 눈이 그치면 다시 오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커먼 하늘을 보니 눈이 그칠 것 같지 않자 헤론 후작은 레이나 공주에게 회군할 뜻을 비쳤다. 레이나 공주도 더 이상은 산을 오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 어쩔 수 없이 회군을 결정했다.

“다른 부대와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나요?”

“이런 폭설에는 마나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통신석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기상이 더 악화되기 전에 군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더 이상은 위험합니다.”

레이나 공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 옆에는 연소민이 함께하고 있었고 우드와 요란이 그녀를 호위하듯 좌우에 포진하고 있었다. 담대소천 등이 갑작스럽게 사라져버린 탓에 둘이 호위를 맡은 것이다. 우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졸지에 호위병으로 전락한 요란은 우드와는 달리 느긋한 표정이다. 사실 우드에겐 레이나 공주보다 연소민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만에 하나 조금의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그날로 자신은 왕전에게 맞아 죽을 목숨이라 여기고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중이었다.

3서클 마법사가 마스터에 근접한 고수를 호위한다는 게 남이 알면 웃을 일이지만 우드는 누구보다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한 발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아리안! 그만 돌아가야겠어.”

“저는 잠깐 더 둘러보고 가겠어요.”

“혼자선 위험해! 숙부들은 곧 돌아올 거야. 그러니 함께 내려가.”

“……!”

연소민은 매우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뒤로 그녀는 작은 이상에도 필요 이상의 긴장이나 불안을 비쳤다. 지금도 담대소천 등이 없자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불안해하며 극심한 초조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드가 따뜻한 말로 그녀를 달랬다.

“그분들도 그곳으로 돌아오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돌아가시죠. 영주님!”

“그게 좋겠습니다.”

요란까지 거들자 그제야 연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군영으로 돌아간다!”

헤론 후작의 눈짓을 받은 가투소가 큰소리로 명령을 전달하자 기사들은 발길을 돌렸다. 그들이 방향을 돌려 조금을 이동했을 때였다.

갑자기 우측 숲,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쿵!

“크아아…….”

콰앙!

“으악!”

거대한 무엇인가가 튀어나오며 그들을 덮쳤다.

화염이 솟구치며 기사들 몇이 엄청난 거리까지 날아가서 떨어졌다. 모두가 경악했다. 나타난 괴물은 실로 놀라울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과 비슷한 얼굴에 오우거에 육박하는 체형을 지닌 그것은 놀랍게도 기사들처럼 시커먼 갑주를 전신에 두르고 어지간한 성인 장정의 몇에 해당하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거대한 칼은 붉은 화염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 절로 공포감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마치 핏물을 연상시키는 화염에게서 모두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마! 어서 아래로 피하소서!”

헤론 후작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가투소와 기사들이 레이나 공주의 앞을 막아섰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기는 했지만 워낙 섬뜩한 광경에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영주께서도 어서 내려가십시오!”

우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요란은 이미 선두에서 양손에 마나를 끌어올리고 여차하면 공격을 가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괴물의 붉은 눈동자가 우드를 향했다.

“후후후! 마계의 기운을 지닌 놈이 있었군.”

괴물의 입에서 놀랍게도 인간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우드가 사색이 되었다. 괴물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고정되었음을 본 까닭이다. 자신이 흑마법사임을 대번에 간파한 시뻘건 혈광으로 일렁거리는 눈동자는 소름 끼치도록 섬뜩함을 발산했다.

“감히 마계의 종속주제에 나의 이 강대한 힘을 느끼고도 머리를 숙이지 않다니, 소멸되고 싶은 것이냐?”

“으……!”

우드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괴물은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우드를 향해 그 큰 몸집을 움직였다. 한걸음 내딛자 대지가 울렸다. 흑마법사의 기운을 간파한 괴물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번뜩였다. 모두는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였다.

우드에게 다가가던 괴물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응! 묘한 기운을 지닌 계집이군.”

괴물의 시선이 연소민에게 돌아갔다. 연소민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멈춰!”

챙!

“후후! 놀랍군. 마계의 것과 비슷한 힘을 지녔다니, 후후후! 꽤 좋은 힘을 가졌구나. 너희 둘은 나와 함께 가야겠다.”

“닥쳐! 어디서 온, 뭣 하는 놈이냐!”

연소민이 지지 않고 받아치자 괴물의 눈이 더욱 섬뜩한 빛으로 번뜩였다.

“후후! 먹음직스러운 힘이군. 너를 나의 수족으로 만들어주마.”

화르륵!

거대한 화염이 괴물의 주변을 용솟음치며 뿜어졌다. 엄청난 화염이 동반한 열기 때문에 모두는 황급히 뒤쪽으로 도망가듯 물러났다. 레이나 공주도 검을 뽑아 들고 연소민의 옆에 섰다. 당황한 헤론 후작이 그녀를 말릴 사이도 없었다.

화르륵!

주변 나무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주변은 불바다로 변해갔다. 기사들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레이나 공주의 주변을 에워쌌다.

“목숨을 다해 마마를 호위하라!”

헤론 후작이 결연하게 외쳤다.

드드드…….

대지가 진동했다.

동시에 괴수의 거대한 양팔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후후후! 역시 미개한 종족들이군. 감히 어둠의 파괴신인 나, 칸빌에게 맞서려고 하다니… 모조리 소멸시켜주마!”

* * *

케논 산맥의 동북부 능선을 넘어가는 시커먼 그림자들이 있었다.

나는 새처럼 빠른 속도를 보이는 그들은 한 번 도약에 상상하기 힘든 거리를 날았다. 선두에 왕전의 모습이 보였다.

“조그마한 놈이 엄청 빠르네.”

옹고르 분화구로 나섰던 그들은 우드의 연락을 받고 되돌아오던 중, 산맥의 능선을 날아가던 카루가를 발견하고서 지금껏 뒤쫓는 중이었다. 왕전의 시선이 향한 전방에 카루가가 어디론가 쏜살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소천, 놈은 어디로 간 거야? 저 꼬맹이를 따라나섰다고 했잖아!”

“그러게. 다른 곳으로 갔나 본데?”

“일단 저 꼬맹이부터 잡자!”

쾅!

넷의 육신이 허공을 가르고 직선으로 쏘아졌다.

거리는 좀처럼 좁혀들지 않았다. 지금 카루가는 변신을 한 상태로 달리고 있었다. 마계의 왕자라는 신분이 지금만큼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거리가 좁혀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끝내 왕전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자식아! 불렀으면 서야 할 것 아니야!”

핀잔을 주던 왕전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

평소의 카루가가 아니었다. 붉게 물든 눈동자와 조금은 더 커진 듯한 체격에 화염으로 일렁거리는 채찍을 든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카루가가 소리쳤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이 자식이! 무슨 일인지 말해 봐.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왕전이 내공을 끌어올려 카루가의 몸 안으로 주입시켰다. 그러자 몸을 한번 크게 휘청거린 카루가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왕전의 내력이 카루가의 마기를 압도한 까닭이었다.

“이……!”

눈을 깜박이자 붉은 화염이 사라지며 맑은 눈동자로 바뀌었다. 북궁천소가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으며 불퉁거렸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네. 무슨 일이냐, 꼬맹이! 그리고 소천은 어디 갔어?”

“혹시 엄청나게 큰 덩치에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커다란 칼을 든 놈, 못 봤어?”

카루가가 오히려 되물었다.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이자 모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조윤이 물었다.

“뭐 하는 놈인데?”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야. 악질 중의 악질인데… 놈이 왔으면 아마 형도 왔을 거야.”

모두의 표정이 급변했다.

카루가가 형이라고 칭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 혁련소뿐이다.

“자세히 말해 봐! 누가 넘어왔다고? 형이라면 소를 말하는 거냐?”

북궁천소가 다소 거칠게 묻자 조윤이 그의 어깨를 잡아 당겨서 눈치를 주었다. 카루가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크게 호흡하고 천천히 말해 봐.”

“후…….”

심호흡을 하자 정상으로 돌아온 카루가가 말을 이었다.

“마계의 문은 당분간 열리지 않게 되어 있었어. 예외라면 형이 넘어올 때, 딱 한 번만 열리게끔 아버지한테 부탁해 놨는데…….”

“그런데?”

“놈의 기운이 느껴져. 틀림없이 놈이야. 스스로 문을 열 수 없는 놈인데 이 세상에 넘어왔다면 형이 넘어올 때, 몰래 넘어온 것이 분명해.”

카루가의 일그러진 표정과는 달리 모두는 희열이 돌았다.

카루가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놈은 세상의 모든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 어쩌면 마계에만 서식하는 블랙 오우거와 블러드 와이번도 넘어왔을 거야. 놈들까지 왔다면 세상은 혼돈에 빠지게 될 거야.”

“혼돈이고 나발이고 어디서 그 새끼의 기운이 느껴지냐? 그곳에 소가 있을 것 아니냐?”

카루가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몰라! 느껴지긴 하는데 위치를 모르겠어. 스스로 마나를 감출 수 있게 되었나 봐. 이렇게까지 강했던 놈은 아닌데…….”

북궁천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여튼 이 산 근처에 있는 것은 맞는 거냐?”

“응!”

“후후! 소가 넘어왔단 말이지? 그 아이가 살아서 돌아왔단 말이지…….”

모두의 얼굴에 희열이 돌았다. 유일하게 자신들의 발목을 잡았던 부분이 해결된 것이다. 혁련소만 찾으면 더 이상 거칠 게 없다.

“움직여 볼까?”

“좋아! 모두 소를 찾으러 간다!”

모두는 최대한의 감각을 열어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강인한 성정을 지닌 헤론 후작조차도 함부로 덤벼들 생각을 못했다.

붉은 광망이 번뜩이는 눈동자는 지옥의 겁화를 연상시켰고 칙칙한 죽음의 향기가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쳐나갔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변 수풀들이 생명을 잃어갔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강인한 헤론 후작도 솟아나는 두려움은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물러설 순 없었다. 레이나 공주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마! 뒤쪽으로 물러나십시오!”

헤론 후작은 레이나 공주의 전면을 막아선 채,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괴수는 다른 이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오직 연소민에게만 고정시켰다.

“흐흐흐!”

섬뜩한 웃음은 기사들에겐 상당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심장을 자극하는 강력한 마기 때문이다. 강자에 속하는 헤론 후작과 레이나 공주, 그리고 연소민과 요란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귀를 막아 괴수의 웃음을 차단하기에 급급했다.

“다가오지 마라!”

연소민은 검을 뽑아 든 손에 힘을 싣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검에 둘러진 오러는 오히려 괴수의 탐욕을 부추겼다. 그녀보다 더욱 강력한 오러를 품은 헤론 후작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연소민은 그게 의문이었다.

‘왜 나만 노리는 거지?’

화악!

엄청난 열기가 발산되자 모두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워낙 열기가 뜨거웠던 탓에 마법방어막이 쳐진 갑주도 소용없었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갑주를 걸친 기사들 중, 몇은 갑주를 벗어서 던져버렸다.

치이익!

눈 위로 떨어진 갑주에서 수증기가 피어났다. 그만큼 괴수가 발산하는 열기는 엄청났다.

그때였다.

“어머!”

레이나 공주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모두는 보았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다섯 개의 점을.

연소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것은 선두에서 날아오는 북궁천소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였다. 그녀의 표정을 본 칸빌이 이채를 발하며 고개를 뒤로 돌리려는 찰나, 그의 어깨에 북궁천소의 대도가 작렬했다.

꽝!

“크으으…….”

칸빌의 어깨에서 불꽃이 솟아났다. 그 거대한 육신이 휘청거리더니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주르륵 밀려왔다. 뒤이어 강력한 화염이 칸빌에게 떨어졌다. 엄청난 열기가 사방으로 뻗쳐나가자 기겁을 한 기사들이 황급히 좌우로 몸을 날렸다. 상당한 거리까지 이동해서 공격을 피한 칸빌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카루가가 소리쳤다.

“칸빌! 이 나쁜 놈!”

연소민과 모두는 재빨리 왕전 등의 뒤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몸을 피했다. 카루가를 본 칸빌의 화염이 크게 출렁거렸다. 놀란 눈동자는 더욱 붉은 화염을 발산하며 크게 흔들렸다.

“카루가! 네놈이 어떻게…….”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어떻게 넘어왔어? 대답해!”

왕전에게 팔을 잡힌 카루가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며 악에 받힌 소리를 질렀다. 평소였으면 벌써 다른 모습으로 달려들었을 카루가였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모두가 그의 몸속을 지배하고 있는 왕전의 내력 때문이다.

북궁천소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놈이냐? 네가 말했던 그놈이?”

“맞아! 저놈이야!”

고개를 끄덕인 북궁천소가 칸빌을 보며 씩 웃었다.

“이봐! 불덩어리! 혹시 우리처럼 생긴 아이를 쫓아서 넘어온 거냐?”

“크흐흐! 놀라울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인간이군. 꽤 아팠단 말이야.”

칸빌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섬뜩하게 웃었다. 더욱 강렬해진 화염으로 인해 주변의 나무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열기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자 기사들은 더욱 뒤쪽으로 물러났다.

헤론 후작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이봐! 당신은 공주를 보호해야지…….”

흑야가 그를 말렸다.

그가 레이나 공주를 도우려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흑야의 눈에도 칸빌은 엄청난 놈이었다. 머뭇거리는 헤론 후작을 보던 연소민이 그의 팔을 끌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후작께서는 저희를 지켜주세요.”

“알겠네.”

헤론 후작이 물러나자 연소민은 흑야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눈빛으로 대답한 흑야는 느릿하게 칸빌의 옆쪽으로 걸어갔다. 조윤이 우측으로, 왕전은 연소민에게 카루가를 넘기고 이미 북궁천소의 옆에서 대도를 꺼내 든 상태였다.

“대답해. 불덩어리! 누굴 쫓아서 온 거야?”

“흐흐흐! 놈과 비슷한 기운을 지녔군. 네놈들도 그렇다면 이계에서 온 것인가?”

칸빌의 대답에 모두의 얼굴에 또다시 희열이 돌았다. 그가 혁련소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혁련소도 넘어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카루가의 말을 믿었지만 칸빌의 대답으로 모두는 확신을 얻었다. 북궁천소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왕전은 이미 대도를 뽑아 들고 손에 침을 뱉고 있었다.

“흐흐흐! 좋아! 이젠 이 세상에서 거칠 게 없게 되었군. 돌아가는 일만 남았으니 힘 좀 써보자고.”

“좋지!”

우드득!

북궁천소와 왕전의 목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그때, 카루가가 소리쳤다.

“조심해야 해! 변신을 하는 놈이야!”

“크흐흐! 마계의 자존심까지 팔아먹은 것이냐? 카루가!”

“흥!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나쁜 놈아!”

카루가의 팔을 꽉 붙들고 섰던 연소민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주고받던 대화 속에서 그녀는 뭔가를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저절로 카루가에게로 향했다.

칸빌을 잔뜩 노려보며 오만 인상을 다 쓰고 있던 카루가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흠칫하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형이 온 거 같아. 헤! 미안해. 저놈 때문에 말해 주지 못했어.”

“……!”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놈이 왔으면 분명 형도 왔을 거야.”

“그게 저, 정말이야?”

“헤헤! 그럴 거야.”

커다란 눈망울이 대번에 뿌옇게 흐려졌다.

“또 운다.”

* * *

드드드…….

대지가 울렸다.

칸빌의 육신을 두른 화염이 붉은색에서 새파란 청광으로 변해가며 그의 몸집이 더욱 거대하게 변해갔다. 시뻘건 눈동자는 지독한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후후후! 네놈들의 그 요상한 힘이 나, 칸빌에게 궁극의 힘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때였다.

소리 없이 날아든 시퍼런 검강이 칸빌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불꽃이 일며 칸빌의 거대한 육신이 주춤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칸빌의 고개가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씁쓸한 표정의 흑야가 서 있었다.

흑야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너무 얕봤군.”

제대로 작렬시켰건만 전력을 다하지 않은 탓에 갑주에 흠집을 내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덕분에 손까지 찌르르 울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 여실히 증명되었기에 흑야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한 놈이야. 최선을 다해야겠어…….”

중얼거림은 벗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칸빌의 눈동자가 시뻘건 화염으로 이글거렸다.

“크흐흐! 인간의 힘으로는 뚫어낼 수 없는 것이 이 암흑마갑이다. 네놈들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든 후, 모조리 잿더미로 소멸시켜주겠다!”

화아악!

엄청난 화염이 사방으로 뻗쳐오르며 지독한 열기를 동반했다. 한참을 떨어졌던 기사들은 또다시 상당한 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칸빌을 에워 싼 넷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왕전이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꽤 거추장스러운 놈이야. 힘껏 싸워야겠어.”

“그래봤자, 제깟 놈도 칼 맞으면 골로 간다. 먼저 간다!”

북궁천소가 몸을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뒤이어 왕전의 대도와 흑야의 검, 조윤의 창이 칸빌의 육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깡!

“으악!”

검과 육신이 동시에 두 조각으로 썰어지며 자욱한 피안개를 만들어냈다.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는 거침이 없었다.

이미 주변은 죽은 자들이 흘린 핏물로 질펀하게 적셔진 상태였다. 그리고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는 자들은 아벨과 다른 하나뿐이었다.

“말하라! 그러면 편안한 죽음을 내려줄 것이다.”

“닥쳐!”

아벨의 우측에 섰던 크로우기사 단원이 검과 한 몸이 되어 돌진해 들어왔다. 그 속도와 실린 힘은 그야말로 대단했지만 상대는 투왕 담대소천이다.

“가소로운!”

담대소천의 눈가에 찬 기운이 걸리며 그의 청룡언월도가 지독하게도 푸른 도강을 뿜어냈다.

꽝!

육탄으로 돌진했던 크로우기사 단원의 육신이 엄청난 속도로 뒤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비명조차 없었다. 거목에 ‘쿵’ 하고 부딪힌 기사단원의 육신이 그대로 늘어졌다.

즉사였다.

담대소천의 강렬한 눈동자가 혼자 남은 아벨에게로 향했다.

“무능한 놈이군. 너는…….”

“……!”

“무리를 이끄는 놈이라면 최소한 수하들의 목숨은 지켰어야지.”

아벨은 불신에 가득한 눈으로 담대소천을 바라만 볼뿐이었다. 담대소천이 한걸음, 한걸음 아벨에게로 걸어갔다.

아벨은 케논 산맥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도 마스터에 근접한 강자, 이를 악물고 검에 오러를 품었다.

“함께 죽겠다! 이놈!”

“후후! 그게 가능할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말하면 편안한 죽음은 보장하지.”

“개소리!”

아벨이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둘의 육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를 보이며 한데 어우러졌다. 청룡언월도와 검이 부딪히며 파생된 기운은 주변 숲을 초토화로 만들었다.

죽은 자들의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간혹 모습을 드러냈던 고블린 몇 마리도 어김없이 기운에 휩쓸려 한 줌 핏물로 화해 사라졌다.

담대소천의 노호성이 울렸다.

“합!”

콰광!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아벨이 뒤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바닥을 구른 아벨의 육신이 진득한 핏물을 쏟아냈지만 담대소천은 그 자리에 우뚝 선 그대로였다.

아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있어야 할 오른팔이 없었다. 무인에겐 생명과도 같은 오른팔인데 저만치에서 검을 잡은 채, 펄떡거리고 있었다.

분노도, 팔이 잘린 것에 대한 통증도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절망.

오직 절망만이 아벨의 뇌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니 함께했던 수하이자 형제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곳곳에 피를 뿌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아벨은 자신의 앞을 우뚝 선 담대소천을 올려다보았다.

비껴든 거대한 칼은 지금까지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기운을 두르고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신들의 가문이 전설로 경고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왜 수백 년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아벨은 지금에서야 절실하게 느꼈다.

담대소천의 묵직한 음성이 아벨의 흐려진 정신을 일깨웠다.

“아직,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아벨이 웃었다.

담대소천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지금 아벨의 웃음은 그가 삶을 포기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아벨이 고개를 젖히고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담대소천은 묵묵히 그런 아벨을 내려다보았다. 웃음이 그치고 아벨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담대소천을 응시했다.

“크크! 그러지. 무엇이 궁금한지 물어라. 모조리 대답해 주겠다. 그렇다고 네놈이 두려워서, 혹은 내가 살고자 그러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어졌으니 모조리 뱉어주마.”

아벨은 삶을 포기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살아난다면 그게 더 죽음보다 못한 상황이 될 것이다. 검을 쥘 오른팔을 잃었다면 차라리 죽은 게 나았다.

“중원이라는 곳을 아는 놈이더냐?”

“알지.”

“……!”

“가문의 전설에 그곳이 들어 있더군. 강자들의 고향이라고 말이야. 지금 너를 보니 전설이 옳았어…….”

담대소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선조들이 중원에서 온 자들이더냐?”

“크크! 어쩌면…….”

아벨의 대답이 모호했다.

“요란 제국이 네놈의 선조가 세운 나라이더냐?”

“크크! 그깟 허울뿐인 제국은 세워서 뭣하겠느냐.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지. 그곳의 황제라는 작자도 우리의 손에 놀아나는 허수아비일 뿐이니 말이야.”

놀라운 말이 아벨의 입에서 쏟아졌다.

“누구지? 너희들을 부리는 자가…….”

“크크! 그건 곤란해.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이제 그만 날 죽여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아벨의 육신이 휘청거렸다. 진득한 핏물이 입을 통해 쏟아졌다.

창백해진 얼굴은 죽음이 다가왔음을 깨닫게 했다. 담대소천은 아벨을 무겁게 쳐다봤다.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저런 부류의 인간들은 더 묻는다고 대답할 자들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넌, 아까운 놈이었다. 무사로서 말이야.”

“크크! 닥쳐!”

“내세엔 좋은 놈으로 환생하길 바란다.”

서걱!

아벨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죽은 자를 내려다보는 담대소천의 눈동자가 순간 가늘게 흔들렸다. 따끔한 통증이 허리에서 솟아났다. 그곳에서 선혈이 주르륵 흘렀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아벨과 크로우기사 단원들과의 대결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다.

“꽤 위험했어…….”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어둠이 아니라 새카맣게 몰려드는 새들이었다. 죽음을 먹고사는 까마귀들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최초 결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얼마나 떨어진지조차 모를 정도로 먼 곳까지 와 있었다.

“너무 멀리 와버렸군.”

쓴웃음을 지은 담대소천은 잠시 나무에 등을 기대로 앉았다. 거친 호흡을 달래고 흔들린 속을 다스리기 위해 곧장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 * *

황태자 카르스는 자꾸만 뒤를 흘긋 돌아봤다.

옹고르 분화구에 남은 크로우기사 단원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 어쩌면 적보다 못한 사이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제국의 소중한 전력이 아닌가.

“전하! 걱정 마십시오. 그들은 강한 자들이니 무사히 돌아올 것입니다.”

폭스 후작이 카르스의 마음을 헤아려 속내와는 달리 그같이 위로했다. 대마법사 율튼의 얼굴은 꽤나 굳어져 있었다.

그는 마법사들이 들고 가는 거대한 철갑덩어리를 보면서 의문에 빠져 있었다.

‘저건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다. 그 정도의 강력한 마기를 발산하는 괴물체라면 마계의 존재, 그것도 최상위급 존재가 틀림없을 것이다. 누구지? 어떻게 마계의 존재가 이곳으로 넘어왔단 말이지.’

율튼은 그것이 의문임과 동시에 놀라웠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순수한 마나의 이동량을 볼 때, 자신보다 더한 강력함을 느꼈었다. 텔레포트를 할 때나 가능한 양의 마나가 괴물체에게서 느껴졌던 것이다.

‘발록은 아니겠지…….’

율튼은 인간 세상에 가장 두려운 존재로 각인된 발록을 염려했다.

“전방에 마나의 흐름이 잡혔습니다!”

누군가가 나지막이 소리치자 율튼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카르스와 폭스 후작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적인가?”

율튼은 재빨리 스캔을 펼쳤다. 이내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마계의 기운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분화구에서의 그놈은 아니겠지요?”

폭스 후작이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소…….”

모두가 초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동을 멈추고 병기를 꺼내 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옹고르 분화구에서 화염 한 방에 기사들이 재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카르스조차도 경직된 반응을 보였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기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카르스는 검에다 오러를 두르고 낮은 자세로 전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스스슥!

숲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점점 카르스 일행이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대마법사 율튼이 지팡이를 숲 쪽으로 겨누었다.

탁! 탁! 탁!

무엇인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고블린 한 마리가 숲에서 튀어 나왔다.

퍽! 퍽!

칵!

고블린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고블린이 모습을 보이기가 무섭게 기사들이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뭐야? 고블린이잖아?”

카르스가 율튼을 돌아봤다. 굳은 표정의 율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볍게 숨을 내쉰 카르스가 다시 숲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가 소리쳤다.

“오우거다!”

우거진 숲의 위쪽으로 오우거의 머리가 보였다. 나무 위로 머리만 쑥 내민 그것은 보통의 오우거와는 달리 눈처럼 흰 털을 지니고 눈동자도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아이스 오우거?”

“그렇습니다. 괜히 놀랐습니다.”

폭스 후작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아이스 오우거는 그다지 두려운 상대가 아니다. 물론 어지간한 기사들에겐 공포의 대상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 이곳엔 하나같이 마스터 급에 이른 기사들만이 있었다. 기사들이 느릿하게 오우거를 향해 걸었다. 좀 전의 긴장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낮은 자세를 취했던 카르스가 그제야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괜히 놀랐군.”

“전하! 평범한 오우거가 아닙니다.”

율튼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카르스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평범한 오우거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놈에게서 마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보통의 오우거는 절대 그럴 수, 없는 법입니다. 기사들을 뒤쪽으로 물리십시오.”

“율튼 공!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 블랙 오우거도 아닌 고작 아이스 오우거 한 마리가 아닌가? 놈을 잡아 가죽을 벗겨라!”

미간을 찌푸렸던 카르스가 기사들에게 다소 짜증스러운 투로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려 아이스 오우거를 덮쳤다.

퍽! 퍽!

오우거의 어깨와 복부에서 핏물이 튀었다.

“캬우!”

괴성과 함께 오우거는 뒤쪽으로 물러났다. 오우거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도망치거나 반격을 가했어야만 했는데, 어쩐 일인지 아이스 오우거는 기사들을 쳐다보며 당황한 빛을 보였다. 몬스터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인간에 대한 적개심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이봐! 가죽이 상하지 않게 해야지!”

“목을 노려!”

카르스가 다시 소리쳤다.

율튼은 아이스 오우거의 그러한 반응이 수상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당혹감과 친근감이 뒤섞여 있었다. 몬스터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눈빛이다.

기사들이 다시 오우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보통의 오우거보다 훨씬 큰 아이스 오우거의 가슴까지 날아오른 기사 하나가 목을 향해 검을 내려칠 때였다.

“멈춰!”

차가운 일성이 숲에서 터졌다.

동시에 기사의 육신이 허공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 날아갔다. 이번엔 또 뭔가라는 불안감에 기사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뒤쪽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이게 무슨 짓이야!”

오우거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혁련소였다.

은발에 갑주를 걸친 그는 잔뜩 성이 난 눈빛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모두는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율튼의 탐스러운 수염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카르스가 이채를 발하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

율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혁련소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율튼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는 혁련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흑발에서 은발로 바뀌었지만 어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으랴.

아니, 혁련소보다는 그를 구해서 사라진 흑발사내의 광포했던 영상이 지금, 율튼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돌아오면 지옥을 구경시켜 주지.’

사라지기 직전에 자신들을 향해 읊조렸던 사내의 음성이 환청처럼 울렸다.

율튼은 지금도 문득문득 그날을 떠올리면 깜짝깜짝 놀란다. 오던 잠도 날아가며 식욕마저 떨어지곤 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율튼은 황태자 몰래 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봐, 너희들! 미쳤어! 왜 다짜고짜 칼질이야!”

“누구냐? 누구이기에 감히 제국의 황태자 저하께서 하는 일을 막아서는 것이냐? 목이 잘려 죽고 싶으냐! 이놈!”

크루즈 백작이 호통을 치며 나섰다.

“황태자면 다짜고짜 칼질을 해도 되는 건가? 어디냐? 요란이야, 아니면 케이론이야?”

“이놈! 무례하다!”

“그만!”

카르스가 나섰다.

크루즈 백작이 성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혁련소는 차가운 시선이 카르스를 향했다. 한눈에 그가 황태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네가 황태자인 모양이군?”

폭스 후작이 화가 뻗쳐 움찔하자 손을 들어 제지한 카르스가 혁련소의 아래위를 쓸어보고는 묘한 눈빛을 발했다.

“묘한 놈이군. 몬스터를 감싸다니, 제국의 법으로 몬스터를 키우거나 사냥을 방해하면 그 죗값이 어떠한지를 모르는 것이냐?”

“별 거지 같은 법도 다 있네. 어디냐니까? 요란이야?”

“후후! 그 입 때문에 제명에 못 살 놈이구나. 그래, 내가 요란 제국의 황태자, 카르스다.”

뜻밖에도 카르스는 화를 내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서 말이다. 혁련소의 입가가 올라갔다.

“난, 요란 제국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니 대접을 받을 생각 따윈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하하! 당돌한 놈이구나. 이 카르스의 위명은 전 대륙에 떨쳐져 있건만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다니, 누구냐? 케이론의 기사냐? 아니면 다른 왕국의 기사냐?”

“후후! 글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위명은 무슨…….”

폭스 후작이 끼어들었다.

“전하! 당장 놈을 베고 서둘러 군영으로 가시지요.”

카르스는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기심마저 보였다.

“여긴 본 제국의 영토, 네놈은 지금 영토를 침범한 것이다. 알겠느냐? 그러니 너를 포박해서 압송해야겠다. 물론 저 오우거까지 데려가야겠지?”

“케논 산맥은 케이론의 영토로 알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지?”

“하하! 웃기는 놈이군. 몬스터와 숲 속에서만 살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그걸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다.”

카르스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기까지 했다.

폭스 후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카르스가 당장에 목을 치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가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인 자를 살려준 적은 단연코 없었다.

더욱이 상대는 상위귀족도 아닌 정체불명의 평범한 기사가 아닌가. 모두가 의아해하면서 카르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느닷없이 율튼의 창노성이 터졌다.

“놈을 잡아라!”

율튼을 비롯한 모든 마법사들이 동시에 손을 뻗어 혁련소를 공격했다. 느닷없는 상황에 카르스조차도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콰과광!

혁련소가 섰던 자리에 거대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위력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조금 뒤쪽에 섰던 아이스 오우거가 허공을 붕 날아서 숲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카르스의 매끄러운 눈썹이 급격하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게 무슨 짓이지? 감히 내가 대화를 나누는데 이런 짓을 벌이다니!”

율튼은 대답 없이 혁련소가 섰던 자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자욱한 연기로 인해 그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랑곳 않는 그의 반응에 카르스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봐! 율튼!”

율튼이 카르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전하! 놈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놈입니다. 놈은 지난날, 케논 산맥에서 본 제국의 마법병단을 처참하게 도륙했던 놈들과 한패입니다!”

“뭣이!”

카르스가 크게 놀랐다.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경악했다. 그 사건은 이미 요란 제국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대마법사와 마법병단의 공격을 뚫어내고 도주할 인간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당신의 공격을 막아내고 도주했다는 그놈들……!”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그때 그놈입니다.”

그제야 낯빛이 정색으로 돌아온 카르스와 폭스 후작의 시선이 빠르게 혁련소를 찾았다. 율튼이 고개를 저으며 다소 맥 빠진 것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주했습니다.”

혁련소가 섰던 자리엔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이가 없군. 그 거리에서의 기습을 피해내다니, 그것도 대마법사가 펼친 기습을 말이야.”

카르스는 진정, 어이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의 눈에는 그저 그런 기사 정도로만 보였었다.

혹시 몰라 마나를 측정해 봤지만 느껴지는 정도는 아이언기사 단원들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자가 율튼의 공격을, 그것도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에서의 기습을 피해냈으니…….

“앗! 저, 저깁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친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숲에서 가장 큰 나무의 꼭대기였다. 그곳에 혁련소가 있었다. 카르스 일행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운이 좋은 놈들이군. 아버지와의 제약만 아니었다면 네놈들을 모조리 죽였을 텐데… 좋아! 요란의 황태자라고 했지? 너, 조만간 내가 직접 찾아가주지. 그리고 마법사 늙은이!”

혁련소의 싸늘한 눈동자가 율튼에게로 향했다.

“나를 다시 만나기 전에 스스로 죽는 것이 좋을 거야. 늙은이!”

“놈!”

율튼의 육신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그의 손에는 마나로 형성된 거대한 랜서가 쥐어져 있었다. 마법병단이 그의 뒤를 쫓아 날아올랐다.

“율튼 공을 도와라!”

카르스의 명령에 기사들도 일제히 숲으로 뛰어들었다.

숲으로 뛰어드는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보면서도 혁련소는 차갑게 웃었다.

“후후!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재회의 그날을 기대해도 좋을 거야. 잘난 황태자 나리.”

“닥쳐!”

카르스는 대답 대신 검을 힘껏 집어 던졌다.

전력으로 던진 검이 엄청난 속도로 혁련소가 섰던 나무에 도달했을 때, 혁련소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사라지자 카르스는 신경질적으로 땅을 걷어찼다.

“젠장! 요즘 들어 놀랄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카르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숲으로 들어갔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돌아왔다. 카르스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오우거도 놓친 것이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놈이 공간이동이 가능한 마법사인 듯합니다.”

크루즈 백작의 말에 카르스는 율튼을 돌아봤다.

율튼의 얼굴은 낭패함과 혼란스러움으로 뒤섞여 있었다. 초월의 현자라는 대마법사는 좀처럼 정신적으로 혼란을 겪지 않는다. 정신적 수양과 능력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율튼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뭔가 말을 하려던 카르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때 율튼이 말했다.

“황궁을 다녀와야겠습니다.”

“갑작스럽게 황궁은 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럼!”

율튼은 카르스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텔레포트를 펼쳐 사라졌다. 마법병단도 모조리 그와 함께 사라졌다.

폭스 후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경솔한 행동입니다. 이곳에서 텔레포트를 펼치면 케이론에 마나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놈들이 공격을 가해오진 못할 것입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쪽엔 쉐인이 있습니다. 그자가 있다면 케이론은 충분히 딴 마음을 먹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텔레포트를 시전하면 엄청난 마나가 소요된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주둔한 케이론 제국의 군영에 있는 대마법사 쉐인이라면 마법병단, 전체의 부재는 둘째쳐도 적어도 율튼이 빠져나간 것 정도는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대마법사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이번의 경솔한 처사는 결코 묵과해선 곤란합니다! 어차피 차후, 케이시 대공과의 한판 승부 때 우리에겐 크나큰 짐이 될 자가 아닙니까?”

폭스 후작은 목을 문 투견처럼 율튼의 처사를 물고 늘어졌다.

“일단 군영으로 돌아가서 경계를 강화시키고 적진에 저격병들을 보내어 만약을 대비해야겠습니다. 율튼의 처벌문제는 차후, 천천히 처리하도록 하지요.”

카르스는 빠르게 군영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가지 못하고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사라졌던 블랙 오우거들이 그들의 이동방향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크르르…….”

입가에 침을 주르륵 흘리며 인간을 노려보는 오우거들은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크와 고블린이 보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카르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하필이면…….”

율튼과 마법병단이 없으면 블랙 오우거는 상당히 버거운 상대다. 게다가 크로우기사단마저 없었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길을 뚫어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사들은 전하를 보호하라!”

아이언기사단과 제후국의 기사들이 빠르게 카르스의 앞을 막아섰다.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자 기사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쿵! 쿵!

블랙 오우거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카르스는 머리를 굴렸다. 작정하고 싸운다면 어찌어찌 상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한 놈에게 공격을 집중하고 틈을 노려 최대한 빠르게 군영으로 이동한다!”

결국 도주하기로 작정한 카르스는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에 오러를 둘렀다.

가공할 기운이 주변을 몰아쳤다. 다가들던 블랙 오우거들도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크아아…….”

“공격!”

카르스가 외치자 모두는 가장 선두에서 달려드는 블랙 오우거를 향해 일제히 검을 뻗었다. 주변공간이 소용돌이치면서 오러의 향연이 펼쳐졌다.

콰앙!

마스터 급에 이르는 기사들의 집단공격은 무시무시했다. 그토록 광포했던 블랙 오우거의 상반신이 걸레처럼 찢겨지며 피를 뿌렸다. 인간이라면 겁을 먹고 물러날 정도의 광경이건만 블랙 오우거들은 더욱 사나운 흉성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우욱!”

제후국의 기사 하나가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다른 블랙 오우거의 주먹에 스친 것이다. 스친 것만으로도 흉갑이 종잇장처럼 뜯겨지며 날아갔다.

스친 오른팔은 뼈가 으스러져 허수아비처럼 너덜거렸다.

“다시 한 놈에게 집중해라!”

기사들이 전열을 뒤쪽으로 슬쩍 물렸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한 방에 죽일 수 없었기에 최대한 가속을 붙여서 강력한 공격을 쏟아낼 심산이었다.

“우측을 돌파한다! 하나가 쓰러지면 그곳으로 전력질주 한다! 공격하라!”

이번엔 가장 우측의 오우거가 목표대상으로 정해졌다. 그곳이 뚫리면 곧장 내리막길이다. 오우거는 내리막길에서 움직임이 둔하다.

크르르…….

눈치라도 챈 것일까? 다른 블랙 오우거들이 우측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카르스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어서 놈에게 퍼부으란 말이다!”

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측을 막아섰던 블랙 오우거의 육신에 기사들의 연합공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은 전처럼 한 방에 끝나지 않았다. 오른 팔만 잘라내는데 그쳤다.

달려드는 다른 오우거들을 의식한 나머지 마나가 흐트러진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팔 하나가 잘려나간 블랙 오우거가 광포한 몸짓을 보이며 괴성을 질러댔다.

무차별적인 팔의 휘두름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으로 날아갔다. 그때 팔이 잘려나간 오우거의 육신이 휘청거리더니 왼쪽으로 기우뚱거렸다.

다가들던 다른 오우거들이 피하느라 주춤하자 공간이 생겼다.

“뛰어!”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카르스가 먼저 몸을 날렸다.

뒤이어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을 비롯한 기사들이 바닥을 차고 올랐다.

“이런, 젠장맞을! 으악!”

퍽!

뒤쪽에서 처참한 비명이 울렸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기사들 몇이 오우거에 둘러싸였다. 용맹하게 싸웠지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카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군영이 있는 곳으로 질주했다.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 그의 좌우를 호위하며 달렸다. 간혹 숲에서 튀어나오는 고블린과 오크들은 여지없이 둘의 칼날 아래 피를 뿌렸다.

그때였다.

카르스는 문득 머리 위쪽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황급히 고개를 든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와이번이다! 피해라!”

거대한 화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콰앙!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고서야 간신히 화염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카르스는 하늘을 쳐다보며 경악에 빠졌다. 폭스 후작이 부르짖듯 소리쳤다.

“전하! 놈들이 모조리 몰려왔습니다.”

하늘엔 블러드 와이번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모두는 재빨리 숲으로 몸을 숨겼다. 카르스는 혼란에 빠졌다. 뒤를 돌아보니 숲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볼 것도 없이 블랙 오우거가 쫓아오는 것이다. 카르스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저쪽으로 간다!”

“전하를 호위하라!”

모두는 숲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나가는 순간, 블러드 와이번의 엄청난 화염공격을 받을 것이다. 기사들은 검을 휘둘러 나뭇가지들을 베어내며 빠르게 전진했다.

쿵! 쿵! 쿵!

블랙 오우거의 진동이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카르스는 초조했다.

“하필이면 율튼이 없는 이때에…….”

그가 있었다면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순간이동으로 도주하면 그뿐이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돌아가면 대마법사고 나발이고 목을 날려버리겠다! 빌어먹을!”

“전하! 저쪽이 좋겠습니다!”

폭스 후작이 방향을 반대편 우측을 가리켰다. 카르스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방향을 바꿨다. 창공을 비행하는 와이번들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지상을 샅샅이 살폈다. 언제라도 목표물이 나타나면 화염을 뿜을 태세였다.

블랙 오우거들의 지축을 흔드는 진동이 더더욱 크게 느껴지자 모두는 이를 악물고 질주했다. 작정하고 도주하면 제아무리 블랙 오우거라도 그들을 잡지는 못한다. 마스터 급 기사들의 기동력은 달리는 말보다 빠르다.

물론 마나가 얼마까지 지속되느냐가 관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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