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황태자 카르스의 고립
레이나 공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괴물도 괴물이지만 왕전을 비롯한 넷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은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지막지한 괴물과 맞서, 그들은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케이론에서 강자에 속하는 헤론 후작이 고개를 저을 정도로 강력함을 뽐내는 괴물을 향해 그들은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그 용맹함이 눈부실 정도였다.
‘잡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숙부들을 내편으로 끌어들여야 해! 저들이라면 테세우드의 횡포에 대항할 충분한 힘이 있어!’
저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열망이 강했던지 피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런, 불덩어리 새끼!”
왕전의 거친 음성이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대도를 휘두르며 돌진하는 왕전은 무척 성이나 있었다. 켈빈의 공격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레이나 공주가 선물한 갑주가 화염에 의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어지간한 공격에는 끄덕조차 없는 최상위마법 갑주가 그렇게 될 정도라면 다른 이들은 벌써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누구보다 놀란 건 칸빌이었다.
혈광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 힘을 내 것으로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차원최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가 당할 수도 있겠어. 도대체 이런 놈들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마계의 전왕이라는 발록의 스승이다.
발록도 자신에겐 머리조차 들지 못한다. 그런 자신이 보잘것없는 인간 따위에게 지금껏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니…….
퍽!
어깨에 지독한 통증이 솟아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계의 그 어떤 종자들보다도 사납게 보이는 인간이 육탄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칸빌은 분노했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크아아!”
두 팔을 교차하며 괴성을 지르자 몸에서 뿜어진 화염이 반경 10미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지독한 뜨거움은 왕전 등도 마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잠시 뒤로 물러서자 칸빌이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돌아와서 반드시 네놈들을 나의 수족으로 만들어주겠다.”
드드드…….
주변이 지진을 만난 듯, 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놈이 이상하다! 물러서!”
조윤이 소리쳤다.
흑야가 눈매를 가늘게 하고서 칸빌을 유심히 살폈다.
“도주하려는 모양이군.”
“도주? 누구 마음대로!”
북궁천소가 대도를 고쳐 잡으며 몸을 날리려고 하자 조윤이 말렸다.
“놔 둬! 어차피 싸워봤자 승부를 보기 어렵다.”
“무슨 소리야? 끝장을 봐야지!”
“벌써 도망갔다.”
“뭐?”
북궁천소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칸빌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좌측을 맡았던 흑야가 검을 갈무리하며 다가왔다.
“마법까지 부리다니, 꽤 귀찮은 놈이 나타났어.”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해 갑주상태가 훨씬 엉망이었다. 누구보다 근접거리에서 공격을 펼쳤던 까닭이다. 머리카락 일부도 시커멓게 그을린 상태였다.
“괜찮으세요!”
연소민이 한걸음에 그들 곁으로 뛰어오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흐흐! 고작 저깟 놈에게 당할 성 싶으냐?”
북궁천소가 히죽 웃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 그리고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투소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와!”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대단해요. 정말! 갈수록 점점 더 말이죠.”
레이나 공주도 꽤나 상기된 표정이다. 누구보다 넷을 바라보는 눈빛이 반짝였다. 머쓱한 표정이 되어버린 조윤이 카루가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피곤해. 얼른 돌아가자!”
“소천을 찾아야지.”
“모두 갈 필요는 없으니 누가 갈래?”
모두가 슬쩍 조윤의 시선을 외면했다. 조윤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셋을 노려보고는 카루가를 올려다보며 짐짓 친절하게 물었다.
“너, 소천을 좋아하지?”
“난, 전부 다 좋아해. 그런데 그건 왜……?”
“넌, 힘이 남아돌 테니 네가 좀 찾아서 데리고 와.”
“나쁜 놈이 있을 수도 있잖아?”
“무섭냐? 아깐 싸우겠다고 길길이 날뛰더니 그게 아니었냐?”
카루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바보처럼 웃는다.
“혼자선 조금 무서워… 헤헤!”
결국 왕전이 담대소천을 찾으러 가야만 했다.
가장 소극적으로 싸웠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왕전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 * *
“이런, 젠장……!”
카르스는 눈앞에 들판이 펼쳐지자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마 산맥의 가운데 들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는 더 이상 은폐할 곳이 없어지자 본능적으로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블러드 와이번들이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가공할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전하!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 그렇군! 숲 속으로 들어간다!”
당황한 카르스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들은 들판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온 길을 되돌아 뛰었다. 간발의 차이로 블러드 와이번의 화염공격을 피한 그들은 제법 높은 지대를 찾아 그곳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올라서기가 무섭게 블랙 오우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
고개를 치켜든 블랙 오우거들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니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그들이 올라선 곳은 협곡을 두른 절벽의 중간지점이었다. 30미르에 달하는 높이 탓에 제아무리 블랙 오우거들이라도 올라설 수 없었다. 게다가 머리 위는 우거진 수림이 가리고 있었기에 블러드 와이번의 시야에도 들키지 않았다.
그야말로 당장의 위험에서 몸을 피하기엔 최적의 장소였지만 반대로 완벽하게 고립된 지형이기도 했다. 당장은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모두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율튼! 이 빌어먹을 늙은이!”
카르스가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그가 있었다면 최소한 자신만은 지금쯤, 안전한 군영이나 황궁으로 텔레포트 했을 것이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보여주었던 당당했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과 분노, 혼란스러움만이 보일 뿐이었다.
“전하! 이거라도 좀 드시지요.”
기사 하나가 가죽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고맙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마실 물은 있나?”
“……!”
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부분은 난리 통에 모조리 분실했고, 그나마 물주머니를 내민 기사와 몇 명만이 있었는데, 그것도 한 모금 마시면 동이 날 지경이었다.
카르스는 차마 물주머니를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는 물주머니를 도로 기사에게 건네고는 주변을 살폈다. 자신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블랙 오우거들에다 언제 몰려들었는지 오크와 고블린들이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고립이었다.
“전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위기를 헤쳐 나갈 방도가 생길 것입니다!”
폭스 후작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스로 헤쳐 나가지 못하면 외부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황궁이나 군영에 소식을 전할 방법이 없었으니…….
그때였다.
“전하! 놈들이 기어서 올라옵니다!”
“이런……!”
오크와 고블린들이 새카맣게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이야 그다지 위협이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모두는 잔뜩 긴장했다.
기사 몇이 검을 뽑아 들고 가장자리 쪽으로 이동했다. 올라오는 족족 쳐낼 심산이었다. 덩치가 작고 놀림이 빠른 고블린이 가장 먼저 올라왔으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자 피를 뿌리며 떨어졌다.
따다당!
쇳소리가 울렸다.
“조심해라! 놈들이 독침을 쏜다!”
고블린은 작은 대롱에 독침을 꽂아 쏘는 것이 주 공격방법이다.
기사들이 걸친 갑주를 뚫어낼 순 없었지만 운이 나쁘면 목이나 얼굴에 당할 수도 있다. 독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에 기사들은 살이 드러난 부분을 마나로 둘러 방어막을 형성했다.
퍽!
“카악!”
고블린들은 올라오기가 무섭게 동강이 나며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올라왔다. 올라오는 공간이 다소 협소했던 까닭에 기사들은 번갈아 고블린들과 오크를 상대했다. 그러기를 1시간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카르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놈들이!”
블랙 오우거들이 주변의 나무를 마구 주먹으로 부러뜨리고 있었다. 워낙 강력한 파워를 지닌 그들이라 굵직한 거목들도 몇 번 주먹질에 사정없이 넘어갔다.
콰지직!
“전하! 이대로 가면 곧 블러드 와이번에 위치가 노출됩니다!”
그랬다.
그게 문제였다. 주변 숲의 나무들이 모조리 넘어가면 위쪽이 그대로 노출된다. 그렇게 되면 화염공격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방법이, 방법이 없어!”
카르스의 얼굴에 드디어 절망이 어린다.
블러드 와이번을 피해 숲으로 들어가면 블랙 오우거들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있다면 지금 당장 뛰어내려서 그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블랙 오우거의 수가 너무 많았고 없던 오크들도 새카맣게 몰려든 상태였다.
“억!”
고블린과 오크들을 상대하던 기사 하나가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독침에 당한 것이다. 그들이 제아무리 강하다지만 마나를 이용한 방어막을 무한정 사용할 순 없었다. 잠깐 마나가 소멸된 틈을 노리고 그에게 집중적으로 날아온 독침이 새카맣게 얼굴 전체를 덮어버렸다.
“매, 맹독입니다!”
쓰러진 기사는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다. 독침에 발라진 독이 얼마나 강한 맹독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카르스는 점점 냉정을 잃어갔다. 이대로 죽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지닌 그였다.
우지끈!
거목이 부러지며 무수한 파편들이 그들이 있는 곳을 덮쳤다. 기사들이 손을 뻗어 밖으로 쳐내는 어지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자 부러진 나무들 사이로 블러드 와이번의 거대한 동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전하! 이대로 있으면 당합니다! 차라리 뛰어 내려서 돌파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 다급하게 외쳐댔지만 카르스는 여전히 공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폭스 후작이 카르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전하! 전하!”
“젠장! 빌어먹을!”
카르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을 가려줬던 나무들이 모조리 무너졌다. 그것은 공포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다. 창공을 배회하던 블러드 와이번들이 방향을 바꾸어 그들에게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쾅!
“으악!”
화염이 좁은 공간의 가장자리를 강타했다.
끊임없이 올라오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던 기사들이 화염에 휩싸여 바닥으로 추락했다. 빗맞아 땅으로 떨어진 화염 일부에 오크들과 고블린들도 떼거리로 죽어갔다. 떨어진 기사들에게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그제야 카르스는 정신을 차렸다.
“뛰어! 뛰어라! 무조건 뛰어라!”
그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유일한 방법이 그거였다.
살아남은 자들이 일제히 몬스터의 가운데로 뛰어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블랙 오우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조건 북쪽으로 뛰어라!”
모두는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블린과 오크의 수가 워낙 많았던 까닭에 블랙 오우거의 움직임이 다소 둔화되었다.
퍽!
퍽!
“크아아…….”
순식간에 카르스와 모든 이들의 육신이 몬스터의 핏물로 흠뻑 적셔졌다. 그들은 오직 검 끝에 오러를 품고서 막아서는 몬스터들을 베면서 전진했다.
콰앙!
“크아아…….”
허공에서 떨어진 화염이 몬스터들의 가운데를 휩쓸었다. 오크와 고블린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죽어갔다. 운 좋게도 기사들은 이번 공격에서 비껴났다.
“크어어…….”
괴성이 모두의 귓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느새 제법 떨어져 있던 블랙 오우거가 지척까지 접근해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몬스터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빈 공간만을 골라서 뛰었다. 몸놀림이 상대적으로 빠른 고블린들이 앞을 막아섰으나 어김없이 기사들의 칼날 아래 죽어갔다.
“으악!”
“칼스!”
또 한 명의 기사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운이 없게도 오크의 칼에 관통상을 입은 기사에게로 고블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피의 잔치를 즐겼다. 언제나 인간의 사냥의 대상이었던 몬스터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기사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블랙 오우거들이 진로를 방해하던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잡으며 전진을 했던 까닭에 후미의 기사들은 벌써 공격사정권까지 좁혀진 상태에 이르렀다.
벌써 몇이 무자비한 주먹에 희생당했다. 돌아서서 싸운다면 그토록 허무하게 죽진 않을 그들이었지만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신이시여! 정녕, 이 카르스를 버리시나이까!”
카르스는 달리면서 신을 부르짖었다.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 그의 좌우를 호위하며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기에 서서히 지쳐갔다.
“전하 조금만 참으십시오! 전방에 강이 있습니다! 강만 넘으면… 헉!”
“으윽!”
콰앙!
그들이 질주하던 전방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불가능의 엄청난 화염이 떨어졌다. 질주하던 셋의 육신이 폭발의 반탄력으로 인해 뒤를 쫓던 몬스터들에게로 튕겨서 날아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셋은 정신을 잃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몬스터들이 그들에게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물러나라!”
허공을 웅웅 울리는 공명이 주변을 몰아쳤다.
혼절한 카르스와 기사들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며 사방으로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꽃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육신을 드러났다. 칸빌이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른 그는 제법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육신 주변의 불꽃이 조금은 줄어든 듯 보였다.
그는 혼절을 하고 쓰러져 있는 카르스와 폭스 후작 등을 내려다보며 괴소를 흘렸다.
“꽤 강한 기운을 지닌 놈들이군.”
그가 성큼 움직이자 몬스터들은 두려움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난폭했던 블랙 오우거들도 마찬가지였다.
“마계의 종자들이여! 다음 명이 내려질 때까지 어둠 속으로 돌아가라!”
칸빌이 허공에다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블러드 와이번들과 블랙 오우거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크들과 고블린들 역시 썰물이 빠져나가 듯 사라졌다.
카르스를 살피던 칸빌의 눈동자가 화염으로 출렁거렸다.
“이놈들도 그 흑발을 한 놈들과 비슷한 기운을 지니고 있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인간 세상에 이토록 마기가 만연해 있다니…….”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던 인간들을 떠올렸다.
그들과 비슷한 기운을 이들이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들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칸빌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후후! 너희들의 힘을 가져가겠다. 100일이 지나면 너희들은 위대한 마계의 전사들로 새롭게 태어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 * *
우우웅…….
마나의 진동이 요란하게 텔레포트진, 주변을 몰아쳤다.
그리고는 잠시 후, 누군가가 그곳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론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 테세우드 공작이었다.
모든 이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대마법사 쉐인이 그를 맞이했다. 역시 고개를 숙여 화답한 테세우드 공작은 곧장 쉐인의 안내를 받아 사령막으로 이동했다. 지위가 높은 귀족들도 그를 따라 사령막에 모였다.
간단한 다과를 준비한 그들은 곧장 회의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테세우드 공작이 물었다.
“놈들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까?”
테세우드 공작의 물음에 쉐인이 대답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마법병단이 자리를 비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몬스터 토벌 과정에서 뭔가 일이 벌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흠…….”
“신께서 주신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그래서 내가 직접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케논 산맥을 수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놈들의 일부지역까지 쓸어버릴 작정입니다!”
테세우드의 말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모두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일 때, 레이놀드 백작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몬스터들을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테세우드 공작이 무릎을 치며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아! 그렇지. 출진에 앞서 그 친구들을 먼저 만나봐야겠군. 지금 어디 있느냐?”
“공주와 함께 능선에 주둔한 선발진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오라고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직접 그곳으로 가겠다.”
당장에 급한 듯, 테세우드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시겠습니다.”
레이놀드 백작이 앞장섰다.
테세우드 공작은 쉐인을 돌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모든 준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놈들이 진영을 전력을 보강하기 전에 쓸어버려야 합니다. 저 친구들이 공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텔레포트로 이동해 온 기사들을 가리켰다. 모두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테세우드 공작의 사병들인 그들은 신비에 가려진 집단이지만 그 무력만큼은 엄청나다고 제국에 소문이 파다한 자들이었다.
“내일 아침에 출진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럼!”
테세우드 공작과 레이놀드 백작이 빠른 걸음으로 사령막을 벗어나자 쉐인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배석한 인물들과 논의에 들어갔다.
* * *
테세우드 공작과 레이놀드 백작은 소수의 기사들만 데리고 케논 산맥의 능선을 향했다. 가는 내내 레이놀드 백작은 정체불명의 괴물체와 아르소의 기사들에 대한 모든 것을 늘어놓았다.
테세우드 공작은 괴물체와 싸워서 기어코 물리쳤다는 아르소의 기사들에게 대단히 큰 관심을 보였다. 물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 아닌가? 말을 늘어놓는 레이놀드 백작도 사실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모른다.
그 자리에 없었으니 당연했다.
다만 그들에 대한 소문은 그들과 함께했던 아르소의 기사들에 의해 전 주둔군에 조금씩 돌고 있는 중이었는데, 마침 그것을 들은 레이놀드 백작이 요란 제국의 마법병단의 부재를 보고할 때, 그 부분에 대한 것을 함께 보고했던 것이다.
“어지간한 기사들을 한 번에 몰살을 시킬 정도의 괴물과 싸워서 물리쳤다면 결코 이름 없는 자들은 아닐 터, 어디서 온 어떤 자들인지는 알아보았느냐?”
“그냥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의 숙부들이라고만 했습니다. 셤서라는 곳에서 왔다더군요.”
“셤서? 그런 곳이 제국에 있었나?”
“다른 대륙의 조그마한 섬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건, 저도 아직은…….”
“흠… 하여튼 그들을 우리 측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레이놀드 백작이 코를 벌름거리며 대답했다.
“레이나 공주가 꽤나 공을 들인다고 들었습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 황제 측으로 간다면 우리에겐 적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끌어들여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그들은 레이나 공주가 주둔하고 있는 진영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 * *
레이나 공주는 요리를 하느라 꽤나 분주했다.
태어나서 스스로 요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황실의 주방장에게 대부분의 요리에 대한 공부는 했었던 그녀였기에 손놀림은 꽤나 익숙했다.
“아리안! 그것 좀 가져다 줘.”
“뭘요?”
“고기 썰어놓은 것 말이야.”
연소민이 그녀의 요리를 돕고 있었다.
그리고 불을 피워놓은 화로엔 우드와 요란이 앞치마를 두르고 뭔가를 열심히 썰어대고 있었는데, 케논 산맥에서만 서식한다는 산양고기였다.
천막 안이 구수한 요리냄새로 가득했다. 천막을 젖히며 가투소가 들어섰다. 양손 가득 뭔가를 안은 그의 뒤쪽으로 솥을 걸어놓고 불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는 기사들이 보였다. 큼지막한 산양 몇 마리가 곳곳에 통째로 불에 구워지고 있는 모습은 저절로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마마! 이제 삶기만 하면 됩니다.”
“수고했어요. 가투소 대장! 오늘만큼은 모두들 배불리 먹고 즐기라고 하세요. 술도 잔뜩 준비했으니 음식은 충분할 거예요.”
“하하! 모두들 신나서 죽으려고 합니다.”
“호호! 그래요? 숙부들은 벌써 술판을 벌이셨죠?”
“하하! 1시간 전에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하여튼…….”
모두가 밝은 표정이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슬픔보다는 왕전등의 놀라운 능력을 확인한 것에 대한 설렘이 더 컸던 탓이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던 레이나 공주는 누구보다 밝은 얼굴로 음식준비에 열을 올렸다.
“전, 담대 숙부께 가봐야겠어요.”
연소민이 손을 털고 일어섰다.
“치료 때문이야?”
“예.”
레이나 공주에게 환한 미소로 화답한 그녀가 천막을 올리려고 손을 뻗을 때 헤론 후작이 다소 급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의 표정이 경직된 것을 본 레이나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테세우드 공작이 오고 있습니다.”
“예?”
대번에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마도 저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
나가려던 연소민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숙부들 때문이라면 혹시……?”
“그래. 틀림없이 제 사람으로 만들려고 수를 쓰러오는 것이겠지.”
헤론 후작이 힘주어 말했다.
“저들의 신분은 마마의 호위기사들입니다. 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누구도 저들을 데려갈 수 없습니다. 테세우드 공작이라도 마찬가집니다!”
수건으로 손을 닦은 레이나 공주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국군의 총사령관은 그예요. 분명 그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게 뻔해요. 지금이 전시라고 우기면 마땅한 방법이 없어요.”
정체불명의 괴물체와 전투를 벌인 것은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소식이 들어가고 직접 나선 것이다. 레이나 공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소민이 그녀를 달랬다.
“숙부님들을 믿으세요. 오란다고 가실 분들이 아님을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마마!”
누군가가 천막으로 바삐 들어서며 레이나 공주를 찾았다. 천인장 휼튼이라는 기사였다. 그가 자신을 찾는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곧 간다고 전하세요.”
“예! 마마!”
휼튼이 다시 천막을 벗어나자 레이나 공주는 연소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리안만 믿겠어. 그들은 아리안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니까…….”
“알겠어요.”
연소민은 웃음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내심으로는 공주의 신분으로 공작의 눈치를 보는 그녀가 안쓰럽게 생각했다.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이 테세우드 공작을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요란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흑야 님이 돼지와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돼지… 아! 레이놀드 백작 말인가요?”
“꽤나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저도 죽도록 싫은 놈이지요.”
“훗! 요란 님이 먼저 싸우는 거 아녜요?”
“법만 아니라면 그러고 싶습니다. 하하!”
요란은 꽤나 밝아져 있었다.
음습했던 지난날의 이미지는 전혀 없었다. 혼자서만 살아왔던 그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성격이 변해간다는 증거였다. 특히, 우드와 그는 무척이나 가까워져 있었는데 매일 요란이 마법을 전수할 정도였다.
* * *
가투소부대의 기사들이 모두 부동자세로 굳어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테세우드 공작 때문이다.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그가 뜬금없이 나타나자 부대 전체엔 긴장감이 흘렀다. 반면에 아르소의 기사들은 그를 몰라보고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한 관계로 레이놀드 백작에게 호된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쓰레기 같은 놈들……!”
바닥을 몇 차례 구른 아르소의 기사들은 흙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그들은 두 팔을 허벅지에 붙이고 전방을 바라보는 자세로 꼼짝을 하지 못했다.
움직이면 곧장 영창으로 보낸다는 레이놀드 백작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하! 공주가 옵니다.”
레이놀드 백작의 말에 테세우드 공작은 시선을 우측으로 돌렸다. 반가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얼굴을 한 레이나 공주가 가까이 다가오자 테세우드 공작은 가볍게 고개 숙여 그녀를 맞았다.
레이나 공주 역시 살짝 고개만을 숙여 화답했다.
서로를 향한 눈빛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주인을 모시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론 후작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레이놀드 백작을 차가운 눈빛으로 대했다.
명백히 레이놀드 백작은 헤론 후작의 아래였다.
하지만 태도는 전혀 상관에 대한 예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레이나 공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제야 그녀는 부동자세로 선 아르소의 기사들을 보았다. 진흙투성이로 변해 있는 그들의 갑주상태를 보니 어떤 상황인지 듣지 않아도 훤히 짐작이 갔다.
그녀의 고운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벌을 준건가요?”
“흐흐! 각하께 불경을 저질러서 벌을 주던 참입니다. 촌놈들이라 대갈통을 개조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만…….”
“감히, 나와 함께하는 기사들을 당신 마음대로 벌을 주다니! 오만하군요. 레이놀드 백작!”
“마마! 케논 산맥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기사들은 제 소관 하에 있습지요. 물론 이곳에 있는 저 촌놈들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고개를 비딱하게 숙여가며 대답하는 레이놀드 백작의 태도에 분노가 치민 헤론 후작이 검을 뽑아 들었다.
챙!
“몸을 똑바로 가누지 못할까? 레이놀드!”
“오호! 이거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후작님?”
“이놈!”
전혀 두려움이라곤 보이지 않는 레이놀드 백작의 능글거림에 헤론 후작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테세우드 공작이 나섰다.
“레이놀드의 말이 맞네, 헤론. 그가 이곳 주둔군의 사령관이니 당연히 모든 기사들은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하네. 소문의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말속에 은근히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드러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레이나 공주가 아니다.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들은 나의 호위기사로 임명된 사람들이에요. 군과는 무관함을 미리 밝혀두겠어요.”
“제국의 법규를 어길 셈이오?”
“제국의 법규에 그렇게 나와 있는 걸 깜박하셨나 보군요. 황실의 직계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폐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부릴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케이론 제국의 법에는 분명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테세우드 공작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걸고는 받아쳤다.
“전시는 모든 것에 예외를 두는 법이오. 지금은 전시이니 당연히 예외법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소? 물론 법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말이오.”
“……!”
레이나 공주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말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말한 조항도 전시에는 무효였다.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테세우드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르소의 기사들은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옮겨가자 선 자세 그대로 눈만 멀뚱거렸다. 그때 양측의 최대 관심사인 왕전 등이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광경이 모두의 눈에 비쳤다.
테세우드 공작의 눈동자에 진한 호기심이 어렸다. 반대로 레이나 공주는 얼굴색이 확연히 어둡게 변했다.
‘하필이면 지금 이곳으로 올 게 뭐야.’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테세우드 공작의 만남을 저지하려고 했건만 그들, 스스로가 테세우드 공작 앞에 나선 꼴이 되어버렸다. 우연이라지만 레이나 공주는 마음이 무척 불안했다.
“저 친구들입니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레이놀드 백작이 성큼성큼 왕전 등에게로 걸음을 놓았다. 얼굴색이 변한 레이나 공주를 쳐다보는 테세우드 공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요란 제국의 놈들도 어쩌지 못한 괴물체를 물리친 것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러 온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은근히 비꼬는 어조였다.
‘교활한 여우같은 인간!’
레이나 공주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왕전 등을 보며 발을 굴렀다. 테세우드 공작이 그들에게 본영으로 파견을 명령하면 어쩔 수 없이 그들도 따라야 한다. 제국의 군사권은 그에게 있었으니까.
그다음은 불을 보듯 훤했다. 온갖 유혹으로 그들을 회유하려 들것이 분명했다.
* * *
“요리를 하다말고 여기서 뭣들 하시오?”
왕전이 큰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 등이 한곳에 몰려 있자 의아한 빛으로 쳐다봤다. 그때, 먼지투성이로 서 있는 아르소의 기사들을 발견한 조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봐! 너희들 왜 그래?”
기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뒤늦게 와서 한쪽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가투소도 입을 굳게 다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걸어가던 레이놀드 백작이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껄껄! 테세우드 각하께서 오셨다! 모두들 예를 갖추어라!”
그제야 모두는 레이나 공주의 옆에 서 있는 테세우드 공작을 쳐다봤다. 자신들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저놈이 그 공작인가 하는 그놈인가 보군.]
[제법 강한 힘을 지녔군. 꽤 강하겠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놈들 중, 하나이니 당연히 강하겠지.]
[그런데, 저놈이 왜 우릴 보고 실실 웃는 걸까? 저 공주표정은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전음으로 그들은 의아함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레이놀드 백작의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놈들! 예를 올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북궁천소의 미간에 굵은 힘줄이 돋아날 때, 연소민이 재빨리 뛰어왔다.
“숙부님들! 제국의 테세우드 공작이세요. 인사드리세요.”
[싸우시면 곤란하니 하는 척만 해주세요.]
그녀는 재빨리 전음으로 부탁했다. 그녀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레이놀드 백작의 턱은 작살이 났을 것이다. 그들은 레이놀드 백작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응? 이, 이놈들이……!”
레이놀드 백작은 다섯이 그냥 자신을 지나쳐가자 귀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질에도 아랑곳 않은 모두는 테세우드 공작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담대소천이 레이나 공주를 응시했다.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테세우드 공작이세요.”
“공작을 뵙습니다!”
담대소천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뒤에 섰던 나머지는 머뭇거렸다. 북궁천소는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주공께서 오시기 전엔 곤란한 일을 만들지 마라.]
담대소천이 전음으로 그같이 말하자 그때야 모두는 건성건성 고개를 숙였다. 불량기마저 풍기는 그들의 태도에 테세우드 공작은 내심 불쾌했지만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대들의 공로는 보고를 통해 들었다! 제국의 모든 군사를 지휘하는 책임자로서 기사들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지랄한다.]
[그만 해라.]
북궁천소와 왕전은 속이 울렁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저절로 욕이 들끓었지만 담대소천의 만류로 모두는 용케 참아냈다. 테세우드 공작이 서둘러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레이나 공주에게 목소리에 무게를 싣고 말했다.
“더 이상 이곳에 주둔할 필요가 없어졌소. 정체불명의 괴물체가 출현한 이상, 조만간 최정예로 부대를 꾸려 다시 올 것이니 본대로 합류해야겠소.”
“공작의 뜻인가요?”
“있어봤자 피해만 늘 뿐이니 서두르시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연상시키는 화염을 뿜어내는 괴물체가 다시 나타난다면 왕전 등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레이나 공주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본대로 합류하면 저들과 자신을 떼어놓으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때, 담대소천이 나섰다.
“우린 합류하지 않겠소.”
“뭣이!”
“……!”
그는 레이나 공주를 쳐다보며 특유의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린 따로 갈 곳이 있어서 이만 헤어져야겠소.”
레이나 공주는 갑작스러운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당황하기는 테세우드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요량으로 만사를 제쳐두고 부리나케 달려왔건만 보자마자 가버린다고 하니 그의 입장에선 그럴 법도 했다.
레이놀드 백작이 테세우드 공작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슬쩍 고개를 저은 테세우드 공작이 직접 나섰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제국군의 소속으로 본 공작의 허락 없이 어딜 간단 말이냐?”
그의 매서운 어조에도 담대소천은 테세우드 공작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여전히 레이나 공주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굴 찾아가려는 것인지는 아실 거라 믿소.”
“주공이라는 분께 가는 거군요.”
레이나 공주의 목소리는 꽤나 풀이 죽어 있었다. 연소민이 측은한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니야. 괜찮아.”
“다시 돌아오면 꼭 마마께 들를게요. 약속해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신이 소외되자 테세우드 공작은 속에서 불끈 부아가 치밀었다. 황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자신을 눈앞의 인물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더욱이 공식적인 작위를 지닌 아리안마저도 그런 태도를 보이자 그의 눈매가 매섭게 돌아갔다.
테세우드 공작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우우웅!
허공에서 마나의 소용돌이가 요란스럽게 일어났다.
느닷없는 상황에 모두는 뒤로 물러나며 허공을 쳐다봤다.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빛이 번쩍하며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어! 진천!”
진천이었다.
담대소천을 비롯한 모두가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진천의 표정이 평소의 그와는 너무 달랐다.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의 진천은 테세우드 공작과 레이나 공주 쪽을 흘긋 쳐다보고는 담대소천 등에게 걸어갔다.
“저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형님들!”
“어딜?”
“주공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렇잖아도 찾아 나서려는 중이었다. 헌데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거냐? 너, 얼굴이 왜 그런 거냐?”
“가보시면 압니다. 서두르십시오. 소민도 함께 간다.”
차갑게 굳은 진천을 보며 모두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때 카루가와 우드, 그리고 요란이 재빨리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요란을 본 진천이 날카로운 눈빛을 발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요란이다. 담대소천이 요란을 진천에게 소개했다.
“새롭게 맞은 친구다. 앞으로 함께할 거니 서로들 인사나 해.”
“요란이라고 합니다.”
요란이 허리를 굽혔으나 진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서두르세요. 마법진이 곧 닫힙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주공께서 기다리신다니 서두르자.”
모두가 진천이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레이놀드 백작이 아니었다.
“이놈들! 감히 각하의 명을 어길 셈이냐? 군법에 회부되고 싶은 게냐?”
진천이 그를 돌아보며 차갑게 물었다.
“넌, 누구지?”
“뭐, 너, 너라고 했냐?”
“죽기 싫으면 꺼져!”
“이런 미친 새끼를 봤… 으헉!”
레이놀드 백작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토해냈다. 10미르밖에 섰던 진천이 어느새 레이놀드 백작의 코앞에 나타나 있었다. 섬뜩한 기운이 매섭게 요동치는 진천의 눈동자가 레이놀드 백작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미치면 넌 죽어.”
“흡……!”
스슥!
진천의 육신이 유령처럼 사라지더니 마법진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후후! 인연이 되면 또 봅시다!”
왕전이 레이나 공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연소민은 여전히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헤어짐이 섭섭하기는 그녀도 레이나 공주에 못지않았다. 진천의 가공할 신법에 놀란 테세우드 공작과 레이놀드 백작이 잠시 멍한 상태를 보일 때 모두는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휘이잉…….
찬바람이 불어 먼지가 잔뜩 일었다.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은 무척이나 굳어 있었다.
‘분명 텔레포트였다. 그것도 정해진 좌표에 설치된 마법진이 아닌 이동… 설마 혼자의 힘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할 정도의 마법사였단 말인가?’
텔레포트진을 이용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펼치는 것은 대마법사들의 전유물이다. 이곳에 텔레포트를 시전할 포탈이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니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무척 어려보이는 금발청년이 그것을 펼쳤다.
테세우드 공작의 고개가 벼락같이 레이나 공주에게로 돌아갔다.
“대화를 좀 나누어야겠소!”
* * *
홀베른 공국의 궁전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혁련천후는 앉아 있었다.
공허한 그의 시선은 초점을 잃은 채, 그저 허공에 던져져 있었다. 천지간을 가득 덮은 눈발은 그의 어깨에 하염없이 쌓여만 갔다.
휘이잉…….
매서운 칼바람이 사위를 몰아쳤지만 그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주변이 그가 비운 술병으로 가득했다.
스스슥!
그의 뒤쪽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백색 일색인 세상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눈부신 미녀였다. 여인은 그의 뒤에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그분들께서 오셨습니다.”
에이미 공주였다.
혁련천후는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에이미 공주 역시 뒤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그의 뒷모습만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혁련천후가 입을 열었다.
“요란 제국에 있는 드래곤의 심장을 얻으면 그녀들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왜 시도하지 않았던 거지? 너희들에겐 그녀들이 소중하지 않았던 것이냐?”
에이미 공주는 그 물음에 흠칫했다. 그리곤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아이아스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궁을, 아니 제단을 비우지 못했습니다.”
에이미 공주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앞의 존재, 그 광포함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그녀는 최대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엔 꽤 강한 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 중, 소수만 보내면 충분하리라 보는데…….”
“그곳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저희들 못지않게 강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견제하는데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서로 원하는 것을 지녔으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놈들이 아이아스의 심장을 원하는 이유는……?”
“켈베로스라는 존재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는 수백 년을 살아오는 불사의 존재라고 전해진 자입니다. 입수한 정보로는 그가 마계전쟁에서 패한 뒤, 인간세상으로 강제로 쫓겨난 마계의 황족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쫓아낸 마계에 복수하고자 힘을 키우고 있다고 했는데, 아이아스의 심장과 고룡, 트로이안의 심장을 이용해 강력한 힘을 얻으려는 속셈입니다.”
혁련천후는 켈베로스라는 이름을 듣자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생겨났다. 에이미 공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놈이 정체불명의 강자들을 이계에서 소환시켜 수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나 엄청난 강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현재 대외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크로우기사단이라는 자들이 그들 중 하나인데, 그들의 수장은 대륙의 초인보다 강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 정도로는 네 아버지와 기사단장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지금껏 미룬 것이란 말이냐?”
그의 주변에 한풍이 몰아쳤다. 결코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에이미 공주의 얼굴에 살짝 땀방울이 맺혔다.
“그들의 모든 전력을 확실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혁련천후는 잠시 말을 끊었다.
에이미 공주는 잔뜩 긴장한 채 오직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고운 미간에 맺힌 땀방울이 이내 얼음으로 변해갔다. 날씨는 그만큼 매섭게 차가웠다. 잠시 하늘에 시선을 던졌던 혁련천후가 입을 열었다.
“내게 모든 것을 말해라.”
“……!”
“그녀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말이다. 요란 제국이 왜 너희들의 선조들과 싸웠는지, 너희들이 파악한 그곳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네게 말하란 말이다.”
에이미 공주의 커다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림을 보인다.
그녀는 불길한 마음이 일었다.
‘복수……!’
그랬다.
눈앞의 존재가 복수를 꿈꾸고 있다고 그녀는 확신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는 호흡을 고르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