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34화 (34/55)

제3장

홀베른의 비밀

홀베른의 인구는 2십만이다.

왕국으로 보기엔 작고, 공국으로 보기엔 큰 규모라고 할 수 있었다. 영토 또한 제국의 수도와 비슷한 크기였기에 스스로는 왕국이라 칭했지만 외부에선 그들을 공국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케이론의 영토에 가까운 탓에 대륙은 홀베른을 케이론의 위성국가로 보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륙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독립된 국가의 백성으로 큰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었다.

700년 전 몬스터와의 대전 이후 홀베른 평원에 세워진 거대한 궁전은 홀베른의 산 역사와도 같은 곳이다. 홀베른의 모든 사람들은 그곳을 경배와 숭상의 성지로 삼고는 광장을 찾아와 축복을 빌고 염원했다.

그들이 축복을 소원하는 대상은 신이 아니다. 홀베른을 세운 선조들이 그 대상이다. 몬스터들의 마수에서 인간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은 홀베른의 백성들은 오늘도 제단을 찾아 그들의 동상 앞에 머리를 숙였다.

제단이 내려다보이는 궁전의 지붕에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과일을 먹고 있었다.

“흠! 역시 이곳의 과일은 최고야. 너무 맛있어!”

아리엘이었다.

중성적인 모습에서 완연한 여인의 모습을 한 그녀는 여전히 갑주차림으로 과일을 바구니채로 껴안고 있었다. 검술대회가 중도에 끝나버렸음에도 그녀는 홀베른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는 그녀만이 알뿐이었다.

그리고 홀베른 측에서도 그녀에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었다.

“흠! 날씨 한번 좋다!”

눈이 그친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평원을 덮은 눈에 반사된 햇빛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간혹 평원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록들은 이곳이 동화 속의 세상이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제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재배된 사과를 한입 물은 아리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한시도 입을 가만두지 못했다.

“어머! 엉덩이가 엄청 크네? 가슴은 완전히 호박만 하잖아?”

지나가는 여인들의 몸매를 보며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엉덩이도 만졌다 하면서 혼자 수다를 떨기에 분주했다.

살짝 찡그린 얼굴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남자들이 봤다면 심장이 터질 정도로 그녀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이었다. 말투만 빼고…….

“이 정도면 환상적인 몸맨데, 쩝! 왜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내가 못생겼나?”

아리엘은 반짝이는 투구를 들어 얼굴에 비추었다. 스스로 봐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이 투구에 비쳤다.

머리를 뒤로 넘기던 그녀가 살짝 주변을 살폈다.

“귀가 드러나면 곤란해. 내 정체가 탄로 날 수 있으니까…….”

그녀의 귀가 조금 이상했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다소 길고 뾰족한 형태였다. 재빨리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린 그녀는 다시 등을 기대고 과일을 입으로 가져갔다. 다시 사람구경에 돌입한 그녀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 빛내더니 벌떡 일어섰다.

“어머! 멋쟁이 아저씨가 나왔네.”

스슥!

* * *

“안녕!”

혁련천후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들어대며 다가오는 아리엘이 보이자 슬쩍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놓았다.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아리엘이 턱을 살짝 내밀며 물었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혁련천후는 대답 없이 걸음을 빨리했다. 아리엘은 잽싸게 따라붙으며 입을 놀렸다.

“지금 어딜 가나요?”

“……!”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서로 말은 하면서 지내죠.”

“난, 남자 같은 여자는 싫다.”

“남자 같은 여자? 내가?”

아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눈을 가늘게 하고서 혁련천후를 쳐다봤다. 그는 벌써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남자 같다고? 가슴이 작아서 그런가? 이 정도면 풍만한데…….’

잠시 자신의 몸매를 살핀 그녀는 다시 혁련천후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어디 가세요?”

짧은 순간에 그녀의 말투는 무척 여성스럽게 변했다.

혁련천후는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많은 것을 물었지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은 그를 아리엘은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연방 쫑알댔다. 잠시 후,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는 중얼거렸다.

“여긴 공방인데?”

그랬다.

그가 멈추어 선 곳은 홀베른 최고의 장인이 운영한다는 금속공방이었다. 드래곤의 뼈도 가공할 줄 안다고 소문난 그는 국왕이라도 선약이 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혹자는 그가 신의 재주를 지녔다는 드워프의 후예라고 말하기도 했다.

딸랑딸랑!

혁련천후는 문고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시오?”

삐거덕!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덥수룩한 수염을 코밑까지 기른 장한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혁련천후의 아래위를 기분 나쁘게 살피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선약은 하셨수?”

“그대가 장인인가?”

“난, 아니오. 선약은 하셨수?”

“장인을 불러라.”

장한의 눈초리가 매섭게 돌아갔다. 반말 때문이다.

“이 자식이 입에 걸레를 처 물었나. 말끝마다 반말이네. 선약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곱게 쳐 돌아가라이!”

쾅!

어찌나 세게 문을 닫았는지 문고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리엘이 혀를 내둘렀다.

“성질 한번 끝내준다.”

아리엘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혁련천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반응은 대번에 나타났다.

쾅!

나무에 철을 덧댄 육중한 정문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났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아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런 개자식이!”

거친 욕설과 함께 장한이 성난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뛰어왔다. 팔을 걷어붙이며 오는 모양새가 한바탕 주먹질을 할 태세였다. 물소처럼 돌진해 들어오던 장한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혁련천후의 눈을 본 것이다.

“장인을 불러라.”

“그, 그…….”

그때였다.

“뉘시오?”

탁한 음성과 함께 우측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백발에 가죽조끼를 걸치고 손에는 커다란 망치를 든 노인이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이 눈처럼 흰 백발과 어울려 묘한 느낌을 풍겼다.

“그대가 이곳의 주인인가?”

“그렇소만, 무슨 일이기에 이런 난동을 부리는 것이오?”

“드래곤의 뼈를 가공할 줄 안다고 들었다. 맞나?”

“내 물음에 먼저 대답하시오. 난동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이며 당신은 누구요?”

“그분께 예를 갖추세요. 테리스!”

아름다운 음성이 울리며 마당에 누군가가 모습을 나타냈다. 여인이었다. 노인, 테리스는 그녀를 보자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공주마마…….”

나타난 여인은 에이미 공주였다.

그녀가 순간이동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아리엘의 눈동자가 살짝 빛을 발했다.

“여전하시군요. 테리스.”

“마마께서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헌데 기별도 없이 어인 일로…….”

에이미 공주가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자신이 말을 하겠다는 뜻을 눈빛으로 물었다.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미 공주는 다시 테리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곳에 세워둘 참인가요?”

“오! 이런! 어서 이리 오시지요. 마마!”

모두는 테리스를 따라서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장한은 산산조각이 나버린 정문의 파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응! 마법이 아니었네? 그럼, 주먹 한 방에 이게 이렇게 되었단 말이야?”

그는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조금 전, 그의 눈빛을 떠올리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눈빛이었어. 으흐!”

몸서리를 친 그는 빗자루를 들고 와서는 마당을 치우기 시작했다.

* * *

테리스는 고즈넉한 공간으로 모두를 안내했다.

바깥에서 볼 때와는 달리 공방 안쪽은 매우 넓었다. 각종 설치물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들이 들어선 방에서 바깥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웃통을 벗은 채, 열심히 뭔가를 만들고 있는 장인들을 바라보며 테리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수고가 많으시군요.”

“허허! 모든 게 홀베른을 위한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아! 그리고 부탁하신 건 며칠 후면 완성이 될 것 같습니다. 마마!”

“고마워요. 테리스! 그리고 하나 더 부탁드릴 게 있어요.”

테리스가 눈빛으로 그게 뭐냐를 물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에이미 공주는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그전에 이분께 예를 올리세요. 상왕 전하세요.”

“예? 그게 무슨…….”

테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상왕이라면 현 국왕의 선대왕이란 소린데, 선대왕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홀베른의 모든 국민들은 알고 있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궁으로 들어가서 말해 줄게요. 단, 이분께서 홀베른의 진정한 주인이시니 어서 예를 올리세요.”

테리스는 여전히 주저했다.

“인사 따윈 필요 없어!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알겠습니다.”

에이미 공주가 이동식 인벤을 열어 그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투명하게 빛나는 그것을 본 테리스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이, 이것은……!”

호기심 어린 빛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아리엘도 크게 놀랐다. 놀랍게도 그녀가 내놓은 것은 드래곤의 뼈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질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그것은 장인들에겐 꿈의 재료이자 소재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테리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것으로 무기를 만들어주세요. 형태는 그림으로 그려왔으니 보시고 그대로 만들면 돼요.”

그녀가 내놓은 드래곤의 뼈는 상당한 양이었다.

1미르 정도면 어지간한 대저택보다 더한 값을 받을 수 있다는 그것이 거의 50미르 가까운 분량이 쏟아졌다. 탁자 위에 왕궁을 세우고도 남을 돈이 쌓인 것과 같았다.

“마마! 이렇게 많은 무기를 어디다 쓰시려고…….”

“언제까지 가능한지, 그것만 말해!”

혁련천후의 차가움에 에이미 공주는 눈빛으로 테리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잠시 혁련천후를 바라보던 테리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마마의 말씀은 귀담아 듣지 않겠소. 그저 내겐 국왕 전하만이 주인일 뿐이오. 단, 내게 명령조로 말하지 마시오. 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사람이니 다시 한 번 그런 식으로 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겠소. 아시겠소?”

테리스의 그 같은 말에 크게 놀란 에이미 공주가 입을 열려고 할 때, 테리스의 짧고 굵은 육신은 이미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으윽!”

테리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육신을 사슬처럼 조이고 있었다.

“하라면 하는 거다. 하지 않으면 너희 일족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알겠나? 난장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에이미 공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테리스는 함부로 해선 곤란한 인물이다. 그가 지닌 장인기술은 홀베른의 전력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혹, 마음이 틀어져 홀베른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손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혁련천후는 당장에 죽이겠다는 듯 테리스에게 엄포를 놓았다.

“거절하면 죽는다. 기한을 넘겨도 죽는다. 알았나?”

“으으…….”

테리스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엄청난 압박감에 몸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언제나 밝은 표정의 아리엘이 조금은 굳은 표정이다. 혁련천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이 사람, 변했어. 갑자기 이렇게 분노한 이유가 뭘까?’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도 차갑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엘은 테리스를 쳐다봤다.

‘위험해…….’

조금만 더 지나면 테리스는 죽는다. 그러나 아리엘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콰당!

공중에 떴던 테리스가 사정없이 탁자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며 혁련천후는 차갑게 말했다.

“돌아왔을 때, 완성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에이미 공주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테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테리스의 붉어진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휴…….”

아리엘도 큰 숨을 내쉬었다.

겁을 모르는 그녀도 조금 전의 광포함엔 숨이 막혔던 것이다. 테리스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을 본 에이미 공주는 내심 놀랐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테리스는 두려움을 모르는 종족의 출신이다.

세상의 그 어떤 존재에게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유령을 본 아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테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를 위로했다.

“테리스! 그분을 이해하셔야 해요. 아리엘 님! 자리를 좀……!”

“훗!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건가? 쳇! 알았어! 나간다고!”

아리엘이 입을 삐죽거리고는 거처를 나갔다. 그때야 테리스가 에이미 공주를 쳐다봤다. 여전히 두 눈엔 막연한 공포감이 가득했다. 아리엘 공주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혁련천후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테리스는 듣는 내내 놀람과 탄성을 반복했다.

그리고 모든 얘기가 끝난 뒤, 자신이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너무나도 엄청난, 아니 위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 * *

궁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넓은 대전에 모두가 모였다.

가장 상석에 혁련천후가 앉았고 좌우로 담대소천 등이, 그리고 가장 말석에 홀베른 왕과 에이미 공주가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놀랄 일이었다.

일국의 왕이 가장 말석에, 그것도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조심스럽게 앉아 있었다. 게다가 왕실의 기사단장인 룻거 후작은 아예, 대전의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엔 조금의 불쾌함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

지금 이들은 다크 영지와 아르소의 영지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 근거지가 홀베른으로 정해졌다. 물론 중원으로 돌아갈 때까지에 국한된 것이다.

다만, 곧 있으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크와 아르소의 영지민들이 받을 고통이 마음에 걸렸던 터라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담대소천의 목소리가 좌중을 울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크 영지와 아르소는 별도로 보호를 해줘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는 장시간에 걸쳐 다크 영지와 아르소에 대한 의견을 끝냈다.

연소민이 혁련천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아르소의 영지민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그녀였다.

“어떤 식으로 보호하잔 말이냐?”

혁련천후의 물음에 담대소천이 대답했다.

“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몇 번의 전투로 인해 영지민들이 꽤나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터전을 마련해 주고 이주시킨다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홀베른 국왕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것엔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홀베른이 비록 케이론의 제후국이라곤 하지만 엄연히 자치권을 행하는 독립국가입니다. 엄연하게 본다면 타 국가로의 이주는 정치적 망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몇이라면 모를까, 수천에 이르는 영지민들이 한꺼번에 이주를 한다면 케이론 측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대소천도 미처 그 생각은 못했던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이런 대화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북궁천소와 왕전은 꾸벅꾸벅 졸았다. 마침 그것을 본 혁련천후가 둘을 불러 깨웠다.

“예! 주공!”

둘을 지그시 노려본 혁련천후가 조윤에게 물었다.

“이곳에 집단전에 쓰일 전차가 있다고 들었다.”

“궁의 외곽 연병장이 격납고로 쓰이고 있습니다.”

혁련천후는 북궁천소와 왕전을 다시 응시했다.

“가서 가져 와.”

“예? 뭘 말입니까?”

“전차 200대!”

“뭣에다 쓰시려고…….”

“그냥 가져와.”

“아! 알겠습니다. 기사 놈들을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너희 둘만 가서 가져와.”

둘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나섰다.

[좀 무거울 겁니다.]

[전차 하나의 무게가 소 열 마리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형님들!]

[부럽습니다. 모처럼 몸에 좋은 운동도 하고 말이죠.]

진천과 사공진무가 전음으로 둘을 부러워(?)했다. 왕전과 북궁천소의 살벌한 눈빛에 고개를 움츠린 둘은 자신들이 미처 깜박한 것이 있음을 몰랐다.

“너희 둘도 함께 가라!”

“쿨럭!”

혁련천후가 전음도 엿들을 수 있음을 둘은 깜빡 잊은 것이다.

모두가 모처럼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넷이 나가자 문을 지키고 섰던 룻거 후작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방법이 있습니다!”

모두가 그를 돌아봤다. 부담스러운 존재들의 눈빛이 모조리 자신에게 몰리자 룻거 후작은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텔레포트로 이동시키면 가능합니다. 물론 몇 번을 걸쳐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옳거니! 바로 그거군! 상왕 전하! 그 방법이면 짧은 시간 안에 충분히 두 영지의 영지민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홀베른 국왕이 무릎을 치며 소리를 높였다.

그는 혁련천후를 상왕이라 칭했다. 조만간 대외적으로 대륙의 전면에 나설 혁련천후의 입장을 생각해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 단, 그들의 의사에 따른다. 그곳에 남겠다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두도록!”

“일단은 먼저 소를 찾아야겠습니다. 저희들이 다녀오겠습니다.”

조윤이 그렇게 말하자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함께 간다. 그리고 국왕은 마법사들을 준비시키도록! 그들도 데려갈 것이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혁련천후는 에이미 공주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선이 부딪히자 그녀는 놀란 사슴처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홀베른에서만 생활한다고 갑갑했을 것이다. 이젠, 네 숙부들이 이곳을 보호할 것이니 너도 함께 데려가겠다.”

아리엘 공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실 그녀는 태어나서 홀베른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제단을 지켜야 하는 임무가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강자들도 넘쳐났지만 워낙 중요한 임무였기에 그녀가 맡아야만 했다. 물론 그녀는 세상이 놀랄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홀베른 국왕이 딸을 쳐다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저 아이가 영지민들을 수송하는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마법사?”

조윤이 놀랐다는 듯 짧게 물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음을 말씀드립니다. 허허!”

모두가 감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홀베른 국왕이 그녀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누가 되지 않게끔 조신하게 행동하여라.”

“그럴게요.”

연소민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나도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고마워요. 언니.”

연소민이 한 살 위였다. 이미 만나자마자 친해져버린 둘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흑야가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이곳에 몇은 남아야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강하다. 특히 국왕과 저 친구는 이 세상에서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보다 약하지 않아.”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요란에서 이곳을 노리고 꾸준히 준비를 해왔다면 언제, 어떤 놈들이 들이닥칠지 모르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차를 나르는 놈들에게 이곳을 지키라고 해.”

듣고만 있던 홀베른 국왕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기사단과의 일을 먼저 해결하심이…….”

“……!”

“우리의 피가 흐르는 친구들입니다. 상왕께서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면 크나큰 힘이 될 것입니다.”

팔짱을 끼고서 홀베른 국왕을 지켜보던 흑야가 피식 웃었다.

“놈들이 화산의 후예라며?”

“그렇습니다.”

“주공은 화산의 주인이시다. 보살펴주고 말고가 어디 있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그 친구들을 만나보겠다.”

“모시겠습니다.”

룻거 후작이 재빨리 문을 열고 앞장섰다. 흑야와 조윤, 그리고 담대소천 등이 뒤를 따랐다.

* * *

거처에서 자신의 대도를 다듬고 있는 데얀의 표정은 꽤나 일그러져 있었다.

“웃기는 놈들이야.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뭐? 선조님들의 주인이었다고? 개소리!”

무술대회에 출전했던 한 사내가 뜬금없이 자신이 모시는 선조의 주인이란다. 웃기는 건, 홀베른 국왕이 그걸 인정하고 스스로 머리를 숙였다는 것에 있었다.

대도를 벽에 건 데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팍!

순간, 그가 변했다.

놀랍게도 시커먼 흑발에 흑안을 지닌 중원인의 모습이었다.

“다시는 이 모습으로 변하기 싫었는데…….”

그는 지금의 이 모습이 싫었다.

드래곤 아이아스의 심장을 보호하는 숙명 때문에 대대로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던 선조들의 삶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그마치 700년을 그렇게 살아온 자신들의 선조들이었다. 자신도 태어나서 단 한순간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껏 금발에 벽안의 모습으로만 살아온 그였다.

“멍청한! 그냥 요란으로 쳐들어가 고룡의 심장을 빼앗으면 간단한 것을… 나약해빠진 작자 같으니!”

그는 홀베른 국왕의 유약함이 싫었다.

자신이 이곳을 지키는 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해왔던 말이 그것이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묶여서 살 것인가? 우린 힘이 있다. 그냥 요란으로 쳐들어가서 고룡의 심장을 빼앗아 지긋지긋한 숙명에서 벗어나자.”

하지만 국왕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적도 만만찮은 준비를 해왔다. 모험을 하기엔 선조들의 유지가 너무나도 큰 것이 아닌가? 혹, 우리들의 실수로 잠을 자고 계신 여왕께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죽어서 선조들을 어찌 볼 텐가.”

항상 그가 해왔던 대답이다.

그것 때문에 자신과 국왕은 완전히 틀어졌다.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국왕조차도 함부로 이곳에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가 선조들께서 유지로 남기셨던 전설의 주인인지는 내 스스로 확인해 보기 전엔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 고작 남작 정도가 전설의 주인이라고? 개소리!”

팍!

데얀의 모습은 다시 금발에 벽안의 청년으로 돌아왔다.

“단장님!”

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흑발청년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의 복장이 특이했다. 이 세상의 복장과는 전혀 다른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화산의 무사들이 입는 무복이었다. 소매에 새겨진 매화가지가 유난히 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또 그 옷이냐?”

“언제나 이 옷인데요.”

데얀의 심드렁한 물음에 청년은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신경질적으로 과일을 입으로 가져간 데얀이 못마땅한 빛으로 청년을 쳐다봤다.

“국왕이 뵙자고 하십니다.”

“그 인간이 왜?”

“그분도 오셨습니다.”

“그분이라니?”

“전설의 주인이라는 그분 말입니다.”

데얀의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했다.

“좋아! 잘됐군. 그렇잖아도 한번 볼까 했다. 가자!”

데얀이 벽에 걸린 대도를 집어 들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청년의 그의 거친 반응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는 데얀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본 청년은 우측 벽면을 보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곳에 청년과 같은 복장을 한 인물들이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모두 다섯이었는데 그림만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질 정도로 그림 속의 인물들은 대단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선조들께서 예견하셨던 분이 오셨답니다. 그분이 진정, 전설 속의 주인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야만 저희들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청년은 그림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하듯 읊조렸다.

그런 청년의 두 눈동자엔 열망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숙명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함이었다.

* * *

사방 벽면이 온통 무기들로 가득한 넓은 대전은 케니언크로우기사단의 기사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곳의 수장인 데얀의 취미가 무기를 수집하는 것이기에 대륙에 유행하는 모든 무기들이 사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무기들을 구경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데얀과 기사들의 성정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했던 화산의 다섯 제자들을 떠올렸다. 화산오웅이라 불리며 천하를 종횡했던 그들의 성정이 이곳 대전과 각종 무기들에게서 묻어났다.

“비록 지금은 틀어졌지만 홀베른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남다른 친구들입니다. 성정이 거칠어 상황께 무례를 끼칠 수도 있으나, 속내는 그렇지 않으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국왕은 데얀과 혁련천후가 부딪힐 것을 꽤나 염려했다.

유일하게 혼자 혁련천후를 수행하고 나선 흑야가 대전의 중앙에 걸린 검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진청의 검입니다. 주공!”

혁련천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틀림없었다. 누구보다 거친 싸움을 즐겼던 다섯의 하나인 진청의 검이 분명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그리움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한동안 그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데얀이 들어섰다. 그는 국왕에게 고개만 까닥거리고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혁력천후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흑야의 눈매가 매섭게 돌아갔다.

“일어나서 예를 갖춰라. 애송이!”

“뭐! 애송이?”

데얀의 입가가 올라갔다. 앉았던 그가 다시 일어서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흑야를 노려봤다. 홀베른 국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데얀이 예상했던 대로 반응하자 그는 은근히 노여움을 드러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라! 데얀!”

“후후! 먼저 도발한건 저 작자라고, 국왕 나리!”

데얀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흑야는 혁련천후를 슬쩍 돌아봤다. 묵묵히 데얀을 응시하던 혁련천후가 입을 열었다.

“데얀이라고 했나?”

“이봐! 입 좀, 조심해야겠어. 전설이고 나발이고 수틀리면 모조리 부숴버릴 테니까!”

순간, 흑야의 육신이 흐릿하게 변하며 사라졌다.

꽝!

불꽃이 튀었다.

“이런 개사식이!”

어느새 대도를 뽑아 흑야를 막아낸 데얀이 거친 욕설을 토해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반응속도였다.

“넌, 좀 맞아야겠다. 네놈의 선조들은 그러지 않았는데, 싹수가 글러먹은 새끼군.”

흑야는 꽤나 화가 나 있었다.

자신보다 혁련천후에게조차 함부로 행동하는 데얀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다. 홀베른 국왕은 손으로 머리를 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러나라. 흑야!”

혁련천후의 눈빛이 무척 차갑게 가라앉아 있음을 본 흑야는 데얀을 싸늘하게 노려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무례함에 대한, 용서는 이번뿐이다. 묻는다. 네가 데얀인가?”

“닥쳐!”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놈이군.”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매섭게 변했다. 그는 데얀에게로 걸었다. 데얀이 대도의 방향을 틀어 그에게로 겨누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 700년을 이곳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야. 그런데, 뭐? 네가 전설의 주인이라고?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는 거냐? 개소리 작작 집어치우시지!”

“데얀!”

홀베른 국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혁련천후는 데얀의 지척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화산은 검을 사용하는 곳, 왜 주병을 도로 바꾼 것이냐? 화산의 긍지를 버릴 셈인가?”

“후후! 그런 뭣 같은 소린 집어치워! 난, 화산과는 상관없는 몸이야! 선조들의 유지 따윈 지나가는 개에게나 주라고! 차라리 잘됐어. 전설의 주인이라는 너를 쓰러뜨리고 세상으로 나가겠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이 돌았다.

“네 선조들은 내겐 혈육과도 같았던 아이들이다. 그들을 부정하면 넌 나의 적이라고 봐야겠군. 그렇다면 넌, 죽어야 해.”

“재주가 있으면 그렇게 해보시지!”

“그럴 생각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혁련천후의 육신이 벼락같이 데얀을 덮쳤다.

* * *

쿵…….

갑자기 왕궁이 흔들렸다.

“무슨 일이지?”

연소민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에이미 공주를 응시했다. 그녀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쿵…….

다시 진동이 이어지며 벽에 걸린 액자들이 흔들렸다.

“지진인가? 에이미! 밖으로 나가 보자!”

“예! 언니!”

둘은 창문을 통해 몸을 날렸다.

왕궁의 후문에 위치한 연무장엔 이미 상당한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중엔 룻거 후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들이 나타나자 모든 기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요? 후작님!”

에이미 공주가 묻자 그는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왕 전하께서 데얀을 만나러 가셨는데…….”

“어머! 그럼 데얀이……!”

깜짝 놀란 에이미 공주가 뾰족하게 소리치고는 연소민을 돌아봤다. 연소민이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상황은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이 짐작이 되었다.

“데얀이 누구야?”

“있어요. 그런 사람…….”

“성주님께 대들면 큰일 나는데…….”

“제가 가봐야겠어요.”

“아냐! 나도 같이 가겠어.”

둘은 재빨리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 * *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왕전과 북궁천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걸 우리가 다 날라야 한단 말이냐?”

“으흐…….”

눈앞에 펼쳐진 전차의 행렬은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었다. 널찍한 평원에 햇빛에 반짝이며 줄지어 늘어선 전차의 수는 200대가 아닌 500대에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하나같이 철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어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젠장! 왜 졸아가지고… 돌아버리겠네.”

“네놈 때문에 나까지 걸렸잖아! 망할 자식아!”

“이런, 빌어먹을 새끼 좀 보게?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졸음은 전염이란 말도 모르냐? 네놈이 먼저 조는 바람에 나까지 졸았잖아!”

사공진무와 진천은 싸우는 둘을 보며 혀를 찼다.

“형님들, 지금부터 열심히 날라도 밤을 꼬박 샐까 말깝니다. 서두르시죠. 억울한 건 우리들이니 그만들 싸우세요.”

심드렁하게 말을 던진 진천이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전차가 늘어선 곳으로 걸었다. 암담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개고생을 하게 생겼으니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울상이 되었다.

“야! 너, 환술로 어찌 안 되겠냐?”

“아직 물건까지 옮기는 건 배우지 못했는데요?”

“뭐야? 그럼, 네놈의 환술이 이 세상의 마법보다 허접하단 소리냐?”

“뭐요?”

진천이 발끈하자 왕전이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어쭈구리! 네놈이 지금 나한테 눈을 부라렸냐?”

“끙! 내가 참아야지. 어서 전차나 날라요!”

황당한 얼굴로 전차를 바라보던 사공진무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하!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셋이 엄청난 속도로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라이트 마법이란 거 있잖습니까? 전에 말에다 그걸 걸으니 말이 가벼워져서 엄청나게 빨리 달렸던 그 마법 말입니다.”

“있었지. 그게 왜?”

“후후! 전차에다 그걸 걸면 엄청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오호!”

대번에 모두의 얼굴에 희열이 돌았다.

“우드! 놈을 불러와야겠다! 이봐, 진천! 얼른 뛰어갔다 와!”

“제가요?”

“그럼, 내가 갈까?”

오만상을 찌푸리고 달려갔던 진천이 잠시 후,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의아한 빛으로 진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드는?”

“주공께서 엄명을 내리셨답니다.”

“엄명? 그게 뭔데?”

“도와주지 말라고 하시고는 데얀이란 놈을 만나러 가셨다는데요?”

모두가 울상이 되었다. 그때 ‘쿵쿵’ 하는 진동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소린……!”

“누가 싸우는 거 같은데요?”

“싸워? 이렇게 땅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놈이 이곳에 있단 말이냐? 이 정도면 거의 주공 급인데…….”

말을 늘어놓던 왕전이 북궁천소를 돌아봤다. 마침 그도 같은 표정으로 왕전을 돌아보고 있었다. 진천의 육신이 뿌연 기운으로 둘러졌다. 환술을 펼쳐 파생되는 기운을 감지하려는 것이다. 진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살강기! 데얀이라는 놈이 주공께 덤볐나 봅니다!”

“이런 망할 놈의 새끼!”

콰앙!

넷의 육신이 폭풍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 * *

콰다당!

데얀의 육중한 육신이 사정없이 벽에 부딪혔다. 부딪힌 벽이 금이 갈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 있었지만 데얀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

“빌어먹을! 젠장!”

입은 연방 욕설을 토해냈다.

“좋아! 오늘 너 죽고 나 죽는다! 퉤!”

진득한 핏물을 뱉어낸 데얀은 다시 혁련천후를 덮쳤다. 당초, 긴장했던 홀베른 국왕은 다소 여유로운 표정으로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에 하나 혁련천후가 불상사를 당할까 염려했었지만 싸움은 일방적으로 그가 주도하고 있었다.

퍽!

“우욱!”

곰처럼 달려들었던 데얀의 육신이 다시 벽으로 날아갔다. 이번엔 아예 벽 속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쩌저적!

벽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생겨나며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런 데얀을 바라보며 불신에 찬 눈을 한 인물들이 있었다. 모두가 화산의 무복을 걸친 스물에 가까운 청년들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데얀이 거느리고 있는 케니언크로우기사단이었다.

그들 중, 몇이 달려 나올 듯이 몸을 움직이자 데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끼어들지 마! 끼어들면 죽을 줄 알아!”

“다, 단장님!”

“닥쳐! 너희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란 말이야!”

사공진무의 검도 뚫어내지 못했던 데얀의 갑주는 이미 곳곳이 움푹 파여 있었다. 혁련천후의 주먹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 맨손으로 데얀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직 입을 살아 있군. 힘이 남았으면 어서 덤벼!”

“이런, 썅!”

퍽!

달려들었던 데얀의 육신이 이번엔 상당한 거리까지 날아가서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 모두가 저절로 움찔할 만큼 패대기쳐진 데얀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흑야! 놈을 깨워라.”

케니언크로우기사단의 앞에 섰던 흑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에 쓰러진 데얀의 옆에 나타나자 청년들은 다시 놀랐다.

퍽!

흑야의 발이 사정없이 데얀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정신이 깬 데얀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가슴에 올려진 흑야의 발 때문에 꼼짝하지 못했다.

“더 덤비면 내가 너를 두 동강 낼 거야.”

“이런 개자식이……!”

“후후! 그 말도 나중에 다 돌려주지.”

데얀이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혁련천후가 다가와 흑야의 옆에 섰다. 한기가 물씬 느껴지는 그의 눈동자를 데얀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1시간 안에 왕궁의 연회장으로 오도록! 물론 저 아이들도 함께!”

“닥쳐!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오지 않으면 이곳을 영원히 폐쇄시키겠다. 물론 너와 저 아이들은 죽는 그날까지 이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혁련천후는 등을 돌렸다. 데얀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어준 흑야도 몸을 돌려 혁력천후를 따랐다. 홀베른 국왕이 안타까운 눈으로 데얀을 쳐다보다가 가볍게 한숨짓고는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쾅!

문이 거칠게 젖혀지며 왕전과 북궁천소가 뛰어들었다. 뒤이어 사공진무와 진천이 둘의 옆에 나타났다. 왕전이 성난 곰처럼 으르렁거렸다.

“어떤 개자식이 주공께 건방을 떤 것이냐! 응?”

고함을 지른 왕전은 걸어오는 혁련천후와 흑야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했다.

“주, 주공……!”

“전차는?”

“예? 아, 그게 주공께서 싸우시는 것 같아서 그만…….”

“5시간 안에 옮겨놔.”

“쿨럭!”

* * *

왕궁의 주방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수많은 요리사들이 요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소민과 에이미 공주도 일손을 거들고 있었고, 제법 요리솜씨가 붙은 우드는 별도의 공간에서 요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루가는 우드 옆에서 재료를 날라주며 틈나는 대로 과일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 냄새 좋다!”

“하하! 좋습니까? 조금 드릴까요?”

“싫어! 난, 그래도 과일이 제일 좋아.”

“요즘, 요리를 제법 많이 드셨잖습니까? 빨리 이 세상의 음식에 적응하셔야죠. 하하!”

우드는 쪼그리고 앉아서 과일을 우물거리는 카루가에게 따뜻한 눈빛을 주었다. 이미 둘은 가족 이상의 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비록 카루가가 함부로 못 하는 존재라지만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애정을 그에게 대신 듬뿍 쏟아 붓는 우드였다.

“우드!”

“예! 왕자님!”

“지금 만드는 그게 숙부들이 온 세상에서 먹는 음식이지? 그거 맛있을까?”

“그럼요! 제가 실력이 제법 늘었기 때문에 별미 중에 별미입지요. 조금 드셔볼랍니까?”

“조금만 줘.”

카루가는 우드가 조금 떼어준 요리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우드는 기대 어린 눈으로 카루가의 반응을 기다렸다.

“으… 맛이 이상해.”

“헉! 정말입니까? 그럼 안 되는데…….”

우드는 재빨리 자신도 맛을 보았다. 꽤 맛있었다.

“괜찮은데요?”

“그걸 어떻게 먹어? 그냥 난 과일만 먹을래.”

고개를 갸웃거린 우드는 다시 요리가 끓고 있는 솥에 신경을 쏟았다. 과일을 손에 든 카루가는 주방의 곳곳을 누비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다가 연소민을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뭐 해?”

“카루가 왔구나. 요리 만들지. 좀 줄까?”

“맛있어?”

“먹어 봐. 이래 봬도 난 꽤 알아주는 솜씨가거든.”

카루가는 그녀가 건네준 요리를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우드가 준 것과는 다른 반응이 나왔다.

“와! 맛있다! 뭘로 만든 거야?”

“훗! 돼지고기하고 야채를 섞어서 만든 거야. 더 줘?”

“응! 더 줘.”

쾅!

그때, 주방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서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안으로 비치는 태양의 역광 때문에 누군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연소민이 눈매를 가늘게 하고서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머! 숙부…….”

“뭐 먹을 것 좀 없냐? 배고파 뒈지겠다.”

* * *

“놈이 올까요?”

흑야는 연회장의 입구를 흘긋거리며 혁련천후에게 물었다.

“온다.”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 안 올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기다려 봐.”

혁력천후는 에이미 공주가 건넨 술을 꽤 많이 마셨다. 독한 데다가 뒷맛이 개운해서인지 입에 꼭 맞았다. 그의 우측에 앉았던 홀베른 국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방금 나섰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전서구가 온 것도 아니고, 통신석을 본 것도 아닌데…….”

흑야가 물었다.

“마법을 이용해서 장거리 통신이 가능하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사정거리가 그다지 길진 않지만 왕궁 내에선 충분한 정돕니다. 선조들께서 전음이라 불렀던 것과 흡사한 건데 조금 손을 봐서 개조한 방식입니다.”

어지간한 흑야가 얼굴표정이 바뀔 정도로 감탄했다. 혁련천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다 나섰다고 하던가?”

“그렇습니다. 데얀을 포함한 21인 전부가 정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놈들이 한판 뜨려고 오는 것은 아닐까요?”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해…….”

기다란 탁자의 끝부분에 움츠리고 앉았던 진천과 사공진무가 끼어들었다.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연방 팔과 어깨를 주무르기 바빴다. 전차를 200대도 아닌 500대를 5시간에 나른 덕분에 근육이 뭉친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고개를 들지도 못하게 작살을 내줘야지.”

으르렁거리는 왕전을 보며 흑야가 웃었다.

“성질머리가 네놈하고 비슷하더라.”

“흐흐! 그럼 완전 개 같은 성질이잖아?”

북궁천소가 가는 눈으로 왕전을 홀기며 놀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왕전은 그저 화를 참아야만 했다. 괜히 여기서 소란을 피우다 잘못 걸리면 궁전을 뽑아다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할지도 몰라서였다.

“어머! 왔어요.”

연소민이 가볍게 놀란 소리를 냈다.

모두가 연회장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데얀과 20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여전히 은빛 갑주를 걸친 데얀과는 달리 뒤를 따르는 청년들은 화산의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데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홀베른 국왕에게 슬쩍 고개를 숙인 그는 혁련천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거친 소리를 냈다.

“다시 싸우자!”

“무례는 한 번으로 족하다. 애송이!”

싸늘한 말이 우측에서 들렸다. 조윤이었다. 데얀은 조윤을 보고는 내심 놀랐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담대소천과 왕전 등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강한 놈들이다! 뭐야? 저놈들이 전부 똘마닌가?’

그들과 데얀은 첫 만남이었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흑야와 비교해도 절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갑주를 걸친 담대소천은 다른 자들보다 훨씬 강력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데얀의 그들의 묵직함에 위압감을 느꼈다.

“그만!”

혁련천후가 나섰다.

조윤이 시선을 거두자 데얀은 다시 혁련천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혁련천후가 턱짓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데얀의 입장에선 상당히 모욕적인 태도였다.

“네 자리로 가라!”

입술을 지그시 깨문 데얀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뒤쪽의 청년들은 에이미 공주가 자리를 권했지만 거부하고서 데얀의 뒤쪽에 늘어섰다. 그것을 본 혁련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입을 통해 싸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까지만 그런 행동을 용서하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의 주인은 나다. 그것에 이의가 있거나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 너희들 방식으로 붙어주겠다.”

데얀의 뒤쪽에서 일시에 뜨거운 기운이 확 솟구쳤다.

몇몇은 사나운 기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혁련천후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무례한 놈들이군…….”

담대소천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데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담대소천은 눈빛으로 혁력천후에게 허락을 받은 뒤, 의자를 밀어내고 데얀과 청년들에게로 걸음을 놓았다.

연회장에 정적이 흘렀다.

연소민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초장에 기를 죽이는 것도 괜찮을 거다.]

[하지만…….]

[소천은 강하다.]

그 말에 연소민은 가볍게 호흡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담대소천이 데얀과 청년들을 한 번 쓸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모두 밖으로 나와.”

“지금 우리와 싸우겠단 것이냐?”

“그 말투도 바꿔야겠어. 네 선조들도 내겐 허리를 굽혔거든…….”

“후후! 그걸 증명해 달라고 온 거야. 당신들이 전설의 주인인지를 납득할 수 있게 해달란 말이지. 우리가 납득하지 못하면 오늘부로 우린 홀베른을 떠날 테니까.”

“밖에서 증명해 주지.”

홀베른 국왕이 근심 어린 빛으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그는 담대소천을 걱정했다. 한눈에 그가 강하다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상대는 데얀이다. 혁련천후에게 일방적으로 패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엄청난 강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속내를 짐작한 혁련천후는 옅은 미소로 대신 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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