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35화 (35/55)

제4장

케니언크로우를 접수하다

연회장 밖에 자리한 널찍한 정원에 모두 모였다.

“싸우는 거야?”

허공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리엘이었다. 그녀는 손을 마구 흔들며 활짝 웃었다. 당연히 손을 흔드는 대상은 혁련천후였다.

진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불퉁거린다.

“쳇! 젊은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 보네. 취향 한 번 이상하다.”

“우리도 별로 젊은 나이는 아니거든?”

“주공보단 젊잖아. 쩝! 어째 예쁜 여자들은 죄다 주공을 좋아하냐? 중원에서도, 이곳에서도 말이야. 에잉!”

사공진무가 묘하게 웃으며 진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에이미 공주는 어떠냐? 저 정도면 무지 예쁘잖아.”

“엄연히 촌수를 따지면 저 아인 수백 년 후에 태어난 조카가 되잖아. 에라! 이 미친놈아!”

“그런가?”

에이미 공주는 관산악의 후예이니 진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둘이 수군거릴 때, 데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싸워서 이긴다는 것만으로 전설의 주인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단 말이오? 국왕!”

홀베른 국왕이 난감한 표정으로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혁련천후도 마땅한 대답이 없었다. 데얀이 지켜온 전설에는 자신들의 선조가 몸담았던 화산이란 곳의 주인이 언젠가는 반드시 출현할 것이라 했지 다른 것은 없었다. 데얀의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혁련천후의 눈가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잠시 생각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소천! 물러서라. 내가 하겠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의 의중을 짐작한 담대소천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혁련천후는 데얀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배워온 모든 것을 내게 펼쳐보도록!”

“그게 전설의 주인을 증명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데얀이 인상을 잔뜩 구기고서 물었다.

“너희들이 배운 것으로 모두 상대해 주지.”

그 말에 데얀의 뒤에 늘어선 청년들이 다소 동요했다. 대부분은 불신을 드러냈다. 혁련천후는 화산의 무공으로 그들의 기를 죽일 작정을 했다.

데얀이 그토록 강력한 검법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화산의 태청검법을 익힌 탓이다. 물론 내공운용법이 다른 탓에 조금은 변질된 부분도 있었지만 본질은 태청검법에 충실하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데얀과 싸울 때, 이미 그러한 부분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데얀은 혁련천후가 자신들이 익힌 무공으로 상대한다고 하자 내심 놀랐다. 그건 오직 케니언크로우의 기사들만이 익히는 가문의 비전이다.

‘정말 전설의 주인이란 말인가?’

데얀은 자신과 싸울 때의 혁련천후를 떠올렸다.

그의 주먹질에 드래곤의 비늘로 만든 갑주가 사정없이 구겨지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 그런 강자는 없는 것으로 데얀은 알고 있었다. 대륙에서 초인이라 불리는 강자들도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젠장! 정말 전설의 주인이라면 이거, 꽤 곤욕을 당하겠는데…….’

혁련천후가 진정, 전설의 주인이라면 자신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만 한다. 선조들이 당부했던 것이 그것이었고 자신 역시 그러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데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조금은 찝찝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는 수하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혼자 해볼 생각이냐?”

혁련천후의 물음에 청년은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화산은 강하다. 너희들의 선조는 특히 더 강했다. 그 후손인 너희들이 그들의 명예를 지켜나갈 수 있는지를 보겠다. 와라!”

“타앗!”

청년이 한줄기 기합성을 토해내고는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 * *

‘훗! 흥미로운걸?’

아리엘은 궁전의 옥상에서 눈빛을 발하며 결투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비기를 가동해서 혁련천후와 청년들을 탐지했다.

아리엘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순간순간 힘을 쏟아내는구나.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혁련천후가 발산하는 마나의 움직임이 무척 독특했다.

한순간 거의 무에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공격을 할 때면 갑작스럽게 강력한 마나의 분출이 이루어졌다. 자신도 그 정도는 가능했지만 혁련천후만큼 완벽하지는 못했다.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야. 확! 시집이나 가버릴까?’

혁련천후를 향한 아리엘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화이팅!”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큰소리로 그를 응원했다. 왕전의 부리부리한 눈길과 마주지차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저게 미쳤나?”

왕전이 아리엘을 보고 인상을 부라렸다. 북궁천소가 왕전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게 다 주공이 멋져서 그런 것 아니겠냐? 넌, 한 번도 여자한테 눈길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모를 거다. 그런 마음…….”

“지랄을 하세요. 네놈이나 나나 마찬가지지.”

“새끼야! 난, 그래도 중원에 있을 때, 나 없으면 죽는다고 따라다녔던 여자가 둘은 있었다.”

“흐흐! 그 계집들이 네놈이 멋있어서 그랬겠냐? 네놈의 내공이 탐나서 그런 거지.”

“이런 백정새끼!”

북궁천소를 따라다녔던 여인들은 채음보양술을 전문으로 했던 요녀들이었다. 불끈 성을 내는 북궁천소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보인 왕전은 이내 결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흐! 한 방에 한 놈씩 가는군. 화산장문인이 저걸 보면 입에 거품을 물고 탄식을 하겠군. 놈들도 따지고 보면 화산의 제자가 아니냐?”

팔짱을 하고서 결투를 지켜보던 조윤이 중얼거렸다.

“화가 나셨군.”

“주공께서?”

“그래. 놈들이 생각보다 약해서 그러신 듯싶다. 내가 봐도 저건 완전히 허접질을 하는 거야. 화산의 날카로움이 전혀 보이지 않아. 무식하게 힘을 중시하는 쪽으로 완전히 변해버렸어.”

조윤의 말 그대로였다.

청년들, 그러니까 케니언크로우기사 단원들은 하나같이 파괴력에 중점을 둔 공격만을 펼치고 있었다. 당초 하나만 대결코자 했던 그들은 몇을 남겨두고 모조리 바닥을 구르고 있었는데, 그들을 상대하는 혁련천후의 얼굴에 확연하게 노기가 드러나 있었다.

퍽!

그의 주먹이 작렬하자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청년이 허공을 날아가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 혁련천후의 매서운 눈길이 데얀에게로 돌아갔다.

“네 선조들이 남겨준 무공이 이거였나?”

“……!”

데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지금 데얀은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자신의 수하, 20명을 주먹질로 날려 보낸 그를 보며 그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가 펼친 공격수법은 바로 자신들의 선조가 물려준 무공이 분명했다. 놀라운 것은 가장 기초적인 수법이라는 것에 있었다. 무공을 입문할 때 기초체력을 다질 목적으로 수련했던 그것으로 모조리 제압을 한 것이다.

‘저, 정말이잖아!’

그랬다.

그가 전설의 주인임에 틀림없었다.

“네놈이 이들을 가르쳤나?”

데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데얀이 아니었다. 난폭했던 표정은 경건하게 굳어져 있었고 몸놀림도 무척 공경하고 신중했다. 그가 느릿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었다.

전형적인 중원식의 예법이었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쓰러졌던 모두가 데얀과 같은 자세로 복창했다.

사조라는 단어도 전설에 이어져온 것이다. 잠시 매서운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던 혁련천후가 담대소천을 눈빛으로 불렀다. 담대소천이 그에게 다가갔다.

“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바꿔 놔라. 따라오지 못하면 죽여도 좋다!”

“알겠습니다.”

쿵!

데얀을 비롯한 케니언크로우기사단, 전원의 가슴에 거대한 충격파가 전해졌다. 죽음보다 더한 지옥의 수련은 당장 그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 * *

홀베른 국왕은 자신의 거처에서 비단에 적힌 무엇인가를 읽으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관옥명.

비단엔 고작 이름 석 자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다뤘다.

“드디어 이 이름을 사용할 때가 되었구나…….”

그랬다.

관옥명은 홀베른 국왕의 중원식 이름이었다. 관산악의 후예들은 모두 중원식 이름을 별도로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관산악의 유지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부터 난 관옥명이다. 숙명을 벗어버리고 선조들의 대지로 향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상왕 전하를 도와 내 모든 것을 불태우리라.”

그는 입술을 굳게 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왔는가?”

“잠이 오질 않아서 술이라도 한잔 할까 싶어 왔습니다.”

룻거 후작이었다. 그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관옥명을 보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당연했다. 그들끼리만 함께할 땐 언제나 본연의 모습으로 서로를 대해왔던 까닭이다. 룻거 후작도 흑발에 흑안의 모습으로 이미 변해 있었다.

탁!

“이건 100년을 익힌 명줍니다. 마침 오늘이 딱 100년째가 되는 날이라 특별히 전하께 먼저 드리려고 가져왔지요. 하하!”

“한 병뿐인가?”

관옥명이 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룻거 후작, 아니 관상천은 관옥명의 속내를 대번에 꿰뚫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벌써 그분께 마음을 다 빼앗기신 겁니까?”

“흐흠! 그분께서 술을 좋아하시는 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상왕 전하께 바칠 술은 이미 마법으로 차갑게 얼려놨습니다. 그것도 세 병씩이나 말입니다. 하하!”

“오! 그랬는가? 하하! 그럼 기분 좋게 마셔볼까?”

관옥명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쪼르륵!

모든 술은 첫잔이 특별하다. 압축되었던 공기가 풀어지며 상쾌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잔은 항상 윗사람이 받는다. 관옥명은 주향이 너무나도 향기로움을 풍기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하하! 술이 향기로우니 상왕 전하께서 좋아하실 것을 떠올리셨습니까?”

관옥명의 입에 걸린 미소의 의미를 룻거 후작은 정확하게 꿰뚫었다. 관옥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받았다.

“멋지지 않은가?”

“뭐가 말씀입니까?”

“700년을 이어온 우리가문의 숙명과 상왕 전하와의 만남이 말일세. 난, 그분께서 본모습을 드러내실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네. 전설이 전했던 것, 그 이상으로 대단함을 느꼈다네. 드래곤이 살아 있다면 아마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그건 저도 그랬습니다. 여왕께서 잠들어 계신 제단을 들어서실 때 뿜어졌던 그 기운은… 하하!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룻거 후작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자! 한잔 마시세.”

쨍!

둘은 동시에 술잔을 기울였다.

몇 잔을 더 주고받은 뒤에 룻거 후작이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요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놈들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왔던 크로우기사단, 전원이 케논 산맥으로 움직이고 있음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번엔 황제도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뭔가 일을 벌이려는 게 분명합니다.”

“케이론에 도발이라도 할 모양이지.”

“몬스터로 인한 피해가 여전한 상황에서 도발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황태자 카르스의 종적이 묘연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놈이 케논 산맥에서 몬스터 토벌을 감행하던 도중 실종되었다는 풍문이 돌고 있습니다.”

관옥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룻거 후작의 말을 들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놈들이 빠져나갈 때 고룡 트로이안의 던전을 급습하는 건 어떻습니까?”

룻거 후작이 눈빛을 발하며 말했으나 관옥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도 우리가 고룡의 심장을 노린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네. 당연히 만반의 대비책을 세워놓고 움직이겠지. 다만 황제와 크로우기사단, 전원이 빠져나갔다면 그들을 제외한 전력으로 우리의 기습을 막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는 것인데…….”

“방심일 수도 있습니다. 워낙 오랜 세월을 서로 대치만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켈베로스! 놈은 절대 작은 것, 하나조차도 간과할 놈이 아니지. 고룡의 심장을 잃어버리면 놈의 야망도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 대비책 없이는 그들을 전력에서 이탈시키지는 않을 것이야. 섣불리 뛰어들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다네. 참! 이 부분은 상왕 전하께 알리지 말게나. 잠들어 계신 두 분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자칫, 소식이 들어가면 당장에 요란으로 달려가실 수도 있네.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술이 떨어졌다.

룻거 후작이 재빨리 달려가 한 병을 더 가져왔다. 이어진 대화에서 둘은 화제를 돌렸다.

“공주께서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렇겠지. 난생처음으로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생겼으니… 아비로서 그동안 너무 미안했었는데, 참으로 잘된 일이지.”

“사실 저도 흥분되는 건 마찬가집니다. 비밀리에 모든 대륙을 돌아다녔다고는 하지만 떳떳하게 신분을 드러내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밤잠을 설칠 정돕니다.”

“허허! 그런가? 이 모든 게 상왕 전하를 만난 덕분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 그분들이…….”

둘의 대화는 밤을 모르고 이어졌다.

하늘에 걸린 달이 제 소임을 다하고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룻거 후작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케논 산맥은 날이 갈수록 혹한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장작불 앞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아직 케논 산맥의 주둔지에서 머물고 있는 그녀는 테세우드 공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본대와 합류하지 않고 능선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들을 잡았어야 하는데…….”

그녀는 여전히 담대소천 등을 아쉬워했다.

날이 갈수록 그들에 대한 아쉬움은 커져갔다. 점점 심해져가는 테세우드 공작의 전횡은 제국의 인사권에도 미치고 있었다. 주요 인사들은 모조리 그의 측근들로 채워졌는데, 그들이 어제 아침에 요란 제국의 케논 산맥 주둔군을 토벌할 것을 결의했다.

이미 20만에 달하는 제국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출전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라면 곧 명령이 떨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게 걱정이었다.

“마마!”

헤론 후작이 급히 군막으로 들어서며 그녀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요?”

“출전명령이 연기되었습니다.”

“예? 정말인가요?”

레이나 공주는 크게 놀랐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희박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더 놀랐을 수도 있었다.

“요란 제국의 황제가 직접 이곳으로 움직였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상당한 병력도 함께 오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가 직접 말인가요?”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대번에 돌처럼 굳어졌다. 출전명령이 지연되어 전쟁을 비껴가는가 싶었는데, 요란의 황제가 직접 군사를 몰고 이곳으로 온단다. 그럼 부대 간의 전투가 아닌 그야말로 제국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자들이 왜…….”

“요란의 황태자, 카르스가 몬스터 토벌을 감행하던 도중 실종되었다는 풍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황제가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나 공주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설마 우리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은 아니겠죠?”

“그건…….”

만약 요란의 황제가 황태자의 실종이 케이론 제국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전쟁발발은 불을 보듯 훤했다.

“공작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은 공식적인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만, 케논 산맥의 수복이 미루어진 점에 대단히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요란의 황제가 직접 움직였다면 사후 방책을 세워놓아야죠.”

“첩보가 입수된 시기가 불과 몇 시간 전이라 마땅한 대응책을 세우려면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겠지요. 지금 각 군의 사령관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소집시킨다고 하니, 곧 대응책이 수립될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나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군막을 서성거렸다.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한참을 서성거린 그녀는 헤론 후작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즉시 본대로 합류해야겠어요. 서둘러 주세요.”

“공작을 만나려고 그러십니까?”

“그래요. 그가 독단적으로 어떤 대응책을 낼지 몰라서 불안하군요. 최소한 저라도 그의 독단을 살펴야겠어요.”

“알겠습니다. 곧장 이동준비를 하겠습니다.”

헤론 후작이 군막을 벗어나자 레이나 공주는 서둘러 자신의 물품을 챙겼다. 대충 물품을 챙긴 그녀가 군막을 벗어나려고 할 때 통신석에 불이 들어왔다.

“어딜 가려는 거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레이나 공주는 놀란 표정으로 통신석을 돌아봤다. 통신석 안에는 가볍게 미소 짓고 있는 루안의 모습이 있었다.

“루안! 지금 어딘가요?”

“그냥,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지…….”

“이곳으로 빨리 와줘야겠어요. 서둘러요!”

레이나 공주의 다급함에 루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두르는 거지?”

“오면 말할게요. 급하니 최대한 빨리 평원에 주둔한 본영으로 오세요. 알았죠?”

“그러지.”

팍!

통신석이 꺼졌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에 어렸던 초조함이 다소 가셨다. 루안이라도 곁에 있다면 테세우드 공작의 독단을 조금은 견제할 수 있다. 그도 루안만큼은 함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신석까지 챙긴 레이나 공주는 빠른 걸음으로 군막을 나섰다.

* * *

두두두두…….

대지가 은은히 울렸다. 수십만의 대군이 질주하는 평원의 하늘은 자욱한 먼지로 가려졌다.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거대한 마차가 군의 선두에서 깃발을 휘날리며 질주를 하고 있었는데, 마차 주변을 호위하는 시커먼 갑주의 기사들은 아군의 접근조차도 막아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칼 드베인 막스!

전쟁광으로 소문난 요란 제국의 황제가 그 마차에 타고 있었다.

황금색 갑주에 눈처럼 흰 백발을 뒤로 넘겨 묶고 손엔 역시 황금으로 치장된 황제검을 든 인물이 느긋한 표정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산천에 시선을 던져놓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막스 황제였다.

핏빛 갑주를 걸치고 어깨엔 거대한 대도를 교차한 인물이 빠르게 마차로 다가왔다. 모든 이들의 접근을 막던 크로우기사들이 그는 막지 않았다.

그가 바로 크로우기사단의 단장이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섬뜩한 눈빛을 지닌 그는 막스 황제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논 산맥이 1시간거리에 접어들었습니다.”

황제, 막스가 그를 돌아봤다. 심유한 눈길은 전쟁광으로 소문난 자의 것으로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평원의 끝에서 군영을 차리겠다. 케논 산맥은 짐과 너희들만 갈 것이다.”

“존명!”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한 기사단장이 빠르게 좌측으로 전마를 몰아갔다. 동시에 거대한 뿔나팔이 일제히 소리를 울리자 질주하던 군마들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처저적!

짧은 시간에 대군이 멈추었다. 그것만으로도 평소 그들의 훈련양이 어느 정돈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군막을 설치하고 마법사들은 주변에 결계를 설치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자 군영이 차려졌다. 막스 황제는 중앙의 설치된 사령막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종류를 알 수 없는 꽃잎들이 깔려 있었고 임시로 마련된 진열장엔 최고급 명주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그것은 전쟁광이라는 막스 황제의 의외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모두들 물리고 홀로 남은 막스 황제는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뭔가 주문을 외우자 구슬에 사람의 영상이 나타났다.

“도착했습니다.”

“준비는 다 되어가겠지?”

“내일, 케이론 측에서 사신단이 올 예정입니다. 그들을 만나보고 결정짓겠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황제가 존대를 하는 인물이 있었다니, 그것도 허리까지 굽혀가며 극도의 공경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말이다.

“막스! 케논 산맥은 내게 반드시 있어야 할 보물이다. 전쟁을 벌여서라도 그곳을 요란의 영토로 삼아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너를 믿겠다. 맥스!”

“항상 사부님을 위해 모든 걸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심려 놓으십시오.”

막스 황제의 공경한 태도에 구슬 안의 인물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구슬 안의 인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구슬을 소중히 품속에 갈무리한 막스 황제는 시녀들을 불렀다. 그는 무척 색을 즐겼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항상 시녀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후후!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이 세상은 나, 막스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첨벙!

그는 뜨거운 물이 가득 찬 임시 욕조에 몸을 담그며 눈을 감았다. 따라 들어선 시녀들이 옷을 벗고는 욕조에 들어섰다. 풍만한 여인의 나신이 막스의 숨결을 거칠게 만들며 사령막은 이내 뜨거운 숨결로 채워졌다.

* * *

케이론 제국을 상징하는 제국기를 꽂은 마차가 빠르게 케논 산맥의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질주를 하고 있었다.

마차 주변은 십여 기의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는데, 바로 테세우드 공작이 막스 황제에게 보내는 사신단이었다. 목적은 막스 황제가 군을 직접 이끌고 온 목적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사신단의 수장은 이튼 백작으로 제국에 소문난 무관이자 정치가였다.

언제나 이런 일은 그의 몫이었다. 달변에다 강심장까지 지닌 그였기에 테세우드 공작의 신임은 대단했다.

“각하! 5시간 정도만 더 가면 막스 황제의 군영이 나옵니다! 잠시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호위장이 마차에다 대고 큰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하지.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고 가겠다.”

“준비하겠습니다!”

호위장이 무리의 이동을 멈추게 하고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그곳으로 이동시켰다. 기사들이 재빨리 조립식 의자와 탁자를 꺼내어 자리를 만들자 이튼 백작이 마차에서 내려 그곳에 앉았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곳은 아니겠지?”

“걱정 마십시오. 이곳은 낮은 지역이라 있어봤자 고블린이나 오크 정도가 고작입니다. 오우거나 와이번은 20일이 넘게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동면기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각별히 주변을 살피게. 혹, 아이스 오우거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예! 각하!”

이튼 백작은 조금은 긴장한 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불과 20일 전까지는 몬스터 대전이 발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낼 만큼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이곳, 케논 산맥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엄청난 피해를 입힌 블랙 오우거나 블러드 와이번이 나타나는 날에는 자신을 비롯한 모두는 목숨을 잃게 된다.

“흠! 그건 그렇고 요란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 소문대로 실종된 황태자 때문일까, 아니면 전쟁을 목적으로 움직인 것일까? 자넨 어찌 생각하는가?”

“황태자를 찾으려고 대군을 몰고 올리는 없잖습니까. 분명 어떤 구실을 내세워 전쟁을 하고자 함일 겁니다.”

“그렇지.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이거 정말 큰일이 아닌가. 물론 본 제국도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곤 있다지만 요란은 전쟁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 말이야…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최소한 10년은 후퇴할 것이 뻔한 전쟁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각하께서 가시는 게 아닙니까? 모두는 각하를 믿고 있습니다.”

“허허! 이 사람아! 그들이 전쟁을 작정하고 있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이튼 백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기사들이 뜨거운 수프와 과일로 만든 음료를 내놓자 모두는 간단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성이 좋은 이튼 백작이 수프를 다 먹고 빵을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그가 타고 왔던 마차의 뒤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바스락!

순간, 기사들이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이튼 백작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상당히 빠른 반응이었다.

“몬스턴가?”

“확인하겠습니다!”

호위장이 직접 마차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제법 강한 무력을 지녔던 호위장은 한번 도약에 마차까지 날아갔다. 이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놀라워할 때 호위장의 육신이 허공에서 그대로 두 동강으로 썰어졌다. 비명조차 없었다.

“헉!”

“저, 저런…….”

지켜보던 모두가 크게 놀랐다.

스슥!

호위장의 잘린 머리를 밟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자들은 모두 셋, 하나같이 칙칙한 마기를 줄기줄기 발산하며 이튼 백작 일행을 노려봤다.

“누구냐!”

기사들이 이튼 백작에 대한 호위망을 더욱 굳건히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나타난 자들은 대답이 없었다. 어둡게 죽어버린 눈동자로 이튼과 기사들을 쓸어본 가운데의 인물이 손짓을 하자 좌우에 섰던 둘이 느릿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눈으로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튼 백작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저, 저자는 요란의 황태자가 아닌가!”

그랬다.

가운데 선 인물은 분명 카르스가 맞았다.

그런데 그가 이상했다.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죽은 자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음습함만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후후! 쓸 만한 인간이 전혀 보이지 않는군.”

카르스가 섬뜩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마계의 존재들을 연상시킬 만큼 굵직하면서도 ‘웅웅’ 울렸다.

“난 케이론의 이튼 백작이오! 저 깃발이 보이지 않소? 지금 귀국의 황제를 만나러가는 사신단에게 이게 지금 무슨 짓이오?”

“사신단? 황제? 후후후! 웃기고 있군.”

“지금 당신은 명백한 국제법위반을 범했소. 이 사실이 대륙에 알려지면 당신은 곤경을 면치 못할 것이오! 카르스 황태자!”

“말이 많은 놈이군. 모조리 죽여라! 저 말들만 빼고 말이야…….”

카르스가 명령을 내리자 다가오던 둘의 속도가 빛처럼 빨라졌다. 그들이 벼락같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기사들은 이튼 백작을 뒤로 밀어내며 검을 마주 뻗었다.

까가강!

퍽퍽!

“으악!”

기사들이 뻗은 검들이 모조리 두 동강이 나며 쥐었던 팔이 싹둑 잘려나갔다. 이튼 백작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자신을 호위해서 온 기사들은 꽤 강한 자들만 추려서 왔다. 그런 그들이 한번 손짓에 팔을 잘려버렸다. 더구나 강철로 만든 검과 동시에 팔이 잘렸으니…….

“설마, 마스터……?”

마스터가 아니면 보일 수 없는 경지였다.

아니, 마스터라도 쉽게 할 수준이 아니었다. 팔이 잘린 기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상황을 빨리 파악한 기사 하나가 이튼 백작에게 도주할 것을 권했다.

“각하! 보통 자들이 아닙니다! 어서 본대로 귀환하십시오! 여기는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님을 깨달은 이튼 백작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들이 탔던 전마에 몸을 실었다.

“부탁하네!”

“후후! 어딜!”

지켜보고만 섰던 카르스가 검을 뽑아 들며 사악하게 웃었다.

이튼 백작은 서둘러 말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 짧은 시간에 10명이 넘어가는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포하게 날뛰는 둘에게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았다.

전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를 시작했다. 동시에 카르스의 육신이 그 자리를 벗어나 이튼 백작을 향해 날아갔다.

“놈!”

허공에 뜬 카르스를 향해 기사 하나가 검을 뻗었다.

“허약한 인간 주제에…….”

“으악!”

날아가는 속도를 멈추지 않는 카르스가 손을 슬쩍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기사는 머리가 박살이 나며 피를 뿌렸다.

“놈을 저지하라! 각하께서 위험하다!”

살아남은 기사들이 달려드는 둘을 포기하고 일제히 카르스를 향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전과는 달리 엄청나게 강력해진 카르스도 그들의 목숨을 내건 돌진에 추격을 포기하고 바닥으로 내려서야만 했다.

“죽여주지!”

콰지직!

“으아악!”

내려서기가 무섭게 그의 육신 주변이 피안개로 물들었다.

횡으로 그어진 단 한 번의 공격에 6명의 기사들이 핏물로 화해 쓰러졌다. 카르스의 고개가 재빨리 이튼 백작을 향해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그를 태운 전마는 까마득한 거리 밖을 질주하고 있었다.

“후후! 그나마 아까운 먹잇감을 놓쳤군.”

중얼거리는 카르스에게서 인간의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둘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었다.

그들의 눈동자 역시 음습하게 죽어 있었다. 전신을 죽은 자들의 피로 흠뻑 적신 그들은 입가에 묻은 핏물을 혀로 핥으며 아무런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몬스터들을 깨워라.”

“알겠습니다.”

“후후! 피의 잔치를 벌여야겠어.”

* * *

“그게 사실인가요? 실종되었다던 요란의 황태자가 사신단을 모조리 죽였단 말인가요?”

테세우드 공작이 머물고 있는 본대로 합류한 레이나 공주는 자신의 군막에서 헤론 후작의 보고를 들으며 경악했다.

“그렇습니다! 이튼 백작만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헤론 후작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들은 지금 제국전쟁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신단이 요란 측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면 테세우드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사신단을 보낸 것도 주변국의 눈을 의식해 형식적으로 보낸 것이 아닌가?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요?”

“……!”

레이나 공주는 머리를 감싸며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헤론 후작은 수염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토록 우려했던 제국전쟁은 이제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 확실한 명분을 얻은 테세우드 공작은 선전포고조차 없이 분명 제국에 총동원령을 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국의 모든 실권은 그에게로 완벽하게 귀속되는 것이다.

전시에는 그가 황제를 대신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가 그토록 전쟁을 원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마마! 힘을 내십시오! 어떻게든 방법이, 아니 신께서 존재하신다면 반드시 폐하를 외면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 신! 그 위대하신 신이 있다면 왜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을 방관하겠어요. 차라리 사라진 몬스터들이 전쟁에 미친 미치광이들을 죽여주는 것을 바라는 게 낫겠군요.”

“마마…….”

레이나 공주는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폐하께서 실권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에요. 전쟁에 의해 죽어나갈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녀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뿌우우우…….

밖이 소란스러웠다. 분주하게 오가는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는 레이나 공주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후작 각하! 비상회의 소집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지금 즉시 사령막으로 가셔야 합니다.”

기사 하나가 군막의 입구에서 부동자세로 말했다.

“곧 갈 것이니 자네 먼저 사령막으로 가게.”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만 물러가게!”

헤론 후작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기사는 허리를 숙이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사라졌다. 헤론 후작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레이나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마마! 다녀와서 결과에 대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레이나 공주는 두 팔에 얼굴을 파묻고는 머리만 끄덕였다. 짙은 한숨을 내쉰 헤론 후작은 몸을 돌려 군막을 벗어났다.

* * *

요란 제국의 막스 황제는 막 들어온 보고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르스가 나타났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놈들의 정보를 포착한 결과, 틀림없습니다.”

보고를 하는 크로우기사단의 단장, 레인은 언제나 그랬듯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막스 황제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그에게서 진득하게 묻어났다.

“다른 이들은?”

“그것까지는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아이들을 그곳으로 보내시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당장 아이들을 카르스가 출현했다고 전해진 곳으로 보내라!”

“알겠습니다.”

레인이 돌아가자 막스 황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약한 놈! 살아 있었다면 즉각 돌아올 것이지…….”

그는 술을 병째 입으로 가져갔다. 레인이 들어서면서 자리를 지켰던 여인들이 다시 옷을 벗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뱀처럼 흐물거리는 농염한 육신이 막스 황제의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후후! 놈을 찾았으니 이젠 명분을 찾는 것만 남았군.”

막스 황제의 얼굴에 흡족함이 나타날 때 레인이 갑자기 다시 들어섰다. 여인들이 깜짝 놀라며 다시 뒤쪽으로 사라졌다.

막스 황제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노크를 하는 법을 배워야겠군, 레인.”

“보고 사안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게 뭔가?”

“황태자가 적국의 사신단을 참살하는 바람에 케이론의 전군이 전시체제로 돌입했다고 합니다. 20만으로 추정되는 선발진에 이어 20만의 지원군이 방금 케이론의 수도를 떠났다고 전해왔습니다.”

막스 황제가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정말이냐?”

“마법전령이 직접 영상까지 담아서 보내온 것이니 틀림없습니다.”

막스 황제의 얼굴빛이 대번에 변했다. 결코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열에 가까운 표정은 마치 케이론이 그래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보였다. 레인의 죽은 눈동자가 막스 황제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후후! 돌아오면 벌을 줄까 했는데 꽤 큰일을 해주었군. 이거, 너무 쉽게 일이 풀리는 것 아니냐? 레인!”

“수도에 지원을 요청하셔야 합니다. 현재의 병력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대가 직접 중앙군 사령관에게 통신을 넣어, 중앙군 전체를 이곳으로 출진시키라고 전하라! 아! 그리고 올 때, 제7강습여단을 전부 오라고 전해.”

“그리하겠습니다.”

레인이 다시 군막을 벗어나 사라졌다.

희열로 번득이는 막스 황제의 눈동자는 이내 탐욕스러움으로 바뀌었다.

“후후! 케이론만 삼키면 대륙통일은 시간문제다. 그렇게 되면 난 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고 말이야.”

다가오던 여인들이 귀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하하하!”

막스 황제의 파안대소는 한동안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 * *

“크르르…….”

블랙 오우거의 입에 고인 침이 주르륵 바닥으로 흘렀다. 시뻘건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움츠린 어깨는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렸다.

카르스는 그런 블랙 오우거를 보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잿빛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죽은 자의 그것이었다.

“후후후! 이 육신이 인간세상의 황태자였단 말이지? 재밌겠군. 꽤나 말이야…….”

그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크르르…….”

“카악…….”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두가 카르스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폭스 후작이 고개를 들어 고저 없는 목소리를 냈다.

“어둠의 왕이시여! 인간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인간들? 후후! 모여들라고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왕께서 바라시는 게 그것이니까. 어차피 주인께서 완벽하게 변신하려면 조금은 더 있어야 하니 그동안 우린 닥치는 대로 인간 놈들을 쓸어버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자고…….”

“인간이 피가 언제나 그리웠습니다.”

“흐흐흐…….”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 사악하게 웃었다.

카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몬스터들이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낮게 엎드렸다. 그 모습에 카르스의 입가에 흡족함이 걸렸다.

“나의 병사들이여! 명령을 내리겠다.”

“크아아…….”

“카악…….”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요동쳤다. 하늘을 배회하던 블러드 와이번도 카르스의 머리 위를 선회하며 괴성을 토해냈다.

“북쪽으로 간다!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인간 놈들을 모조리 어둠의 세상으로 보내라! 나, 어둠의 왕이 함께하나니, 승리는 우리가 쟁취하게 될 것이다!”

“크아아…….”

카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몬스터들이 일제히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시커먼 철갑을 두른 전마에 몸을 실은 카르스는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의 호위를 받으며 무리의 선두를 이끌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요란 제국의 막스 황제가 친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는 곳이었다.

* * *

홀베른 왕궁의 뒤편은 홀베른 전체를 병풍처럼 두르고 선 산맥 테베르가 있다. 높이 6,000미르의 테베르 산맥의 정상은 언제나 만년설로 덮여 있었는데, 그곳에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혹한의 날씨에다 제대로 숨조차 쉬기 힘든 희박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웃통을 벗은 채, 어디론가 열심히 뛰었다.

“헉헉!”

거친 숨결이 토해낸 입김은 순식간에 작은 얼음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육신이 흘려낸 땀은 얼었다가 깨어지기를 반복하며 그들이 지나간 길 위로 떨어졌다. 인원은 모두 20명, 아니 한참을 앞서서 뛰어가는 인물을 포함하면 모두 21명이었다.

“젠장! 힘들 내라고! 그 정도밖에 안 되었어? 헉헉!”

선두에서 뛰어가는 인물이 뒤를 돌아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시커먼 흑발이 땀과 얼음으로 범벅이 된 그는 데얀이었다.

그렇다면 뒤를 따르는 20명의 청년들은 말하지 않아도 케니언크로우의 기사들일 것이다. 그들이 왜 이런 극한의 고지에서 뜀박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헉! 헉! 단장님! 조금만 쉬었다가 하시죠.”

“주, 죽겠습니다! 헉! 헉!”

기사들은 탈진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자식들아! 오늘도 쫄쫄 굶을 거야? 벌써 5일째 물 한 모금으로 보냈잖아!”

“그전에 심장이 터져 죽겠습니다.”

“빌어먹을…….”

데얀이 걸음을 멈추고 털썩 눈밭에 누웠다. 따르던 모두가 그의 옆으로 줄줄이 쓰러지듯 누웠다.

“헉! 헉! 젠장, 언제까지 체력훈련만 할 건지… 그냥 마나를 돌리면 이까짓 체력쯤은 평생 써도 남을 것을…….”

“그러게 말이다!”

기사들은 연방 불만을 쏟아냈다.

눈밭에 누었던 그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 더워서 누웠는데, 뼛속까지 시리는 한기가 금방 차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사이에 참을 수 없는 한기가 전신을 꽁꽁 얼려버릴 듯 매섭게 몰아쳤다.

“으…….”

“뛰어! 뛰어야 산다!”

데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두는 다시 죽어라 뛰었다.

그런 그들을 반대편 봉우리에서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에 몸을 맡긴 채, 케니언크로우기사단을 응시하는 그는 바로 담대소천이었다.

그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후후! 끈기 하나는 제대로 타고난 놈들이군.’

그랬다.

그들은 생각 이상으로 끈기가 있었다. 오기도 있었고 승부욕도 넘쳤다. 담대소천은 그러한 점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한 달 안에 제대로 만들어 놔.’

혁련천후가 그에게 내린 지상명령이 그것이었다.

담대소천은 선두를 달려가는 데얀을 응시했다. 가장 속을 썩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가 의외로 가장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슬슬 가볼까?’

생각이 끝나자 그가 사라졌다.

* * *

데얀은 전방에 나타난 담대소천을 발견하고는 몸을 세웠다.

놀랍게도 그가 허리를 숙였다. 뒤따르던 20명도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할 만한가?”

“죽겠습니다.”

담대소천이 큼지막한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

“술이다! 마셔라!”

“오오! 술!”

“으흐… 술이래, 술!”

너 나 할 것 없이 벌떼처럼 상자로 몰려들었다. 데얀이 누구보다 빨리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 수십 병의 술과 건포가 들어 있었다.

술을 보자 훈련의 고단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모두가 병째 술을 들이켰다. 청년 한 명이 담대소천에게 물었다.

“체력훈련은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힘든가?”

“그것보다는 다른 훈련을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해서…….”

담대소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주공께서는 너희들이 완벽해지기를 원하신다. 그 완벽의 시작이 체력훈련이다. 이 세상에서 마나라고 하는 것을 너무 믿지 말도록!”

“마나를 믿지 말란 말입니까?”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했다. 기사들에겐 마나가 전부다. 마나와 강함은 비례한다. 누가 더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지어진다.

그런데 마나를 믿지 말라니…….

“지금 내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이 어느 정도지?”

“형편 없습…….”

누군가가 대답을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 너희들보다 형편없는 마나가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화아악!

순간, 담대소천의 주변에 쌓였던 눈이 모조리 수증기로 화해 사라졌다.

그 두꺼운 만년설이 바닥까지 드러났다. 데얀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뿐이 아니다. 다른 모두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변했다.

“이, 이건…….”

측정불가의 마나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이건 마나가 아니다. 내공이라고 하는 것이지. 물론 너희들이 맹신하는 마나와 본질은 같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차이는 엄청나다.”

담대소천이 데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과 붙는다면 이길 수 있나?”

“당연합니다!”

“네가 입는 갑주를 빼고도 장담할 수 있느냐?”

“그건…….”

데얀은 말끝을 흐렸다.

담대소천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모두를 쓸고 지나갔다. 눈발과 어우러진 그를 바라보던 모두는 그가 무척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데얀도 마찬가지였다.

“넌, 주공께서 어느 정도의 힘으로 너를 상대했다고 보느냐?”

“전력이 아니었습니까?”

다소 불편한 기색으로 되묻는 데얀을 담대소천은 담담하게 쳐다봤다. 모두가 담대소천의 입을 주시했다. 데얀 역시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분이 검을 들었다면 넌, 한수에 죽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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