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가인과 카츄
수천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케논 산맥의 최북단 봉우리는 다른 곳과는 달리 유난히 푸르렀다. 암벽은 거의 보이지 않는 그곳은 전설의 종족, 엘프들이 살아간다는 곳을 연상시킬 정도로 무성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엘프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인간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천험의 오지였다. 산맥이 끝나는 곳엔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고 그 앞은 선박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물살을 자랑하는 널찍한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우거진 숲으로 둘러져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살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고는 접근을 꺼린 이유도 한몫했다.
콰르…….
장대한 폭포가 천지를 울리며 요동치는 곳의 끝부분에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금발에 눈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미를 모조리 담아놓은 듯 찬란하기까지 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뾰족한 귀에 있었다.
엘프!
그랬다. 청년은 전설의 종족이라는 엘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흠!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정말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군.”
폭포수를 내려다보며 살짝 찌푸리는 얼굴은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바스락!
청년의 뒤쪽 수풀이 살짝 흔들렸다.
“나와!”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말했다. 수풀이 흔들리며 얼굴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무척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였는데, 역시 뾰족한 귀를 하고 있었다.
“헤헤! 여기 있었어?”
“무슨 일이야?”
“오래. 빨리…….”
“누가? 난,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는데?”
“나도 몰라. 그냥 촌장님이 부르셔.”
청년이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일어나자 바짝 붙어 있던 사내아이가 깜짝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촌장님이? 하하! 정말 촌장님이 부르셨단 말이지?”
“응!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해?”
사내아이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변한 사내아이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청년이 섰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쳇! 엄청 빨라졌네. 난 언제 저렇게 빨라지고 강해질까?”
* * *
엄청난 굵기를 자랑하는 거목은 단순한 거목이 아니었다.
중간 부근에 사람이 사는 듯한 집이 만들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짧은 검과 활을 둘러멘 청년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하하! 이봐! 촌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거목 밑에서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경계를 서던 청년이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눈을 부라렸다. 조용히 하라는 시늉이었다. 고개를 살짝 움츠린 청년이 조심스럽게 거목에 둘러진 줄기계단으로 올라섰다. 넝쿨을 엮어서 만든 줄기계단이 사람이 올라섰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청년의 발은 살짝 허공에 떠 있었다.
[바보야! 그냥 날아오면 될 걸 계단은 왜……?]
[후훗! 그럼 만들긴 왜 만들었냐?]
[……!]
경계를 서던 청년의 앞에 내려선 그는 고개를 살짝 빼고는 안을 슬쩍 쳐다봤다. 안에 몇 명이 모여 있음을 본 그는 눈앞의 청년에게 다시 물었다.
[장로님들은 왜……?]
[나도 몰라. 얼른 들어가! 아까부터 찾으셨어.]
[그래, 수고해라!]
* * *
“왔느냐?”
“찾으셨습니까? 족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장로님들!”
청년은 해맑은 얼굴로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를 바라보는 실내의 인물들은 무척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청년과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아 보였다.
“또 폭포에 갔던 모양이구나?”
“예! 그냥 심심해서… 그런데, 절 찾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청년의 눈동자는 뭔가를 갈망하는 빛으로 반짝거렸다. 족장이라 불린 인물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좌우로 앉았던 3명도 그와 같은 인자함으로 청년을 응시했다.
“아리엘이 홀베른에 있다는구나.”
“하하! 그러니까 저보고 아리엘을 데리고 오라, 이 말씀이죠?”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앞서 나갔다. 족장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바뀌었다.
“허허! 이놈아! 세상으로 나가는 게 그리도 좋으냐?”
“하하! 그럼요! 정말 꼭 가보고 싶습니다!”
그때, 가장 우측에 앉았던 인물이 정색으로 말했다.
“카츄를 데리고 가거라. 단, 아리엘을 찾으면 곧장 돌아와야 한다. 괜한 시비에 휘말려 시간을 지체하면 다음부턴 절대 내게 일을 맡기지 않을 테니까, 알아들었느냐?”
“그럼요. 아리엘을 찾으면 곧장 달려오겠습니다! 그런데 카츄는 왜……?”
“너만큼 카츄도 세상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느냐? 그리고 혹시 모를 험한 일에 그 아이의 신비한 능력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잘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가면 될까요?”
“내일 당장 떠나거라.”
청년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찢어졌다. 그 모습에 좌중의 인물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 * *
케이론 제국과 홀베른, 그리고 요란 제국의 영토가 한곳에서 부딪히는 삼각지역을 가로지르는 강줄기는 며칠 전부터 내린 비로 인해 거친 물줄기로 변해 있었다.
세 국가의 영토가 한눈에 다 보이는 그곳은 말이 국경이지 영토를 구분하는 잣대는 강이 전부였다. 그것도 한바탕 폭풍이라도 쓸고 지나가면 부분적으로 각국의 영토가 뒤바뀔 정도로 매우 협소한 지역이었다.
콰르르…….
거센 물줄기가 주변 숲까지 범람하는 바람에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물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숲에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은발이 한껏 멋스러움을 자아내는 청년은 바로 혁련소였다. 작은 술병을 손에 들고 커다란 거목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힘차게 흐르는 강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녔던 아이스 오우거는 보이지 않았다.
“흠! 어디서 찾는담? 이럴 줄 알았으면 망치를 데리고 올걸 그랬나?”
그는 지금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들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당초, 칸빌의 행방을 쫓았던 그는 갑작스럽게 칸빌의 기운이 사라져버리자 한동안 케논 산맥을 헤매다가 다크 영지로 가기 위해 텔레포트를 시전했다가 엉뚱하게도 이곳으로 떨어진 것이다.
텔레포트는 마계에서 머물 때, 틈나는 대로 배워두었던 것인데 완벽하지 못한 탓에 좌표가 틀어져 이곳으로 오게 된 그는 잠시 쉬면서 행로를 고민 중이었다.
혁련소는 문득 연소민을 떠올렸다. 마계에 있으면서도 하루도 잊지 않았던 그녀였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에 대한 애절함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후… 살아 있겠지. 살아만 있다면 만날 거야.”
스스로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곳이 홀베른인가?”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전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넓게 펼쳐진 초원의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궁전과 수많은 건물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혁련소는 이내 시선을 우측으로 던졌다. 그곳으로 가면 다크 영지가 나온다.
“잘들 지내고 있겠지? 아버님과 숙부들도 어쩌면 그곳에 계실지도 몰라. 후후!”
이 세상에 마땅한 근거지가 없는 아버지는 자신이 영주로 있었던 다크 영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혁련소의 육신이 강을 훌쩍 뛰어넘어 건너편으로 내려섰다. 다시 텔레포트를 이용할까 했지만 또 어느 곳으로 떨어질지를 몰라서 그냥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말이라도 한 필 구할까?”
그는 다시 홀베른을 흘긋 돌아봤다.
걸어서 다크 영지까지 가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모된다. 케논 산맥 인근에 위치했다지만 케논 산맥 자체만도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가면 일 년은 더 걸리는 엄청난 거리다.
혁련소가 눈빛을 발했다.
“좋아! 홀베른을 구경도 할 겸 말을 사러 가볼까?”
발길을 돌린 혁련소는 느긋하게 홀베른으로 걸었다.
* * *
과연 소문대로 홀베른의 도시는 번화로웠다.
길의 양옆을 늘어선 수많은 상점들과 그곳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서 행복이라는 것을 느낀 혁련소는 내심 다크 영지를 떠올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군. 조금은 부러운걸.”
다크 영지의 주민들에게선 볼 수 없는 활력이 이들에게 있었다. 하물며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표정이 너무나도 환했다.
혁련소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파는 곳을 찾았으나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2시간을 헤맸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자 노점에서 과일을 파는 사람에게 물었다.
“말을 파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을 산다고요? 흠… 쉽지 않을 텐데요.”
“쉽지가 않다니요?”
“며칠 전에 말의 거래를 금지한다는 공고가 붙었소. 걸리면 처벌을 받게 되는 까닭에 아마 구입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혁련소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는 다시 물었다.
“무슨 전쟁이라도 났답니까? 말의 거래를 중단시키게…….”
“허허! 아시면서 묻긴 왜 묻소? 당연히 기사들과 병사들이 쓸 전마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소?”
혁련소는 상인에게 가볍게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걸음을 딴 곳으로 옮겼다.
‘전쟁이 났단 말이야? 케이론과 요란이 붙었나?’
케이론 제국와 요란 제국이 조만간 대대적인 전면전을 벌일 거란 소문은 이미 전 대륙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지만 혁련소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케논 산맥 근처에서 칸빌의 행방만을 쫓았던 까닭에 당연히 들을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웃기는군. 전쟁이 나면 이곳도 피해가 올 텐데, 표정들이 저리도 밝다니…….”
그랬다.
노점 상인이 알 정도면 모두가 안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저렇듯 활력이 넘치는 모습들을 보인다는 게 그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쪼르륵…….
“쩝! 배고픈데.”
혁련소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기가 좋겠군.”
조그만 식당이 보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꽤나 깔끔한 외관을 지닌 식당으로 그는 걸음을 옮겼다. 식당은 사람들로 넘쳤다. 다행히 건물 밖에 마련된 탁자 한 곳이 비어 있음을 본 혁련소는 재빨리 그곳에 앉았다.
음식을 주문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고개를 돌렸다. 금발에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꼬마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의 옆에는 역시 금발을 한 청년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는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녕! 꼬마야!”
혁련소는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아이는 시선을 돌렸다.
* * *
[가인! 이상한 사람이 있어.]
식사를 하던 금발청년, 가인이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가 눈짓으로 혁련소를 가리켰다. 가인이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뭐가 이상해?]
[저 사람에게서 마계의 기운이 느껴져. 그것도 무척이나 강력한…….]
[뭐! 마계의 기운? 그럼 저 자식이 마족이란 말이야?]
[마족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해. 정말…….]
가인은 혁련소를 노려보다가 그가 자신을 보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이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카츄! 그냥 밥이나 먹어. 괜히 시비라도 붙으면 곤란하니까.]
[알았어. 가인!]
둘은 이내 식사에 열중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혁련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이상한 놈들이네. 아주 묘한 기운이 느껴져…….’
그 역시도 그들에게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자신과 상극의 기운이란 느낌도 들었다. 그는 지금 중원에서 얻었던 모든 기운을 버리고 마계의 기운만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궁극의 힘이라는 천살강기도 사라진지 오래다.
덕분에 혁련천후를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천살강기를 잃는 바람에 천살강기의 흔적을 쫓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혁련소는 잠시 둘을 쳐다보다 이내 식사에 열중했다. 간단한 고기볶음과 수프로 배를 채우는데 10여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법으로 얼린 시원한 음료수를 후식으로 마신 혁련소는 무심결에 아이가 있던 탁자로 시선을 던졌다.
‘응! 갔네?’
그랬다.
둘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신경이 무뎌진 건가? 전혀 느끼지 못했잖아…….’
비록 둘에게 그다지 신경을 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묘한 느낌이라는 게, 뭔가 대단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혁련소는 생각을 떨쳐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식당이 보이는 모퉁이에 가인과 카츄는 서 있었다.
혁련소를 바라보는 카츄의 눈동자는 어린 아이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보석처럼 새파랗게 빛나던 눈동자는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했는데, 한순간도 혁련소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정말이네? 저놈 나쁜 놈이잖아?”
가인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중얼거렸다.
혁련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마계의 것이었다. 가인과 카츄는 세상이 모르는 신비로운 능력들을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가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힘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기운을 감추려고 해도 둘의 눈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따라가 볼까?”
“에이! 그냥 가자! 아리엘을 찾는 게 우선이야.”
가인은 카츄를 잡고 반대편으로 걸었다. 카츄는 여전히 혁련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끌려가면서도 그를 쳐다봤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둘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후후! 너희들 뭐냐? 왜 사람을 흘깃거리는 거지?”
혁련소였다.
분명 건너편에 있던 것을 봤는데 어느새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둘은 그것 때문에 크게 놀랐다. 워낙 당황했던 둘은 입을 열지 못했다.
“뭐냐니까? 나쁜 놈들인가?”
“나쁜 놈은 너잖아!”
가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얼굴에 잔뜩 경계의 빛을 품은 그는 여차하면 주먹을 뻗을 듯,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설픈 동작이지만 혁련소는 가인의 내면에 감춰진 거대한 힘을 어렴풋이 파악했다.
‘뭐야? 이놈들, 엄청난데?’
그 역시 상대방의 힘을 측정할 능력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발산된 가인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카츄가 물었다.
“마계에서 온 거야?”
“마계? 그렇지, 난 마계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 그런데 그건 왜?”
혁련소는 무심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문제였다.
쾅!
뭔가 번쩍한다 싶더니 혁련소의 육신이 저만치로 튕겨져 날아가고 있었다. 카츄의 앙증맞은 손이 앞으로 뻗어져 있었는데, 주먹 주변이 빛의 고리로 둘러져 있었다.
“와! 엄청난데? 너 더 강해진 거야?”
가인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카츄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츄의 표정이 굳어져 있음을 본 것이다.
“죽지 않았어. 아니, 멀쩡해!”
“뭐? 무슨 소리야? 저렇게 개구리처럼 뻗었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혁련소가 쓰러진 곳을 쳐다보던 가인의 눈동자가 다시 부릅떠졌다. 피를 흘리고 죽었어야 할 그가 팔짱을 하고서 씩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들! 정말 나쁜 놈들이네?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닥쳐! 마계에서 온 주제에 무슨 사람타령이야!”
귀엽기만 했던 카츄가 적개심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난, 엄연한 사람이야. 물론 사정이 있어서 마계에 갔다 오긴 했지만… 그런데, 너희들은 뭐 하는 놈들이지? 그 뾰족한 귀는 또 뭐야?”
“뭐……?”
가인과 카츄는 엉겁결에 손을 귀로 가져갔다.
특수한 능력으로 귀를 보통의 인간들과 같게 변화시켰는데 혁련소가 그걸 알아본 것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눈치 챌 수 없는 방법이 그것인데, 대번에 알아보자 혁련소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강해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커다란 굉음과 혁련소가 부딪혔던 벽면이 무너지는 바람에 길을 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셋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혁련소는 난감했다. 가인과 카츄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저기 저 산이 보이지? 그곳에서 기다리겠다.”
혁련소는 둘에게 자신이 잠시 쉬었던 케논 산맥의 강줄기 부근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우……!”
“마법사구나. 순간이동을 했어!”
혁련소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소리를 했다. 모두는 또 한 번 놀랐다. 가인과 카츄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모였던 사람들은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에 혁련소가 다시 나타났다.
“망할 놈들! 도망을 치다니…….”
가인과 카츄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을 살폈으나 있을 리 만무했다. 입맛을 다신 혁련소는 다시 말을 사기 위해 시내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도저히 말을 파는 곳이 보이질 않자 노점에서 술을 한 병 사들고는 시내를 빠져나가기로 작정했다.
“어쩔 수 없군. 경공으로 갈 수밖에… 이거, 완전히 개고생이잖아!”
조금 전 소란을 기억했던 몇몇 사람들이 그를 보고는 수군거렸다. 혁련소는 머쓱한 표정으로 외곽지역으로 걸음을 놓았다.
저 멀리 웅장한 궁전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본 혁련소는 내심 감탄했다.
“일개 왕국치고는 엄청난 규모군. 강자들의 고향이라는 홀베른답구나.”
어지간한 제국의 황궁과 맞먹는 규모였다.
사실, 이 세상으로 건너와서 흑야와 대륙을 떠돌 때, 가장 와보고 싶었던 곳이 홀베른이었다. 케이론 제국의 위성국가이면서도 케이론 제국이 함부로 어쩌지 못했던 곳, 강자들이 득실거린다고 소문난 곳이 바로 홀베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크 영지로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버지와 숙부들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를 거란 확신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달려볼까?”
인적이 뜸해지자 그는 경공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마계에서 중원의 무공과는 다른 기이한 마공들을 배운 그는 그것을 직접 펼쳐보기로 작정하고는 기운을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주변이 칙칙한 마기로 채워졌다.
“이게 단점이군. 백마법사들이 보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겠지? 후후!”
쾅!
그가 섰던 자리에 자욱한 먼지만이 남았다.
* * *
써튼은 오늘도 홀로 다크 영지의 낮은 성곽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부터는 매일같이 술이었다.
“왜 나만 쏙 빼놓고 가버린 거야. 젠장!”
함께 있을 땐 그토록 무서웠던 그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특히 우드는 꿈속에 나타날 정도였다. 내일이면 오겠지, 하던 게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섭섭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다.
벌컥벌컥!
막 숙성된 맥주를 물마시듯 들이부었다. 배가 올챙이처럼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많이 마셨건만 취기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그만 드세요.”
귀엽게 생긴 꼬마아이가 써튼의 옆에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난날, 혁련소에게 커다란 송아지 뒷다리를 선물 받았던 루크였다. 써튼의 유일한 말동무가 루크였다.
“이놈아! 너도 커서 버림이란 걸 당해봐라.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거다.”
“술 때문에 배가 볼록하게 나왔잖아요.”
“이까짓 배 나온 게 무슨 큰일이냐? 배가 터져도 좋으니 술이나 마시련다.”
“쳇!”
루크는 무릎에 얼굴을 올리고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들녘에선 영지민들이 밭을 일구고 있었는데, 그곳에 루크의 엄마도 있었다. 루크는 자신을 간혹 쳐다보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남작님도 일 좀 하시지…….”
“내보고 밭을 일구라고? 이놈아! 할 줄 알면 벌써 했다.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아느냐? 젠장…….”
“밭일이 뭐 어렵다고 그러세요. 그냥 농기구로 갈면 될걸…….”
“어허! 어른이 말씀하는데 꼬박꼬박 말대꾸할 거냐?”
벌컥벌컥!
반은 흘러내려 옷을 적신 맥주냄새 때문에 루크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들녘을 바라보던 루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기 누가 와요!”
“오긴 누가 온단 말이냐? 보나마나 아르소의 맥주상인들이겠지.”
“아닌데…….”
써튼은 마른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들녘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었다. 여러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석양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잔뜩 눈을 찌푸린 써튼이 어느 순간 입에 물었던 육포를 흘렸다.
퍽!
나무로 만들어진 맥주통이 밑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루크가 써튼을 돌아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세요? 몸까지 떨고…….”
“으흐흐… 오셨다. 오셨어!”
써튼이 기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허겁지겁 성곽을 내려와 밖으로 뛰었다.
* * *
“쯧쯧! 저러다가 자빠져서 코가 깨져야 정신을 차리지…….”
조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써튼을 보고는 혀를 찼다. 불안정한 무게중심이 금방이라도 앞으로 꼬라박힐 듯 보였다. 우드가 반가운 얼굴로 마주 달리려고 할 즈음, 써튼이 밭에 얼굴을 박으며 자빠졌다.
“후후! 제대로 자빠졌군.”
“하여튼 저 인간은 발전이 없네.”
흑야와 조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연소민과 에이미 공주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었다.
얼굴에 흙은 잔뜩 묻힌 써튼은 혁련천후 앞에서 넙죽 엎드렸다.
“오, 오셨습니까? 하하!”
옅은 미소로 대신한 혁련천후가 성곽으로 걸음을 옮기자 우드가 재빨리 써튼을 일으켜 세웠다. 흑야와 조윤이 써튼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혁련천후를 따랐다.
“아유! 술 냄새…….”
연소민이 코를 쥐는 시늉을 하자 써튼은 머리를 긁적이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러다가 에이미 공주를 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예를 갖추세요. 홀베른의 공주마마세요.”
“아이 참, 언니는…….”
에이미 공주는 연소민의 어깨를 흔들며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소민의 말을 믿지 못한 써튼이 우드를 돌아봤다. 우드가 짐짓 눈을 부라리며 닦달했다.
“뭐 하는가? 공주마마께 예를 올리지 않고!”
“주, 준남작 써튼이라고 합니다! 신비의 왕국, 홀베른의 공주마마를 이렇게 뵙게 되다니…아, 그리고…….”
써튼은 갑자기 취기가 확 도는 바람에 말이 꼬였다.
“반가워요. 얼른 들어가서 술부터 깨야겠네요?”
“풋!”
연소민과 에이미 공주는 우드에게 먼저 가겠다는 눈빛을 주고는 총총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가는 혁련천후를 쫓았다. 우드가 그제야 부드러운 표정으로 써튼을 바라봤다.
“하하! 잘 지냈는가?”
“외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아, 홀베른에 일이 있어 그곳에 계시지.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더니 그래도 보고 싶은 모양이지?”
“그럼요. 그분들이 없으니 낯선 사람이 영지로 들어오기만 해도 무슨 일이나 벌어지지 않을까, 심장이 철렁거리던 걸요. 제국전쟁이니 뭐니 세상이 좀 시끄럽습니까? 아! 이젠 두발 쭉 뻗고 잘 수 있겠습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써튼은 모처럼 활짝 웃었다.
우드도 그런 써튼이 무척 반가워 둘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둥그런 탁자를 가운데 놓고 모두는 찻잔을 기울였다.
아르소와 다크 영지민들의 이주문제는 각각 연소민과 써튼이 담당하기로 했다. 원하는 주민에 한해서 텔레포트로 이동시킨다는 원론엔 변함이 없었다.
그것에 대한 의논을 끝나자 조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논 산맥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혁련소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 있다고 확신할 순 없었지만 칸빌이 나타난 지역이 그곳이라 무작정 가고 보는 것이다. 그곳에서 천살강기의 흔적을 찾아다니기로 생각을 굳힌 혁련천후는 내심 초조했다.
‘고룡의 심장에다, 돌아갈 방법까지…….’
해야 할 일이 하나가 늘었다.
어쩌면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고룡, 트로이안의 심장을 얻는 일이다.
하지만 아내들은 3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전에 혁련소를 빨리 찾아야 했다. 돌아온 건 확신하지만 눈으로 직접 봐야만 했다. 그전엔 마음이 불안하고 심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윤이 상념에 잠긴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소가 돌아왔다면 이곳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보시는 게…….”
“그게 좋겠습니다. 주공!”
흑야도 거들었다.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다. 이곳으로 올 거였다면 벌써 왔겠지…….”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조윤과 흑야는 서로의 얼굴을 흘긋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요즘의 혁련천후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물론 왜 그런 건지를 알기 때문에 둘은 최대한 그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연소민이 말끝을 흐렸다.
혁련천후가 시선을 주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속내를 이해하는 모두는 잠시 애틋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소는 네가 맡아야지 않겠느냐?”
“……!”
연소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흑야가 그녀를 달랬다.
“그들은 너를 믿고 있다. 너는 그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 몸, 걱정 말고 에이미와 함께 아르소로 가보도록 해.”
“예……!”
그때 혁련천후가 일어섰다. 조윤이 조금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가시렵니까?”
“그래야지.”
조윤과 흑야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혁련천후가 연소민을 보며 눈가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찾으면 아르소로 가마.”
* * *
연소민과 에이미 공주는 성곽에 서서 석양이 걸린 산을 바라보았다.
밭을 일구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들녘은 아늑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며 빠르게 뛰어가는 우드와 써튼의 뒷모습을 보며 에이미 공주가 물었다.
“그분은 어떤 분이세요?”
“……?”
“기다리시는 분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낸 연소민의 얼굴이 애틋함으로 물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어. 그 사람과 함께한 날은…….”
에이미 공주의 얼굴에 호기심이 번져갔다.
“처음엔 몰랐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걸… 하지만 기억을 되찾고 가장 먼저 그 사람 얼굴이 떠올랐을 때, 가슴이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 그때 알았지.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걸…….”
“멋진 분이겠죠?”
“좋은 사람이야.”
“저도 무척 보고 싶어요. 언니의 마음을 이렇게 잡은 분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가볍게 숨을 내쉰 연소민이 에이미 공주의 팔을 잡았다.
“들어가서 술 마시자. 오늘은 그냥 취하고 싶어…….”
“좋아요! 오늘은 술로 밤을 지새우고 내일, 아르소로 떠나요.”
성으로 몸을 돌리는 그녀들의 뒤로 붉은 석양이 수명을 다하고 산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 * *
케이론 제국 50만, 요란 제국 56만, 도합 100만이 넘어가는 대군이 케논 산맥을 가운데 두고서 적의 심장을 향해 창검을 들었다.
최초, 케이시 공작과 테세우드 공작간의 전투에서 요란 제국이 승리하면서부터 드리웠던 제국전쟁의 암운은 몬스터 준동이라는 의외의 변수로 다른 양상을 맞았으나 요란 제국의 황태자, 카르스에 의해 케이론 제국의 사신단이 죽음을 당한 것을 기폭제로 일촉즉발의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바야흐로, 전 대륙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갈 양 제국 간의 전쟁발발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대륙은 초 긴장상태로 접어들었다.
양 제국은 위성국가들에게 연합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어 최대한 군세를 늘리려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오늘도 곳곳에서 작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왕국과 공국의 병력들이 속속들이 케논 산맥으로 집결하기에 이르렀다.
* * *
콰르르…….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하늘은 굵은 장대비를 쏟아냈다.
요란 제국의 본영이 있는 케논 산맥의 북부지역은 주둔지와 케논 산맥의 가운데를 흐르는 강물이 불어나자 수십만의 병사들이 교량을 건설하느라 빗속에서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굵은 통나무를 교각으로 세우고 그 위에 널찍하게 자른 통나무를 얹는 방식으로 만들고 있는 교량은 번번이 거친 물살에 쓸려갔다.
“나무를 더 깊숙이 박아야지! 그래야 버틸 것 아니냐?”
“너, 넘어간다!”
곳곳에서 아우성이었다.
물과 함께 흐르는 커다란 바위 때문에 교량작업의 진도는 무척이나 더뎠다. 그러나 워낙 많은 인원이 달려들었던 까닭에 곳곳에서 교량들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기사, 셋 정도가 동시에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너비로 완성된 교량은 굵은 밧줄로 좌우를 묶어 물살이 더욱 거세질 것을 대비했다.
그런 요란 진영의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강줄기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절벽 위에 케이론의 대마법사 쉐인이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요란 제국의 진영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엔 레이놀드 백작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는 마법경을 통해 요란 제국 진영을 샅샅이 살폈다.
“이 빗속에 교량건설이라니…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내일 아침을 즈음하여 넘어온단 말인데…….”
쉐인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 빗속에 교량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불어난 물살이야 비가 그치고 이틀 정도면 평소의 수위로 돌아온다. 그때 넘어와도 충분한 것인데 지금 저들은 전 병력이 달라붙어 교량을 세우고 있었다.
레이놀드가 마법경에서 눈을 떼고는 쉐인을 쳐다봤다.
“놈들의 이동이 예상되는 길목에 함정과 매복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그건 쉽지가 않소. 분명 막스는 여러 부대로 나뉘어 넘어올 것이오. 게다가 아군과 저들의 중앙 지점에 케이시 공작이 이끌던 1군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소. 자칫 앞뒤에서 적을 맞이하는 불상사를 초래할 수도 있소.”
“흠! 좋은 복안이라도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쉐인은 적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20개에 달하는 교량이 완성직전에 있었다. 레이놀드 백작도 다시 마법경으로 적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억!”
레이놀드 백작이 탁한 신음성을 토해냈다.
“무슨 일이오?”
“발각되었습니다! 서둘러 돌아가야겠습니다.”
“발각이라니? 우리를 말이오?”
“저기를 보십시오.”
레이놀드 백작이 손으로 요란 진영의 우측을 가리켰다. 순간 쉐인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시커먼 흑색갑주를 걸친 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자신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마법진으로!”
쉐인은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레이놀드 백작도 검을 뽑아 들고는 재빨리 쉐인의 뒤를 따랐다. 둘이 이동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릴 즈음, 흑색갑주를 걸친 자들은 이미 강을 건너 지척까지 다가들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쉐인과 레이놀드는 등을 통해 가공할 기운을 느꼈다. 둘은 마법진에 몸을 날리며 뒤를 돌아봤다.
“쥐새끼들!”
빛이 번쩍하며 시퍼런 불꽃이 둘을 향해 짓쳐들었다.
쉐인의 육신이 눈부신 빛으로 둘러짐과 동시에 불꽃이 떨어졌다.
콰과과광…….
요란한 폭발과 함께 마법진이 설치되었던 주변이 태풍에 휩쓸린 듯 초토화로 변했다. 동시에 4명의 기사들이 떨어져 내렸다.
섬뜩한 기운으로 번뜩이는 시뻘건 눈동자를 지닌 그들은 바로 크로우기사 단원들이었다.
“대마법사가 직접 정찰을 오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요동쳤던 마나의 흐름만으로 그는 쉐인이 직접 다녀갔음을 눈치 챘다. 다른 셋이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마법경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레이놀드 백작이 창졸지간에 떨어뜨린 것을 발견한 것이다.
“놈들이 흘리고 갔습니다.”
“좋아! 그걸 전주님께 갖다드려라.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줄 것이다.
“대형! 호칭을…….”
“우리뿐이니 괜찮다!”
전주라는 중원식 호칭이 흘러나왔다. 이들이 전주라고 칭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크로우기사단의 단장이 분명할 것이다. 섬뜩한 눈으로 주변을 쓸어본 그들은 이내 유령처럼 강을 건너 군영으로 돌아갔다.
* * *
“우욱!”
공간이 울렁거리더니 그곳에서 대마법사 쉐인과 레이놀드 백작이 튀어 나왔다. 레이놀드 백작이 시뻘건 핏물을 주르륵 토해냈다.
놀란 쉐인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당한 것이오?”
“크윽! 견딜 만합니다. 빌어먹을 놈들…….”
레이놀드 백작의 거친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이동하는 순간에 날아든 오러에 등을 정통으로 격타당한 그는 상당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쉐인의 놀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토록 강력한 놈들이 있었다니…….’
자신들이 발각된 것을 깨닫고 마법진으로 뛰어가 운용하는 데까지 걸린 시각은 고작 1분이 채 안 되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시간에 강을 건너고 레이놀드 백작에게 부상까지 입혔다. 직접 당하고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레이놀드 백작에게 포션을 건넨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창졸지간에 마나를 운용한 탓에 본대가 주둔하고 있는 카티르 평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산세를 보니 케논 산맥은 분명했다.
그는 눈을 감고 스캔 마법을 펼쳤다. 카티르 평원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마법병단의 마나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론의 마법사들은 대부분이 쉐인의 제자들이다. 요란 제국의 마법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속성이기에 먼 거리만 아니라면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쉐인이 눈을 떴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텔레포트를 통해 돌아가면 그뿐이지만 방금 막대한 마나를 소모했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는 레이놀드 백작을 돌아봤다.
포션 덕분에 조금 전보다는 안색이 좋아져 있었지만 워낙 제대로 입은 내상 탓에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텔레포트로 돌아가야겠소.”
“여기가 어딥니까?”
“케논 산맥은 분명한데 워낙 큰 산이라 나도 모르겠소. 30분 정도만 참으시오. 본대로 돌아가 마법치료를 받으면 속히 나을 것이니까.”
쉐인은 레이놀드 백작의 옆에 앉았다.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한 모금 마시고는 그것을 레이놀드 백작에게 건넸다.
“마나를 속성으로 보충시켜주는 포션이오.”
그 말에 레이놀드 백작은 빼앗듯 낚아채서는 입으로 가져갔다. 고개를 젖히고 마시려던 레이놀드 백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것은……!”
막 눈을 감고 마나를 운용해 보려던 쉐인이 레이놀드 백작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도 부릅떠졌다.
우거진 숲 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산 전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각종 몬스터들이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의 블랙 오우거와 그 위로는 블러드 와이번들이 괴성을 지르며 날갯짓을 해댔고 십만이 넘어 보이는 오크와 고블린, 그리고 지금껏 케논 산맥에선 나타나지 않았던 트롤까지도 상당수 보였다.
“도대체 저 많은 몬스터들이 어디를 간단 말인가?”
“케논 산맥의 몬스터란 몬스터는 모조리 모인 것 같습니다.”
둘이 있는 곳은 제법 높은 곳이었다.
때문에 능선을 타고 이동하는 몬스터의 진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장관일 수도 있었지만 블랙 오우거와 블러드 와이번의 가공할 위력을 맛본 그들에겐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제아무리 대마법사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레이놀드 백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쉐인 공! 놈들이 향하는 곳이…….”
“그렇군! 이동방향이 북쪽이라면 놈들은 요란 제국의 주둔지로 몰려가고 있음이 틀림없소!”
둘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원군.
그렇다. 이렇게 되면 몬스터대군은 케이론에겐 엄청난 힘을 보태줄 원군이 되는 것이다. 그때 쉐인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쉐인이 다급해졌다.
“움직일 수 있겠소? 최대한 본영으로 이동하다가 마나가 보충되면 텔레포트를 하는 것이 좋겠소. 이 사실을 공작께 최대한 빨리 알려야만 하오. 자칫 출전하다가 저들과 중도에서 만날 수도 있소.”
레이놀드 백작도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표정이 변했다.
둘은 하늘을 보고 방향을 잡은 후, 빠르게 남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이놀드 백작 때문에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안되겠습니다. 저는 천천히 뒤따를 테니 공께서 먼저 가십시오!”
“그래도 되겠소?”
“제 걱정은 마십시오! 어서 가십시오!”
“가는 곧장, 마법사들을 보낼 테니, 최대한 안전하게 천천히 오시오. 그럼!”
쉐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레이놀드 백작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았다. 멈췄던 각혈이 다시 시작되었다. 시커멓게 죽은 핏물이 입을 통해 토해졌다.
“빌어먹을 새끼들… 다음에 걸리면 사지를 잘라주겠다.”
* * *
몬스터들의 대규모 이동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에이미 공주의 텔레포트로 방금 케논 산맥으로 이동한 혁련천후는 새카맣게 능선을 채우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놀랍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지휘하듯 질서정연하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설마 몬스터들이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닐 텐데…….”
조윤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몬스터는 중원으로 치면 짐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몬스터들이 대열을 이루고 마치 인간의 군대가 이동하듯 하고 있었으니…….
몬스터의 이동을 말없이 바라보던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살짝 빛을 발했다.
“사람이 있군.”
“예? 사람이 있다니요?”
혁련천후가 턱짓으로 몬스터 대군의 선두 부근을 가리켰다. 순간 조윤과 흑야의 눈동자도 빛을 발했다. 둘은 즉시 내공을 끌어올려 안구에 힘을 주었다.
과연 새카맣게 밀려가는 몬스터들의 선두에 말을 탄 3명이 보였다.
“그렇군요. 셋입니다. 저들이 몬스터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말을 듣는 몬스터라…….”
중얼거린 혁련천후가 에이미 공주를 돌아봤다. 뭔가 물으려던 그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흠칫했다.
“왜 그러느냐?”
“저들 중 하나에게서 킹 데스나이트의 기운이 느껴져요.”
“뭐 하는 놈이냐?”
“죽은 자들의 왕이라 불리는 마계의 존재랍니다. 700년 전에 벌어졌던 몬스터대전에서 소멸되었다고 전해졌었는데 어떻게 다시 강림했는지 의문이군요.”
전방을 슬쩍 돌아본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강한 놈인가?”
“마계의 황족들을 제외하곤 가장 강력한 존재라고 보면…….”
“데얀보다 강한가?”
“데얀이 갑주를 입고 싸운다면 비슷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데얀이 훨씬 못 미친다고 보는 것이…….”
에이미 공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혁련천후가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혁련천후를 응시하는 그녀의 어깨를 조윤이 툭 쳐주었다.
“그 정도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가자!”
“별것도 아니군. 이름만 거창해 가지고는…….”
조윤과 흑야도 혁련천후의 뒤를 따랐다. 에이미 공주는 셋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강림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공포로 몰아갈 킹 데스나이트도 저들에겐 그저 오우거 정도로만 여겨진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하긴 맨주먹으로 데얀을 눕힌 분이니…….’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그녀는 몬스터들을 한 번 돌아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셋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