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다시 나타난 몬스터의 준동
레이놀드 백작은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에 빠르게 몸을 숨겼다.
동시에 전방 숲 속에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흑발을 늘어뜨린 얼음처럼 차가운 사내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분명 낯이 익은 사내였다. 그러나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때 사내의 뒤쪽에서 셋이 더 모습을 나타냈다. 순간, 레이놀드 백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자는 다크 영지의 그…….’
그는 흑야를 기억했다.
지난날, 아르소의 평원에서 그를 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오시지.”
차가운 음성이 레이놀드 백작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이 발각되었음을 깨닫고는 성큼 나섰다. 자신은 백작이고 저들은 자신보다 하위계급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레이놀드 백작이 모습을 드러내자 흑야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자넨 다크 영지의 근위장이 아닌가? 내가 누군지 기억하겠지?”
흑야는 어이가 없어 조윤을 쳐다봤다. 어이없기는 레이놀드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백작인 자신을 보고도 고개조차 숙이지 않다니…….
“이봐! 나를 카티르 평원까지 호위해 줘야겠어. 그래 줄 수 있겠지?”
혁련천후가 흑야를 돌아봤다.
눈빛은 뭐 하는 놈이야? 라고 묻고 있었다. 흑야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는 레이놀드 백작을 향해 말했다.
“돼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돼, 돼지?”
“여긴 돼지, 네겐 적진이 아닌가?”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이 삶은 돼지처럼 붉어졌다. 아무리 부상을 입은 몸이라지만 변방의 기사 정도는 일검에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 때 혁련천후가 말했다.
“케이론의 기사였나?”
“기, 기사라고?”
“부상당한 몸으로 여기 있으면 죽는다. 기어서라도 얼른 돌아가야 할 거야.”
혁련천후가 등을 돌리자 조윤이 묻는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레이놀드 백작이 더 놀랐다. 죽긴 누가 죽는단 말인가? 부상을 입었지만 몬스터 정도는 충분히 처치할 능력은 되었고, 또 조금 있으면 쉐인이 보낸 마법사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텐데 말이다.
이번에도 그보다 흑야의 말이 더 빨랐다.
“미련한 놈이군. 죽어가면서도 가만히 있다니…….”
“죽긴 누가 죽는단 말이냐? 그리고 말투가 그게 뭐지? 감히 백작인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백작은 개뿔…….”
정상으로 오르려던 혁련천후가 나지막이 말했다.
“상태를 살펴봐.”
조윤이 다가왔다. 레이놀드 백작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네 몸속에서 칙칙한 죽음의 냄새가 느껴지거든. 그러니 가만히 있어라. 돼지 백작!”
조윤이 손을 슬쩍 휘젓는 시늉을 하자 레이놀드 백작은 자신의 육신이 목석처럼 굳어짐을 느꼈다. 손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손까지 신경이 전해지지 않았다.
크게 놀란 그가 소리쳤다.
“이놈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난, 케이론 제국의 백작이란 말이다!”
“백작이고 나발이고 가만히 있어 봐.”
조윤이 손바닥을 펼쳐 레이놀드 백작의 명치 부근에 갖다 대었다. 뜨거운 기운이 몸 안으로 밀려오자 레이놀드 백작은 통증에 인상을 그렸다.
조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주공! 이상합니다!”
그 말에 혁련천후와 흑야, 에이미 공주가 곁으로 다가왔다. 조윤이 일어섰다. 눈빛은 직접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혁련천후가 손을 뻗어 레이놀드 백작의 명치에 대었다.
순간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결코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기운이 레이놀드 백작에게서 느껴졌다. 이내 그의 눈동자에 한기가 돌았다.
“누구에게 당한 부상이지?”
“……!”
“말해라. 너를 이렇게 만든 놈들이 누군지를…….”
차가운 기운에 소름이 돋은 레이놀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요란 제국의 기사들에게 당했다. 그런데 그게 왜……?”
레이놀드 백작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는지 표정이 꽤나 굳어져 있었다.
“우리처럼 흑발에 흑안을 지녔던가?”
“그건 자세히 보지 못했다.”
“자세히 말해라.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것을 말이야.”
레이놀드 백작은 혁련천후의 눈을 정면으로 보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피어나는 강렬한 기운은 저절로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여기서 대답하지 않으면 자신은 죽을 거란 직감이 뇌리를 때리자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 * *
옹고르 분화구에 다다른 혁련천후는 천살강기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누볐지만 전혀 찾아내질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표정이 썩 좋질 않았다.
카루가는 분명 칸빌이라는 존재가 이곳에서 강림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혁련소도 이곳에 왔을 것이고 당연히 천살강기의 흔적이 느껴져야만 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금 더 찾아보시지요.”
조윤이 다가오며 위로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이미 공주 역시 자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넓은 공간을 샅샅이 감지했다. 그녀는 혁련천후에게서 천살강기의 기운을 조금 익히고는 그것을 바탕으로 혁련소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에 열중했다. 그러나 혁련천후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그녀가 느낄 리 만무했다.
‘천살강기를 잃어버린 건가?’
초조함이 더해만 갔다.
혁련소를 찾으면 곧장 요란 제국의 모처에 있는 고룡, 트로이안의 심장을 얻는 것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언제나 시커멓게 죽은 케논 산맥의 하늘이 지금은 자신의 속내와 같았다. 자꾸만 꼬여가자 은근한 분노마저 일었다.
흑야와 조윤은 말없이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에이미 공주도 마른침을 삼키고는 혁련천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상념에 잠긴 듯 보였던 그가 몸을 돌려 흑야와 조윤에게 말했다.
“몬스터가 몰려간 곳이 요란 제국의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라 했나?”
“그렇습니다만…….”
혁련천후가 흑야를 보며 말했다.
“일단 놈들을 먼저 해결해야겠어.”
“크로우기사라는 놈들을 말입니까?”
“중원에서 넘어온 것이 확실하다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 넘어온 놈들인지 알아봐야겠어. 그리고 방법까지…….”
“소를 먼저 찾아야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공께선 사람을 죽여선 안 되는 제약이…….”
흑야의 말에 혁련천후의 얼굴근육이 살짝 움직였다.
“그 아이가 천살강기를 잃어버린 듯하군. 그렇다면 스스로 다크 영지로 오는 것을 기대할 수밖에… 그리고 그깟 제약 따윈 이미 사라졌다.”
혁련천후가 등을 돌려 성큼 걸었다.
조윤과 흑야는 서로를 마주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혁련천후의 심정이 어떠한지 둘은 충분히 짐작했다.
[화가 나신 것 같은데…….]
[번번이 일이 꼬이니 그러실 수밖에…….]
[성주님께서 뛰시는데요?]
갑작스럽게 에이미 공주가 전음에 끼어들자 둘은 화들짝 놀랐다. 설마 그녀가 전음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던 둘은 엉겁결에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그녀의 말대로 벌써 그는 새카만 점으로 변해 있었다.
쾅!
셋의 육신이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갔다.
* * *
드드드드…….
대지가 은은한 울음을 토해냈다. 경계를 서던 요란 제국의 병사들은 대지를 새카맣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몬스터 대군을 발견하고는 곳곳으로 통신을 타전하기에 급급했다.
“몬스터가 몰려옵니다! 10만이 넘어가는 엄청난 숩니다!”
“블랙 오우거와 블러드 와이번도 섞여 있습니다! 우측 결계가 무너져 1차 경계망이 돌파당했습니다!”
쾅!
블러드 와이번의 화염공격으로 결계는 손쉽게 무너졌다. 그곳을 통해 몬스터들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가장 일선을 경계하던 소수병력은 맞서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서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렸다.
“으악!”
“후, 후퇴하라! 본진으로 후퇴하라!”
수천에 이르는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뒤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블러드 와이번이 더욱 빨랐다. 순식간에 갑주조차 녹여버리는 화염덩어리가 그들을 덮쳤다. 참혹한 비명이 곳곳에서 울렸다.
부상을 입고 꿈틀거리는 병사들에겐 고블린들이 떼로 달려들어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병사들은 오크의 칼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끄으…….”
경계를 책임지던 제7강습여단의 천인장 로송크 자작은 자신의 가슴을 뚫고 삐져나온 검을 내려다보며 공포에 젖은 비명을 흘려냈다.
“후후후…….”
천천히 고개를 돌린 로송크 자작의 눈에 칙칙한 죽음의 향기를 뿌려대는 인물들이 보였다. 회색빛 투구에 혈광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지닌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바라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데, 데스 킹…….”
그 말을 끝으로 로송크 자작은 고개를 꺾었다.
“인간 마법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폭스 후작이 평원의 끝을 가리켰다. 카르스의 잿빛 눈동자가 그곳으로 향해졌다.
수백에 달하는 마법사들과 10만이 넘어가는 대군이 폭풍처럼 짓쳐들어 오는 광경이 그의 눈에 잡혔다. 카르스의 입가가 올라갔다.
“후후후! 죽음의 향연이 시작되는군. 모두 저곳을 향해 돌진하라! 미개한 인간들에게 마계의 위대함을 보여주리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옆에 섰던 크루즈 백작의 입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몬스터들이 일제히 평원의 끝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 * *
막스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시야를 새카맣게 채워버린 몬스터대군은 잠깐이나마 그에게 긴장감을 솟아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다.
“감히! 몬스터 따위가…….”
“폐하! 기병으로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마법병단의 화염공격으로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참모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일 때, 크로우기사단의 단장, 레인이 나섰다.
“저놈들을 먼저 처치해야 합니다.”
그는 몬스터 대군의 곳곳에 우뚝 솟은 탑처럼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돌진해 오는 블랙 오우거를 가리켰다. 그리고 눈으로는 하늘의 지배자, 블러드 와이번을 가리켰다.
막스 황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놈들은 레인, 그대에게 맡기겠다! 놈들이 쓰러지면 그때 기병으로 쓸어버릴 것이다!”
레인이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막스 황제는 병력의 이동을 멈추고 평원의 능선에 포진했다. 몬스터 대군의 출현소식을 접한 그는 주둔 병력의 절반인 15만을 직접 이끌고 나선 상태였다.
“폐하! 몬스터들 사이에서 인간이 보입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인간이……?”
“인간이 몬스터와 함께할 순 없습니다! 저들은 데스나이트가 분명합니다!”
“데스나이트가 있다면 다른 마계의 존재도 있을 것이다! 철저히 살피고 포착하라!”
막스 황제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몬스터 대군의 가운데에 기사로 보이는 인간 셋이 보였는데, 그들이 데스나이트라면 어딘가에 그들을 소환한 마계의 상위존재가 있을 것이다. 데스나이트는 흑마법에 영혼을 저당 잡힌 죽은 기사들, 당연히 그들과 계약한 존재를 찾아야만 했다.
그때였다.
진영의 가운데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앞으로 날아갔다. 모두 다섯으로 레인을 비롯한 크로우기사단의 최정예 강자들이 새카맣게 몰려오는 몬스터 대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막스 황제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기병!”
처처척!
그의 짤막한 명령에 수만의 기병들이 앞으로 나섰다. 철갑을 두른 전마에 몸을 실은 그들은 집단전에 있어 대륙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제7강습여단의 기마병단이었다. 요란 제국의 전성기를 연 그들은 돌진명령만을 기다리며 강렬한 눈빛들을 발산했다.
“후후후… 저들의 위력을 테세우드, 놈이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막스 황제는 벌써 몬스터 대군의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가는 레인과 기사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저들은 세상이 모르는 자신의 비밀전력이다.
크로우기사단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상위 다섯이 그들인데 자신의 사부가 직접 데려와서 양성한 까닭에 자신도 그들의 정확한 경지는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흡족한 웃음을 지을 때, 레인의 육신이 블랙 오우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넷도 각각이 블랙 오우거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들은 다른 몬스터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크와 고블린의 머리 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막스 황제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연! 대단하구나!”
* * *
크어어…….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인간을 발견한 블랙 오우거가 광포한 몸짓을 보이며 주먹을 휘둘렀다. 거대한 통나무를 연상시키는 굵은 팔뚝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레인의 육신을 향해 뻗어갔다.
그러나 레인이 더 빨랐다. 허공에서 블랙 오우거의 팔뚝을 발판삼아 도약한 그의 검이 섬광을 발하며 그어졌다.
퍽!
“크아아…….”
검이 베고 지나간 목이 반쯤 잘라지며 엄청난 양의 핏물을 쏟아냈다.
쾅!
움켜쥐듯 날아온 블랙 오우거의 창날 같은 손톱에 레인의 갑주 끝부분이 종이처럼 뜯겨 날아갔다. 레인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을 발했다.
“죽어라!”
바람을 일으키며 회전한 레인의 검이 블랙 오우거의 머리를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가공할 위력의 블랙 오우거가 단 두 번의 칼질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진정 가공할 만한 레인의 위력은 요란 진영에 환호성을 일으켰다. 레인의 잿빛 눈동자가 주변을 쓸었다.
다른 크로우기사 단원들도 각각 맡았던 블랙 오우거의 목을 막 잘라내고 있는 것이 보이자 그의 눈동자는 하늘로 향해졌다. 동료의 죽음에 화라도 난 것일까? 유유히 허공을 선회하던 블러드 와이번 몇 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레인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손에 쥐었다. 톱니바퀴처럼 생긴 암기였다.
“드래곤의 뼈로 만든 이것이라면 네놈의 심장을 뚫어낼 수 있겠지.”
죽은 블랙 오우거의 시신을 밟고 선 레인의 오른손이 강렬한 빛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오크와 고블린들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주변에 원형이 공간이 생겨났다.
카아아…….
블러드 와이번의 화염이 그곳으로 쏘아졌다.
동시에 레인의 손이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빛이 번쩍 하더니 그의 손에서 발출된 암기가 굉음을 일으키며 블러드 와이번을 향해 날아갔다.
쾅!
허공에서 강력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급강하하던 블러드 와이번의 거대한 동체가 휘청거리더니 대지로 떨어져 내렸다. 레인의 육신이 허공으로 쭉 솟아 올라가더니 곧장 꿈틀거리는 블러드 와이번의 육신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피와 살이 난무했다. 주변에 몰려 있던 오크와 고블린이 파생된 기운에 휩쓸려 떼로 죽어나갔다.
“우와아…….”
능선에서 돌격을 준비하고 있던 기마병단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레인과 기사단원들의 대활약을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막스 황제의 오른팔이 올라갔다.
두두두두…….
기마병단이 폭풍처럼 질주를 시작했다.
* * *
“틀림없습니다! 방금 놈이 펼쳤던 무공은 신교의 장로들이 익힌다는 아수마공의 최강초식인 폭렬탄강이었습니다!”
“소천이 싸웠다는 놈들이 저놈들과 한패였던 모양입니다.”
조윤과 흑야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격앙된 목소리를 뱉어냈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이 돌았다.
“난입해서 놈을 잡아오겠습니다!”
흑야가 움직였다. 그러나 혁련천후가 그를 제지했다.
“기다려.”
혁련천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직시했다.
그들은 지금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서 있었다. 레인의 가공할 무위를 눈으로 확인한 그들은 레인이 중원에서 온, 신교의 인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블러드 와이번을 처치할 때 펼쳤던 무공이 그것을 증명했다.
“케이론을 기다리십니까?”
“머리가 있다면 이런 호기를 놓칠 리 없겠지.”
레이놀드 백작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대마법사 쉐인이 몬스터의 준동을 알렸다면 테세우드 공작은 몬스터들과 요란 제국 간의 싸움이 끝날 때를 노려 대군을 몰고 케논 산맥을 넘어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마법병단은 벌써 도착해서 전장을 살펴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그때 전장으로 난입한다.”
“……!”
“우선적으로 저놈들을 먼저 잡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요란의 황제까지!”
혁련천후는 일말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이 전쟁은 오직 아들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누가 이기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아들을 찾고 아내들을 부활시키면 그땐 중원으로 돌아가면 그뿐인 것이다.
콰과광!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과 몬스터들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들이 선 절벽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했다.
레인을 비롯한 크로우기사단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흑야와 조윤과는 달리 혁련천후는 전마에 올라 전장을 바라보는 막스 황제를 응시했다. 워낙 화려한 갑주에다 주변을 늘어선 철통같은 경호에 “내가 황제다.” 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전장에서, 그것도 승리를 확신하는 전투가 아니면 대부분의 수장들은 드러내기를 꺼린다. 자칫 적의 집중공세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면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요란 제국의 막스 황제는 케이론 제국과의 전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요란 진영을 날카롭게 살펴보던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이채가 맺혔다.
‘이상한 놈들이군.’
그는 막스 황제의 주변을 늘어선 자들 중, 시커먼 로브를 걸친 자들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법사들에 대한 막연한 감정이 아니었다.
“주공! 케이론입니다.”
조윤의 나지막한 말에 혁련천후는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선 뒤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가 케이론의 영토였는데, 그곳에 케이론의 대병력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어림잡아 20만은 넘어 보이는 대군이었다. 몬스터와의 전쟁을 지켜보던 막스 황제도 그것을 보았는지 갑자기 요란 진영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론이 작정하고 나섰군요. 뒤를 보니 최소 30만입니다.”
그랬다.
병력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선두에 선 마법병단의 수도 케이론에 비해 훨씬 많아 보였다. 혁련천후가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저기 저 놈들 중 하나만 생포하는 쪽으로 해봐.”
“마법사들이 아닙니까?”
“기분이 묘해…….”
“알겠습니다.”
혁련천후가 막스 황제의 주변을 늘어선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조윤과 흑야의 눈이 매서운 빛으로 번뜩였다. 에이미 공주는 여전히 셋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설마 이런 무지막지한 방법을 쓰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그녀였다. 물론 요란의 전력을 최대한 줄여놓으면 그것으로 이득이다. 어차피 자신들은 요란 제국의 심장부로 곧 쳐들어가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여전히 그녀로선 이해불가였다.
가볍게 한숨지은 그녀는 빠르게 셋을 따라붙었다.
* * *
영지 아르소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대군의 이동길목에 놓인 그곳은 태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먼지가 영지, 전체를 덮고 있었다.
기마병들이 지나간 들판은 개간이 필요할 정도로 손상을 입었고 간혹 병사들이 들이닥친 술집이며 상점들은 상당한 양의 물품을 강제적으로 헐값에 팔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것은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면 케논 산맥과 가까운 이곳까지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자국의 병사들이 출전함에도 영지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래서 전쟁이 무서운 것이다.
특히 아르소나 다크 같은 변방의 영지민들은 더더욱 그렇다. 사실 이들에겐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불필요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군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아군도 이들을 자국민으로 보기보다는 물품조달에 필요한 소모품으로 여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병력들의 행렬을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연소민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녀의 옆에 선 집사 쉘트는 분노를 표출하기에 바빴다.
“저자들이 과연 우리를 케이론의 백성으로 여기기는 하는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대부분의 상점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전쟁이니까요…….”
“전쟁이 무엇입니까? 자국민들을 적에게서 보호하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까? 그런데보호들은…….”
쉘트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데려가려는 것이에요. 물론 원하는 분들에 한해서지만…….”
“이렇게 되면 모두가 서로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잘되었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홀베른의 영화는 전 대륙에 소문나지 않았습니까?”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야 해요. 잘못하면 반역행위로 몰려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저녁에 모든 영지민들을 성안으로 모이라고 해놓았습니다. 영주께서 직접 설명을 드린다면 모두가 흔쾌히 따라 나설 것입니다.”
연소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군의 행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군의 행렬이 도중에 흩어지고 있었는데, 수십 기의 기마들이 누군가를 쫓는 광경이 눈에 잡혔다. 놀라운 것은 기마병들이 쫓고 있는 게 사람이었는데 쫓기는 사람은 말을 타고 있지 않았음에도 기마병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호기심이 일면서도 가슴 한쪽이 아리하게 저려옴을 느꼈다. 스스로도 그러한 반응이 의아했다.
그녀는 내공을 끌어올려 시야를 밝게 했다. 그러나 워낙 먼 거리였던 탓에 형태만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추격전이 벌어지면서 일어나는 먼지로 보아 자신이 있는 성과는 반대편으로 향함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다크 영지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 * *
“빌어먹을 자식들! 끝까지 쫓아오네?”
혁련소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지금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에게 쫓기는 중이었다. 이유는 자신이 찬 검을 그들이 탐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압수하고자 달려드는 기사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그는 번거로움을 피해 도주를 택한 것이다.
금방 포기할 줄 알았던 그들이 끝까지 쫓아오자 혁련소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뒤를 돌아보니 대략 십여 기로 보였다.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는 거지?”
그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쫓아오는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기사들도 고삐를 당겨 전마를 세웠다.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어라!”
혁련소가 자신을 그대로 흉내 내자 기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기사들은 빠르게 혁련소의 사방을 에워쌌다.
“감히 제국의 기사들을 농락하고 도주하다니, 네놈의 간이 얼마나 큰지 보겠다.”
“아주 지랄들을 하셔. 제국의 기사는 강도짓을 해도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닥쳐라! 지금은 전시다. 당연히 기사들이 요구하면 평민들은 검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내주어야 하거늘, 감히 도주를 하다니…….”
기사는 짐짓 호통을 쳤다.
혁련소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싼 기사들을 느릿하게 돌아봤다.
‘흠씬 두들겨 패주고 아르소에나 들렀다갈까?’
저 멀리 보이는 아르소의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아리안이 떠올랐다. 지난날, 그녀에게서 느꼈던 묘한 분위기…….
‘더 예뻐졌겠지? 좋아! 가서 술이나 한 잔 얻어먹어야겠다.’
혁련소가 혼자 히죽거리자 기사들은 대뜸 고함을 질렀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이놈!”
“무릎을 꿇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이놈!”
“이런 망할 새끼!”
“이런 망할 새끼!”
더 참지 못한 기사가 전마에서 뛰어내렸다. 다른 기사들은 혁련소가 도망치지 못하게 사방을 차단했다.
“이봐! 네놈들의 적은 요란이잖아. 불쌍한 백성들을 괴롭혀서야 어디 기사란 말을 들을 수 있겠어? 머리에 똥만 찬 자식들아!”
“죽엇!”
기사의 검이 제법 강력한 기운을 뿌려대며 날아들었다. 목 근처까지 검이 날아들었음에도 혁련소는 피하거나 막을 생각을 안 했다. 아니, 기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모두가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머리를 생각하고 있을 때, 깡! 하는 금속성과 함께 검을 휘둘렀던 기사의 육신이 자신이 타고 왔던 전마에게로 날아가 부딪혔다.
“욱!”
“아프지?”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혁련소와 쓰러진 기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선 혁련소, 날아든 검을 손가락으로 쳐낸 것이다. 불행이라면 기사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 것에 있었다.
마법을 쓴 것이라 여긴 기사들이 대노하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눈깔은 멋으로 달고 다니는 놈들이군. 쯧쯧쯧!”
* * *
혁련소와 기사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곳에서 약 100미르 정도 떨어진 장소에 은은한 진동이 생겨났다.
우우웅…….
공간이 진동하며 마나의 소용돌이가 요동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어지간한 텔레포트를 상회하는 상당한 양의 마나였다. 작은 빛의 폭발이 일어나며 사람의 형상이 그곳에 나타났다. 검다 못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색갑주를 걸치고 어깨까지 늘어진 핏빛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인물은 주변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후후후… 예상보다 빨랐어. 몇 개월은 걸릴 줄 알았는데, 놈들의 힘이 생각보다 괜찮았어.”
붉은 광망이 번뜩이던 눈동자가 이내 새카만 흑색으로 변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혁련소와 기사들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기운은……!”
갸웃거림은 상당한 놀람으로 번져갔다.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온 눈동자가 혁련소에게 고정되었다.
“후후! 여기 있었군. 이계의 애송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꽤나 섬뜩한 느낌을 발산했다. 혁련소를 알고 있었던 자였을까? 그는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 * *
혁련소는 문득 뒤쪽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지자 무심결에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오는 인물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익숙한 기운인데? 누구지?’
그랬다.
분명 익숙한 기운이 인물에게서 느껴졌다. 그러나 얼굴은 처음 보는 자였다.
그런데 그자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기사들의 검이 섬뜩한 소리를 울리며 혁련소의 주변을 날아다녔지만 그는 여유롭게 피해내면서 다가오는 인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때 혁련소의 눈이 부릅떠졌다.
“피해!”
쾅!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혁련소에게 달려들었던 기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서 산산조각으로 찢겨져 날아갔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고 그곳에 사람과 전마의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후후후! 또 보는군. 애송이!”
“미친놈! 넌 누구지?”
“역시 날 알아보지 못하는군. 그건 내가 그만큼 완벽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뜻하는 거고 말이야. 이거 기분 죽이는데?”
“누구냐니까? 미친 자식아!”
혁련소가 검을 뽑았다. 상대가 검을 뽑지 않으면 상대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강자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없었다. 다만 그가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한 것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죽으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상대가 지독한 살기를 드리우자 혁련소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자신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힘을 얻은 나의 첫 제물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죽어라. 애송이!”
“과연 그럴까?”
치르륵!
혁련소의 검이 강렬한 마기를 품었다. 그것을 본 인물의 눈동자에 탐욕이 어렸다.
“후후! 네놈의 힘마저 내 것으로 만든다면 차원에서 나를 당할 자 아무도 없겠구나. 좋아! 네놈을 새로운 데스 킹으로 만들어주마. 카르스, 놈보다 훨씬 훌륭한 수족이 되기에 충분하겠어. 후후후!”
‘데스 킹! 그렇다면…….’
혁련소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짐작했다.
“칸빌! 네놈이었군. 사악한 놈! 보아하니 다른 자의 힘을 흡수한 모양이구나!”
“후후! 이제야 알아보는군. 하지만 이미 늦었어. 진즉에 알아봤다면 도망이라도 쳐보다가 죽었을 텐데 말이야.”
칸빌은 여유가 넘쳤다.
반대로 혁련소는 내심 초조했다. 지금의 칸빌은 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전에는 일대일로 붙어도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도 그가 더 강해 보였다.
말처럼 다른 자의 힘을 흡수한 것이 원인이리라. 그것도 꽤나 강력한 힘을 말이다. 인간의 육신으로 변신한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네놈을 찾아다녔는데, 스스로 이곳으로 기어오다니… 끝장을 내주마!”
혁련소는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비록 천살강기는 잃었지만 대신 마계의 막강한 암흑마기가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암흑마기에 가문의 비기로 전해져오던 무공을 섞으면 칸빌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있었다.
* * *
“엄청난 힘이 느껴져. 누구지……?”
성곽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연소민은 새롭게 나타난 자에게서 막강한 기운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지자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사람에게서도 전과는 다른 무지막지한 기운이 느껴지자 호기심은 더욱 강렬하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검에 손을 가져가다가 흠칫했다.
‘뭐지? 이 반응은…….’
그랬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청년이 뿜어내는 기운을 느끼고는 가슴 한구석에서 작은 울렁거림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호흡을 다스리고 시선을 던졌을 때, 둘이 격돌했다. 연소민은 순간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번쩍!
둘이 격돌하자 엄청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전마를 몰아 달려오던 다른 기사들이 태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드드드…….
대지가 울렸다.
“도대체……!”
연소민은 반쯤 넋이 나갔다. 이건 듣도 보도 못했던 엄청난 광경이었다. 고수들의 요람이라던 신교에서도 이 정도의 가공할 만한 격돌은 구경조차 못했던 그녀였다. 아니, 중원을 통틀어서도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일 고수는 오직 신마성의 거인들뿐일 것이다.
쾅! 쾅!
둘의 격돌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칸빌!”
뾰족한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를 넘어 둘이 싸우는 곳으로 쏜살처럼 날아갔다. 연소민의 커다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카루가! 위험해!”
카루가였다.
그러나 카루가는 벌써 둘의 격돌 현장 근처까지 다다라 있었다. 연소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챙!
검을 뽑아 든 그녀의 육신이 카루가의 뒤를 쫓았다.
* * *
크로우기사단의 단장, 레인은 거침이 없었다.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몬스터들은 모조리 한줌 핏물로 화해 쓰러졌다. 칼이 닿지 않았음에도 막강한 오러가 오우거며 고블린을 휩쓸고 지나갔다.
다른 크로우기사 단원들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그들의 뒤쪽으로 기병들이 들이쳤다. 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크어어…….”
쾅!
“캬악!”
아직 살아남았던 블랙 오우거의 거대한 주먹이 레인의 육신을 강타했다. 그러나 비명은 오히려 주변에 몰려 있던 몬스터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파생된 기운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오크의 단단한 가죽이 종이처럼 잘려나가며 비릿한 피비린내를 주변을 진동했다.
레인의 눈이 매섭게 돌아갔다.
“이런 개 같은……!”
블랙 오우거의 주먹에 정통으로 가격당하고도 그는 입가에 가는 선혈만을 흘려낼 뿐이었다. 피하지 못한 것에 분노한 것일까? 레인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블랙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돌진방향에 있었던 오크와 고블린들이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해 좌우로 썰물이 빠지듯 물러났다.
어지간해서는 공포를 모르는 몬스터들의 특성을 감안하면 레인이 발산하는 기운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크아아…….”
블랙 오우거도 괴성을 지르며 레인을 향해 거대한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검을 베어가던 레인을 향해 누군가가 빛을 번쩍이며 날아들었다.
쾅!
강력한 폭발과 함께 두 개의 신형이 양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바닥으로 내려선 레인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순간, 레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황태자!”
“후후후! 황태자? 지금 내게 하는 소리냐?”
카르스였다.
칙칙한 죽음의 기운을 두른 그는 느릿하게 레인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부릅떠진 레인의 눈동자에 의문이 어렸다. 한눈에 카르스가 정상이 아님을 알아본 것이다. 특히 잿빛으로 죽어버린 눈동자는 도저히 산 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레인은 무심결에 능선을 쳐다봤다. 막스 황제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몬스터를 향해 뛰어든 기마병단을 제외한 소수의 기마병과 상당수 보병들이 우측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보였다.
의구심이 들었으나 레인은 생각을 떨쳐야 했다. 카르스가 느닷없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네놈을 죽여 그 힘을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미친…….”
레인의 눈동자에 악독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는 눈앞의 카르스를 다른 존재로 여겼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당장은 그를 죽여야 자신이 산다.
레인의 검이 불을 뿜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 * *
요란 제국의 마법병단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양팔을 뻗어 올렸다.
막스 황제의 지근거리를 호위하던 자들도 기묘하게 생긴 지팡이를 앞으로 쭉 뻗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교활한 놈! 당연히 올 줄 알았다.”
막스 황제는 짓쳐들기 시작하는 케이론 제국의 대군을 바라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양면에서 적을 맞게 된 형국이건만 그에게선 조금의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광이 어린 그의 눈에 선두에서 검을 뽑아 든 채, 바람처럼 달려오는 테세우드 공작이 비쳤다.
순간 그의 입가에 찬웃음이 걸렸다.
“기회를 잘 노렸다만 네놈이 알고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린 강하다. 그걸 모른 네놈은 오늘로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여유로웠다. 그리고 자신이 넘쳤다.
그때 천지간이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막스 황제의 시선이 마법병단의 머리 위쪽으로 던져졌다.
놀랍게도 그곳에 거대한 와이번의 형상이 나타나 있었는데, 광포한 빛으로 둘러싸인 그것은 당장에라도 적을 향해 날아갈듯 포효하고 있었다.
“후후! 놈들이 조금 더 접근하기를 기다려라.”
그는 담담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대기하라!”
“대기하라!”
명령이 빠르게 사방으로 전해졌다.
두두두…….
20만이 넘어가는 케이론 제국의 대군은 지축을 울리며 쇄도해 들고 있었다. 그 선두에 테세우드 공작과 대마법사 쉐인, 그리고 상당히 젊은 청년기사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좌우로 생소한 인물들이 괴이한 병기를 손에 들고서 괴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각하! 놈들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몬스터를 막느라 양쪽으로 분산된 듯합니다! 기회를 제대로 잡았습니다!”
대마법사 쉐인이 호기롭게 외쳤다.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그도 수십만이 부딪히는 전쟁을 눈앞에 두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 쓸어버립니다!”
테세우드 공작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호기를 잡은 것이다. 전멸을 시키지 못하더라도 황제만 잡으면 전쟁은 끝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황제가 지금 자신의 두 눈에 선연하게 들어차 있었다.
“맥마흔! 돌격부대를 이끌고 곧장 우측으로 선회하여 황제의 친위부대를 친다! 올란도! 너는 좌측으로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친다! 테론! 너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 막스의 목을 베는 자에겐 공작의 위를 내릴 것이다!”
테세우드 공작이 포효했다.
명령을 받은 자들이 일제히 삼면으로 산개하며 떨어져나갔다. 테세우드 공작, 스스로는 곧장 정면으로 막스 황제를 들이칠 기세였다.
그때였다.
요란 제국의 진영에서 거대한 빛 덩어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케이론 제국 병사들의 눈에 비쳤다. 상당한 높이로 날아오른 그것은 빠른 속도로 질주해 들어가는 케이론 제국의 대군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빨리 위험을 감지한 건 대마법사 쉐인이었다.
“실드!”
그가 소리치자 마법병단이 일제히 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테세우드 공작을 비롯한 수뇌부의 주변 공간에 마나의 방어막이 생겨났다.
츠츠츠츠…….
괴이한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테세우드 공작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거대한 빛의 와이번을 쳐다봤다. 방어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끈한 열기가 얼굴을 핥고 지나가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뒤이어서 떠오르는 불안감, 그는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렸다. 빛으로 둘러싸인 와이번은 뒤쪽을 질주해오던 기마병단의 가운데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엄청난 화염이 순간적으로 세상을 붉은색으로 변화시켰다.
테세우드 공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게…….”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전마와 기사가 통째로 화염에 휩싸이며 죽어갔다. 놀랍게도 빛의 와이번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기마병단의 중심을 헤집으며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직접 닿지 않아도 근접거리에 놓인 기사들이 화염에 싸여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근육이 심하게 뒤틀렸다.
“요란! 이 죽일 놈들!”
“각하! 사정거리에 접어들었습니다!”
쉐인의 외침에 테세우드 공작은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그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방어막을 거두시오!”
“알겠습니다!”
방어막이 걷혔다. 그러자 질주하는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다. 테세우드 공작이 드디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저곳에 요란의 황제가 있다. 돌격하라!”
“돌격하라!”
두두두두…….
뒤쪽의 참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앞선 기마병단은 지축을 울리며 요란의 황제, 막스가 있는 능선으로 돌진했다. 좌측에 2만, 우측에 2만, 그리고 몬스터 대군과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뒤쪽으로 3만이 몰아쳤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고립될 상황임에도 막스 황제는 여유로웠다. 아니 지나치게 담담했다.
처처척!
케이론 제국의 기마병단이 근접거리로 돌진해 들어오자 막스 황제를 호위하며 늘어섰던 5만의 기마병들이 서서히 움직였다.
“저놈이 케이론의 실질적인 지배자, 테세우드다. 놈의 목을 내게 가져오라!”
막스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 * *
전장은 대량살상이 가능한 마법공격이 난무했다.
피아간에 화염공격에 의해 죽어가는 전사자들이 속출했다. 당장은 케이론의 우세로 전황이 돌아갔다. 양분된 요란과는 달리 그들은 30만에 달하는 대군을 막스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마법병단의 공격은 오직 막스 황제의 주변으로만 날아갔다.
그러나 쉽게 성공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막스 황제의 주변을 철통처럼 호위하는 마법사들의 전력은 케이론을 압도했다. 그들에 의해 케이론의 마법공격은 모조리 튕겨나갔다. 다만 기병에서 우위를 보인 케이론은 전장을 폭넓게 활용하며 요란 제국의 기병들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그때 질풍처럼 전장으로 뛰어든 요란의 5만 기병이 케이론의 기마병단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기마병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벼운 경갑을 두른 그들은 월등한 기동력으로 케이론의 중장기병들을 헤집기 시작했는데 속도에서 워낙 차이가 나버리자 전황은 삽시간에 요란 제국으로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료 하나가 죽으면 그들은 적, 셋을 죽였다. 연방 핏빛 안개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무기는 이 세상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창에 날이 선 칼을 꽂은 그들의 무기는 거리에서 케이론 기사들을 압도했다.
찌르기 위주의 장창을 든 케이론의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워낙 수적으로 우세했던 까닭에 단시간에 밀리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결과는 불을 보듯 훤했다.
테세우드 공작은 전황에 아랑곳 않고 곧장 직선으로 돌진했다. 그를 따르는 수만의 기병들은 케이론 최고의 정예들로 구성된 테세우드 공작가의 사병들이었다.
“막스! 이놈! 목을 내놓아라!”
막스 황제와 테세우드 공작 간의 거리가 20미르로 좁혀졌다. 그때야 막스 황제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설마 테세우드 공작이 이 정도로 집요하게 자신만을 노릴 줄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던 그였다.
“간악한 놈이구나! 수하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다니…….”
그와 테세우드 공작의 차이는 그것에 있었다. 전쟁광 막스 황제는 소문과는 달리 누구보다 수하들을 아꼈다. 반면에 테세우드 공작은 오직 승리만을 최종결과로 보는 성격이었다. 승리를 쟁취하기 이전의 모든 것들은 승리만 한다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 테세우드 공작이었다.
그래서 막스 황제는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 반면, 테세우드 공작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막스 황제를 욕하더라도 최소한 요란 제국의 국민들만큼은 그를 지지하고 따랐다. 그게 국력이고 제국으로 올라선 원동력이었다.
“폐하! 뒤로 물러나십시오! 놈은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막스 황제의 주변을 호위하던 시커먼 로브를 걸친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모두 20명, 하나같이 섬뜩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었다.
“부탁하겠소.”
막스 황제가 뒤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황제인 그가 그들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뒤쪽으로 물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막스 황제의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건 결코 동료를 바라보는 빛이 아니었다. 눈빛, 깊숙한 곳에서 번뜩이는 그건 분명 증오였다.
왜일까?
참혹한 전장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구해주겠다고 나선 그들에게 증오를 내비치다니…….